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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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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제3편) 댓글:  조회:3180  추천:0  2013-08-06
                                              믿거나 말거나                                                                          솔트레이크 시내에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들이 많다. 주로 개척사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의 동상이다. 그런데 유독 하나만은 인물 동상이 아니고 조류 동상이다. 그것이 바로 유타 주를 상징하는 새로 지정된 갈매기 동상(Sea Gull Tower)이다. 갈매기 동상은 인물 동상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해 세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적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역사적인 기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몰몬교 성도들이 새로운 자유의 땅인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해 먼저 시작한 것이 관개 농업이다. 사막을 전답으로 만들려면 우선 물이 필요했다. 쇠로 된 파이프가 없으니 나무속을 파서 관개용 물길을 만들고 그 물길을 수원이 있는 산으로 이어가는 혹독한 역사(役事)였다. 더군다나 솔트레이크는 사막성 기후인데다가 고지대여서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초기 이주민들은 놀랄 만한 생명력과 근면성, 도전 의지로 기아와 추위를 이겨내며 삶의 터전을 닦았다. 봄이 오니 이주민들은 가지고 온 씨앗을 뿌린다. 개간된 처녀지에 새싹이 움트고 햇볕을 받아 곡식이 잘 자라고 있는데 난데없이 메뚜기 떼가 덮쳐든다. 메뚜기들이 농작물을 줄기와 잎도 남기지 않고 다 갉아먹는다. 메뚜기가 하도 많아 농부들은 농작물이 메뚜기에게 먹히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열심히 기도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갈매기가 하늘을 덮으며 떼 지어 날아왔다. 태평양과는 머나먼 사막지대에 갈매기가 날아오다니 참말로 기적이다. 날아온 갈매기들은 메뚜기를 잡아먹거나 부리로 물어서 소금호수에 버렸다. 갈매기들로 요행 위기를 모면한 그 해가 이주민들이 솔트레이크에 정착한 이듬해인 1848년이었다. 멀리 태평양에서 날아온 갈매기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는 바다로 날아가지 않고 그냥 솔트레이크에 남았다. 지금도 염수호에 가면 그 때의 《후손》들을 볼 수 있다. 해마다 4월에서 6월까지 5,000마리 내지 8,000마리 정도의 갈매기들이 호수에서 알을 낳는다. 역사적인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1913년 《갈매기 기적》이라고 이름 한 갈매기 동상이 세워지고 갈매기가 유타 주를 상징하는 새로 된다.    지금도 머나먼 태평양에서 갈매기 떼가 날아온 것이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몰몬교 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내린 것이라고 답하나 혹자는 당시 태평양에서 일어난 허리케인으로 먹이를 찾을 수 없어 갈매기들이 내륙 염수호를 찾아 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당시 태평양에서 날아온 갈매기는 물론 곡식을 덮쳤던 메뚜기마저 《몰몬 메뚜기(Mormon Cricket)》로 명명되어 대영백과사전에 올라있다. 염수호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보니 우리 내외가 자주 찾는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비치인 산타모니카 해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솔트레이크에 갓 이주한 사람들도 갈매기가 날아예는 염수호가 태평양인줄로 알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해변까지 미국 대륙을 횡단한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 믿거나 말거나, 이번엔 평균 수명 관련 이야기다. 유타 주는 네바다 주와 럭키산맥을 사이 두고 있다. 땅 크기와 인구도 비슷하고 대부분 땅이 산맥 아니면 사막이라는 점도 같다. 그러나 두 주는 주민들의 평균 수명에서 극과 극을 이룬다. 네바다 주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미국에서 가장 짧은 반면 유타 주 주민들의 평균 수명은 미국에서 최장이다. 최장 수명에 대해 몰몬교 신도들은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즉 몰몬교의 엄격한 신앙이 준 혜택이란다. 몰몬교 신도들에게는 건강 율법이 따로 있다. 몰몬교 교주인 조셉 스미스가 1823년에 제정한 《건강수칙》을 보면 주로 음식과 관련이 있다. 《건강수칙》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곡물은 생명의 근본이다. 야채나 과일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면 다 먹되 고기는 적게 먹어라. 약초와 야채, 과일은 보충하는 뜻에서 섭취가 무방하다. 술, 담배 그리고 뜨거운 차는 금하라. 흉년에 대비해 1-2년간 먹을 것은 반드시 비축하고 비축할 때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하라.》    몰몬교의 교주 스미스가 《건강수칙》을 제정한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는 게 해당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건강수칙》을 제정하기 전 해인 1822년 미국 해안지방에는 콜레라가 크게 유행해 뉴욕시는 과일 매매를 금지시키고 감자, 토마토, 양파 등 몇 가지 야채만 먹되 그나마 적게 먹을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당시 서부로 가던 이주민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은 인디언이 아니라 괴혈병이었다. 황야에서 사막에서 야채나 과일은 볼 수조차 없어 이주민들에게는 야생동물 고기가 주식이 되었는데 고기만 주로 먹으니 자연히 비타민C가 결핍하게 되었다. 붙는 불에 키질이라고 콜레라 예방으로 야채와 과일 섭취에 대해 내린 금지령은 괴혈병 발생에 박차를 가한 셈으로 되었다. 몰몬교 교주 스미스가 금지령과 정반대되는 《건강수칙》을 정한 것은 당시로 말하면 이주민들에게 치명적인 괴혈병 예방을 위한 아주 현명한 처사라고 해당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지금도 몰몬교 신도들은 술, 담배, 커피를 금하고 곡물은 원상 그대로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제분해서 먹는데 밀가루는 정백하지 않고 통밀가루로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해당 부문에서 전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몰몬교 신도들과 미국의 일반 주민들이 중요한 질병 발병률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몰몬교 신도들의 여성 식도암 발병률은 일반 주민들에 비해 90%나 적으며 당뇨병, 신장병, 방광염 등 비뇨기과 질환은 50%나 적다. 암 사망률도 전국 평균 수치보다 낮다.    식생활을 제외한 주거환경이나 기후 등 다른 생활환경이 일반 주민들과 같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려주는 실례로 된다. 《몸에 꼭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몰몬교 신도들의 명언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43    북경과 LA 스모그 사건의 차이 댓글:  조회:6798  추천:2  2013-07-21
    필자는 10년전부터 해마다 휴가차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찾는다. 로스앤젤레스를 일명 LA라고도 부른다. 19세기 중반, 금광의 발견과 더불어 터진 골드러시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LA는 미국에서 뉴욕 버금으로 가는 대도시이다.   LA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영화, 나아가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와 세계 최대급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다. 지금 디즈니랜드는 LA에서 갈라져 나간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속한다. 할리우드에 가면 세계 최정상급 영화배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디즈니랜드에 가면 동화세계, 동년의 세계로 돌아간다. 할리우드, 디즈니랜드를 내놓고도 LA에는 볼거리가 많다. LA 유명한 비치인 싼타모니카, 환상적인 항구도시 롱비치와 카탈리나섬, 영화 스타와 대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의 상징인 비버리힐즈, “LA” 상징물의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LA 요람으로 올베라 거리,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다.  LA 시장은 환영사에서 LA는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고 끝없는 가능성이 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곳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라고 했다.  그의 말과같이 매번 LA를 찾을 때마다 필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감동적인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 걸음에는 감동적인 충격보다도 경악스런 충격을 받았다. 그 사연을 아래에 적는다.   새해 문턱을 넘어서면서 북경 시민들에게 차려진 것은 축복보다도 악몽과 같은 스모그 “세례”였다. 기상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1월 북경은 네차례 스모그 “세례”를 받았는데 스모그가 장장 20여일을 북경 하늘을 뒤덮었다. 해마다 가끔씩 북경 상공을 뒤덮던 스모그려니하고 별로 개이치않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도 바람만 불면 한국의 어느 노래 가삿말과같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르리라”는 확신을 갖고 미국행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는데 스모그 날씨가 지속되면서 공항이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항공편이 결항될가바 조바심을 갖게 됐다. 천만다행으로 1월 31일 밤 찬공기가 북경을 급습하면서 오랫만에 파란 하늘이 보이고 하늘길이 열렸다.   미국에 도착해 안해와 딸과 휴가를 즐기던 중 중국과학원에서 발표한 글을 접하게 되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였다. 그 글 한대목 인용한다.   “중국과학원에서는 요즘 ‘대기 스모그원인 추적 및 통제’ 특정연구팀의 최신연구결과를 공포했다. 연구결과 최근 스모그사건은 기후이변사태로 중동부 대기안정, 인위적오염물배출, 미세먼지와 풍부한 수증기가 공동히 작용한 결과이자 자연요인과 인위적요인이 공동으로 작용한 사건이라고 인정한것으로 나타났다.  특정연구팀의 ‘대기 먼지안개 원천추적’ 대상 책임자이자 중국과학원 대기물리소 연구원인 왕약사는 이번에 중국 중동부지역을 강타한 강한 스모그 오염물 화학구성은 영국 런던의 1952년 스모그사건과 20세기 40-50년대 시작된 미국 LA 광화학연무사건 오염물의 혼합체이며 거기에 중국특색의 미세먼지교질용액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것이다.”  스모그에 대한 정의를 보면 스모그란 연기 “smoke”와 안개“fog”의 합성어로, 18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용어다. 산업발전과 인구증가로 석탄이나 석유 소비 소비량이 늘어나자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온 도시를 뒤덮는 현상이 영국 런던에서 발생했는데 훗날 이 현상을 “런던형 스모그”라고 이름지었다. 런던형 스모그로 1872년 243명이 사망, 1952년 12월 1주일간 스모그 현상이 지속되면서 호흡장애, 질식, 만성 폐질환 등으로 총 1만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란?    10년동안 해마다 LA를 나들면서도 “LA 광화학스모그”란 말은 듣다 첫소리였다. 또한 북경의 스모그사건이 LA 스모그사건과 련관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 필자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해당 내용을 검색해보니 “LA 광화학스모그”에 대한 정의는 이러했다.    “1954년 7월 미국 LA에서 맑은 날씨에 안개가 발생하는 새로운 스모그 현상(일명 백색 스모그)이 발견됐는데 1차 오염물질에 의한 ‘런던형 스모그’와 달리 ‘LA 스모그’는 석유 연료가 연소된 후 석유휘발물(탄화수소)과 이산화탄소가 강한 광선자외선의 직사로 광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형성된 강한 독성의 광화학연무였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LA 스모그”로 800여명이 숨졌다. 영국 런던 스모그사건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사건은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최악의 대기오염 재난이다. 그런데 새해 북경을 망라한 중국 3분의 1의 지역을 강타한 스모그사건이 영국 런던의 스모그사건과 미국 LA 광화학스모그사건 보다 더 엄중한 “중국특색”의 스모그사건이라고 하니 아연실색해질수 밖에 없다.   중국의 저명한 의학전문가인 종남산 원사는 “중국특색”의 스모그는 몇 해전 중국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사스”보다 더 무서운 환경재난이라고 했다. 그는 “사스”는 격리조치로 환자와의 접촉을 막을수 있지만 스모그는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무서운 재난이라고 했다.   몇해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이 가장 심한 10대 도시를 선정했는데 그 중 중국의 수도 북경이 불명예스럽게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환경전문가들은 현 상태대로 나가면 북경은 몇십년전의 런던처럼 사람을 질식케하는 “안개도시”로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환경전문가들의 예측이 너무 일찍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것이다.   북경 스모그사건과 LA 스모그사건의 차이에 대해 LA에서 신문기자로 있는 필자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두 도시의 자동차 보유량을 비교해보면 북경은 500만대, LA는 북경 인구의 절반도 안되지만 자동차 보유량은 천여만대를 넘어섰습니다.  LA정부는 스모그사건이 발생한후 질소산화물 및 탄화수소의 방지대책을 강구하고 주요 배출원인 자동차 배출가스의 규제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강력하게 실시했습니다.    중국과학원의 보고에 따르면 북경 스모그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은 자동차 매연으로 전체의 25%를 차지했고 다음으로 석탄, 외부 요인이 각각 20%씩을 차지했습니다.  도시화와 현대화 진척 과정에 어쩔수 없이 발생하게되는 대기오염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북경과 LA스모그사건은 공통점이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LA 스모그사건은 ‘과거형’이고 북경 스모그사건은 ‘현재진행형’이라는데 있습니다.”  뜻인즉 “LA 스모그사건”은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건이지만 “북경 스모그사건”은 현실적인 재난이란 것이다. 친구의 분석대로 “현재진행형”인 “북경 스모그”로 인한 재난이 언제가면 “LA 스모그사건”처럼 “과거형”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될런지.    인간들은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그냥 자기를 품어주고 키워주고 혜택을 준 자연을 훼손하면서 연명해왔다. 해마다 하늘땅을 노랗게 만든 황사가 자연의 훼손으로 하여 오는 자연의 보복이 얼마나 무자비한가를 보여주었다면 이젠 시도때도없이 인간의 삶의 공간을 뒤덮는 스모그는 어떤 계시를 주고 있을가?!  몇해전 북경 주변의 관광지인 령산에 갔는데 가는 길에 관광버스에 앉은 애들이 농가집 처마에 매단 옥수수 이삭을 보고 그것이 바나나인줄 알고 환성을 지르는 것이였다. 도시에서 자란 애들이니 그럴만도 했다. 애들 중 한 애가 갑자기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나무 한 그루 없이 밋밋한 민둥산들을 가리키며 저 무덤은 왜 저렇게 큰가고 부모에게 묻는 것이였다. 부모로선 할 말이 없다. 사실 민둥산은 인간들의 무지로 만들어진 자연의 “무덤”이니까. 이번 스모그 사건 발생이 주로 인위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인간은 또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20세기가 남긴 10대 후환중의 하나가 환경오염과 지구자원의 고갈이다. 새세기를 맞으며 당시 유엔 환경국의 집행주석인 도데스페엘은 세계 환경일에 한 연설에서 [인류의 생존공간인 지구가 이미 참을성을 잃었다]고 경고했다.  참을성을 잃은 지구, 그 지구의 대기마저 질식사를 초래할 정도로 오염시키면 인류의 다음 생존공간은 어디? 달나라일가 아니면 별나라일가? 허무맹랑하게 지구 종말에서 탈출용으로 유일한 생명선이라고 하는 “노아의 방주”를 느닷없이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42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2편) 댓글:  조회:3549  추천:0  2013-07-12
