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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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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 ]

17    제16편 차라리 죽기보다도 못해서 댓글:  조회:1633  추천:1  2015-02-27
     감옥살이란 어떤 것인가, 나 진짜 문화대혁명때 그 맛을 보았다. 남편이  누명을 쓰고 갇힌 후 나도 간첩죄로 잡혀들어갔다. 남편이 간첩이고 나는 무전수라나.  겨울이였는데 너무 추워서 생각다못해 신문지로 쬐꼬만 통집을 만들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추위가 덜했다. 신문지가 그렇게 추위를 막아주는걸 예전에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밤, 보초 서는 사람이 신문지에 가리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톱이 길어도 깎을 가위가 없었다. 그런데 그놈의 손톱은 왜 그리도 빨리 자라는지.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콩크리트 벽에 대해 손톱을 갈았다. 그러니 갈 수는 있는데 모서리를 갈 수가 없어 변소에 가는 틈을 타서 유리조각을 주워왔다. 그건데 그것이 보초꾼들의 검사에 들킬줄이야.  “너 이건 물하려 들여왔는가? 자살하려구?” “자살, 아닙니다. 손톱을 깎을려구요.” “거짓말 말어! 분명 자살기도가 있는거야. 자살은 무산계급 전정에 항거하는 표현이야!” 나는 원래 자살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들이 말을 하자 진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천대받고 살아선 뭘 해. 차리리 죽고 말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자살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칼도 없고 유리조각 하나도 주워올 수 없고 목을 매자니 목 맬 끈도 없었다. 온 밤 생각하던 끝에 이불이나 요를 찢어 못 매달 궁리를 하였다. 나는 요를 찢어 보초꾼의 눈을 피해가며 끈을 꼬았다. 정작 이 세상을 하직하자고 생각하니 생각이 착찹해졌다.  “보고 싶던 남편 얼굴 한번 못 보고, 몸살나게 그립던 애들도 못 보고 이렇게 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면 나 스스로가 죄를 승인하는 것이 되고 후에 애들에게도 얼마나 큰 누명이 될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가 자살할 리유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하나, 사람대우를 못받고 값없이 산다는 것, 억울하다는 것, 그것뿐인데. 지금 나처럼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가.   이런 생각을 굴리니 목 맬 이블끈을 꼬던 내 손이 멈춰졌다.   (죽을 수 없어, 죽다니 내가 왜 죽는단 말인가?)  그날부터 나는 오히려 더 떳떳해졌다. 밥도 억지로 먹고 일하려 나갈 때면 머리를 꿋꿋이 들고 다녔다. 삶에 대한 의욕이 북받친 것이다. 심사를 받을 때도 기죽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물론 심사조 사람들은 나를 “완고하다” 했다. “완고”하다면 좋다. 난 오늘도 “완고”하고 내일도 “완고”하고 영원한 “완고파”가 될 것이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내게 죄가 없는 이상 무엇이 두려우랴!  
16    제15편 임신한줄 모르고 위약만 먹어 댓글:  조회:1554  추천:1  2015-02-11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위병”에 걸렸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의사는 내 위가 헐었다고 했다. 그래서 위약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후에 알고보니 임신인걸 모르고 위병치료만 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첫 아이는 배속에서 위병약만 먹고 자란셈이다.  해산 하는 날, 철없는 나는 해산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배가 아파나기 시작했다.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배가 아파요. 어제 저녁에 드릎을 많이 먹었더니 그게 탈이 난 것 같아요.”  그랬더니 남편도 하는 말이 “글쎄, 나도 배가 아프오.”  얼마 후에 나는 이것이 해산할 징조임을 알았다. 그래서 새벽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 때만해도 해산하러 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차도 없고 해서 걸어서 병원으로 가는데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다가는 주저앉고 그러면 남편이 “어서 일어서오, 저기 양몰이꾼이 오오.” 하면서 나를 일궈세우곤 했다.  나는 병원 문앞에서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병원에서 밀차를 보내와 거기에 실려 곧바로 산실로 실려갔다.  헌데 뜻밖에도 난산이었다. 조산사가 끝내 아이를 출산시켰는데 아기는 숨이 없고 온 몸이 흙빛이었다. 나이 지숙한 조산사가 그래도 경험이 있어 아이를 꺼꾸로 쳐들고 찬물이 넣었다 냈다 하면서 아이 엉덩이를 두드렸다. 이윽고 아기 몸에 핏기가 돌더니 드디어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기 무게가 6근 반이었다. “아들을 낳았소.”  조산사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아픔이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낳은 아들이 바로 우리의 맏아들 김훈인데 후에 저명한 소설가, 극작가, 교수, 문학박사로 되었다.
15    제14편 결혼 첫날 밤 댓글:  조회:2625  추천:1  2015-01-29
신랑의 보모가 사는 신안진이라는 농촌에 당도해 보니 신랑 집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신랑 어미니는 반갑다고 뭘 대접하고 싶은데 대접할게 없어서 부랴부랴 엿을 만드느라고 법석이었다.   밤에 우리는 온식구 일곱 사람이 한구들에서 이불 한 채에다 발만 밀어넣고 하루밤을 새웠다. 구들장이라는게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하였는데 게다가 담요도 없이 자자니 잠이 올리 없었다. 신랑은 미안해서 몇 번이나 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신랑이 좋아서 불편한 것도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결혼 첫날밤은 이렇게 지새웠다. 어떻게 보면 우린 지금 젊은이들이 말하는 려행잔치를 한 셈이다. 우리가 연길에 돌아오자 소문을 들었는지 신랑의 문예계 친구들이 돌연 습격을 했다.  “이 자식, 결혼을 했다는게 술 한잔도 안 내?” 나는 불이나케 술상을 차렸다. 그 때 우리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은 모두 문예계 거두들이었다. 소설가 김학철, 작곡가 정진옥, 모두가 당시 한다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날 신랑 친구들은 우리 초가집에서 구들장이 꺼지도록 춤추며 신나게 놀았다.  날이 저물어 모두들 귀가길에 올랐다 헌데 김학철씨의 지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택시도 없는 시절인데 지팽이가 없이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실로 난처했다. 모두들 김학철씨의 지팽이를 찾아 나섰다. 나중에 김치움에서 그의 지팽이가 발견되었다.                                                            당시 남편 친구들(선글라스 쓴 분이 남편)                                                          
14    제13편 공동묘지에서 속삭인 사랑 댓글:  조회:1947  추천:4  2015-01-08
  그 때만해도 남여가 더구나 처녀총각이 나란히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때였다. 그렇다고 집에서 사랑을 속삭이자니 늙으신 할머니가 계셔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생각다 못해 인기척이 드믄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연변대학 뒷산의 공동묘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좋은 연애장소였다. 우리는 거기서 무덤을 빙빙 돌며 숨박곡질을 하였다. 아무리 크게 웃어도 소리쳐도 듣는 이가 없었다. 아주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게다가 풀까지 잔잔히 자라 뒹굴기도 좋았다. 우리는 공동묘지에서 즐기다나니 해 지는줄도 몰랐다.   우리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방애하는 사람도 많았다. 몰래 나를 엿보고 짝사랑을 하던 공안국의 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룡섭씨에게 다섯살짜리 아이가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어린데, 또 학교에서 직접 군대에 갔으니 언제 장가를 들었으며 다섯살짜리 아이가 있을수 있겠는가.   또 우리 동네의 한 아줌마는 그의 어머니가 계모이고 째지게 가난하고 식구도 많다고 말했다.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런 말은 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편단심 오직 한 마음!  드디어 우리는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째지게 가난한 우리로서는 결혼식이 문제였다. 양쪽 집이 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궁리하다 못해 우리는 거짓말 잔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인가? 연길에서는 부모님이 계시는 목단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하고 부모님 집에 가서는 이미 연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거짓말 하기로 했다.   우리가 “잔치”하러 목단강으로 떠나는 날 아침 그래도 할머니는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였다. 어쩌다 이밥에 좁쌀을 절반 섞고 반찬이래야 고등어 한 마리, 떠나는 신랑 밥상이라는게 고작 이뿐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우리가 떠난다고 숱한 친척들이 찾아왔다. 고등어 한 마리만 밥상에 놓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사양하다나니 고등어 한 마리가 종시 축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나의 가슴은 미어지는듯 했다. 슬프고 죄스럽고 미안하고, 끝내 우리는 밥도 먹는둥만둥하고 먼길을 떠났다.    
