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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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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저복금: 바둑술어‘사석’(단편소설) 댓글:  조회:359  추천:0  2019-07-11
바둑술어 ‘사석’ 저복금     사석선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모두 자기의 장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양최득의 장점은 일단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과감히 바둑돌을 버리는 것이다. 바둑을 두다가 간혹 몇개의 바둑돌이 어느 한 귀에서 서로 맞물려 진흙탕 싸움을 벌일 때면 그는 돌연 바둑돌을 버리고 다른 한 외각에서 포위전을 벌여 보다 많은 집을 차지한다.    “바둑돌 하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선점을 잃으면 안되지!”  양최득은 평소 별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바둑을 둘 때만은 지긋이 손으로 입을 움켜쥐고 있다가 이런 말 한마디씩 불쑥 내뱉군 한다.  “넌 지指를 버리는 대가로 도시를 얻으려 했지!”  양최득과 맞장구를 친 사람은 ‘면도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식이다. 이 자식은 말할 때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아픈 곳만을 찔러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방금 말한 손가락 ‘지指’는 바둑돌을 가리키는 ‘자子’와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양최득은 못 들은 척 머리를 들지 않고 바둑판만 응시했다. 바둑돌을 잡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환히 로출된 그의 손은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그 자리에는 매듭을 방불케 하는 종기가 흉하게 부풀어있다.  양최득의 세대는 과거 중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나서자란 농촌애들과는 달리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농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도시의 버림을 받고 농촌에 처박힌 ‘삽자插子’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내려간 강북 농촌의 공수(工分=로동 점수)는 형편 없이 낮았다. 한공에 겨우 일이십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루종일 강바닥에서 진흙을 퍼올려도 1.5공 밖에 벌지 못했다. 현찰로 환산하면 겨우 이십전이 되는 셈이다. 삽으로 진흙을 퍼올리다가 간혹 삽자루가 부러지면서 유기유리로 만든 옷단추라도 떨어뜨리면 그 날 하루의 일은 거의 헛탕을 친 거나 다름 없다. 공수가 하도 낮아서 농한계절만 되면 지식청년들은 너도나도 뿔뿔이 도시로 돌아가버리군 했다. 농한기에 하는 일들은 공수가 적은 데다가 집에 있어보았자 추운 고생만 하기 때문이였다. 대개 그맘 때면 지식청년들이 합숙하는 숙소에는 양최득 한사람만 외롭게 남아서 들락거릴 뿐이였다. 년말에 공량을 바치고 나서 생산대에서는 1년 농사 수익을 계산하게 되는데 그 때면 사원들에게 공수를 돈으로 환산해주기도 하고 쌀과 채소 같은 것들을 고루 나누어주기도 했다. 지식청년들은 수입이 없기에 모두 집에서 부쳐온 돈으로 쌀과 채소를 사서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유독 양최득만은 쌀과 채소를 나누어가진 외에도 얼마간 돈을 타기도 했다. 그는 어느덧 농사일을 전부 몸에 익혀 당지에서 내노라 하는 농군과도 어깨를 겨루었다. 동료들은 양최득이 탄 돈이라 해봤자 겨우 집으로 갔다올 차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며 픽픽거렸다. 매번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오면 지식청년들은 모두 기차표를 사지 않고 집으로 갔다온 자기의 경험을 소개하느라 소근댔다. 이렇게 농촌에서 몇년 지내고 나면 금방 농촌에 내려올 때의 격정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란 허탈 밖에 없다. 적지 않은 지식청년들은 한번 집으로 가면 도시에 숨어서 돌아오지 않았다. 농촌에 남아있는 지식청년들도 날마다 빽을 써서 도시로 돌아갈 방법만 연구했다. 그 해 양력설이 지난 뒤 농민들마저도 설 쇨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설치고 있었으나 유독 양최득만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홀로 마을에 남아 말없이 대장이 시키는 여러가지 잡일들을 수걱수걱 했다.  양최득은 혼자 일하면 조용해서 오히려 더 좋다고 외로운 자신을 위로했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양최득의 집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가고 수근거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양최득이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었다면 고작 양최득이 자기가 이제는 나이도 많고 어른이여서 더는 어머니 돈을 쓸 수 없다는 말 뿐이였다. 설을 며칠 앞두고 변강농장에서 상춘생이라는 지식청년이 어느 날 문득 나타나서 양최득을 찾았다. 그 때의 장거리 기차표는 유효기간이 4일이였기에 상춘생은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내려 양최득이 사는 숙소를 찾은 것이다. 그는 양최득과 련속 이틀간이나 바둑을 두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석유등까지 켜놓고 겨루기를 반복했다. 둘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겨우 밖으로 나와 도랑길을 따라 걸었다. 그 날 마을 사람들은 어쩌다가 양최득의 얼굴에 어려있는 득의양양한 빛을 보았다.  상춘생은 양최득이 시내 바둑판에서 사귄 바둑친구였다. 상춘생이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큰소리를 잘 치는 것이였다. 그는 입만 벙긋하면 나폴레옹이 어쩌고 저쩌고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저쩌고 했다. 평소 문학서적 읽기를 좋아하는 양최득은 몇번 상춘생과 접촉해보고 나서 상춘생이 여러가지 책들을 많이 읽어서 지식면이 넓고 깊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쩍하면 상춘생을 찾아가 세상을 론하고 인생을 론했다. 말할 때 간혹 양최득이 자기 관점이라도 내놓으면 상춘생이 고금중외 명작이나 경구들까지 인용하면서 반박해와서 뭐가뭔지 모를 정도로 오리무중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바둑을 둘 때 바둑돌 하나를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양최득은 별로 변론하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열변을 토하는 상춘생의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기 관점을 바꾸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농촌에 내려간 뒤에도 서로 자주 련락했다. 상춘생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양최득은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다가 그를 반갑게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다 날려버렸다. 둘이 산책할 때 양최득은 상춘생에게 강북마을의 논밭과 농사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이제는 농촌사람들 못지 않게 일을 잘한다는 자랑을 했다. 상춘생은 두손을 팔소매에 찔러넣고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남의 기운은 바로 그래서 아름다운 거야. 수천년 력사의 지혜와 아름다움이 루적된 곳이니까” 그 해는 립춘이 빨리 찾아와서 설 무렵에 내린 가랑비에 공기가 때이르게 축축했다. 양최득이 재미 있다는듯 상춘생의 말을 받았다. “아니, 수천년의 땀과 눈물이 루적되여있는 곳이지.” “너에게 약간 문학인이 갖고 있는 비감한 정서가 있구나!” 상춘생이 얼굴을 돌리며 양최득에게 물었다. “넌 농사를 짓는 데 대체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된다고 생각하니?” 상춘생이 이어 또 물었다. “너 이런 일들을 좋아하니?” 그다음 또 물었다. “너 정말 이곳에서 일만 잘하면 로동자로 뽑히거나 대학에 추천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상춘생은 떠나갔다. 양최득은 홀로 숙소에 남아 또 한해의 설을 쓸쓸하게 쇴다. 그는 집에 앉아 상춘생과 벌였던 바둑판을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올리며 한수한수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 한판의 사석선점! 사실 너무나 뻔한 일이여서 바둑판을 다시 앞에 펴놓고 생각해볼 필요마저 없었다. 그는 바둑돌을 하나씩 잡으며 천천히 비닐로 된 바둑판에 배렬해갔다. 그러다가도 웬 영문인지 이따금씩 바둑돌을 잡은 손가락을 지긋이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의 손가락은 원래 가늘고 길었다. 어렸을 때 누군가 그의 손가락을 보고 피아노를 치기 안성맞춤한 손가락이라며 치하한 적이 있었다. 그렇던 손가락들이 이제는 못이 박혀 보기 흉하게 굵어지고 두꺼워졌다. 하얗고 부드럽기만 했던 손가락 피부도 이제는 실농군의 손가락처럼 검게 타고 터슬터슬 거칠어졌다.  그 해 설 후에 집으로 돌아갔던 몇몇 지식청년은 도시에 눌러앉아 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두사람은 돌아왔다가 며칠도 안되여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로동자에 초빙되였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양최득은 자기가 누구보다 농촌에 온 시간이 길고 들뜨지 않고 착실하게 일해왔지만 로동자로 뽑혀 도시로 돌아갈 기회는 자기에게 쉽게 차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름철 수확 때 밭에 나가 밀가을을 할 때면 양최득은 솜씨가 빨라서 항상 밭고랑 제일 앞머리에 서군 했다. 혹시 정말 몸을 내번지고 일한다면 그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다 한가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앞을 다투며 힘들게 일하려 하지 않았다. 양최득이 밭고랑 끝에 막 이르렀을 때 뒤따르던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한창 밀을 베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짧고 급촉한 신음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뢰소리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신음소리가 울려온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밭두렁 우에 양최득이 우뚝 서있는 게 보였다. 웬 영문인지 밭두렁 우에 선 양최득이 그 날 따라 각별히 커보이고 돋보였다. 두손을 번쩍 쳐든 양최득이 한손으로 다른 한손을 누르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에 웬 손가락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 손가락은 마치 다른 한손에서 뽑아온 손가락 같았다. 쳐들린 손가락 아래로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예리한 낫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리하게 빛나는 낫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번쩍번쩍 은빛을 발하는 낫날 아래로 빨간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최득은 즉시 공사 위생소에 호송됐다가 다시 현병원에 옮겨졌고 나중에는 그의 부모들이 사는 남성南城에 옮겨졌다. 이 기간이 다만 며칠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전처럼 여전히 침착했고 태연했다. 그는 병원에 갈 때 요나 이불 같은 침구를 가지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간 뒤 더는 그의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야 마을 사람들은 양최득이 불구라는 리유로 도시로 돌아가게 되였다는 것과 이제부터 더는 농촌에 붙박힌 지식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양최득이 병으로 도시로 돌아간 뒤 얼마 안되여 지식청년에 대한 정책이 새롭게 나와 모든 지식청년들이 다 도시로 되돌아가게 되였다. 도시에 남게 된 양최득은 지식청년 직장배치정책에 의해 어느 한 공예품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이 공예품공장은 소집체기업에 속했다. 그 때 기업들은 모두 세가지로 나뉘였다. 즉 대집체기업, 소집체기업, 국영기업 등이였다. 같은 도시에서도 공장에 따라 대우가 달랐지만 너무 큰 차이는 없었다. 양최득은 전문 종이에 그림이나 글을 새기는 부서에 배치받았다. 이 부서는 가두에서 경영하는 작은 공장이였지만 취급하는 공예품의 품목만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목조木雕, 죽조竹雕, 옥조玉雕 등을 다 취급했다. 종이조각 품목은 공장을 참관하러 온 시장의 제의에 의해 하게 되였다. 시장이 지구에서 전근해왔기에 그 지구의 재래항목인 종이조각예술을 추천했던 것이다. 종이조각은 작은 항목이라 평소 전문가 한 사람이 학도 몇을 거느리고 일하는 정도였다. 양최득이 공장에 갓 들어왔을 때 종이조각은 전 공장에서 경제적인 효률이 가장 높은 부서였다. 그 때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유족하지 못한 때여서 한장에 몇전 밖에 하지 않는 종이조각을 사서 희사나 길일을 경축했다. 황경중이라는 스승은 이 종이조각공예품의 계승자였다. 종이조각예술은 그의 손에 의해 영향면이 크게 확대되였다. 그도 지구에서 전근해왔는데 웬 영문인지 그가 받는 학도마다 모두 녀자 뿐이였다. 남자인 양최득을 받은 것은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받지 않으면 안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목조, 죽조, 옥조 같은 일은 모두 섬세하고 치밀한 기술성을 요구했다. 공장 령도들이 양최득을 그의 수하에 억지로 안배한 것은 양최득이 불구이기에 직종을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되였기 때문이다. 종이조각공예는 전지剪纸예술에서 발전해왔다. 전지는 한번에 한장의 종이만을 오려야 하기에 각별히 손재주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종이조각은 도안에 따라 새기기에 한번에 여러장을 새길 수 있었다. 도안은 스승인 황경중이 그린 뒤 몇몇 학도들에게 넘겨주어 새기게 했다. 황경중은 50살이 넘었는데 아래턱에 항상 수염을 남기고 다녔다. 평소 그는 항간에서 류행되는 유머로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그 시대에는 자극적인 육담이나 걸직한 롱담을 하는 것이 크게 실례되는 일이 아니였다. 황경중스승의 특기는 평소 주고받는 모든 화제를 녀자에 관한 롱담으로 유도해가는 것이였다. 아마도 외설적인 화제에는 항상 욕망의 힘이 넘치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황경중스승이 그린 도안은 장군이든 재상이든 부처님이든 날아다니는 새든, 네발 가진 짐승이든 관계없이 언제나 속되고 거친 갈망으로 가득차있었다. 따라서 그의 도안은 언제나 신선하고 진실하고 활기로 넘쳤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하지만 황경중은 유독 양최득만은 스스로 알아서 종이에 그림을 새기게 했다. 녀자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몸 가까이 밀착해서 손까지 꼭 잡고 가르쳐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편애가 전혀 리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였다. 농촌에서 못이 박히게 일해서 거칠어진 투박한 손을 잡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양최득은 마치 종이를 새기는 조각칼 끝에 정말 무슨 큰 비결이라도 숨어있는 것처럼 항상 스승님, 스승님 하고 부르며 자주 황경중 집을 들락거리며 물도 길어주고 석탄도 날라주었다. 마치 스승에게서 정말 큰 비결이라도 배워낼 것처럼… 황경중스승이 그에게 얼마간 가르쳤다면 말로 되는대로 지시하는 것 뿐이였다. 그가 양최득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림은 마음속에 그려져있어야 한다”는 것 뿐이였다.  양최득의 마음속에는 항상 황경중이 그린 도안이 우렷이 떠올랐다. 그는 한칼한칼 그 도안에 따라 새겨갔다. 그렇게 반복해서 새기노라니 칼이 점차 자연스럽게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양최득은 이만하면 스승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황경중은 그가 그린 도안을 보자 아래턱 수염을 쭈볏이 치켜세우며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왜 죄다 우거지상이야.” 그 말을 듣고 양최득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꺼내 다시 자세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비결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린 그림과 스승이 그린 그림을 펼쳐놓고 비교해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그린 도안이 스승이 그린 도안과 모양은 비슷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승이 그린 도안은 뱀 한마리를 그린 거나 쥐 한마리를 그린 거나 모두 살아숨쉬는듯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나 그가 그린 도안은 살진 돼지를 그린 거나 오동통한 아이를 그린 거나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모두 수심과 비애에 젖어있었다. 그는 엷은 종이를 스승이 그린 도안 우에 놓고 그대로 모방해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새겨놓고 섬세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몇번이나 반복하고 나자 그의 칼끝 아래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도안을 그릴 때 조금만 한쪽에 치우쳐도 스승이 말한 ‘우거지상’이 또다시 되살아나는 것이였다.  양최득은 그렇게 되는 것은 그의 칼솜씨가 아직도 제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벽구석에 놓인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 숨 죽이고 조용히 그림을 새겼다. 그에게 있는 것이란 인내심 뿐이였다. 그는 듬직하게 자리에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래 앉아있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다 그가 바둑을 두면서 련마한 내공이였다. 마음이 갑갑할 때면 그는 이따금 일어서서 스승의 탁자 앞에 놓여있는 화책을 펼쳐보기도 했다. 그 때의 화책에 그려진 그림은 대부분 단순한 선전적인 표현들 뿐이였다. 그는 공휴일이 되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으로 찾아가서 그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때로는 어떤 명화가의 명작품 앞에 얼빠진 사람처럼 멈춰서서 뚫어지게 응시하는 때도 있었다. 농촌에 있을 때처럼 공예공장에서 양최득의 작업량은 조금씩 선두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갓 결혼한 몇몇 녀학도들은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쩍하면 자기들이 맡은 임무를 양최득에게 떠맡겼다. 양최득은 그러한 일을 별로 개의치 않게 생각했다. 조각칼은 가늘게 갈아놓으면 한번에 몇장은 족히 새길 수 있었다. 양최득은 그중 한장이라도 편차가 생기면 가차없이 구겨버리고 다시 새겼다. 조각칼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어느덧 능수능란한 경지에 이르러 곧게 새기려고 마음 먹으면 곧게 새겨지고 동그랗게 새기려고 마음 먹으면 동그랗게 새겨졌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우거지상’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황경중스승과는 비할 수 없었지만 다른 녀학도들과는 얼마든지 비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새긴 선은 아직도 비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인물형상의 표정들은 행복함과 경쾌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흠집들은 그림을 사가는 사람으로 말하면 별로 문제 될 것까지는 없었다. 그림을 살 때 누가 까짓 한장의 그림을 놓고 그렇게 오래 관찰하겠는가!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공예공장 밖의 다른 공장들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장들의 유혹에 빠져 이미 공예공장의 녀학도만 해도 둘이나 다른 곳으로 전근해갔다. 다른 한 녀학도도 이틀이 멀다 하게 병휴가서를 내밀었다. 황경중스승은 이미 퇴직 나이가 되였으나 공장에서는 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전에 비해 많이 자유로와졌다. 평소 그는 공장에 자주 나오지 않았다. 간혹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로 설계한 도안 한장을 들고 와서 양최득더러 새기게 했다. 때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양최득을 불러 대신 구사하게 하고 그것을 종이조각 형식으로 다시 표현해보게 했다. 양최득은 시간이 많았다. 전에 비해 공장의 생산임무가 적어졌기 때문이였다. 사회의 발전추세가 돈벌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서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종이조각 같은 것은 점점 외면당하고 있었다.  양최득은 결혼했다. 안해는 그의 바둑친구 류진취의 누이동생이였다. 양최득과 류진취는 같은 골목에서 살았었다. 양최득은 골목 어귀에서 살았고 류진취는 골목 끝 쪽에서 살았다. 농촌에 내려갔을 때 매년 설 쇠러 시내로 올 때마다 양최득은 류진취 집에 가서 바둑을 두군 했다. 류진취 집은 성분이 높았으나 양최득 같이 농촌에 내려간 ‘삽자插子’를 별로 꺼리지 않았다.  류이미는 다른 처녀들과는 달리 피부는 순수한 황인종이였지만 피부색은 검은 편이였고 두 눈은 작고 가늘었다. 약하고 메마른 몸매는 언제나 푸들 줄 몰라서 피부가 마치 뼈우에 가죽을 들씌워놓은 것 같았다. 처음 보면 못나게 생각되나 자주 보면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 얼굴이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돌아와 처음 류이미를 봤을 때 양최득은 그녀가 못생겼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같이 마주 서서 대화하면서 그녀가 상을 찡그리거나 웃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었다.  양최득이 도시로 돌아오던 해 그의 나이는 이미 30살에 가까웠다. 류이미 나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인물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 때까지 남자친구가 없었다. 류이미가 양최득을 보고 이렇게 그를 치하했다. “오빠는 정말 들뜨지 않는군요. 요즘 세상에 오빠 만큼 듬직하고 침착한 남자는 드물지요!”  양최득과는 달리 그녀의 오빠인 류진취는 듬직하지 못했고 항상 마음이 들떠있었다. 양최득이 바둑을 두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갈 때마다 그는 어디로 갔는지 항상 집에 있지 않았다. 양최득은 집을 지키고 있는 그의 녀동생과 심심풀이로 한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말저말 나누는 사이에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이 통해 서로를 사랑하게 되였다.  류이미가 고중을 졸업할 때 오빠인 류진취는 이미 회북이라는 농촌에 재교육을 받으러 갔다. 부모의 신변에 자식 하나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정책이 있어서 류이미는 쉽게 도시에 남아 일할 수 있게 되였다. 나중에 그녀는 도시 환경청결을 담당하는 일을 하게 되였다. 류이미는 양최득과 같이 있을 때면 양최득의 이야기를 듣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양최득이 책의 내용들을 복사하듯 그대로 옮긴 것들이였다. 그로 인해 양최득은 더 많은 문학서적들을 읽어야 했다. 평소 별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양최득이였지만 류이미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만은 례외였다. 그 때면 그는 비단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청산류수처럼 술술 잘하기도 했다. 양최득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할 때면 류이미는 옆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느꼈다. 그 때면 양최득의 눈에 류이미가 각별히 예뻐보였다. 양최득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내밀어 안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섬세하고 부드럽고 윤나는 그녀의 피부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그의 느낌이 그대로 투명한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짜릿하게 녹아들었다. 류이미는 양최득과 결혼한 뒤 더는 환경청결공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기청가를 맡고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류이미의 수입이 끊어지자 가정생활은 전부 양최득 한사람의 월급에만 매달려야 해서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양최득은 늘 류이미에게 과거 농촌생활에 비해 지금의 생활이 어디가 더 나아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류이미로서는 양최득의 이 말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양최득이 한 말은 확실히 가식 하나 없는 진실이였다.  류이미는 몇년간 련속 대학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번마다 락방되였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였다. 대학입시에 락방한 대신 임신했기 때문이였다. 식구가 하나 더 불어나자 양최득은 가급적 밤작업을 늘여 상금을 받으려 했다. 그의 조각칼 아래에서 새겨지는 그림들은 환골탈태하여 과거와는 풍격이 많이 달라졌다. 양최득은 원래 황경중스승만이 할 수 있었던 기술적인 일들을 어느덧 전부 배워내고 익혔다. 필경 그는 적지 않은 책들을 읽은 사람이라 문화수양이 결코 낮지 않았다. 그의 종이조각 솜씨와 재능이 늘면서 도안은 보기 좋으면서도 통속적이였고 전통적인 유산의 틀 속에서도 새로운 기상과 빛을 발했다.  아이를 낳고서도 류이미는 전혀 몸에 살이 오르지 않았다. 피부는 여전히 팽팽했고 부드럽고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양최득은 비록 생활이 바빠졌지만 과거 농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어떠한 가정 일이든 다 할 줄 알았다. 저녁이 되면 안해와 아이가 그의 품속에 함께 기대와서 그러한 나날이 그로서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안해와 아이가 있는 데다가 그가 새긴 종이조각도 호평을 받고 있었고 판매량도 크게 늘고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데다가 대학입시에서 또 한번 락방돼서 류이미는 원래 출근하던 도시환경청결소에 다시 복직하려 했다. 그 몇년은 사회변화도 커서 출신을 문제 삼던 일은 어느덧 력사의 한페지로 넘겨져 해외친척관계 같은 것을 더는 문제삼지 않았다. 바로 그 때 해외에서 살던 류이미의 친척이 친척방문으로 와서 류이미에게 출국하여 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류학하기를 권했다. 귀국한 뒤에도 친척은 련락을 계속 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당숙이 되는 해외 친척이 그녀의 해외에서의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부담하겠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그 날 저녁, 류이미는 양최득의 품에 안겨 출국에 관한 화제를 꺼내면서 “해외에서 생활한다니 듣기만 해도 겁나 죽겠어요. 당신의 그늘이 없이 제가 어떻게 살아?!” 했다. 며칠 뒤 류이미는 도시환경청결소에 복직하는 일을 말하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고 했고 이후에 기회를 만들어 양최득과 아이를 데리고 외국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도 했다. 그 뒤 류이미는 출국했고 양최득은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 그는 때로는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애엄마가 해외에 간 거나 그가 과거 농촌에 간 거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시골에 내려가 단련을 받았고 안해는 해외에 가서 단련을 받고 있으니까. 그는 안해가 외국에 갔으니 꼭 많은 점에서 습관되지 않고 불편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때로는 아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아들이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속으로 비애와 미묘한 예감이 엇갈려 찾아들었다.  안해가 외국에 나가있는 그 몇년 동안 양최득은 밖에 잘 나가지 않았고 바둑도 잘 두지 않았다. 설사 밖에 나간다 해도 아이를 안고 나왔고 마치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치기라도 할듯 언제나 손으로 바둑판을 가리켜보였다. 그는 바둑은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찍 가르치면 바둑에 대한 기초가 튼튼해져서 평생 가도 잊지 않으니까. 그래서 동자공童子功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아이는 두세살 때 몹시 여위고 약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가고 걱정했다. 그러나 양최득 자신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애엄마가 있을 때도 아이는 거의 그가 키웠기 때문이였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양최득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애에게 끝없이 말을 걸었다. “너 장차 뭘 할래?” “바둑 둘 거야!” “혼자 두면 재미없지.” “아빠두 혼자 두지 않아?” “너와 바둑 둘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나 혼자 둘래.” 몇년 전 바둑 두러 곧잘 찾아오던 북쪽 골목의 왕씨도 요즘 양최득을 별로 부르지 않았다. 양최득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불편한 몸이기에 찾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때면 그는 아이를 안고 류진취 집에 찾아가서 류진취와 한판 겨루기도 했다. 그런 때면 장모가 아이를 대신 봐주었다. 류진취의 원래의 바둑 실력은 그와 비슷했으나 요즘에 와서는 늘 그에게 지고 있었다. 류진취의 바둑판에서의 살상력은 눈에 띄게 무뎌지고 약해졌다. 양최득은 류진취와는 달리 자기의 바둑실력이 더 는 것 같았다. 그동안 혼자 장기를 두면서 바둑 두는 비결을 깨쳤기 때문일가?  양최득은 이미 아이를 돌보는 생활에 습관되였다. 아이가 소학교에 다니게 되자 안해가 전화를 걸어와 그들을 외국에 데려가는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다. 그러나 양최득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안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데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자기는 불구이고 외국어마저 모르는데 어떻게 외국에서 사는가? 양최득으로서는 안해가 자기와 아이를 먹여살리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안해가 대학을 졸업할 때도 다되여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 안해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 때라는듯 류이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흥분된 어조로 자기가 그 곳에서 취직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가 기뻐하는지 괴로워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뒤 안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더는 혼자 외국에서 살 수 없고 그렇다고 귀국할 수도 없다면서 만약 당신이 정 올 생각이 없으면 아이를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양최득은 금방 그녀의 뜻을 리해했다. 그녀가 그와 헤여지려는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외국에 데려가려 했다. 혹시 양최득은 진작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리혼문제를 협의하는 동안 류이미는 하루 건너 전화를 걸어왔다. 양최득은 그녀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명색 뿐이고 사실은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그녀는 클리트라고 하는 한 외국 남자가 그녀에게 반해 밤낮없이 쫓아다닌다고 실토했다. 그녀는 또 국내에 있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줄곧 밉게 생겼다는 말만 들었는데 외국에 와서는 사람마다 자기를 동방미인이라고 찬미한다고도 했고 그녀와는 달리 그녀와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다른 한 중국 처녀 상염은 눈이 크고 피부색이 희여서 국내에 있을 때에는 미녀로 떠받들렸지만 외국에 와서는 남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피부가 아무리 희여봤자 백인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기 같은 피부를 만들려고 해빛에 일부러 살을 검게 태운다고도 했다. 외국사람은 사람마다 다 눈이 크기에 희소가치라는 말처럼 자기 같이 작은 눈이 오히려 더 인기라고 했다. 그리고 클리트라는 남자가 그녀의 피부를 찬미하고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면 중국의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고 한다고 했다.  양최득은 류이미와 리혼했다. 그는 아이를 그녀의 신변에 데려다줄 때 또 한번 아이 대신 비애를 느꼈다. 이번엔 아이가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였다. 양최득이 류이미에게 아이를 맡긴 원인은 그가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였다. 공예공장을 공장장 한 사람이 도맡게 되자 평소 리윤을 내지 못하던 종이조각부서부터 없애버렸다. 그는 클리트라는 외국 남자가 생활조건이 괜찮기에 류이미가 그와 같이 살면 자연히 잘살 것이라고 믿었다. 양최득은 아이로 말하면 어머니를 따르는 것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아이에게 리롭게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양최득은 날마다 밖에 나가 바둑을 두었다. 지금까지 그는 마음이 이렇듯 홀가분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무엇도 관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잊고 오직 바둑판에만 매달렸다. 