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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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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9) 고향의 버들 김장혁 댓글:  조회:719  추천:0  2024-04-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장       7. 고향의 버들     엄동설한에  눈 덮인 대지에 차가운 빛가루가 뿌려지고 있다. 윙-윙- 눈보라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눈 덮인 시골개천바닥을 휩쓸며 휘몰아친다.     경인과 어금은 불 붙이에 세간나 이럭저럭 근근득식하면서 살았다. 경인은  베옷바람에 초신 감발하고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버들방천의 버들을 베러 발기를 끌고 나갔다. 소 버치를 결어 팔아 차좁쌀이라도 사 살림에 보태려는 것이였다.     눈보라가 어찌나 세찬지 날아오는 모래알 같은 눈가루에 얼굴을 맞아대는 듯하였다. 숨이 헉헉 막혀 발기를 끌기 힘들었다. 설상가상 맵짠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 들어 아래위이발이 더덕더덕 맞쪼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경인은 용케도 쓸만한 버들을 얻어만 보면 낫질 해 발기에 담았다.     “야, 이 놈새끼, 버드나무를 마구 베?!”    눈보라치는 겨울에 이게 무슨 마른 하늘 생벼락인가?    경인은 낫을 쥔 채 머리를 돌렸다. 소리임자를 보니 말을 타고 군도 찬 일본 사람이었다.    경인은 일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발기를 끌고 나가면서 계속 버들을 베였다.     쒹- 쒹-    가죽채찍이 날아와 경인의 잔등을 핥아 쨌다.    옷이 째지며 살갗이 드러났다. 드디여 살캋에 시뻘건 굴 뱀이 죽죽 졌다.    “아니, 왜 이래?”    “빠까 모노(바보 같은 자식)!”    일본 놈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경인이 날아드는 채찍을 덥석 감아쥐어 홱 챘다.    일본 놈이 말잔등에서 휘청거리며 하마트면 떨어질 번했다.    이때 등뒤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총을 든 일본 경찰 대여섯이 말 타고 달려왔다.    먼저 온자가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치자 일본 경찰들은 경인을 붙잡아 묶었다. 그 놈들은 경인을 붙잡아끌고 개 잡은 포수들처럼 우쭐렁거리며 상우남면에 자리잡은 림산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는 조선인 통역이 있었다.    통역은 사무상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일본 사람을 가리키면서 조선말로 말하였다.    “이분은 림산파출소 야마모도소장이네. 당신 정신 있소? 감히 버들방천의 버들을 베다니?”    그제야 경인은 자기가 잡혀온 영문을 조금 알게 되였다.   잠간 후 그는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일본 사람들이 정신있소? 내가 나서 자란 고향에서 버들을 벴는데 무슨 죄 있단 말이오?”    경인의 뒤 말만 통역하자 야마모도 소장이 호통쳤다.    “뭐 어쩌고 어째? 법도 모르는 시골 놈들, 한일합방 후 조선은 일본에 귀속됐어. 조선의 땅과 물에서 자란 모든 게 일본 거란 말이야. 넌 일본 삼림법을 어겼기에 중대 범죄자야.”    경인은 억이 막혀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우리가 세세대대로 살아온 고향이 일본 거란 말이요?”    통역은 조용히 말했다.    “이보. 말해보았자 쓸데없소.벌금이나 하구 집에 가게 내 말해줄테니. 작작 떠드오.”   "벌금? 무슨 말이오?"   "감옥살이 대신 돈이나 내란 거요."    경인은 머리를 무겁게 툭 떨어뜨렸다.    (일본 사람들이 들어온 후 처음 듣는 소리야, 제기랄 벌금! 당장 먹을 쌀을 살 돈도 없는데 벌금 하라는 거야? )    경인이 속으로 두덜거리는데 일본 헌병 소대장 나까노라이찌로가 파출소에 들어왔다.     그는 야마모도 소장 곁으로 다가가 거적눈을 내리깔면서 뭐라고 쑹얼거렸다.     야마모도 소장은 경인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연 한대를 꺼내 가재수염아래에 꼬나물었다.    나까노라의 거적눈은 실눈으로 한데 붙더니 피어오르는 연기를 꿰뚫고 경인을 여겨보면서 무슨 속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야마모도 소장은 희죽이 웃으며 씨부렸다.     “자넨 운주동 최구장네 둘째아들이라면서?”    경인은 머리를 들어 야마모도 소장을 쳐다보았다.    야마모도 소장은 가재수염을 슬슬 쓸더니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 벌금서에 이름 석 자를 써넣고 돈을 가지고 오게나.”    경인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아니, 보릿고개를 넘을 쌀을 살 돈도 없는데 무슨 벌금을 내라는 게요?”     야마모도소장은 통역이 번역해주자 책상을 꽝 쳤다.     “제기랄! 최구장 낯을 봐주는 건데도 모르는가? 어째 감옥살이를 하고 싶은가?”     경인은 억울한 대로 그렇게 하겠다고 벌금 서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써넣고 파출소에서 나왔다.     그는 앙알한 마음으로 발기를 끌고 운주동에서 서쪽으로 오리나 떨어져있는 불붙이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어금에게서 기별을 받고 최구장과 경숙이 달려왔다. 그들은 경인의 째진 옷 속에 드러난 잔등의 채찍자리를 보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기 고장의 버들을 벴는데 채찍으로 이다지도 때려?”    경숙이 경인의 상처를 보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계십둥?”   이때 밖에서 성칠이 사냥총을 쥐고 불쑥 들어섰다.    눈보라가 살창문을 투르륵 두드린다.    “사돈어른 오셨구먼. 우리 조카사위가 일본 놈들에게 다쳤다더니 어떻소?”    성칠이 문안하러 오자 경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유, 목재 일에 바쁜데 찾아 왔습니까?”    경인은 일어나 절을 올렸다. 그러자 성칠은 바삐 마주 앉으면서 답례했다.    “에이, 아픈데 무슨 절까지. 에이고, 어깨랑 다쳤구먼. 다른 덴 상하지 않았소?”    “괜찮습니다.”    어금은 눈물이 글썽해 두 손을 맞잡고 앉아 큰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성칠은 어금을 건너다보면서 당부했다.    "이후에는 일본 놈들의 눈을 피해 버들을 베오.”    경인은 피발이 선 눈을 뚝 부릅뜨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이를 북북 갈았다.    “에이유, 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습둥? 버치라도 결어서 쌀이나 사자 했더니. 그것마저 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삽둥? 전번에 경찰국공지의 삯전도 주지 않은 게 목재 일을 해도 주겠습둥? 살 길이 막막합구마.”     성칠은 여러분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기 전에는 발편잠을 잘 수 없습구마.”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칼을 쥔 일본 놈들을 어쩌겠수?”    성칠은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사냥총 들고 싸워야 합구마. 경인 조카사위는 검을 잘 쓰지 않소?”    그 소리에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힘으로 언제 그 놈들과 싸워 이기겠소? 500년이나 이 나라를 통치해온 이씨 조선의 관군들도 어쩌지 못하고 나라를 다 빼앗기고 말았는데. 괜히 검을 휘두르다가 괜히 목숨이나 잃겠소.”      최구장은 앉아 김빠진 말만 했다. 성칠은 공자 왈 맹자 왈 밖에 모르는 선비들과 무력을 쓰자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도 주저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선비들이야 무슨 담에 총칼을 든 일본 놈들과 싸우겠는가?)     성칠은 장소나 사람을 봐가면서 말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사돈어른의 서당 방은 어떻게 돼갑둥?”     최구장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요즘부터 일본 사람들이 조선 글이나 한어를 가르치지 말구 일어를 배워서 가르치라고 해서 난리네.”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패이고 흰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최구장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늘이 꽉 끼였다.    성칠은 세파에 모대기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최구장에게 존경이 갔다.     “최구장은 서당 방을 차려서 우리 후대들의 눈을 틔워주는 게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겝지유.”     “우린 아무리 가난해도 허리띠를 조이고서라도 자식들을 공부시켜야지.”     그쯤 되자 성칠은 후에 경인과 조용히 말해보기로 하고 문안 몇 마디 더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칠은 사돈들과 인사하고는 집에 나와 성큼성큼 앞장대로 치달아 올랐다.     눈보라가 쌩쌩 나무초리를 스치며 무서운 비명소리를 쳐댔다. 일본 놈들의 세상으로 뒤바뀐 조선의 대지에는 와가의 콧노래가 장송곡을 부른다.     저승사자가 염라전 화로불 옆에서 이빨을 다시며 기지개를 켜더니 하품을 하며 낮잠을 청한다.                        
38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8) 조선의 원시림 김장혁 댓글:  조회:625  추천:0  2024-04-05
                         김장혁 작 울고 웃는 고향 제5장                   6. 조선의 원시림          나무가지들에는 시허연 눈이 더부룩이 쌓여 있다. 박달나무도 탁탁 얼어터질 엄동설한이 다가왔다. 여우도 추워 눈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발을 동동 구를 맵짠 추위가 덮쳐왔다. 화로불도 품 속으로 기여들 지경으로 매섭게 추웠다.     마을 사람들은 길수가 경찰국청사공지 삯전을 주지 않아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이 없어 근심하면서 하루를 삼추와 같이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길수는 집에 일본 경찰국장과 기생 년들까지 불러다가 흔전만전 먹고 마시고 큰 잔치를 벌렸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모두 욕설을 퍼부었다.     "저 우멍눈을 까마귀 파먹었으면."      "어서 썩어질게지."      길수는 영팔과 수길 등 졸개들을 데리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벌목에 나오라고 을러멨다. 그의 말대로라면 통나무를 벌목해 우시장에까지 실어가면 꼭 삯전을 준다고 했다.     성칠은 크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서도 사냥도 하지 못하게 하는 판에 칠백과 덕성, 최동욱 등과 함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으로  벌목하러 올라갔다.     요즘 삼림분주소 야마모도 소장은 사냥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낮에는 삽살개처럼 졸개들을 데리고 산에서 벌목공들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누가 사냥을 하나 살피였다. 밤에는 마을로 싸다니면서 어느 집에서 혹시 산짐승을 사냥해 끓여 먹나 집집이 기웃거리면서 가마뚜껑까지 일일이 열어보았다.        스르륵 스르륵 톱질소리에 턱턱 도끼질소리에 조용하던 원시림이 시끌어워졌다.      “넘어간다!”       여기저기서 아름드리나무가 쿵 쿵 넘어갔다.      사기 나서 “넘어간다!”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넘어가는 나무에 사람이 다칠 까봐 소리치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넘어간 통나무를 집짓기에 좋을 만큼 토막 내 소 발기에 실어 산 아래에 끌어내려갔다. 거기서 다시 마차나 소수레에 실어 우시장 경찰서 사무청사 공지에 실어갔다.     산골마을 영월동은 벌목 일에 끌려온 사람들로 붐비었다. 집집마다 다른 마을사람들이 몇몇씩 들었다. 저기 버치 골에는 저목장이 들어앉아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겨우내 몇 달 벌목하니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우중충하게 서있던 원시림은 거의 벌거숭이로 돼버렸다. 