13    제12편 나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댓글:  조회:1826  추천:3  2014-12-28
      명절날 운동대회가 열렸는데 그 총각이 마라톤 시합에 나가게 됐다. 듣자니 군대에 나가기전 학생시절에 전 동북 마라톤대회에서 2등을 한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시합은 오후에 있는데 오전에 그 총각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출전하기전 조용한 곳에서 잠깐 쉬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쉬다가 가면서 그 총각은 나 몰래 내 책상 설합에서 내 사진 한 장을 꺼내 운동복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   나는 오후에 운동장에 나가 보았다. 마라톤 시합은 운동장에서 출발해 연길시 북쪽에 있는 뾰족산까지 가서 등에다 도장을 박고 돌아오는 1만미터 경기였다.   “선수들이 들어온다!”  누군가 소리치는 바람에 운동장 입구를 바라보니 눈에 익은 선수 모습이 안겨왔다. 그 총각이었다. 뒤 따르는 선수를 한참 떨궈놓고 선참으로 들어오는 총각, 그를 보는 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가볍게 운동장을 세바퀴 돌고나서 종점에 들어섰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했다. 나는 막 달려나가 꽃다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수줍은 처녀의 몸, 그 시절엔 그런 용기도 낼 수가 없었다. 다만 혼자서 소리치며 손만 흔들었다.   (마라톤도 잘 하고 문학도 하고, 정말 재간있는 청년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내 마음은 이미 그 총각에게 쏠렸다.   그 후 어느날 밤 그 총각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 그가 왔다간 후 그 총각의 하숙집 아줌마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룡섭동무가 여기 왔다 갔소?” “예. 그런데요?” “큰일났소,. 밤길에 오다가 김치굴에 빠져서 몹시 다쳤소. 빨리 가 보오!”  나는 깜작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그 아줌마를 따라 그 총각 하숙집을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보니 그 총각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 그냥 멍하니 서만 있었다.   “어서 이불을 들춰보오.”  아줌마가 이렇게 말했지만 처녀인 나로서는 총각의 이불을 들춰볼 수 없었다.   “빨리 물어보오. 얼마나 다쳤는가.”  아줌마의 독촉에 나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이불 모서리를 들며 낮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없어 나는 또 물었다.  “다친데는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총각이 갑자기 눈을 뜨며 히죽이 웃는다. 이어 벌떡 일어나 앉는다.   “보다시피 아무 일 없습니다.”  그제야 나는 얼림에 들었다는걸 알았다. 하숙집 아줌마가 우리를 대면시키려고 조작한 연극임을 알았다.   훌훌 털고 일어난 그 총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후에 과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뜻하지 않은 야밤의 즐거운 웃음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또 며칠 후 하숙집 아줌마가 또 나를 찾아왔다.   “우리 집이 비었는데 좀 와서 집을 봐주오.”  아줌마 집에 가 보니 말그대로 집은 텅 비어있었다. 내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그 총각이 문을 떼고 들어왔다.   (아이구 또 연극이였구나!)  우리 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라고 아줌마가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날 밤 총각의 이야기는 진지하였다. 자기의 경력과 가정상황, 모든 이야기를 자초지종 죄다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나중에 자기의 진심을 고백했다.   “나는 동무를 사랑하오. 백년가약을 맺고 싶은데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당돌한 이 말에 나는 다소 당황했으나 잠깐 뜸을 들인후 긍정적으로 나왔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맙소! 우리 재미있게 살아보기오.”  그 총각이 나에게 청을 들었다.   “내 팔에 한번 누어볼 수 없을가?”  나는 말없이 수긍하였다. 이렇게 나는 처음으로 총각의 팔을 베고 누웠다. 가슴이 떨리고 무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뻤다. 후에 그 총각의 말에 따르면 처녀를 처음으로 제 팔에 눕히고 보니 천정이 빙빙 돌더라나. 나도 마찬가지. 기쁨인지 무서움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누가 당금 문을 뗴고 들어오는 것만 같아 1분도 안지나 나는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우리들의 연애생활은 시작되었다.       