홀로 사는 그의 생활은 마치 버림받은 바둑알과도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텅 빈 방안을 보고 있으면 웬 영문인지 마음이 흐리멍텅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정원에서 바둑을 두었다. 매판마다 그는 전투에 뛰여든 사람처럼 진지하고 엄숙했다. 누군가 그에게 왜 처자와 함께 외국에 나가지 않았는가고 물으면 양최득은 “왜 외국에 가지 않았는가구 ? 외국에 가면 한가하게 바둑을 둘 수 있는가?”고 반문했다. 그 때 그의 말을 누군가 이렇게 받았다.  “자넨 자식 하나를 잃는 대가로 공장장이 되려 했잖아!” 양최득은 머리를 들지 않고도 불청객처럼 불쑥 대화에 끼여든 사람이 다름아닌 면도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이 덜컹 했으나 여전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리혼할 때 류이미는 확실히 그에게 목돈을 주었다. 그는 류이미의 마음이 리해되여 그녀가 내미는 돈을 받았다. 외국으로 놓고 말하면 그만한 돈이 아무 것도 아니겠으나 외화와의 환률 차이가 커서 외국에서는 반달 급여도 안되는 그 돈이 그를 일시에 ‘만원호’로 되게 했다. 그는 입을 하 벌리고 흐리멍텅하게 침대 우에 앉아있었다. 방금 둔 바둑이 현실이 아니라 환영 같았다. 면도칼은 언제나 집문 앞에 놓인 바둑판에만 있었고 정원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진실해보였고 면도칼다워보였다. 원래 양최득과 같이 한 공장에서 일했던 두 사람은 공장을 도맡은 공장장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간부였다. 그들은 해체된 공예공장을 다시 세우려 했다. 양최득에게 일정한 자금이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은 집까지 찾아와서 양최득을 출자지분의 주주로 모시겠다며 설득했다. 이리하여 양최득은 그들과 동업자로 되였다. 양최득이 제기한 출자조건은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이조각항목을 보류하는 것이였다. 그는 자기에게 관리재능은 없고 오직 종이조각 솜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다년간 종이조각 업종에 종사하면서 그는 점점 종이 우에 한칼한칼 여러가지 도안을 새기는 일을 좋아하게 되였다. 새로운 공장이 끝내 개업되였다. 양최득은 여전히 매일 출근하면서 그만의 종이조각 일에만 몰입했다. 공장의 경영에 대해 그는 언제 한번 묻지 않았다. 지어 그에게 전달되는 자금손익명세표마저 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수자거래는 봐도 잘 몰랐다.  주문이 있으면 그는 그림을 새겼고 주문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그림을 새겼다.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잘하든 못하든 그는 여전히 성심껏 일만 했다. 지각도 조퇴도 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공장의 판매창구의 항목이 하나 더 늘어나게 했다. 어쩌다가 공장장 사무실에라도 가면 공장장은 밖에서 온 손님들에게 그를 합자주주라고 소개했다. 손님들은 그를 양회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그 무슨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사람은 아니나 주식 초과배당금은 받으며 과거처럼 더는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 몇년간 사회변화는 갈수록 커졌고 그 기류를 타고 공장규모도 커져서 높고 으리으리한 공장건물까지 보라는듯이 일어섰다. 공장장들은 떼돈을 벌어 자가용차도 몰고 다니고 큰 주택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나 양최득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고 낡고 낮은 집에서 그림만을 새겼다.  비록 양최득이 가장 일찍 출자한 합자자이지만 그의 출자금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의 투자금은 이미 다른 투자자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미소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미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받는 초과배당금도 그만큼 미소했기 때문이다. 혼자 공장을 들락거려도 누구도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낡은 공장건물의 한 구석에서 소리없이 자기 일만 했다. 마치 버림받은 바둑돌처럼… 그는 출퇴근하면서 간혹 한가할 때면 바둑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승부를 다투지 않았고 높고 낮음을 비하지도 않았다. 기회 있으면 업무를 련계했고 업무를 련계하지 못하면 자기가 새기려고 했던 도안을 계속 그려갔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자유스러웠다. 이미 새긴 도안은 스스로 가져다가 앞에 있는 판매부의 창고에 넣어두었고 그것이 팔리든 팔리지 않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것들이 필경 아직도 멋져보였기 때문이였다.  중년 이후의 인생은 참으로 빨리 흘러갔다. 언뜰하는 사이에 몇년이 흘러갔고 뒤돌아보니 남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한판한판의 바둑판처럼 둘 때에는 매 걸음마다 다 뜻이 있고 함정이 있고 쟁탈이 있고 모략이 있고 허虚와 실实이 있었지만 손을 떼고 나앉으면 잡히는 것이란 공허 뿐인 것과 똑같았다. 외국에 간 아들은 어느덧 결혼하여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동안 양최득에게만 해도 두번이나 왔다갔다. 그들은 서로 낯설음 때문에 어색해했다. 양최득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은 것이란 매일 도안을 새기는 것 뿐이였다.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발전 추세에 순응하기 위해 공장에서는 종이조각예술품을 사회홍보용으로 포장했다. 양최득은 새긴 매 한장 한장의 그림을 투명한 종이 사이에 끼운 다음 접어서 박스 안에 넣었다. 한 간부가 공예공장을 참관 왔을 때 양최득은 현장에서 도안을 새기는 표현을 해보였다. 그 간부는 그의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종이조각공예가 아직도 사회에 홍보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홍보가 제대로 안됐다고 한 그 간부의 말은 그냥 례의적으로 해보는 인사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때 공장에서 홍보를 위해 종이조각품을 선물로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선물로 박스에 넣는 것은 종이조각품이 아니라 옥조각품 같은 것들이였다. 다행히 학교에서 조직한 아동견학단원들만은 떠나갈 때 매 아이들마다 한장씩 사서 조심스럽게 손에 받쳐들고 갔다. 마치 바람이 불면 그림이 날려가기라도 하듯 아주 조심조심… 양최득은 긴 시간 할일이 없어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그림을 새기기에만 바빴다. 그는 그림을 구사할 때 매 장의 형상을 다 다르게 그리려고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는 이따금 공장구역의 아스라하게 높은 빌딩을 따라 낡고 허름한 옛 단층건물 안에 들어서면 해빛이 가리워진 건물 안이 너무나 음침해서 도안을 그릴 때 쓰는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조각칼 한자루, 도안 한무더기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지난 몇년간 줄곧 이렇게 걸어온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필요가 있는지 그는 스스로도 의심이 갈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단 앉아서 손에 조각칼을 잡으면 그의 잡념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조각그림에 대한 집념만 남았다. 이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숙명이였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는 숙명이였다. 도안을 그리는 한자루의 조각칼은 잡기는 쉽지만 그것을 파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조각칼 끝에서 오려지는 하나하나의 직선과 곡선, 여러가지 형태의 선은 머리카락 만큼 가늘어서 오래동안 쌓아온 내공이 없이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당년에 황경중스승이 한 “마음에 도안이 있어야 한다”던 말이 진리임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머리를 돌려 황경중스승이 새긴 간단한 도형들을 살펴보니 그것들이 오늘따라 각별히 생동하고 활기 있게 느껴졌고 거칠고 속된 저변에 무성하게 깔려있는 정감과 환락, 행복 같은 것들이 크게 확대되여왔다. 그런데 이전에는 왜서 이 모든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보아내지 못했는지 양최득은 스스로도 리해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여러가지 느낌과 깨달음이 오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을 오래 삭혀둔다. 놀라운 것은 그 속에서 그가 즐거움과 보람, 희열을 느꼈고 그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새롭지도 낡지도 않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조금씩 그것에 더 중독되고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는 조각칼을 버릴 수 없다. 밀을 가을하면서 박혔던 그의 손가락 굳은살은 이 칼로 해서 더욱 두꺼워졌다. 손바닥에 난 장알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그와 여전히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 날은 찌뿌둥하게 음침한 데다가 질척질척 비까지 내려서 공예공장의 매대 앞은 살벌하게 휑뎅그렁했다. 양최득이 매대의 종이조각품을 바꾸러 가자 그 때까지 호젓이 서서 매대를 지키고 있던 아가씨가 반색했다. 그녀는 일시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양최득더러 잠간만 대신 매대를 봐달라 부탁하고는 자기 일 보러 몸을 사렸다. 매대에 선 양최득이 밖에서 쏟아져내리는 비를 보며 넋을 잃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뛰여들어왔다. 매대를 사이 두고 살펴보니 웬 양복 차림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얼핏 보기에도 아주 위엄이 있어보였다. 양최득은 그가 공예품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찾아든 것이 아니라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렸을 것이라 생각하고 별로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오른쪽 벽 모서리 앞에 뚝 멈춰서더니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였다. 사나이가 바라보는 벽면에는 양최득이 그린 종규钟馗 형상의 조각그림이 걸려있었다. 이 조각그림은 원래 양최득이 마음 내키는 대로 가볍게 새긴 것이였는데 새기고 보니 마음에 들어서 액틀에 넣어 걸어놓았던 것이다. 종규그림은 도법이 간결했고 조각그림의 독특한 투각술透刻术로 생동하게 인물형상을 표현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표정, 넓고 멀리 바라보는 눈, 바람에 날리는 수염, 보면 살아숨쉬는 실제 인물처럼 립체감이 있었다. 원 도안의 액틀 형식도 돌파해서 공백을 많이 두었고 오른쪽 아래의 귀만 남겨두고 무성한 숲과 바위와 이어지게 하여 마치 손으로 조각한 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종규는 세상 밖의 비애와 처량함 속에 홀로 서있지만 세간과 련계하는 넓고 찬연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양최득 자신은 혹시 그 그림 속에 그가 지난 몇십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겨오면서 겪어온 복잡한 심경이 투영되여 세상을 살피고 있는듯한 은유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줄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최득이 사나이의 뒤로 걸어가자 그가 뒤로 얼굴을 돌렸다. 어딘가 퍽 눈에 익은 얼굴이였다. 양최득과 눈이 마주치자 사나이는 격동된 목소리로 양최득의 이름을 불렀다. 양최득은 그제야 그가 바로 옛날 시골에서 자기와 바둑을 두었던 상춘생임을 알아보았다.  “이 그림 말이야, 참 대단해!…” 상춘생은 손으로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입으로 연신 혀를 찼다. 둘은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춘생은 자기는 지금 바둑을 적게 두지만 파고들 정도로 바둑에 인이 박혀서 완전히 끊지 못했다고 했다.  상춘생은 말하면서도 자주 머리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자네 보기에 이 그림이 좋아보이는가? 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살 수 있지. 얼마인가? 양최득은 벽에 걸린 그림을 내리우며 상춘생에게 그저 선물하겠노라고 했다. 상춘생은 그림 액틀을 받쳐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양최득을 보며 말했다. “이 그림이 자네의 걸작이 맞는가?” “보아하니 자네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자네만 마음에 든다면 선물할 만하지!” 상춘생은 한동안 그림에만 빠져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나 원래 이 그림을 사려고 했는데 이것이 자네의 작품이라니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기회 되면 어느 날 자네를 우리 집에 청해서 예술을 둘러싸고 진지하게 말해보고 싶네.” 환갑 나이 되여서인지 동지 추위를 만나자 양최득은 몸이 싸늘하게 얼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출근했다. 물가가 오르고 있는 시세를 외면하고 조각그림을 원 격 대로 파는 데도 판로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양최득은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조각칼을 잡았다. 그러자 마음속에 하나의 도안이 붕 떠올랐다. 손에 잡은 조각칼이 종이에 닿는 순간 양최득의 온 신경은 모두 칼끝에만 쏠렸다. 칼끝에서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그림이 그려져서야 그는 칼질을 멈추었다. 그제야 손이 시린 느낌이 들어 그는 팔소매에 손을 찔러넣고 조용히 금방 새긴 작품을 살펴보았다.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그제야 그는 요즘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많이 적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송수화기를 집어들자 상춘생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상춘생은 그를 집으로 청했다. 그깟 한장의 그림이 뭐가 대단해서 집에 청하기까지 하는가! 양최득은 사양하려다가 상대가 바둑을 두자는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 혼자 사는 양최득에게는 다른 취미가 별로 없었다. 바둑을 두는 재미로 그는 매일을 버텼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 바둑친구와의 만남이 많이 적어졌다. 과거와는 달리 사람들은 친구를 집에 청해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운영하는 바둑실에 가서 간식까지 먹어가면서 바둑을 두었다. 양최득은 이러한 사교적인 바둑판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요즘 더 많은 바둑친구들은 인터넷에 올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바둑을 두면 언제든지 바둑을 놀아줄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양최득은 이렇게 두는 바둑에도 습관되지 않았다. 그는 바둑을 진지하게 두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 바둑을 두다 보면 상대가 억지를 부리거나 생떼를 쓰는 경우가 있게 된다. 양최득은 바둑 품위가 낮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이 바둑판을 더럽힌다고 격분해했다. 상춘생의 집은 도시에서 가까운 근교에 있었는데 거의 인기척이란 드문 편벽한 곳이였다. 상춘생이 알려준 집주소 대로 찾으니 눈앞에 파란 칠을 한 철란간에 둘러싸인 별장동네가 나타났다. 정문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불쑥 나타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다. 집 문어귀에 앉아있던 개가 양최득을 보자 사납게 짖어댔다. 여기는 호화주택구여서 오히려 시골풍의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기척을 듣고 상춘생이 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며 개를 제지시키고 양최득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북방의 습관 그대로 두손을 가운 스타일의 잠옷 소매에 찔러넣고 말했다. “루추한 우리 집을 찾아주어 고맙네.” “자네의 이 집을 루추하다고 하면 다른 집들은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루추한 집이라네. 이곳에 집을 산 사람들은 거의 모두 투자자들 뿐이고 진짜 눌러살고 있는 사람은 몇집이 안된다네. 그러니 집이 루추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듣자니 요즘 마을 뒤쪽에 높은 아빠트를 짓는다던데 장차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시끄러워지니까 그 때에 가서 이 집을 팔고 이사 갈 거네. 내가 이 집을 산 건 바로 아늑한 분위기가 좋아서였으니까.” 상춘생은 집을 팔고 사는 어마어마한 일을 아이들의 장난처럼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최득은 자기가 몇십년간 살아온 달팽이처럼 비좁은 지금의 집 공간을 좀 넓히는 일마저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마디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양최득은 상춘생이 수장품 대가라고 할 만한 큰 인물임을 알았다. 그는 수장품 업종에서 하나의 인기인물이 되여 수장품에 관한 텔레비죤강좌도 한 적이 있었다. 양최득은 평소 그러한 텔레비죤채널을 잘 보지 않기에 그런 일은 잘 모르고 있었다. “수집대가는 무슨 놈의 수집대가인가. 난 그냥 장사할 뿐이네. 그러나 수집을 생업으로 삼는 장사군들과는 좀 다르지. 난 그래도 력사를 알고 예술을 말하니까.” 상춘생은 양최득을 이끌고 그의 별장을 보여주었다. 수집대가는 확실히 다르기는 달랐다. 별장의 매 층마다 예술품들이 촘촘히 걸려있었고 계단을 올라가는 벽도 작고 귀여운 예술품들로 오밀조밀하게 꾸며져있었다. 아래층은 주방과 넓은 대청이였다. 양최득은 마치 고급가구점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였다. 유럽식 주방시설과 전자제품들을 죽 스쳐보던 그의 눈길이 예술품들에 미치자 놀란 빛을 띠며 정전된듯 뚝 멈추었다. 식당칸 바람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그림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가가 그린 작품이였다. 양최득이 몸 담고 있는 공예공장의 어떤 직원들은 평소 요즘 잘 나가는 화가들을 곧잘 화제로 삼았다. 그래서 양최득도 일찍 이 화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그림은 화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화법이 대담하고 개방적이여서 녀자의 자태가 유난히 짙고 요염했다.  “이 그림은 그저 그렇네. 왜냐하면 화가는 내가 작심하고 띄워줘서 된 거니까. 그래서 평소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기도 하지. 이 그림을 걸어놓지 않으면 그를 보기 미안해서 그냥 보기 좋으라구 걸어놓았을 뿐이네.”  상춘생은 잠간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여기 밑층에는 모두 일반적이고 수수한 그림들만 걸어놓았네. 이 그림들은 그냥 보기 좋게만 그린 그림들이지. 이 마을엔 경비가 있기는 하지만 편벽한 데다가 사람까지 적어서 도적이 들 위험이 많다네. 그래서 혹 예술에 대한 고상한 취미라도 있는 도적이 들어오면 보기 좋은 걸 갖고 가라고 여기에 부러 방편처럼 걸어놓았네. 그런 그림을 잃으면 마음이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2층 침실에 놓인 가구들은 간단하면서도 완비했다. 계획적으로 남긴 공간에는 예술적인 분위기로 꽉 차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거의 모두 국내외 명인들의 작품들이였다. 상춘생은 자기는 전문 국내 장사를 하기에 여기에 걸어놓은 작품들은 모두 그가 좋아하는 화가나 서예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양최득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이 작품들이 그냥 조건도 없이 아무 모임에서나 쉽게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춘생은 그 작품들의 우점들을 말할 줄 알았고 부족한 점들도 지적할 줄 알았다. 작품의 예술표현을 론하는 그의 말은 조리정연했고 화가가 어느 년대에 그림을 그렸고 매 화가는 모두 그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갖고 있기에 화가가 늙으면 늙을수록 값진 것만은 아니라는 섬세한 문제까지 론했다. 소장한 작품 속에 있는 한두폭 서화작품의 작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상춘생은 그들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아직 젊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 모두가 큰 잠재력을 갖고 있어서 자기가 추천하고 띄워주면 꼭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3층은 서재였는데 안에 서화를 소장하는 칸이 별도로 설치되여있었다. 긴 탁자 우에는 융단천이 고급스럽게 덮여있었다. 상춘생은 자기도 여기에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기도 하나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모두 찢어버렸다고 했다. 모처럼 모셔온 서화가는 일반적으로 모두 묵보를 남기는데 그러한 서화는 모두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용으로 쓴다고 했다. 이 층에는 작품은 많지 않았으나 모두 명품들이였다.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외국의 유화 한폭이 걸려있었는데 관례 대로 그는 외국의 그림을 취급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외국 유화를 걸어놓은 것은 그가 그냥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였다. 양최득이 보기에도 그림이 좋아보였다. 그림 속의 시내물과 넓은 들이 너무나 깨끗하고 조용하고 우아하고 치밀해서 마치 인간세상 밖의 다른 한 세상 같은 불도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양최득은 그와 상춘생이 작품을 감상하고 흔상하는 눈 높이가 같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했다.  제일 웃층은 루각이였다. 상춘생은 양최득에게 이 루각은 그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바둑실이라고 정중하게 소개했다. 양최득은 바둑실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울 것이라고 여겼으나 정작 상춘생을 따라 올라가 보니 생각과는 달리 하나의 명실상부한 루각이였다. 루각은 옛날 성안에 있었던 루각처럼 그다지 크지 않았고 꼭대기에 호랑이를 조각한 지붕창문 하나가 있었다. 그걸 보자 양최득은 일종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양최득은 어렸을 때부터 바로 이런 루각에서 살았었다. 지금의 새집들은 모두 비둘기장 같이 비좁은 아빠트들 뿐이여서 이런 루각은 거의 찾아불 수 없었다.  루각의 한가운데는 바둑탁자가 있었다. 탁자 우에는 박달나무로 만든 단단한 바둑판이 고풍스럽게 놓여있었다. 그 옆에 놓여있는 덮개 열린 두개의 바둑돌 통에는 마노바둑돌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루각 벽에는 세폭의 예술품이 정중하게 모셔져있었다. 한폭은 당대 초성草圣이라 불리는 인물의 서예작품이였는데 상춘생은 당대의 많은 서화작품들은 모두 시간의 고험과 검증을 거치지 않았으며 무릇 세간에서 인기를 끌고 주목받는 작품들은 모두 조작해서 계획적으로 띄워준 것들에 불과하다며 자기도 그런 조작자들 중의 일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성의 서예작품은 정말 명작이였다. 이것은 초성과 문우들이 시를 담론하는 내용을 담은 한폭의 서예작품이였다. 초성은 시에 대해 각별히 관심이 있어서 시에 대한 그의 담론에는 그만의 독특한 견해가 담겨있었다. 이 자폭은 임의대로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지 특별히 서예작품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였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며 내심을 고백하고 발설하는 것이다. 그로써 문화의 수양과 예술의 견해가 하나로 융화되고 유착된다.  다른 한폭은 이국타향에서 사는 중국계 화가가 그린 그림이였는데 그림 속에는 중국인만이 갖고 있는 함축성과 절제된 필묵이 엿보였고 어떻게 해도 떨쳐버릴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향수乡愁가 처연하게 응축되여있었다. 또 다른 한장은 양최득이 새긴 종규钟馗 조각그림이였다. 상춘생은 이 공간은 자기가 줄곧 비워두고 좋은 그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양최득의 종이조각품을 얻은 뒤에야 그것으로 이 자리를 메우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여기에 걸어놓은 그림이야말로 진정으로 독특한 예술품이라고 했다.  “나 말이야, 자네의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온몸과 마음이 전률하는 느낌이였네. 나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예술작품들을 보아왔지만 이 그림 만큼 예술성이 독특한 그림은 별로 보지 못했네. 그 때 난 몽환의 세계를 헤매다가 갑자기 인간세상에로 내려온듯한 기분이였지. 결국 눈에 차지도 않는 그 자그마한 공예품 판매점 벽에 걸려있던 이 그림이 나의 눈을 틔워주었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게 된다네.” 상춘생은 옆에 선 양최득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은 구도로 보나 표현으로 보나 모두 일반에 머물지 않고 있네. 그림 속 형상의 기질은 슬퍼하면서도 쇠락하지 않고 분노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으며 도법은 또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하고 공백은 버림이 도달하고저 하는 경지를 돌파해버리고 또 버려야 비로소 이 그림이 보여주고저 하는 진정한 미를 발견할 수 있지. 천재적인 유전자가 없고 인생의 고통이 없고 참고 지켜보는 인내력이 없다면 이런 걸작을 완성할 수 없지.” 상춘생의 찬탄에 양최득은 머리를 흔들어보일 뿐이였다. “자넨 원래부터 자네 자신이 예술창작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상춘생이 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내가 저것을 제일 높은 곳에 놓은 것은 자네가 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네. 완전히 예술적인 각도에서 엄선한 것이네. 같은 조각그림을 놓고도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돌파하려 했다면 소가 소 같지 않고 말이 말 같지 않게 그릴 수도 있지. 현대 예술인들은 모두 창의성을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만 모방에만 머물러있네. 말하자면 외국의 것을 모방한단 말일세. 그들은 어떻게 황당무계하게 그려도 외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폭의 공예품이니까 돈으로 가치를 계산한다면 근본적으로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수도 있지. 그러나 경매장에서 내가 소장한 작품이 몇백만 몇천만원에 팔려나간 적도 있다네. 물론 나에게도 나로서의 비애가 있다네. 나의 예술흔상과 작품을 소장하고 팔고 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생긴다네. 졸부들과 접촉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이란 오직 돈 밖에 없네. 경영과 경전은 언제나 한차원에 있지 않지. 그것들이 너무 어긋나서 난 두 얼굴을 가진 투페이스로 되는 때가 많네. 그러나 내가 더 큰 경제적인 리익을 얻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좋아하는 예술품을 소장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자네가 예술에 대해 이렇듯 깊은 리해와 표현력을 갖고 있으니 만약 진작부터 그림을 그렸더라면 긍적적으로 큰 실적을 쌓았을 거네. 지금 그림 한장이 걸핏하면 수만원을 호가하는데 거기에 내가 자네를 포장하고 띄워줘서 미술협회주석 자리라도 낚는다면 1년에 몇십만원을 벌기는 식은 죽 먹기지. 물론 지금 이 나이에 와서 업종을 바꾸기엔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종이조각예술과 비슷한 것이 바로 전각篆刻이지. 다 조각칼을 다루니까. 요즘 금석 업종이 아주 벌이가 잘되는 모양이더군. 방각仿刻을 갖춘 도장 하나가 몇만원에 팔린다네. 그런데 자네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겠지. 부류가 다르고 표현이 다르니까. 도장의 면이 너무 작아서 자네의 상상을 발휘할 수도 없지. 보아하니 자넨 여전히 자네의 종이조각 업종에 종사해야 하겠군. 이건 하나의 버림받은 예술의 패턴이기에 내가 자네를 도와 조작하고 띄우려고 해도 안되네. 지금 같은 상품화 시대에 표현이 독특한 예술을 견지하자면 자그마한 희생은 감내해야 하네. 혹시 자네의 돌파나 노력, 로고 같은 것들은 다만 한 사람의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자네는 현시대 사람들과 같은 선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현시대 사람들이 접수할 만한 작품을 그려낼 수 없을 거네. 설사 자네 종이조각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진정으로 리해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나 한사람 뿐일 거네.” “난 자네 한사람만으로 족하네!” 양최득은 손에 잡고 있던 바둑알 하나를 바둑판 천원점 우에 힘있게 놓았다. 검은 마노바둑돌 하나가 바둑판 한가운데서 맑고 눈부신 초록색 빛을 외롭게 발했다. (김재국 옮김) 출처:2018 제2호
24    라나: 모래성(시) 댓글:  조회:363  추천:0  2019-07-11
모래성 라나   바다가에 쌓은 작은모래성 하나 백사장에 그려진 예쁜발자국 밀물에 밀려갈가 썰물에 씻겨갈가 보고 보고 또보고 있노라면 붉게 타오른 저녁 노을은 지고 두둥실 밝은 달 밤바다의 새악시 데려가는소리만 들리네 출처:2018 제2호
23    박지아: 애절함(시) 댓글:  조회:343  추천:0  2019-07-11
애절함 박지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이라는 말을 살아가면서 알았다     사소하면서도 숨 쉬듯이 평범하여 홀시하기 쉽고 당연한 것들  그 일상적인 것들이 애절하게 색바래졌다   밤은 깊어가지만  잠은 늘 부족하고 몸은 지쳐만 간다 책장에 책들은 쌓여만 가지만  몰입하는 독서시간은 줄어들기만 한다 그토록 사람이 그리워  만남을 기대하지만  마음의 여울을 열지도 못한 채 헤여진다 살아가면서 애틋하게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는지 돌이켜본다    아침마다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를, 아이와 우리말로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생각이나 했던가 아침식탁에 차려지는 김치와 장국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에  나는 오늘도 애가 탄다    하루 삼시 허둥대며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하고 그런 속절없는 일에 몸뚱아리를 지탱한다면  얼마나 속절없이 허무할 것인가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것들에  이 애절함은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편지로 쓴 이 사무침은 또 어디로 띄워야 하나 아하, 지친 이 맘 보낼 곳이 없구나 출처:2018 제2호
22    김미옥: 명태(수필) 댓글:  조회:388  추천:0  2019-07-11