산도 옷을 홀랑 벗은 까까머리처럼 민둥산으로 보기 싫게 변해갔다.     “제길 할, 나라에서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부동림이라고 법령을 내리더니 결국 섬나라 오랑캐들이 좋은 노릇을 했네그려."      성칠이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쉿-”     칠백이 턱으로 산기슭 쪽을 가리켰다.     야마모도소장이 가죽채찍을 감아쥐고 졸개들과 함께 눈에 푹푹 빠지며 이쪽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다가왔다.     설겅설겅     성칠과 칠백은 마주 앉아 톱질했다.     “요로씨이(좋아)”      야마모도는 원숭이 엉덩이 같은 낯에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깍- 깍-”    야마모도의 멋들어진 모자에 까마귀 똥 꽃이 허옇게 피었다.    성칠이 하늘을 쳐다보니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지나가면서 똥을 내리쏜 것이 틀림없었다.    “바까(바보) 새끼!”    야마모도 소장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까마귀를 쳐다보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는 모자를 벗어보고 까마귀 똥을 옆에 선 나무에 대고 문질렀다. 똥이 벗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넓게 똥칠이 돼버렸다.    “제길 할!”    야마모도 소장은 모자를 홱 팽개치더니 뒤따라 온 졸개의 모자를 벗겨 쓰고 가버렸다.    졸개는 귀를 싸쥐었다가 옆에 선 졸개와 칠백이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칠백의 털모자를 빼앗아 쓰고 가버렸다.    김칠백은 수림 속으로 사라져가는 야마모도와 졸개들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였다.    “개자식들, 아무 때건 도끼로 대갈통 찍어놓지 않는가 봐.”    칠백은 도끼자루에 침을 퉤 뱉어 틀어쥐더니 통나무를 탁탁 내리찍었다. 도끼밥들이 사처로 튕겨 눈 위에 툭툭 떨어졌다.    “일본 사람들은 이젠 기운봉이나 치마봉 수림의 주인행세를 하는구나. 경찰국 청사를 짓는 데 무슨 나무를 이렇게 많이 쓴다니?”    성칠의 말에 칠백은 투덜거렸다.     “내 사촌형 룡천이가 말하던데 철길과 길 닦는데도 쓴다더이.”    칠백의 말꼬리에는 경상도 사투리 줄줄 묻어나왔다.    “개자식들, 우리를 생각해 철도를 놓는 척 해도 자기네 좋은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고 뭐냐?"    “글쎄 말인기여.”    “가만.”    성칠은  톱질을 하다가 손을 멈추고 칠백에게 물었다.    “네 사촌형은 뭘 하는 사람이냐?”    그러자 칠백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성칠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룡천은 경주 큰아버지네 맏아들인기여. 내 죄를 짓고 이 마을로 도망쳐 온 후 소식이 끊어졌댔어. 몇해 전 어느 날 밤중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장백산에 다니면서 사냥한다던데 친구들도 꽤 많은 것 같더이.”    “음, 언제 만났으면 좋겠다. 함께 사냥도 하고. 이게 어디 지긋지긋해 일본 사람들의 수하에서 살겠냐?”    “그러지. 이제 형이 오면 만나게나.”    그들은 말을 마치자 톱질을 슬슬 해댔다.    이윽고 아름드리통나무가 흔들거렸다.    성칠과 칠백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넘어간다!”    산악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통나무가 다른 나무 가지들을 내리깔며 꽈당 쿵 넘어졌다.   이때 통나무를 살피던 칠백이 소리쳤다.   “아니, 이거 벌레 먹은 통나무 아냐!”    성칠이 여겨보니 톱으로 벤 나무 밑둥 여기저기에 손가락만큼 한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우비니 톱밥 같은 나무가루가 나왔다. 이윽고 까만 대가리에 누런 색을 띤 손가락만큼 굵은 벌레가 묻어 나왔다.   “아니, 이 흐물흐물한 벌레가 이 큰 아름드리통나무를 파먹었단 말인가?”    성칠이 놀라자 칠백이 성칠의 귀에 대고 쑤군거렸다.    “이런 나무로 경찰국 청사를 어떻게 짓는대? 쾅 무너져뿌려!”    성칠은 피뜩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벌레를 벌레구멍에 되 넣고 나무가루로 잘 막아주었다.    “왜?”    의아한 칠백의 눈길에 성칠은 귀속 말로 "쉬-" 하고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살폈다.     “장차 알 도리가 있을 거야.”    그는 도끼로 나무가지를 툭툭 쳤다.     칠백도 알았다는 듯이 벌레구멍난 자리를 피해 도끼질했다.    “그런데 말이야. 벌레가 얼어 죽지 않을까?”    “아니야. 이 벌레는 춘하추동 나무구멍에서 살아온 끈질긴 놈이야. 우리 도끼나 톱에 죽지 않으면 얼마든지 겨울을 살아 나갈 수 있어.”     “오, 그래? 잘 됐어.”     “쉿-”    성칠은 입가에 식지를 댔다.    칠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 둘은 무슨 묘책이나 생각해낸 듯이 시름놓고 다른 나무를 찾아가 밑 둥에 대고 톱질만 부지런히 슬슬 했다.    한참 후 칠백이가 이렇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사냥하러 간 틈을 타서 길수가 은녀를 부엌데기로 들여갔잖아. 그런데 전번에 득호와 짜고 들어 응삼을 몽둥이로 쳐 눕혔다고 해. 득호와 은녀는 한바탕 두들겨 맞고 한평생 종살이를 해야 한다데이.”    “그게 될 말인가?”    성칠은 성나서 씩씩거렸다.    칠백은 톱질을 멈추고 산기슭을 내려다보았다.    소가 엄청나게 큰 통나무를 수레에 싣고 내리막을 받지 못하는지 덕성과 덕팔, 상호, 백룡 등 십여 명 장년들이 통나무를 멜대목도로 메고 산기슭으로 내려갔다. 덕성이 첫소리를 먹이면 모두들 소리를 받으면서 발을 맞춰 힘겹게 내려가고 있었다.      백년 묵은 통나무라    허기영차    썩둑 잘라 죽였어    허기영차    산 것보다 무거워라    허기영차    고향 떠나기 싫은가?    허기영차    가기 싫어 뻗치는가?    허기영차    무겁기도 무겁다    허기영차      고향 땅 떠나가면    허기영차    오랑캐 섬나라서 썩으리라    허기영차    오호 서럽다    허기영차    이제 가면 언제 오냐?    허기영차    얼씨구 서럽다   허기영차   절씨구 서럽구나   허기영차      목도소리를 듣고 성칠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 내쉬었다.    이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면서 웬 장년이 다가오더니 칠백에게 인사했다.    “동생, 벌목해?”   칠백은 반가워 그 사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히야(형),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칠백은 몸을 돌리더니 성칠에게 인사시켰다.   “인사해. 우리 마을 힘장사 성칠 형이야.”   “내캉 한 고향 마을에 살던 사촌형 룡천이야.”    성칠은 룡천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니까(뭐야)?”    그들이 머리를 돌려보니  헌병 가메다가 영팔과 수길을 꼬리에 달고 다가오고 있었다.    가메다는 별나게 볼때기에 검은 사마귀에 털 한 모숨이 나 있었다. 하여 사람들은 그 놈을 털 한모숨이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칠백은 턱으로 털 한 모숨을 가리키면서 룡천에게 도끼를 쥐어 주었다.    “저 가메다는 대단히 교활한 놈이야. 일하는 척 해.”     칠백의 귀속말 뜻을 알아챈 룡천은 도끼로 나무 가지를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가메다는 채찍을 쥐고 거들먹거리면서 세 사람과 통나무를 번갈아보았다.     “야, 이 놈들아, 아까부터 겨우 나무 한대를 벴냐? 엉?”    털 한 모숨은 다짜고짜로 채찍을 휘둘러 성칠의 잔등을 내리쳤다. 날아드는 채찍을 받아 거머쥔 성칠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때 뒤따라온 영팔이가 발길을 날려 성칠의 아래 배를 걷어찼다. 성칠은 날아드는 발을 받아 쥐어 내동댕이쳤다. 영팔은 바람개비처럼 저쪽에 날려가 눈속에 머리를 보기좋게 처박혔다.    “엉, 이 놈들, 언감 도감께 손을 대?”   수길이 눈깔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룡천이 도끼를 놓고 두 팔을 벌리고 나서며 말리였다.    “다들 왜 이래? 우리 부지런히 일하면 끝 난 거 아뇨?”     수길은 주먹을 내리우더니 의아한 눈길로 룡천을 쏘아보았다.    “넌 어느 마을에서 온 놈이야?”    “저 뒤쪽 가마골에서 왔소.”    “오, 그래?”    수길은 도끼를 거머쥔 성칠과 칠백의 눈길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고 바삐 그 자리를 떴다.    “부지런히 일하게나.”    영팔은 눈구덩이에서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성칠에게 주먹을 쳐들고 흔들어 보이면서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38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7) 함정 김장혁 댓글:  조회:759  추천:0  2024-04-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장                                                              5. 함정                 길수는 마지못해 절구통 같은 월선의 옆에 들어 누었다. 그러나 그는  옆방에서 풍겨오는 속살 향기, 아양 떠는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끼무라 국장이 월향을 안고 노는 징글스런 모습을 떠올렸다.      순간 속으로 말하지 못할 무엇이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어올랐다. 맛있는 비게덩이를 개한테 빼앗긴 한이랄까, 자기 여동생이 왜놈에게 강간당한 치욕감이랄까, 날강도에 대한 증오심이라고 할까. 착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미닫이문을 하나 사이 두고 앞방에서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가 높아갈수록 길수는 속이 비길 데 없었다.      “음, 여보, 냉수를 좀 주오.”     월선은 뭐라고 두덜거리면서 비단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정지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는 황소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아, 아하, 으흐, 아우~”     월향의 신음소리가 집안 어둠속의 정적을 산산 박살냈다.     뒤이어 끼무라의 긴 한숨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속살이 째지는 월향의 아픈 신음소리도 잠잠해졌다.      길수는 월선이가 가져다준 냉수를 한 그릇을 꿀꺽꿀꺽 다 마시고나서 바가지를 월선에게 주었다.      이윽고 길수는 배를 끌어안으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아이고, 배 아파라. 내 뒷간에 갔다 와야겠소.”      길수가 엄살을 부리면서 털조끼를 껴입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월선은 말리지 않았다. 그만큼 속으로는 어떻게 더러운 영감에게 보복할까 속궁리를 했다.     길수는 마루에 나가자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슬슬 뒤로 돌아가다가 슬금슬금 사랑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는 옥설과 뽕녀, 만금 등 여러 기생 년들이 살 냄새를 풍기면서 자고 있었다.     이때 덜커덕 중대문이 여닫는 소리가 났다. 길수는 사랑채벽에 찰거머리처럼 딱 들어붙어 동정을 살폈다. 풀풀 눈가루가 흩날리는 눈발 속에 은녀가 물동이를 이고 맥없이 중대문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웬 작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은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마나! ”     “히히히, 은녀,  항상 귀여워.”     “이걸 놓으라니까. 물독을 깨겠소.”     은녀가 머리우의 물동이를 붙잡으며 손을 뿌리쳤다.     자그마한 그림자는 놓으려고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내 말을 들으면 이 돈을 가지고 머슴도 살지 않아도 돼. 내가 주인어른께 말해줄게.”     길수가 찬찬히 여겨보니 눈에 익은 자였다.    (아니, 저 놈, 응삼이, 저 눔두 은녀에게 눈독을 들였어? 내 맛도 보기 전에 은녀한테 치근거려?)    