                                                                                                              바로 이 곳이다!                          럭키산맥을 넘어온 몰몬교 지도자 브리감 영이 산 정상에서 솔트레이크 분지를 내려다보며 감격에 차 외친 소리가 《바로 이 곳이다(This Is The Place!)》 이 말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른다.     당시 솔트레이크는 황막한 사막과 모래벌판으로 이렇다 할 지명도 없고 소수의 인디언들만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살풍경 같은 땅이었지만 브리감 영의 눈에 비친 건 그토록 갈망했던 《신이 계시한 시온의 땅》이었다고 한다. 하여 브리감 영은 후에 개척을 거쳐 옥토가 된 솔트레이크를 《뉴 예루살렘》, 또는 《성인의 도시》라고 자칭했다.    솔트레이크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개척자 주립공원(Pioneer Trail State Park)》이다. 《개척자 주립공원》은 브리감 영이 인솔한 148명 개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1847년 럭키산맥을 넘어 솔트레이크 분지에 첫 발자국을 찍은 도착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개척자들의 공적을 기려 공원에 세운 기념비에는 개척자들이 자유의 땅, 약속의 땅을 찾아 1846년부터 2월부터 1847년 6월까지 고통, 병마, 굶주림을 이겨가며 육로로 장장 2,080킬로미터를 강행군한 미국 대륙 횡단 역사를 보여주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잠깐 몰몬교와 신도들의 서부 이동 역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몰몬교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몰몬교 정식 명칭은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The Christ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이다. 몰몬교란 말은 예전엔 기시가 담긴 별명이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뜻에서 크리스챤이라고 불렀던 경우와 흡사하다.  몰몬교는 1805년 미국 버몬트 주 샤론에서 출생한 교주 요셉 스미스가 1823년 모로나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아 기원전 2천2백년부터 서기 4백20년까지 고대 미국 대륙 종교역사가 새겨진 금판을 얻고 그것을 번역해 몰몬경을 만들면서 시작을 고한다. 그 뒤로 몰몬교 신도들은 기존 기독교 신도들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당해 박해를 받게 된다. 중국 4대 고전명작 《수호지》에 《핍박에 의해 량산(梁산)에 오른다.》는 말이 나온다. 량산박에 모여든 108명 영웅호걸들이 각자 부득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산적》이 되는 길을 택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 말과 같이 몰몬교 신도들은 교주가 감옥에서 피살되자 이주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1868년까지 22년간 약 8만 명 몰몬교 신도들이 미국 뉴욕 주에서 유타 주까지 평원과 계곡, 늪지대, 설산을 포장마차와 손수레를 끌고 횡단하는 전무후무한 대장정이 장을 펼친다. 이 대장정의 선두에 선 사람이 바로 교주 뒤를 이어 몰몬교를 이끌게 될 브리감 영이다.         건축가 출신인 브리감 영은 나중엔 유타 주 초대 주지사로 되고 미국 서부 개척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사적을 작가인 바르디스 피셔(Vardis Fisher)가 1939년《하나님의 아들(Children of God)》이라는 소설을 써서 《하퍼북(Harper Book Prize)》 대상을 받게 되자 1년 뒤인 1940년에 20세기 폭스사가 소설을 영화화하였는데 그 영화가 바로 서사시적 대작 《브리감 영(Brigham Young)》이다. 이 영화는 오스카상을 받은 딘 재거(Dean Jagger)와 타이론 파워(Tyron Power)등이 출연하여 공전의 히트를 하였다. 영화는 자유의 땅을 찾아가는 몰몬교 신도들의 대장정 역사를 생생하게 펼쳐 보여 당시 미국 내에서 몰몬교 신도들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지금도 텔레비전 화면에 종종 오른다고 한다. 몰몬교 신도들의 대장정 역사는 서부 개척사의 한 장을 빛나게 장식했다. 그들의 이주로 유타 주가 생겨났고 솔트레이크가 사막의 오아시스로 되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몰몬교 개척자들의 이야기는 자유를 찾는 모든 미국인들의 역사》라고 높이 평가했다.        
41    《꿀벌》들의 도시-솔트레이크 (제1편) 댓글:  조회:4093  추천:0  2013-06-26
   솔트레이크는 몰몬교 성지로 많이 알려졌다. 중국인들에게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으로 성큼 다가온 도시다. 솔트레이크는 미국의 첫 국립공원인 옐로우스톤 관광차 들러 간 도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항공편으로 옐로우스톤으로 가려면 솔트레이크까지 가서 관광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옐로우스톤 외 솔트레이크 주변엔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과 주립공원이 많다. 솔트레이크에서 그랜드캐년, 자이언캐년, 브라이스캐년, 브레이크스 유적, 모뉴먼트 벨리, 파웰호수 등 관광명소까지 차로 5~9시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때문에 솔트레이크는 각 관광명소로 가는 필수 경유지이다. 사실 옐로우스톤 3박 4일 관광코스를 선택할 때만 해도 솔트레이크는 그냥 지나치는 도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가보고 나니 샌프란시스코와도 어께를 견줄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였다.                                    사막의 오아시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사막을 지나 유타 주 경내에 들어서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서는 곳이 바로 솔트레이크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감수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받는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한다. 자동차로 솔트레이크를 찾은 한 여행객은 마치 사막에서 생명의 수원을 찾은 느낌이었다고 그 감수를 적고 있다.  비행기로 솔트레이크를 내려다보면 두 곳이 눈이 부시게 하얀 색깔을 내고 있는데 하나는 럭키산맥 지류인 워새치 산맥(Wasatch)의 봉우리들이 떠이고 있는 만년설이고 다른 하나는 솔트레이크 북쪽에 위치한 염수호의 소금밭이다. 여름에 솔트레이크를 찾는 관광객들은 염수호의 하얀 소금밭을 보고 때 아닌 계절에 웬 눈이냐고 의아해한다. 여름에 솔트레이크를 찾은 우리 내외도 비행기에서 황량한 사막을 지겹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하얀 눈》이 덮인 평야가 펼쳐지니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수호의 이름은 솔트레이크(Salt Lake)다. 유타 주 주도인 고원도시 솔트레이크 지명은 이 호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때문에 솔트레이크를 《소금호수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호수의 호안선 길이가 500km, 너비가 80km, 평균수심 4.5m, 면적이 4,700㎢에 달한다. 빙하기에 형성된 호수인데 염분 함유량은 바닷물의 10배인 25%나 되고 소금 매장량은 약 60억 톤 이다. 우연한 일치라고 할 가, 지구상에는 요르단 강이 두 곳에 있는데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과 솔트레이크의 요르단 강이다. 두 곳은 지형학적으로 비슷하거니와 똑 같이 사해(死海)를 갖고 있다. 다르다면 솔트레이크 소금호수가 이스라엘 소금호수보다 면적이 크고 소금 함유량이 높을 뿐이다. 지도로 보면 소금호수가 위치한 지형이 그렇게도 똑 같을 수가 없다. 조물주가 그냥 두 곳에 똑같은 천혜의 비경을 빚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솔트레이크를 《뉴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 가. 솔트레이크 염수호를 세계 최대 염수호라고 하지만 사실 중국 청장고원 차르담분지에 위치한 차르한(察尔汗) 염수호가 표고 2670m, 남북으로 40km, 동서로 140km, 총면적이 5800㎢로 세계 최대 염수호다.      지금 솔트레이크는 눈과 《눈》의 혜택을 톡톡히 입고 있다. 말하자면 솔트레이크를 병풍인양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만년설과 눈처럼 하얀 소금밭으로 솔트레이크는 세계 최고 스키 메카로, 최대 이온 미네랄 공급지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솔트레이크 염수호는 미네랄 공급원으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에 겨우내 쌓인 눈이 봄에 녹아 호수로 유입되면서 풍부한 미네랄의 원천으로 되면 여름의 사막성 기후는 물을 자연 증발시켜 호수의 미네랄 함유 도를 높인다. 호수가 사해이기에 오직 자연적인 증발만 있을 뿐이다. 또한 염수호가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호수의 미네랄이 중금속을 거의 함유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재에는 일찍 이 소금호수 일대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쇼오니 인디언들이 염수호의 이온 미네랄의 자연 치유 능력을 알고 질병에 걸렸거나 외상을 입었을 경우 염수호 물이나 주변 식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염수호의 수면엔 7개 섬이 떠 있는데 섬마다 야영장을 갖추고 있어 젊은이들과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일교차가 크고 겨울이 긴 솔트레이크는 년 중 6개월 동안 스키를 탈 수 있고 또 스키장의 눈이 부드럽고 흩날리는 눈 갈기가 꽃 보라 같다고 해서 《신이 선사한 지상 최고의 환상적인 눈》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솔트레이크 시내에서 차체에 《지상 최고의 환상적인 눈》이라는 글을 새겨 넣은 차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솔트레이크처럼 큰 산맥과 인접한 도시가 드물다. 솔트레이크가 200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지로 꼽힌 데는 천혜의 자연이 큰 몫을 담당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은 중국 선수가 동계 올림픽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올림픽이다. 중국 선수 양양이 500미타 여자 쇼트트랙에서 중국 선수로는 사상 최초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걸었다.    지금 도심에서 30분 내지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스키장만 13군데에 이를 정도로 인프라가 잘 되어 있고 가까운 골프장만도 30여 군데 있으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1000여 개의 등산로가 와사치 산맥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고 한다. 해마다 4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스키를 타려고 솔트레이크를 찾는다. 스포츠는 관광업과 함께 솔트레이크에서 거대 산업으로 부상했다. 솔트레이크는 천혜의 자연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40    샌프란시스코 (제9편) 댓글:  조회:4115  추천:0  2013-06-15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도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태운 버스는 샌프란시스코 중심지를 벗어나 동쪽 방향으로 달렸다. 버스가 금문교보다 3배나 더 길다는 베이 다리 (Bay Bridge)를 넘어서자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천혜의 비경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 기술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먼저 미국 명문대 스탠포드 대학과 함께 인재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진 버클리 대학을 보겠습니다. 왼쪽 차창 밖을 보십시오.》  차창 밖으로 종탑이 보였다.  《저 종탑은 버클리의 상징인데 새더 타워(Sather Tower)라고 합니다. 높이 94 m인 저 종탑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종탑입니다. 가장 높은 종탑은 이태리에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학이다. 이 대학은 미국 서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주립대학 중 가장 우수한 대학이다. 2006 년 미국의 뉴스위크지 발표에 의하면 버클리는 100 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하버드, 스탠포드, 예일, 캘리포니아 공대에 이어 5 위에 올랐다. 2006년까지 61 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14개 단과대학에, 130개 이상의 학과, 300 개가 넘는 전공분야, 7,000개가 넘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60 년대 미국 사회를 대표하는 자유 언론 운동, 히피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868 년에 설립된 버클리 대학 명칭은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아일랜드의 철학가이며 주교인 조지 버클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가이드는 미국 대학이 한국 대학과 다른 점에 대해 소개했다. 곧 대학에 진학할 자식을 둔 처지라 우리 내외는 귀를 기우렸다. 첫 째 다른 점은 한국의 경우, (사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학이 어려운 반면 일단 대학에 입학하면 제적당하지 않은 한 유급하는 학생이 없지만 미국 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이 더 힘들다. 학점 미달로 유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이고 교수들의 학점 평가가 아주 엄격하다. 