명태 김미옥   나는 어려서부터 생선을 유난히 좋아한다. 찜, 졸임, 구이, 회… 조리방식에 상관 없이 지금도 밥상에 생선이 오르면 그것 만큼 기쁠 때가 없다. 혼자서 조기구이 한마리 정도는 거뜬하게 해치우며 회집에 가면 혼자서도 ‘중’짜리 모듬회를 먹어치울 정도다. 샤브샤브 먹을 때도 소고기나 양고기는 없어도 괜찮지만 새우완자나 오징어완자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나의 생선사랑은 유별나다. 고기 없이는 살아도 생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입에 대지 않는 생선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명태다.  명태, 우리 민족의 명태사랑 역시 나의 생선사랑 못지 않은 것 같다. 황태, 동태, 짝태, 생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등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특히 연변지역 사람들은 명태를 유난히 좋아하여 조리방식 또한 다양하다. 게다가 명태살만 발라먹는 것이 아니고 명태 뼈나 껍질을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 간식으로 먹고 명태눈알까지도 아작아작 씹어먹는 것을 보면 명태는 버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선 중의 보배요,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의 일등 공신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명태를 아주 좋아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방망이로 명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내 숙제공부의 배경소음이 되고 푸근한 엄마냄새가 비릿한 명태냄새로 바뀌기 시작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해빛도 들지 않는 단층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나타난다.  3학년으로 올라가던 그 해 여름, 간암말기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아빠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고 아이들만 우는 줄 알았던 나는 그 때서야 어른들도 운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아까운 나이에 뭐가 그리 급해서 저 어린 걸 남겨두고…” 하며 우시던 친척 분들, 엄마는 내 곁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그 뒤로 문턱이 다슬도록 찾아오던 친척들은 점점 발길이 뜸해지다가 언제부턴가 끊어져버렸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우리 집,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이 바로 엄마의 방망이질이다.  나도 자식 키우는 립장이 되고 보니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혼자 딸 뒤바라지를 해 대학에까지 보낸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변변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외국으로 돈벌이 나간 것도 아니고 오직 뚝심 하나로 10년을 자식 옆에서 버텨온 엄마에게 “고생 많았어, 엄마.”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아빠가 세상뜬 후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나섰다. 봄에는 삯모하러 다녔고 가을이면 사과배 따러 다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시던 엄마,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방 한구석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가 엄마가 돌아오는 기척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면 엄마는 가방 속에서 아껴두었던 새참을 꺼내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준다. 그리고는 가마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대충 드신 다음 방 한구석에 고단히 주무셨다.  얼마 뒤 엄마는 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를 알게 되여 집에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을 하게 되였고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항상 엄마가 반겨주었다. 내가 숙제공부를 할 때면 엄마는 항상 말없이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었다. 겨우내 찬바람 속에서 단단하게 말라붙은 명태를 방망이로 꽝꽝 내리치고는 뾰족한 칼끝으로 배에서 꼬리부분까지 단번에 쭉 찢은 다음 뼈를 훑어내고 반듯하게 펴지라고 엉뎅이 밑에 깔고 앉는다.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펴진 명태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고는 그 우에 나무판자를 펴고 무거운 바위돌로 다시 한번 짓눌러놓아야 이튿날이면 납작하게 펴진 명태를 얻을 수 있다. 품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명태 한마리당 가공비가 3전 밖에 안되는지라 엄마는 하루종일 손에서 명태를 놓지 않으셨고 오줌 누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면 “에구구 허리야…” 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잘 준비를 하면 그 때서야 엄마는 손에서 명태를 놓군 했는데 옷소매와 바지가랭이에는 항상 명태뼈가 달라붙어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해보겠다고 나섰더니 엄마가 넌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했으나 내가 자꾸만 졸라대자 내 성화에 못이겨 그럼 한번 해보라고 허락했다. 내 팔목보다도 두배나 굵은 수제방망이, 명태가공을 위해 엄마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명태를 내리치는 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였다. 몇번 안하고 나는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고 이번에는 명태를 칼로 찢는 일을 해보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예리한 칼끝으로 단번에 꼬리까지 쭉 내리찢는 것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칼로 뼈를 훑어낼 때 요령이 부족하면 살까지 떨어져나갔다. 돈 한푼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고 그 때부터 방학이 되면 엄마 옆에서 일을 도와드렸다.        “엄마는 배운 게 없어서 이런 일을 하니까 넌 이담에 꼭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해라. ”  엄마는 늘 습관처럼 나에게 말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엄마의 몸에는 명태비린내가 진하게 배였고 두손에는 굳은살이 늘어갔다.   “이 정도 고생이면 한국에 나가서 돈 벌어도 힘든 걸 못 느끼겠는데 차라리 한국에나 가서 돈 벌지.”  명태 한마리에 가공비 3전씩 받으며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가 리해 안된다는듯 이웃 아줌마들이 엄마에게 권유했다.  “쟤를 공부 다 시키면 그 때 갈려구요.” 엄마는 정말로 내가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말없이 명태가공일을 하면서 내 곁을 지켜주었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집을 팔아버리고 돈 벌러 한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몇년간 얼굴을 못 보고 있다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것은 엄마가 외할머니가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매일마다 출근하는 나를 현관문앞까지 흐뭇한 얼굴로 바래준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하는 내가 부럽고 자랑스러운듯. 얼마 전 엄마랑 고향을 다녀왔다. 십여년 만에 돌아간 연길은 몰라보게 변해있었고 난 자신이 마치 낯선 도시에 온 관광객 같았다. 서시장 뒤골목을 걷고 있으니 떡, 젓갈, 고추장, 김치… 등 여러가지 음식을 파는 조선족아줌마들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연변말투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대롱대롱 매달린 명태, 납작하게 펴진 명태, 빨갛게 양념한 명태, 각종 명태들도 눈에 안겨왔다. 그 옛날의 우리 엄마처럼 어느 누군가도 지금 쯤 공부하는 딸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겠지? 자식 위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들어 우리 민족이 각별히 즐겨먹는 명태의 짭짤한 맛이 더해진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출처:2018 제2호
21    성해동: 립춘(시, 외2수) 댓글:  조회:429  추천:0  2019-07-11
립춘(외2수) 성해동   가슴 속에  겹겹이 닫힌 장지문 찢어진 창호지가 바람에 팔랑인다    칼칼한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미련에 아직도 기침은 멎지 않고  욕망으로 뒤틀린 창자는 살얼음판이겠다    방울방울  녹아내리는 고드름에 처마에 매달린 낡은 풍경이 한숨도 쉴 수가 없다   한파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가슴이 콩닥거려  부랴부랴 붙이는 립춘방이겠다   어둠이 있어 빛나는 저 별 겨울이 있어 반가운 이 봄     스치는 풍경   수많은 차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산과 강과 논과 밭을 스치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고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관계 맺고 꽃은 어떻게 피우고 풍파는 어떻게 견디는지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단지 공허한 웨침에 불과한  모든 걸 스쳐보내는 시속 230키로메터    얼마나 많은 다음을 기약하고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 세상을 사는가?   나만 빠르게 달려 결국 혼자가 되여버린  멈추는 법을 잊어 넘어지는 일만 남은 나   기쁠 땐 누구와 공유하고 힘들 땐 누구에게 의지하지    소홀하거나  민망하거나  마음을 쓴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 꼬여버린 실타래  한올이라도 잘리면  그 순간 날카로운 가시가 되는  달빛의 위로가 필요한 나   애써 기억 속에 붙잡는다 바람과 나무 기차에서 내리면  잊어버릴 저 풍경이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나는야 양치기 소년    어릴 때부터 만들어  하나의 집착이 되여  이번엔 진짜 튼튼히 만들어  평생 함께 하리라 믿었는데    리유도 시기도 가물가물한 어느 날 당황하며 찾은 망치와 나무판자로 눈물을 훔치며 하는 망치질   처음으로 부서진  울타리 안에서 나는야  너를 부르는  양치기 소년   바람에 목적지가 없듯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함께 가야만 하는  양치기 소년 나는 너희가 되고  너희는 나 되는가    부서진 울타리 안에 홀로 남은 이 몸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을 간단히 부정할 수 있었던 오늘도  튼튼한 판자와 못을 찾아다니는 나는야 양치기 소년 출처:2018년 제2호
20    곽미란: 첫사랑(시, 외1수) 댓글:  조회:330  추천:0  2019-07-11
첫사랑(외1수) 곽미란   첫사랑이라고 제목을 써놓고  맥주 한모금 마신다 1664 프랑스 맥주 첨 마셔보는 맥주다    보리가 아닌 밀로 만들어진 맥주  거품이 풍성하고 부드러운 맥주 첫사랑처럼 달콤하고 첫사랑처럼 불투명한   사람들은 누구나  처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처음 마셔보는 맥주이든   처음이라는 건 그토록 설레이고 그토록 미묘하고 그토록 아름다운 것 나는 오늘 처음으로 쎄즈 스와쌍 꺄트르를 마시며  다시 한번 첫사랑에 빠진다  거품의 바다에     마라탕이 먹고 싶은 날   울고 싶은 날이거나 사람이 그리운 날이면 어김없이 마라탕이 생각난다   상하이 허촨루 길모퉁이의 마라탕집 뼈속까지 으슬으슬 떨리는 겨울에도 더워서 정신을 못 차리는 여름에도 마라탕집은 늘 앉을 자리가 없다   감자 연근 두부 당면 오징어 소시지 게맛살 표고버섯 쌀국수 누룽지 펄펄 끓는 육수 속에 푹 익어간다   남과 북 륙지와 바다 이곳과 저곳 이 세상 구석구석의 맛이 하나로 된다   다진 파와 마늘, 생강과 고추기름을 듬뿍 넣으면 뽀얀 김에 스트레스 날려가고 가슴엔 행복 한덩이 가라앉는다   멋쟁이 상하이 아줌마도 호들갑스런 한국 아줌마도 오구작작 떠드는 출근족들도 지하철역 구두수리공 아저씨도 자그마한 원형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 붙이고 15원짜리 행복에 취한다 출처:2018년 제2호
19    김명숙:산이 아프다(수필) 댓글:  조회:315  추천:0  2019-07-11
산이 아프다 김명숙   나는 홀로 걷고 있다. 어디까지 걸었는지 모른다. 얼마 동안 걸었는지도 모른다. 바람 따라 발길 따라 몸을 맡겨버렸다. 대화가 사무치게 그립고 어딘가에 잠간 몸을 기대고 싶다. 하지만 바람소리만 점점 기승을 부리고 눈앞이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이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강물과 대화를 걸었더니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모습도 어디론가 종적이 묘연해졌고 하늘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눈개비마저 보내주지 않는다. 정처없이 앞을 향해 무작정 걷고 걷는데 멀리서 희미한 륜곽이 내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온다. 눈을 비비고 다시 뚫어지게 그 곳을 응시했다. 확실하게 뭔가가 보인다. 순간 내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힘을 얻고 발걸음을 재우쳤다. 륜곽이 점점 뚜렷해지더니 우람진 체구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어느덧 내 발길도 그 곳에 닿았다. 하늘을 치받아 고개를 번쩍 쳐들고 병풍을 휘둘러 천하를 휘감은듯한 웅위로운 그 모습! 산! 산이다. 산만이 지치도록 몸부림치며 방황하는 나를 위로해줄듯 싶다. 그래서 내 정처없는 발길이 이곳까지 왔을가? 내 목적지가 여기였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내가 산을 흠모한 적 있었던가? 그래서 여태 산을 찾아 이토록 애타게 헤매였을가? 대바른 사나이 같이 무게 있는 품위는 내 가슴에 맺힌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하소연들을 속속들이 들어줄 것 같았고 그 거대한 몸체는 가냘프고 무너질듯한 내 육체를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방패 같이 느껴졌다.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뼈속까지 찌르던 추위를 어느덧 잠재워놓고 산은 따뜻한 기운으로 나를 맞아준다. 방대한 식솔들을 동원하여 푸른 바탕의 무대를 펼쳐놓고 그 우에 인간의 령혼을 싹 앗아갈듯 아름다운 대자연의 미인들을 풀어놓는다.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푸르른 무대 우에서 살랑대는 그 모습에 허공에 뜬 고무풍선마냥 방향 없이 허둥대던 내 마음이 소리없이 끌려든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고 누구도 받아주지 않던 나를 산은 그토록 따뜻하게 그토록 열정껏 맞아준다.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하는데 대자연의 온갖 예리한 시선들이 산의 인기에 매혹되는 순간 질투로 약이 오른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토하며 지꿎게도 그의 몸체를 지져가기 시작한다. 산은 어쩔 수 없이 미인들을 퇴장시키고 용맹하게 불덩이 같은 열기를 내뿜는 태양의 기세에 맞서 몸속의 온갖 에네르기를 동원하여 신선한 산소를 뿜어가면서 무서운 폭염에 대처해나간다. 어느덧 그처럼 기세를 부리던 태양도 맥이 진했는지 뜨꺼운 열기를 슬며시 거둬들인다.  그 무섭고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고 공포에 젖어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더니 산은 어느덧 수다쟁이 녀인마냥 우람진 체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자기 몸을 울긋불긋 꽃무늬로 단장시킨다. 어데라 없이 빨갛게 노랗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같은 한폭의 수채화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주위의 분위기를 재치 있게 완화시키는 산의 그 실력은 또 한번 내 마음을 움켜잡았다. 산의 그 익살스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일이 마뜩잖아 여태 옹졸하게 닫겨있던 내 마음이 이젠 좀씩 풀리기 시작한다. 때를 같이 하여 산은 또 소중히 간직해오던 보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한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다. 귀중한 약재며 달콤한 열매 그리고 개암버섯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나에게까지 아낌없이 베풀어가는 산의 훌륭한 성품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내 아픔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순간 부질없이 흘러보낸 소중한 시간들이 안타까와지면서 하루속히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친다.  떠나려는 나를 바래주려고 산은 어느새 꽃무늬옷을 벗어버리고 요술쟁이마냥 하얀 옷으로 몸을 감싸버린다. 자기를 그토록 흠모하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듯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선녀를 보는듯한 내 마음은 무난하기 그지 없다. 헌신과 베품을 천직으로 수없이 모습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다루는 그의 뛰여난 실력에 나는 스스로 고개가 숙어진다.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다시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백설 같이 아름다운 드레스 밑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간간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미약하던 신음소리는 점점 높아갔다. 갈길을 재촉하던 나는 우뚝 멈춰섰다. 내 발길이 그의 신변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신음소리가 울부짖음소리로 변한다. 산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심하게 휘청거린다. 살을 에여내는듯한 무서운 엄한이 사나운 광풍을 몰고 와 그의 식솔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산은 그 많은 식솔들을 일일이 잡아주느라 천하가 떠나갈듯 고함을 치기도 하고 땅이 뒤집힐듯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의 가까이에 닿고서야 나는 세상을 독차지한듯 부럼 없는 산에게도 이처럼 큰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산이 아프다! 산이 심하게 아픔을 겪고 있다. 산은 사시절 극심한 아픔을 겪는다. 봄이면 수많은 새 생명들이 고고성을 울리며 그의 몸을 꿰뚫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산은 산모로서의 무서운 아픔을 겪는다. 여름이면 심한 폭염에 견디느라 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사정 없는 홍수에 살점이 뜯기여나가고 식솔들이 쓰러져나가는 바람에 산은 피눈물을 흘린다. 가을이면 멋진 그의 모습에 반하여 찾아오는 고객들 그리고 보물에 눈독을 들여 자연의 재부마저도 무참히 짓밟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성화에 산은 심하게 지쳐가고 몸이 망가지기도 한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을계절도 산은 이처럼 말 못할 고통을 삼키며 또 힘든 겨울을 맞는다. 하지만 이처럼 모진 아픔에도 산은 용케 참고 버텨간다. 헌신과 베품을 천직으로 살아가는 산의 심한 아픔을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이 못견디게 아프다. 나는 지금 산의 신변에서 그의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심한 아픔으로 고통을 겪는 나날이 오니 그의 신변에 수없이 찍혀있던 발자국들은 하나 둘 사라진다. 미녀들에 반하여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이들도, 꽃무늬옷이 이쁘다고 엄지를 내들고 걸탐스레 보물들에 눈독을 들이던 이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산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기색이란 조금도 없다. 하냥 그 자리에서 강의한 의력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기 모습을 지켜간다. 심하게 아파하는 그의 곁을 매몰차게 떠나버린 발자국들을 바라보며 그가 아닌 내가 그들을 원망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보니 내 옹졸한 마음이 더더욱 부끄러워진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은 깊이 감춰버리고 타인을 위한 헌신과 베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가슴의 작디작은 아픔도 감추지 못하고 세상일을 마뜩잖아하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던 자신이 참으로 수치스럽다. 나는 항상 내 보잘 것 없는 실력을 모르고 내 설자리가 없다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작은 가슴에 불만만 쌓아갔다. 힘들고 가파로운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돌멩이에 걸채여 넘어질 수도 있다. 넘어지면 피가 흐르고 상처가 생길 수도 있는데 나는 내 스스로 그 상처들을 치유할 대신 비겁하게 뒤걸음만 치면서 도전에는 담을 쌓고 허무한 나날들을 속절없이 보냈었다. 비록 내 모습이 작고 못났지만 목표 없이 허둥대는 마음부터 바르게 강하게 다스리고 날마다 내 볼품 없는 모습이라도 부지런히 열심히 가꿔간다면 부족한 틈서리들이 언젠가는 메워지지 않을가? 비록 산처럼 크고 멋진 인격은 갖추지 못했지만 작고 담찬 모습으로 현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내 욕심과 욕망을 앞세우기 전에 타인의 아픔과 상처들을 먼저 헤아려주고 보듬어준다면 볼품 없는 나에게도 내가 다가가기 전에 산처럼 멋진 누군가가 다가올 수 있지 않을가? 나는 오늘 명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하냥 썰렁하게만 느껴지던 대지가 따뜻이 나를 포옹한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내 생애에 조미료를 듬뿍 뿌려준 고마움들을 떠올리니 텅 빈듯한 허허벌판이 어디론가 멀리 종적을 감춘다. 바람도 자고 대지도 그림 같이 아름답다. 도란도란 강물은 모습을 찾았고 하늘에는 하얀 꽃구름들이 수없이 흘러간다. 산과 작별을 고하고 오는 내 마음은 오직 하나의 걱정만으로 마음이 조여진다. 산! 산이 아픔을 겪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명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태고 적 전설들을 가슴 속 깊이 묻고 무수한 풍상风霜들을 온몸으로 삭이면서 웅지雄志를 한껏 펼치려 벽공碧空으로 치솟았나. 출처:2018 제2호
18    김광영: 파란 전화기(수필) 댓글:  조회:322  추천:0  2019-07-11
파란 전화기 김광영   5월 14일 어머니의 날이다. 이제 전화할 데가 없다. 물론 생전에도 휴대전화 한번 못 써봤던 엄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운던 시절의 이야기라 할가 내가 갓 입사했을 때는 90년대 초반이였으니까 고향에서 집에 전화가 있다는 건 사치였다. 우리 집 전화는 사무실 대선배님이 내가 평소에 엄마하고 자주 전화통화를 하라고 전화 가설비를 주어서부터 생겨났다. 그 때 돈으로 천원을 주면서 이번 설에 집에 가면 꼭 전화를 가설하라고 배려해주셨다. 그 때 나의 로임이 천원 미만이였으니 나에게는 많은 돈이였다. 나는 그 해 설에 집에 전화를 가설하게 되였다. 파란색 전화기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빠트가 아니라 단층집 구역에 있어서 전화선이 들어와있지 않았다. 선을 따로 늘이려면 또 우정국의 사람을 통해야만 했다. 마침 고중 동창이 사람을 찾아줘서 빠른 시간 내에 전화를 개통하게 되였다. 정상적으로 비용을 내도 관계를 찾아야만 가능한 이른바 관계가 소개신보다 나았던 시기였다.  전화기가 있기 전에는 편지나 전보나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고 받았다. 지금은 편지를 요구해도 받아보기 힘든 시대지만 중요한 사교수단의 하나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편지는 담기는 내용에 따라 사연도 많았다. 최근에 고향에서 녀자 동창들과 만나고 나서 중학교 때 얼마나 많은 남학생들의 련애편지가  선생님들 손으로 들어갔는지를 알게 되였다. 그 때 녀학생들은 련애편지를 받으며 첫 반응이 겁부터 났다고 한다. 애가 왜 나한테 이러지? 다른 친구들이 알면 어쩌지? 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날 텐데… 대개 이런 심리에서 편지를 받는 족족 성생님께 바쳤다고 한다. 어떤 편지는 아예 무슨 내용인지 보지도 않고 바쳤단다. 물론 아예 관심이 없는 남학생의 편지니 그냥 뜯지도 않고 바쳤을 것이다. 마침 얼마간 호감이 갔던 남학생이였다면 무슨 내용인지는 훔쳐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와중에 련애편지 한번도 못 받아본 녀학생들은 또 얼마나 허무했을가? 한번도 못 줘본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편지를 건네보지는 못했지만 못 써본 건 아니다. 설레는 마음을 눅잦히고 알심들여 쓰고 지우고 고치고 완성한 편지를 결국 주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걸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부치지 못한 편지, 무슨 수필 제목에서나 볼 법한 사연을 내가 만든 것이다. 오히려 주기라도 하고 퇴짜를 맞는 게 나았을걸 그랬다. 후회는 항상 가장 아쉬운 부분에서 상처가 깊다. 그 뒤로 편지는 대학교에 와서 많이 써봤다. 그 사이 도와준 친척 친우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하는 것도 있겠지만 편지라는 것은 회신이 있어서 그 회답편지를 받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기에 또 옹졸하게 회답편지를 유도한 작전이 한번 있었다. 중학교 때 호감이 갔던 녀학생 후배가 있었는데 각기 다른 도시로 학교를 가게 되였다. 타성의 벽을 넘어 편지가 오가며 지내던 중 어느 순간 저쪽에서 회답이 없어졌다. 회답편지가 기다려지기도 하고 받은 편지에 답장을 안하는 것이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답이 없냐고 편지를 써서 물을 법도 했건만 그냥 백지 몇장을 봉투에 넣어 부쳐보냈다. 뜻인즉 답장이 없는데 편지종이까지 받쳐줄 테니 답장은 하면서 살자는 대개 그런 뜻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금방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답장이 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속 좁은 행동이였지만 그 때는 그러고 살았다. 학교 때 편지와 비슷한 또 하나의 재미는 년말에 친척친우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일이다. 누구에게 새해 엽서가 많이 오면 그것도 자랑이고 괜히 뿌듯해했다. 지금은 문자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 굳이 편지를 보내고 받을 일이 없지만 편지는 편지로서의 고유의 매력을 갖고 있고 소장의 가치도 있다. 특히 타이핑인 아닌 펜으로 직접 쓴 손편지는 지금 받아도 하나의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던 중 통신수단의 혁신적인 돌파로 호출기가 출시된다. 일명 삐삐기라도 했던 이 작은 물건은 교환수나 자동시스템을 통해 련락을 바라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띄워준다. 나중에는 한단계 발전해 직접 문자가 뜨는 데까지 발전한다. 호출기는 당시 고가의 통신제품이였던 만큼 애지중지 아껴서 어디 부딪치거나 긁히는 것을 막아주는 씌우개도 했다. 씌우개 중에는 투명하게 비닐로 된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멋으로 100딸라짜리 지페를 끼워넣고 다니기도 했다. 졸업 전 실습기간에 허리춤에 호출기를 차고 다니며 우연일지라도 바지 주머니에서 미국 딸라가 삐죽이 나와있는 현상을 목격한 회사에서 이 학생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학생들이 아니라고 판단해 아예 채용할 생각을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직 널리 보급된 상황은 아닌 시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호출기를 소지하고 다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 실습회사에도 호출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던 시기였으니까. 우리 시대에 우리 학교 조선족 학생들한테서만 볼 수 있었던 특수 현상이였다. 한달 생활비가 백원에서 백오십원였던 시절에 몇천원짜리 호출기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였다.  그 뒤로 휴대전화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휴대전화와 호출기가 병존했다. 주요 원인은 휴대전화 비용이 감당이 안돼서 호출기로 상대방의 전화를 받은 후 꼭 회답을 해야 할 전화만 휴대전화로 하고 급하지 않으면 유선전화를 리용했다. 이 때는 휴대전화를 들고 공공뻐스를 타면 그 수준에서 휴대전화는 왜 갖고 다니냐 하는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기다. 자전거를 타면서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총을 받았다. 그만큼 휴대전화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였다. 특히 초기 아날로그 휴대전화 시절에는 벽돌 반장 만한 크기의 휴대전화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회식장소에서 테이블에 척 올려놓으면 그만한 위풍이 없다.   그러다가 전화기는 작아지고 액정화면은 커지는 추세로 발전했다. 가격도 옛날처럼 그렇게 고가도 아니고 부의 상징도 아닌 시대가 도래한다. 이 때는 휴대전화을 잃어버리는 고봉기다. 나는 일편단심 노키아를 선호했는데 아마 일년에 십여대는 잃어버린 것 같다. 넘어진 김에 쉬여간다고 잃어버린 기회에 다른 기종도 써보고 싶었지만 잃어버렸다는 걸 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년 내내 똑같은 기종을 사야 했다. 안타까운 건 갱신이 빠른 휴대전화는 똑같은 기종을 바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기종을 사고 싶어도 파는 데가 없어서 결국은 전화기를 잃어버린 사실이 들통났다.  스마트폰 시대는 예고 없이 쑥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휴대전화에 매달려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휴대전화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아주 불편한 시대를 맞이한다. 옆에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더는 련인 사이 죽고 못사는 애틋한 장면이 아니다. 옆에 있어도 서로가 각자의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니 그만한 거리가 또 어디 있을가 싶다.  무관심 만큼 살상력이 강력한 무기는 없다. 휴대전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의뢰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회의 중에 휴대전화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회의 사회자에 대한 그 이상의 결례는 없다. 또 회식 장소에서 휴대전화를 끊임없이 들여다볼 거면 왜 그 자리에 나오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요즘 학생들은 기숙사 아래 침대에서 2층 침대 학생에게 위챗으로 통지를 전달한다고 한다.  편지-유선전화-호출기-휴대전화, 통신수단으로서의 이 네개 중 호출기만 사라졌다. 휴대전화가 호출기의 모든 기능을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건 그 자체의 특유의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쓴 편지, 글자마다에 새겨진 진심과 성의가 그의 매력이고 생명력이다. 그래서 나는 짧든 길든 나에게 손으로 적어준 편지들을 차곡차곡 보관해둔다. 창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울적한 날에는 이런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아름다운 옛 추억들을 떠올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을 그리게 된다.  이제 휴대전화는 또 전화를 걸기보다는 음성메시지나 문자를 많이 활용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소통의 방식이 바뀌여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은 역행할 수 없다. 이러한 소통방식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간에 적응해가야 한다.  하지만 통신수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든간에 우리 집의 첫 전화기, 파란색 전화기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하라고 가설해준 사무실 대선배님의 배려를 잊을 수 없고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전화기는 나도 대선배님이 했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하는 상징체이기도 하다. 하늘나라에서는 무슨 전화기를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번호도 모르는 전화기에 마냥 걸고 싶고 목소리를 단 한번만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그 파란 전화기를 더 그립게 한다.    출처:2018 제2호
17    심명주:‘집시’가 되여(수필) 댓글:  조회:370  추천:0  2019-07-11
‘집시’가 되여 심명주   이사를 했으나 아직 많은 물건이 남은 낡은 집에는 정리할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간만에 낡은 아빠트로 다시 갔다. 다시 마주한 아빠트는 못 본 사이에 늙어버린 사람 같았다.  겉이 멀쩡한 밑층 대문은 여전히 묵직했고 여닫음이 자유로왔다. 2층을 오르고 3, 4층을 지나 5층까지 도착하는데 갑자기 쓸쓸함 같은 것이 훅 파고 온다. 드디여 7층에 다달아 숙련된 솜씨로 집열쇠를 틀었다. 때묻은 집안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은 이사짐으로 뒤죽박죽이 된 풍경이다. 신을 벗고 먼지 앉은 바닥에서 다시 끌신을 찾아 주방까지 직진하여 익숙하게 랭장고문을 열었다.  연극이 끝난 무대인양 불 꺼지고 텅 빈 랭장고 안. 잠시 흐트러진 내 기억의 퍼즐에서 마음을 되찾아 객실로 나왔고 이리저리 널린 이사짐 사이에서 앉을 곳 없어 서성이다가 이번에는 내가 서버린 랭장고처럼 휑하니 비여있는다.  꼬박 11년을 내 둥지로 삼았던 집에서 곧 완전히 이사를 나오게 되였다. 푸르른 나무들로 빼곡한 바깥풍경이 훤하게 트인 데다가 조용하기까지 하여 그야말로 내 세상 같던 다락층 이 소가에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기를 얼마의 시간이였던가.  이사를 앞둔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류랑을 앞둔 ‘집시’이다. 낡은 곳을 털어 힘차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마음은 웬 허전함과 막연함으로 에돈다. 이사짐 꾸미는 날 밖에서는 여름비가 내렸다. 이렇게 비가 온 날 저녁이면 방충망 내린 창문은 어김없이 저 아래 숲속에서 귀뚜라미 울음 한웅큼씩 건져 내 귀에 부어주군 했다. 그 때면 나는 귀뚤귀뚤 소리와 함께 창을 타고 밀려오는 청신한 밤공기를 어우러 낮동안 나른해진 몸을 추스르군 했었지. 헌데 이제 우리는 정말 리별해야 할 시간이다. 이사는 추억을 갈무리하는 한차례 들춤거림이다. 그리고 곧 내가 새롭게 자리잡을 또 다른 집. 집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 몸을 맡길 믿음직한 지분 한쪼각 같은 것이라서 사람은 늘 그것에 의지하고 련련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난 기억도 사람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단단한 지분 같은 것이리라. 수많은 그런 지분 중에 제일 오래고 낡은 것은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다. 어찌하여 그 나날의 빛과 냄새와 슬픔의 온도까지 나는 아직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노란 전구가 빤히 드리운 밤, 초저녁에 이미 누워 잠든 엄마의 가슴을 헤치고 젖 먹으려고 입을 댔던 나는 갑자기 쓰디쓴 젖맛에 소스라치게 엄마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엄마가 젖먹이 나를 떼여내려고 유두에 개열을 바르고 잤던 것인데 어린 나는 예고 없이 찾아온 쓰디쓴 맛에 입이 타는듯 기겁을 했고 잇달아 차오르는 엄마에 대한 배신감과 서러움이 슬픔으로 퍼져 울어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를 얼마일가, 웃방에서 자던 대여섯살배기 오빠가 눈 비비며 깨여나더니 정주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잠도 못 깬 채 아무 말 없이 엄마젖을 힘차게 빨아서는 바닥에 가서 뱉어버리고 다시 빨아서는 또 달려가 버리기 시작했다. 드디여 쓴맛이 사라지자 우는 나를 보듬어 엄마 젖 물려주던 일…   노란 전구와 노란 구들과 초라한 가마목과 온 하루 일밭에서 헤맨, 습습한듯 익숙한 엄마 몸의 냄새와 목 쉰 나의 울음소리와 오빠의 달램과 곁에 아무도 없는듯 서럽던 슬픔과 배신과 무기력함들… 지금껏 내 기억에서 그것들이 퇴색할 줄 모른다. 락인처럼 박힌 기억은 누구에게나 신비한 비밀처럼 더욱 또렷하게 남아있는 법인듯하다. 기억에도 분명 생로병사가 있음직한데 사람들은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혹처럼 혹은 지병처럼 지독하게 깊숙이 넣고 다닌다. 지금처럼 그 기억이 툭하고 튀여나오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지워지지 않는 서럽던 엄마와의 그 기억 덕분에 로산으로 아들을 낳으면서 나는 31개월 동안 모유수유로 기꺼이 아들에게 내 가슴을 내여주었다. 또 지금 아들과의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 옛 생각처럼 곧 이사할 이 집에 고스란히 배여있고 나는 곧 다른 집을 터로 잡아 이사를 떠나야 한다.  떠난다는 말은 늘 알짝지근한 말이다. 사춘기를 막 맞아 우울하던 그 때에 아버지도 그렇게 내 곁을 훌쩍 떠났다.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기둥이 무너지던 소리는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큰 울림 같은 것이였다. 생사의 예기치 못한 리별 만큼 아픈 것이 또 있을가. 아버지와의 리별은 우리 형제 모두를 단번에 훌쩍 커버리게 하였다.  아직도 푸른 청포 같이 펴기만 하면 내 마음에서 후드득 일어서는 이런저런 어린 시절의 추억무늬들이다. 다 커버린 지금 이사를 하노라니 괜히 지난 추억이 줄레줄레 따라나오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나무가 마디로 이어지듯 인생 또한 한번 또 한번 리별과의 련속적인 만남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별이란 나쁜 의미만이 아니다. 리별이란 곧 하나의 마디맺음이며 역시 새 마디의 시작으로 희망을 품은 아픔이라서 리별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은 마디를 딛고 올곧게 서서 건실하게 성장하는 대나무처럼 싱싱해지리라.  바로 집의 기억들과 추억들과 잘 리별해야 할 시간, 나는 집시인이 되여 다시 기꺼이 떠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이 마음에 서린 저 소가에서 쌓은 놓지 못할 기억들과 그리움들은.  곧 몸은 다른 곳에 정착할 것이나 마음은 한동안 이사 중일 것이리니. 출처:2018 제2호