길수는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욱 치밀어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사랑채 벽에 붙어 섰다. 손에 괭이자루가 만지웠다. 그는 괭이자루를 오른손에 단단히 틀어쥐고 왼손으로 벽을 스치면서 슬금슬금 중문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때 가물에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은녀에게 치근거리면서 다가왔다. 은녀는 응삼을 한손으로 밀어버리면서 머리 우의 물동이를 한손으로 붙잡고 부엌으로 발뼘발뼘 다가갔다.     응삼이 은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사랑채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중대문으로 가려는 순간이다.    길수가가 괭이자루로 응삼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딱!     “억!”      외마디소리와 함께 응삼이 눈 바닥에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쓰러졌다.      이윽고 은녀가 물동이를 안고 나오다가 눈 바닥에 쓰러진 응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앗!”     은녀는 식지를 깨물면서 못 박힌 듯이 눈 바닥에 서있었다. 그때 문 뒤에 키꺽다리가 까딱하지 않고 붙어 서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문을 배시시 열고 검은 그림자들이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었다. 뒤이어 바깥의 일을 눈치 채지 못하였는지 덜컥덜컥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었다.     은녀는 제 정신을 가다듬고 물동이를 이고 몸채로 들어갔다. 그는 월선에게 알리려고 하다가 응삼이 치근거리던 것이 생각난 데다 괜히 무슨 때라도 들쓸까봐 될 대로 되라고 그만두었다.     길수는 응삼의 손에서 돈이라던 걸 빼앗아냈다. 번쩍번쩍하는 은전 세잎이었다.     “개자식, 은전으로 은녀를 꼬시려고?”     그는 말이발을 사려 물고 은전을 부서지게 꽉 틀어 쥐였다. 이윽고 그는 홱 돌아서서 주위의 동정을 살피었다. 뒤이어  득호가 든 방 앞에 슬금슬금 다가가 은전을 처마 밑에 쑤셔 넣었다. 잠간 후 우멍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고 쓰러진 응삼의 곁에 버려진 괭이를 쥐여 괭이자루로 응삼의 머리에서 눈 바닥에 흘러내린 뻘건 피를 문질러 발랐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득호가 든 방 앞에 괭이를 슬쩍 내려놓고 사랑채 큰 방 앞에 슬슬 다가가 멈춰 섰다. 방안에서는 술에 취한 젊은 일본 기생 년들이 쌔근쌔근 잠들어있었다.     길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일본 기생들을 다쳤다간 끼무라 국장에게 잘못 보일수도 있어. 아무리 내가 색마라도 상전의 계집을 다칠 순 없어.)     길수는 사랑방안의 분내 나는 기생 년들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이 벽을 손으로 만지다가 피뜩 응삼의 사랑채에 눈길을 돌렸다.     “그래, 그 주제에 은녀를 지껄여?. 네놈의 여편네를 데리고 놀아주마.”    춘실은 응삼이 잠자리에서 나간 지 이슥해도 돌아오지 않아 이상해하며  기다렸다.    삐꺼덕    문 여는 소리 났다.    “이제 왔어요?”    “음.”    웬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이불 안으로 쑥 들어왔다.    “으, 차가워. 왜 이렇게 얼면서 밖에 있었는가요?”    검은 그림자는 대답 대신 춘실의 몸에 와락 덮쳐들었다. 땀내와 술내가 메스껍게 확 풍겨왔다.    “아야, 찬 몸으로 왜 이리 성급해?”     허나 춘실은 인차 자기 남편보다 더 무거운 억대우라는 걸 알고 이상해했다. 머리를 만져보니 번대머리 아니겠는가.    “아니, 주인어른?!”    “쉿!"”    “양반어른이? 소리지를래!”    길수는 황망히 넉가래손으로 춘실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질러 봐라. 응삼이 아는 날엔 네년 살아남겠구나. 난 응삼을 우리 집에서 쫓아내면 그만이야."    그 소리에 춘실의 입이 꽁꽁 닫혀버렸다.    길수는 시름놓고 춘실의 속옷을 와락 벗겨버렸다.    "고분고분 말 들어. 길거리에서 굶어죽는 걸 데려다 키워줬으면 은혜를 보답할줄도 알아야지. 안 그래? 더러워질대로 다 더러워진 년한테 누가 열녀비라도 세워줄 거 같아?”    춘실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발악하다가 맥을 버리고 구슬픈 눈물을 볼에 주르르 흘렸다. 하신에 불에 단 절구공이 같은 것이 아프게 들어왔다. 뒤이어 쨍 아파나게 들쑤시는 것이었다. 춘실은 두 손으로 길수의 털이 부숭부숭한 몸뚱아리를 마구 올리 떠밀다가 손을 활 놓았다. 아프더니 점차 진짜 사내 맛이 저리게 부딪쳐 왔던 것이다.    “아우, 아, 아~”    어두운 방 안에는 춘실의 신음소리와 감탄소리가 끝이 없었다…    한참 후 길수는 흐느끼면서 섧게 우는 춘실의 손에 은전 몇 닢을 쥐여 주고 어슬렁어슬렁 나갔다. 문을 덜컥 닫자 춘실은 이불을 들쓰고 더 섧게 울었다. 즐거움은 잠시뿐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천하 사내들이란 다 개 같은 물건 짝이구나. 이모부, 길거리 건달들, 한길수. 다 색마야!)    쟁그랑!    춘실은 길수가 준 더러운 은전을 문 쪽에 홱 던졌다.   (내 어디 기생 년인가? 뭐.)   바깥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때까지 물동이를 안고 정주간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면서 서있던 은녀는 마루에 올라서는 길수를 보았고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춘실의 구슬픈 울음소리도 들었다.    “에헴, 물동이를 안고 서 있냐? 일찍이 들어가 자거라. 참, 일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길수는 생각는 척 했다.   은녀는 물동이에서 흐르는 물방울을 손바닥으로 쓸어버리면서 길수의 지나친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뒷방에 들어가는 길수의 잔등을 바라보았다.   은녀는 물독마다 물이 꼴딱꼴딱 찬 것을 보고 곁방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 빠금히 열린 미닫이 틈으로 등불 빛과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데 갔댔소? 몸이 이리 차오?”    “예. 저녁에 먹은 게 속탈이 뒷간에 가 앉아있었어요.”    “그래? 나도 속이 좋지 않아서 뒷간에 갔는데. 아니, 저.”    “호호호.”   그들 둘은 서로 거짓말을 한 걸 눈치 챘다. 뒷간은 하나인데 둘 다 이제껏 뒷간에 가 앉아 있었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소린가?    은녀는 코를 싸쥐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면서 정주간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길수가 제꺽 화제를 바꿨다.    “은녀란 년이 웬 사내와 사통하려다가 들키게 되니 그 사내와 함께 마름을 쳐 눕히지 않겠소. 그 사내가 허리가 구부정한걸 보니 득호 같더라니까.”    “저런, 세상에.”    미닫이 쫙 열리더니 번들 이마와 함지 엉덩이가 정주간에 뛰쳐나왔다.    “고년이 금방 물독을 안고 여기 서있더니 어디로 갔어? 저기 나가는구나.”    “이년 거기 섯거라!”    길수는 독이 어린 우멍 사기눈을 부릅떴다. 그는 말이발을 사려 물고 씽 달려가 은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틀어쥐고 내동댕이쳤다. 은녀는 단통 마루에 나가 쓰러졌다.    길수는 끼무라를 깨울까 봐 높이 고함치지는 못하고 발길질만 했다. 암범 같은 월선은 은녀의 머리채를 쥐여 휘둘렀다.    “웬 일입둥?”    처량한 비명소리가 울리는데 영팔이 곁방에서 뛰쳐나왔다.    “저기 쓰러진 응삼을 봐라.”    길수는 물매질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으로 눈 바닥에 쓰러진 음삼을 가리켰다.    영팔은 달려가 응삼을 끌어안아 일으켰다.    “마름, 마름!”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응삼은 맥없이 눈을 떴다.   “깨났어?”    허위적인 길수는 맨발바람으로 응삼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키고 부축해 마루우로 올라왔다.    “분명 은녀가 어떤 사내와 함께 자넬 치는 걸 내 이 눈으로 보았어. 맞지?”     길수는 자기 쳐 넘기고서도 생사람한테 죄를 들씌워 잡아먹을 작정이었다. 참말로 열매는 자기가 먹고 가시로 남을 찌르는 격이었다.     응삼은 피가 낭자한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리었다.    “글쎄. 이년을 저기 중문어귀에서 보고 몇 마디 말하는 새에 맞았습니다.”    길수는 영팔을 보고 고래고래 호령했다.     "흉수를 사출해! 꼭 발자국을 남겼을 거야.”     영팔은 순사처럼 응삼이 쓰러졌던 자리로부터 난 발자국들을 살펴보았다.    “금방 우리가 밟은 발자국 위에는 싸락눈이 덮일 수 없지. 다만 흉수의 발자국 위에만 싸락눈이 살짝 덮여 있을 거야.”    길수는 마루에서 신을 찾아 신고 내려와 그럴듯하게 인도해갔다.    “여기, 여기!”    길수는 싸락눈이 살짝 덮인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보니 몽둥이 같은 것을 질질 끌고 간 자리가 득호의 방문 앞으로 났다. 확실히 방문 앞에 자루에 피가 질벅하게 묻은 괭이가 있지 않겠는가.    “피 묻은 괭이자루! 분명, 득호 녀석이 응삼을 쳐 눕힌 거야!”    길수는 음흉한 눈길로 영팔을 보면서 쑤군거렸다. 영팔은 납작코를 벌름거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길수는 득호 방문 앞으로 다가가 이영의 지푸라기가 부스러진 것을 손가락질했다.     "이 지푸라기 봐라."    영팔이 처마 밑을 살피다가 처마 밑에 움쭉 들린 틈새를 발견했다.    그는 손을 쑥 들이밀어 더듬더니 고함쳤다.    “이게 뭐냐?!”   영팔은 뭘 쑥 뽑아냈다.    “은전!”    은전이 등불에 백설같이 빛 뿌렸다.    영팔은 더 지체하지 않고 득호네 방문을 열어 재꼈다. 득호는 바깥에서 떠들썩한 영문을 모르고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다가 영팔의 납작 코와 부딪쳤다.    “너 이놈, 마름을 몽둥이로 쳐 눕혔지?!”   영팔이 득호 팔을 붙잡고 을러멨다.   득호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했다.    “난 나무를 패구 곤해서 쓰러져 쿨쿨 잤소. 건데 누구를 몽둥이로 쳐눕혔다구 그러오? 생똥 같은 소리를 좀 작작 하오.”    득호는 몸채 앞에까지 끌려나왔다.   길수는 득호 코 앞에 대고 삿대질했다.   “난 네놈이 응삼을 쳐 눕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거 괭이하구 은전을 여기 가져오너라.”    영팔이 피 묻은 괭이와 은전을 가져왔다.    “응삼이, 이 은전을 보게나. 이게 자네 게 맞는가?”    응삼은 머리를 싸쥐고 은전을 여겨보더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득호를 노려보았다.    영팔은 응삼에게서 눈길을 득호에게 돌렸다.    “그래도 승인하지 않겠는가? 물증이 나왔는데. 응삼의 은전 세잎이 어떻게 돼 자네 처마 밑에 감춰졌어? 이 피 묻은 괭이도 네 방 앞에 있지 않았어? 발자국두 분명 네 방 앞으로  났구.”    득호는 억울하여 눈이 풀풀 흩날리는 하늘만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억울해 죽겠다. 씨, 곤해 잤는데 왜 생똥 같은 죄를 들씌움둥?”    “분명 저 허리구부정한 놈이 몽둥이로 우리 집 마름을 쳐 눕히는 걸 보았다. 은녀, 말해봐. 저 놈과 짜고 들었지?”    은녀는 월선에게 머리채를 틀어 쥐인 채 머리를 쳐들고 말했다.    “난 물을 긷고 돌아오면서 마름을 보았지 득호 오빠는 본적두 없습구마.”    찰싹!    영팔은 은녀의 볼에 한대 안기고 은녀와 득호에게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어째, 매우 맞아봐야 실토정하겠냐?"   길수는 영팔과 수길의 귀에 번갈아대고 끼무라 국장을 깨울까봐 득호와 은녀를 대문밖에 끌고나가 매우 치라고 귀속 말로 쑤군거리었다.    죄 없는 득호와 은녀는 대문 밖에 끌리어나가 언 눈 바닥에 엎드려 억울한 매를 맞았다. 세상에 이런 무함이 어디 있는가? 죄는 누가 짓고 매는 누가 맞는단 말인가?   매를 맞던 득호는 옆에서 방망이에 볼기짝을 맞는 은녀가 불쌍해 손을 쳐들며 고함쳤다.    “그만! 내 혼자 마름을 쳤소. 은녀하구는 관계없소.”    영팔과 수길은 매를 멈추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진작 죄를 실토정할게지.”     “매나 덜 맞지. 흥!”    영팔과 수길은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면서 득호와 은녀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어둠 속으로 눈을 펑펑 내리쏟아부었다. 어둠은 백설같이 흰 대지를 어둡게 감싸 안으려고 억지를 부렸다.