한번 좀 봐달라는 것을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 번째 다른 점은 학생 대 교수 비례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미국에서는 학생 대 교수 비례를 해마다 대학 평가 기준의 중요한 요인으로 잡는다. 미국에서 괜찮은 대학이면 학생 대 교수 비례가 10:1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국 대학의 세 번째 다른 점은 재정적으로 아주 견실하다. 미국 대학은 국가나 단체 지원이나 학생들의 학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졸업생들의 독지가들의 헌금에 많이 의존한다. 역시 중국의 경우하곤 많이 다른 점이다. 미국 대학과 중국 대학을 비교해 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다음 코스는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실리콘 밸리란다.  실리콘 밸리의 주인공들 중 스탠포드 대학 출신이 많다고 한다. 개교 이래 9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11명 미국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스탠포드 대학에 대해 가이드는 주로 스탠포드 대학을 세운 로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소개에 역점을 두었다.   《스탠포드 대학의 이름은 대학 설립자인 로랜드 스탠포드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로랜드 스탠포드는 미국의 동서 횡단철도를 성사시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로랜드 스탠포드만큼 입지적인 인물도 드물다. 워싱톤에서 변호사로 지내던 그에게 변신의 기회가 온다. 그의 사무실과 도서실이 화재로 전소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스탠포드는 결연히 변호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사업에 뛰어든다. 처음엔 광산용 기자재를 취급하는 사업에 손을 대다가 1861년에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주역을 맡게 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를 세운다.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유공자인 스탠포드는 1885년 상원 의원으로 정계에 나선다. 그러나 행운의 해였던 그 해 그는 가족동반 여행도중 사랑하는 아들을 병으로 잃는 불행을 안겨 된다. 몇 달 후 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선 스탠포드는《캘리포니아의 모든 아이들은 모두 나의 아이들이 될 것이다》고 선언하고 하버드대 총장을 찾아가 대학 설립 조언을 듣는다. 비명에 간 아들을 기리는 뜻으로 설립된 것이 바로 여러 번 대학 종합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스텐포드 대학이다.  당시 스탠포드는 하버드대 총장에게 종합대학 설립에 얼마만한 자금이 필요한가고 물었습니다. 하버드대 총장이 5백만 달러라고 대답했지만 스탠포드는 2천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그동안의 물가지수를 감안하면 그 때 스탠포드가 투자한 금액은 현재가로 약 4억 달러에 해당합니다. 스탠포드 대학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많으신데 스탠포드 대학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10배나 됩니다.》  혀를 내두를 숫자였다. 화제는 실리콘 밸리로 이어졌다. 실리콘 밸리, 미국 산업화의 엔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실리콘 밸리 하면 계곡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실리콘 밸리에는 계곡이 없다. 숲 속에 묻힌 조용한 도시다. 그렇지만,  《실리콘 밸리는 이곳은 인간 문명의 바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엔진이 작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IT 산업의 혁신적인 발전은 인간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마저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소 격앙된 어조로 가이드가 실리콘 밸리를 소개했다.  실리콘 밸리에는 겨울철 제외하면 년 중 비가 내리지 않고 습기 없는 건조한 날이 계속되어 전자 산업에는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거기다가 근처에 스탠포드, 버클리, 산타클라라 같은 명문대가 있어 우수 인재 영입에도 편리하다. 반도체와 컴퓨터 관련기업, 연구소,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컨설팅 회사, 유망한 벤처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캐피탈 회사 등 약 4 천개 이상의 회사, 기업이 밀집해 있는 실리콘 밸리에는 야후, 구굴, 아도비, 애풀 컴퓨터, AMD, HP, 맥 아피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가지 제품이 선을 보인다.   《실리콘 벨리의 탄생은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탠포드 대학 출신, 윌리엄 휴렛과 데이 팩커드라고 하는 두 청년이 스탠포드대학 캠퍼스 부근의 허름한 차고를 하나 빌려 음향 측정 오디오 오실레이터를 개발합니다. 첫 제품 개발에 성공한 두 청년은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휴렛의 이름을 앞에 붙이고 팩커드 이름을 뒤에 붙인 휴렛 팩커드란 회사가 탄생을 고합니다. 이 회사가 실리콘 밸리의 최초 벤처 기업입니다. 지금 이 회사는 종업원 30여만 명에 매출 140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실리콘 밸리 이름의 탄생은 1956년 벨연구소 (Bell Labs)에 근무하던 윌리암 쇼클리(William Shockley)가 마운틴 뷰(Mountain View)에 페어차일드(Fairchild Semiconductor)라는 반도체 회사를 설립한데서 유래된다. 반도체의 소재인 규소 영어명이 실리콘(Silicon)이기 때문에 실리콘이란 명칭이 붙게 된 것이란다.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언급하게 되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는 창업자가 한사람이 있다. 스티브 잡스, 그가 바로 인류에게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연 애플 컴퓨터 회사 창시자이다. 그가 인재를 스카우트할 때 한 말이 실리콘 밸리 창업자들의 희망과 포부의 대명사로 되고 있다. 그 말이 뭣일 가?   가이드는 짐짓 뜸을 들였다. 모두 가이드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내가 손을 들었다. 《김 작가님, 말씀해 보십시오.》  이미 책에서 본 이야기라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와 함께 꿈을 만드는 일을 합시다.》 《정답입니다. 김 작가님께 오늘 저녁 와인 한 병 선물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은 당시 팹시 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자기 회사로 스카우트 할 때 한 말이다. 당시 잘 나가는 대기업인 팹시 콜라를 그만 두고 자리를 옮기라는 권고에 망설이고 있는 존 스컬리에게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평생 사탕 물이나 만들며 살겠나? 나와 함께 꿈을 만드는 일을 합세.》  꿈을 만드는 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언이다. 실리콘 밸리 개척자들 모두가 하는 일이 바로 꿈을 만드는 일이다. 꿈이 깨질 수도 있겠지만 꿈을 만드는 과정이 더 보람차니까. 인생의 보람이 여기 있지 않을 가…   기왕 와인 얘기가 나왔으니 다음 화제는 자연히 와인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의 또 하나의 자랑은 미국에서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나파벨리입니다. 오늘 일정에 잡히지 않아 소개만 해드립니다.》  와인은 스페인 전도사들이 처음으로 가지고 왔다. 나파밸리의 기후와 토양이 포도재배에는 천혜 적이었기에 19세기 중반부터 포도농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적인 와인 생산업체를 망라한 약 300여개 와인 생산 기업이 나파밸리에 입주해 있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와인의 소비량이 증가하자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랑스 와인입니다. 프랑스 와인 업계는 프랑스 와인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세계 와인 생산 업자들을 초청해 세계 최고의 와인을 뽑는 행사를 가졌는데 생각밖에도 심사위원들은 나파밸리 와인에 표를 몰았습니다. 그래서 나파밸리 와인은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군침을 돌게 하는 와인 얘기로 샌프란시스코의 관광이 막을 내렸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시작할 때 가이드는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는 말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을 선택하라고 했다.《관용의 도시》,《기적을 낳는 도시》 중 하나를 택하려다가 그냥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위대한 작가 월리엄 포크너가 샌프란시스코를 평한 말로 나의 선택을 대신한다. 《당신이 생존이라면 샌프란시스코는 당신을 싫증나게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만일 숨을 거두었다면 샌프란시스코는 당신을 기사회생시킬 것입니다.》
39    샌프란시스코 (제7편) 댓글:  조회:3916  추천:0  2013-06-09
                                                                                                                             관용의 도시  호텔로 이동하는 도중 여러 거리를 지나면서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대표적인 경관들을 두루 볼 수 있었다. 미국 서부의 최대 금융타운이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독특한 빌딩이 금융가에서 단연 돋보이는데 48층으로 260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미국의 최대 은행의 하나인 아메리카은행 본점이라고 한다. 이 빌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외 이목을 잡는 또 하나의 건물은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물이다.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모양을 본 뜬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밝고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시청 건물의 돔 높이가 308피트로 국회의사당보다 16피트 더 높다고 한다.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인상적인 광장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심장부에 위치한 유니온 스퀘어 광장이다. 이곳은 1850년 이래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중심지로 항상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광장 이름은 남북전쟁시기 북부 연합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남부 세력을 반대하여 데모를 일으켰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대형백화점, 유명 명품매장, 수십 개 호텔들이 몰려있어 샌프란시스코의 최고의 쇼핑타운으로 각광받고 있다. 광장 근처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아트갤러리들과 극장가도 있다고 했지만 일정상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적어도 3일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을 실감케 했다.  갑자기 가이드가 우릴 보고 차창 밖을 주시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주택에 여러 가지 색깔의 기를 꽂은 것이 보이지요. 저 깃발을 이라고 하는데 게이들의 상징입니다.》  가이드 말에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들의 천국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무지개  깃발은 다양성의 상징으로 동성애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거리에서 무지개 깃발을 단 주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게이공동체의 중심지입니다. 여기서 게이들은 자유롭게 자기들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카페나 길거리의 유흥가에서 여장을 한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첨 샌프란시스코에 오신 분들은 게이들의 모습에서 불쾌감을 가질 수 있기에 이번 관광코스에 넣지 않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해마다 4월말 게이축제가 열리는데 축제 때마다 대규모 게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게이들이 모여드는데 그 규모를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게이 퍼레이드는 사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게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인권보장을 호소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사다.  게이들의 퍼레이드를 두고 두 가지 부동한 시각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시장이다. 2007년 모스크바에서 게이 퍼레이드가 있은 후 당시 모스크바 시장이었던 유리 루쉬코프가 게이 퍼레이드를 《악마적 행사》라고 맹비난하면서 자신이 시장자리에 있는 한 다시는 모스크바에서 게이 퍼레이드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와 반면 브라질 상파울로 시장은 게이 퍼레이드는 상파울로 경제에 중요한 추진 역할을 한다고 했다. 2008년 상파울로 게이 퍼레이드에 세계 각국에서 350만 명이 모여들었는데 게이 퍼레이드로 13500여 개의 직업이 창출되고 관광업이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보통 게이들의 퍼레이드에서 모아지는 돈은 에이즈 환자 치료와 평화 운동에 쓰인다고 한다. 게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계속 따가운 시선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친구 같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나한텐 그런 선택을 위한 고뇌까진 필요 없겠지만 게이가 활보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관용의 도시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38    샌프란시스코 (제6편) 댓글:  조회:3959  추천:0  2013-05-29