16    심명주: 육담이 필요한 날(수필) 댓글:  조회:348  추천:0  2019-07-11
육담이 필요한 날 심명주   육담肉谈은 언어 계보에서 지위가 천하다.  순 우리말로 풀면 ‘고기 이야기’라는 뜻이며 저속하고 품격이 낮은 말이거나 이야기로 흔히 음담패설로 통한다. 육두문자의 육담과 악담恶谈을 아울러 육악담이라는 말도 있다. 내가 아는 육담은 별로 많지가 않다. 기껏 발휘해봐야 몇마디 뿐이다. 그것은 내가 몇십년간 나름 흔들리며 지내온 생활 속에서 용케도 맑고 티없는 본질을 잃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냥 그동안 살아오면서 육담은 나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이 구별되는 옷 같은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거리낌없이 훌쩍 내 몸에 걸치기를 꺼렸다.  그런 나의 마음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육담이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후자가 나 자신이라고 고집했을 뿐이다. 왜서 그런 마인드로 자신을 포장해왔을가. 그것도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냥 내 기억에서 최초로 부끄러운 충격을 받았던 상스러운 말투의 원조를 떠올리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 하나는 있다. 바로 아스름한 기억의 녀자이다. 약간은 모자란듯 거친 말투의 녀자였다.  내가 열두어살 되던 해 여름, 날씨가 무더운 어스름한 저녁녘이였다. 그맘 때 시절 남정들은 음식점 곁에서 삼삼오오 로천 술상을 벌리기를 즐겼다.  웃통을 벗어젖힌 남자들이 줄느런히 앉아 권커니 작커니 하는 어느 음식가게 앞을 내가 지나던 때였다. 스무살도 안되는 녀자애 하나가 술손님들이 앉은 이곳저곳을 누비며 발빠르게 음식을 나르는 것을 보았다. 서빙하는 녀자애였다. 머리가 짧은 숏컷이였고 얼굴은 희고 말쑥하나 녀자녀자함이 아니고 약간은 중성스러운 인상에 모습 전체에서 어딘가 거친 기운이 풍기였다.  다리보다 몸통이 더 앞으로 쏠리며 잽싸게 서빙하던 그 녀자애가 갑자기 발에 무엇이 탁 걸채여 앞으로 고꾸라질듯 비칠비칠 지름걸음을 했다. 그러다가 용하게 몸을 재빨리 가누며 입으로 어쩔 사이 없이 “개XX 초채炒菜~”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남정들의 억양을 본따서 내는 웅글고 저음진 소리에는 앳됨도 묻어있었으나 거기서 풍기는 상스러움은 남자 못지가 않았다. 걸채인 발이 참기 어렵게 아팠던 모양이다. 왁작 떠들던 술군들의 시선이 녀자애한데 집중되였고 나도 일순 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녀자 입으로 숙련되게 거친 말을 하는 모습에 영화 속 폭력장면처럼 충격이였던가.  녀자애는 상관없다는듯 통증이 가시지 않은 자기 발만 한손으로 꼭 쥐고 상을 찡그렸다가 이내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야 금숙아, 녀자가, 어? 그런 말 해서 쓰겠나?”  듣기 거북하다는듯 어느 술상의 남자가 넌지시 뜨뜨미지근한 말을 던졌다. 이름 부르는 걸 보아 단골손님인 모양이였다. 남자들은 대개 상스러운 말이나 거친 말에 너그럽다. 금숙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금숙’이라 불리우던, 약간은 반푼스러워보이던 녀자애가 거리낌없이 뱉어내던 그 찰진 욕설이 그 날 나에게는 놀랍고 신선했다.  그 날에 본 ‘금숙’이는 그 뒤 내가 자라오면서 누구한테 자주 털어놓지 않은 허물 같은 것이였다. 훅 하고 생면부지의 내 기억에 꽂혀 살 속에 단단히 파고 들어온 ‘금숙’이는 내가 가끔 육두문자를 떠올리면 같이 따라 생각나던 녀자였다. 몇십년을 죽 그랬다. 잊을래야 잊어지지 않는 기억 속의 ‘금숙’이. 내 몸에 들어와 오래동안 나의 살을 자양으로 같이 커온 가시 같은 존재였던가? 함께 크는 동안 나는 그것이 가시이고 처음 그를 보던 그 날 나를 몹시 아프게 찔렀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그냥 잊었다. 아니, 가시라고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을 빌미로 잘 커온 그 가시는 더듬이 같은 속성을 나에게 배워주었고 때로는 내가 정말 ‘금숙’이로 되여 나에게 상스럽고 거친 말을 시키려고 들었다. 조금씩 그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내 원초의 부끄러운 ‘금숙’이를 더 기억 속에 인식했고 또한 ‘금숙’이라는 이미지의 녀자가 나에게는 거칠고 부끄러운 가르침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숙’이는 나를 육담이라면 거부부터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후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일상이 육담인 사람이 정상이 아니듯 육담이라 하면 거부부터 하는 나 또한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런 발견은 나더러 생활에 조금 더 재미를 가미하려면 적당한 육담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선호하는 육담을 책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나름 나의 육담표준을 정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육담에 대한 나의 기준을 바꿔준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TV들에 자주 나오는 ‘욕쟁이할머니’이다.  보통 맛집 같은 것을 경영하는 이런 ‘욕쟁이할머니’들은 매일 스트레스와의 전쟁 중인 직장인들이 가게를 찾으면 따뜻하고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는 한편 포장이 없는 원색 언어로 거친 육담을 펴내며 귀와 뇌도 시원하게 해준다. 옛부터 그런 ‘욕쟁이할머니’들은 우리 주위에 푸술했지만 하필이면 요즘 들어 사회 속의 한 캐릭터로 각광을 받는다. 그런 현상에 대해 나는 시대적인 사색을 하기보다는 ‘욕쟁이할머니’는 그냥 내 눈에 세월을 인내하고 이미 성인으로 성장해온 ‘금숙’이 아니였을가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던 지난 어느 날, 나는 아홉살배기 아들과 나의 친구랑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내 옆에 리혼으로 우울했던 나의 친구가 나란히 앉았고 마침 우리 차는 어느 사거리에 다달았다. 길옆에 사면팔방 줄느런한 음식점 간판을 보며 소학교에서 금방 배운 우리글을 익히느라 간판쪽을 읽던 아들이 ‘연병만두국집’이라는 간판글을 보았고 그것을 잘못 읽어 그만 ‘염병만두국집’으로 읽었다.  ‘염병’이라는 말을 듣던 친구가 어둡던 얼굴을 확 밝히며 “옘병~”하고 과장하며 흉내냈다. 나도 되받아 “에라잇 옘병~”하고 외웠고 우리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큰소리로 웃었다. 가는 길 내내 속 후련히 “에라잇”, “옘병”을 련발하며 웃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도 감염된듯 함께 웃어댔다. 단어의 뉴앙스를 터득한 것이다.  그 날 꼭꼭 가두어졌던 내 친구의 속을 해장국처럼 확 풀어주던 ‘옘병’이라는 욕설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준 구세주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묘미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 육담을 하나부다. 적절한 육담은 경우에 따라서 어떤 지략이고 유머이며 센스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는 동안 나도 가끔은 시원한 육두문자가 그리웠던 것 같다. 육두음들이 나의 후두를 적시고 목청을 매체로 세상에 터지는 것이 어려웠을 뿐 실제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내뱉는 거친 말은 그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아름다운 글과 언어는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아우라 같은 날개를 달아준다. 하지만 비포장도로 같이 터덜터덜한 생활의 나날들을 경과하다 보면 시종 우아함을 보존하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세상은 때론 너무 슬프고 속상하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악담과 육담을 일상사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육악담은 맛만 들이면 돌이키기 어려운 중독을 부르는 쓰레기음식이며 저질인간의 악동짓이다. 매료되면 빠져나오기 어렵고 그 상스러운 외문猥文에 경도되면 사람은 성품을 잃는다.  출처:2018 제2호
15    심명주: 내가 만난 개들(수필) 댓글:  조회:443  추천:0  2019-07-11
내가 만난 개들 심명주   개를 내 손으로 키워보지 못한 지가 올 들어 십년째이다.  로산으로 아들을 임신하고 막달이 되기까지 나의 곁에는 마지막으로 세살배기 깜순이라는 촌강아지, 변견便犬이 있었다. 농촌에 갔다가 50원을 주고 사와 남편의 생일 선물로 충당했던 개였다.  깜순이를 키우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기억은 그가 낳은 새끼 세마리이다. 그 때까지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못했음에도 나는 깜순이를 도와 산후조리를 살뜰히 챙겨주었고 곧 40일 좌우가 지나 몸집이 앙바틈한 깜순이가 기세 좋게 크는 새끼 시달림에 힘들어하자 면접까지 보면서 세 집들에 또 알뜰히 분양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번엔 내가 임신을 하고 나의 자식을 키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막달이 되자 깜순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결국 엄마집으로 보냈다. 내가 살던 집이 몇십평방메터 밖에 안되고 짖음소리에 하루 거의 20시간은 잠을 자야 되는 아기가 놀라 깰 수 있고 행동이 자유로운 깜순이한테 아기 때문에 여러가지 구속을 주려니 그것도 안스러웠고 더구나 아빠트 살림에 사람 손이 무지 닿아야 되는 개 뒤시중이 아이를 키우는 나를 힘들게 한다는 리유에서였다.   깜순이를 보내고 나니 덕분에 종래로 애견, 애묘가 차지하던 나의 품은 그 때부터 오롯이 십년째 유아독존 아들의 차지가 되였다. 2018년은 무술년 황금개띠해이다. 이미 열살배기로 성장한 아들도 몇년 뒤면 곧 어미품을 떠날 련습을 할 것이고 그러면 빈 둥지 같이 보기 좋게 비는 내 품에 나는 무엇을 담아 인생 후반의 증후군을 사그릴가.  삶에는 밥과 만두와 시루떡 같이 채울 것들이 많으나 이미 그런 것에서 포식을 느낀 현대인들은 소울을 지향하고 원한다. 아들애 태여나자 시작한 심리학공부가 거의 십년째이다. 허나 나는 거기에서도 만족을 못 얻었다. 개나 고양이 한마리를 데려다 키울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개나 고양이도 준비 안된 허전한 인간의 마음에 아무 거나 채워서 대타시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대접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매번 준비없이 받아들이고 어마지두 함께 했던 지난 동물들과의 생활에서 내가 얻어낸 결론이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우세로 나는 개나 고양이의 덕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들은 과연 나와 함께라서 진정 행복했을가. 그리고 여직껏 나는 내가 키우던 어느 개든 그의 림종까지 지키지 못했다. 이것도 어떤 자책과 아픔을 동반한 여한으로 나한테 남았으니. 황금개띠해를 맞아 그동안 내가 만났던 견들과의 일단락 추억을 지어보는 것도 내가 생각의 풋풋함에서 성숙으로 치다르는 인생의 앙상불에 하나의 매듭작용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생명이란 만남이 아닌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만남에는 대상이 규정되지 않는다. 시간과의 만남, 계절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 동물과의 만남, 사랑과의 만남, 리별과의 만남… 걸핏하면 부딪치는 거나하고 화려한 만남 때문에 사람은 사는 동안 이토록 이승에 련련하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좋은 만남은 자기와의 만남이려니. 아마 오늘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무술년 개띠해를 빌미로 내가 만난 개들을 거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만남 뒤의 리별. 지난 세월 나를 스쳤던 만남들과 그에 어김없이 따라오던 리별을 생각하면 그저 사무친다는 말로는 모자라는 느낌이다. 사람하고도 그랬고 개들하고도 그랬다. 죽음과 련관되고 아픔과 이어지는 리별에는 에누리가 없었고 돌이킬 여지가 없었다. 그런 만남과 리별 와중에 시간은 공정하게 흐르고 마음은 찼다가 비였다가 나의 몸도 불었다가 줄었다가 인간이 지닌 법대로 생명 하나를 세상에 부리우고. 그리고 이제야 토로하지만 내가 만삭의 몸이 되기까지 즐겨 먹었던 음식이 있다. 바로 보신탕! 들숨날숨이 어여쁘던 강아지들이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촉촉하니 이루 말하기 어려운 코끝으로 비비닥이고 주먹 만하던 강아지가 우렁찬 성견이 되도록 나는 그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느꼈던가. 숨붙은 그들이 나에게 생생한 그대로 생활의 에너지원으로 되던 순간순간들을 쌓으면 가히 집채보다도 더 많았을 것인데. 그런 아릿하니 부드러웠던 스킨십을 잊고 내가 임신한 몸으로 하루 건너 찾았던 음식점이 바로 보신탕집이였다.  가누기 힘들게 부풀어가는 아기 밴 몸이 보신탕만 생각나면 하늘 뜻을 쫓는 신도마냥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이 군침을 흘리며 한밤중에라도 기어이 개고기를 찾아서 몸에 넣기를 반복했던 임산부, 어이없게도 그게 나였다.  오로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식감으로 나는 그것이 일찍 나와 교감을 나누던 애견들이 둔갑된 육질이라는 것을 헤아릴 사이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 바라던 것을 먹고 나서도 늘쌍 뒤끝 입맛이 상쾌하지 않는 입덧 특유의 여운으로 어렴풋이 애견들과의 상념을 떠올렸다. 아니면 애견들과 늘쌍 제대로 나누지 못한 리별들을 감지했던가. 아니, 이건 별로 간사한 나의 변명이리라.  리별은 리별이로되 내가 바라는 견犬과의 리별을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것은 팔팔하게 뛰여놀던 조막 강아지가 우람해지다가 서서히 무던해지고 그다음 뒤다리를 절뚝거리고 이어서 한쪽 눈은 혹여 백태도 번지고 청력을 잃고 나중엔 실명하여 온종일 웅크리고 누워만 지내고…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죽어 식어가는 개의 육신을 그들이 살았을 때 그랬듯 내 품에 꼭 그러안고 나는 가슴으로 지긋이 통곡하리라. 살아 인연이 되였던 우리 사이를 감사하면서.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그들과의 잘된 리별이고 내가 바라는 모든 애견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더 길게 살아야 되는 사람은 다시 하루, 한달, 나아가 몇달, 몇년이 지나도록 그들을 잊어가면서 혹여 또 다른 애견과 만나면서 여생을 이어갈 것이리니. 림종 끝까지 개들과 나누지 못한 리별을 상상에 부칠 때면 나는 나의 자식 생산을 위해 그토록 수요하던 단백질을 넉근히 내 살집에 찌워주던 견犬들을 더욱 추억한다. 나의 살과 피로 환생했던 그들을 느끼며 내 몸을 어루쓸어본다.    내가 만난 개들은 그냥 개가 아니였다. 나에게 무엇인가 남기고 간 개들이였다. 출처:2018 제2호
14    김홍월: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소설평) 댓글:  조회:317  추천:0  2019-07-11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 김홍월   고통의 시간은 길고 깊었다. 길고 깊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우리에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길 속에 숨어있던 희망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멀어져만 가고 어찌할 도리 없이 파멸로만 치닫던 녀자와 남자는 사실 반쪽이 아닌 하나가 될 수 있는 희망과 결정된 운명이 아닌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반점에서 점이 되듯, 마침표에서 쉼표가 되듯 이들은 반쪽에서 하나로, 결정된 상태에서 비결정의 상태로 나아간다.   ‘반점’에서 ‘점’으로  - 반쪽·분렬에서 하나·통일로  빛은 명도와 채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명도와 채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녀자는 채도를 잃었다. 녀자는 무채색의 반쪽짜리 삶을 자살로 마감하려 한다.    눈이 흐려있다. 그녀는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보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흙탕물에서 금방 건져올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 것도 비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중략…) 색상도 보이지 않는 강물에 오물이라도 쏟아붓고 싶지만 그녀는 오물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가?   색을 볼 수 없을 만큼 녀자는 삶에 의미를 잃었다. 녀자의 삶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겉으로 예쁜 아이의 엄마이고 사회적으로 믿음직한 남편의 안해였지만 녀자는 아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녀자를 경멸하고 아이를 경멸한다. 애초에 이들은 뚜렷한 의미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결혼했다. 이들의 더 큰 문제는 서로가 화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스스로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부부로서도 분렬됐지만 스스로도 겉과 속이 일치하지 못하는 분렬에 시달린다.  녀자는 아이를 완전히 잊은 채 강물에 뛰여들려 했으면서도 아이 울음소리에 아이를 챙긴다. 남자는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면서도 녀자 직원들을 깍듯한 친절로 대한다. 이러한 자아의 분렬로 인해 이들 부부의 분렬은 돌이킬 것조차 없는 파탄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들 부부의 관계는 애증으로 인한 뜨거운 파탄에 이른 것이 아닌 일말의 애정조차 없는 차거운 파탄이다. 소설은 이들이 파탄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자살 기도에서부터 사랑 없는 가정생활, 분렬된 자아 그리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고통과 파탄으로만 고꾸라져가는 이들을 보며 우리에게는 점점 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트라우마가 드러날 때에 우리는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녀자가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이의 운명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녀자의 운명이 비참한 리유는 남편의 사랑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랑의 파탄은 녀성으로서의 문제에 해당하고 아이에 대한 파탄은 어머니로서의 문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녀성으로서의 운명이 파탄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녀는 아이에 대한 모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녀자가 모성애를 포기한 것은 첩보다도 못한 어머니의 비참한 인생에 대한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어머니의 인생처럼 자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까지 비참해질 것이라는 운명의식 때문이였다.   고추를 잃고 태여난 아기다. 모든 것이 반복이다. 젖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기가 자라는 것도. 엄마처럼 살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아기도 계집애다. 아기도 계집애니 아기에게 언젠가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엄마처럼 살지 말라.”일가? 그녀가 엄마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였지? 아기가 그녀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또 무엇이지? -너도… 마침내 그녀의 머리가 말을 시작한다. -너도 크면 나처럼 될 거야.   어쩌면 녀자의 주체성 없는 결혼은 적어도 어머니와 같은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소설 속에 녀자는 온전한 가정에 대한 열망만을 보여주고 가정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인 사랑에 대한 열망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만 당부했지 사랑을 가르치진 않았다. 결국 그녀가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어릴 적 새엄마와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가정에서 소외된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와 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각각의 사건들로 기적적으로 극복된다. 녀자의 트라우마와 운명의식은 “내가 힘들고 고달프다고 아기의 운명도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예요. 세상에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깐요.”라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통해 깨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남자의 트라우마는 술에 취해 우연히 부성애를 발견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녀의 고성과 함께 이미 술을 반은 넘게 깨여버렸던 남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남은 술만이 아닌 그간 마셨던 술 모두를 깬다. -아기. 아기를 싫어하고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를 판단하고 계산할 여유가 없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아기를 향해서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을 뿐이다.   그는 그 자신이 아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믿어왔지만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자신을 발견하고 아홉살에 형성되였던 트라우마와 작별한 것이다. 이렇게 트라우마를 깨뜨림으로써 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라는 직책과 모성애, 부성애라는 마음을 일치시킨다. 즉 겉과 속으로 분렬된 자아를 다시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된 이들에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들이 앞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한다.   그러는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녀자가 아닌 또 다른 녀자로 태여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녀자로 다시 태여나고 그에게 그녀는 녀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이성적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듯 부성애와 모성애로서 온전한 하나의 자아를 획득한 것을 넘어 서로 사랑하는 남편과 안해로서도 온전한 하나의 자아의 획득을 예고한다. 이러한 분렬된 자아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곧 자기로부터의 일치를 넘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부부, 가족으로서의 일치를 예고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은 반점에서 하나의 점이 되였다. 지옥 같았던 이들의 상황은 반점을 점으로 고치듯 분렬된 것들이 다시 하나로 고쳐지면서 천국으로 급변한 것이다. 마치 코딩의 세계처럼 아주 작은 차이가 현실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리고 코딩의 세계처럼 작은 사건 하나로 구호준은 고통의 순간을 환희의 순간으로 뒤바꾸는 급격한 반전을 이루어낸다.     ‘마침표’를 ‘쉼표’로  - 결정성을 비결정성으로  반전은 반전으로서의 감동이 있다. 그러나 모든 반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개연성이 없는 반전은 작위적인 것에 불과하며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녀자가 단지 정신과의사의 한마디 조언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과 남자가 단지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것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토록 자살을 시도할 만큼 강렬하게 아이는 잊은 채 운명을 비관하던 녀자가 단 한마디 말로 마음을 바꾸고, 아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멸에 가득찼던 남자가 일순간의 반사적 경험만으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또한 이들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되찾았다는 리유만으로 리성적 사랑에 관한 트라우마까지 극복되고 서로의 사랑이 다시 싹틀 것이라는 예고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급격한 반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개연성이 떨어져보임에도 불구하고 반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작품 곳곳에 숨어있던 비밀스런 알리바이, 희망의 씨앗들 때문이다. 우선, 녀자가 운명의 반복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리유는 단순히 운명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정신과의사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조언은 이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상황에 대한 방점에 불과하다. 강물에 뛰여들기 직전 녀자를 구한 것은 아이의 손길이였다. 가장 강력한 비관을 이겨낸 것은 모성애였던 것이다. 또한 녀자는 처음에는 가식으로 치부했지만 아이를 예쁘게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이 과정 속에서 모성애가 그녀의 마음의 심연에서 본능으로서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유아 홈페지 디자인을 가장 쉬운 것이라 여길 만큼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욕망과 사랑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미스 최가 켠 화면은 남자에게는 일도 아닌 그냥 애들의 장난감 같은 존재다.  유아상점의 사이트를 개설하는 것이다. 유아상점이라면 팔고 있는 상품만 생생하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어떤 기교나 느낌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아이에 대한 사랑을 단순한 흉내 내기를 통해 터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성애가 본능으로 내재되여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이복동생에 대한 증오로써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아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것이지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아기가 미워서도 아니였다. 아기가 싫어서도 아니였다, 그 순간만은. 아기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였다. 학교에 갈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트라우마를 얻게 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복동생과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성인이 된 그는 아이를 싫어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공포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듯 이들의 부성애와 모성애는 단지 억압된 것에 불과하지 이들의 모성애와 부성애는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내면 깊은 곳에 그리고 작품 곳곳에 숨어있었다. 한편, 모성애와 부성애가 이들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듯이 이성에 대한 사랑의 욕망도 이들 내면에 숨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녀자의 경우, 그녀는 전부터 원래 그러기도 했거니와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가슴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가슴을 가린다.    그녀는 아기를 받아서 가슴을 풀어헤친다.  병원이지만 상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고 같은 존재의 녀인만이 있으니 가슴을 헤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누가 문득 문을 떼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들어설 때 의사가 문에 상담중이란 패말을 붙이는 것을 봤으니깐.   심지어 진료실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슴을 가렸다. 이는 그녀가 머리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본능적으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의 이성에 대한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실장을 보며 성적 흥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는 유독 가슴에 집착한다. 그런데 하필 작품상에서는 그의 안해의 가슴이 예쁜 것으로 설정되여있다. 이는 그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의 본능이 내재되여있고 그 사랑의 본능이 향할 곳이 자신의 안해임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녀자도 자신의 가슴에 대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예민하다. 이는 녀자의 사랑에 대한 본능이 자신이 가슴을 좋아해줄 남편에게 향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녀자와 남자에게는 서로를 사랑할 본능이, 그리고 앞서 말한 모성애와 부성애의 본능이 내재되여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본능은 작품 곳곳에 은밀하게 그러나 버젓이 숨어서 소설의 급격한 반전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고통이 환희로 급격히 뒤바뀌는 반전의 개연성은 곳곳에 숨겨진 녀자와 남자의 본능을 통해 드러난다. 녀자와 남자는 모성과 부성 그리고 사랑의 본능을 억눌러왔고 그러나 자연의 리치를 거스를 수 없듯이 본능을 막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이들의 욕망은 분출되여 녀자와 남자는 아이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더 깊이 누른 용수철이 더 높이 튀여오르는 원리의 개연성처럼 억눌린 욕망으로 분렬되여 지옥에서처럼 고통스러웠던 이들의 욕망은 극단적 지점에서 분출되며 이들은 가장 높은 환희를 맞이하는 개연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이 자신의 본능을 되찾았다는 점은 이들이 주체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삶은 트라우마에 갇혀 본능을 억누르는 비주체적 상태에 있었다. 즉 이들의 현재는 과거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이며 이들의 현재의 운명은 과거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 놓여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이 억눌렸던 본능을 표출시킨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넘어서고 과거에 의해 결정된 운명에서 벗어나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해나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명의 개척을 강조하듯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예고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녀자와 남자에게 운명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운명은 쉼표의 상태로 열려있다. 마침표는 이미 끝나버린 것, 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반면 쉼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비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편 앞서 확인했듯이 마침표는 점이고 쉼표는 반점에 해당하기도 한다. 구호준은 교묘하게도 ‘.’ / ‘,’을 1차적으로는 점 / 반점, 혹은 하나·통일 / 반쪽·분렬로 해석하도록 설정했고 숨겨진 2차적 의미로는 결정성 / 비결정성으로 해석하도록 설정했다.   쓴 커피를 들이켜면서 한참을 화면과 씨름하던 남자는 마침내 문제를 찾았다. 점이 반점으로 되여있었다. ‘점(.)’과 ‘반점(,)’,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쉽게 혼돈이 생길 문제다. 부호를 수정하니 화면이 펼쳐지면서 아기용품 상점이 펼쳐진다. 점과 반점의 사이, 그 작은 사이 하나가 전체를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남자는 화면에서 움직이는 아기용품 상점의 물건들만 멍하니 쳐다본다. 마음을 빼앗는 뭔가가 보여서가 아니다. 남자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점은 옳은 것이고 반점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의 뒤로 갈수록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지고 남자는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 남자는 이미 점이 맞고 반점을 틀린 것으로 보고 있고 우선적으로 ‘.’과 ‘,’을 점과 반점으로 읽기 때문에 점을 하나·통일로, 반점을 반쪽·분렬로 해석하는 것이 1차적 해석에 위치한다. 그리고 인용문의 후반부에 은밀히 드러나는 ‘.’과 ‘,’의 마침표 / 쉼표, 결정성 / 비결정성의 의미는 2차적 해석에 위치하게 된다.     인물적 수제, 시간적 파불라 은 두가지 의미의 구성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녀자에게 밀착한 서술, 남자에게 밀착한 서술로 분렬된 두개의 서술 그리고 이 둘을 통합시켜 함께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인물을 기준으로 한 은 분렬된 것이 다시 온전히 합쳐지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인물에 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은 불완전한 반점이 온전한 점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1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두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과거-현재-미래를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시간, 혹은 시점时点을 기준으로 한 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고 억눌렸던 현재가 본능에 의해 과거의 굴레를 벗고 비결정된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시간에 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은 결정성의 마침표가 비결정성의 쉼표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2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인물에 관한 수제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분렬된 인물이 통일되는 내용이 도출되고 시간에 관한 파불라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결정된 운명이 비결정된 운명으로 나아가는 내용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렇듯 은 1, 2차의 의미에 걸쳐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킨다.  ‘점’으로 그리고 ‘쉼표’로 바꾸게 됨으로써 이들 둘은 모두 반쪽·분렬의 삶, 결정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태양의 동쪽’인 새로운 생명의 땅을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복잡하고도 치밀한 구성을 통해 의 극단적 고통이 환희로 뒤바뀌는 급격한 반전은 개연성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심리로 침투한다. 이것은 고도의 위로이다. 한올의 희망도 기대하지 못하게 독자들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에 모든 고통을 다시 환희로 바꾼다. 단순히 사라져버리라는 주문만 외운다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통을 미리 겪고 고통에서 탈출해본 자의 구체적인 경험을 치밀하게 공유하지 않는 이상 몇마디 주문 같은 말로 고통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희망은 생기지 않는다.  이제는 구호준이 이처럼 치밀한 구성을 한 리유를 알 수 있다. 극단적 고통을 환희로 위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2018 제2호