38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6) 눈물 겨운 머슴살이 김장혁 댓글:  조회:608  추천:0  2024-04-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장                 4. 눈물겨운 머슴살이           푸실푸실 내리는 눈발 속에 토성 안 집 춤판이 어수선하게 끝났다. 콧수염쟁이도 일본 기생년들이 모두 녹작지근해 춤판에서 비틀거리며 물러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북장고소리가 멎고 대나무피리 소리도 잠을 잤다. 울안에는 광솔불이 활활 타오르며 주정배들의 떠들썩하던 미친 소리 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월선은 펑퍼짐한 엉덩이를 비뚤거리며 마루에 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쳤다.      “득호! ”     “예꾸마!”    득호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마루 앞에 뛰어와 딱 멈춰 섰다.    “넌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니? 마당을 어떻게 쓸었으면 일본 귀빈이 미끄러져 넘어졌겠느냐? 일본 어른이 래일 일어나지 못하는 날엔 네 목이 날아나지 않는가 봐라.”     "아이쿠!"     득호는 뒤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두덜거렸다.     “아니, 술에 취해 자기절로 미끄러졌구만두.  흥, 하나 밖에 없는 목을 치면 어떻게 합둥?”    월선은 빗자루를 들고 버선발 바람으로 마루에서 뛰여내려와 득호를 마구 때렸다.     “이 놈, 네놈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다.”     득호는 머리를 싸쥐고 피했다.     “아니, 가마니를 쪽 깐 마당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게 누구 탓입둥? 막걸리를 배때 터지게 처먹고 너덜대다가 넘어갔는데두 내 탓입둥?”     월선은 득호를 따라가면서 조겨댔다.     “이 놈아, 이 놈, 전번엔 마차를 운주하에 처박더니. 흥! 이번엔 일본 어른신님을 넘어지게 하잖았나? 엉? 이 놈아, 일본 어르신님이 상하는 날엔 널 놔둘 것 같니? 엉? 엉? ”     월선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빗자루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빨리 마당을 말끔히 치워라. 눈 내린다.”     월선은 은녀가 부엌에서 부엌녀와 함께 설거지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불러냈다.     “은녀야, 여기 나오나.”     “얘-”     은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달려 나오자 월선은 책망부터 앞섰다.     “‘얘’는 무슨 얘나? 말버릇부터 고치라는데도.”     은녀는 혀를 홀랑 내밀면서 머리를 수깃했다.     “내일 아침 물을 물 독에 꼴딱 길어라. 이 집에 들어온 지 이젠 몇달 되는데 아직도 뭘 시켜야 하겠니? 자기절로 척척 해야지.”     “알았습구마.”    은녀는 두말없이 물동이를 안고 풀풀 흩날리는 눈을 밟으면서 대문 쪽으로 나갔다.    등뒤에서 월선의 귀 째질듯한 고함소리가 이어졌다.    “물독을 깨겠다. 주의해.”     “예.”    (먹을 땐 개 닭 보듯하다가도 저녁도 먹지 못한 은녀를 밤중에 물을 긷게 하다니? 한심한 년이라구야.)   득호는 마당에 깐 멍석을 왈왈 거두면서 속으로 월선을 욕했다. 그는 널린 종이까지 걷어 낸 후 눈을 빠득빠득 밟으면서 마당의 눈을 쓱쓱 쓸었다.    아무리 밤중까지 눈을 쓸고 또 쓸어도 하늘에서 푸실푸실 쏟아져내리는 눈을 어찌는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득호는 빗자루를 쥐어뿌리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은녀 어떻게 물을 긷겠니?)    득호가 뒤따라 가보니 저쪽 우물가에서 드레박을 잣는 소리가 삐꺼덕 삐꺼덕 들리었다. 뒤이어 드레박의 물을 물동이에 쪽 붓는 소리가 들리고 허연 그림자우에 꺼먼 물동이를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득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은녀가 비칠거리다가 우물가의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갈 번했다.    득호는 바삐 은녀를 부축하면서 물동이를 붙잡았다. 그는 은녀의 머리 우에 놓인 물동이를 내리워 안고 앞에서 씨엉씨엉 집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괜히 암펌이 보면 욕 먹겠소.”    은녀는 치마폭을 걷어안고 득호를 뒤따라 부랴부랴 대문 안에 들어섰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몸채에서 나온 월선은 은녀의 물동이를 안고 대문 안에 들어서는 득호와 그 뒤를 따르는 은녀를 보고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쳤다.    “아니, 득호, 마당을 쓸어라 하였지. 물을 길으라고 하였나? 꼴 보기 좋다. 그래 계집애를 뒤쫓아 다닌다고 바보가 장가갈 것 같냐?”    은녀는 바삐 득호의 손에서 물동이를 빼앗아 이고 부랴부랴 정주간으로 들어갔다.    득호는 뒤따라가면서 월선이쪽에 대고 입을 비쭉거렸다.    “패놓은 장작이 산더미 같은데 또 패라고? 암펌 같은게. 씨, 주둥이만 벌리면 마당을 쓸어라, 장작을 패라, 잔소리 끝이 없네. 이거 못 살겠다.”     월선은 득호의 잔등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뭣이 어찌구 어째? 꼽싹 꼽싹 들을 거지, 뭣이 어쩌고 어째? 그래 두지 같은 배에 공밥을 채우겠냐?”     그래도 뭐라고 투덜거리는 득호를 보고 월선은 곁방에 대고 소리쳤다.     “영팔아, 영팔씨!”    영팔이 바지멀춤을 쥐고 달려나와 가달두새를 긁적거렸다.    “왜 그랩둥?”   “초저녁부터 벌써 기생 년을 끼고 자겠나? 저 득호를 호되게 족쳐라!”     영팔은 득호를 노려보다가 월선을 보고 헤벌쭉 웃었다.    “숱한 손님들이 왔는데 방망이찜질까지 할 필요 있습둥? 집이 조용할 때 다시 버릇을 가르쳐주면 어떤가요?”    월선은 살기등등해 고함쳤다.    “너를 곱다고 숱한 돈을 먹여 길렀냐? 저런 놈을 매우 치지 못할가?”     영팔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차는 격으로 사랑방에 달려가 방망이를 들고 씽 달아나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득호를 땅바닥에 개구리 메치듯 메쳐놓고 사정없이 방망이찜질을 해댔다. 투닥 투닥 방망이로 득호를 패는 소리 과부 집 떵메질 소리 같고 빨래터의 방치 질 소리 같기도 하다. 아니, 방망이로 다듬이돌우의 이불등을 다듬는 소리 같았다.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차마 볼수 없어 "앗!" 비명소리를 내며 입술 속에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다.     “요년, 넌 물을 긷지 않고 뭘 해?”    월선은 득호를 자기 손으로 때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지 은녀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휘두르면서 살진 손을 날려 귀썀을 챨싹 갈겼다. 머리채를 놓고 또 귀썀을 힘껏 쳤다. 은녀가 주춤하다가 뒤로 살짝 물러섰다. 월선은 지나치게 힘을 쓴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그만 마루에서 반 고패를 돌다가 마루 아래로 뚝 떨어졌다. 언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신짝마저 저 멀리 뿌리어 나가 상통이 가소롭기를 그지없었다.     떠들썩하는 소리에 구경나왔던 일본과 조선 기생 년들이 코를 싸쥐고 웃어댔다.     “바까 새끼, 다렝아 고찌라데 다까꾸 사껜다까?(누가 여기서 고래고래 고함쳐?)”    끼무라가 취해 뻐드려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마루에 나왔다. 그는 콧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사위를 둘러보더니 이상한 빛이 번쩍이는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면서 꽥 고함쳤다.    한길수는 깜짝 놀라 아래방에서 마루에 뛰쳐 나왔다. 그는 끼무라의 무서운 눈길과 은녀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행악질하며 물앉아 있는 월선이를 번갈아보다가 월선에게 다가가 타일렀다.    “여보, 숱한 일본 손님들 앞에서 이게 뭐요? 집안 허물내메. 흥!”    월선은 은녀의 머리채를 더 힘껏 내동댕이치더니 어린애처럼 발버둥질 쳤다.    “년놈들, 잘도 놀아댄다. 이젠 숱한 사람들앞에서 요년의 역성까지 들어? 내 섧어서 어떻게 살아? 어, 헝.”    끼무라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추운지 고개를 돌려 들어가면서 대가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길수는 끼무라를 따라 윗방에 들어가 바깥을 가리키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손으로 너무 많이 마셨다고 배를 가리키면서 손시늉을 했다.     그런데 눈치 빠른 끼무라는 자기를 많이 마셨다고 말한다고 피씩 웃었다.     한길수는 다시 마루아래 쓰러진 은녀 앞에 다가가 볼품없이 헝클어진 은녀 머리를 쓸어올려주며 나직이 말했다.     “밤도 깊었는데 이젠 물을 그만 길어라. 좀 있다가 끼무라 발이나 씻어드려라.”     그때까지 옆에 물앉아 발버둥질치며 엉엉 울던 월선은 은녀를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물 길으러 가지 못하겠냐?”    그런데 한길수의 고함소리 하늘땅을 진감했다.     “발을 씻어줘라!”     은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입에 대고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길수와 월선을 번갈아보았다.    길수는 월선을 쏘아보며 고함쳤다.    “옳다, 은녀는 물 길으러 가구. 당신이나 끼무라 발을 씻어주오.”     월선은 억이 막혀 입을 쫙 벌리었다가 천천히 다물더니 길수의 번대 머리에 대고 삿대질했다.    “옳다, 여편네라두 종처럼 팔아서 일본 졸개나 해 처먹어라. 원, 못난 영감이라구야. 쳇!”    길수는 황급히 웃방과 사랑방을 둘러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끼 국장님이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다행이다. 에구, 이년을 어쩌겠냐?”     길수는 어린애 달래듯이 월선의 두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일으켰다. 월선은 영감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아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월선은 아래방문을 활 열고 머리를 내밀더니 방망이를 쥐고 떡 서있는 영팔에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거기서 뭘해? 득호 그놈을 매우 치지 못하구.”     그제야 영팔은 꿈에서 깨여난듯이 방망이로 득호를 때리는 시늉했다. 월선이가 들어가자 영팔은 방망이를 홱 팽개치고 두덜거렸다.     “밤중까지 이 놈 종노릇을 못해먹겠다.”     영팔이 득호를 놓아주고 기생 뽕녀가 기다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득호는 눈을 털고 일어나 외딴 사랑채로 들어갔다. 은녀는 득호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물동이를 정주방으로 들여갔다.      그는 사랑채 제일 작은 칸으로 들어가 누더기 이불을 쿡 쓰고 드러누워 흑흑 흐느껴 울었다. 순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립고 멀리 사라진 성칠 오빠가 그리워났고 남동생 상호가 그리워났다. 그럴수록 더욱 슬프게 흑흑 흐느끼면서 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입귀에 흘러내렸다가 베개잇을 적셨다. 칠칠야밤에 어두컴컴한 사랑방에서는 은녀의 섧게 우는 소리와 흐느낌소리가 가냘프게 들릴 뿐이었다. 은녀는 울면서 짜개바람이 불어 손가락을 주물렀다.     벙어리 속은 벙어리가 안다고 득호는 은녀 처지에 마음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은녀를 어떻게 위안하였으면 좋을지 몰라 벽을 하나 사이 두고 서성거리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이때 은녀가 우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문고락지 다치는 소리 떨꺼덩 들렸다.     “누구요?”      은녀는 황급히 어두운 방에 들어선 검은 그림자에게 물었다.     “영팔이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요? 나가오.”     “먹을 거 가져왔다.”     “필요 없소. 나가오.”    “이건 주인영감이 보낸 거야. 배 든든하게 먹어라.”    영팔은 구들 목에 뭔가 내려놓고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언 감자 같은 년을 첩으로 들여앉힐 예산인가? 한밤중에 자지도 못하게 나까지 심부름시켜? 흥!”     영팔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였다. 뒤이어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은녀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이윽고 은녀는 누더기 이불속에서 나와 영팔이 가져온 것이 뭔가 기여가 손 더듬질 해보았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맞 덮은 그릇이 몇 개 만지었다.      점심부터 먹지 못한 은녀는 숟가락을 쥐고 몇숟가락 퍼먹다가 속으로 먹어서는 빚을 진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서 숟가락을 내리어놓았다.     “은녀야, 여기 나오너라.”     월선이 부르는 소리.     월선은 하루 종일 눈을 감기 전에는 함지 같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 심부름을 시키는 앙칼진 소리 온 울안에 우박 치듯 쏟아졌다.       은녀는 간신히 일어나다가 눈앞이 아찔해나면서 불티가 반짝였다. 