                                                                                                                      미국 개척정신의 표상-금문교    섬을 떠나 유람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는 금문교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마침 석양 무렵이어서 금문교 뒤로 펼쳐진 태평양 바다와 하늘이 맞붙은 곳에 빨간 저녁놀이 걸려있었다. 그림 같은 경관이었다. 그 노을을 배경으로 금문교가 무지개처럼 해협 사이에 걸려있다. 장관적인 경관에 사진기 렌즈를 맞추니 갈매기가 날아든다. 너무나 멋진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관광객들 모두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 내외도 서로 번갈아 금문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노란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뻥한 모습을 보였더니 그 청년이 손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우리 내외를 사진 찍어주겠다는 고마운 제의라는 걸 알아차렸다. 연신 입으로 유일한 영어 밑천인 《땡큐》를 연발하면서 우리 내외는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미국을 여행하노라면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진해 나서는 고마운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의 고마운 소행에서 남한테 가벼운 서비스라도 제공하는 순간, 스스로 천사가 된다는 미국인들의 봉사정신을 읽게 된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관광지에 가서 연인들이나 부부동반인 관광객을 만나면 사진 찍어드리겠다고 한번 자진해 나설 것을 권고하고 싶다. 가벼운 서비스를 제공한 대신 밝은 웃음과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될 것이다. 밝은 웃음과 감사의 인사는 최상의 선물이다. 최상의 선물을 받으며 스스로 천사가 되는 순간을 얻는 셈이다.  총 길이가 2737미타이고 수면 높이가 67미타인 금문교는 건축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서 샌프란시스코  뿐만 아니라 미국의 상징으로 되었다. 금문교가 놓인 해협은 태평양과 만이 만나는 곳으로 간만의 차로 집채 같은 파도가 자주 일고 해류가 빠르며 수심이 120미터이다. 이런 곳에 현수교를 세운다는 것은 당시의 공법으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골드러시 후부터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놓자는 제의가 제기되었지만 당시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케이블 기술자이며 토목 기술자인 조셉 스트라우스의 출현으로 다리 건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조셉 스트라우스는 이미 400여개 다리를 설계한 사람이다. 금문교는 그의 마지막 걸작이다.    교량 건설에 투입 된 주요 자재만 해도 그 당시 단일 공사로서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콘크리트 300,000m3, 철재 류 82,600 톤, 직경 48mm 동선을 다발로 묶어 직경 92 cm 의 케이불로 만들었다. 2 개의 케이블에 사용 된 동선의 길이만 129,000 km. 지구 3 바퀴를 돌 수 있는 길이다. 한 케이블의 무게만도 24,500 톤, 이런 무게를 장비가 낙후한 70여 년 전에 227 m 높이로 들어 올려 다리를 만들었으니 금문교가 미국의 7대 불가사의 중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유를 이해 할만도 하다. 금문교 건설에 6개 나라 이민자들이 참가했는데 그 중 중국인 인부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금문교 건설에 참가했던 중국인 인부들이 당시 거주했던 지역이 바로 지금 도심으로 된 차이나타운이다. 금문교 건설로 미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생겨난 것이다.  금문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로 널리 알려지면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칫거리로 되고 있다. 1993년 그 해 자살자가 천명을 넘어선 후로 공식 통계를 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67미터 높이에서 시속 120킬로미터 속도로 떨어지면 4초 사이에 바다 속에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삶을 미련 없이 접고 순간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을 가, 아니면 이승의 삶에 회의를 느꼈을 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새 출발이었을 가? 생의 종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맞은 이들의 동기가 궁금해진다.   금문교가 개통되기 일 년 전 조섭 스트라우스는 심장마비로 애석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을 다리를 계속 건설하고 보수해야 한다는 당부보다도 신화는 계속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신화는 계속 되어야 하지만 아름다운 곳이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국의 개척정신의 표상이기도 한 금문교는 뉴욕의 자유 여신상 못지않은 명물로 해마다 9백만 명을 웃도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람선은 금문교를 넘어선 후 배전을 돌렸다. 이번엔 분홍빛 저녁노을에 물든 항구도시가 화폭을 펼치고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서서히 석양을 거두어내면서 황홀한 야경 전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37    샌프란시스코 (제5편) 댓글:  조회:3899  추천:0  2013-05-13
        《악마의 섬》   금문교 유람선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미국 서부 해안에서 가장 먼저 등대를 앉혔다는 펠리컨 섬이다. 이 섬의 이름은 큰 바다 새 일종인 일명 《사다 새》라고 하는 펠리컨(Pelican)이 많이 서식했다는데서 지어졌는데 흉악범들만 수용한 알카트래즈 형무소가 자리 잡으면서 초대 형무소 소장의 이름을 따서 알카트래즈 섬으로 이름이 바뀐다. 펠리컨 말이 나오니 언젠가 책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른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변 한 바닷가에 수천마리의 펠리컨들이 서식한다. 펠리컨들은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먹이를 잡아먹고 번식도 하면서 나름대로의 평화를 누리던 중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촌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물고기들을 잡아 통조림으로 만들면서 내장을 빼내 주변 강가에 버린다. 펠리컨들은 버린 내장을 받아먹으면서 사냥이라는 생존 법칙을 차츰차츰 잊어간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고기 내장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자 펠리컨들은 먹이가 없게 된다. 사람들이 언젠가는 물고기 내장을 던져주려니 해서 마을 주변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펠리컨들은 결국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몰살한다. 사냥이라는 생존 법칙을 잊은 펠리컨의 종말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환경보호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펠리컨 비극》이다. 인간의 침입으로 기인된 이 비극이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유람선을 따라오는 갈매기만 보이고 펠리컨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이 비극의 발생지가 바로 펠리컨 섬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갑자기 부두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물개가 떠올랐다. 부둣가에서 서식하는 물개들도 언젠가는 펠리컨 비극을 맞지 않을 가 근심이 앞선다.  유람선이 알카트래즈 감옥이 있는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섬의 원주민은 인디언이었는데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합병한 뒤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 섬에 미국 서부 해안의 첫 등대가 세워진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 400여명의 포로들을 수감하면서 미국의 감옥 역사가 여기서 시작을 고한다. 등대섬이 1909년에는 미 육군 형무소로 탈바꿈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마피아 등 조직폭력배에 의해 미국의 강력범죄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자 미국 정부는 강력범죄자들을 장기 수감할 장소로 알카트레즈 섬으로 택했다. 이때로부터 군사 감옥으로 이용되었던 알카트레즈 감옥이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를 비롯한 수많은 흉악범들을 수감하는 연방 형무소로 되었다. 알카포네는 1930 년대 암흑가를 지배한 미국 마피아의 대부로 한때는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1927년 한 해 총 수입이 1억 달러에 달해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던 그는 1939 년 7 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가석방 되었다. 출소 당시 그는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1947 년 알카포네는  플로리다의 한적한 어느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 당시의 병명은 매독과 폐렴 합병증이었다.   형무소가 폐쇄되기 전 20여 년간 도합 34명 죄수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죄다 성공하지 못했다. 탈옥자들은 다시 체포됐거나 사살되었는데 그 중 죄수 세 명만 요행 형무소를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탈옥자들이 섬과 거리가 불과 1마일도 안 되는 뭍에 올랐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없다. 3명의 탈옥자들은 해변 가에 신발만 남겨 놓은 채 종적을 감췄다. 탈옥에 성공해 멕시코 어딘가에 숨어 산다는 일설이 있지만 섬 주위의 물살이 빠르고 수온이 찬데다가 섬 주변에 상어들이 자주 출몰하기에 탈옥자들이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의 제물로 되지 않았으면 상어의 먹이 감이 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고 있다. 악명 높은 섬으로 이름난 이 섬을 《악마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악마의 섬》이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이 섬 이름을 바꾼 초대 형무소장 알카트레즈다. 그는 《악마의 섬》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이 곳은 잔인하다. 차가운 바닷물과 거센 파도 때문에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보이고 금문교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샌프란시스코 만을 한가롭게 떠다니는 요트가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방 뙤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면서 수감자들은 조용히 속삭인다. 고.》  일반 상식으로도 천혜의 비경에, 그것도 낭만의 항구에 살풍경인 흉악범을 수감하는 형무소를 앉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수감자들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보다 더 잔인한 형벌로 천혜의 비경을 보여준 것이다. 참으로 악마적인 발상이다. 수감자들에게는 천혜의 비경 그 자체가 악몽이었고 지옥이었을 것이다. 형무소에서 발생한 죄수에 대한 비인간적 취급, 자살, 자해 등 비화가 언론에 공개된 후 1963년 케니디 대통령 지시에 의해 형무소가 폐쇄되고 섬이 다시 항구의 명물로 이미지를 바꾸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행운이다.   이 섬은 마이클 베이 감독, 숀 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더록(The Rock)》으로 유명해졌다. 영화 《더록》 스토리가 펼쳐지는 주 무대가 바로 알카트래즈 형무소다. 가장 멋진 액션 영화로 각광받는 이 영화는 중국에서도 상영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 섬에는 등대와 형무소 내 죄수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섬을 관광하려면 최소 일주일전 예약을 해야 한다.        
36    협곡을 누비는 내 딸 댓글:  조회:3098  추천:0  2013-05-07
뉴질랜드 협곡에서 래프팅하는 내 딸과 회사 친구들의 장한 모습!
35    하늘을 나는 내 딸 댓글:  조회:4915  추천:0  2013-04-28
하늘은 저에겐 꿈이였습니다. 그 꿈이 뉴질랜드 하늘에서 펼쳐졌습니다. 단,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내 딸!
34    샌프란시스코(제4편) 댓글:  조회:4947  추천:1  2013-04-14
항구의 낭만  금문교 관광 유람선을 타는 39번 부두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와 롬바르드 꽃길을 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영화에 자주 등장해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명물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굴곡이 심한 산성(山城)이어서 급 경사길이 많다. 비탈길 교통수단으로 케이블카를 1873년 스코틀랜드 공정사가 설계했는데 지금은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하나의 관광 상품이라고 함이 더 적절할 것이다. 3불을 내고 케이블카를 타면 100년 전 케이블카 승차권 모조품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하나 관광버스로 움직이는 우리는 그저 차창 밖으로 내다 볼 수밖에 없었다.    롬바르드 꽃길(Lombard Street)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다. 27도 정도의 급경사진 곳에 5미터 간격으로 S자 형태로 굽이굽이 낸 내리막길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해 꽃길로 유명해졌다. 이 꽃길은 세계적으로 가장 꼬불꼬불한 길로 알려져 있다. 꽃길은 캘리포니아 개척시기 우체부가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언덕을 오르내릴 때 힘을 덜기 위해 꽃을 하나씩 꽂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곧추 내려오면 1분도 안 걸릴 거리인데 꽃 속에 묻힌 길을 따라 지그재그 내려오노라면 꽃 속에 묻힌 것 같은 착각을 가진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꽃은 없지만 꽃길 옆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꽃길이 샌프란시스코의 푸른 하늘과 거리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람선 승선 부두는 요트와 그림 같은 집과 가게들이 모여 있는 조그마한 부두다. 원래는 이태리계 어부들의 부둣가라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목조건물에는 갤러리, 선물가게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이 노천에서 파는 삶은 게라고 했지만 시간상 관계로 우리 일행은 서둘러 유람선에 올랐다. 이 부두의 신기한 구경거리는 선창가에 띄워놓은 판자위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는 물개들이다. 미국 해안선이나 부두에서 물개를 흔히 볼 수 있다. 물개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나라 관광객만 무서워한다고 가이드가 유머를 구사했다.  《정력에 좋다면 뭐나 다 먹는 한국 남자들을 가장 무서워한답니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만 보면 하고 비명 지르며 바닷물 속에 숨어버린답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고, 물개들은 관광객들이 웃고 떠들어도 상관없이 그냥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팔자 하나 기껏 늘어졌다》는 말 물개들에게 선물하고 부두를 떠났다.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유람선을 쫓는다. 갈매기는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려고 유람선 속도에 맞춰 관광객들 머리위에서 선회한다. 원래 날아다니는 새를 찍기가 쉽지 않은데 샌프란시스코의 갈매기는 유람선을 따라오기에 사진에 잘 담긴다.
