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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로스앤젤레스(3)
2012년 12월 06일 10시 33분  조회:6413  추천:0  작성자: 훈이
 앞에서 로스앤젤레스의 한 토막 역사를 만든 두 위인을 소개했으니 이번 순서는 사건이다. 먼 역사는 접어두고 근대사를 보면 로스앤젤레스에는 특기할 사건이 셋이 있다. 그것이 바로 로스앤젤레스 대지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다.

 먼저 지진 관련 당시 보도다.

《1971년 2월 9일 아침 6시경(현지 시각)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강습한 지진. 진원지는 시의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 약 40 km 되는 산속으로, 규모 6.6의 중 지진이었다. 진원의 깊이가 약 10 km로 얕아서 진원지 부근에서는 진도 7, 시 북부의 샌퍼낸도 지구 등은 진도 6이 되어 참화를 입었으며, 시 중심부 등은 진도 5로 피해가 작았다. 이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지진이라 통칭되며, 정식명칭은 샌퍼낸도 지진이다. 병원, 댐, 고속도로, 학교 , 변전소, 민가 등이 피해를 입고 사망 62명, 부상 1000여 명이었다. 병원이 특히 참화를 입었는데, 사망자의 대부분이 입원환자였다. 저수지의 댐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며 한 때 약 8만 명의 주민이 긴급 피난하였다. 화재는 42건으로 비교적 적었다. 큰 재해로 번지지 않은 것은 방재 활동이 신속하고 적절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는 해마다 진도 2내지 3의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미국 체류기간 나도 여러 번 겪었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 공항 부근에서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층집이 그냥 마구 뒤흔들렸다. 닫힌 창문에서 삐걱 이는 소리가 났고 머리에 어지럼증이 왔다. 그때 마침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지진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여차하면 뛰어 내릴 작정으로 인차 창문을 열었다. 나의 거동을 보고 아내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후에 웃음을 거둔 아내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집이 흔들리는 정도의 지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했다. 잠잘 때 지진이 발생할 때도 있는데 그때면 침대가 좌우로 흔들리는데 마치도 배를 탄 것 같은 느낌이란다. 재앙을 부르는 큰 지진은 순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하기에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아내는 체념하듯 말했다. 그래도 강진에 대비해 지진 대처법 같은 건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지진 관련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아내에게 강진이 발생하면 어쩔 거냐고 물으니 아내 대답이 강진이면 그냥 책상 밑에 들어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눈 깜박일 사이에 일어나는 게 지진이니까. 그래도 지진에 대비해 항상 비상용 비품을 갖추어 놓으라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해당 부문에서 권장하고 있는 비품에는 손전지, 반도체 라디오, 음료수, 식품, 비상약, 현찰, 여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사시를 대비해 이런 비품들은 항상 손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비치해 두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예언가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로스앤젤레스는 산타모니카 앞 바다에서 지진으로 일어난 해일로 바다 속으로 영영 잠적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들의 예언은 미국의 재난을 다룬 영화에서도 실 상황처럼 펼쳐졌다. 해저 대지진이 일어난다. 태평양 해안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 산악 같은 해일이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산타모니카를 삼키고 그 여세를 타고 로스앤젤레스까지 덮친다. 아비규환의 로스앤젤레스, 900만 인구를 가진 로스앤젤레스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파도만 넘실거린다. 이것이 재난 영화에 비친 로스앤젤레스의 비극이다. 예언이 어디까지나 예언으로 그쳤으면 하는 것이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의 바람이다. 