하긴 수십명의 음식을 마련하느라고 쓴 물을 혼자 추운 겨울에 한 동이 한 동이 길었으니 소 힘이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녀는 안간힘을 다해 방바닥 쪽으로 벌벌 기여가 짚신을 찾아 신고 문설주를 잡고 간신히 일어나 비실비실 문 밖으로 나섰다.      밤송이 같은 눈송이가 성미도 급하게 펑펑 쏟아져 내렸다. 울 안에 쓸쓸하게 한 많은 세상을 뒤덮어버릴듯 하얀 눈이 한겹한겹 하얀 이불을 깔리고 있었다.      은녀가 정주간에 들어서니 등불 아래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월선이가 옆구리에 두손을 지른 월선이 콤파스처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서 있었다.     “부른지 언젠데 왜 이제야 나와? 얼른 윗방에 들어가 끼무라 국장님의 발을 씻어드려라.”     “예?”     “얼른, 왜 그리 꾸물거려?”     은녀는 설거지를 하는 부엌여를 힐끔 곁눈질해보았다. 부엌여는 별수 없으니 어서 가라고 머리를 끄덕여보이며 눈짓했다. 은녀는 할 수 없이 풍로에 끓여두었던 물을 함지에 퍼들고 윗방으로 올라갔다.    은녀가 미닫이문을 사르르 열고 윗방 안에 들어서니 끼무라와 월향이 껴안고 코를 드렁드렁 구르고 있었다. 치마 바람에 드러누운 월향의 새하얀 허벅다리가 흘러내린 치마 밑으로 드러났다.     은녀가 물함지를 끼무라의 발치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각반을 풀기 시작했다.      “바까(바보)!”      갑자기 끼무라가 고함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벽에 기대여 세워놓았던 군도를 쥐였다. 그는 은녀를 가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은녀는 화뜰 놀라 뒤로 물앉으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끼무라는 세수 대야와 은녀의 수척한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군도를 스르르 놓았다.      흉악한 눈길이 차츰 음충스런 눈길로 변하면서 은녀의 탄탄한 몸을 노려보았다. 청춘의 싱싱한 매력을 풍기는  봉긋한 점 가슴, 누더기 치마에 가려진 허벅다리...      "오, 우쯔꾸씨이 무스메(예쁜 처녀구나.)"    끼무라는 싹아 떨어진 이발 새로 금 이발을 드러내며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색마의 본성을 드러냈다.    “놓읍소. 발을 씻어 드리겠습구마.”     은녀는 움추린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뭘 놓으라?”     이때 길수가 윗방 문을 쭉 열고 들어왔다.     끼무라는 이젠 제법 조선말도 섞어 지껄였다.     “헤헤헤, 발을 씻으라고, 시켰소까.”     끼무라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코 수염 밑에 웃음을 지었으나 눈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미친 듯이 스치고 있었다.    “난 또, 이년이 혹시 국장님을 해치려나 해서. 에헴, 헴.”    끼무라는 뭐라는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연신 헛 대답을 했다.     길수는 은녀에게 머리를 돌리더니 당부했다.    “끼국장님이 곤할 텐데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발을 씻어주고 나가라.”     “얘.”     은녀는 길수 영감이 요때 방에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삐 끼무라의 각반을 풀고 양말을 벗긴 후 살진 발을 대야에 넣고 씻어주었다.    끼무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연신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감탄했다.    은녀는 발을 다 씻은 후 물 함지를 들고 부엌간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은녀의 봉긋한 젖가슴이며 펑퍼짐한 엉덩이에 눈 뿌리를 박고 있던 끼무라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입을 헤벌리더니 닭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마저 다시였다.    끼무라는 그때까지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길수를 쳐다보면서 “저건 웬 새애기냐?”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 우리 집 부엌데기 은녀라는 계집앱죠.”    “오.”    끼무라는 색마의 눈알을 희번뜩거리더니 길수를 게슴츠레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내, 당신 사위하면 어떻소?“     "네?"    끼무라의 정신나간 소리에 한길수는 우멍눈이 다 튀여나올 지경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월향이 깨여나면서 도도도 거리었다.     “밤중에 무슨 뉘네 사위한다고 이래요? 호호호. 촌수 개판이구먼. ㅎㅎㅎ. 소 웃다가 꾸러미 터질 일인데요. 국장이란 녀석이 우리 집 머슴여를 욕심내 사위 하겠다잖아? 호호호.”     길수도 월향의 말에 코를 싸쥐고 우멍 눈에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길수와 월향을 힐끔힐끔 번갈아보던 끼무라 국장은 취김에 그런 실수를 하고 너무나 창피해 비단요우에 스르르 너부러지더니 자는척했다.     집 안에는 살진 돼지 콧수염쟁이 코고는 소리 드렁드렁 구들 고래를 다 훑어가며 요란했다.     드르릉, 드르릉…
38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5) 큰 잔치 김장혁 댓글:  조회:736  추천:0  2024-03-27
         김장혁 작 울고 웃는 고향         3. 토성안집의 큰 잔치             갓 서른을 넘은 떠꺼머리 노총각 득호는 새끼로 질끈 동여맨 허리를 구부정하고 일만 수걱수걱 해 그런지 쉰 고개도 훨씬 넘어보였다.      길수네 집에서 머슴살이를 허리 부러지게 하였건만 오막살이집 한 채도 생기지 않았고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들지 못했다.      “득호야, 거 당나귀차를 헛간에 끌어다 넣어라. 당나귀 차 눈을 폭 맞아서야 쓰겠냐?”      “알았습구마.”    요염하게 화장한 월선은 버들잎눈섭꼬리 휘도록 표독스런 암펌의 눈길을 내쏘면서 끝임 없이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얼른 말과 당나귀도 먹여. 일본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마당에서 춤마당을 펼친단다. 마당에 거적을 펴라.”     “예꾸마-”    득호는 월선의 끝없는 잔소리에 신물났다.    “은녀야!”     “얘—”    은녀는 절구를 꽝꽝 찧다가 부랴부랴 몸채 마루 아래로 달려 나왔다.     “‘얘’가 뭐냐? 에이, 계집애가 뭐야? 전라도 깍쟁이말도 아니고 함경도 도적놈의 사투리도 아니고.”     은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몸둘바를 모르며 머리마저 숙였다.     “얼른 풍로를 피워라. 일본 손님들이 발 씻을 물 끓여놓아라.”    “알았습구마.”    “아, 깜빡 잊었구나. 설거지 할 물도 미리 길어오라.”    그런데 부엌으로 들어가는 은녀의 등 뒤를 보다가 무슨 생각이 또 났던지 곁채를 향해 소리쳤다.     “춘실아,  얼른 몸채로 들어와! 응삼 마름도 오라고 해라. 얼른!”     “예, 갑네다. 에이 취!”     월선은 마루에서 정주간으로 들어가려다가 되돌아서 곁채를 내다보면서 소리쳤다.     “아니, 주인이 말하는데 ‘에이 취’가 뭐냐?”     춘실이 황급히 조끼를 껴입으면서 곁방에서 달려 나왔다.     “재채기를 했어요. 감기에 걸린 거 같어요.”     춘실은 암범 같은 월선을 뒤따라 몸채로 들어가면서 또 연신 재채기를 했다.      득호가 당나귀차를 끌어 헛간에 넣고 마당을 쓸고 나서 손의 먼지를 툭툭 터는데 은녀가 풍로를 들고 나온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뭉게뭉게 풍겨 오르는 연기에 은녀는 눈도 바로 뜨지 못하면서 상을 찡그리었다.      “은녀, 좀 빨랑빨랑 불 피워라!”      “알았습구마.”     은녀는 월선의 눈치를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풍로를 바람맞이에 내려놓았다.     마루 우에서 월선의 목소리가 우레 소리처럼 지동쳤다.     “은녀, 게서 뭘 해?! 얼른 물도 길어오라!”     “얘-”     은녀는 속으로 두덜거렸다.     (어느 일부터 먼저 하라오? 풍로를 피워라. 물을 길어라. 물을 끓여놔라. 원, 참. 손이 열개라도 다 못하겠다. 흥!)    “득호, 좀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나무를 패! 시키길 기다리지 말고 좀 제절로 척척 찾아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월선은 득호와 은녀를 하루 종일 오금에 불이 일도록 부려먹고서도 모자라는지 질책소리 끝없었다.     “땔나무가 산더미 같구먼. 씨! ”     득호는 낮은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월선은 유들유들하게 기름이 번지르르하고 살진 낯살에 표독스런 표정을 드러내면서 득호의 코가 맞힐 정도로 삿대질했다.     “뭐라구 투덜거려? 엉? 패라면 얼른 팰 거지. 언제 셈이 들겠냐? 저러니깐 서른 고개 넘어도 장가도 못가지. 그 주제에 계집애 궁둥이를 쫓아다녀?”      그 말이 어찌나 구역질나게 들렸던지 은녀는 마땅찮은 눈길로 쳐다보다가 월선의 표독스러운 눈길과 마주치자 머리를 숙였다.      은녀는 풍로 불을 피워놓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풍로에 올려놓은 후 정주간에 들어가 물동이를 오른 팔에 껴안고 나왔다.     득호는 은녀를 보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러자 은녀는 동이를 안고 다가갔다.     득호는 몸채의 동정을 두루 살피더니 은녀를 보고 나직이 귀띔해 주었다.     "오늘 저녁에 특별히 조심해라. 일본사람들은 몽땅 색마들이여서 계집애들을 보기만 하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은녀는 몸을 옹송그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은녀가 떠나가자 득호는 사랑채 앞에서 도끼를 휘둘러 땔나무를 힘겹게 팡팡 팼다.     하늘에서는 거위 털 같은 흰 눈이 풀풀 흩날려 내리였다. 영월동은 하얀 소복단장을 해갔다.    겨울 해는 코끼 꼬리처럼 어찌나 짧은지 어느새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고 허연 눈이 덮인 대지에는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 드리워 어스름한 황혼을 수림 속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면을 높다란 토성으로 두른 길수네 토성안집 울안은 오늘 따라 경사가 난 듯이 광솔 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놓았다.     병풍을 두른 몸채 위방에서는 끼무라 국장과 상우남면 면장이 상좌에 앉아 기생 둘씩이나 끼고  술을 마시였다. 큰상에는 다리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다.  한길수와 월선이가 그들을  접대하느라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옆 상에 앉은 통역 류강철과 영팔 그리고 호위병은 끼무라 국장 덕분에 입귀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하게 게걸스레 먹어주고 있었다.     영팔은 닭다리를 쥐고 질근질근 씹으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가 위상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그는 끼무라 국장의 숟가락과 저가 어디로 많이 가나 살피다가 정지로 내려갔다.     영팔은 부엌에서 채를 볶아내느라고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부엌 여를 보고 재촉했다.     “빨리 모두부를 더 올려라. 일본 손님들은 조선의 모두부를 특별히 맛나게 잡숫는다.”      은녀는 부엌여가 사발에 떠주는 야들야들한 우유 빛 두부를 들고 위방 미닫이를 사르르 열고 들어갔다.      끼무라 국장은 두부모를 들고 들어와 큰상에 놓는 은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은녀가 나가자 끼무라 국장은 지껄였다.      “스빠라씨이데스네(이쁘구나). 사꾸라만 보다가 여기 조선의 무궁화를 보니 별나게 예뻐 보이는구먼. 사람이 어찌 모두부나 돼지고기만 먹겠는가? 조선의 고사리 채도 먹어봐야지. 고사리 채 참 맛이 좋지.”     강철의 통역을 듣고 길수는 인차 말귀를 알아들었다.     "예, 예, 밤에 먹는게, 아니, 잡숫는게 더 맛있죠."     호색한이 호색한의 속궁리를 젤 잘 알아주었다.     (쳇, 벌써 그게 근질근질해나니? 개놈새끼, 조선 계집들 그게 뭐 별나다고. 흥! 내 계집들을 다치려구? 양심없는 놈. 계집을 놀아두 친구 계집은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두 몰라?"    그러나 그런 별스런 기분을 억지로 눅잦히였다. 그러나 어쩐지 속이 볶이우면서 알알해났다.       (쳇, 나도 맛보지 못한 꽃을? 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성칠에게서 빼앗아온 계집애이라고. 은녀만은 안 돼.)     한길수는 짐짓 화제를 바꿔 아래 정주간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은녀야, 거 고사리 채를 볶아오라.”     “한군, 우리 대일본제국은 목재, 석탄이 많이, 많이 필요하네. 우시장으로부터 회령까지 통하는 철길과 큰길을 빼야겠네. 우시장으로부터 여기 영월동과 저 앞의 운주동이나 어느 마을이나 쭉쭉 사통팔달한 길을 닦아야 되겠어.”     길수는 류강철이 통역하자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아직 경찰국 사무 청사도 채 짓지 못했는데 길을 닦을 사람이 어데 있다구 그럽니까?”     그러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강철은 그대로 통역하지 않았다. 그대로 통역했다가 한길수가 혼쌀날게 아닌가.     “한군은 경찰국 사무 청사도 잘 짓고 길도 잘 닦겠다고 합니다.”     “그래? 허허허. 한도감이야 말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충실한 개, 아니, 충신이야. 흐흐흐.”    끼무라는 길수를 가슴츠레 건너다보면서 금이발을 번쩍이며 계속 지껄여댔다.     “한군의 표정은 이상한데. 