33    청명절단상 댓글:  조회:4326  추천:0  2013-04-05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은 또한 전통명절이기도 합니다. 청명날 조상들의 산소에 가서 성묘하고 제사 지내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풍속입니다. 청명을 두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춘추시대 다섯 패왕의 하나인 진문공이 젊은 시절 19년이나 망명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자기 나라로 돌아온 진문공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날 자기를 따라다니며 뒤 시중을 들던 신하들과 친척들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면서도 일편단심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 개자추라는 사람에게는 그만 잊고 상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개자추는 진문공이 굶어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허벅다리 살점을 베내여 진문공의 허기진 배를 달래준 사람입니다. 개자추는 비록 랭대를 받았지만 명리를 따지지 않고 오늘의 산서성 개휴현 동남쪽에 있는 금산이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후에 진문공은 개자추의 모자를 찾아 금산으로 떠났습니다. 진문공이 사람들을 시켜 개자추 이름을 부르면서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지만 개자추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 지방 사람들은 진문공에게 개자추는 효자이기에 산에 불을 놓으면 어머니를 업고 산에서 나올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진문공이 들어보니 그 말에 도리가 있는지라 신하들에게 명하여 산불을 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밤낮 사흘동안 불이 붙어도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진문공은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사람을 보내 찾아보도록 하였습니다. 헌데 공명을 따지지 않는 개자추 모자는 산 속에서 나올 념을 하지 않고 한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었던 것입니다. 죄송스러운 생각을 가진 진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금산에 안장한 후 그 산 이름을 개산으로 고쳐 영원히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금산에 불을 놓던 그 날이 바로 24절기의 청명 전날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개자추 모자를 추모하여 해마다 청명전날이 돌아오면 불을 삼가 찬 음식을 먹었고 그들 모자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청명을 맞으면서 청명의 유래와 공명을 따지지 않는 개자추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니 다른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나라 때 적공(翟公)이란 사람이 벼슬자리에 오르기 바쁘게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벼슬을 그만두자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문 앞은 참새 잡이 그물을 쳐놓을 만큼 쓸쓸해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다시 벼슬자리에 오르자 그의 집 문턱이 다슬 지경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자기의 허벅다리 살까지 베여주고는 궁지에 빠졌던 그 사람이 나중에 왕으로 되어 봉록을 주려고 하여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개자추의 이야기로하여 남이 역경에 처했을 때 그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돕는 것이 진심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반대로 벼슬자리를 보고 철새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두고 [재상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재상이 죽으면 문전이 썰렁하다]는 풍자가 나왔을런지도 모릅니다.   청명절에 즈음하여 세월의 이끼가 앉은 옛이야기를 떠올려보면서 오늘의 인간상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게 됩니다. 권력과 부를 척도로 삼고 [재상집 개가 죽어도 문상을 가는] 그런 사람이 날로 적어지고 공명과 그 어떤 보상을 따지지 않고 역경에 처한 사람을 진심으로 도와 나서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32    작가의 령감 댓글:  조회:3656  추천:0  2013-03-31
 십년 전 대학에서 대학생들과 대화를 가진적 있다. 당시 대화의 주제가 “작가의 령감”이었다. 필자가 창작경력에 대한 소개를 마친뒤 바로 질문 답변 절차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누구나 글은 쓸 수 있지만 작가다운 글은 못 쓰는데 대체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작가님의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17살부터 시, 소설, 연극, 시나리오, 칼럼, 기행문을 써오면서도 필자는 작가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도 못했던차라 인차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이고나서 필자는 생각나는대로 답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작가에 대한 정의를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입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이렇게 허두를 뗀 필자는 대충 작가에 대한 소견을 피력했다. 작가는 모든 것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삼라만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하늘의 태양, 지어 꽃잎에 맺힌 이슬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영혼과도 또한 하나님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가능한 것은 작가가 대화를 통해 계시를 받고 창작 충동을 받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버님(김철)은 당대 원로 시인이다. 아버님은 어떻게 해야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학도들의 질문에 “시인이 되려면 남다른 시각과 느낌을 가져야 한다.”고 답한적이 있다. 남다른 시각이라면 시인다운 시각이란 말인데 그런 시각을 갖추어야만 시인다운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시인과 령감을 언급하면서 아버님은 자작시 를 예들었다.    대장간 모루우에서  나는 늘  매를 맞아 사람이 된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정열  뜨거울 때 나는 매를 청한다  맞을 때는 미처 몰라도  맞고 나면 그 매값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이 식을 때  노상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시인의 눈에는 대장간 모루위에 놓인 쇠붙이가 그냥 쇠붙이로 보이지 않고 고된 인생살이에서 삶의 이치를 터득해 가는 자신을 찾아본 것이다. 이런 시각적인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시인과 일반인과의 차이다. 시각적인 차이로 느낌도 다를 건 당연한 일이다.     시인다운 시각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필자의 아버님은 직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시인이다. 돈보다도 사색의 빈곤, 그 고통이 심하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다. 추억에는 백만장자지만 사색에는 참말 거지다. 그래서 애써 사색의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시인다운 시각은 깊은 사색에서 온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 사색이 동반되어야 시적인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   아버님은 문화혁명시절 4년 옥살이를 하면서도 감방에서 사색을 멈추지 않았고 시를 구상하는 비범한 창작열정을 보였다. 아버님은 “내가 자살을 하거나 정신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가족의 드팀없는 믿음외에도 내 맘속에 항상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진짜 시에 “신들린” 분이셨다.    “부전자전”으로 필자가 아버님 뒤를 이어 작가가 된데는 유전자보다도 아버님이 항상 쫓는 집요한 사색, 그 사색이 동반한 창작열정이 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전에 올림말을 보면 령감이란 사유의 일종인데 일명 영감사유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창조적인 사유로서 간단하게 말하면 창의적인 기발한 생각이다. 작가의 생활체험, 소유한 지식, 끈질긴 추구, 깊은 사색의 복합체가 승화를 이룬 것이 바로 작가가 얻는 령감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계시”다. “신의 계시”를 “영적인 계시”라고도 하는데 작가가 생활실천과 사색을 통해 받는 계시, 느낌, 또는 창작 충동도 역시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계시”가 아닐가.  작가가 령감을 얻는 방식 또한 각양각색이다. 어떤 작가는 미술, 음악, 영화 등 다른 쟝르의 작품에서 령감을 얻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꿈을 통해 령감을 얻는다고도 한다. 그 중 많은 작가들은 산책하면서 또는 명상에 잠겨 령감을 얻는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체험이다. 필자의 경우를 보면 창작의 령감을 얻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바로 생활체험과 사색이다.  필자의 작품 중 중편소설 “아 동년”은 필자의 동년의 추억을 바탕으로 씌어진 자서전체 소설이고 중편소설 “청춘약전”은 필자가 지식청년시절 의 생활체험과 주변 친구들의 운명을 다룬 글이며 3대 여성의 운명을 다룬 시나리오 “민들레꽃”은 역사공부에서 얻은 사색과 품을 들인 인물취재에서 얻어진 작품이다. 10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계열소설 “수도권의 촌놈들”은 필자가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전근된 후 쓴 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후 수도에 진출한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그렸는데 이 소설 역시 사색을 동반한 작가적인 체험에 근거해 씌어진 것이다. 아래에 중편소설 “정신병리학 연구”를 례들가 한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을 쓸 충동은 정신병원 원장으로 있는 친구를 찾아 정신병원에 갔다가 목격한 장면에서 받았다. 정신병원에 가 보니 한번 특이한 환경인 정신병원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환자들인 입원한 병동에 들어서기 바쁘게 한 늙은 환자가 군례를 붙혔다. 그 환자는 전쟁시기 포소리에 놀라 정신이 돌아버린 분이었다. 여자 병동에 가니 한 여인이 연지곤지 바른 얼굴로 열심히 문화혁명시기 추던 “충성무”를 추고 있었다. 돈에 환장해 정신이 돌아버린 한 환자는 쉴새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동전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이런 환자들을 보는 순간 필자는 정신병 환자의 사유는 그가 미쳐버린 그 시대에 머물러 있고 정신병원은 그냥 병원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상인들은?   원장인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정상인도 여러가지 정신질환을 안고 있다. 단 그가 정상인인 것은 그가 정신 통제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통제력을 잃으면 정신병환자다.” 정신병원에서 받은 계시, 느낌, 충동으로 필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상들을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게되었고 물질의 풍요속에 병들어가는 심령의 상처를 짚어내게 되어 나중에 그것이 소설화 되었다. 소설이 발표된 후 필자는 소설을 장막연극으로 각색했다. “망각된 인간들”이란 제목으로 된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필자는 작가의 령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생활실천과 사색은 작가의 사명감에서 온다고 본다. 작가의 사명감에 대해 작가들마다 다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지만 필자 생각에는 작가의 사명감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안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그리는 것이라고 본다.  20년전 필자는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한국의 조정래 소설가를 두 번 만났다. 편한 자리에서 나누던 대화 중 조정래 소설가는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는 그냥 고개 숙이고 묵묵히 밭길을 걷는 농부와 같다.”고 했다.   농부는 묵묵히 밭길을 걷지만 가을을 꿈꾼다. 작가 역시 농부마냥 창작에서 수확의 계절을 꿈군다. 천재적인 발명가 애디슨의 명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천재는 99%의 땀과 1%의 령감으로 이루어진다.”                                                                                  (두만강 사이섬에서)  
31    샌프란시스코(제3편) 댓글:  조회:3653  추천:0  2013-03-27
          미국 속의 《중국》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트윈픽스 언덕이 아니면 도심 북쪽 항구에 있는 선착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선착장으로 가려면 도심에 자리 잡은 차이나타운을 경과하게 된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탐내는 조각을 이고 사자 두 마리를 양옆에 거느린 전통적인 중국풍의 솟을 대문이 차이나타운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솟을 대문엔 손중산 선생이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편액이 붙어있다.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 시내 도심에서 46개 거리를 정자(井)형으로 가지고 있는 미국 최대의 중국인 밀집지역이다. 중국 특색의 유명 잡화점, 레스토랑, 식료품 시장, 불교사원, 소형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샌프란시스코 지명과 관련해 중국인들은 다른 유래를 갖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삼번시(三藩市)》라고 불렀다. 《삼번시》라고 부르게 된 것은 최초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중국인들 중 광동인들이 많았는데 광동 말에 삼번이란 말이 《샌프란》 발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광동 출신인 중국 민주혁명의 선구자인 손중산 선생도 저서와 서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삼번시》라고 했다. 골드러시가 터지면서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인들에게 《금산(金山)》으로 불리게 된다. 글자 그대로 금이 산을 이룬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호주 멜버른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 곳이 《신금산(新金山)》 지명을 갖게 되는데 멜버른과 샌프란시스코를 구별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던 《금산》 앞에 오랜 《구(旧)》를 붙여 《구금산(旧金山)이라고 부르게 된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지명 사용에서 미국 국무성뿐만 아니라 중국 관변 측 문헌과 지도, 해외 파출 기구 명칭에서도 《삼번시》와 《구금산》이란 지명을 그냥 쓰고 있다.                                                 (1851년의 샌프란시스코) 《중국인들은 세계 그 어디에 가나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기에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됩니다. 그 중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세계적인 규모로 알려져 있는 만큼 여기에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은 미국이라기보다 입니다.》 가이드가 아주 서투르게 중국이란 단어를 발음했지만 그냥 기분 좋게 들렸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도중 진행된 자아소개에서 우리 내외가 북경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가이드는 갑자기 마이크를 나한테 넘겼다. 중국인에 의한 중국 소개란 뜻이다. 다행히도 사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대한 소개를 보았기에 중국인으로서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타운입니다. 기재에는 골드러시가 터지면서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고 하지만 사실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정착한 중국인은 1807년 중국의 비단, 도자기, 연초 판매차로 이곳을 찾은 중국 광동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두를 땐 나는 미국 산업발전과 맥락을 함께 한 중국인 이민사를 간추려 소개했다. 미국 동서를 잇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과 골드러시로 중국인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대거 미국에 정착한다. 그 때로부터 중국인 이민자들은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가진 상업민족의 특징과 대륙적 기질, 강한 정체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지금은 미국 전체 인구의 1%를 차지할 정도로 그 힘이 늘어나고 있다. 정계만 봐도 현재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해있는 아시아계 정치인들이 대개 중국계 아니면 일본계인데 중국계가 다수를 차지한다. 《미국의 산업발전에서 획기적인 이정표로 되고 있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 광산 개발, 후버댐 건설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대륙횡단 철도와 후버댐이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쌓아올린 두 번째 만리장성에 비유한다면 이제 곧 보시게 될 샌프란시스코 상징인 금문교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항구도시 1번지에 걸어놓은 바다위의 만리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수가 터졌고 가이드는 두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김 작가님이 안내를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이드 말을 내가 롱으로 받았다. 《팁을 주면 고려해 보죠.》    
30    꽃향기 봄내음! 댓글:  조회:3574  추천:3  2013-03-16
   봄기운이 넘치는 계절입니다. 3월부터 5월초까지 미국 서부 남쪽 샌디에고 북쪽에 위치한 칼스배드의 태평양 연안에서 꽃의 향연이 벌어집니다. 50 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서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칼스배드 플라워필드입니다. (Flower Fields Carlsbad) 300만 송이 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지상 최대의 화원에서 꽃향기, 봄내음 함께 만끽합시다!
29    샌프란시스코(제2편) 댓글:  조회:3734  추천:4  2013-03-10
  거듭 나는 도시 노래 감상에 이어 가이드의 샌프란시스코 안내말씀이 시작되었다. 녹음된 가이드 안내말씀을 글로 옮기면 대략 이러하다. 샌프란시스코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유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스페인 탐험대에 의해 처음 발견된 것은 1769년이고 1776년부터 스페인 이민들의 개척지가 된다. 1806년 러시아가 이곳에 초소를 세우고 알래스카 보급지로 사용. 1821년 멕시코에 귀속되었다가 1846년 미국 영토로 탈바꿈한다. 당시 인구가 천여 명, 그러나 1850년 샌프란시스코가 시로 승격될 때 인구는 2만 5천명. 골드러시로 금융업, 무역, 광산, 서비스업이 발전하면서 태평양 연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 변모. 급성장하던 도시가 1906년 진도 8.3 의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다. 그 후 불과 10 년도 안 되어 샌프란시스코는 천혜의 비경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난다. 1915 년, 샌프란시스코는 지진으로부터의 성공적인 복구를 기념하기 위하여 파나마, 태평양 국제 박람회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어려움을 겪었고 대공황시절에는 오클랜드만과 금문교를 건설해 위기를 탈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조선소로 도시발전이 박차를 가한다. 그 뒤 1950~60년대에 대대적인 도시 정비를 하였고 1970년대 초 다운타운의 주요 대형건물들이 완공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반도 남쪽의 산타클라라를 중심으로 첨단 전자산업단지인 실리콘밸리가 형성됨으로써 첨단 기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미국 내 인기도시 베스트 1위를 계속 차지한다. 《샌프란시스코를 칭하는 말이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 , , , , , , 이밖에도 , 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느 평가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를 이제 여러분들이 직접 보시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우리 내외한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 가? 가이드는 우리 내외처럼 처음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의 궁금증을 달래기엔 샌프란시스코 중심에 솟은 트윈픽스라고 불리는 언덕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해지기 전에 많은 곳을 둘러 봐야 하기에 먼저 한 눈에 샌프란시스코가 들어오는 트윈픽스 코스를 정했다고 했다. 트윈픽스 언덕은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을 360도 각도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전망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평양을 마주한 샌프란시스코는 만을 가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북서쪽으로는 유명한 금문교와 알카트래즈 섬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환한 색상의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보였다. 남서쪽으로는 오클랜드 항구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 만의 가장 긴 다리인 샌마테오(San Mateo)다리 까지 보였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지금 보시는 시내의 인구는 약 75만 정도이고 오크랜드, 산호세 지역까지 포함한 광역 대도시권 인구는 약 700여만 명으로 미국 서부 지역 태평양 연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버금으로 두 번째로 큰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3월이 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꽃 축제가 벌어져 도시 곳곳이 아름다운 꽃과 그 향기로 가득해진다고 하니 겨울철에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아쉬움이 크다. 샌프란시스코는 《안개의 도시》란 말과 같이 여름철에는 안개가 많이 낀다고 한다. 안개만 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안개가 없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어 다소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트윈픽스 언덕에서 샌프란시스코 야경 구경은 최고의 볼거리라고 하지만 밤에는 다른 코스가 정해져 아쉬운 대로 언덕을 내려왔다.