12    제11편 나한테 첫 고민을 준 총각 댓글:  조회:1936  추천:1  2014-12-07
  어느날 내 친구 리정희가 한 총각을 소개했다.  “이전에 우리 목단강중학교에 룡섭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너처럼 문학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잘 하고 마음도 영 고운 사람인데 지원군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너 한테는 딱 맞는 총각이다.”  그 후 얼마 안지나 할머니가 점을 친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시집을 안간다니까 하도 답답해서 동네 등곱쟁이 점쟁이 할머니를 찾아간것이다. 점쟁이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생각을 굴리더니 하는 말이 “연애편지를 쓰고 그 애를 탐내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그건 다 쓸데 없는 일이외다. 그 애의 연분은 따로 있는데 이제 얼마 안지나서 저 북쪽에서 책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오는 청년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연분을 맺을 총각이오.”  그래서 할머니는 누군지도 모를 그 총각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고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날 나와 정희는 함께 거리에 나갔다. 어느 사진관 앞에서 정희가 어떤 총각을 만나 함께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사진관으로 들어갔던 정희가 인차 나오더니 나에게   “야, 저 사람이 그 때 내가 말하던 룡섭이라는 총각이다. 지원군에서 제대되어 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단다.”라고 말했다.  나는 얼핏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퇴색한 군복차림에 몸에 어울리지 않은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야, 그저 수수한 사람이구나.”  나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그 때만해도 나는 제대군인이 제일 싫었다. 왜냐하면 전쟁시기 부상한 부상병들이 우전국 책임자를 찾아와 처녀를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을 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전국은 처녀가 가장 많은 단위었다. 제대군인이나 부상병들은 “내가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는데 까짓 처녀 하나 못 내놓는가?” 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래서 우전국의 처녀들은 제대군인이나 부상병을 보기만 하면 피해 달아났다. 솔직히 말해 나도 지원군에서 제대했다는 제대군인 총각이 싫었다.   이튿날 나는 정희와 함께 우리집 부근의 한 골목길에서 우연히 그 총각과 마주쳤다. 그는 정희네 집으로 놀러오는 길이었다. 나는 초면이라 인사도 못하고 있는데 그 총각이 먼저 “안녕하십니까?”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몸 둘바를 몰랐다. 다시 보니 갤편하게 생긴 얼굴에 우유독에서 빠져나온듯 하야 맑숙한 피부가 인상깊었다. 정희가 말했다.  “너 집이 조용할텐데 우리 함께 너 집으로 가자.”  그래서 나는 총각을 처음 우리 집에 모셨다. 이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 후 그 총각은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다. 신문기자인 그는 이때부터 군복을 벗고 하얀 와이샤스바람에 왔는데  눈 여겨 보니 그가 입은 외이샤스는 낙하산천을 베어 만든 것이었다. 바느질이 서툴어서 여기저기 실밥이 삐어져 나왔다. 유심히 살펴본느 내 눈치를 알아채렸는지 그 총각이 어색하며 변명했다.   “이건 전선에서 미국 낙하산천을 주어 만든건데 천이 너무 미끄러워서 잘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기 좋은데요.” 이날 나는 실로 뜬 이불보의 수를 매고 있었다.  “나도 같이 하면 안될까요?”  그 총각이 자진해 내 일을 거들었다.   “이걸 어디 다 치려고 그럽니까?” 나는 귀볼이 화끈해남을 느꼈다.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 총각이 말끈을 달았다. “후에 우리 집에다 치면 안될가요?” “정말 농담도 잘하시네.” 이렇게 대꾸하는 내 마음에도 이상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다운 시원시원한 성격 소유자였다. 이때 정주간에 계시던 할머니가 말간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젊은이 저 애를 좀 시집 보내주게. 시집가란 말만 나오면 천길만길 뛰나까 참 답답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전에 누구한테 맡기고 가야하는데…” “글세요, 정 맡길데가 없으면 저에게 맡기세요. “ 그 총각의 농담엔 진담이 섞여있는듯 했다. 나는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 총각은 내 책상의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책상이래야 쬐꼬마 밥상같은건데 그 위에는 최서해의 “탈출기”며, 이광수의 소설, 이수일과 심순애 연애사를 다룬 책들이 꽂혀있었다.  “문학을 퍽 좋아하시나봐요.” “예, 좋아합니다.” “나도 좋아하는데요. 나는 시를 씁니다. 최서해 탈출기를 보셨나요?” “예, 봤습니다.” “그 책에서 임신한 아내가 귤껍질을 주어먹는걸 보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이 인상적이지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작가의 마음이란 항상 자애롭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잘 보살펴주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집가면 한평생 각별한 사랑을 받을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학의 물리계나 수학계 학생들이 보낸 연애편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문학을 하는 사람을 은근히 찾던 중이었다.   나는 그 총각이 시를 쓴다는데 마음이 솔깃해졌다. 우리 둘 사이엔 공동언어가 있게 되었다. 우리 둘은 문학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즈음 할머니가 자주 그 총각 이야기를 꺼냈다. “내 보기엔 그 젊은이가 참 인사성이 있더라. 다른 사람은 우리 집에 와도 어른한테 인사도 없이 너만 찾는데 그 젊은이는 꼭 먼저 나한테 인사를 하더라. 인물도 그만하면 잘 생겼고…” 분명 할머니는 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나도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인물도 좋고 직장도 좋고 성격도 좋은 문학청년인데 단 한가지 맏이라는 것 나는 장차 할머니를 모셔야 할 상황인데…” 어쩌면 좋을가? 아깝기는 한데 당기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할 형편, 나의 진짜 고민이 시작됐다.         
11    제10편 내가 받은 첫 연애편지 댓글:  조회:1874  추천:1  2014-09-20
   부모없이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나는 사랑이 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자랐다. 천진란만했던 소녀인 나는 아무런 준비없이 청춘기를 맞았다.  어느날 나는 문뜩 이름모를 남자한테서 연애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나는 당황했다. 성부지명부지 전혀 모를 사람인데 왜 연애편지를 했을가?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었다. 그러던차 얼마후에야 나는 그 영문을 알았다.   알고보니 당시 “영미사진관”이라는 연길시 사진관, 광고란에 내 사진이 크게 걸린 것이었다. 사진은 또 어떻게 된 영문일가? 그것도 알고보니 사진관 주인이 내가 예쁘다고 나 몰래 가만히 사진을 찍어 내 허락도 없이 광고용으로 내건 것이었다. 그 바람에 당시 연변대학 제1기생 학생들 가운데서 사진에 반한 학생들이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만 내가 우전국에 있다는것과 처녀라는 것 밖에 모르고 무작정 연애편지를 쓴 것이다.   숱한 총각들이 달라붙었다. 그래서 연애편지는 눈발처럼 날아왔다. 그러던중 어느날 한 편지는 “사랑하는 최인순씨”라고 썼다.  (이건 또 웬일인가? 최인순이라면 우리 할머니인데)  후에 알고보니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알기위해 가만히 우리 초가집을 찾아왔는데 마침 문패에 “최인순”으로 써있어 그 것이 내 이름인줄 알고 편지를 쓴 것이었다.   연애편지에는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말, 멋진 문구는 다 써있었다.  꽃 보다도 이쁘다느니, 초록빛 호수보다도 더 맑은 눈빛이라느니,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눈매라느니 실로 영내편지는 아름다운 어휘의 집대성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편지가 오는 족족 조직에 바쳤다. 만나자는 사람이 있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총각들이 내 뒤를 줄줄이 따라다녔다. 강변에 빨래하러 가면 강뚝에서 나를 지켜보고 영화관에 가면 영화관에서 글쪽지를 내 손에 가만히 쥐어주고, 밤 늦게 퇴근하면 어디에서 기다렸는지 불쑥 나타나 내 뒤를 따르곤 하였다.   어느날 밤 나는 퇴근길에 누군가가 뒤에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빨리 걸으면 그도 빨리 걷고 내가 천천히 걸으면 그도 천천히 걷고, 나는 겁이 왈칵 났다. 거의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집에 와 문고리를 당기며 “개새끼”하고 욕을 했다. 그랬더니 이튿날 또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어젯밤 뒤를 따랐던 사람입니다. 욕을 얻어먹고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순진한 처녀만이 이런 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를 욕심낸 사람 가운데는 조선족도 있고 한족도 있었다. 당시 전업국의 한 한족은 내 친구들에게 내 옷을 하자면 천이 몇 미터나 드느나고 묻는가 하면 자기는 조선말을 모르니까 지금부터 조선말을 배우겠다느니 하면서 호의를 표했다. 나는 당시 당지부서기인 리병직을 아버지처럼 믿고 크고 작은 일 모든 것을 그에게 보고하였다.   어느날 당지부서기가 조용히 나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이 몹시 복잡하다. 너에게 편지 쓰는 사람들 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너는 우리 우전국의 모법이고 보배인데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 때 그의 말은 최고 지시나 다름 없었다. 무조건 따라야 했다.        