 로스앤젤레스는 두 차례 하계 올림픽을 치른 도시이다.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제10회 하계 올림픽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는데 특기할 것은 이 올림픽에 중국이 처음으로 《중화민국》 이름으로 참가한 것이다.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하계 올림픽에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4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불참해 올림픽 사상 또 한 번 유감을 남겼다. 23회 올림픽에서 중국대표단은 사상 최초로 금메달, 종합 순위 4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여론은 동구권 나라 불참으로 중국이 어부지리를 보았다고 보도했으나 24년이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중국은 실력을 과시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참가국 수, 시청률, 기자, 자원봉사자 수, 올림픽 성화 봉송 거리, 송출 시스템 등 면에서 최고를 기록한 올림픽이다.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베이징 올림픽 성황을 생중계하면서 중국 붐에 열을 올렸다. 그 때 아내는 매일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북경 올림픽으로 중국인들의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언론은 왜 비난만 하고 있냐고 그 이유를 물어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국 TV를 시청할 수 있다. 한국의 KBS, MBC, SBS가 고정된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다. 아내는 미국 주요 언론의 보도와 한국 언론의 보도가 북경 올림픽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틀린다고 했다. 미국의 주요 보도 매체는 북경 올림픽을 자국의 경사처럼 보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도 끝에 중국어 강좌를 달아 매일 올림픽 관련 중국어를 배워주고 있는 반면 한국 언론은 올림픽 보도 끝에 꼭 중국을 비하하거나 비아냥하는 말을 단다고 했다. 올림픽 개막 전 한국의 SBS가 개막식 리허설을 몰래 찍어 방송해 물의를 빚은 사건으로 중국정부까지 불쾌감을 표시했다. 일이 여기서 그치면 괜찮겠는데 한국의 일부 주류 매체는 북경 올림픽기간 경기를 보도하면서 항상 뒤 끝엔 《올림픽 후 중국 경제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올림픽 개최로 피해 입은 철거민들의 분노를 삭일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달았기에 중국의 해당 부문으로부터 《우호적이 못되는 나라 매체》 명단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중국을 보는 한국 언론의 자세가 문제되고 있는 것은 올림픽 개최기간의 일만 아니다. 중국이 한국의 제일 큰 해외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언론은 항상 중국의 부정적인 면만 크게 기사화한다. 《삼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 아파난다》는 심리가 작용했는지 아니면 끝도 없는 당쟁, 항상 대방의 허물만 잡고 늘어지는 정치인들의 보도에 치중하다나니 그냥 그 세태에 물젖어서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 흑인 폭동에 대한 기재를 보자.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을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이 보도되자 인종차별이라고 여긴 흑인 청년들(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을 저지르면서 6일간에 걸친 폭동이 시작되었다. 폭동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 전체의 피해액은 7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했다.
 

 이 폭동이 있기 전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왓츠에서 유대인 상권을 내쫓는 흑인 폭동이 발생했었다. 이 폭동 관련 맥콘 보고서는 왓츠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가 두 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극복되지 않으면 이 같은  폭동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경고가 적중했던 것이다. 4.29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역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가져온 누적된 감정의 폭발이라고 해당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피해자인 흑인계도 가해자격인 백인계도, 시위에 동조한 남미계도 미국 사회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어온 유대계도 아닌 한인사회가 폭동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음모론》이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1991년 3월 16일, 그러니까 1년 전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흑인 빈민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 시켰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두순자 씨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던 15세 흑인 소녀와 말싸움, 그리고 이어진 난투극 끝에, 두 씨를 때려눕히고 나가던 흑인 소녀에게 총을 쏘아 숨지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흑인 폭동이 일어난 직후 미국 언론에 의도적으로 크게 보도됨으로써, 마침 로드니 킹 사건으로 불만이 가득 차 있던 흑인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는 곧 한국인, 그리고 기타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대한 흑인들의 불매 시위와 보복 행위를 야기했다. 이밖에도 폭동기간 미국 경찰이 폭동 피해지역인 한인 타운엔 왜서 경찰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인 거주 지역에만 진을 치고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반감과 분노를 한국인들에게 풀도록 방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 분석은 흑인과 한국인들 간의 《갈등론》이다. 즉 흑인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 사회 공동체적 행사 참여나 기부 등 미국사회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국인들을 배타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시 화풀이 주요 대상으로 되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한인들이 주 고객인 흑인에 대해 항시 인종차별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다민족 사회에서 다민족과의 융합을 홀시한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인과 흑인과의 관계가 어떤 극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가사가 하나 있다. 힙합 음악계의 거장이며 흑인 우월주의 찬미자인 랩  뮤직 가수 아이스 규브의 음반 중 《블랙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

《검은 주먹의 힘을 존경하라, 한국 상인들 흑인을 도둑놈으로 취급하네. 돈 갖고 가도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니 기분이 나쁘네. 한인들 가게 불 지르고 기분 나쁜 여자 강간을 해야겠네. 한인들 한국으로 돌아가라!》

 가사만 보아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노래는 《4.29》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가사를 통해 당시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어느 정도 극에 달했는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120개의 다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 간 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버성겨진 관계라고 하지만 《4.29》사건은 어디까지나 흑인과 백인 간 《흑백 갈등》으로 터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말 속담을 빈다면 한국인들은 그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시각은 《경제 불황 설》인데 《4.29》가 당시 경제 불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경제 불황은 캘리포니아 주에 50년 만에 들이닥친 큰 불황이었다. 당시 불황은 주로 제조업에 종사하던 흑인들이게 가강 큰 타격을 주었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흑인들은 질투의 대상으로 되어왔던 한인 상인들에게 불황속에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켰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지금의 경제위기는 30년대 대공황이후로 가장 심각한 경제 불황이다. 《경제 불황 설》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경제 불황이 아직은 어울려 사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하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인터넷에 오른 동영상이 나한테 《4.29》 사건 현장을 재현했다. 방화, 약탈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화면을 보면서 내가 실감한 것은 《천사가 악마로 변하기는 순간이다.》라는 격언이다. 평소 마주치면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웃는 얼굴로 인사하던 사람들이 삽시에 폭도로 약탈자로 되어 날치는 장면을 보니 인간에 대한 비애가 느껴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한인 상가를 터는 흑인과 멕시코 계 약탈자들 중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걸음 옮기기도 힘든 노인네들도 있었다. 전대미문의 비극을 낳은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연상되었다. 누군가 《문화대혁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도록 한 인류 역사의 《악몽》이라고 했다. 그 시절 명철보신을 하기 위해 나의 아버지를 감옥행으로 물어먹은 한 인간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직접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이 없으니 아들인 나를 찾아 사죄의 뜻으로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 시절 인간은 없었다.》

