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창녀
—한국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4년 “올해의 좋은 시” 상 수장작
김이듬
수상시인 김이듬시인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6월호 발표)
선정 이유
한국 현역시인들의 참여와 선택
2014 「올해의좋은시상」 본선에 진출한 10편의 시를 놓고 심사에 들어갔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시인광장이 정한 원칙에 의해 전년도 수상자인 김신용과 편집위원인 최형심을 제외한 김사인 김소연 김행숙 신용목 김이듬 김중일 박연준 김두안의 작품이 대상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자유로운 기준과 숙고의 선택으로 각자 3편을 고른 다음 투표한 결과 일차에서는 김사인 시인 2표, 김소연 시인 2표, 김이듬 시인 2표, 김행숙 시인 2표를 획득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겹친 시인과 펼쳐진 시인이 다양하다는 뜻이었다. 위 시인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 2차 투표를 한 결과 김사인 시인 2표 김이듬시인 2표로 좁혀졌다. 이 부분에서 심사위원들의 검토와 숙고가 다시 이어지고 토의결과 3차에서는 단일합의로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로 결론을 냈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처음 선정한 시편들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선자는 처음에 김두안의 「환월幻月」, 김사인의 「김태정」, 김이듬의 「시골 창녀」를 주목했다. 그러나 2차와 3차를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김태정」과 「시골 창녀」를 검토하면서 이 두 작품이 많은 시인들의 관심과 또 선자들의 시선을 끈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시의 형식적 태도에서는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서사를 끌고 가는 호흡과 긴 주제에 대한 시적 진실성은 양자가 공히 공유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들이다.
모든 시인들이 참여하고 쳐다보고 있는 이 상의 본질과 목표에 좀 더 접근하는 시가 어떤 시인가를 고민했다. 선자들은 김이듬의 「시골 창녀」가 우리 시단에 좀 더 활력을 불러오리라는데 동의하고 일치된 의견으로 「시골 창녀」를 2014 올해의 좋은시 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끝까지 선방한 김사인의 「김태정」에 아쉬움을 표하며 김이듬 시인에게 축하한다. 이 상은 한국 현역시인들의 참여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상이고 선자들은 그 과정에서 대행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상자는 다른 문학상과는 성격이 다른 이 상의 공정성과 그 명예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 말은 10선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게도 해당된다. 선자들이 달랐다면 그 작품들이 수상작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므로.
김백겸 (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이 있음.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이며 웹진 『시인광장』 主幹. 한국원자력연구원 근무.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선정 이유
감정의 긴장 과정, 고조과정, 그리고 완결
작년 한 해 시단의 특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시가 무척이나 길어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들 길게 쓰는지,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그것이 어떤 공통적 수렴점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산문적인 시들로서 아주 선연한 감동을 주는 시들을 몇 편 만나지 못한 것을 보면 시의 이 장형화를 마냥 반갑게 마주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우리 시에서 이런 장형화는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의 구별점에 대해서, 시적 언어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또 조사 처리, 어미 처리 같은 데서의 섬세한 형식상의 문제들애 대해서도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일반화된 장형화는 시의 타락의 징후다. 긴장의 이완을 땜질하는 장광설일 수도 있다.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나 김사인 시인의 '김태정'은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작년 한 해 동안 급격히 증가된 장형화된 시들의 단점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자의식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는 시들이라고 생각된다.
'시골 창녀'는 여성 시인 자신일 수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의 풍경을 연을 바꾸어가며 리듬이 달라지는 '드라마' 속에서 극적으로 펼쳐내고 있는 시다. '김태정'은 한 아름답게 살다 세상을 떠난 한 여성 시인의 모습을 반추하는 여러 각도를 보여주는 시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둘 다 각기 다른 미덕을 갖추고 있으나, 그 방향이 다른데, 앞의 것이 화자 자신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 쪽으로 파고 들어간다면, 뒤의 것은 화자가 관찰적, 회고적인 시각으로 한 여성 시인의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시골 창녀'를 '김태정'보다 선호하게 된 연유를 말한다면, 긴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몸체를 지탱할 수 있는 리듬과 그 색조의 변화를 '시골 창녀' 쪽이 더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시골 창녀'는 어떤 '모노드라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감정의 긴장 과정, 고조과정, 그리고 완결이 있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교수)
1965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4년 제1회 《창작과 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 활동 시작. 2000년 《현대시》를 통해 시단 등단. 저서로는 비평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와 『문명의 감각』 등이 있음.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
선정 이유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는 충격
본심에 올라온 10편 중에서 작년 수상자인 김신용 시인의 시와 『시인광장』 편집장인 최형심 시인의 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8편을 읽었다. 모두 예심에서 뛰어난 역량과 장기를 인정받고 올라온 작품들이고, 또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독특한 지평을 넓혀온 시인들의 작품이었기에, 솔직히 나는 이들 중 어느 작품이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된다 해도 수상자격으로 충분하리라 여겼다.