경찰국 사무 청사를 잘 짓고 길만 잘 닦으면 한자리 주겠네.”     길수는 그 말에는 귀가 솔깃해졌다.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철길이나 큰길을 불시에 빼서 뭘 합니까?”      끼무라는 기생의 손에서 닭다리를 받아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서 거만하게 말했다.     “한군, 길을 잘 빼야 다니기도 좋고 돈도 벌기 쉽소. 우리 대일본제국은 철길을 잘 빼서 영월동의 목재하구 개마고원의 석탄이랑 황금이랑 몽땅 실어가야겠네. 그러자면 큰길과 철도를 잘 빼야 되지. 알만하오?”     길수는 그제야 끼무라 뒤에 숨은 탐욕스러운 날강도들의 그림자들이 얼른거리고 있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보는 상 싶었다.     “그런데 두만강변의 회령은 조선의 끝간 시골인데 거기까지 철길을 뺄 필요야 있습니까?”     끼무라는 막걸리를 한잔 쭉 내고 닭고기를 게걸스레 뜯어먹더니 허리를 쭉 펴면서 말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잘 건설하고 나아가서 만주국에 있는 천황의 황민들을 보호하러 들어갈 거요. 아, 그 넓은 만주벌이 그저 황무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아깝소? 우리 조선의 황민들이 그 넓은 옥토 벌에 밭을 일구고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요. 안 그렇소? 한 군.”     한길수는 우멍눈이 환해지면서  시야가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희 번뜩 번졌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연신 번들번들한 대머리를 조아리면서 끄덕였다.     “이제야 좀 알겠습니다.”     “그때면 한 군은 지금의 총 도감이겠소? 아마 무슨 대장 자리쯤은 차려질 거요. 허허허.”     한길수는 짧은 가랭이를 춰주는 줄도 모르고 기뻐 입귀가 귀밑에까지 찢어질 지경으로 입이 함박만 해졌다.      “고맙습니다. 끼 국장님.”      “에, 또 끼 국장인가? 끼무라 국장이지.”      한길수는 황급히 아픈 허리를 굽히면서 대머리를 조아렸다.     “시골의 제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꼭 사무 청사와 길닦기 공지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흡족한 듯이 번들 이마를 건너다보면서 씨불였다.      “자넨 우시장으부터터 회령까지 통하는 철길을 닦으라는 말이 아니네. 이 뒤 마을 부근 길닦이와 경찰국 청사만 맡으면 되네.”      “예, 알았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에게 끝없이 불어넣었다.     “이번에 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에 인부를 데려온 일로, 오늘 우릴 접대한 걸로 두루 보니 한 군은 정말 이 산골에 파묻혀있기는 아까운 인재네. 잘 하게나. 우리 일본제국은 잊지 않을 거야.”    “예, 고맙습니다.”    한길수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보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일본 경찰국장에게 머리를 조아려댔다.    월선은 일본 사람에게 너무 굽석거리는 영감을 보고 속으로 치미는    불길을 참느라고 속이 부글부글 괴여 번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기쁜 듯이 끼무라 국장에게 나오지 않는 웃음을 팔았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끼무라는 색정광의 본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젠 일본 기생 년들을 물리고 우시장 조선기생 옥설을 데려오게나. 오늘을 다른 맛을 봐야겠네.”     “알았습니다.”     영팔이 나가서 이윽고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앞세우고 연지 꼰지 찍고 발끝에까지 분가루가 흩날리게 바른 옥설과 만금, 뽕녀가 들어왔다.     끼무라는 실눈이 대뜸 화등잔이 되여 옥설을 껴안았다.     옥설은 끼무라 국장의 무릎 우에 올라앉아 실버들 같은 허리를 이리 곰실 저리 곰실 배배 탈면서 갖은 애교를 다 부리였다.      한길수는 옥설을 뚫어지게 건너다보면서도 옆에 앉은 월선의 눈치가 보여 어찌 하는 수가 없었다.      한길수가 불편해 하는 것을 눈치 채고 끼무라는 월선을 보고 꼬부랑소리를 했다.     “여보세요. 곤하겠는데요. 나가 쉬세요. 나와 한 군 은밀히 할 말이 많이 있소이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월선은 일어나 펑퍼짐한 엉덩이를 삐뚤거리며 나가면서 입귀를 비쭉거렸다.     뒤늦게 들어온 월향은 아저씨 한길수를 보고 머리를 까딱 하면서 살짝 웃음을 흘리었다.      끼무라는 월향을 보고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서 와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순간 한길수는 속에서 질투의 불길이 훅 치밀었다. 그러건 말건 끼무라는 옆에 앉은 월향의 볼을 살살 만지면서 놀아댔다.      만금과 뽕녀도 끼무라 국장 옆에 붙어 앉았으면 큰 떡이 생길 것 같았지만 별수 없이 한길수의 옆에 와 물앉았다.     월향은 평소에 길수가가 우시장에 오기만 하면 자기 몰래 옥설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던 일이 괘씸해 보복하려고 들었다. 일부러 한길수의 애가 마르게 모두부랑 숟가락에 떠서 끼무라의 입에 넣어주고 아양을 떨어댔다.     끼무라는 막걸리 잔을 들어 옆에서 희희닥거리는 옥설을 끌어안고 빨간 앵두 입에 억지로 부어넣었다. 옥설은 얼굴을 돌리면서 도리머리 질 하다가 별수 없이 막걸리를 삼키였다.     그녀는 섬섬옥수로 막걸리단지를 들어 끼무라와 한길수의 잔에 쪼르륵 쪼르륵 부어 올렸다.     기생들의 애교를 부리는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안주로 위방에서는 술을 한잔 또 한잔 기울였다.      주흥이 도도해지자 끼무라는 일어나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인차 눈치를 챈 한길수는 손벽을 짝짝 치더니 기생들에게 당부했다.     “끼 국장이 즐겁게 어서 춤판을 벌려라.”     월향은 “추워서 바깥에서 어떻게 춤을 춰요?” 하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나 한길수가 눈을 굴리자 마지못해 일어나 나갔다.      드디어 마당에서는 북장단이 둥당 둥당 울리고 기생 년들이 비단치마자락을 날리며 학이 나래를 파닥이듯이 팔을 하느작거리면서 춤판을 벌렸다. 대낮 같은 대뜰아래 춤판이 한창인데 거위 털 같은 눈송이가 하늘하늘 쏟아져 기생들 춤사위 두새에 내려 앉았다.      끼무라는 마루 위에서 월향과 옥설의 가는 목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댄 채 춤판을 구경하다가 비칠거리면서 팔자걸음으로 땅바닥에 내려갔다.      “조선 춤이 멋이 없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사꾸라 춤을 췄쏘까?”     끼무라는 “사꾸라, 사꾸라.”하면서 일본 기생들과 함께 왼발 내딛고 손 벽을 짝 치고 오른손 쳐들고 왼손 펴고 오른발 내딛고 손 벽을 짝 치며 사꾸라 춤을 췄다. 기생들은 제법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췄다. 그들은 조선기생들과 한데 어울려 일본에 둔 고향과 부모들의 생각에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잘들 돌아갔다.       “아이쿠!”      한창 흥이 나서 모두들 춤을 추다가 복판에 쓰러진 끼무라에게 놀란 눈길을 모았다.      끼무라가 엉덩방아를 찧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빨리, 부축해라.”     한길수가 황급히 고함쳤다.     그는 영팔과 함께 달려가 양쪽에서 부축하였다. 끼무라가 그들의 귀 쌈을 찰싹 찰싹 갈겼다.     “바까(바보)! 콘칙쑈(관둬)!”    기생 년들은 발바리 상을 하던 길수가가 맞는 것을 보고 너무 우스워 입을 싸쥐고 돌아서서 키드득 키드득 했다.     기생 년들은 뺨을 감싸쥔 한길수의 독살스런 우멍 눈을 훔쳐보고 곁방으로 몸을 숨기였다.     춤판은 깨지고 월향과 옥설이 끼무라를 부축해 윗방으로 들어갔다.     끼무라는 방 문턱을 넘어서면서 마른 날에 우박이 쏟아지듯이 울컥울컥 토했다. 막걸리며 닭고기며 버섯이며 고사리며 쏟아져 구들에 떨어졌다.     개들이 이게 웬 떡이냐며 끼무라의 가다리 두 새로, 엉덩이 밑으로 대가리를 들이밀고 쩝쩝 먹어댄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 ㅋㅋㅋ     한길수와 영팔, 순사들이 짖어대며 먹어대는 개들을 쫓아내느라고 위방이 떠들썩했다.
37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4) 불운한 아이들 댓글:  조회:573  추천:0  2024-03-2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2. 불운한 애들        기운봉은 은세계를 방불케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늙은이의 은발을 날리듯이 하얀 눈가루를 바람에 흩날리면서 하늘을 찌르며 서 있었다.      운주동은 하얀 이불을 들써 은빛세계를  방불케 했다. 초가집마다 하얀 꽃노을을 지붕 위에 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딱 뭔가 살기 힘든 하소연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완과 기준이 운주동에 돌아와보니 뜻밖에도 고방에서 사련이가 해산 앓음을 하고 있었다. 하옥이 고방에서 나오면서 반겨 맞았다.      “돌아왔어요?”      “오, 그래. 작은 며느리는 어찌된 일인가?"      병완은 물으면서 위방에 들어가 앉았다.      "아직 해산날이 멀잖소?”       하옥은 아랫방에서 걀쭉한 얼굴을 다소곳이 숙이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좀 앞당긴 거 같아요. 가을에 감자를 팔 때 삐치지 말렸지요. 그런데도 감자를 눈 밑에 파묻으면 어쩌겠는가면서 저 몸으로 삐치더니.”      “쯧쯧쯧. 조산 모는 왔느냐?”      “예, 진작 고방에 와 있어요.”     병완은 어두커니 서 있는 기준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근심말아라. 네번째 애니까. 순산하겠지.”     뒤이어 그는 아랫방의 하옥한테 머리를 돌렸다.     “그래, 거 성칠은 어디로 갔느냐?”      “꿩 사냥하러 산으로 들어갔어요. 제수한테 꿩탕을 대접해야겠다더군요.”     하옥은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고방에 들어갔다.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에이구, 막내동생은 이젠 맏사위를 삼고 오래지 않으면 손자를 보겠는데 저 큰놈은 아직도 자식 하나 보지 못하였으니 어쩌는가?”     하옥은 고방에서 그 말을 듣고 칼로 에이는 듯이 가슴이 아팠다.     병완은 윗방에서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하는 기준을 보고 물었다.     “올해 1919년도지?”     “예.”      “그래. 올해는 특별한 해지. 서울에서 부른 ‘독립 만세!’소리가 우리 여기 이 산골에까지 다 울려 퍼졌지.”     병완은 바깥을 내다보면서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머리를 이쪽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오늘 몇 월 며칠이냐?”     기준은 머리를 들고 조금 생각하더니 “음력 10월 18일입구마.” 하고 대답했다.    “응, 참 좋은 날이구나.”    그때 고방에서 갓난 애기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응아, 응아, 응아.”     병완은 기준을 마주보면서 반가워 희죽이 웃었다.     "허, 그 놈이 울음소리 센걸 보니 혹시 사내애가 아닌지 모르겠군. 어서 알아봐라.”     기준은 황급히 정주간으로 내려갔다.      “조산모, 무슨 애요?”      “고추 달린 놈입구마."     "아들이란 말이오?”     "예. 아들입구마."    조산모의 말에 기준은 뒤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에이구,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이 걱정되는 세월에 아들이면 뭘 하겠습둥? 입이 하나 불었으니 근심이 태산같구먼.”     조산모가 고방에 들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갓난애를 누더기에 싸서 안고나와 기준에게 안겨주었다.      기준은 갓난애를 안고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에이고, 길쭉하게 생긴 놈이 딱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쯧쯧.”      기준은 먼저 고방으로 들어가 사련을 보고 인사말을 아끼지 않았다.     “여보, 둘째아들을 낳느라고 수고했소.”     사련은 자애로운 얼굴표정으로 갓난애를 올려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기준은 애를 안고 고방에서 나와 윗방으로 올라갔다.    병완은 기준의 손에서 갓난애를 받아 안고 들여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에이, 그 놈, 뭐나 길쭉한 게 시원하게 생겼구나. 애비를 닮아서 밸 때기 사나우면 어쩌지?”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거리었다.     “아버님두, 조손 삼대 다 성격이 강하잖습둥? 이 애만은 어진 애여야겠는데.”     병완은 넷째손자를 안고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멀어서 닮지 않겠느냐? 아버지 대는 종 자 돌림이구. 내 대는 병 자 돌림이지. 너희들은 준 자 돌림이구 .얘들 대는 상 자 돌림이라. 상자에 무슨 글자를 달아준다?”     기준은 갓난애를 보면서 아버지한테 물었다.     “큰집 병권 큰아버님이나 관준 형님께 물어보고 이름을 지으면 어떻습둥?"    병완은 뜻밖에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니야, 우리 부자간이 먼저 이름을 지어 놓고 물어보자.”    집 안에 한참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지경이었다.     한참 후 병완이 빙긋이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요 놈을 숭상할 ‘상’ 자에 순임금이란 ‘순’ 자를 달아서 상순이라고 지으면 어떠냐? 