13    하영:숙명처럼 찾아든 문학(대담) 댓글:  조회:327  추천:0  2019-07-11
숙명처럼 찾아든 문학 하영   초대작가: 우광훈(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하영(《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12월 23일      하영: 안녕하세요? 우광훈작가님. 그동안 수없이 만났었지만 문학대담이라는 형식으로 마주하고 보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네요.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은퇴 후에도 우리 문학을 위해 애를 쓰시고 유익한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께 진정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작품을 많이 쓰시여 우리 문단의 주력으로서 중견역할을 톡톡히 해오신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의 문학인생과 창작성과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광훈: 네, 저도 그래요. 반갑습니다. 하영: 이번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의 문학인생을 살펴보는 동안 내내 가슴이 먹먹해나고 눈가가 젖어왔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다구요. 늘 밝으시고 유머적이시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분위기를 띄워주시는 선생님의 안에 그토록 큰 아픔이 있었을지 어찌 알았겠어요. 그런 상처를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운명처럼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조여왔던 비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은 더 ‘즐거워야’ 했고 더 ‘밝아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동년을 선생님은 회색으로 단정지으시죠. 사실 처음부터 회색이였던 건 아닙니다. 연길이라는 도회지에서 6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부친이 출판사에서 번역전문가로 일하시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난 출신 자체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분홍빛이였어요. 그러나 1954년에 태여나 한창 재롱 부리며 행복하게 자라야 할 무렵인 1958년, 선생님의 가족에는 청천벽력 같은 비운이 떨어집니다. 아버지에게 ‘우파분자’라는 모자가 덜컥 씌워졌고 직장에 다닐 자격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훈춘 로동개조농장에 가시게 되였죠. 우광훈: ‘회색의 동년’이라는 말은 그 시기를 살았던 많은 동년들의 시대적인 현실이기도 했어요. 많은 동년들은 태여나서부터 굶주려야 했고 뭐든 배가 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사회인 줄로 알고 있었지요. 사실 ‘밝아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의미로 볼 때 아직 세상을 깨우치지 못한 천성적인 천진함과 순진함이 없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다행인지도 모르지요. 했기에 그런 동년에도 추억할 만한 순간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우파’라는 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농장에 가시자 저희 식구들은 생활난으로 하여 다섯곳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어요. 풍비박산이라는 말이 이런 건지 모르겠네요. 그 때 저와 저의 셋째누님은 심양의 소가툰에서 살던 외가집으로 갔었구요. 하영: 선생님은 동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그나마 외가에서 살던 시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파분자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음에도 아직 개구쟁이였던 어린 선생님은 불운이란 게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던 거죠. 그 시기에 3년 대기근까지 시작되였지만 외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선생님은 배고픔이란 걸 몰랐고 그냥 ‘사랑이 듬뿍’이라는 표현을 써도 걸맞을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의 3년 생활이 후날 선생님에게는 향수와 같은 정서가 되였구요. 최병우교수는 “자신의 기억에 따스함으로 남아있는 자연의 공간인 외가의 기억은 우광훈소설에서 고향에 가까운 이미지로 등장한다.”고 했어요. 때묻지 않은 자연 속의 아름답고 순수한 외가는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였고 선생님에게는 곧 고향이자 그리움이였죠. 우광훈: 외가에서 지낸 3년은 저로 말하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어요. 외가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 때 이미 홀로 난 큰이모와 이모의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의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여위신 편이였으나 장대하고 외할머니는 작달막한 키에 언제 한번 큰소리 하지 않으시는 인자한 분이셨어요. 외할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강으로 나가 고기도 잡으셨고 습지에 가 골뱅이도 건졌어요. 외할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야시장에 나가 외할아버지가 산에서 뜯어온 머루를 팔고 강에서 잡은 물고기나 골뱅이를 파는 것을 동무하기도 했죠. 물론 장에서 번 돈으로 사주는 사탕이나 과자, 놀이감에 기대가 더 컸었구요. 외할아버지와 함께 야외로 나가면 들에는 벼밭이 있었고 련못에는 련꽃들이 피여있기도 했어요. 그리고 심양과 단동을 오가는 기차들이 으르렁거리는 것도 볼 수 있었구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선반 우에는 항상 저의 몫으로 감추어둔 사과나 배 반쪽이 있었고 사탕 몇알, 과자 몇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가는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포근하고 사랑과 인자함으로 가득한 항만에 다름 아니였어요. 지금도 외가의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로 저의 기억에 살아있습니다. 아마 그런 기억들이 저의 문학에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숭배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영: 부모님이 계시는 연길로 돌아온 어린 선생님은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고 그로부터 ‘우파 자식’으로서의 외로움이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훈춘에 있는 로동개조농장에 계셨고 식구들은 3년재해로 주린 창자를 안고 살아야 했으며 더우기는 우파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쓰고 어린 마음에 그 무거운 과부하를 견디며 공부를 하고 글을 깨우쳐야 했죠. 아버지의 불운은 ‘우파분자’ 하나로 끝나지 않으셨어요. 문화혁명기간에는 또 ‘5류분자’로 지목되여 매일 투쟁받는 고투를 치러야 했고 그 바람에 어린 선생님은 기가 죽을 대로 죽어있었다죠. 그 후 중학생이 된 선생님은 ‘우파분자’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학교선전대에서도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명되기까지 했었어요. 한창 천진란만하게 뛰여놀고 맑은 눈으로 세상만물을 익혀야 할 나이에 선생님에게는 너무도 일찍 짙은 회색이 찾아들었습니다. 우광훈: 연길에 돌아와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동년은 끝났다고 해야겠죠. 더우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정치운동의 참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어요. 그 때 이미 ‘우파’의 모자를 벗었던 아버지였지만 출판사의 사무실에 마련된 ‘감옥’이 아닌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격리돼야 했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밥을 나르는 일은 아직 어려서 ‘문화대혁명’에 가담하지 못하는 저의 넷째누님과 저의 몫이 되였어요. 십여리가 되는 길을 걸어서 하루 세번 왕복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지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어른들로부터 받는 수모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도시락이라고 해봐야 수수밥에 김치 몇쪼각이 고작이건만 그것을 감시하는 어른들은 밥 속에 종이쪽지나 ‘반혁명적’인 뭔가 있나 살피려고 저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며 증오와 멸시로 가득찬 눈으로 노려보는데 그 눈길을 저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그것도 그 시대 지식인의 눈에 그런 동물적인 눈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하영: 도시에서, 그것도 조선족 집거구인 연길에서의 ‘문화대혁명’은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렬했던 것 같아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돌싸움, 창칼싸움, 총싸움에 관한 얘기는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는 모습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던 저에게는 많이 생소한 것이였어요. 그만큼 선생님이 받은, 사회로부터 오는 피해도 엄청 컸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는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못한 것이겠죠. 학교는 지어 문을 닫고 학업을 중단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우광훈: 그래요. ‘문화대혁명’은 저의 인생의 행적을 결정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소학교 5학년 후학기부터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그 때로부터 학업은 중단되였어요. 우리 또래들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가 된 셈이지요. 어린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경험을 하였고 목격하지 말아야 할 참혹한 현실과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투쟁대회를 하면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자리에서 구호를 웨쳐댔고 자살을 한 사람,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연길의 ‘문화대혁명’이 가렬화되면서 총싸움으로 번졌고 열두세살이였던 저는 기관총, 99식보총, 38식 일본보총, 신형의 54식보총의 소리를 듣고도 무슨 총인가를 가려들을 수 있었어요. 무서운 현실이였죠. 하영: 그런 란리 속에서 소외까지 당했지만 다행히도 어린 선생님은 오히려 독서를 하며 외로움을 달랬다죠. 다른 친구애들이 재미나게 노는 시간에 선생님은 집에서 아동소설이나 과학서적에 심취해있었고 학교가 싫어지던 중학교시절에는 성인문학작품을 읽으며 사춘기에 들어섰다고 하셨어요. 우광훈: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덕으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데다 우에 누님들과 형들이 있었기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았고 과학서들이 많았어요. 《취미의 물리학》, 《취미의 수학》과 같은 책들이 있었고 《무엇때문에》라는 책들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죠. 뉴톤, 아인슈타인, 피다고라스와 같은 과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책을 읽고는 여름밤 밖에 나가 북극성이나 안타레스 별을 찾기도 했고 별자리를 찾기도 했어요. 특히 물리학이 그토록 재미있었습니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아니였다면 저는 물리학자가 되였거나 어디선가 물리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영: 그 후 문 닫았던 학교들이 수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그러나 겨우 1년이 좀더 지나 선생님은 다시 ‘하방’을 하는 가족을 따라 돈화현 쟈피꺼우夹皮沟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백여호 되는 한족마을에서 언어도 안 통하는 마을사람들과 낯선 농촌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생각만 해도 막막해나네요. 그 곳에서도 공부의 기회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선생님은 학업을 그만두었다죠. 배움에 갈했던 선생님은 아마 그래서 몇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조선족 마을의 집체호로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문학명작들을 얻어 걸탐스레 읽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서서히 문학이 가져다주는 희미한 열망에 매료되였나봐요. 우광훈: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후학기에 아버지가 돈화현 마호공사 쟈피꺼우대대로 ‘하방’을 하게 됩니다. 그 때가 1969년 12월 13일이였어요. 이듬해 학교를 다니겠다고 공사로 갔더니 조선족학교는 중학교가 없고 소학교만 있었어요. 중학교를 다니려면 30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고 공사의 소학교에 입학한다고 해도 역시 매일 왕복 40리를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때이르게 하향지식청년이 된 거죠.  다행히 그 때 농촌에는 옛날 책들이 더러 남아있었어요. 도시에서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고 책이라는 책은 몽땅 불살라버렸지만 농촌에서는 그 여파가 심하지 않은 셈이죠. 그 때 단행본으로 된 《햄리트》, 《뿌쉬낀선집》 그리고 모파쌍, 뚜르게네브, 파금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얻어볼 수 있었어요. 감수성이 싹트기 시작하는 시기라 그런 책들이 ‘독초’라는 느낌보다는 책 속의 주인공들한테 매료되였습니다. 아마 문학인으로 되는 첫 시작일 수도 있겠죠. 당시 자신이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책이 많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책들은 아예 외워버리기도 했어요. 특히 《햄리트》는 그대로 외워서 집체호의 친구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구요.  하영: 세계명작을 외울 수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총기와 실력이십니다. 또한 문학을 향한 뜨거운 끌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 시기,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깁니다. 다름아닌 ‘첫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다 있겠지만 그러나 영화 같고 드라마 같은 선생님의 첫사랑은 선생님 인생에 너무나 큰 자리로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아픔과 함께 선생님은 보다 성숙해졌지요. 우광훈: 허참, 이건 젊은 시절의 비밀인데… 젊은 날의 저의 초상은 체중 54키로그람에 174센치메터의 키를 가진 마르고 허우적거리는 멋적은 총각이였어요. 그래도 젊음이라는 호기가 있어 그 동네에 살고 있던 한족처녀와 첫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앞날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우파’의 아들인 데다 호미자루 같이 생긴 저에게 딸을 맡기려는 부모는 없겠죠. 결국 녀자애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펑펑 울어대는 녀자애를 사람들이 억지로 결혼마차에 들어올렸지요. 아마 그 때에야 저는 저라는 존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요. 사랑의 권리라는 것도 시대적인 상황을 따르는 것이였지요.  처음에는 그 아픔을 일기로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문학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이야기들이 엮어지기 시작했죠. 물론 사실에 립각한 것이였지만. 어쩌면 그 때로부터 문학이 꿈이 되여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영: 1974년, 드디여 부친께서 탄광의 총무로 공직을 회복하시며 선생님 가족은 쟈피꺼우를 떠나게 되였고 선생님은 정식으로 하향지식청년의 신분으로 3년간 집체호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1976년 12월에는 지질탐사대의 탐사공으로 인생이 바뀌죠. 어떻게 보면 매일 험한 산과 들을 누비는 고된 작업의 련속이고 또다시 적막하고 고독한 나날이 이어지는 인생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환경 속에 몸 담고 있었기에 복잡한 인간세상을 멀리 떠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자연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며 그것을 원고지에 옮겨놓을 줄 아는 문학청년이 될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우광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출판사에서 번역편집을 하시던 아버지는 공직회복을 하시면서 연변복동탄광의 남양갱에 총무로 발령받았습니다. 갱목을 통계하고 탄갱에 들어가는 광부들에게 복리로 빵을 나누어주는 일이였어요. 그렇게 되여 저는 그 때의 화룡현 동성공사 흥성10대의 집체호로 가게 되였고 그 곳에서 3년, 후에는 연변석탄지질대의 탐사공으로 들어가 6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집체호에서의 생활은 참담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누구는 도시로 가고 누구는 참군을 하고 누구는 대학으로 추천을 받아 갔으나 저에게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지질대의 탐사공으로 갈 무렵부터 중국의 정치정세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4인방’이 중국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아버지께서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썼던 일이 개정을 받았고 1980년에는 출판사에 복귀하셨어요. 말 그대로 시대의 ‘봄’이 온 거죠.  탐사대의 장막에서 소설을 쓴답시고 나무판자에 원고지를 끼우고 긁적거렸습니다. 사실 그 때 발표된 많은 소설은 그렇게 무릎 우에서 씌여진 것들이였어요. 농촌마을의 골방에서, 수림 속의 나무 밑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죠. 그래도 그 시기는 아름차게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그리고 성취감이 있었으니까요. 일은 힘든 일이였습니다. 야외에서 모든 것이 철로 된 기계를 움직이고 공구를 다룬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체력을 필요로 했고 3대거리로 하는 일은 밤과 낮이 따로 없었어요. 그것도 야외에서 말입니다. 하영: 동년배에 비해 선생님은 누구보다 시대의 피해를 많이 받았고 삶이 굴곡적이였어요. 헤밍웨이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라고 했어요. 회색의 동년, 소년시절의 실의감, 빼앗긴 첫사랑으로 선생님은 너무도 일찍 인생의 쓰디쓴 고배를 마시였고 동란시대와 하방생활과 집체호생활을 거치며 세상의 삭막함을 체험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비아냥 속에 말수가 적어진 선생님은 결국 소설로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죠.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과 사색하는 두뇌를 가지게 된 선생님은 쌓인 게 많고 억울한 게 많았던 만큼 한번 보뚝을 터뜨리자 산사태처럼 작품을 쏟아내셨지요. 1978년, 처녀작 단편소설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선생님은 이듬해에 단편소설 을 발표하며 곧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향지식청년시기에 체험한 경력을 제재로 한 은 인위적인 정치운동 속에서 인간사이의 메말라가는 정과 우파분자 자식의 고독과 아픔을 진실하게 그려냈어요. 소설은 국경 30주년 응모작품 소설문학상을 수상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였고 그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소설 (작자 이름을 모르겠지만), 정세봉선생의 소설 과 함께 조선족소설사에서 상처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기도 하죠.  우광훈: 저로 말하면 운을 타고 났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을 발표하자 일약 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됐으니까. 1979년 6월에 발표된 와 저의 작품 은 연변에서의 첫 상처문학작품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의 작가는 저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후에 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 헤밍웨이의 이 말은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의 필수를 말한 것 같습니다만 작가가 되기 위해 이런 경험을 하라면 저는 천백번이고 다시는 그런 시대가 없었으면 합니다.  하영: 선생님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소설이 진실성이 부여된다.” 고 주장하셨으며 그러한 자세로 창작에 림하셨어요. 동년기와 소년기, 청년기의 특수한 인생체험이 선생님 소설에 폭 넓게, 진실하게 반영되여있으며 이에 최병우교수는 중한수교 이전에 발표한 선생님의 소설을 외가의 체험, 하방체험, 탐사대원 생활, 한족녀성과의 사랑과 리별… 그 체험별로 주제를 나누어보기도 합니다. 리광일교수는 또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선생님의 중단편소설을 인간,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살펴보기도 하죠. 리광일교수는 선생님의 소설중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하향지식청년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비틀어진 정치문화 속에서 인간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겪고 비극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였다고 했어요. 또한 “인간, 자연 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탐사대원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작가가 겪었던 인생경력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부류의 작품은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었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자연관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자연,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1990년 및 그 이후 작품들로서 자연이 배경이 되면서 그 속에서 인간들이 형성한 여러가지 관계를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모순, 충돌 및 조화의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결국 작가는 자연 앞에서 인간은 매우 왜소한 것이며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조화라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했어요. 우광훈: 지금도 저는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에 기대고 있어요. 체험한 것들, 경험한 것들만이 가슴 가장 가까이 다가와있습니다. 작품에서 생활의 진실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저의 작품의 모든 소재는 제가 경험했던 것들과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에 의해 소외된 인간형상이라든가 한족들의 형상, 자연들은 바로 이런 생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역시 제가 자연을 많이 쓰게 되는 원인도 돈화의 농촌에 하향했던 곳이 심심산골이였고 지질탐사대원으로 일하면서 다닌 곳 역시 순수한 자연들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영: 창작 초기부터 선생님은 주제의 심각한 발굴과 최하층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세련되고 류창한 언어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으며 , 등 소설로 수많은 독자군을 가지면서 30대에 벌써 우리 문단에서 중견작가로 부상합니다.  중편소설 (1986)은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시골의 어느 한족마을의 비극과 인정세태를 기본주제로 하면서 자유분방한 문체, 섬세한 세부묘사, 서정성이 강한 일인칭서술, 산문에 가까운 구성 등으로 비교적 풍부한 사회생활을 담고 해당 시기 사회면모와 생태환경을 진실하게 구현하여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198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은 동물화된 인간화신으로서의 메리가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주인의 손에 죽고 마는 비극을 그렸어요. 소설은 농촌에 하향한 지식청년들이 마치 “토끼를 잡은 후에 죽임을 당하는 개의 신세”와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의 부정과 반항을 메리의 운명과 죽음을 통해 은유적으로 폭로”하였다고 보기도 하는데요, 소설은 인간이 아닌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간사한 내면을 해부하고 사악한 리기주의를 타매했으며 여지없이 배반당하고 유린당한 충성심을 슬퍼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비판한 소설은 “다의적인 상징성과 주제의 다층차성 등으로 예술적 매력을 풍기여” 깊은 사상미학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며 많은 호평을 받았지요. 우광훈: 저의 중편소설 은 돈화에서 생활한 저의 체험을 가장 집중력 있게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실말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실생활의 모델들이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개 ‘메리’마저 모델이 있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생활의 진실이 예술적인 진실로 승화한 매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요. 주인공 소곤이가 죽는 장면을 쓰고 나서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한밤중이였는데 저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소곤이가 죽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소곤이라 부르는 것을 알고 계신 어머니는 저의 등을 두드리시며 “그래, 울어주라.”고 말씀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을 쓸 때 저는 하향세대보다 그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들을 더 많이 생각했어요. 인간만이 자기의 리성과 관념으로 자연의 속성과 천성을 짓밟을 수 있지요. 누구는 사랑이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고 하지만 저는 이것이 문학의 초심이요 영원한 주제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부언하지만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 역시 돈화 시골에서의 5년간 생활이 밑거름이 되여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영: 창작에서 진실성에 힘입어 작품의 주제를 깊이 파는 한편, 소설의 예술적 기교면에서도 선생님은 남다른 탐구를 해옵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까지의 선생님 소설은 서정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이룹니다. 지어 어떤 소설은 소설 자체가 그대로 한편의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선생님의 자유분방하고 환상적이며 정열적인 시인기질은 서방의 랑만주의문학의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집시와 같은 지질탐사대 생활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도 보고 있어요. 이 시기에 쓴 이라는 단편소설은 그 제목부터 진한 서정을 담고 있죠. 소설은 탐사대원의 생활을 소재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했다는 점도 흥미 있지만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2인칭 수법을 써서 서사학적인 측면에서 실험적이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컸어요.  그런가 하면 1991년도에 발표한 단편소설 는 “과학탐구소설”, “소설미학적 의의가 큰 력작”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소설창작기교로 낡은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 량자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켜 참신한 양상을 부상”시키였고 자연 속의 인간을 그리여 “천인합일”의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우광훈: 따지고 보면 매 한편의 소설은 성공의 여부를 떠나 새로운 시도의 시작이 아닐 수 없어요. 많은 경우 한편의 소설을 끝내고 다른 한편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학이 매력적인지도 모르겠구요. 저의 초기소설이 랑만주의적인 요소가 섞인 작품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젊음의 작간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문학공부를 하면서 초반에 읽은 작품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제가 읽은 작품들은 ‘문화대혁명’전에 번역 출판된 외국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런데다 그 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로씨야 작품들이 주종이였지요. 뿌쉬낀, 레르몬또브, 쉡첸꼬 그리고 쉐익스피어… 아무튼 그 때 중국에서 조선어로 번역된 외국소설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시들도 읽고 외웠어요.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레르몬또브, 쉡첸꼬의 시들을 모방해 시랍시고 써보기도 했구요. 이런 것들이 저의 서사에서 시적인 냄새를 풍기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 순수한 우리 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유감으로 남아있어요. 민족언어에 대한 공부가 모자란다는 뜻이 되겠구요. 