1차 투표에 나는 김사인, 김소연, 김행숙 시인의 작품을 추천하였다. 김사인 시인의 ‘김태정’은 가난하게 살다간 한 인물을 그리면서 추념 보다는 생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현시하며 그 아래 깔린 외로움을 환하게 비춰내고 있다. 김소연 시인의 ‘장남감의 세계’는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겹치면서도 그 틈이 어긋나 결코 같은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론적으로 보여준다. 김행숙의 ‘옥토정기 찾기’는 ‘빨간약’이라는 대상을 기점으로 우리 생이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다는 점을 활달한 상상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수상자가 결정이 되지 않아 다시 2차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이것으로도 최종 수상자가 나오지 않자 3차 투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를 다시 주목하기로 했다. 다른 심사위원이 계속 그를 추천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추천하지 않은 이유는 지나친 산문성과 요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상상력의 신선함, 그러면서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는 충격은 요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납득이 갔다. 그래서 나도 3차 투표에서 김이듬 시인의 작품을 ‘올해의 좋은 시’ 수상시로 선정하는데 동의했다.
김이듬 시인에게 마음 깊이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모두 우리 시단이 뽑은 올해의 가장 멋진 작품들이라는 점을 환기하면서, 더불어 축하드린다.
정한용(시인, 문학평론가)
충주에서 출생. 2000년 시작하여 현재 80여명의 회원을 가진 인터넷 문학동인 빈터 대표. 2003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국제창작 프로그램 및 2011년 코로라도 Art Ranch residency 프로그램 참여. 2012년 만해문학상과 천상병시상 수상. 다섯 권의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슬픈 산타 페』, 『나나 이야기』,『흰 꽃』, 『유령들』과 두 권의 평론집 『지옥에 대한 두개의 보고서』와『울림과 들림』이 있음. 현재 『시인광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수상 소감
수상가옥은 젖었으나
정결케 하는 한 가지 방법, 신을 향해 기도할 것,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은밀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할 것. 죽은 이들에 대한 경건함,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할 것.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수상 소식을 들었다, 그저께 진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평소 관혼상제에 무심한 내가 1월 중순 김진완 시인 모친상 조문을 시작으로 일주일 사이 세 곳에 문상을 갔다. 이상하게 성급히 움직였다. 자살한 사나이는 목재 나이테 분석 전문가였다. 그의 영정 아래 흰 국화를 놓았다. 그 순간, 그토록 가까우며 동시에 가장 먼 곳을 향해 나는 인사했다.
시는 죽음과 같다. 시는 누구에게나 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둘러싸고 있다. 시를 쓸 때 나는 미래와 단절된다. 영원한 비극성에 끌리지 않고 순수한 결정체나 정신의 일보전진도 꾀하지 않는다. 누가 보든 안 보든 흐느끼는 누군가 나타난다. 퍼소나라고 하자. 아까는 어린 백정이 등장했다. 그의 온몸은 피범벅이 된다. 언어의 근육, 이런 거 모른다. 그는 털 뽑고 껍질 벗긴 살점을 저울에 다느라 바쁘다. 쳐내도 움직이는 대가리를 안고 발라놓은 수북한 뼈들 사이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나는 그 어린 백정 퍼소나와 다투었다. 자기투쟁, 자기혁명, 뭐 이런 거 모른다. 다소 정결해질 뿐. 아무튼 나는 싸운다. 무수한 나와 사물들, 말과 침묵과 욕망들과……
기차 타고 여행하는 도중에 수상소식을 접했다면, 그 별안간 떨어진 분에 넘치는 희보(喜報)로 객실 통로를 뛰어다니며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수상은 통로이자 장애물이다. 수상시인은 물 아래 그림자 수상가옥에 입성한다. 여보게! 낚시 잘 되나? 몇 마리나 잡았는가? 지나치게 빛나서 흐릿해 보이는, 문단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문청 피라미(被羅美), 악어(惡語)들아! 난 날름 들어간다. 너희들은 바깥에서 전선을 가다듬기 바란다. ‘최고작’ ‘수상작’ 등을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해라. 여기저기 폭탄상금을 싣고 내달리는 시 카니발 광란열차에 뛰어올라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다오.
