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의 조선족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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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칼럼] 아름다운 글과 현대적 감각 댓글:  조회:470  추천:0  2019-07-14
아름다운 글과 현대적 감각 장춘식(중국사회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 평론가)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것이 문학작품이다. 우리의 문학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모 위챗그룹에서 리기영의 《두만강》을 읽고 싶다는 글을 읽고 갑자기 ‘과연 어떤 글이 아름다운 글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리기영의 《고향》이나 《땅》, 《두만강》과 같은 소설의 문장을 아름다운 글의 전범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작가들, 가령 김학철이나 김철, 림원춘, 리원길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학전통을 전승받았으며 그래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조선의 현대작가들, 그들의 글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문이 열리면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문학작품의 잘 갈고 닦여진 언어에 매료되여 한동안은 우리의 전통문학어에 대한 애착이 시들해지고 심지어 어딘가 촌스럽다는 생각마저 들기에 이르렀다. 이런 차원에서 2000년대 초반 우리의 신진작가들 특히 녀성작가들의 매끄러운 언어, 분명히 한국문학에서 섭취했을 그들의 언어능력을 평론가로서 높이 사주게 되였다. 실제로도 이는 우리 작가들의 진보요, 우리 문학의 환골탈태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우리의 촌스런 언어에 대한 향수가 생기고 문학어 즉 글이 아름답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가 라는 의문이 들게 되였다. 그리고 박경리의 대하장편 《토지》를 읽게 되였다. 령남사투리와 호남사투리에 대한 박작가의 거침없는 사용과 이를 다루는 능수능란함은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였다. 그 이전에 읽었던, 매끄러운 문장의 극치라 할 만한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에서 느꼈던 1% 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답을 얻게 되였다. 문장은, 혹은 글이란 매끄럽기만 하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시대 민중의 생존과 언어의 실질 즉 민중의 참모습을 재생시킬 수 있는 말, 글이라야 진정 아름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문학어가 과거 시골문화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리기영 시대의 언어는 농경문화의 산물이며 인구의 다수가 농민이였던 시대에 적절한 언어로서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는 항상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만 한다. 제6세대 작가로 분류되는 2000년대 세대 즉 이른바 ‘70후’ 세대로부터 그 이후의 우리 문학어는 도시문명 시대의 언어적 특징을 반영한다. 이들의 언어가 한국문학의 언어특징을 닮았다는 것이 중론인데 이는 한국의 문학어가 도시문명의 시대 우리 문학어를 대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산업화를 실현한 한국이 우리에 한발 앞서 도시문명의 문학어를 이루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나 한국의 문학어는 도시문명의 특징을 대표하는 매끄러운 언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서구화하여 농경사회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아름다운 고유어가 어려운 외래어, 우리에게는 더구나 생경한 외국어에 밀려난다는 안타까움을 동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가? 일단 도시적인 감각이 담긴 한국의 문학어를 꾸준히 습득해야 한다. 도시화 시대에 ‘촌스런’ 시골언어를 가감없이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발 앞서 도시화 사회에 진입했다고 하여 한국의 문학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가령 지나친 외래어 람용이나 신조어를 걸러내지 않은 채 그대로 문학작품에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문학어를 오염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리기영 시대의 문학어 또한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이를 이어받은 우리 문학선배들의 언어와 더불어 도시화 시대 우리의 새로운 문학어를 확립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현대 삶의 환경에 어울리는 현장언어를 이러한 전통과 결부시켜 정화시키고 재창조함으로써 한국이나 조선의 문학어와는 색다른 우리만의 문학어를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진로가 아닐가 한다. 이것이 변두리에서, 틈새에서 생존해가는 우리 문학의 전략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처:2018 제4호
1    장춘식: 인간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정체성 댓글:  조회:502  추천:0  2019-07-08