하영: (1991)를 시작으로 3년 사이에 (1992), (1993) 등 숙명계렬 소설을 련이어 써내시던 선생님은 중편소설 (1995), 단편소설 (1996), (1997), (1998) 등 소설을 륙속 발표하며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실존주의 소설 실험에 들어갑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들끓던 조선족문학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이르러 잠잠해졌으며 곤혹과 침체 속에서 모대기던 우리 작가들은 점차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문학본체로의 접근을 더욱 의식적으로 시도했어요. “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변화는 무명상황 속에서의 개인 창작행위”였으며 “문학은 점차 국가적 언어로부터 개인적 언어로 전이”됩니다. 개체의 정신세계나 인간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발굴이 90년대 문학의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났으며 우리 문학은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체의식보다 개체인 ‘나’, 객관세계보다 ‘내 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모더니즘에 대한 수용도 80년대와 같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현상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를 주축으로 하면서 모더니즘의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수용하여 다의적인 이미지 창조, 주체의 다의성, 구성의 다층차성, 표현수법의 다양화 등으로 퍽 활기를 띠였으며 서술시각의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보다 자연스럽고 세련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흐름을 타고 90년대 중반부터 선생님은 실존주의소설 실험을 통해 현실적 사회문제를 초월하여 운명의 곤혹, 정신방황을 추적하면서 미망하는 세계 속에서 자아 찾기, 확실성 찾기에 나섰으며 우리 문단에서 모더니즘 창작의 선두주자적 역할을 합니다. 우광훈: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새로운 사상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많은 책들이 서점에 나오기 시작하고 전에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던 철학, 종교, 인문 서적들이 쏟아져나왔어요. 그 때 처음으로 니체를 읽었고 성경을 읽었고 쇼펜하우를 알게 되였어요. 물론 많은 책들이 있었지요. 그 때 우리 젊은 문인들은 독서에 목숨을 걸었다고 할 만큼 독서에 열을 올렸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서는 서로에게 추천하고… 그 때를 돌이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독서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사색을 하게 되고 인간과 개인적인 삶을 관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회적인 인간이면서도 개인적인 생명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고 불확실한 운명 앞에서 방황하는 생명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때까지 저희들이 받은 교육은 집단으로서의 개인만 있었을 뿐입니다. 즉 어느 집단의 ‘라사못’이였지요. 그것에 대한 반동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인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면서도 무가내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작품을 쓰면서 글쓰기에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시도를 해봤어요. 언어라든가 문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하는 데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천을 했었죠. 하영: 2004년 4기부터 《도라지》잡지에 련재하기 시작한 선생님의 장편소설 《흔적》은 그 후 《도라지》 장락주문학상을 수상, 2005년에는 책으로 출간되여 연변작가협회 ‘석화’문학상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최삼룡 평론가는 “작가는 《흔적》에서 ‘문화대혁명세대’의 정신타락과 신앙위기 그리고 사랑이 죽은 시대에 대한 조명에 필묵을 많이 들였다.”고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사람들에게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였어요. 그 리념과잉의 시대가 지나간 후 개혁개방의 시대가 되자 급작스럽게 실리가 시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였고 이런 변화는 리념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를 살았던 ‘문화대혁명세대’들이 시대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최병우교수는 우광훈작가님이 《흔적》에서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변화와 ‘문화대혁명’시기의 치렬한 삶과 비극적인 체험이 현재의 삶에 드리운 상흔을 다루었으며 ‘문화대혁명’이라는 트라우마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에게 미치고 있는 상흔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트라우마의 길고 어두운 턴넬을 벗어나는 길은 ‘문화대혁명’시기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억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리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소설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런 ‘문화대혁명’의 상흔과 치유의 서사는 풍요로우나 고통스러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우광훈: ‘문화대혁명’은 인류의 력사에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남을 겁니다. 그 시대를 경험한 우리 세대로서는 그 참상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는 바람에 문화재라는 문화재는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고 불태워졌습니다. 책이라는 책은 모두 다 불살라졌으니까요. 력사와 문화에 대한 철저하고도 잔인한 청산이였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증오를 너무나 쉽게 배웠어요. 우리 세대는 그 시대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해자라는 점에서 반성을 하려고 하지 않지요. 인간적인 측면의 반성이 필요했지만 몽땅 시대의 탓으로만 돌려버렸어요. 이건 정말로 심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악을 동조했다는 걸 내놓고도 그 죄악을 무시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없다면 우리 세대는 여전히 그 슬픈 력사의 ‘턴넬’을 계속 걷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흔적》에서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던 겁니다. ‘밑바닥’을 살아가는 평범한 지식인의 반항과 추구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이 빠져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지요. 아직도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부언하고 싶은 건 저의 《흔적》이 빛을 보게 된 건 김홍란선생의 끈질긴 원고 청탁과 독촉이 큰 힘이 되여준 덕분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면 이 소설이 제대로 끝을 봤겠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영: 아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작품으로 밀어주셔서 저에겐 큰 힘이 되였는데요. 일찍 지질탐사대에서 탐사원으로 일하시던 선생님은 1983년 3월부터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문학반에서 공부하게 되셨죠.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조선족사회에서 유일한 문학양성반이기도 한데 문학적 기량이 보이는 열혈 문학청년들로 꾸려진 반으로 알고 있어요. 1987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연변작가협회에 전직작가로 취직하여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하시였고 그 후 창작련락부 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셨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에 가입하십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위원회 제8기 위원, 제9기 상무위원이셨고 길림성 정치협상위원회 제9기 위원에 이어 제10기 위원으로 활약하셨죠. 현재까지 선생님은 , 등 중단편소설 60여편을 발표하시였고 소설집 《메리의 죽음》, 《가람 건느지 마소》, 장편소설 《흔적》을 출간하셨어요. 또한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제6회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제5회 길림성 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국경 30주년 문학상, 제1회 연변작가협회 중장편소설문학상, 제2회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화려한 업적을 쌓으셨고 우리 문학을 빛내셨습니다. 한편, 오래 동안 연변소설가학회 중책을 떠맡고 계시면서 우리 소설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소설가들의 창작을 격려하고 우리 소설의 제고와 번영을 기하는 일에서 연변소설가학회의 계속되는 역할을 기대해봅니다. 우광훈: 연변대학교 문학반에서 공부한 4년은 저로서는 황금시기였다고 할 만합니다. 농촌에서, 지질대에서의 문학공부는 사실상 멋모르고 여기저기를 쑤셔대는 게릴라전이였어요. 대학교에서 체계적인 문학공부를 하게 되고 특히는 체계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로서는 행운이였지요. 문학상을 두루 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이 오히려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일 수도 있지요. 본의든 타의든 사회활동에도 많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제 정년퇴직을 했으니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정력을 집중하고 싶어요. 하영: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생활과 일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게 되여있어요. 그중에서도 한족과는 상당 부분을 함께 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 문학에 그것이 반영되는 건 극히 드물었어요. 선생님의 소설에 특별히 한족이 많이 등장하고 한족과 어울려 사는 조선족의 삶의 양상이 많이 취급되는데 그래서 진실감이 더 안겨오는 것 같아요. 그것이 선생님 소설의 특징이자 우세이기도 하구요. 우광훈: 저의 작품에서 한족이 많이 등장하는 건 저의 생활경력과 관련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문학은 이민문학에 속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요. 예술의 진실은 생활의 진실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있구요. 우리는 한족이 주민족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라는 땅에서 태여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고 우리의 령혼에는 이미 수많은 중국문화의 요소들이 들어와있지요.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이민 민족으로서는 조선족의 문학이 이민문학의 범주가 아닐가요? 하물며 저는 우리 민족의 이민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은 이 부분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영: 90년대 후반기의 어느 《도라지》문학상 시상식에 선생님께서 가족동반으로 모셔오셨던 어머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고결하시고 단아하시고 지적이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였어요. 선생님은 어머님께서 고령이심에도 독서를 즐기시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내용을 읽으시면 가위로 곱게 잘라서 잘 건사해주신다고 했지요. 작가인 아드님의 창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우광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니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26년에 저의 외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이주해오셨어요. 장춘과 할빈 사이의 도래소라는 곳이였는데 그 곳에서 중국사람이 꾸린 학교에서 5년간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조선어는 저의 이상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배웠고 연길에 오신 후에는 문맹을 퇴치하는 습자반에 다니면서 익혔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독서를 하셨고 림종의 순간에도 머리맡에 책이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저의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였어요.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저의 문학이 있을 수 있었고 저의 오늘의 인생이 있을 수 있었어요.  아득히 먼 날의 어느 날이였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집체호로 찾아오셔서 습작으로 써둔 저의 작품 원고들을 태워버리면 안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으셨어요. 수많은 작가들이 필화로 감옥에서, 로동개조농장에서 ‘사상개조’를 당하고 ‘문화사업위험론’이 유령처럼 드리워있던 그 시대에 자식이 혹여 피해라도 입을가 마음 졸이신 어머니였지요. 그 애잔하고 피어린 사랑 앞에서 저는 오래 고민하지 못하고 동의를 했어요. 그렇게 저의 원고들과 일기는 몽땅 부엌 아궁이로 들어갔고 작가로 성장한 썩 후날에도 불살라진 원고 이야기는 어머니 앞에서 금기사항으로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게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아시는 어머니는 그 때의 미안함에 그 후 평생을 두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저의 책상 앞에 눈에 띄는 곳에 놓아주셨고 좋은 글이 실린 잡지는 문장이 실린 부분을 접어서 저에게 주셨으며 신문에 좋은 글들이 있으면 스크랩을 해두었다가 저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운 가위질로 이 아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으신 것 같아 가슴이 아려납니다. 하영: 문학얘기만 나오면 항상 흥분하시던 선생님, 청년기를 넘어 중년에 와서도 문학에 흠뻑 취해 살으셨죠. 일찍 숙명처럼 찾아들었다는 문학이 선생님께는 언제나 끓어넘치는 용광로 같았고 아무리 소모해도 끝없이 솟아나는 에너지 원천 같았죠. 지금 차분히 돌아보셨을 때 선생님께 그 문학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가요? 우광훈: 저로 말하면 문학이 숙명인 건 분명했습니다. 저의 인생과 오늘의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준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이 있었기에 그 우울한 시대를 견딜 수 있었고 세상과 대화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문학의 의미는 이것 이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영: 누구보다 삶을 아프게 살아오신 선생님, 그 무게 만큼이나 소설의 깊이를 보여주며 많은 력작을 펼쳐내시였고 새로운 창작수법의 실험에서도 선두자적 역할을 하시며 우리 문단에 신선함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소설의 중심에 우뚝 서계셨어요. 한동안 창작을 거의 멈추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필을 들고 주옥 같은 소설을 써내시여 우리 소설사를 계속 이쁘게 장식해주실 걸 기대해봅니다. 그 보석같이 소중한 작가적 재능을 묵혀두지만 말고 아낌없이 다 사용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과의 대담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한 고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감사합니다. 우광훈: 과거형은 이제 다 잊으려고 해요. 새롭게 시작을 해야겠지요. 지금도 문학에 정진하고 계시는 림원춘선생 같은 분들을 보면 제가 많이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발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차분한 마음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대담을 통해 저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어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고 고마운 일도 많았는데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여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2018 제2호
12    살춘각: 참 고운 발(단편소설) 댓글:  조회:421  추천:0  2019-07-11
참 고운 발 살춘각   상  편 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 슬슬 뒤걸음질치고 있었다.  이게 누군가!  그리고 이게 얼마 만이란 말인가?!  “너 정말 계, 계, 계경숙이야?”  초중 2학년 때 보고 못 보았으니 30년도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경숙이가 맞지. 나 계경숙 맞아. 호호호…”  “‘5·7농장’의 그…”  “그러엄! 룡문중학교 3반을 다니던.”  “아…”  나의 입에서 드디여 비명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맞구나.  그녀가 맞구나!  “야, 반갑다야, 계경숙. 얼마 만이야?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30년도 넘었지. 꿈은 무슨. 하늘이 새파랗구만.”  그래서 쳐다본 하늘은 정말 쥐면 묻어날듯 새파랬다.  “너 지금 어디야? 우리 당장 만나자!”  “급하기는… 나 지금 공항이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너한테 전화부터 치는 거야. 알겠어?”  “공항? 어디서 오는데?”  “한국. 일이 있어서 잠간 들어온 거야. 오늘 밖에 시간이 없어. 래일은 일 마무리짓고 나가야 돼.”  “그리 급히? 그럼 당장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네. 나 지금 공항에 갈게. 기다려!”  “그래. 뛰여와. 기다릴게. 나도 널 빨리 보고 싶기는 너만 못지 않을 거야. 호호호…”  전화 저켠에서 그녀가 파란 하늘에 금이 실리도록 맑게 웃어제꼈다.  나는 손목을 들어보았다. 시간은 열한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어림잡아 20분이면 도착하리라.  나는 내 옷차림새를 스윽 훑어보았다. 반소매에 반바지였다. 그리고 슬리퍼.  동켠에 있는 성자산성을 한번 바라보고 나는 히쭉 웃고 나서 그대로 택시에 뛰여올랐다.    그녀는 연한 살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채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늘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유표한 건 원피스 치마자락이 나팔꽃처럼 들려있어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공항 정문에 서있는 그녀를 보고 머뭇거리는 나한테 그녀가 두팔을 활짝 펼쳐보였다.  “용하게 알아보네?”  “당연하지. 누군데 못 알아봐.”  “난 널 못 알아보겠던데…”  “넌 옛날 그대로야. 어쩜 늙지도 않냐? 나 많이 늙었지? 실해지고?”  “실해진 건 모르겠는데 얼굴이 많이 변했어. 길에서 그냥 보면 모르고 지나치겠다야.”  “그래? 할망구가 되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너 소녀 적 내 모습을 기대했던 건 아니야? 실망했겠네. 하하하…”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한번 하늘을 쳐다보며 해바라기처럼 터지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행장은 단촐했다. 쪽걸상 만한 캐리어 하나가 다였다.  “팬티 두장 밖에 없어. 궁금해하지 마.”  택시에 앉자 그녀가 캐리어를 훔쳐보는 내 눈을 의식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쿡 웃었다.  “콘돔이라도 한박스 담아왔나 생각해보았지. 크크크…”  그녀가 내 옆구리를 찌르더니 눈을 석자나 빨았다.  “속은 파래가지구… 누나보고 못하는 소리 없네.”  계경숙은 나보다 한살 더 많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 때 우리 반 애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한살이나 두살 더 많았었다. 당시엔 락제제도라는 게 있어서 시험에서 급제를 못하면 가차없이 한학년 내려앉혔기 때문이였다. 초중에 붙지 못해 한해 더 다니고 이듬해 다시 올라오는 애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런 애들을 ‘묵은 돼지’라고 불렀다.  “묵돼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모양이구나?”  “묵돼가 뭐야? 아~ 야, 나 묵돼가 아니야. 아홉살에 늦게 학교에 입학해서 그래.”  “그래? 뻥 까는 거 아니야?”  “믿든지 말든지.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호텔 간다 왜? 30년 만에 만났는데 묵은 회포부터 풀어야제?”  “야, 나 지금 배고퍼. 시간을 봐. 열두시가 넘었어. 밥부터 먹자.”  “그건 한국시간이고 여긴 아직 열두시가 안됐어. 조금 참어.”  “야, 안된다는데두. 야, 차 돌려. 경숙이가 배가 고프다구!”  택시는 옛날 체육장을 뒤에 떨궈놓고 혁명렬사릉원을 흘겨보며 발전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경숙이가 짐짓 울상을 하고 내 무르팍을 종주먹으로 쥐여박았다.  “그냥 가만있어봐. 원래 절에 가면 중이 하라는 대로 하는 법야.”  “니가 중이가?”  “오늘만은!”  “켁.”  “쿡.”  갑자기 계경숙이 고개를 숙이더니 쓰러질듯 웃는 것이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내 사타구니였다. 내 사타구니가 엄청 부풀어있었다.  “야, 너 지금 선 거야? 내가 옆에 있는 데도?”  내 얼굴이 붉어졌는지 어쨌는지 보지 못하는 나로선 알길이 없다. 다만 망신스럽다는 생각은 좀 들었다. 그러나 이내 아닌 보살 하고 저으기 화끈거리는 낯을 그녀 쪽에 던지며 깐죽거렸다.  “그러게 누가 너더러 팬티가 다 보이는 치마를 입으라던.”  “어머머!”  그녀가 반사적으로 치마자락을 끄당겨 허벅지를 가렸다. 그러더니 나한테 속히운 줄 알았는지 꽤나 정색한 낯빛으로 말했다.  “장난도 그런 장난 치지 마. 나 그런 녀자 아니거든.”  “다 왔어. 내려.”  택시에서 내리자 그녀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여가 어디야? 호텔은 아닌데?”  “발전이다.”  “발전? 아버지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던 그 발전?!”  “응. 그래. 그 발전이 지금 이렇게 코리안타운이 돼버렸다. 맛집거리로.”  “와~ 발전이 빠른데! 발전이 그 이름값을 한다야.”  뭘 먹을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갈비집으로 아퀴를 지었다.  “젤 잘하는 집으로 가! 오늘은 이 누나가 쏜다!”  ‘마포갈비’, 내가 자주 찾는 곳이다. 주인장하고도 면목을 튼 지 오래다. 한국에서 돈 벌어가지고 여기에다 가게를 차린 지 7년째라고 했다.  “환경이 좋은데? 인테리어도 근사하고.”  경숙이가 자리에 앉더니 들어오길 잘했다는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서 보니까 간판들이 한국인지 중국인지 안 알릴 정도로 한국을 그대로 떠옮겨왔데?”  “그니까 코리안타운이라는 거지.”  그녀는 기어이 소갈비 4인분을 시켰다. 칠레와인 한병과 함께.  “그래봤자 한국에서 한끼 먹는 반값 밖에 안돼. 걱정 말고 먹어. 나 그만한 돈은 있어.”  그녀는 내 의견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실컷 먹자. 30여년 만에 너를 만났는데.”  “그래. 먹고 죽자.”  “강산이 세번 변했는데 너는 그대로네.”  “지금은 하루밤이면 강산이 변해. 어느 옛날 소리를 하냐. 나도 늙었어. 반백이야.”  “그런가?”  우리는 쨍그랑 잔을 부딪쳤다.  “근데 너 날 어떻게 찾았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물음을 나는 이제서야 묻고 있었다.  계경숙이 나를 뜨아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도 물음이냐고 묻기라도 하는듯이.  “넌 알려진 사람이잖아.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타나는 사람.”  “그래도…”  “니 소설은 꾸준히 읽고 있어. 니가 쓴 모든 글을 다 봤다고 감히 장담할 정도로 말이야. 이러면 믿겠노?”  “잘 믿어 안 지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내여 웃었다. 그러더니 부끄러운듯 량볼을 싸쥐며 말했다.  “너와 나 그런 사이 아니잖아. 잊은 거야 아니겠지?”  “참…”  그러면서 나도 살짝 어깨를 비틀었던가 말았던가.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근데 너 그 때 나한테 왜 그랬어? 설마 정말로 날 좋아했던 거야?”  “소녀의 순정을 의심하다니! 그래갖고도 작가냐?”  15살의 어느 날, 막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녀, 계경숙이다.  “너 좀 나를 집에 데려다줄래?”  나는 잠간 머뭇거렸다. 그녀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곧추 가는 길을 놔두고 그녀는 산등성이를 타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내가 15살이였으니 그녀는 16살이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멀리 고모벌 되는 녀자애가 한반에 있었다. 그런 연고로 나는 학급 녀자애들과 잘 섞여놀았다. 그러나 계경숙하고는 처음이였다.  산등성이에서 내려와 약수동에 들어서자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전학철이가 나한테 련애편지를 보내왔어. 그래서 너보고 데려다달라 한 거야. 무서웠어.”  그러면서 그녀 계경숙이 내 곁에 딱 붙어섰다.  “아 …”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전류가 발끝으로부터 등골을 타고 머리 우로 치달아오르고 있었다.  “2반의 전학철이가 너한테 련애편지를 썼다고 했지, 아마?”  “응. 기억하고 있네.”  그녀가 쿡 웃었다.  “편지내용도 단마디명창이였어. ‘우리 약혼하자’. 우스워. 웃겨. 하하하…”  무서웠다는 그 말에 나는 묘하게 흥분되였을 것이다. 그 때의 그 전률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짜릿하면서도 달콤했던.  ‘5·7농장’으로 들어가는 마을어귀 우물가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를 통해 콩닥콩닥 뛰는 가슴소리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반짝 얼굴을 들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 혹시 녀자 손 잡아봤어?”  나는 덴겁해서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 때 나는 확실히 많이 놀랐었다. 그녀가 그런 어뚱한 물음을 제기해오리라곤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깐.  “잡아볼래?”  나나 그녀나 얼굴이 빨개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녀자의 손이라는 걸 쥐여봤다. 작고 보드라운 손을.  “젖은 더구나 못 쥐여봤겠구나?”  나는 하마트면 심장이 밖으로 튀여나올 번했다. 가슴이 뛰다 못해 아팠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쥐여볼래?”  수전증환자의 손이면 그럴가. 사시나무가 떨면 그렇게 떨가.  더듬더듬 … 더듬더듬… 장님 코끼리 만지기.  어둠 속에 길 찾기.  “어땠었어? 그 때 그 감각이?”  그 날 묻지 못했던 것을 경숙이가 30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묻고 있다. 그것도 부끄러움이 전혀 없이. 얼굴이 다소 붉어진 건 술기운 탓이리.  “어떻긴. 심장이 터져서 죽는 줄로 알았구만.”  “아니 그거 말고. 만져본 느낌.”  “밤알 만하대. 크크크. 손바닥 안에도 안 차. 크크크…”  “그렇게 작았어? 난 큰 줄로. 풉~”  “브래지어도 없이.”  “시대가 워낙 그런 시대였잖아. 나 그 때 생리를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되였었다.”  “그렇게 귀한 몸을 내가 만지는 영광을 지녔었나? 너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가 있었지?”  “나도 몰라. 니가 너무 좋아서였겠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 니가 첫 남자야, 나한테는.”  “자지도 않았는데?”  “꼭 먹어봐야만 맛이야?”  그러더니 카운터 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언니! 여기요, 언니!!”  “네에~”  아가씨가 다가오자 경숙이가 눈초리에 힘을 주었다.  “아까부터 벨을 눌렀는데 못 들었어요? 이 집에선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손님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얘, 그러지 마. 손님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 고만한 걸 갖고 야단치지 마.”  “재수없잖아. 한국에선 이러면 안돼.”  경숙이가 복무원보고 말했다.  “와인 하나 추가하구요, 갈비살도 더 내주세요. 그리고 사장님하고 물어봐요, 서비스가 있나 없나.”  “니가 말 안해도 서비스가 나와. 나 여기 단골이야.”  “그런 기본적인 거 말구.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돈을 더 쓰잖아.”  경숙의 얼굴에 달이 뜨고 있었다. 달이 빨갛게 머리를 얹고 있었다. 달무리.  “근데 너 연변말을 잘한다? 한국에 간 지 몇년 됐다 했지?”  “20년 거의 돼. 글고 사람은 자기 고향버전은 안 잊어먹게 돼있어. 연변에 오면 자연적으로 연변말을 하게 돼. 몇번 오지는 않았지만.”  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가 현성으로 전근하는 바람에 너와 떨어졌지만 난 널 잊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 물론 한동안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잊혀졌지만 그래도 널 많이 생각했어. 갑자기 문득문득 니가 떠오르는 거야. 그러다가 한국에 왔는데 그 때부터는 니가 미치게 그리운 거야. 그런데 너한테 련락할 엄두는 못 내겠는 거야. 내게는 훌륭한 남편에 좋은 아들이 있었거든.”  “그래? 축하한다야! 좋은 남편에 좋은 아들. 난 리혼하고 외토리 신세인데.”  “글쎄 그렇더구나. 왜 리혼했냐. 그냥 살 거지.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 최고야. 다시 만나봤자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년이 그 년이야. 더 더러운 꼴만 보게 돼.”  “재혼할 생각은 없다. 나 자유로운 지금이 좋아.”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 얘가 편하게 사네, 하고.”  그녀의 눈이 풀리고 있었다. 와인이 두번째 병도 반나마 내려가있었다.  안주는 불판 우에서 앗뜨거를 열창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비스로 나온 꽃게무침과 과매기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난 니 글을 다 읽었어. 인터넷에 널 검색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어.”  “보러 올 거지.”  “오면 안되지.”  “왜 안되는데?”  경숙이가 고개를 들고 몰라 묻느냐는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그래. 왜 안되는데?”  “젖까지 만져봤으니 이번엔 아래를 탐할 게 아니야. 이 바보야.”  “아, 그렇구나…”  나는 내 머리를 쿡 쥐여박았다.  “나 바보 맞네. 근데 어떻게 이번엔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된 거야?”  “사실은…”  경숙이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나한테 보내왔다.  “아들이 일본에 있거든. 일본에 가게 하나 차렸는데 힘든가봐. 우리 량주보고 들어오래. 아마도 일본에 갈 것 같아서…”  “아, 잘됐네. 축하한다야, 경숙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뜻으로 술잔을 쳐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너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래서 불문곡직 련락한 거야. 나 잘했지?”  “잘했어!”  “잘했다니까 기분 좋네.”  우리는 나머지 와인을 두잔에 똑같이 나누어 부었다.  경숙이가 약간 비틀거렸다.  “가자. 우리 이 잔 쭉 내고 2차 가자. 오늘은 죽도록 마시는 거야!”  “2차는 무슨. 너 술도 된 것 같은데 호텔 가서 자.”  “안돼.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너 오늘 하루를 나한테 바쳐야 돼. 각오해라. 오늘 우리 3차, 4차까지 간다! 잘하면 5차까지 갈 수도 있어. 다시 보지 못할 텐데 영원한 추억을 남겨야지. 안 그렇냐, 이 바보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끌려 2차, 3차, 4차까지 가게 되였다.  그녀는 마치 돈을 쓰지 못해 신들린 사람 같았다.  4차 커피숍에서 나와 보니 밤은 이미 시커먼 날개를 땅 우에 널어놓고 있었다.  “5차는 못 가겠다. 내 몸이 술을 받지 못하네.”  “그래. 호텔에 가서 푹 자. 덕분에 오늘 너무 잘 놀았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옹근 하루 시간을 나한테 할애해준 니가.”  “니 돈을 너무 많이 썼어. 그게 마음에 걸린다. 날 좀 쓰게 할 거지. 미안하게스리.”  “괜찮아. 나 돈 많잖아. 우리 둘을 위해 쓴 건 안 아까워. 흐흐흐…”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한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줄래?”  “열가지라도!”  “내 이름 한번 불러줘? 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을 직접 두귀로 듣고 싶어.”  안아달라는 뜻이구나.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녀의 통통한 어깨를 그러안으며 내가 조용히 불렀다.  “경숙아~ 우리 경숙, 고맙다. 이렇게 날 찾아줘서. 계, 경, 숙.”   그녀 계경숙이 내 허리를 두팔로 감싸안고 있었다. 얼굴은 내 가슴에 묻은 채.  “호텔에 데려다줄가?”  “아니. 안돼.”  그녀가 내 몸에서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그것만은 하지 말자. 난 널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남기고 싶어. 내 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 되지? 그렇게 해줄 거지? 계경숙 인생의 가장 멋진 남자. 응?”  “그래.”  나는 경숙의 머리칼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춥겠다. 