천만다행 내 시는 덜 빛났다. 심지어 비루하고 무식하며 품격 없는 시를 뽑아주신 동료시인들과 심사위원님들의 무모와 불온, 그 훌륭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나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감격했고 감사한다. 구차하게 덧붙인다면, 시를 잘 쓰는, 내가 사랑하는 몇몇 시인에게 미안하다.
김이듬 시인
196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 부산대 독문과 졸업. 경상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2001년 계간 《포에지》(나남출판사)로 등단. 네 권의 시집『별 모양의 얼룩』(2005. 천년의시작)『명랑하라 팜 파탈』(2007. 문학과지성사)『말할 수 없는 애인』(2011. 문학과지성사)『베를린, 달렘의 노래』(2013. 서정시학)와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2011. 문학동네) 출간. 제1회 시와세계작품상(2010)과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2014) 수상.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선정되어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간 생활. 현재 경상대 출강 중.
시골 창녀 /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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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모신다는 점에서 시인과 기생은 닮았습니다. 영혼을 파느냐 몸을 파느냐 하는 것만 다를 뿐 자신의 일부를 판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그 대가로 사랑을 얻지만, 밤마다 몸과 마음이 춤을 추도록 하기 위해서 약을 빨든 술을 빨든 무언가를 빨아야 한다는 것 역시 닮았습니다. 아마도 시인과 창녀는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신전에서 몸을 팔던 고대 신녀들, 혹시 그들이 둘의 공통 조상은 아닐까요?
- 시인 최형심
정말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
진실된 고백과 인정이야말로 순결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참 뜨겁네요.
선천적으로 감정에 헤프기는 시인만큼이나 독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둘 다 삶을 살아가는 행위인만큼 시작과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지만 정말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 창작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해낼 정도로 미쳐버리고 퇴폐해버린 시인이야말로 진짜배기 기생인건가요, 아니면 체통있는 집안의 유일한 진짜배기 사람일까요.
하하... 시인도 독자도 감정에 헤프죠. 창작의 고통을 위해 몸도 영혼도 버린 시인이야말로 진짜배기겠죠. 펜만 쥐었다고 다 시인인가요...
라디비나 네 선생님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조금씩 벗어던지고 있습니다,,, 정성스러운
가슴이 뜨거워지는 시죠.
싯귀 한 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잘 알겠습니다.
그저 적당한 단어 하나 어물쩍 찍어 붙이려던
내 감정이 부끄럽습니다.
쉽게 쓸 수 있는 시라면 거기에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담겨있겠습니까? 읽고 이해하기 쉬운 시라도 쓸 때는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치부까지 온전히 토해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겠군요.
거침없는상상의 끝이 없네요
이 시도 사실 거침없죠. 누구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게 본능인데, 사실 나 창녀나 다름없어,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자세가 참 훌륭합니다.
부끄러움과 솔직함을 정말 절묘하게 섞어낸 것 같아요.
아무리 글 잘 쓰는 이라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막 툭툭 튀어나오는 게 아님을 또 새삼...
김이듬 시인은 솔직하고 대범한 작가죠. 그래도 그 솔직함이 다순한 외설이 아니라 깊이와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기에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시
김태정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데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 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5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김사인
시인. 문학평론가. 1956년 충북 보은 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2년 ‘시와 경제’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를 시작했다. 김사인의 시들은 대체적으로 형식면에서는 매우 균제된 느낌을 주지만 치열한 내적 긴장을 함축하고 있다. ‘무수히 들끓는 감각의 반란을 통제하기 위한 시인의 혹독한 극기의 산물’이라는 비평가의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시대와의 불화로 몸살을 앓는 시인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시의 정신과 감성 양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엄격성을 지키고자하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고, 2005년 제20회 현대문학상, 2006년 제14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2007년 제1회 서정시학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으로는 『밤에 쓰는 편지』(청사, 1987),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이 있고 신철균과 함께 사진시집인 『따뜻한 밥 한 그릇』(큰나, 2006) 을 펴내기도 했다. 이외에 임동확과 함께 5․18 20주년 기념 시선집인 『꿈 어떤 맑은 날』(이룸, 2000)을 펴냈으며 『박상륭 깊이읽기』(문학과지성사, 2001)를 엮어내기도 했다.
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김태정
*김태정(1963~2011)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한권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5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 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은 일이 있다.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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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가해봅니다. 세속적인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조용하게 사는 것이 시인답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말이 쉽지 현대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진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요. 시인 김태정은 온몸으로 시인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시인 최형심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절미
김사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사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한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머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김사인 시집 중에서
[출처] 김사인의 '인절미'|작성자 허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