10    제9편 날벼락을 맞다 댓글:  조회:1633  추천:2  2014-09-04
   나는 기술능수로, 모범교환수로 이름이 났다. 연변자치구 각 우전국에서 나를 알게 되었고 얼무후에는 길림성우전국에서 조직한 전성 기술표연대회까지 참가했다. 기술표현 항목은 매우 어려웠고 표준도 높았다. 연길시 전화번호를 죄다 외워야 했고 외우는 속도도 빨라야 했다. 전화를 이어주는 300분 사이에 낭비되는 공간시간이 처저로 짧아야 했고 전화를 받아쓰는 속도도 빠르고 오자가 없어야 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도 그때 내 머리는 비상했고 솜씨도 놀라울 정도였다. 심사위원들은 노랑운 표정으로 나젊은 조선족 교환수의 솜씨를 지켜보고 나서 나를 전성 1등으로 뽑았다.  대회 지도부는 “방채봉을 따라배우자”라는 호소문을 채택해 전성에 발부했다. 그리고 나의 기술을 소개하는 책 두 권을 출판하였다.   이 소식이 연변자치주에 전해지자 연변 각지에서는 나를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나는 몸 둘바를 몰랐다. 이 무렵 연변우전국 지도부가 나를 과장으로 승진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은근히 기뻤다. 앞날이 활짝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지도자가 나를 찾았다. “감옥에 갇힌 친척이 있소?” “셋째 할아버지가 역사문제로 감옥에 갇혔다는 말은 들었어도 저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음, 그렇구만” “저는 고아입니다. 아버지도 친척들도 모두 보지못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지도자의 말 가운데 꼭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할아버지 쪽으로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막내인 셋째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자위단에 가입한 탓으로 해방후에 감옥게 갇혔다고 한다. 감옥측에서 조사한 결과 별로 뚜렷한 혈채도 없고 해서 석방이 되었는데 석방될 때 사회에 어떤 친척이 있느냐는 물음에 우전국에 방채봉이라는 손녀가 있다해서 그 조사가 나에게로 온 것이었다.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않던 셋째 할아버지 문제가 불쑥 튕겨났으니. 그때는 계급투쟁에 신경이 곤두섰던 세월이었으니 친척중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친척들 모두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무렵에 파출소 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할머니하고 뭔가 조사하기도 했다. 지도부가 나를 보는 시각도 좀 달라졌고 과장 승진은 흐지부지해졌다. 하루는 우전국에서 “중미합작사” 전시관 참관을 조직했다. 나는 “중미합작사”가 뭔지 몰랐다. 그저 합작사라니까 미국과 중국 국민당이 무슨 합작을 해서 만든 기구인줄만 알았지 그것이 국민당과 미국이 공산당을 잡아넣는 감옥인줄 몰랐다.  전시관 입구에서 나는 친구들과 농담도 하고 장난도 했다.  들어가 보니 엄숙한 계급투쟁 전시관이었다. 그제사 “중미합작사”가 뭔지 알았다. 참관하고 돌아오자마자 나한테 불벼락이 떨어졌다. 엄숙한 계급투쟁 전시장에서 웃고 떠들며 장난을 쳤다는 것이었다. 비판대회가 열렸다. “방채봉, 너의 계급본성이 이제야 나타났다.” “무슨 계급본성이란 말이야? 난 빈고농출신인데.” 내가 발칵 대들었다. 곰곰히 생각하니 셋째 할아버지와 나를 연계시킨 것이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눈물을 떨구었다. (보지도 못한 셋째 할아버지가 나와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계급투쟁이 칼부림치던 세월에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나는 당하고만 있었다. 이때로부터 나는 당의 신임을 받을 수가 없었다. 냉냉한 분위기가 내 곁을 감돌고 있었다. 하늘을 원망하랴 땅을 원망하랴 나는 꾹 참고 묵묵히 일만하였다. 