얼른 가.”  치마 아래로 그녀의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샌들을 신은 발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양말도 받쳐신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뒤걸음으로 택시를 향해 다가가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밤의 무릎 사이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떠나고 있었다.    이튿날 오전.  열시가 되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지금 공항.”  “응, 그래. 잘 가라. 만나서 즐거웠어.”  “나도 좋았어. 잘 있어라.”  이제 한시간 뒤면 그녀는 떠나리라. 핸드백 만한 캐리어를 끌고서 떠나가리라. 그리고 두시간 뒤면 인천공항에 내릴 것이다. 그녀는 한국에, 나는 중국에 서로 다른 하늘을 떠이고 살아가리라. 혹은 아들이 있는 일본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자는 인사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  편 쇼허룽에 동래사라는 절이 섰다. 개관식 때 가려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가고 동창들 모임을 핑게로 동래사에 올랐다. 세그루 천년송은 용하게 보존돼있었다.  점심은 성자산성이 내다보이는 토닭집으로 자리를 정했다.  성자산성을 넘겨다보며 나는 잠간 동하국과 거란의 영웅 포선만노를 떠올렸다. 1233년 몽골군에 포위되여 포로될 때까지도 포선만노는 저 산성 안에 있었다지. 왕후 리선아는 몽골군에 겁탈당할가 겁나 산성 남쪽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하였으니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쳐지는 바로 그 여울목이였으리라. 천년을 두고 흐른 로리커호에서 발원한 해란강은 그렇게 저 곳에서 자기 사명을 다한다.  동창이라 해봤자 네명 뿐이였다. 다들 외국에 돈벌이로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 담배 한대 꾸질려니까 경철이가 따라나왔다.  “야, 나 며칠 전에 이상한 일을 목격했다?”  “뭔?”  “경숙이 비슷한 사람을 봤어.”  “경숙? 계경숙?”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걔 지금 한국에 있거나 일본에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에 있어?”  “아니야, 진짜야. 내가 왜 경숙을 못 알아보냐? 수상시장 끝자락에서 선지를 팔고 있더라구. 마스크를 했지만 난 대번에 걔를 알아보았지. 학교 때 나 걔 좋아했거든.”  “미친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 몇달 전에 경숙이를 만났었다. 일본에 있는 아들한테로 갈 거라 그러던데? 아마 지금 쯤은 일본에 있을 걸. 근데 너 걔를 좋아했다는 건 좀 뜻밖이다?”  경철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가뜩이나 작은 눈이 아주 붙어버렸다.  “창피해서 말 안했지. 이젠 나이 먹으니까 부끄러운 것도 사라지고… 흐흐…”  “뻔뻔해지고?”  “그런데 계경숙이 왜 너한테만 련락하냐? 너 둘이 무슨 일이 있어? 걔 누구도 안 만나는 애야. 동창들 중에 아무도 걔를 만났다는 애가 없다?”  경철이가 의뭉스런 눈을 만들어왔다.  나는 담배 한대 꼬나물며 짐짓 그 눈길을 피했다.  “그렇다구?”  “아무래두 수상해.”  하긴 수상하긴 했다. 경철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숙이가 수상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다니?  내 앞에서 호기를 떨던 천하의 계경숙이가 수상시장 끝자락에서 선지나 팔고 있다니?!  나는 경철이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자식, 말도 안될 소리를!  나는 허청 한번 웃고 나서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끈 다음 그래도 남은 불씨가 있을가봐 침을 찍 뱉어주었다.  경숙이가 나한테만 련락을 했다고?!    며칠 지나면 7일 련휴 국경절이다. 어떤 이에겐 좋고 어떤 이에겐 나쁜 그런 긴 련휴가 될 것이다.  대충 장이라도 봐와야 할 터.  국거리감이라도 몇줌 사와야 할 터.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경숙이를 보았다는 경철이의 말이 귀에 걸려서 좀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귀에 나무가 자라나서 가지를 칠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참지 못하고 아침 5시를 겐또하여 수상시장을 찾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경철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수상시장은 컸다. 연길시 아침시장 중에서는 가장 클 것이다. 경숙이는 그 끝자락에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북쪽 끝자락, 사범학교 쪽으로 말이다. 아마도 집이 그쪽 방향에 있지 않을가 싶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기 앞에 선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추호도 놀라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었던듯이 말이다. 오히려 놀란 쪽은 나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너무나 당당한 경숙이 앞에서 내사 허둥대고 있었으니.  “왔구나~”  드디여 경숙이가 입을 열었고 마스크를 내렸다.  나는 이 국면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서 손만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같은 연길의 하늘 아래서 30여년을 함께 살아왔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코딱지 만한 연길에서. 말이나 되나 말이다.  “저쪽에 가서 담배나 피면서 기다려봐. 나 이 선지를 마저 팔고 갈게. 몇덩이 안 남았으니까 잠간이면 돼.”  나는 그녀로부터 여나문 걸음 물러서서 담배 한대 꼬나물고 섰다.  그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여있었다. 옷차림부터가 할망구다. 몇달 전에 보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그녀가 선지를 파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속은 텅 빈 채 하나도 정리가 안되고 있었다. 조금 뒤면 그녀가 내 앞에 말뚝처럼 설 터인데 그러면 나는 이 난국을 어떻게 파헤쳐나가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자.”  그녀가 다 팔고 난 짐을 머리 우에 이더니 내 앞에서 쥉쥉 걸었다.  나는 그 뒤를 지떡지떡 따라갔다.  사범학교 쪽이 옳았다.  “며칠 전에 경철이를 봤었다. 순간 니가 찾아올 줄 알았지. 그리고 기다렸어.”  “말하더라, 경철이가. 믿지 않았어.”  사범학교를 지나자 무장경찰부대 건너편으로 새길이 나졌다. 그녀는 그 길로 나를 인도했다.  놀랍게도 거기엔 굴뚝이 있는 단층집이 있었다. 그녀가 그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 이런 곳에서 산다.”  미닫이로 웃방 하나를 만든 그런 집이였다.  나는 아직도 잠이 덜 깬 기분이였다.  그녀가 서둘러 구들을 정리하더니 아직도 아래에 서있는 나를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단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사는 꼴이 이렇다 보니 먹을 것도 없구나. 그런대로 먹어.”  황당했다. 모든 게 황당했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황당하다고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달랑 김치 뿐인 술상 옆에서 계란이 삶겨지고 있다.  “근데 너 혼자 사냐?”  술 한모금 훔치고서 내가 물었고  “아니, 남편이 있어.”  경숙이가 턱짓으로 웃방을 가리켰다.  어, 하면서 일어서는 나를 그녀가 제지시켰다.  “인사 안해도 돼. 산송장이야. 중풍에 걸려 드러누운 지 7년째야. 아참, 기저귀를 갈아야겠구나. 미안하지만 잠간만 기다려.”  미닫이문이 열리자 눈이 한뼘은 되게 들어간 산송장이 나타났다. 온몸에 눈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재빨리 기저귀를 갈아채우더니 드르륵 웃방문을 닫았다.  “먹는데 냄새를 풍겨서 미안해.”  “괜찮아. 인간의 생리인데 뭐.”  세번째로 맞은 중풍이라고 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남편이란 사람이 바로 경숙이한테 련애편지를 썼던 화제의 주인공 전학철이란 것이다.  내가 어마지두 놀란 눈길을 웃방에 던지자 채 닫혀지지 않은 미닫이 틈새로 전학철의 퀭한 눈이 내다보고 있었다.  “상관하지 마. 듣기만 할 뿐… 숨만 붙어있는 송장이야.”  그녀가 술을 씹고 있었다. 잘 삶겨진 계란도 옷을 벗고 올라왔다.  그녀는 전혀 안주를 집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술이 없인 살지 못해. 너를 만나기 위해 이틀 동안 안 마신 게 아마 최고의 기록일 거야.”  먼지 쌓이듯 그녀의 과거가 술상 우에 차곡차곡 내려쌓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들만 골라서 양파껍질 까듯이 까고 있었다. 그리고 껍질과 함께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고 했다. 거의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할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현성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얼마 뒤 그 학교에서 전학철을 만난다. 전학철의 아버지도 현성으로 전근되여왔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전학철의 협박이 이어졌다. 친구들을 데리고 길을 막는가 하면 집 문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말 안 들으면 경숙네 가족을 전멸시킨다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전학철이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반강제에 가까운 수락을 하고 만다. 수락과 함께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고 한다. 그저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믿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20여년을 키운 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두다리를 잃었고 두다리를 잃은 아들은 어느 날 끝끝내 5층 베란다에서 뛰여내려 자결을 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남편 전학철은 몇번이나 쓰러졌고 그녀 경숙은 반정신병자가 되여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마신 술이 오후 늦게까지 갔고 술상도 거두지 못한 채 한켠에 널부러졌다. 술상도 거두지 못한 채 널부러졌다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본 광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뜬 것은 누군가의 손이 내 몸을 더듬었기 때문이였다.  경숙이닷!  내 몸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경숙이닷. 그런데 이건? 하면서도 내 몸은 아무런 거부감없이 경숙의 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얼굴을 만지던 경숙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가슴에 멈추고 있었다. 그다지 매끄러운 손은 아니였다. 가슴팍을 어루쓸던 손이 차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헙~ 나의 근육들이 펄떡펄떡 살아나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깨여난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엔 온갖 회환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팬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경숙은 내 얼굴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불끈 일어선 내 양물을 그녀는 거칠게 부여잡았다. 나는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길은 마치 해도 되냐고 묻는듯했다. 나도 눈으로 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묵인.  그것을 읽었을가. 그녀가 내 가슴팍을 핥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래 동안 굶주렸을 것이다. 걸신 들린듯 걸탐스레 핥고 있는 모습만 봐도 알겠다. 애무가 거의 광적이였다. 그럴 것이다. 그녀는 많이 허기져있으리라.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뒤로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허겁지겁 쳐들어갔다. 그녀는 이미 푹 젖어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몸을 짓이기던 내가 뭔가를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뭔가 이상한 감촉이 뒤통수를 찌르는 것 같아서 머리를 돌려보니 웃방 조금 열려진 미닫이 틈새로 전학철의 우멍한 눈길이 형형히 내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소름이 순식간에 등골에 쫙 퍼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보며 경숙이를 짓이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드디여 삽질은 끝났고 나는 경숙의 몸 우에 널부러졌다. 널부러져서는 전학철의 눈길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전학철도 눈길을 돌려가지는 않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였다. 경숙이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서둘러 뒤정리하고 경숙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때 나는 들었다. 샤워소리와 함께 그녀의 간간한 흐느낌 같은 것을. 두귀를 쫑긋 세우고 그것이 정말 울음소리였는지를 확인하려 하자 그 소리는 마치 내 행동이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더 들려주지 않았다. 나왔을 때 그녀의 눈언저리는 살짝 붉어져있었다.  “가자.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줄게.”  전신무장을 하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팔에는 기다란 토시를 했고 발에는 두꺼운 장화를 신었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를 조금 넘어서서 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새벽에?”  그러면서도 나는 어정쩡 따라 일어섰다.  “응. 내 일이란 게 이렇다.”  밖은 추웠다. 나는 오싹 몸을 떨었다.  달빛이 째듯했다.  그녀는 자전거를 끌었다. 자전거 짐받이에 커다란 네모난 통이 두개 달려있었다.  우리는 이름도 모를 실개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연길에서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이런 개천이 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가.  “어디로 가는 거야?”  “도살장.”  “도살장?”  “응. 돼지랑 소랑 잡는 곳.”  그렇게 나는 모르던 데로부터 알고 있었다. 연길에 이런 실개천이 있다는 것과 그 실개천을 따라 가노라면 돼지랑 소랑 잡는 도살장이 나온다는 것을.  그녀는 소의 피를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해서 선지.  피를 끓는 물에 넣어 익히면 선지가 된다.  “선지가 맛이 있자면 피를 받기 전에 통에 소금을 좀 넣어줘야 해. 그러면 선지가 비리지도 않고 나긋나긋해져서 맛있어.  “한통에 보통 40모 정도 나와. 썰면서 한통에서 5장 정도가 깨진다고 생각하면 두통에 70장이 나온다고 보면 돼. 한장에 1원씩 팔면 70원이야. 이런 마른 벌이가 어디 있어?  “도살장에서 피는 버리는 거니까 받아오는 건 공짜야. 근데 피가 돈이 된다는 걸 알고 도살장 측에서 5원씩 받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웃기지?”  그런데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웃기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그냥 경숙이 그녀가 안스럽기만 했다.    도살장에는 소들이 자동차로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다 흑룡강성에서 들어온다고 했다. 료녕 쪽에서도 혹간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연변황소고기가 기실은 대부분 안쪽 소고기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속혔다는 느낌이 든다.  마당에는 소 십여마리씩 실은 자동차들이 수태 서있었다. 이제 곧 죽을 소들이였다. 늙어서 이발이 빠진 소부터 몇달 안된 송아지까지 별별 소들이 다 있었다.  소를 잡는 방법도 흐름식이였다. 뒤다리를 묶은 다음 걸쇠로 걸어서 형틀에 달면 소들은 거꾸로 매달려서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그런 것을 전기방망이 한대로 기절시키고 목에 한칼을 넣는다. 그러면 선지가 대번에 콸콸 쏟아지는 것이다.  일렬로 나오는 소의 대렬 사이에 가이드라인이 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녀는 잽싸게 팔을 뻗어 선지를 받았다. 선지 받는 사람은 어림잡아 20여명. 소가 움직이면 그녀도 같이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몇걸음만 따라가며 받다가 안 받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오는 피는 안 좋아. 물이 많이 섞여있어. 나중에 나오는 피는 찌꺼기가 많아. 그래서 가운데 거로 조금만 받는 거야. 소가 많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받아도 반시간만 받으면 두통 골똑 채울 수 있어.”  녀자가 하기엔 거친 일이였다. 선지 받는 사람 중 유일한 녀자였다. 그런데 녀자 하나가 남자 스물보다 더 억셌다. 그녀는 몸에 피가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를 두려워하면 이 일을 못해. 조금 뒤로 물러설래? 넌 피가 튀면 안되니깐.”  그녀의 말대로 반시간 되니까 선지가 골똑 찼다.  집에 오니 새벽 네시.  경숙은 물부터 끓였다.  물이 끓자 통을 들어 조심스레 쏟아넣었다. 네모반듯한 선지 두덩이가 물속에서 익고 있다.  선지는 오래 익었다. 무려 반시간.  다 익은 선지를 그녀는 맨손으로 썰고 있었다. 그 뜨거운 선지를 손바닥 우에 올려놓고 칼질하는데 용하게 손이 베이지 않고 있었다. 가히 달인 수준이였다. 잽쌌고 가쯘했다.  두께는 대략 5cm.  길이 15cm.  너비 10cm.  “뜨겁지 않아?”  던져놓고 보니 바보 같은 물음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뜨거운지 어떤지 감각도 없다, 이젠.”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지막 한장이 손바닥 우에 남았을 때 그녀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먹어볼래?”  약간 깨져있었다. 귀퉁이가.  양념간장과 귀 떨어진 선지 한모를 상 우에 올려놓고서 그녀가 말했다.  “이로써 너는 나의 일상을 다 보았어. 더 이상 나에 대해 볼 것이 없다. 난 너한테 나의 모든 것을 발가벗겼어.”  “음~”  선지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녀 앞에서 먹는 선지가 어떻게 맛이 알리랴.  “다 보았으니 이젠 됐다. 가라. 난 지금 한통 배달하고 남은 건 시장에 내다 팔아야 돼. 빨리 가.”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시 날 보러 오지 마. 니가 오면 난 여기서 못산다. 그리고 내 말 누구하고도 하지 말아줄래. 빨리 가.”  빨리 가 를 복창하면서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마치 말 안 들으면 죽여버리기라도 하겠다는듯이.  그녀의 눈길은 서늘했다. 전에 못 보던 눈빛이였다. 그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와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일종 말 못할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오면서 보니 경숙은 나한테 등을 돌려대고 양말을 갈아신고 있었다.  발.  그리고 보았다, 나는. 경숙의 어깨 너머로 그리 못나지 않은 하얗고 조그마한 발을.  “간다?”  “…”  경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리별인가.  손목을 들어보니 시간은 아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강남구 양재동이다.  나는 지금 다이소에 있다. 다이소에서 생활용품 몇가지를 사다가 한곳에 뚝 머물렀다.  ‘참 고운 발’. 발크림이였다.  나는 그 앞에 이윽히 서있었다. 세상에… 크림은 얼굴에만 바르는 줄 알았더니… 손에만 바르는 줄 알았더니… 발에도 바르는구나… 하고 있었다. 나로선 놀라운 발견이였다. 그리고 모르던 데로부터 알게되였다. 크림은 얼굴이나 손만 아니라 발에도 바른다.  발. 그렇다. 인간의 온몸을 받쳐주는 지탱점이 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발이 건강해야 하리라.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발부터 건강해야 하리라. 그리고 이뻐야 하리라. 비록 양말 속에 감춰져있다 하더라도. 신발 속에 숨겨져있다 하더라도. 발이 건강해야 인간도 건강하리라.  나는 저도 모르게 ‘참 고운 발’을 손에 집어들었다.  그녀 경숙의 발이 어떻게 생겼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발을 상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생각 안 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참 고운 발’.  샀다.  그녀를 주려고 산 건 아니였다.  내가 바르려고 산 것도 아니였다.  그냥 산 것이였다.  이 시각 그녀는 연길에 살고 나는 한국에 산다.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출처:2018 제2호  
11    권혁률: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작품평) 댓글:  조회:414  추천:0  2019-07-11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 권혁률   1. 인간의 삶은 자체의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폭력과의 겨룸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결하고 있는 그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현상이여서 그 괴로움을 실제로 겪고 있는 당사자조차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력에 길들여져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유의 관성’에 고착되여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의 폭력의 근원지가 우리와 결코 낯설지 않은 주변에 있다는 데에 있다. 좀더 끔찍하게 말하자면 가장 친근한 사람이 그러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폭력은 피해자에 대한 극진한 ‘친절과 배려’로 둔갑하기에 더 문제가 된다. 설명절 기간인 현 시점에 부모와 친지로부터의 ‘혼인’에 관한 너무 친절한 주목 때문에 젊은이들이 겪는 ‘관심’은 그러한 폭력의 생생한 현장이다.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가정 또는 가족 내 일상적인 폭력은 사회적 폭력으로 탈바꿈하고 사회적 폭력은 또 가족 내 일상적 폭력을 부르는 근원이 된다. 과거에 비일비재했던 자식의 종신대사를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혼인관습은 가족 내 폭력의 하나였다. 그것은 자식을 키워낸 부모의 일종의 권력으로 간주되는 사회풍습 때문에 폭력적인 그 간섭행위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둔갑하여 세세대대 이어왔었다. 부모 자식 간에 전혀 의사소통의 절차가 결여된 채 심지어 대체로 자식의 의사에 관계없거나 반대되는 방향으로 감행되였기에 그것은 분명 ‘폭력’이였다. 이러한 삶이 전근대적인 현상이였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전시대에 정치적 요소가 그러한 폭력을 부추기는 시대도 있었거니와 현재에도 전술한 현상과 같은 일상의 폭력이 여전히 우리들의 삶을 괴롭히고 있다. 그 모든 근원을 캐여본다면 당사자들 사이에 필요한 소통이 결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필요한 의사소통의 루트가 단절되였거나 아니면 이러저러한 리유 때문에 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통의 결여, 그에 따르는 일상의 폭력은 우리의 삶의 현장 곳곳에 산재되여있는 흔한 사회현상이다. 이에 대한 우리 문학의 반응은 어떠한 양상일가? 량영철의 소설에서 필자는 그 소중한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작가의 삶과 맞먹는 그리 멀지 않았던 시대에 겪었던 폭력, 현시대의 중년시대에 이르러 몸소 겪거나 목격하게 되는 일상의 폭력들이 그의 작품에서 형상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시대적 반응의 하나로 다루어보고저 하는 것이 이 글의 초심이다.   2. 량영철의 이 본고 원고청탁의 대상 텍스트이다. 이 작품 애초의 창작동기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최××이란 동창생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만났더니 이 녀석이 허풍을 꽝꽝 쳐대는 것이였다. 한국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가봤다고 돈이랑 펑펑 써제끼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정말로 믿었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들키고 나서 녀석은 도살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살장 구경을 한번 잘했다. 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면서 흐름식 생산선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언젠가는 써야지 마음 굳혔다. 물론 그 때부터 나는 선지를 먹지 않았다.(살춘각 창작후기 에서)   의 전반 경개는 우의 작가의 말과 별반 다름이 없다. 바뀐  것은 주인공이 남자 동창에서 녀성 동창으로 바뀐 것이고 당연한 짐작이 따르는 대화와 행위이다. 작가의 임무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맞추어본다면 표준 작문거리를 동원한 셈이다. 이 작품은 ‘상편’에 이어서 ‘하편’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얼핏 보기엔 사족 같은 처리이지만 작가의 말에 의거한다면 상당한 의도적인 작업의 결과이다.   하편에서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편을 설치했다. 따라서 상편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다. 마지막 한줄을 위해 나는 앞에다 천마디의 헛소리를 쳤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나 나는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너무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살춘각 창작후기 에서)   작품은 중학교 2학년 시절의 동창생 ‘계경숙’이 걸어온 전화에서 시작된다. 의외의 전화를 걸어온 열정의 소유자 계경숙은 중학교 시절 한살 아래인 ‘나’를 은근히 좋아했던 녀동창생이다. 활달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나’에게 녀자와의 첫 스킨십을 선사했고 심지어는 숫처녀의 가슴까지 서슴지 않고 선사했던 그러한 녀동창이였다. 따라서 30여년 후의 만남이였지만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대화와 행위에서 스스럼없게 된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4차를 거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행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은 작품의 리해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 “근데 너 연변말을 잘한다? 한국에 간 지 몇년 됐다 했지?”  “20년 거의 돼. 글고 사람은 자기 고향 버전은 안 잊어먹게 돼있어. 연변에 오면 자연적으로 연변말을 하게 돼. 몇번 오지는 않았지만.”    2) 경숙이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나한테 보내왔다.  “아들이 일본에 있거든. 일본에 가게 하나 차렸는데 힘든가봐. 우리 량주 보고 들어오래. 아마도 일본에 갈 것 같아서…”    3) 치마 아래로 그녀의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샌들을 신은 발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양말도 받쳐신지 않고 있었다.    우의 세 인용은 작품 중 ‘나’의 의혹이 진전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한국에서 20년간 살아온 사람으로서 너무 자연스러운 연변말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1)에서 보다싶이 잘 넘기고 있다. 하지만 인용 2)의 아들이 일본에 있다, 가게를 차렸다, 량주 보고 와서 도와달란다는 복잡한 사연을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의미심장’하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채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늘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던 그런 차림새와 어울리는 부분이다. 뭔가는 미심쩍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표정을 가리고 림기응변으로 이러저러한 사연을 꾸며내기 위한 그녀의 의도적인 표정과 차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3)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의혹을 더한층 가중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 대로 하편의 전개를 위한 복선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가정의 사연으로 일본으로 들어가기 직전 만났던 ‘계경숙’이, 4차까지 하고 다시 만나자는 인사도 없이 갈라지는 것이 상편의 마감이다.  후편에서 ‘계경숙’은 동창모임에 온 ‘나’ 친구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수상시장에서 선지장사를 하고 있다는 뜻밖의 소식이다. 그 소식을 친히 확인하는 ‘나’와 함께 상편에서 깔아놓은 복선도 일일이 은을 내게 된다.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첫 구애의 장본자 전학철과 부친의 직장전근으로 또 가깝게 되여 위협과 공갈의 폭력 아래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한 그녀, 유일한 바람으로 믿고 살던 아들은 교통사고 끝에 부모의 부담이 되지 않고저 자살로 생을 맺고 풍을 맞은 남편은 스스로 몸도 거두지 못하는 페인이 되고 만다. 불행한 혼인은 불행한 삶과 고생의 생계유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편에 보였던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스스로 남편의 구완과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그녀의 어려운 형편은 앞에서 인용한 세 부분의 점차 짙어가는 의혹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평생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를 찾아본 것은 점차 꺼져갈듯도 했던 자신의 삶의 의욕을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였으리라. 하지만 리해 가능한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누구에게도, 사랑하는 상대에게까지도 자신의 그 궁핍한 처지를 보이기 싫게 했다. 따라서 우에서 인용한 어불성설 같지만 또 재치 있는 그녀의 말에 넘어갔던 세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개연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30여년  동안 잊지 못하던 첫사랑을 모처럼 찾는 재회에서 “원피스 치마자락이 나팔꽃처럼 들려있어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다 드러나는 차림도 후편에서 그녀의 궁핍한 생활상을 예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 상편의 전개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리행하고저 몇개의 복선의 장치를 운용하고 있다. 복선의 역할을 하는 디테일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대화와 행위에 용해되여있었고 하편에서 그 복선들은 각각 암시하고 있던 바의 원모습을 재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전반 작품의 플롯의 구성과 인물의 설정에서 의도했던 바를 충실히 리행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앞에서 본고는 의 외적 형태 면에서의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를 편의에 따라 살펴보았다. 이를 차치하고 작가가 자신의 창작에서 ‘소통의 결여에 따른 일상의 폭력’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은 본고가 살펴본 작가 또는 작품의 내적 특징이다.  의 경우 의사소통의 결여로 인한 폭력은 주인공에 그치지 않는다. ‘계경숙’은 ‘나’보다 한살 이상이였기에 사랑하는 ‘나’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일정한 어려움을 겪는다. 먼 고모벌이 되는 녀자애와 친구이고 한살 이상인 그녀를 ‘나’도 서먹서먹하게 대하기는 피차일반이였다. ‘소통의 결여’의 첫쌍이였다. 다음은 ‘계경숙’의 혼인에 관한 ‘소통의 결여’이다. 련애편지를 보낸 상대를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느끼고 있는 그녀가 결국 그 ‘공포의 대상’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부친의 직장 전근으로 ‘공포의 대상’의 무차별적인 위협과 공갈에 시달린 결과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두 당사자 부친의 직장 전근이란 출세의 표현이였다. 여기에 두 당사자 사이의 ‘소통의 불가’도 문제였지만 그녀는 부모와도 ‘소통의 결여’ 상태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상상력을 좀더 풍부화해본다면 부모의 립장에서는 같은 동네에서 출세하여 타향으로 이주한 량가가 사돈으로 승격하는 것을 제격일 것으로 생각했을 법도 하다. 환언한다면 그녀의 부모 역시 ‘소통의 결여’ 뿐만 아니라 그 ‘소통 불가’의 결혼을 추진한 ‘폭력’의 장본인이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모의 립장과 체면을 전제로 한 자식‘사랑’, 그 ‘아름다운 명분’이 그녀를 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거의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할가” 라는 작가의 판단이 이를 뒤받침한다. 결국 ‘계경숙’과 ‘나’의 ‘소통의 결여’로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한 결혼은 무산되고 그녀와 부모와의 ‘소통의 결여’는 결국 그녀를 전혀 ‘소통’이 불가한 ‘폭력’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러한 것이 사랑과 혼인의 령역 그리고 가족 내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폭력’이였다고 한다면 작품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소통의 결여’를 은연중 포함하고 있다. 