28    랑만의 도시 샌프랜시스코(1) 댓글:  조회:3562  추천:2  2013-03-06
                                   노래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가이드가 틀어주는 경쾌한 리듬의 노래로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시게 되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다세요. 샌프란시스코에 가시게 되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날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는 이들 위해 여름철에 사랑의 모임 있어요.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달아요. 신기한 설렘 온 나라에 넘치고 사람들은 활기에 차 있어요. 새로운 생각 가진 새 세대가 탄생했어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다세요. 샌프란시스코에 오시게 되면 여름철에 사랑의 모임 있어요.》   노래 제목이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가 가까워 오자 가이드는 우리 일행에게 《노래 공부》부터 시켰다. 가이드는 도미하기 전 한국에서 음악다방을 경영한 이력자여서 음악을 달관한 분이었다. 음악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사랑은 광적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 노래는 말이죠, 스콧 맥켄지라고 하는 음악가가 1967년에 발표해 대 히트를 쳤는데 지금까지도 샌프란시스코를 노래한 팝송 중 토니 베넷의 노래 와 함께 애창곡 중 상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경쾌한 리듬을 탄 애정가요 같은 이 노래는 사실 반전과 세계 평화를 호소하는 노래인데 당시 히피 음악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는 60년대는 반전, 운동과 히피의 평화주의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던 때였고 샌프란시스코는 히피와 평화주의자들의 중심지였다. 히피, 지금은 많이 색 바랜 말이다. 특히 지금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다. 중국에서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도 히피란 글에서나 읽힌 존재였을 따름이다. 통념적으로 히피(hippie)는 1960년대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기성의 사회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에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일상적이 아닌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청년세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윗세대와는 다르게 전쟁을 겪지 않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 세대로 현실을 외면한 채 행복한 유토피아를 꿈꿨던 히피들은 순진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사랑, 평화, 자유를 꿈꾸던 그들의 정신만은 인정을 받고 있다.    
27    라스베가스 (제5편) 댓글:  조회:3983  추천:0  2013-02-21
                                             호텔 카지노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호텔은 반드시 1층 카지노를 통해야만 객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 속담으로 풀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게》 꾸민 곳이 카지노 호텔이다. 호텔 문을 들어서니 영화에서 자주 보는 광경이 필자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호텔 카지노에 가장 많이 배치된 것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만져볼 수 있는 슬럿머신이다. 그 외 작은 공을 회전시켜 숫자나 색을 맞추는 룻렛, 주사위를 던져서 하는 박카라, 트럼프로 내기하는 포커판도 있다. 카지노에 없는 것이 딱 두 개인데 그것은 창문과 시계다. 창문이 없으니 날 밝은 줄 모르겠고 시계가 없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곳이 바로 카지노다. 한마디로 카지노는 시간 개념이 배제된 곳이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 안 하면 바보》라고 했으니 바보 면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손을 대봐야지. 필자 내외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슬럿머신을 택하기 시작했다. 한 번 누르면 20불씩 나가는 건 도저히 할 수 없고 5불씩 나가는 것도 잠깐이면 몇 백 불 나가니까 포기해야 했고 1불씩 나가는 것 역시 초보자에겐 부담스럽고 50센트나 25센터는 숙련된 담에 하는 것이고 5센트도 별로 파악이 안가서 결국에는 필자 내외가 택한 것은 우리 돈으로는 1전에 해당되는 1센트였다. 한 사람이 10불씩 나눠 갖고 시작한 슬럿머신인데 아내는 거푸 10분도 안되어 10불을 그냥 기계에 넣어주고 말았다. 카지노에서 《돈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흡연이 허용된 카지노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돈이 날아난다는 뜻이다. 필자는 아마 타고난 운이 있었는지 슬럿머신 단추를 누를 때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짧게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100배 되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소리만 요란했지 판돈이 적어 딴 돈이 적었다. 1센트 백배면 고작 10불이다. 1센트 판돈으로 노는 놀이에서 한번에 100배를 딴다는 것은 아주 운이 붙었다는 것으로 된다. 100배를 딸 때마다 곁에 앉은 백인 할아버지가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굿!》을 연발했다. 아내는 아예 내 곁에 붙어 앉았다. 필자가 구경만 하지 말고 다른 기계에서 해보라고 하니 아내는 운이 없어 돈만 까먹기에 포기했다고 한다. 인젠 필자에게만 승부가 걸렸다. 첨엔 운이 좋았다. 10불로 시작한 게임이 80불로 늘어났다. 이때 아내가 제동을 걸었다.   《피곤한데 그만 하고 갑시다.》  《아니야. 지금이 기계가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야.》  기계가 열을 올린다는 말은 가이드한테서 들은 말이다. 가이드는 호텔 카지노에서 슬럿머신을 선택할 때 손으로 만져봐서 기계가 뜨거운 것, 기계 앞에 놓인 담배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한 것을 택하라고 했다. 기계가 열이 올랐다는 것은 누군가 한참 놀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담배꽁초가 많다는 것은 누군가가 기계 열만 올리고 따지 못해 애꿎은 담배만 연신 태웠다는 증거로 된다고 했다. 가이드는 열을 올렸지만 돈이 안 나온 기계를 선택하면 돈 잃을 확률이 많이 떨어지고 오히려 돈을 딸 확률이 높아진다고 계시를 주었다.   필자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런 기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내가 또 제동을 건다.  《가이드 말이 판돈 회수하면 무작정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당신은 판돈에서 8배나 더 땄어요.》\  아내가 아주 《쉬》를 날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본 《도박 지침》에 바로 《무작정 일어나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 지침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시간 이상 하는 것 보다는 5분 이내 따든지 잃든지 그만 두는 것이 돈을 따는 길이다. 오래하면 한 시간 이상 놀면 따는 사람 보다 잃는 사람이 훨씬 많다. 땄을 때 그만 두어야 한다. 딴 금액이 조금씩 줄고 있으면 이미 본전 보다 조금이라도 딴 상태라면 무조건 일어서야 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그냥 단추를 눌렀더니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확률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한다. 흘끔 뒤 돌아보니 어느새 자리를 떴는지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먼저 객실로 올라간 것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필자는 담배 한 대 붙여 물고는 웨이터에게 맥주 한 병 청했다. 호텔 카지노에선 술과 음료수는 무료다. 단, 웨이터에게 팁으로 1불 주어야 한다. 맥주 한 모금 넘긴 후 필자는 도정신하고 슬럿머신에 마주 앉았다. 운 좋게 100배 되는 판이 여러 번 터졌다. 딴 돈은 150달러 선을 넘어섰다. 판돈에서 15배를 딴 셈이다. 이 때 낯모를 50대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내 곁에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굿!》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얼굴 모양을 보니 동양계였다. 필자가 답례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 사람이 나한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카지노 거지》다. 《카지노 거지》란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집으로 갈 수 없는 신세지만 그냥 동냥으로 카지노를 노는 도박중독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창 열을 올리는 판에 《카지노 거지》가 나타났으니 재수 없는 일이다. 호주머니에 있은 잔돈 내팽개치듯 주어버리니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굽실거린다. 어서 썩 꺼지라고 손을 홱 내저으니 입으로 《땡큐!》를 연발하면서 물러간다. 그 녀석 때문인지 그 뒤로 필자의 도박 운이 내리막길을 걷는다.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드물어지고 딴 돈 액수가 줄어든다. 이럴 때 《한 번만 더, 한 번 더》 하는 식으로 주춤하지 말고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도박 지침》이 가르치고 있지만 필자는 그 가르침을 무시했다. 한 것은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드물어지는 대신 대박의 《7777》 숫자 맞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숫자가 돌아가다가 멈춰서는 순간마다 기계는 단박 대박이 터질 듯 굉장한 소리를 냈다. 이것이 도박심리를 자극하는 줄 모르고 필자는 곧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연신 단추를 눌러댔다. 돈 액수는 곤두박질하듯 순식간에 본전에 가까운 선으로 떨어졌다. 에라, 대박은 그만두고 몇 십 불만 따고 가자. 《도박 지침》에는 이런 심리를 도박에 빠져드는 심리, 종국에 가서 돈을 몽땅 날리게 되는 심리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필자로서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단계가 도박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단계》라고 한다. 필자는 딴 돈 다 잃고 판돈 10불마저 거의 밑바닥이 날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 대박의 숫자에 육박하면서 굉음이 터질 듯 말듯 할 때 필자는 판돈마저 몽땅 날렸다. 단박 대박이 터질 순간이라 필자는 지갑을 넣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때면 사람이 도박을 노는 것이 아니라 도박이 사람을 삼킨다. 온 호주머니를 다 들췄으나 지갑이 없었다. 분명 아내가 뽑아간 것이다. 동동 발을 구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지노를 하는 사람이 몇 명밖에 안되었는데 우리 관광 팀에 속한 분들이 아니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10불이라고 꾸고 싶은 생각까지 치밀었다. 이 날 필자는 도박의 유혹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했다. 돈을 넣으라고 깜박거리는 슬럿머신을 멀거니 내려다보면서 필자는 언젠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내가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여인이 있는데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카지노를 찾았다. 남편은 재미로 놀다가 어디론가 자리를 뜬 사이 단박 대박이 터지려는 순간 그 여인은 필자 경우처럼 돈이 떨어졌다. 다만 그 여인과 필자의 판돈 액수가 다를 뿐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돈 있는 여인인지라 판돈은 3천불이었다. 그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남편을 찾았지만 남편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다. 그 순간이 사람 말리는 순간이라고 했다. 남편을 《죽일 놈, 살 놈》 하고 속으로 욕하고 나중에 저주까지 했지만 기다리던 남편이 나타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백인 노인에게 자리를 내 주었는데 그런데 이럴 수가. 그 자리에 앉은 백인 노인이 몇 분 만에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액수는 5만 불이였다나. 그 여인은 그냥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단다. 후에 그 여인이 하는 말이 대박이 터지는 순간 눈앞에 벼랑이 있으면 떨어져 죽을 생각까지 들었단다. 도박 중독자는 대체로 크게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즉, 희열, 패배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절망! 그 여인은 이 세 단계를 다 거쳐본 분이다. 필자의 경우 그 날 아내가 지갑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대박을 기대하면서 줄기차게 돈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리곤 허망에 빠지고 나중엔 절망도 절감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내가 그 날 지갑을 빼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긴 그 당시 속으로 아내를 실컷 욕했지만.   그날 아쉬운 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필자는 그만 카지노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우리 관광 팀이 투숙한 호텔은 여덟 개 호텔 건물에 도합 5천여 개 객실을 가진 호텔인데 건물마다 일층 카지노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도박에 정신 팔다나니 필자가 투숙한 객실이 어느 건물에 속했는지 알 길이 없다. 카지노 호텔은 며칠 전 미리 예약해야 하기에 여행사측은 객실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관광객 이름으로 예약한다. 때문에 호텔 측에 필자의 기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있다고 해도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무작정 절로 방을 찾아야 했다.   시계는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큰 카지노에 필자만 남았다. 필자가 카지노를 내려올 때 기억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 출구나 다 똑같이 생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다. 객실을 찾지 못하면 큰일이다. 밤을 새야하는 것을 둘째 치고 관광 팀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필자는 진짜 라스베가스 《미아》로 남게 된다. 한참 헤매고 다니는데 호텔 종업원 복장을 입은 흑인 남성이 구세주마냥 필자 앞에 나타났다. 뭐라고 묻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객실 키를 꺼냈다. 호텔 종업원은 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뭔가 더 내놓으라고 한다. 필자가 호주머니를 들추니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객실 배당 시 가이드가 준 것이었다. 호텔 종업원은 그 종이를 보더니 《오케!》를 부르면서 필자를 안내했다. 아마 그 종이에 객실이 속한 건물 이름이 적혀 있었던 모양.  결국 그 종업원 덕으로 필자는 간신히 카지노 《미아》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아내가 눈을 흘겼지만 필자는 피곤하지만 작가로서 도박꾼 심리를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경험 한번 했다고 생각하면서 꿈 나락에 빠져들었다.                                        나오면서     라스베가스를 나오면서 나름대로 라스베가스에서 받은 인상과 가이드 소개를 정리해 보았다.  《라스베가스가 있는 네바다주는 표고가 높고 습기가 적고 기온이 높아 고혈압이나 당료 환자들이 살아가기엔 최적의 환경. 그래서 은퇴한 노인들이 몰려온다. 그들에게는 라스베가스가 천국.》  《과거에 네바다 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였다고 한다. 주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되기도 하고, 핵 실험장으로 대여하기까지 했다는데 지금은 라스베가스가 있어 가난의 모자를 벗어버렸다.》 《절제가 강요되지 않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은 파괴될 수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삶 위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부가 축적되고 있는 라스베가스는 그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적 도덕률의 전형, 희망과 실망, 절망이 공존하는 곳.》 《7시가 넘어 눈을 떠 아침 창문을 여니 어젯밤의 그 도시는 간데없다. 여느 도시와 달리 출근길 북적대야 할 거리에 노숙자 한두 명 어슬렁댈 뿐, 인적도 차량도 없다. 간 밤 카지노 기계 앞에서, 온갖 화려한 쇼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불태우고 동트는 태양 아래 허망하게 서있는 도시를 뒤로하고 떠나왔다-어느 여행자의 일기.》  《공항에 들어오는 입국 승객들은 하나같이 희망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러나 바로 위층의 출국하는 승객들 모두 하나 같이 씁쓸한 표정으로 이곳을 떠나간다.-한 외국인 관광객 소감》  《폭파되어 역사 속에 사라진 유명 호텔 자리에 더 멋진 호텔이 들어서는 라스베가스는 무한 성장의 도시!》   이 글이 라스베가스를 떠나는 내 마음에 들었다. 라스베가스의 유명 호텔들은 폭파,  신축, 또 폭파, 다시 신축을 거듭했다. 세계적으로 초호화 호텔인 알라딘 호텔, 벨라지오 호텔, 베네시안 호텔이 그 실례로 된다. 어느 시인은 라스베가스를 《불모의 땅 사막위에 핀 번영의 꽃》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사막의 오아시스로 변모한 축복의 땅》이라고 했다. 필자는 시인이 아니어서 화려한 문구보다도 그저 라스베가스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도시, 그냥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하도록 철저히 계획이 된 도시》라고 라스베가스를 이름짓고 싶다.   