뜻인 즉 ‘순임금을 숭상한다는 말’이다.”    기준은 아버지와 애를 번갈아 보더니 무릎을 탁 쳤다.    “예, 그 이름이 좋습구마.”    기준은 병완의 손에서 갓난애를 받아 안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상순아, 할아버진 널 상순이란 좋은 이름 지어주었다. 어디 보자. 에구, 이 봉이 눈을 봐라. 세 귀 눈인 게 사납게 생겼구나. 넌 커서 장차 순임금처럼 나라의 백성들을, 응, 우리 고향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알았지? 응?”       병완은 기준을 보고 일렀다.    "상순을 애 에미에게 가져다 젖이나 먹여라. 너무 차게 굴면 못쓴다.”    “예꾸마, 상순아, 엄마한테 가자.”      뒤이어 고방에서 기준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었다.      “여보, 아버님께서 우리 둘째를 상순이라고 이름을 졌소. 상순아, 엄마한테 가자, 응.”     “오, 상순이, 이름이 참 좋소. 상순아, 젖을 먹어라.”     병완은 기준이 부부가 고방에서 주고받는 말을 윗방에서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담배물주리에 담배를 꿍꿍 쑤셔 넣었다.     하옥이 따뜻한 미역국을 사발에 떠들고 고방에 들어갔다.     기준이네가 둘째아들을 보았다는 소문이 온 운주동 마을에 퍼지자 이 집 갓난애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문턱이 다슬 지경이었다.     어금은 혹시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찬바람이라도 맞을까봐 바람간호를 하느라고 무척 왼 심을 썼다.     한 마을에 있는 최구장 내외간도 사돈집에 인사하러 왔다.     인사수작이 끝나자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병완은 담배물주리를 뻑뻑 빨면서 답답한 소리부터 했다.     “이제 이틀만 있으면 잔치를 해야겠는데 우린 아무 준비도 없습구마. 삯전을 주지 않아서 통말이 아닙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나도 경인에게서 들었습구마. 한달 동안 일해도 삯전을 주지 않으니 어쩌는가요? 저 경인은 삯전도 주잖는다고 슬그머니 빠져 집으로 돌아왔습디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 내 숱한 사람들을 겨울나이 쌀이나 벌겠나 해서 공지로 가자고 동원했는데. 삯전을 주지 않아서 큰 일 났습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리 부자간은 마가을에 버들로 버치를 결어 팔아 잔치준비를 대충 했습니다. 우리도 준비한 게 없습니다. 산나물에 감자 떡이나 갖춰 놓고 결혼식이라고 올리면 됩지. 없는 살림살이에 별게 있습니까?”     “예, 구차한 세월에 간단히 대사를 치르깁소.”     병완과 기준도 한시름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의 흐름은 청산유수라 또 이틀이 흘러지나갔다.       운주동의 최구장의 둘째아들 경인과 기준의 맏딸 어금의 결혼잔치는 간소하게 치렀다.      병완은 잔치에 온 창렬과 덕성, 동욱 등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괜히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지에 가게 했구나. 삯전을 주지 않는 날엔 한길수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병완은 잔치 날에도 속으로 윽별렀다. 그런데 한길수는 잔치 날에 낯짝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오지 않길 잘했다. 괜히 잔치 날에 주먹이 날아나가면 어쩌니?)      백두산에 숨어 사는 최구철과 진달래가 위험을 무릅쓰고 잔치를 보러 왔다. 최구철이 백두산에서 사냥한 사슴고기를 가지고와서 모두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잔치날에 최구장은 동생을 집아래목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일렀다.     “너네두 백두산에서 외롭게 살지 말고 여기 운주동에 내려와 살렴.”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최구철은 가죽장화로 하얀 눈을 밟아 문지르면서 도리머리질을 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보오. 일본 놈들이 우리를 어디 살게 하겠어요? 게다가 나는 고향에서 일본 놈들을 몇을 죽였으니까. 여기 와서 편안히 살 수 있겠어요? 괜히 붙잡히자고.”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글쎄 말이야. 형제간에 한마을에서 살면 얼마나 좋겠냐? 그런데 일본 놈들 때문에 형제간에 이렇게 천리를 떨어져서 살아야 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이냐?”     최구철의 코와 입에서 하얀 김이 거세게 뿜겨 나왔다. 마치 성난 사자가 노기를 토하는 듯 했다.     이때 경인의 막내 동생 경석이가 심부름을 하다가 약담배인이 올라 생야단이 일어났다.      최구장은 최구철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맏이 경숙을 시켜 막내 경석을 남들이 보지 않는 집 뒤에 끌어다가 붙잡아두게 했다.     “에이유, 저 꼬락서니를 어쩌니? 동네 창피해 어디 살겠느냐?”     최구장은 답답하여 가슴을 탕탕 쳤다.     최구장은 윗방에서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머리를 수깃하고 무슨 궁리를 하는 경숙에게 물었다.     “경숙아, 그래 공지에 또 갈 예산이냐? ”     “예? 품삯도 안 주는데 또 가겠습둥?”      “맞아, 갈 필요 없어.”      최구장은 곰방대의 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경숙은 허리를 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더니 나지막이 근심을 털어놓았다.     “저 응삼이란 자식이 일본 헌병들을 데리고 가마골로 가서 사람들을 공지로 강제로 끌어갔답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응삼이 고놈새끼, 아이 때부터 교활하게 놀더니 일본 사람들한테 찰싹 들어붙어서 이젠 앞잡이질 하는구나.”      경숙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고놈새끼 말에 홀딱 넘어가서 공지로 가지 않았고 뭡니까?”    부자간은 윗방에 앉아서 한숨만 푸푸 내쉬었다.       기준이 둘째아들 상순을 본 해도 막가는 음력 동지섣달에 소대가리도 얼어 터질 듯 한 엄동설한이 들이닥쳐 살을 어이는 북풍이 윙- 윙- 불어쳤다. 모래알 같은 눈 쌀들이 날아와 창호지를 무섭게 두드렸다.      최구장네 집에는 언 감자도 이젠 거의 거덜이 날 지경이었다. 일본 놈들이 우시장에 경찰서를 짓고 우시장으로부터 두만강변의 회룡까지 철길과 큰길을 닦으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김치움에 파묻어둔 감자, 생명줄 같은 얼마 안되는 감자마저 들춰내 다 빼앗아갔다.      엉망진창이 된 살벌한 세월에 최구장의 맏며느리 허옥실은 해산하려고 고방에서 해산앓음을 했다.      “에구, 이 야박한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살려고 꿈틀거려?”     옥실은 배속에서 꿈틀거리는 아가를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이때 최구장의 로친 성단이 고방에 들어와 앉아 며느리 손을 잡고 위안했다.     “아가야, 하늘이 무너져두 솟아날 구멍이 있다구 근심말게나.”     세파에 부대끼여 성단은 쉰고개를 갓 넘어선 나이에 비해 얼굴에 잔주름이 죽죽 건너갔다.     “내 경숙이랑 산에 가서 버섯을 캐오라구 했는데 오는가 마중나가보겠소. 조산모가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구 몸조심하게나.”      시어머니가 나가자 옥실은 수척한 얼굴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기없는 두눈은 섦음에 찬 샘구멍인가.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러내려 입귀로 흘러들다가는 턱을 타고 어린 근형의 복숭아얼굴에 똑똑 방울져 떨어졌다.     옥실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옥물고 해산진통을 참느라고 모진 애를 썼다.     성단이 아들마중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였다.    고방에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응아, 응아.” 하고 자지러지게 들렸다.    최구장은 웃방에서 곰방대를 들어 재떨이에 툭툭 털면서 로친을 나무랐다.    “에참, 주책없는 노친도. 맏며느리 애를 낳는데 아들마중을 가다니? 쯧쯧쯧.”    성단이 고방에 달아 들어 가더니 환성을 올렸다.     “며느리, 용하구나. 계집애를 낳았구만.”    초신감발을 하고 흰옷을 입은 경숙은 돌 버섯을 캔 바구니를 정주간 바닥에 내려놓고 희죽이 웃었다.     “큰사람, 딸을 안아보게나.”     성단은 갓난애를 포대기에 싸안고 나와 경숙에게 보였다.     경숙은 갓난애를 안고 서성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에구, 살기 바쁜 세월에 나서 어찌 하겠습니까? 입이나 하나 불었지.”     경숙은 아들 근형을 본지 1년 만에 음력 동지섣달에 연연 생으로 딸을 보았다.     최구장은 맏손녀를 안고 한참 궁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몇 월 몇 일인가?”    경숙이 손을 꼽았다 폈다 하면서 한참 생각하더니    “음력으로 12월 5일입구마.” 하고 대답하자    최구장이 좀 궁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애 이름을 밝을 ‘명’ 자에 옥 ‘옥’ 자를 달아서 최명옥이라고 짓자.”     경숙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말이라면 다 따랐다.     “명옥이? 밝은 옥이라. 참 좋은 이름입니다.”     최구장은 덧붙였다.     “칠흑 같은 세월이 밝아오기를 기다려 잘 살라고 밝을 ‘명’자를 단 게다. 옥 ‘옥’ 자는 애 어미 이름에서 따왔다.”      “예—참 좋습니다.”     경숙과 성단은 서로 마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성단은 바삐 부엌에 내려가 멱국을 끓여 고방에 들여갔다. 뒤이어 다시 부엌에 내려가 경숙이 기운봉에서 따온 돌 버섯을 함지에 씻어 가마에 얹고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땠다.      경인과 어금도 소문을 듣고 불붙이에서 달려내려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경인과 어금은 잔치를 해서 얼마 안 돼 운주동에서 서쪽으로 한 3리 떨어진 불붙이라는 골 안에 가서 남의 사랑방을 빌어 들고 세간났던 것이다.    “아, 그, 우리 개성 최 씨네 어쩌다가 계집애를 봤소? 아 그, 쯧쯧쯧.”     경인은 조카 명옥을 안고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때 명옥과 년년생인 근형이 앙기장 아기장 걸어와 갓난애 명옥이 곱다고 고사리 손으로 어루만지었다.     최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식들을 둘러보았다.     최구장의 집안에는 경사가 났지만 저녁에 가마에 얹을 쌀도 없어 최구장의 아내 성단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긴긴 겨울과 보리 고개는 어떻게 넘는단 말인가?)     최구장이 마루에 나가 거위 털 같은 눈송이가 쏟아지는 벌판을 바라보면서 대통을 뻑뻑 빨며 근심했다.      그때 천만뜻밖에도 영월동의 성칠이 어깨에 사슴 한 마리를 메고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사돈어른, 편안히 보냈습둥?”     “아니, 영월동의 사돈이 어떻게 돼서 여기로 왔소?”     성칠은 마당에 사슴을 훌 내려놓았다.     “전번에 장백산 밀림으로 들어갔다가 잡아 온 겁니다. 잡수라고 가져왔습구마.”    최구장이 바삐 성칠의 옷에 묻은 먼지와 눈을 털어주면서 위방으로 안내했다. 온 집안 식구들이 인사수작이 끝나자 어금이 큰아버지에게 손을 씻으라고 뜨거운 물을 대야에 담아 들여왔다.    성칠은 눈섭과 코수염에 낀 서리도 물에 씻어버렸다.     최구장은 성칠을 쳐다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우리 집에 가져오고 사돈네는 뭘 잡수시겠수?”      “전번 사냥에 멧돼지와 사슴을 여러 마리 잡았습구마. 사돈이 한 집안이라고 사양하지 맙소.”     최구장은 허리를 약간 앞으로 굽히면서 사의를 표시하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병완 사돈어른은 편안히 계신기우?”      성칠은 성단이가 들여보낸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답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삯전두 주지 않는데 기어이 공지로 갔습구마. 숱한 사람들의 삯전을 받아 내고야 말겠답더구마.”     삯전 말이 나오자 최구장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말했다.     “거 영월동의 길수란 자가 무슨 사람입니까? 삯전을 주겠다고 했으면 줘야지. 남을 속여 먹으면 됩니까?”      성칠은 아주 분개해 말했다.     “길수도 문제지만 일본 놈들이 더 문제입구마. 경찰국 지으면서 삯전을 내놓지 않았단 말입구마.”     최구장은 부시를 쳐서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면서 말했다.      “응삼은 서당 제자인데 말이 아니더구먼. 한길수한테 붙어 살더니 이젠 일본 사람들의 졸개로 돼서 스승마저 등 쳐 먹는 망할 놈으로 돼버렸수다.”     성칠은 한길수에게 생각이 미치자 악이 났다.     최구장은 담배대통을 뻑뻑 빨며 한탄했다.     “옛말에 부자 한 놈이면 온 마을이 망한다는 말이 맞아요.”    성칠도 동을 달았다.     “요즘엔 한길수는 일본 사람들을 영월동에까지 끌어들여 큰 잔치를 벌리면서 개지랄을 합더구마.”     “개 같은 놈!”     집 안에서는 한길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와 한숨소리가 뒤섞여 오고 갔다.     고방에서는 갓 난애 명옥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깥에서는 풍설이 창호지를 치며 무섭게 윙윙- 울부짖었다.     어른들은 이 살벌한 세상에 태어난 애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한숨만 후~ 후~ 쉬었다.