9    제8편 즐거웠던 야학시절 댓글:  조회:1766  추천:3  2014-08-16
학교에 갈 형편이 못된 나는 야학으로 찾아갔다. 야학에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거기서도 애숭이 꼴지 젖먹이었다. 장가가고 시집 간 분들과 함께 공부하는 야학실, 나는 거기서 세상 처음 듣는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은 우리 한글부터 배워야했다. “가, 갸, 거, 겨…” 배울수록 재미가 났다. 나이가 제일 어려서였던지 배우는 속도도 제일 빨랐다. 자주 선생님의 칭찬도 받았다. 그래서 신나는 배운터, 나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 다음은 정치과도 배웠다. 무슨 유물론이요, 진화론이요 하는데 처음엔 난 알아들을수 없었다. 공부는 갈수록 심산이었다. 그래도 나는 신이나서 야학에 다녔다. 몰라도 아는 척, 두툼한 책 꾸러미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이 별로 멋져보였다. 한동안 야학에 다녔더니 못 보던 신문도 뜯어보게 되고 세상물정도 적지핞게 알게 되어 나는 장원급제나 한 것처럼 기뻤다.  할머니가 혼자서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냥 야학에 다녔다. 어느날 나는 신문에서 민주학원에서 학생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나는 시험을 치기로 작심했다. 그러나 야학공부를 좀 한 밑천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길고 짧은건 대봐애 한다고 마음을 크게 먹고 시험공부에 달려들었다.  내 짐작과 같이 수학은 문제가 없고 정치는 신문을 뜯어본 탓에 그럭저럭 넘길수 있었는데 어문이 문제였다. 어떤 단어는 몰라 일본어로 섞어 썼다. 시험지를 바친 나는 십상팔구는 불합격인줄 알고 아예 단념하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의 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나가 보았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761호” 내 시험번호가 나붙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 밑에 이름이 틀렸다. 마땅히 “방채봉”이라야 할 것을 “방재춘”으로 되어있어 잠시의 기쁨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 확인학 따지고 보니 “방채봉”의 오자로 되어있었다. 그 후에는 구두시험이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려가며 불운한 나의 동년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때 시험관들은 나늬 이야기에 감동이 되었다 나이가 어리지만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어렵지 않게 합격이 되었다.   민주학원에서 나는 사회발전사를 배웠다. 얼마 후 나는 우전국에 배치를 받았다. 들어가 보니 거의 가 다 일제시절 교환수들이어서 질서는 문란하였다. 처음 들어가니 월급이라고 해서 겉수수 서른다섯근을 주었다. 반년 후에는 60근을 주었다. 그때만해도 60근 곁수수 월급도 상당하여 남들이 부러워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였다. 1년후 중국공산당 공개지부 건설이 있었는데 나는 첫 번째로 입당 발전대상이 되었다. 누가 “입당지원서”라는걸 가져다 주면서 등기표를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청서를 들고 고민하였다. 그때 들은 말에 의하면 공산당원이 되면 시집가는 것도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시집을 가면 당지부 서기나 당간부한테 가야 하는데 보니까 당지부서기라는게 거의가 다 이미 장가를 간 늙은이들이어서 내가 저런데로 어떻게 시집을 가냐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게다가 조선에 나간 언니 남편이 조선에 나와 중학교 공부를 하라는 편지가 와서 나는 입당을 거절했다.  그래도 하도 일을 잘 했기에 얼마후에는 또 공산주의청년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이것도 내가 자진해서가 아니라 조직의 추천이었다. “난 신청도 안했는데.”  회의에서 내가 볼멘 소리를 하자 곁에 있던 친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가만있어, 바보야” 그렇게 나는 공산주의청년단에 입단하였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다. 조직에서는 나를 신임해 장도교환수가 되게 했고 성에서는 비밀교환수와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조선전쟁이 터지자 나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미군 비행기가 어느 방향으로 떴고 어디까지 왔으며 어느 곳을 폭격하고 있다는 모든 비밀연락을 내가 맡아야 했다. 당시 비밀교환수는 적고 상황은 긴박하고해서 때로는 연 며칠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일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피곤한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일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서 코피가 쏟아지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동료들은 나를 집에 가서 며칠 쉬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나는 의자에서 잠간 쪽잠을 자고 또 계속 일했다.  쪽잠을 자다가도 사이렌소리만 나는 비밀교환대가 있는 공원의 지하실로 달려가야 했다. 처녀의 몸으로 혼자 숲속에 있는 공원 지하실로 들어가야 했지만 당시 나는 무서운 줄도 몰랐다. 다만 할머니가 폭격을 맞는 것 같아 근심이 태산 같았다.이렇게 밤낮을 모르고 열심히 일한 탓으로 나는 “10년 변강보위모범”이라는 영예를 받아 안게 되었다.  
8    제7편 내 성분은 지주랍니다 댓글:  조회:1940  추천:0  2014-06-21
해방후에 계급성분 획득이라는게 있었다. 옛날에 못 산 사람은 빈농, 고농이요, 잘 산 사람은 지주, 부농으로 획분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자기가 스스로 성분을 보고하였다. 나는 제대로 하자면 성시 빈민에 속하는데 너무도 찢어지게 못 산 것이 한이 되어 잘 살 았다는 사람들이 부러운 나머지 나는 내 성분은 지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주, 부농 소조에 들어가 학습에 참가했다. 나는 지주나 부농이 뭔지 알리 없었다.  투쟁대회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지주, 부농이라는 사람들이 끌려나왔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발씩이나 되는 고깔이 푹 씌워있었다. 그들은 단상에 끌려나와 머리를 푹 숙이고 있고 빈농, 고농이라는 사람들이 무대 아래에서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외쳐댔다. “지주, 부농을 타도하자!” “우리 피를 빨아먹은 저놈들에게 혈채를 받아내자!”  사람들의 외침은 분노에 젖어있었다. “지주, 부농이 뭔데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곁사람에게 물었다. “엤날에 호의호식하고 잘 산 사람들이지.” “혈채라는 건 또 뭐고요?” “저 놈들이 빨아먹은 피 값이란 말이다.” 나는 그제사 성분을 지주로 신청한것이 잘못된줄 알았다. 나는 투쟁대회 사회를 보고 있는 공작대 대원에게 가서 말했다. “아저씨 제가 신청을 잘못했어요. 난 지주가 아니예요. 난 저 사람들처럼 잘 산게 아니고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럼 넌 저쪽으로 가!” 그래서 나는 빈농, 고농들이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불러대는 사람들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후에 책임자는 나더러 빈농, 고농단의 깃발을 들고 다니라고 하였다. 나는 큰 벼슬이나 한 것만치 기뻤다. 깃발을 들고 다니며 투쟁대회도 참가하고 문예공연에도 참가했다. 그때 나는 노래를 꽤나 잘 부르는 축이었다. 그래서 선전대를 따라다니며 독창을 했다.  “아득한 천리길 고향은 먼데” 이렇게 노래를 뽑으면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얼마후에 문공단에서 왔다는 사람이 나를 찾았다. “노래를 참 잘하는데 문공단에 오지 않겠소?” “월급은 줍니까?” “아직은 없소.” 이 말에 내 마음은 갑자기 식어버렸다. “그럼 우리 할머니는 어떻게 하고요?” “글쎄 앞으로는 월급이 있겠지만…” 그 사람은 말끝을 흐리마리 해버렸다. 월급이 없다는 말에 그렇게도 가고 싶던 문공단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합창대에 뽑혀 목단강이나 할빈 방송국에 다니던 소학시절의 잊 못할 추억을 떠올리며 힘겹게 살아갔다. 