바로 ‘계경숙’, ‘나’의 동창, 사회적 관계 속의 ‘소통의 결여’이다. 그녀는 그 어려운 삶의 여건에서도 ‘나’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을 정도이다. 심지어 ‘나’를 만나려는 강렬한 충동으로 결국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고운 발’을 보이는 씨나리오를 출연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그녀는 30여년 동안 “자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와 ‘계경숙’만의 만남에 이의를 품은 동창생의 말에서 증명된다. 그렇다면 도무지 한 시내 안에 다섯명 밖에 되지 않는 동창생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심층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욕이 흘러넘치는 이 시대, 물질적 리익의 획득 여부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을 그녀는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막론하고 물질적 소득과 재부의 다소에 따라 친소亲疏가 확정되는 시대에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사회진출은 동창생을 망라한 사회의 한담거리로, 웃음거리로 전락되여 새로운 ‘폭력’의 짓이김을 당하리라는 점을 그녀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묵묵히 결혼에 이은 가족, 사회의 ‘폭력’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강인하게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저 혼신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정신적 버팀대가 있었다면 ‘나’의 작품이였을 것이다. 이것이 의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이 이루고 있는 전경全景이다. ‘소통의 결여’로 인한 인간세상의 ‘폭력’은 작가의 다른 한 작품 에서도 일별된다. 안해를 잃은 부친과 자식 사이, ‘소통의 결여’를 자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이, 종종 ‘폭력’적인 결론으로 대화의 매듭을 짓는다. 그 뿐이 아니다. 부친은 안해를 잃은 후에 세번의 결혼 같지 않은 짝짓기에 실패하는 바 정이 결여된 동거상태를 이어가던 중 마지막 로친에게서 호된 ‘폭력’을 당하고 만다. 자식 ‘나’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누라가 외국에 있는 상황, ‘수지’와 ‘경이’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진정 애인도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소통’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말에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너 나를 사랑하기나 한 거니?”라고 묻는 ‘나’의 이 한마디로 독자들은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일생에서 ‘소통’의 의미, 아니 모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소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과연 원활한 ‘소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가?   4. 30대의 젊은 시절 문단에 일찍 활약상을 보였던 작가 량영철은 이제 다시 재기의 기세를 보이고 있는듯하다. 얼마 동안 ‘살춘각’에서 ‘돼지’같이 살았다는 작가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회한, 안타까움, 무가내 등 정서가 착잡하게 엉켜져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야기만 꾸미는 일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모든 식자층이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삶에 대한 남다른 애착, 사랑, 고민, 사색이 필요하다. 아니 심지어는 삶에 대한 반발, 혐오의 정서까지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지 않고 어찌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으랴. “긴긴 밤을 통곡으로 지새워 못 본 자는 인생을 담론하기에 력부족이라未曾长夜痛哭者,不足以语人生”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명언과 련관시켜보아야 할 경지이다.  단 두 작품에 한정하여 량영철을 론하는 본고는 작가와의 ‘소통’이 결여된 채로 진행되였다. 은 작가의 창작의도에 맞춘다면 성공작이 될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애증이 분명했던 자기가 사랑하는 동생 벌의 남자애에게 선뜻 숫처녀의 가슴까지 허락할 정도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녀주인공, 30여년 후에 모처럼 만든 재회의 기회에도 아무런 꺼리낌없이 육담을 나눈다. 심지어 당시에 사랑했던 ‘나’의 페니스가 대담거리가 될 정도로 스스럼없다. 일관된 성격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에는 단호하게 브레이크를 걸던 그녀였다. 그런데 최후 자신의 삶의 진상을 ‘나’의 앞에 드러냈을 때 반신불수의 남편이였지만 그 ‘형형’한 눈빛 아래 ‘나’와 질펀한 정사情事를 펼친다. 이는 반평생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근원인 남편에 련대한 복수라고 해야 할가? 본고는 이에 대한 속단速断은 삼가키로 한다. 살춘각杀春阁의 살춘각, 작가 량영철과의 ‘소통’이 없는 판단은 아무래도 오단误断의 위험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의 ‘소통’이 기대되는 부분으로서 후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출처:2018 제2호  
10    살춘각: 일하면서 글쓰기 댓글:  조회:288  추천:0  2019-07-11
일하면서 글쓰기 살춘각   최××이란 동창생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만났더니 이 녀석이 허풍을 꽝꽝 쳐대는 것이였다. 한국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가봤다고 돈이랑 펑펑 써제끼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정말로 믿었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들키고 나서 녀석은 도살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살장 구경을 한번 잘했다. 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면서 흐름식 생산선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언젠가는 써야지 마음 굳혔다. 물론 그 때부터 나는 선지를 먹지 않았다.  이 소설을 구상한 지 15년이 너머 된다는 것을 예서 감히 고백한다. 그 사이 나는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다. 그럼에도 쓰지 못했던 것은 내 게으름 탓일 것이다.  십년 동안 눕혔던 붓을 다시 세웠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이 이 소설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아마 편집부에서 독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백산》에 더구나 감사한지도 모른다.  오십대가 쓴 글하고 사십대가 쓴 글은 다르다. 내 나이가 오십대란 말이다. 어딘가 달라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온밤을 하얗게 새우던 2016년 12월 31일이 생각난다. 이 밤만 지나면 오십대에 들어선다는 현실은 나를 안절부절 방안을 바장이게 했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꽉 찼고 나는 혹 아래층에서 내 한숨소리라도 들을가봐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 카텐을 열어젖히고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성자산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양로원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마지막 방문길에 허리춤에서 지린내에 절은 빨간 돈 몇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힘없이 자리에 누우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를 만나 아버지의 전 재산을 쥐여줄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이튿날 바로 세상을 등졌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향한 기다림이 그 날까지 아버지를 지탱하게 하였을 것이다.  2017년 1월 1일, 급기야 오십대의 회오리바람은 플라이어를 들고 달려와 내 녹 쓴 이발을 뽑아갔다. 그리고는 내 지나온 세월의 귀때기를 힘껏 후려쳤다. 결국 나는 내 지나온 비틀비틀 50년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문했다. 나는? 왜? 하필? 새해 정초에 아버지를 떠올렸을가? 나는 나의 후반생을 재설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3월 17일 이른새벽, 푸름한 달빛 속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나는 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은 내 아들의 생일이였다. 나는 자못 진지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한줄 쓰고 또 한번 바라보고는 한줄을 쓰고 했다. 그렇게 해서 씌여진 것이 《장백산》에 나간 살춘각 계렬수필과 이란 소설이다. 몇편의 발표도 안할 칼럼과 쓰레기 같은 시도 배가했다. 그리고 소설이 발표되는 것도 보지 않고 주저없이 내가 발 딛고 있던 연길땅을 떠나 연태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태서 2박3일 체류하고 청도서 장학규와 몇몇 문인들과 짧은 시간 회동한 다음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날은 잊지도 못할 7월 22일이였다.    인천국제공항에 몸을 내리며 나는 다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삶을 살리라.  나는 달라지리라.  물론 글도 달라지리라.  내 서재의 한낱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살춘각杀春阁이 오늘부터는 걸어다니는 살아숨쉬는 살춘각으로 되리라… 했다.    한국에 온 지 반년이 되였고 일을 시작한 지는 석달이 되였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소설의 경우는 더하다.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들어오는 청탁은 소설이고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하면서 쓴 두번째 소설이다. 일하면서 쓴 거라 그런지 특별히 애착이 간다. 특별히 두번째 소설을 쓸 때는 소설 못지 않은 아픔을 주기도 겪기도 했다.  하나는 《도라지》에 줬고 하나는 《장백산》에 줬다. 둘 다 톱으로 나간다는 기별이다. 안 떠지는 눈을 잡아뜯으며 쓴 보람을 예서 느낀다.  일하면서 글쓰기.  한국에서의 내 일상이다.  아니, 작가로서의 숙명이요 운명이다.    인간의 복합성을 구현하기 위해 상하편으로 나눠썼다.  하편에서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편을 설치했다. 따라서 상편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다. 마지막 한줄을 위해 나는 앞에다 천마디의 헛소리를 쳤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나 나는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너무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처음에 나는 하편만으로 소설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편만으로도 소설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나는 상편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인간은 단순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또 다른 동창생을 떠올렸고 나는 그 둘을 오버랩시켜버렸다. 이것이 이 소설이 탄생한 과정이다. 아무튼 나왔으니 판단은 독자들한테 맡기련다.    창작후기인지 작가노트인지 참 쓰기가 싫다. 이것을 읽어줄 독자가 있을가 하고 잠간 생각해본다.  그래도 써야겠지? 이것도 창작의 일부이고 보면? 그래,  너는 써야 해.  너한테 다른 길은 없어.  아픈 눈을 집어뜯으면서라도 너는 쓰거라.  출처:2018 제2호
9    <장백산> 2018.1 루계217 댓글:  조회:629  추천:0  2019-07-09
장백산 총217호 2018년1호   권두칼럼 황유복        소셜미디어 시대의 문학지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김경화        겨울개구리(중편소설) 김경화        삶의 대화(작가노트) 리태복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작품평) 조원            청산리 적마(작가평)   문학대담:작가를 말하다-리원길편 김홍란       사실주의에 충실하려던 작가  소설광장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1) 김혁         잊혀진 ‘영화황제’(작가의 말)   박초란소설코너 박초란       장자의 고양이(단편소설)   계렬수필 리임원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리임원         시간이 흐름을 멈춘 곳 리임원         천년고도에서 꿈을 먹다    시인 시전 강효삼         이른봄 강물의 소리에서(시 외5수) 강혜라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시평) 기획련재 김혁          한락연평전   창작마당 김철호        검은빛(단편소설) 리여천        올겨울은 날씨가 몹시 추웠다(소설) 조광명        정유년의 마지막 어느 날,어떤 위로의 대화방식(수필) 김기덕        돌(시 외1수) 마성욱        엄마의 밥상(시)   인물탐방 최창륵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인물전기)   8090문학코너 허은명       벽(단편소설) 박영화       외할머니 전 상서(수필) 김수연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시 외2수) 김화         설국의 발레리나는 외롭다(시)   문학과 비평     김영옥       조광명 소설의 픽션과 논픽션의 탈경계(평론)   중국소수민족문학 알라무노     몽등교(수필/천년목 옮김)   장펴노설련재 림원춘       산귀신(장편소설 련재19) 구용기       해볕이 춥다(장편소설 련재8)
8    알리무노:몽등교(수필) 댓글:  조회:459  추천:0  2019-07-09
몽등교   알리무노   채운 남쪽에 위치한 운룡, 종래로 가볼 생각을 안해본 이곳의 잠들어있는 문을 노크한 것은 오직 꿈속의 다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른아침, 현성에서 출발한 우리는 비강 沘江을 따라 올라가며 마음 안에 풍아한 멋으로 남아있는 다리를 찾고 있었다. 도로는 산 사이의 협곡을 완연하게 뻗어나갔고 계곡 량안의 제전에는 무서리가 한벌 깔려있었다. 시들어진 마른풀이 벌거벗은 산마루를 차지하고 있고 들쭉날쭉한 마을이 계곡 량안에 드문드문 앉아있다. 밀봉이 잘 안된 차창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차안은 찬기운으로 감돌았다. 겨울 아침, 낯선 이 땅, 어쩌면 현세거나 혹은 후세에 다리 우의 덩쿨마냥 나와 엉킬지도 모를 이곳이 나로 하여금 서리 내린 땅을 편안하게 내딛게 한다.   내가 본 첫 다리는 장신향의 안란교였다. 안란교는 현수교悬索桥였으며 다리 옆에 세워진 대리석판 소개비에는 이 다리가 성급 중점보호문물이라고 적혀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안란교는 량안의 산사람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나는 신 모과를 등에 진 늙은 말의 뒤를 모과의 시큼한 향을 더듬으며 휘청이는 안란교를 건넜다. 발밑에서 흐르는 비강은 영원히 음표가 변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리어구의 주추돌 아래로 발 두쌍이 나와있었다. 한쌍은 누런색 고무장화를 신었고 다른 한쌍은 수공으로 만든 검정색 헝겊신을 신었다. 나는 이 두쌍의 발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교각에 기대여 강물소리를 사이두고 발 두쌍의 주인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누런색 고무장화 주인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가자.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돼지죽도 아직 안 줬어.”  몇분이 지나서야 검정색 헝겊신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담에도 날 때릴 거야? 안 때린다고 담보해야 돌아가.”  고무장화 주인이 거칠게 말했다.  “안 때려. 한대 때렸다가 온 오전 쫓아다니는데 그 짓을 왜 해.”  고무장화 주인이 일어서니 헝겊신 주인도 일어섰으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리어구를 떠났다. 이번에 나는 어떤 농가의 채마밭 변두리에 둘러놓은 돌 우에 앉아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집의 들보에는 온통 옥수수가 가득 걸려있었고 참새 한마리가 옥수수들 사이에서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녔다. 나는 마치 속세 밖에 놓여있는 한알의 먼지인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계속 전진하여 통경 풍우교에 이르렀으며 이 다리의 본명은 대풍랑교라고 했었단다. 비강이 산굽이를 돈 곳에 다리가 세워져서 물살이 세고 파도소리가 리유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나라 건륭시기에 세워진 다리는 현비식悬臂式이고 단공목량单孔木梁에 교량 본체는 나무 각재를 교착가첩交错架叠 형식을 채용하였으며 다리어구로부터 층층이 강심을 향해 가려내다가 량쪽 9메터 거리에서 5개의 굵은 횡목으로 련결하였고 그런 후 나무판자를 깔았다. 교량 바닥에는 태량식抬梁式 나무구조의 교옥桥屋을 지었고 다리 량쪽 끝은 강남수향江南水乡 풍격의 륙각정을 만들어 사람들이 휴식하고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놓아서 풍우교风雨桥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고대의 아름다운 녀인이 란간을 짚고 멀리 바라보는 풍경도 없고 과거시험에 락방한 선비가 우연히 미인을 만나는 일도 없이 묵묵히 존재하고 있을 뿐 그냥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비를 피하는 장소로만 제공되고 있다. 강 량안 시골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운룡의 주민들 대부분은 남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이런 풍우교는 운룡의 향마다에 하나씩 있다고 한다. 순탕을 빠져나와 멀지 않은 곳에 운룡 경내의 마지막 등교가 있다. 어쩌면 낡고 피페한 이 다리가 언제 세워졌는지 아무도모를 수 있다. 말라 끊어진 덩쿨은 쇠줄로 바뀌여있고 쇠줄도 오래된듯 세월의 풍파에 녹쓸어있다. 담배를 붙여물고 눈을 감은 채 담배연기를 둥글게 뱉어내면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연기는 마치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을 영현影现하는 것 같다. 강건너 장터로 가던 아석阿昔은 일곱달 된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산고개를 넘던 중 등교가 보이는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비강의 파도 속에 삼켜져버렸다. 아석은 그 날 강을 건너가서 꽃천 두자와 성냥을 살 생각이였다. 나는 덩쿨 사이로 두발을 뻗어 바람 속에 내놓으며 발끝에 차거움이 닿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담배연기의 몽롱함 속에서 어제 밤의 춘몽을 돌이켜보았다. 록음이 우거진 다리 우에 한가하게 누워서 다리를 건너던 어느 남자가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장작불을 피워서 연기가 자오록한 집안에 데려들어가며는 화로의 각척 우에는 따뜻한 강낭죽을 끓이고 돼지우리 안에서는 돼지가 구유를 에워싼 채 먹이 달라며 보채고 닭장 안의 암탉은 몸을 옮겨 새하얀 닭알을 드러내며 공 세운 걸 알아달라는듯 꼬꼬댁 운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저녁해가 장작 틈 사이로 천만갈래의 잔잔한 빛을 들여보내여 시커먼 얼굴의 남자 몸에 비춘다. 나는 그 집의 아석이라 부르는 녀주인이다. 긴 머리로 상투를 틀고 빨간색 머리수건을 걸치였으며 어깨에 둘러멘 광주리에는 햇강낭이 가득 담겨있다. 현악기를 타는 셋째삼촌의 손가락이 나비처럼 날고 있는 게 똑똑히 보인다. 푸른빛 그림자가 뛰여노는 등교가 비강의 잔물결 속에서 휘청거리고 다리 건너 떠나간 뒤모습은 갈수록 멀어지는데 리아국은 긴 적삼에 짧은 홑저고리 차림으로 붉게 타오르는 홰불을 높이 들고 나에게 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나는 우물가에서 소금을 끓이며 생활을 건조시킨다… (천년목 옮김) 출처:2018제1호  
7    김수연: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시, 외2수) 댓글:  조회:415  추천:0  2019-07-09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 김수연     가을바람의 소리 아, 멀리서 그리움이 걸어오는 소리다    가을바람의 얼굴 아, 추억이 길을 찾아떠나는 뒤모습    가을바람의 냄새 아, 네 안에서 너를 읽던 시간의 향기다    가을바람의 손길 아, 네가 내 안에 들어서던 순간의 설레임   가을 속에 세상이 익어가고 있다 아, 너라는 한 사람으로 꽉 찬 세상이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 2   그냥  그대가 내 손을 잡아줬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그게 뭔 대수라고 가을조차 물들이지 못한 세상이 홀연 노란 금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아, 대수 맞네요 그 빛에 눈이 먼 나에게  이젠, 내 손을 잡아준 그대만 보이는걸요     아무렇지 않은 가을    사랑은 딱 그 깊이 만큼 가슴을 허비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만지는 가을비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툭툭 던지고 갑니다    이 비가 멈추면 추위는 아무렇지 않게 이만치 더 가까이서 우리의 옷깃을 파고들 테지요 그러면 오늘 가을비 속에 흩날린 기억들은 아무렇지 않게 저만치 나에게서 멀어져갈 테지요 아,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고 떠나갈 가을 속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가 봅니다 열심히 태운 이 시간들이 무엇으로 남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냥 정말 아무렇지 않게 선뜻 하늘의 뜻에 맡기는 법을 익혀야 할가 봅니다   이제 조금 더 촉촉한 가슴으로  이 가을을, 이 시간을, 이 사랑을, 이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듯이 안아주겠습니다 출처:2018제1호
6    박영화: 외할머니 전 상서(수필) 댓글:  조회:723  추천:0  2019-07-09
외할머니 전 상서 박영화   높아진 하늘을 따라 그리움이 늘어가는 추억의 계절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한자락에도 괜히 울컥해지는 감성 충만한 계절에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을 유독 많이 담은 윤동주시인의 을 읊어본다. 부끄러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은은하게 들려주고 자아성찰과 반성이 얼마나 멋들어진 일인지를 가장 느낌 있게 전달하는 시인, 윤동주 만큼 가을에 어울리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이름 석자만 대충 알고 지냈던 소시적에 작문선생님을 따라 무작정 윤동주 생가에 다녀온 뒤에도 마냥 이런 시인이 이런 곳에 머물렀었구나, 이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무슨 일인가를 많이 했나 보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평화치 않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처럼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시를 지어낸 시인에 대한 동경도 따라서 커져갔다. 그러면서 하나의 별에 자신의 고민과, 마음과 그리고 온 우주를 담고 싶어했던 시인의 먹먹함이 조금씩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시인 윤동주는 비물이 호수에 담기듯이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에 다가와서 조용히 내 감성을 적셔주곤 했다.  들판에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이 온통 황금빛을 자랑하는 이맘 때면 산타마냥 자식들에게 나눠줄 선물꾸러미들을 옹기종기 쌓아놓고 기다리시던 외할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민족과 시대를 잃은 거창한 부끄러움과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한 반성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끄러움과 아픔, 그 감정들만은 시인을 꼭 닮은 채 살다 가신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난치병을 앓는 큰아들을 둔 자책감과 그에 따른 온갖 설음과 짐들을 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감당해내신 분이셨다. 늘 다소곳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삶의 현장을 지켜오신 외할머니는 큰아들을 앞세운 아픔의 무게를 못 견디고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부재한 세상에서 살게 된 막내외손녀가 오늘은 윤동주시인의 의 쓸쓸함과 감동을 빌려 높은 가을 하늘에 외할머니 전 상서를 띄워본다. 외할머니한테도 아무 걱정 없이 자연을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을가. 다시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외할머니께서 어느 곳이 경치가 좋더라, 어떤 꽃이 예쁘더라고 하셨던 기억이 없다. 이곳저곳 마을 사람들과 려행을 다녀오신 뒤에도 그 사진 속에서도 외할머니의 눈빛은 늘 자연을 즐긴 사람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려행 후일담에도 자연에 대한 감상평은 없으신 채 큰외삼촌이 어느 곳을 갔는데 힘들어했다, 어디에선 좋아했다 뿐이였다. 외할머니 생활의 대부분은 큰외삼촌 챙기기로 채워져있었지만 정작 그 정성과 마음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큰외숙모가 선택한 결혼이였지만 지병이 있는 아들을 장가보내서 딸의 인생을 망쳤다는 사돈들의 눈초리는 명절 때면 더욱 심해졌고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성우로 활약할 만큼 재능 많고 의젓했던 큰아들이 위축되는 게 싫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뒤돌아 술로 서러움을 삼키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왔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에게는 삶의 어느 모퉁이에도 숨통이 트일만한 곳이 마련되여있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라도 곁에 계셨더라면 덜했을 외로움과 서글픔들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림도 잘 그리고 손수 가구도 만들고 기관사로도 지낸 적이 있는 다재다능한 분이셨다고 한다.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진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큰 병은 아니였던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셨고 중병을 앓는 큰아들의 병치료만으로도 버거웠던 가정형편을 걱정하여 식음을 전페하고 약도 안 드신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남편을 여의고 자책감의 무게를 키워온 외할머니의 생은 한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가슴 시린 삶이였다. 그럼에도 외할머니는 끝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쌀 줄 아는 마음 따뜻한 분이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외할머니댁에 가는 게 동년시절에는 제일 신나는 일이였고 제일 행복한 려행이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는 틈만 나면 옷가지를 대충 챙겨가지고 혼자서 찾았던 외할머니댁은 항상 사촌들과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했던 원인도 있겠지만 손주들은 물론이고 사돈아이들까지도 외할머니를 잘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어린 우리들에게 류행가를 가르치고 그 당시엔 리해하지도 못하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때론 술에 취해 춤도 곧잘 추던 외할머니댁은 우리에게 가장 큰 놀이터였고 따뜻한 쉼터였다. 가갸거겨도 겨우 알가말가 하는 손주들을 불러놓고 일본어로 개사한 노래를 가르치며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일본어로 수업하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다는 외할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신기했고 깨끗하게 정돈될 틈이 없을 정도로 늘 어질러진 채로 분주했던 외할머니 집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 이어 큰아들마저 앞세운 외할머니는 끝내는 슬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야 말았다. 외할머니의 모진 인생이 더 힘들어진 것도 큰아들 때문이였지만 외할머니의 유일한 삶의 끈 또한 큰아들이였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큰아들을 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오던 외할머니는 큰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마지막 한오리의 지푸라기마저 놓았던 것 같다. 손톱, 발톱이 빠지도록 큰아들을 위해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밭일을 하면서 안 좋은 심장 탓에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면서도 늘 강철마냥 탄탄해보이던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졌고 더 이상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던 할머니의 손발은 나어린 우리 것보다도 희고 곱게 변해갔다. 늘 숨이 차서 헐떡이던 모습도 차츰 사라져 아이처럼 평온하게 잠에 들곤 하셨다.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을 한달이고 두달이고 감췄다가 다른 자식들 몰래 큰아들 집에 올려가시던 외할머니는 계절마다 제철 과일도 찾고 드시고 싶은 음식도 사다달라고 했다. 그렇게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6년 동안 치매를 앓으신 외할머니는 막내딸인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늘 우리 집을 큰아들 집이라 우기셨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막내딸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현실부정이겠지만 엄마도 나도 당시엔 그게 늘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전화만 받으면 내 이름만 부르곤 해서 다른 손녀들의 서운함까지 산 외할머니,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하시고 그 긴 시간을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가? 어쩌면 외할머니가 좋아하던 모든 아름다운 말들을 되뇌고 있던 건 아닐가. 언젠가 젊어서는 ‘고운 새댁’으로 불리웠던 적이 있다고 롱담처럼 하셨던 말씀 대로 외할머니에게도 밝고 싱그러운 청춘이 있었을 테니가… 그리고 어쩌면 백일홍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언젠가 여름방학에 찾았던 외할머니댁 터밭 가장자리에 피여있던 꽃을 보며 막연하게 ‘꽃을 심을 여유도 있으시네.’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외할머니는 늘 빚을 진 자세로 힘겹게 삶을 감당해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에서 심어진 꽃들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아마 모두가 잠든 희붐한 새벽녘에 당신의 고뇌와 아픔을 담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보려고 심었던 것은 아니였을가.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온 아픔들이 그 순간이나마 꽃으로 피여나고 꽃으로 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그 꽃 하나하나에 당신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웠을 어머니를 담아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때늦은 바람이라 부질없긴 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유독 오래동안 피여있는 꽃이 백일홍이기도 하다. 쉽게 피였다 쉽게 지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게 적어도 일년에 백일 동안은 외할머니 곁을 밤낮없이 지켜줬으니 참 고마운 꽃이다. 또 어쩌면 끔찍이도 아끼고 우애가 깊었던 형제자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 요절한 막내녀동생과 셋째동생과 고국에 남겨진 남동생과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큰오빠를… 아니면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에 씌여져있던 외할머니의 이름 석자를 보고서야 안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누이, 동생, 언니로만 살다 가신 외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이 너무나도 서글프게 안겨왔으니까. 그이들을 추억할 잠간의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불공평한 운명에 내버려졌던 외할머니를 위해 좋은 기억만 허락한 6년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랬으면 참 좋았을 시간이였다.  이제 내가 대신 외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그 존재들의 이름을 불러드릴가? 그러면 잠시나마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달래질 수 있을가? 외로움과 그리움과 서글픔으로 반죽된 인생을 힘겹게 견뎌온 외할머니, 이제 외할머니가 누워계신 파란 언덕에도 수많은 별빛들이 내려앉아 말동무도 되여주고 술친구도 되여주었으면 좋겠다.  아스라이 먼 별로 떠나셨지만 또 손에 닿을듯한 거리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계시는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별에도 백일홍이 피였다가 진 시원한 가을이 왔기를, 별 하나하나에 외할머니를 추억해본다.  출처:2018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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