26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댓글:  조회:3736  추천:2  2013-02-09
                                                 (지난해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맞은 음력설)                                                                   새해를 맞는 시점에 (조문판) 서정옥 주필님으로부터 음력설 관련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음력설 풍속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그 부분은 민속학자들이 쓸 몫이기에 제가 무슨 글을 써야하는가를 잠간 고민했습니다. 해마다 쇠는 음력설, 저는 나름대로 설맞이를 해왔습니다. 우선                                            고향이야기를 떠올리고    음력설을 계기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 대류동이 시작됩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중국의 전통명절인 음력설 연휴에 연인수로 약 20여억명이 귀성길에 올랐습니다.  태여나서 자란 고향, 고향은 어디까지나 파란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과 성스런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하기에 고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고향이란 말은 사전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_ 뜻풀이 돼 있습니다.  자기가 태여나 자란 곳이라면 저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일본에서 태여난 아버님 경우엔 고향은 출생지인 일본 시모노세끼이고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 치면 할아버지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가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머님의 경우도 출생지로 치면 연길시 봉림동이 고향이고 조상들이 살던 곳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입니다.  이럴 듯 우리 가문의 탯줄은 반도의 나라에서 현해탄 너머 섬나라로, 그 섬나라에서 다시 반도를 거쳐 어마어마한 대륙에 이릅니다.  시인인 아버님의 말을 빈다면 “해_ 솟는 아침의 나라(한국)에서 보따리를 지고 떠난 나그네가 태양이 작렬하는 섬(일본)에서 달덩이 같은 아들을 얻고 숲 바람 서늘한 대륙(중국)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게 된 셈”이니_ 우리 가문으로 말하면 지금 동북 아세아의 주역으로 부상된 세 나라가 다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에겐 눈을 감으면 지척에 다가오는 것이 고향이요, 눈 뜨면 저 하늘 은하수마냥 아득한 것이 고향이라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술 한잔 하고 들어올 때마다 감 몇 개를 사 오셨습니다. 겨울에는 언 감을 사 오고 여름에는 곶감을 사 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할아버지는 왜 감만 사 오는가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먹고 먹어도 가장 싫증이 안 나는 게 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이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은 감을 너무 먹고 배탈을 만나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배침까지 맞은 뒤로는 감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감만 사 왔습니다.  1989년 한국 방문차 할아버지 고향집을 찾아 뒤 뜰에 있는 세 그루 감나무를 보니 할아버지가 감만 사 온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선 감은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겐 감 맛은 그대로 고향의 맛이였을것입니다. 비록 과묵한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감으로 손자들에게 못 잊을 고향을 맛보였던것입니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한스러움만 남는다고 아버님은 "고향이 원수인 줄을 미처 몰랐네"라고 고향에 대한 애수를 읊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설이 오면 어쩔수없이 떠올리게 되는것이 고향이야기입니다.                                                   고인을 추모하고    음력설맞이에서 빼놓을수 없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인을 추모하면서 지내는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에 따르면 차례는 1년에 네 번, 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음력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설날 제사, 4월의 한식, 8월 한가위 추석제사, 겨울의 동지 제사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해마다 조촐한 차례상을 차리고 청명, 추석, 양력설, 음력설 이렇게 네 번 차례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차례를 지낸다고 하니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믿지못하겠다는 눈빛이였습니다. 지금 세월에 무슨 제사? 한국도 아닌 중국에서? 믿거나 말거나 저는 부모님을 본받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제가 마련한 차례상에는 과일, 사탕, 과자, “육,해,공군 요리”(할머님과 장모님이 즐겨드시던 닭고기는 “공군”, 할아버지가 즐겨드시던 해산물은 “해군”, 장인어른과 큰고모, 작은 삼촌이 즐겨드시던 돼지고기는 “육군”)가 각기 한접시 오르고 할아버지와 장인어른, 삼촌이 즐겨드신 흰 술, 할머니와 장모님, 큰고모에 올릴 포도주나 음료가 준비됩니다.  아주 간소한 차례상입니다. 책에서 본 차례상 규모나 배열순서를 보면 제가 마련한 차례상은 차례상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허지만 저의 어머님은 상차림보다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차례상을 차리고 제를 지내게 된데는 리유가 있습니다. 리유라면 제를 지낼 산소나 고인의 납골을 보관한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3년제를 연길시 부르하퉁하 강변에서 지냈습니다. 광복이 나서 할아버지는 솔가해 고향으로 가려다가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그냥 환고향하지 못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일본, 대만, 중국땅을 전전하신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다시 못 간 고향에 넋이라도 그냥 가시라고 우리는 강가에서 제를 올린 뒤 할아버지 납골을 강에 띄웠습니다. 부르하통하가 흘러흘러 두만강으로 가고 그 두만강이 흘러흘러 조선의 동해로 가니 동해면 어떻고 서해면 어떠랴. 다 고국의 바다니 물결에 실려 언젠가는 고국산천 그 어느 기슭에라도 대일 테지. 그날 우리는 강물에 담배도 띄웠습니다. 고향 가시는 길에 지치면 담배 쉼이라도 하며 가시라고.  그 뒤로 고인이 된 분은 3년제를 지낸후 할아버지 뒤를 따라 환고향하라고 납골을 강에 뿌렸습니다. 청명, 추석이 오면 남들은 산소나 납골을 모신 곳에 가서 제를 지내지만 우리는 그냥 집에서 차례상 차려놓고 고인들을 추모하게 되었습니다.  제를 지낼 때 첫 잔은 모든 고인들에게 올립니다. 그 담 잔은 어머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 뒤로 저의 할아버지, 할머니, 장인어른, 장모님 순으로 이어집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원으로 이어지기에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간단한 “대화”를 합니다. 해마다 “대화” 내용이 다릅니다. 간단한 “대화”지만 고인이 생전일때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내용은 그냥 맘속에 묻어둡니다만 한 례만 든다면 저의 딸이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 장모님과는 “장모님_ 키워주신 저의 딸이 회사원이 됐습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_ 말꼭지를 떼고는 계속 “저의 딸을 예뻐해 주십시오.”로_ “대화”를 마쳤습니다.  제를 지낸 그 날은 고인들과 함께 보내는 기분입니다. 지난해 음력설은 온가족이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고인들에게 제를 지냈습니다. 애들도 고인들에게 술을 붓고 절을 올렸습니다. 애들이 장차 저를 본받아 고인들의 제를 지내달라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애들이 저의 뜻에 따라줄지는 미지수입니다.                                                      덕담을 나누고    고인들과의 "대화"를 마치고는 현대인들과 덕담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덕담을 나누는 것도 음력설 세시풍속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덕담이란 말그대로 새해 축복입니다. 지금은 전화, 연하장,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이전처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세배하고 축복을 나눌 때에 비해 조금은 인정이 말라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떤 방식이던 나누는 축복은 최고의 덕담입니다. 저는 명절엔 주로 전화와 메시지로 축복을 전합니다.  “새해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새해 선물이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새롭다는것입니다. 해는 어제와같이 떠올라도 해빛은 어제의 해빛이 아니고 꽃은 한 나무에서 피여나지만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피여납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래가 좋은것은 그것이 하루하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당신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것은 참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새해도 변함없이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이처럼 주고받는 덕담엔 참 좋은 덕담들이 많습니다. 저의 덕담은 아주 간단한데 해마다 변함없이 써오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모든 이들에게 새해 인사로 저의 축복을 드립니다.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25    라스베가스 (제4편) 댓글:  조회:4752  추천:1  2013-01-31
                                                                             라스베가스의 야경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멀리로 라스베가스가 보인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아서인지 멀리로 바라보이는 라스베가스는 그냥 허허벌판이나 황막한 사막을 내내 경과하다가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그런 도시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거리가 가까워지고 어둠이 쫙 깔리자 라스베가스 진입로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에서 바라본 라스베가스 야경은 말 그대로 진주를 쫙 뿌려놓은 듯 했다. 금 모래알처럼 반짝인다고 할 가, 뭇별처럼 명멸한다고 할 가 너무나 환상적인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딱히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야명주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라스베가스는 《사막의 야명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야경이다. 때문에 관광 팀은 라스베가스 야경을 보기위해 보통 저녁에 라스베가스에 들어왔다가 이튿날 아침 다른 관광 명소로 이동한다. 라스베가스 야경은 라스베가스만 가질 수 있는 조명의 극치를 이룬 환상적인 빛의 세계이다. 라스베가스를 라스베가스답게 만든 것이 인간의 기술과 창조력을 맘껏 자랑한 조명이라면 그 조명을 밝힌 전력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후버댐에서 온다. 후버댐은 라스베가스에서 남동쪽으로 40㎞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댐으로 1936년에 완공되었다. 이 댐의 건설로 인공호수인 미드호(Mead Lake)가 생겼는데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이다. 후버댐 높이 221m, 길이 379m이고 발전량은 134만 Kwh이다. 후버댐 건설에 중국인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댐 건설에서 돈을 번 중국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털려고 미국 정부가 라스베가스에 카지노를 허가했다는 일설도 있다. 하긴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이 라스베가스를 많이 드나든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인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치른 우리 일행은 예약한 호텔에 들를 새 없이 버스에 짐을 둔 채 먼저 라스베가스 야경 관광에 나섰다. 지정된 야경 관광 코소를 끝내곤 인차 유명한 쥬빌리쇼 관람이 이어지기에 우리 일행은 말 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야경 관광을 시작했다. 첫 코스는 베네치안 호텔이었다. 눈부신 야경을 두고 왜서 호텔로 들어가는 가고 가이드에게 물으니 가이드는 그냥 따라오라고 손짓만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우리 일행 앞장에 선다. 제한된 시간에 빨리 서둘러야만 볼거리를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호텔 안 에스컬레이터에 내리니 이게 웬걸, 방금 밤거리를 경과해 호텔에 들어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 푸른 하늘아래 즐비하게 늘어선 유럽풍의 베니스거리에서 악사들이 노래하고 사람들이 상가를 드나들고 있는 광경이었다. 더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은 거리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강에서 뱃사공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를 젓고 있는 광경이었다. 마치도 영화에서 나오는 베니스의 한 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와!》 모두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첫 탄성을 뽑았다. 그 때 필자의 아내가 거리의 악사와 찍은 기념사진을 보니 실내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진짜 그 뭣에 홀린 기분이다.    라스베가스는 쇼의 세계이다. 하루에도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쇼가 라스베가스의 밤을 장식한다. 