7    제6편 죽어도 시집은 안 갈래요 댓글:  조회:1686  추천:2  2014-06-05
 열네살 때 일이었다. 너무도 살기가 힘이 드니 할머니는 나더러 시집을 가라고 했다. “시집 가라구?” “그래 잘사는 집에 가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잖겠니.” “시집이 뭔데?” 진짜 철없는 나로서는 그 뜻을 리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웬 사람들이 한구들 모여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중에는 고모, 고모부, 오빠뻘 되는 사람도 끼어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니 모두들 국수사발을 놓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서 들어 오너라, 저 웃방에 가 인사를 해라, 너 신랑되는 사람이 있다.” 고모가 반색을 하며 나를 웃방으로 안내하였다. “신랑 되는 사람?” “너를 민며느리로 삼자고 사둔댁에서 사람들이 왔단다.” “민며느리?” 나는 듣다 첫소리다. 나는 그자리에서 맏고모가 건네주는 국수사발을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국수사발이 찰랑하고 깨지는 바람에 화기애애했던 집안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우리 집에 친척들이 모였다. 나를 설득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우리 집안은 양반집안이어서 어른들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 없는데 저 기집애 왜 례모없이 구는 거야.”  고모가 나를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옛날에도 처음엔 울고불고 하다가 동여매 가면 아들딸 낳고 잘 살더라.” 둘째 고모부의 말이다. 동여매 간다는 말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동여매 가는 날이면 난 죽고 말테야!” 나의 태도에는 타협할 여지가 없었다. 이 무렵 심순애와 리수일 소설을 본 나는 내가 마치도 다이아몬드에 팔려가는 심순애 같아서 더더구나 펄펄 뛰었다. “그래도 신랑을 시켜서 자주 만나게 하면 정이 들거야.” 고모부 말은 능청맞았다. 그래 그랬던지 며칠 후 밤에 문밖에서 문고리 당기는 소리가 났다. 달빛에 모자를 꾹 눌러쓴 한 사나이의 모습이 창호지에 어려 있었다.  그때만해도 초가집인 우리 집 문고리에는 삼끈을 감아놓은 문이어서 밖에서 당길 때마다 삼끈이 조금씩 풀렸다. 나는 그 사람이 신랑감이라는 사내인줄 알아차리고 뒷문으로 도망을 쳤다. 그래서 그 사람은 몇 번을 왔다가 그 때마다 헛물을 켜고 돌아갔다.  내가 만약 고모부 말과 같이 동여매가는 날이면 양잿물을 먹고 죽기로 작심하고 이웃집 아주머니한테서 돈 10전을 꾸어 양잿물을 산다는 것이 만두 잿물을 잘못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너무도 고민 끝에 나는 신경쇠약까지 걸렸다. 그래서 자다가도 나는 죽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며칠 후 제삿날에 친척들이 또 모였다. “안되겠다. 저러다가 잘못되면 큰일이니 혼사를 물릴 수 밖에.” 둘째 고모부 말이 떨어지자 “국수 값이나 신랑의 명예손상비는 어떻게 하고, 명예손상비는 부르는게 값인데” 맏고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끈을 이었다. “국수 값은 내가 낼께.” 언니 남편-아저씨가 자진해 나섰다. 아저씨는 운전수여서 국수 값을 낼만 했다. “사돈 설득은 내가 할께.” 영화관 해설사로 일하는 외사촌 오빠가 자신있는 소리를 했다. 영화해설을 하는 오빠는 말이 청산류수라 그렇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이 갔다.  이튿날 외사촌 오빠는 사돈을 불러왔다. 양가의 “담판”이 시작된 것이다. 외사촌 오빠의 말은 변설이었다. “억혼(억압으로 하는 혼사)을 반대하는 오늘의 신사회에서 우리가 억압적으로 결혼을 시킨다는 것도 법에 위반이요 본인 저렇게 반대를 하니 할 수가 없군요 사돈어른 그렇지 않습니까?”  사돈댁이라는 여자도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듣는 말에 따르면 그 여자도 어느 촌의 부녀회 주임이어서 법을 모르는바 아니었다. 이윽고 그도 말문을 열었다. “글쎄요. 억압으로 약혼을 시키는 것도 오늘 법에는 맞지 않을상 싶은데요.” 말이 이렇게 실마리가 풀리자 대화에는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남자 측에서는 결혼을 급급히 서두르자고 결혼날짜 택일 해왔는데 섣달그믐으로 잡아왔다. 봉건미신이 많은 우리 맏고모가 즉석에서 반발했다. “왜 하필 썩은 달을 잡은거요?” 옛습관에는 섣달은 썩은 달로 치는 모양이었다.  파혼 담판이 순조롭게 풀리니 나는 하느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로부터 나에게는 시집가라는 소리가 죽으라는 말보다도 더 싫었다. 누구의 입에서 시집가라는 말만 나오면 나는 펄펄 뛰었다. 할머니도 이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6    제5편 내 이름은 “뽀이” 댓글:  조회:1861  추천:3  2014-04-12
 열세살 어린 나이에 나는 우편국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열두살에 소학교를 겨우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야 할텐데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그런건 엄두도 못내고 날마다 석탄을 주으러 다녔다. 어린것이 머리 벗어지게 석탄통을 이고 다니는 것이 측은해 보였던지 이웃집 우편국 다니는 아저씨가 나를 우편국에 소개하여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때는 심부름꾼을 일본말로 “뽀이”라고 불렀는데 누구나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냥 “뽀이”라고만 불렀다. 그래서 내 이름은 “뽀이”가 되어버렸다. 그 때 내가 한 일은 화장실 청소, 국장실과 서무실 청소, 국장실에 물 끓여 공급하기, 우편 공용지 등사 등이었다.  화장실 청소같은 더러운 일 보다도 제일 힘든 것은 등사였다. 그 때만해도 우편국에서는 그 많은 우편용지를 죄다 등사해서 사용했다. 어려서 힘이 없는지라 하루종일 등사를 하고나면 팔다리가 쑤셔나고 온 사지가 물러나는 것 같았다.  손은 기름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비누가 없어 씻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퇴근을 해야 하는데 거리에서 남들이 볼까봐 신문지로 손을 싸매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골라 남의 눈을 피해 집에가면 새까맣게 된 내 손을 만지며 할머니는 또 눈물을 떨구시였다.  비오는 날, 비에 젓은 숯을 담아다 물을 끓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때는 풍로라는 것도 없어 부채질을 하며 불을 피우자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국장은 빨리 물을 끓여오라고 벨을 울리고 물은 끓지 않고 해서 나는 다급한 김에 이웃 중국식당에 가서 큰가마의 더운 물을 빌려오면 물위에 둥둥 뜬 기름을 보고 국장나으리는 이게 무슨 물이냐고 호통을 친다. 광복 전야 그 때는 반항공 사이렌이 자주 울렸다. 소련 비행기가 공습을 온다는 것이였다. 그러면 우리 우편국 직원들은 지정된 방공굴로 일제히 대피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밖에 나앉아 있는 할머니가 폭탄에 맞아 죽는 것만 같아 근심이 태산 같았다. 방공굴에 대피해 있는 나의 마음은 마치도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을 거듭하는 동안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라고 생각한 나는 우편국 “뽀이”를 그만두기로 작심하였다.  이 때 조선으로 재가하신 우리 어머니가 연길로 이사를 왔다. 나와 할머니가 너무도 보고싶어 못 살겠다는 어머니! 어머니는 장거리에서 두부장사를 하였다. 혹시 내가 장에 나가면 어머니는 줄 돈이 없어 길바닥에서 하나 둘씩 주워 모은 고무줄을 주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고 싶어도 차마 오지는 못하고 혹시 길거리에서 할머니를 만나면 다짜고짜 할머니를 무릎에 눕혀놓고 해가는 줄도 모르고 머리의 이를 잡아주곤 하시였다. 할아버지 제삿날이면 꼭꼭 찾아와서 집에는 못 들어오고 문밖에서 빙빙 돌다가곤 하였다. 가난한 세월에도 끊기지 않은 인정 서로의 마음을 의지하며 이를 악물고 우리는 힘들게 살아갔다.