 인간이 없으면 뭐가 남았나? 인간의 탈바가지를 쓴 악마들인가? 그 말을 떠올리면서 《악마가 다시 천사로 되는 것도 순간》이 아닐 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내 생각이 아주 적중한 생각이다. 《4.29》 사건 시 방화, 약탈자자들이 지금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4.29》 사건 흔적이 가셔진 코리아타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상전벽해,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불쑥 뇌리를 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4.29》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보는 시각의 차이점을 주목할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그냥 폭동으로 보고 있는 반면 흑인들은 지금도 《4.29》를 인종차별에 항거한 《의거》로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저 《소요》라고 규정짓고 있다. 폭동이든 의거든 소요든 관계없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가 이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한인 사회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또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이 사건의 발생은 코리아타운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인들에게 놀란 백인들이 철수하자 그 자리에 한국인들이 《입성》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푼다면 이 사건은 한인들을 미국 주류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국계 이민사회는 19세기 철도건설로, 그 후 일본계 이민사회는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면 《4.29》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비로소 미국 현대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한인 사회에는 《4.29 세대》라는 말이 있다. 《4.29》를 지켜본 이민 2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 한인사회에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4.29 세대》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지켜본 이민 2세들이 그 후로 법조계, 의료계, 정치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세대보다 왕성하게 한국인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4.29》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4.29》 폭동 피해자들은 지금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비록 미국 연방정부가 폭동 피해자들에게 보상대신 30년 상환 저금리 재해융자를 제공했지만 그 때 받은 융자를 17년이 지난 오늘까지 겨우 반만 갚았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4.29》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소름이 끼치는 《현실》이 아닐 가.

 로스앤젤레스 시장의 환영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평등, 자유, 융합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가 바로 《4.29》 사건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든다.

 세계 이민자들의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를 칭하는 말에 《시작의 도시》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첫 발을 들여놓고 새 삶을 시작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문명이 어우러지고 독특한 생존환경이 펼쳐진 로스앤젤레스가 마냥 《시작의 도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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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미국 언론
날자:2012-12-06 17:18:26
미국 언론을 계속 읽고 듣는 입잡에서 말씀드린다면 미국언론이 한국언론에 비해서 중국에 우호적이질 않읍니다. 부인께서 얼마나 영어를 하시는지 모르지만 한국어를 이해하듯이 영어를 이해하시는 분 같지는 않읍니다.

부인께서 뉴욕 타임즈의 중국 관련 기사와 칼럼들을 몇달만 계속해서 읽으면 미국인들이 중국을 보는 시각을 이해할 것입니다. 한국은 오히려 점잖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들은 미국인들이 중국인들 뒤에서 하는 욕들은 지면에 옮길 수도 없읍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을 중국인들만 모르고 있읍니다.
1   작성자 : 4-29 폭동
날자:2012-12-06 16:46:47
김훈 선생님께서 좋은 글을 쓰셨읍니다. 선생님의 글이 옛날 기억을 생생하게 다시 떠올리는군요. 1992년 4-29 폭동 당시 엘에이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던 증인으로서 덫붙여 설명드림니다.

김훈님이 4-29 폭동전의 엘에이 왓츠 흑인 폭동까지 언급하신 걸 보니 연구를 많이 하셨읍니다. 왓츠 흑인 폭동 때는 유태인들이 엘에이 흑인 상권의 85%를 쥐고 있을 때 일어난 것이고 4-29 폭동 때는 한국인들이 엘에이 흑인 상권의 95%를 쥐고 있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당시 흑인동네에 들어가면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상점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읍니다. 크게는 미국 월마트보다 더 크거나 같은 크기의 거대한 마켓을 엘에이 흑인동네에 20개이상 운영하는 한국분도 있었읍니다. 그분이 운영하는 마켓을 가보고 거대한 크기에 놀랐읍니다.

4-29 폭동 당시 엘에이 흑인들에게 한국인들은 고래같은 상대였고 김훈님이 표현하신대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약한 처지가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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