라스베가스를 다녀온 사람들이 라스베가스에 가서 꼭 봐야 할 두 가지를 추천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호텔 쇼다. 호텔 쇼는 노천과 극장 쇼로 구분된다. 라스베가스 야경 관광에서 호텔 쇼 구경은 기본이다.  호텔 쇼 첫 코스로 트레져 아일랜드 호텔 앞에서 열리는 해적선 쇼 구경이 잡혔다. 해적선 쇼 구경은 호텔 앞거리에서 한다. 워낙 좁은 거리여서 미리 가서 자리를 잡느라고 우리 일행은 숨차게 가이드를 따라 걸었다. 해적선 쇼는 매일 밤 호텔 앞에서 진행되다가 2003년 7월 6일후로는 다른 쇼로 바뀌었다. 다행히 필자 내외는 첫 번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이 쇼를 구경할 행운을 가졌다. 20분가량 진행된 해적선 쇼는 영국 군함 브리타니아 호와 해적선 히스파니올라호가 해상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영국 군함이 침몰되는 과정을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쇼에서 불을 뿜는 대포, 밧줄을 타고 선상을 오락가락하는 해적들, 바닷물에 떨어지는 영국 해군 병사들, 침몰되는 영국 함선 등 장면이 아주 실감 있게 안겨온다. 2003년 10월 26일 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종래의 시설들을 그대로 많이 활용하여 여성들이 탄 배와 남성들이 탄 배간 대결을 보여주는 쇼가 공연되었다고 하나 두 번째로 라스베가스를 찾았을 때 다른 일정으로 필자 내외는 그 쇼를 보지 못했다. 듣기로는 쇼의 스토리는 해적선이 여성들이 탄 배로, 영국 군함이 남성들이 탄 배로 둔갑해 대결을 벌리는데 결국 해적에 의해 영국군함이 침몰되듯이 남자들이 탄 배가 침몰되고 바닷물에 빠진 남성들이 여성들에 의해 구출되어 여성들이 탄 배에서 파티를 벌린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바뀐 것은 아마도 영국 측이 입김을 넣은 것 같다. 첫 번 관광에서 해적선 쇼를 보면서 내가 가이드에게 대영제국의 군함이 무적의 함대로 바다를 호령했던 스페인 군함이면 몰라도 하찮은 해적들에게 침몰되고 있으니 영국인들이 반발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영국 정부에서까지 반발한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 말 바꾸어 만일 중국 군함이 해적선에 의해 침몰되는 쇼가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다면 필자부터 반발할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고. 그 담 쇼는 라스베가스에서 이 쇼를 보지 못하면 라스베가스 관광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을 듣게 되는 벨라지오 호텔 앞 분수 쇼이다. 벨라지오 호텔 앞 넓은 인공호수에서 매 30분 간격으로 음악에 맞추어 분수가 춤을 추는 예술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총 공사비가 4,000 만 달러가 들었다는 이 분수대는 최고 높이 80 미터 정도로 분수가 치솟고 4500개 조명등이 환상적인 조명효과를 내고 있다. 분수는 현악기의 조용한 곡에 맞춰 바람에 흐느적이는 실버들처럼 가는 물줄기를 흔들며 춤을 추다가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음악이 터지면서 폭발적인 물기둥을 만들어 치솟는다. 분수 쇼를 보면서 사람마다 나름대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흐느적대는 분수를 보면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잠겨든다는 분도 있고 영화 《타이타닉호》 테마 곡에 따라 움직이는 분수를 보면서 애수의 분위기에 젖는 분도 있다. 지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분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도 변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거창한 확신을 가진 분도 있다고 한다. 필자에게 충격적인 것은 춤추는 분수보다도  분수 쇼가 미국 국가로 시작되었다가 밤 11시 55분에 다시 미국 국가로 막을 내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미국인다운 애국심이 보여 지는 분수 쇼임을 절감케 한다.  그 담 라스베가스에서 꼭 봐야 할 쇼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밝다는 다운타운의 전자 음악 쇼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이다. 이 쇼는 라스베가스의 발상지인 다운타운 주변 호텔들의 인기를 다시 살리려고 다운타운 지역 호텔들이 4천만 달러를 공동 출자해 라스베가스의 또 하나의 명소로 부상시킨 것이다. 천정 전체가 형광막인 이곳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라스베가스에 온 관광객 70%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통계가 있다. 모든 공연이 36대의 컴퓨터로 조종된다는 이 쇼는 210만개의 전구에서 64 종의 색상을 내면서 만드는 생동감 넘치는 화면, 218개의 스피커와 54만 와트의 사운드 시설에서 나오는 엄청난 소리와 음악이 조성하는 분위기에 젖어 탄성을 뽑으며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는 관광객들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공연을 이루고 있다. 하기에 이 쇼는 라스베가스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유일한 쇼로 평판이 높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쇼 조명에 이용된 전구가 죄다 한국의 LG 전자 제품인 것이다. 하여 이곳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자존심을 찾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라스베가스에 왔을 때 가이드 소개로 2003년 LG 전자가 1,700 만 달러를 들여 기존의 전구 대신에 1,250 만개의 LED ( 발광 다이오드 )를 설치해 더 선명한 화면과 함께 쇼의 질이 한층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스베가스 야경 구경에서 실외 쇼 구경은 머라지 호텔 앞에서 진행되는 화산 쇼 구경으로 끝난다. 일몰 후 매 30분 간격으로 8분간 동안 진행되는 이 쇼는 조용하던 정글 속 화산 분화구가 갑자기 울리는 굉음 속에 하얀 연기를 뿜어 올리며 시작된다. 쇼는 화산 폭발을 재현한 치솟는 용암 불기둥, 호수로 흘러내리는 용암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이 쇼 구경 역시 길 거리에서 무료로 구경하는 쇼이다. 라스베가스에는 무료로 구경하는 쇼가 많으나 우리일행은 아쉬운 대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쥬빌리 쇼를 구경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운전기사는 가급적이면 좀 더 많은 경관을 구경시키느라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자유 여인상이 손짓하는 뉴욕뉴욕 호텔, 프랑스 분위기를 돋우는  패리스 호텔의 에펠탑,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의 럭서호텔 꼭대기에서 하늘을 찌르는 레이저 불빛, 참말로 라스베가스의 호텔은 규모와 화려함과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호텔 10개중에서 9개가 라스베가스에 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텔은 MGM 그랜드 호텔이다. 이 호텔 상징이 사자여서 입구에 커다란 사자가 입을 꼭 다물고 버티고 있다.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저 사자가 왜 입을 다물었는지 아십니까? 다 중국인들 탓입니다.》   가이드가 또 중국인을 거든다. 《중국에 가 보면 사찰이나 궁전이나 할 것 없이 대문 앞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사자상인데 전부 단박 사람을 삼킬 듯 아가리를 짝 벌린 무서운 모습입니다. 호텔 신축 시 호텔 측은 아가리를 짝 벌린 사자를 저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돈을 가장 많이 뿌리는 중국인들이 저 호텔에 발길을 끊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중국인들한테 물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는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아가리를 짝 벌린 사자가 지켜선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주 불길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지금 중국이 한창 뜨는 시점에서 라스베가스에서도 중국인들을 많이 유치하는 것이 호텔 성공의 지름길로 되고 있습니다. 중국인 유치를 위해 호텔 측은 하는 수 없이 거금을 들여 저렇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사자를 다시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이드 소개가 중국인을 비아냥하는 말은 아니지만 중국인 유치가 세계적인 라스베가스 호텔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되고 있다니 별로 기분 좋게는 들리지 않았다.   라스베가스에서 두 가지를 꼭 봐야 할 볼거리 중 하나가 호텔 쇼라면 호텔 쇼에서도 꼭 봐야 하는 쇼가 바로 가장 라스베가스 쇼답다고 평가되는 세계 3대 쇼의 하나인 쥬빌리 쇼이다. 1981년 7월 30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공연 기록을 남기며 그냥 라스베가스의 최고의 볼거리로 남아 있다. 쥬빌리 쇼는 파리의 리도쇼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쇼이다. 커다란 극장에서 화려한 무대와 의상, 특수 효과, 그리고 세트 장치는 물론 100여명이 넘는 무용수와 가수들이 벌리는 환상적인 공연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상은 가이드가 쥬빌리 쇼가 공연되는 호텔로 가는 도중에 한 간추린 소개다.    쥬빌리 쇼는 촬영이 금지되었기에 극장에 들어가기 전 사진기를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 천여 명을 용납할 수 있는 극장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면서 무대에 황홀한 경관이 펼쳐졌다. 곧 이어 특히 남성분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경관이 펼쳐졌다. 수십 명 무희들이 전부 가슴을 드러낸 채 미끈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쇼 구경에 앞서 가이드가 무희들의 춤을 《토플리스 차림의 쇼걸들의 환상적인 춤》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당시엔 《토플리스》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쇼를 보는 순간 그 말의 뜻을 풀 수가 있었다. 연변에서 10여년을 예술 공연 심사위원으로 지냈던 필자는 무대 공연을 수백 차 넘게 보아왔지만 말 그대로 《토플리스 차림》의 무용수,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똑 같은 키에 똑 같은 체형을 가진 수십 명 무용수가 《토플리스 차림》으로 한꺼번에 무대에 등장한건 첨보는 광경이다. 쥬빌리 쇼에 출연하는 쇼걸들은 라스베가스에서 최고로 알려진 쇼걸인데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쇼걸은 나이 환갑나이를 넘겼다고 한다. 필자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란다. 얼마나 몸 관리를 잘 했으면 환갑 넘긴 할머니가 처녀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 가? 필자보다 더 궁금한 것은 필자의 아내였다. 지금도 필자의 아내는 쥬빌리 쇼가 화제에 오르면 풀지 못한 궁금증을 내비친다.     쥬빌리 쇼는 필자의 기억으로는 6막 12장으로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장관적인 장면은 《타이타닉》호가 바다에 침몰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수백 톤의 물이 쏟아져 온 무대를 채우면서 《타이타닉》호가 60도로 기울다가 나중에 두 동강이 난다. 지진과 화산 폭발 장면도 핍진하게 안겨오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연출하는데 6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쥬빌리 쇼는 라스베가스 오락문화의 대표작이기에 손색이 없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 윤리위원회에서 쥬빌리 쇼에 등장하는 쇼걸들이 가슴을 가릴 수 없느냐란 제의를 한 적이 있는데 결국 그 제의가 쇼 진행 측에 거부당하고 쥬빌리 쇼가 18세 이상 관람가로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소개 책자를 통해 라스베가스에 성인을 위한 쇼뿐만 아니라 가족 동반으로 구경할 수 있는 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밤 라스베가스 유명 호텔에서 대형 쇼들이 공연되고 있는데 그 중 전체가 풀장으로 된 무대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수중 연기자들이 각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0》쇼와 360도 회전 무대에서 불을 소재로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주는 《카》쇼는 쥬빌리 쇼에 비해 손색이 없는 대형 쇼라고 한다.   80년대부터 투자가들은 최상급 호텔에 최고급 공연문화를 접목시켜 라스베가스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관광도시로 변모시켰다. 라스베가스가 80년대로부터 《도박의 도시》, 《죄악의 도시》, 《타락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고 단순한 카지노의 도시가 아닌 오락문화와 컨벤션 기능을 갖춘 복합적인 세계 최대 관광도시로 탈바꿈 한데는 쇼 문화 역할이 컸다. 지금 해마다 300억 달러에 달하는 라스베가스의 관광 수입 원천은 다양한 공연문화에 있다. 건전한 공연문화 반면에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면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라스베가스다. 가이드가 호텔 투숙 전 주의를 준 말이다.   《재차 강조하는데 절대 도박과 놀이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개별 행동 시 혼자 오신 남성분들은 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을 받지 마십시오. 전단은 대체로 호텔 방에서 나체쇼 개별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입니다.》   가이드 호텔방에서 제공한다는 나체쇼 서비스는 많은 경우 매음으로 이어지기에 자칫하면 돈 날리고 망신만 사는 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라스베가스엔 전라의 무희들이 춤추는 성인용 나체쇼가 여러 곳에서 열린다. 춤추는 무희들에게 5불정도 팁을 주면 더 가까운 거리에서 춤을 춰주고 20불정도 팁을 주면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춤을 추는데 그 때 절대 춤추는 무희 몸에 손을 대선 안 된다고 가이드는 천만 당부했다. 무희에 손을 대면 벌금은 물론 그냥 공연장에서 쫓겨난다고 했다. 필자가 속한 관광 팀은 모두 가족 동반으로 온 분들이어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호텔로 직행했다.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이제 남은 것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놀이로 해봐야 하는 카지노 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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