5    제4편 어려웠던 동년시절 댓글:  조회:2148  추천:0  2014-03-24
   산산이 깨져버린 우리 가정, 설상가상으로 내 위의 오빠였던 세살난 애기도 여름에 어른들이 보리타작을 하는데 벌벌 기어 나가 보리끄스럼을 먹고 죽었다. 하여 우리 집은 할머니와 나 단둘이만 남았다.  할머니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생전에 그렇게도 부러워하며 사달라고 하던 야쟁금과 자전거를 못 사주고 끝내 가슴에 묻었다고,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지사라고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죽게 얻어맞고 이마에 주먹만한 혹을 달고 왔던 일, 아버지가 일본놈들이 깍으라는 머리를 않까고 “하이칼라(긴 머리)”를 했다고 얻어맞던 일… 등등 가슴 아픈 일들을 되새기면서 할머니는 밤마다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어지러운 세상 눈물겨운 사연들이 많고도 많고 또 그 사연들의 깊은 뜻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애처로운 할머니 모습은 내 동년의 슬픈 기억으로 또렷이 남았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 한 푼 나올 곳이 없는 할머니와 내 앞에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다. 우선 두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누가 돈 한푼 준단 말인가. 그 시절에는 너 나 없이 어렵기란 매일반, 동정은 해도 구원을 손길을 내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별의별 궁리를 하다못해 할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왜정시대에 개인집에서 막걸리를 해파는 것음 금물이었다. 말하자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둑막걸리장사를 해야 했다. 낮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파출소의 순사가 곧장 달려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남들이 모두 자는 밤중에 막걸리를 해야 했다. 할머니는 한밤중에 일어나 맷돌질을 했다. 나도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불쌍해사 자다 말고 눈을 부비비며 일어나서 할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열 살도 되나마나한 어린 아이가  밤중에 일어나 맷돌질을 하자니 오죽했으랴. 채 잠이 깨지 않아 눈을 감고 맷돌을 돌리다가 깜박 졸아 맷돌 손잡이에 이마를 찍곤했다.  한번은 순사가 들이닥쳤다. 할머니는 경찰서에 잡혀갔다. 호되게 꾸지람을 받은 할머니는 살아갈 길이 너무도 막막하여 다시는 안하겠다는 다짐도 못하고 그냥 눈물란 흘렸다. 보기가 너무도 안되었던지 순사는 때리지는 못하고 배급통장만 몰수했다.  배급통장을 빼앗긴 할머니는 앞이 더 캄캄했다. 배급에 목숨을 걸고 사는 그 시절에 배급통장까지 빼앗겼으니 어떻게 살아가랴. 세상은 왜 이다지도 갈수록 심산일까.  그러던 어느 날 배급통장을 가지고 가면 “갸라메루(사탕의 일종)”를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것이 못시 먹고 싶었으나 통장을 빼앗긴 우리로서는 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마음을 크게 먹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왜 왔냐?”  순사가 물었다.  “통장을 주세요.”  나는 당돌하게 대답했다.  “뭘 하자고?”  “가라메루가 먹고 싶어요.”  “안돼!”  순사가 소리를 높혔다.  이때 어린 마음에도 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가며 두 손을 싹싹 부비며 말했다.  “순사아저씨, 딱 한 번 갸라메루만 타먹고 가져올게요. “  너무도 쬐고만 계집애가 손을 싹싹 부비며 사정을 하니 순사가 내 귀를 잡아올리며  “꼭 가져와. 거짓말 하면 안돼! 알았어?”  그래서 배급통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순사는 그 일을 잊었는지 통장을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우리도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또 막걸리에 손을 댔다. 할머니는 구들장을 번지고 술을 안곳는 것처럼 해놓고 고은 술은 병에 넣어 이웃집 외양간 소여물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몰래 팔았다.  막걸리를 고으면서 불을 때자니 나무도 없고 석탄은 더욱 없었다. 할머니는 우시장에 나가 소똥을 주어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땔거리였다. 할머니는 소똥을 주어다가 마당에 널어 말리웠다. 그래서 우리 집은 소똥집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러던 중 들은 소문에 일본 관사에 가면 석탄을 주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우리는 그 석탄을 아궁이에 넣을 엄두도 못하고 그걸 주워다가 장마당에 나가 팔면 혹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나는 열심히 땅에 묻힌 석탄을 쇠고랑이로 파서는 빈 석유통에 담았다. 그 때 석유통 하나에 가득 담아 장마당에 내다 팔면 그 때 돈으로 12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통을 머리에 이고 오기엔 어린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안감힘을 다 써서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다 넘어지면 석탄이 몽땅 강물에 쏟아지고 빈 통만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한 나는 강변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소문이 들려왔다. 량식창고에 곡식 주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나도 따라나섰다. 가보니 과연 듣던 소문과 같이 겉수수쌀을 실어간 뒤 널린 낟알들이 흙에 범벅이 되어 널려있었다.  나는 땅에 박힌 낟알을 열심이 파서 통에 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창고에 들어가 좋은 곡식을 퍼 담았다.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창고 지키는 사람이 달려와 소리 질렀다.  “뭣 하는 짓이야?”  그 소리에 놀라 모두들 도망쳤다. 나는 다소 겁이 났지만 도둑질 한 것이 없으니 그냥 앉아있었다. 창고지기는 내 통을 들어다보더니  “너 도둑질은 안했구나. 정직한 애구나.”  그러곤 “날 따라와.” 하는 것이었다.  창고지기는 창고에 들어가 좋은 곡식을 한통 퍼담아주며 어서가 먹으라고 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니 할머니는 무등 기뻐하시며  “잘 했다. 우린 가난해도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살림은 갈수록 막막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연길바닥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팔도에 있는 둘째 고모네 집으로 갔다. 가보니 아이가 일곱이나 되는 둘째 고모네도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그 집 아홉 식구에 우리 둘까지 끼우니 열한 식구가 일불 한 채로 발만 가리고 새우잠을 자야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그 집 식구들과 함꼐 금전으로 올라갔다. 남이 캐고난 뒤에 버려진 흙을 담아다가 강물에 헹구면 금싸라기가 조금씩 나타나는데 그걸 재차 수은에 굴리면 아주 작은 금덩어리가 생긴다. 우리는 그걸 또 장에 나가 팔아서는 쌀을 바꿔어다가 입에 풀칠을 했다. 칠흑과도 같은 캄캄한 세상, 어디가나 우리가 살아갈 길은 없었다.     