인간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정체성 -허무궁의 신작수필 3편 장춘식     허무궁의 수필은 솔직담백함과 ‘점잖은’ 유머 혹은 해학으로 독자를 끈다. 때로는 무거운 인생체험을 해학으로 풀어내기도 하며 거기에 환경의식과 같은 현대를 반성하는 소박한 ‘현대의식’이 가미되여 감동과 심사숙고를 동시에 이끌어낸다. 이번의 신작 3편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전하다. 그러나 변화도 있다. 삶과 세상의 본질을 좀더 다각적으로 들여다보고저 하는 작가의식이 그것이다.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분량도 여느 수필작품들보다 훨씬 더 많고 서술 스타일 또한 대부분 서사로 되여있다. 어쩌면 한편의 소설작품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거의 완결된 스토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항상 해학으로 이어지는 여타의 수필작품과는 달리 상당히 무겁고 우울한 빛갈을 던져주고 있다. 주제적 측면에서는 한마디로 ‘아버지’라는 이름 혹은 역할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구조적으로는 , , 라는 세개의 이야기 토막을 하나의 의미 구조에 엮어놓고 있다. 첫토막은 라는 제목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작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란의 세월에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토막을 엮어놓은 것인데 그 이야기 자체는 사실 비극적이고 눈물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 자체의 비극성이나 10년 동란이 우리 사회와 가족에게 남겨준 아픔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런 아버지의 운명이 아들인 ‘나’에게 미친 영향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두번째 토막인 ‘남의 아버지’의 이야기, 아니 정확하게는 아버지 때문에 발생한 한 아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을 버리고 가출을 한 까닭에 어머니는 그 보복으로 아들로 하여금 항상 최고가 되도록 ‘강요’했고 그것이 나중에는 아들의 심리적인 장애를 야기하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이야기와는 여러 측면에서 사뭇 대조적이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어서도 당당한 모범이 되여 아버지의 역할을 했지만 뒤의 이야기에서는 살아있을지도 모를 아버지이지만 가정을 버림으로써 엄마의 복수심을 자극하였고 그것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비뚤어진 기대감을 유발하였으며 아들은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지 못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토막이다. 작가 자신이 여느 아버지나 다름없는 아버지로서 경험한 인생체험을 아버지가 되였을 때의 책임감과 딸을 출가시키는 이른바 ‘끝나는 아버지’의 심경으로 제시한 것인데 “아버지의 등은 아버지의 마음을 비추는 도광판이며 아버지의 인생을 적어놓은 노트이며 아버지의 책임을 업은 파넬이다.” 라는 작가의 깨달음은 곧 이 세토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인생의 원리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아버지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해야만 자신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구조적으로 조금 절제되였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삶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동시에 수필전략의 차원에서 체험의 솔직담백한 고백으로 하여 충분히 감동과 공감을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제 다시 이라는 작품을 보자. 요즘 중로년들의 위챗그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생이나 건강 관련 이런저런 ‘비결’들과 비견되는 이 ‘건강비결’은 결국 환경의식에서 비롯된 ‘자연주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볍지만은 않은 화제를 작가는 해학으로 시작한다. 자신을 그럴듯한 건강관리사나 양생의 체험자로 자처하지는 않고 오히려 저 멀리 《동의보감》이라는 조선의 고대 의학서의 저자 허준을 할아버지로 모신 것이다. 자신의 성씨도 허준과 같은 허씨라는 것. 이 정도가 되면 아무리 무거운 화제라 해도 일단 웃음이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허무궁의 해학은 여기까지가 아니다. 작품의 곳곳에서 작가는 해학이나 유머를 곁들이며 문제를 풀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허무궁 수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력작이다. 산업화 혹은 후기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현대인이 안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학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건강의 비결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체의 질서를 맞추고 자연스럽게 살기, 벌레가 먹는 음식을 달게 먹기, 화초 가꾸듯이 자기 몸을 가꾸기가 그것인데 한마디로 지나치게 인간의 능력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의 능력만 믿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건강하다는 것이다. 십분 정확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리해가 되는 원리를 잊고 살아야 했던가? 과학이라는, 현대라는 허상에 오래동안 습관되여 자연의 섭리라는 근본을 잊은 건 아닐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근본으로부터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라는 작품을 잠간 주목해보자. 본적은 명천군 아감면, 고향은 중국 연변 룡정이고 집은 일본의 동경 그리고 사업터는 중국의 소주나 필리핀인 작가에게 있어 ‘돌아간다’고 할 때는 어디서 어디를 가든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혈통으로서는 단군의 후예이고 중국의 조선족으로 살다가 이제 일본사위를 둔, 일본에 가족이 있는 한 남자! 그리고 사업마저 중국의 소주 한곳이 아닌 필리핀에까지 가서 하고 있는 처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단 하나 “나는 인간이다”라는 정체만 분명할 뿐이니까. 아버지의 의무나 책임감, 환경의식마저도 결국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어디에 살든,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지구땅에 사는 고등동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행복을 위해서라도 지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곧 환경의식이요, 인간의 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허무궁은 유독 환경의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무궁의 이번 수필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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