4    제3편 기구한 엄마 운명 댓글:  조회:1833  추천:2  2014-03-14
   할아버지가 돌아가니 우리 가정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재가를 해야 했다. 그때 생각만은 잘 사는 집에 시집을 가서 우리 집을 돕는다는 것인데 갔다는 시집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어서 돕기는커녕 제 입살이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때 어머니는 내가 따라나설까바 사탕 사러 간다고 나를 얼려놓고 눈물을 떨구며 떠났다. 나는 어머니가 사탕을 사들고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사탕 사러 갔다는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발저둥을 치며 울었다.  후에 알고보니 어머니는 조선 남양의 한 가난한 집으로 재가했다고 한다. 어린 딸자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얼마후에 어머니는 색동저고리를 해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또 내가 따라갈까 봐 너의 어머니는 너를 버리고 간 나쁜 년이라고 리간을 높으면서 그 색동저고리를 받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너무나도 어리고 천진한 나는 그 말을 곧이듣고 어머니가 지어온 색동저고리를 받지않고 어머니도 못 본체 외면했다. 그러니 또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바람에 어머니는 나를 한번 품에 안아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면서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다. 장질부사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떠는 그 무서운 병이. 왜정시대에는 어느집에 한사람이라도 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아예 그 집주위에 새끼줄을 돌리고 통행을 금지했다. 그런데 큰 외삼촌, 그러니까 어머니의 오빠가 이 병에 걸렸다. 어머니는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 문안을 왔다. 병 문안을 왔다가 어머니도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약도 없는 때라 사정없는 병마는 어머니 온 집 식구를 죄다 쓸어 눕혔다. 이 바람에 나는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다.  어머니 상두가 나가는 날 우리집 문앞에서 상두가 나가지 않아 상두꾼들이 무진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딸을 두고 가기가 차마 아쉬워 상두를 멈추게 했다 한다.  철없는 나는 사탕 사러 간 어머니가 언제 오나, 비행기 타고 먼 곳을 갔다는 아버지가 언제 오나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3    제2편 독립지사 할아버지 댓글:  조회:2328  추천:3  2014-02-23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일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연길로 이사를 했다. 지금의 공원 문 앞, 우시장 북쪽이었다. 할아버지는 진짜 멋쟁이시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멋진 팔자수염을 하신, 누가 보나 지나치다가 한번씩은 뒤돌아보는 미남이었다.  서울에서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아홉 사람이 중국으로 건너왔는데 그 때는 모두 머리태를 드리우고 왔다 한다. 학자형인 할아버니는 그 후 독립군에 참가하여 김좌진장군 소속 부대에서 활약했는데 청산리전투 때에는 김좌진 장군 부대에서 군량도감까지 지내셨다.  한국에 가니까 우리 방씨 족보에 이 사실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봉림동사건 때 할아버니는 연길에 일 보러 가시고 안계셔서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려서 보니까 할아버지는 중국말을 잘 하셔서 관청이나 잘 사는 집에 가서 량식을 얻어다가는 못 사는 집에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가난한 집에 돈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방회장이라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목에 후발증이 나서 몸져 눕게 되었다. 후발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2    제1편 밤중의 총소리 댓글:  조회:1940  추천:1  2014-02-08
     나의 동년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이건 모두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1933년 어느 날 밤,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웬 일이여?”  동네사람들이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몰라 마을을 털러 온다더니…”  “며칠 전 촌장집에 기별이 왔는데 돈을 갖춰 놓으라고, 주지 않으면 귀를 떼간다나…”  “그럼 우린 어쩌나?”  “어쩌긴 무조건 피해야지.”  그래서 사람들은 허겁지겁 논밭으로 몰려갔다.  이 때 잠결에서 놀라 깨어난 어머니는 한 살난 나를 업는다는게 베개를 업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동네사람들은 따라 논밭으로 내뛰었다.  그떄 우리가 살던 마을은 봉림동, 연길에서 서남쪽으로 약 20리가량 떨어지 조그만 산간 마을이었다.  논밭으로 몰려간 동네사람들은 모두 물위에 반드시 누었다. 벼 포기가 두어뼘 자란 논벌은 사람이 누우면 인체가 보일랑 말랑해서 어둠이 깃들면 일시 피신하기는 알맞춤하였다.  베개를 업고간 어머니는 논판에 가서야 애기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 마을로 되돌아 오려고 했으나 그 때는 벌써 늦었다.  그 때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단잠에 골아빠져 있었다 한다.  이 날 우리 가문에는 큰 불행이 뚝 떨어졌다. 사랑방에 누어있던 나의 아버지가 너무도 요란한 총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서 우리집 뒤 배자를 뛰어넘다가 유탄에 허벅다리를 맞은 것이다.  그 해 용정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팔도 경찰서 순사로 가라는걸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와 벼 재배 실험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성중학교에서 민족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일제의 개다리질을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다 피신하는데도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뱃심으로 논밭에 나가지 않고 누워있다가 총소리가 너무 요란하니 견딜 수가 없어 뒤늦게야 배자를 뛰어넘다가 그만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 때 한 아줌마가 아버지가 쓰러진 곳을 지나갔다.  “아줌마 날 좀 살려주오.”  아버지가 애원했으나 그 아줌마는 자기도 한 목숨 구하려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그 때 누가 총 맞은 아버지 허벅다리를 꾹 동여매주었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습격자들이 돌아간 뒤 아버지는 소수레에 실려 연길병원 쪽으로 가던 중 시내물을 건너다가 물을 찾았다. 총상을 입고 피 흘리는 사람한테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는걸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물을 퍼주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출혈과다로 운명하고 말았다. 스물여섯 살 아까운 나이에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저 세상에 가시고 나는 하룻밤 사이에 아버지를 잃은 신세가 되었다.   
1    어머님 자서전 안내 말씀 댓글:  조회:3049  추천:5  2014-01-19
 오늘부터 저의 어머님의 자서전을 연재합니다. 어머님이 쓰신 자서전 은 2008년 넌픽션부문 최우수 당선작으로 뽑혔습니다. 어머님의 자서전을 올리기앞서 편집자의 소개글을 선보입니다.                                                             한국 편자의 말  이 공모한 넌픽션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방채봉 여사는 중국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이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을 거쳐 현재 중국 55개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을 주필이며 시인으로 널리 알혀진 김철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일본헌병대의 숱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던 아버지의 비극적인 운명,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진 오빠 등, 연이은 수난의 가족사를 겪으면서 할머니 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이후 배고픔과 고난을 겪었고, 중국의 문화혁명 때에는 남편과 함께 억울하게 구속되었다가 명예회복이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의 드라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서전에서 방채봉 여사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민족의 수난사는 내가 겪은 재난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내 일생의 수난사는 우리 민족의 혈투사의 축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어디 가서나 피도 많이 흘렸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도탄속에서 허덕이던 나의 겨례, 그 속에 한 사람으로서 나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갸냘픈 여인으로 극복하기 힘든 수많은 역격과 좌절을 딛고서 일어선 오뚝이 같은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극기와 인내로서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등,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아울러 맞춤법이나 표기 등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원문을 살려 싣기로 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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