37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3) 삯전 김장혁 댓글:  조회:645  추천:0  2024-03-27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5장 반항                               1. 삯전          끼무라는 한길수의 입방아질에 오뉴월에도 장독에 서리칠 지경이었다. 그들은  짜고 들어 인부들의 품삯을 주지 않았다.      병완은 한길수가 신용을 저버리고 마을 사람들의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이 괘씸했다. 아무리 힘들게 대패질을 하고 톱질을 하여도 좁쌀 한 되도 차례지지 않았다.    (진짜 강물을 건너자 다리를 뜯어버리구나. 개 놈새끼.)    당장 맏손녀 어금을 시집보내야 하겠는데 손에 한 푼도 쥔 게 없어 근심이 태산 같았다.    결혼 날자는 하루하루 눈앞에 다가와 근심이 태산 같았다.     기준과 병완이 대패질을 쓱 쓱 할 때다.    한길수가가 응삼과 영팔 등을 데리고 목수 간으로 들어와 개화장을 휘두르며 거들먹거렸다.    “저, 김 도감, 대패질만 하지 말구 동네 민공들이 제대로 일하는가 좀 살피게나.”   병완은 거들먹거리는 길수가 눈에 거슬리어 부르튼 소리를 하었다.   “한도감, 난 부지런히 일만 하지 남을 살피는 일은 못하네. 품삯도 못 받는 도감인지 도깨빈지 못하겠네.”    그는 응삼을 건너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어떨꿍이 사람을 죽인다고 응삼은 벼슬욕에 실눈을 가슴츠레 뜨고 길수의 눈치를 핼끔거렸다.     그러나 길수는 속에 전혀 예산도 없었다.     “흥. 응삼을 어찌 자네한테 비길 수 있단 말이오? 자넨 내 의형제 아니요? 자네 말이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듣지 않는가!”    병완은 이럴 때다고 제꺽 바쁜 일부터 들이댔다.    “여보게, 맏손녀를 시집보내야겠는데 손에 일전 한 푼 쥔 게 없어 근심이 태산 같네. 삯전이나 제때에 주오.”    삯전 말이 나오자 한길수는 대뜸 낯색이 어두워지며 퍼란 바위돌처럼 굳어졌다.    “나도 중간에서 진짜 시집살이네. 일본 사람들이 자초보다 다르게 노는 거 어쩌오? 삯전을 인차 줄  거 같지 않네.”     “그게 무슨 소리오?”    병완은 대패질하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한길수를 쏘아보며 따지고 들었다.    "자네 삯전을 딱딱 준다고 했잖은가? 그래 숱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데리고 왔는데. 지금 와서 핸들 나누우면 마을 사람들은 굶어죽으라는겐가?"    한길수는 말이 빗나갔음을 느끼고 중절모자를 벗어 쥐고 마른 기침을 깇더니 번들이마를 슬슬 어루만지면서 제꺽 말을 바꾸었다.    “근심하지 말게. 어떻게 하나 끼무라 국장님과 말해 설전에는 삯전을 주겠네.”    기준과 덕성을 비롯한 목수들은 품삯을 차일피일 미루는 한길수를 못 미더워하는 눈길로 쏘았다. 그들은 모두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길수에게 아니꼬운 눈총을 쏘았다.     “아니, 모두 가을걷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공지로 왔는데 삯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누가 여기서 일하겠소?”     너부죽하게 생긴 덕성은 자귀로 깎던 목재를 들어 던지면서 노호했다.     “품삯을 안 주면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겠소. 감자랑 눈에 다 덮여버리면 어쩌오? 하다못해 산에 가서 사냥이라도 해야 살지. 쳇,”    바빠 맞은 길수는 병완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쑤군거렸다.     “자넨, 도감이 아닌가? 자네 삯전을 주지 않을까봐 그러오? 근심하지 말게나.”    병완은 누구나 다 들으라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온 마을 사람들한테 삯전을 딱딱 준다고 불러왔는데 내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한단 말이요? 안되오. 달마다 꼭꼭 삯전을 계산해 주오.”    길수도 안 되겠다싶었든지 살짝 말을 바꿨다.     “그렇긴 하구만. 자넨 맏손녀를 시집보내야 한다니 내 오늘 끼무라 국장에게 말해서 먼저 주겠네.”    “안 되오. 온 마을 사람들의 삯전을 다 …”    한길수는 마을 사람들을 건너다보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떠들지 말라는데도 왜 이래?”    “떠들지 않게 됐소?”     길수는 병완을 마구 끌다시피 해 목수 간에서 나왔다.    그는 병완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춰 쑤군거렸다.     “내 말 듣소. 내일 목수 간의 삯전만 먼저 줄게.”     “안 되네. 온 마을 사람들 삯전을 몽땅 달란 말이오.”    한길수는 고집불통인 병완과 말해보았자 쓸데없는지라 또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 주지. 온 마을 사람들의 삯전을 다 주지.”    그제야 병완은 씩씩 거친 숨소리를 죽이면서 목수 간으로 되들어갔다.     이튿날 정말 한길수는 병완을 공지 총도감실에 불러갔다.    병완은 삯전을 주겠지 하고 총도감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총도감실에는 한길수와 응삼, 영팔, 수길 등 사람 외에도 끼무라 국장과 야마모도 소장, 털 한 모숨이 가메다까지 살기등등해 앉아있지 않겠는가.    가메다는 볼에 난 털 한 모숨 났다고 해 털한모숨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볼의 털을 슬슬 어루만지며 눈을 버릇처럼 찔끔거리면서 키가 구척이나 되는 병완을 살기 찬 눈길로 노려보았다.    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삯전을 달라고 너무 떠드는 바람에 이게 뭔가? 끼무라 국장과 삼림파출소 야마모도 소장이 직접 자네를 만나러 왔네.”    야마모도 소장이란 자는 안경알 밑으로 구척 같은 병완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고 끼무라는 아주 반가운듯이 걸상에서 일어나 병완과 악수까지 청했다.    “요로씨이(좋아), 자네가 병완인가?”   류강철이 조선말로 통역해주자 병완은 끼무라의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삯전이나 줍소. 우린 지금 죽물도 먹기 힘드오.”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끼무라는 피씩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돈밖에 모르는 놈들. 우리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양민이 되고 싶지 않은가? 우리 대일본제국은 그대들의 충성심을 요구하네. 그럼 돈뿐이겠는가? 쌀이랑 미녀랑 많이 주지.”    끼무라는 세 살 짜리 애에게 사탕을 주고 얼리듯이 구슬렸다.    “아니, 미녀고 뭐고 싹 그만두고 삯전이나 주오.”    “주지. 간상, 자네가 어떻게 공지를 다스렸으면 이 놈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자고 들겠는가?”    한길수는 잔등에 식은 땀을 쫙 흘리었다.    그는 병완을 쏘아보면서 나무랐다.    “주겠다는데 왜 나까지 욕을 먹이는가?”    병완은 그저 삯전을 주기만 기다리면서 입에 빗장을 지르고 말뚝처럼 떡 뻗치고 서 있었다.    상전 앞에서 바빠 맞은 한길수는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잎을 꺼내 병완의 손에 척 쥐어주었다.    “얻소. 가져다 맏손녀를 시집보내게나.”   끼무라 국장은 입귀에 금이발을 드러내며 피씩 냉소했다.   “그깟 놈들이 대일본제국의 일을 하지 않으면 몽땅 죽여 버려! 또 인부들을 붙잡아오면 돼. 쳇, 대일본제국을 위해 일하는데 무슨 놈의 삯전? 우둔한 놈들, 정말 정신 나갔군. 흥!”     병완은 길수에게서 동전 몇 푼 받아 낸데다가 공지 모든 인부들의 삯전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총도감실을 나섰다.    그때 등 뒤에서 끼무라 국장이 야마모도소장을 돌아보면서 지껄여대는 소리가 들렸다.    “장승같은 놈, 힘깨나 쓸 거 같군. 우리 개로 길러볼만한 놈이네.”    “쳇, 딱 도깨비 같구먼.”    목수칸으로 돌아온 병완은 길수에게서 가진 동전 몇 잎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대패 틀 위에 잘그락 놓았다.     덕성은 눈이 동그래 물었다. “건 어데서 나온 거요?” 병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길수 영감이 선심을 썼네. 날 보고 동전 몇 잎 받고 인부들의 입을 틀어막아 달라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한 영감은 정말 삯전을 주지 않을 작정인가?” “그러게 말이요. 괜히 여기 와서 뼈 빠지게 일한 것 같네.” “두 달째 삯전을 주지 않으니 코앞에 닥쳐온 양력설은 어떻게 쇤단 말이요.” “양력설? 쳇, 난 가을에 감자를 파오지 못하고 여기 끌려오다나니 눈 밑에 몽땅 파묻었소. 이 기나긴 겨울에 뭘 먹고 산단 말이요.”      “최구장네 경인처럼 버치나 틀었더라면 우시장에 가져다가 팔아 겨울나이 쌀이나 장만했지.” 그런 말을 들으면서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동전을 가져다 바쁜 목에 쓰게나.” 병완이 대패 틀 우에 놓은 동전 몇 잎을 건너다보면서도 서로 눈치를 볼뿐 누구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병완은 동전을 싹 쓸어 쥐더니 덕성이랑 몇몇 목수들에게 일일이 둬 잎씩 나눠주었다. 이때 기준도 나무에 묻은 대패 밥을 손으로 쓱쓱 털어버리면서 답답해 말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네. 맏딸을 대엿새 후에 시집보내야지. 아내가 막달인데 당장 몸을 풀어야 하오. 그런데 손에 쥔 게 어디 있소?”      덕성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동전을 기준에게 내밀었다.      “이걸 부조 삼아 가져다가 맏딸의 결혼에 쓰게나."       “싫소.”      기준의 말에 병완도 손을 내저으면서 사절했다.       “절대 그러지 마오. 양력설에 어떻게 빈손으로 가겠는가? 난 마을 사람들 앞에서 머리도 못 들고 다니겠네.”        덕성은 동전을 쥐고 병완과 기준이 그리고 다른 목수들을 돌아보다가 한 잎 만 기준에게 주었다.        “그럼 이 한 잎은 맏딸의 결혼잔치 부조인 셈 치고 받네. 나머지는 자네들이 꼭 받아야 하네. 사양하면 우리도 한 잎도 가지지 않겠네.”      기준은 기어이 사양했다.      “아니요. 우리도 제 몫을 가졌으니까. 이러지 말게나.”      덕성은 두툼하고 터실터실한 손으로 동전잎을 기어이 기준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에이, 사람이. 부조도 받지 않는 법이 어데 있는가.”     기준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병완은 기준을 보고 “덕성이, 성의는 이미 받았으니까 그만두게. 먼저 바쁜 목을 열고 보기요. 우린 감자떡이랑 빚어 놓고 결혼잔치를 하면 되네.”라고 했다.     덕성과 기준은 동전 한 잎을 가지고 주려거니 받지 않으려고 하거니 했다.     이때 한길수가 영팔과 응삼을 데리고 목수 간으로 우르르 쓸어 들어섰다.    그제야 덕성과 기준은 그만뒀다. 덕성은 할 수 없이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자네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미세 당기 세를 하오? 에헴.”     한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병완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병완은 길수를 똑바로 마주보면서 말했다.      “총 도감, 모두들 삯전을 주지 않으면 계속 일하지 못하오. 감자랑 채 파지도 못하고 여길 오다나니 몽땅 눈 밑에 쓸어 넣었단 말이요. 동삼에 쌀을 살 삯전도 주지 않아 집식구들의 입에 거미줄을 치겠소.”      (아, 이 영감이 금방 입을 틀어막으라고 동전을 주었구만 오히려 인부들 쪽에 서서 대포를 쏜단 말이야. 흥!)      한길수는 속으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공지에 왔기에 당신들의 입만은 집에서 근심하지 않게 되지 않았소? 너무 좋아서 그러오?”     그 말에 덕성은 팔을 걷어 올리더니 한길수의 코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것도 말이라구 해? 우리 공지에 오지 않으면 사냥이라도 해서 쌀값을 장만할수 있어. 당장 삯전을 줘. 그러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겠어.”     “옳소. 우린 그만두고 사냥하든지 삯일을 하든지 하겠소.”      “아니, 이것들이 누구 앞에서!”     영팔이 가죽채찍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닥쳐!”      한길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는 영팔을 질책했다.     “에이, 못난 놈. 한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짓이냐?”     한길수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낯에 게바르면서 구슬렸다.      “우린 한 마을 사람들이 아니고 뭐요?  좀 서로 사정을 봐 줄내기.  흐흐흐. 나도 일본 경찰국 끼무라 국장과 말해서 꼭 자네들의 삯전을 주게 하겠네. 근심 말고 일하게나. 나도 중간에서 정말 시집살이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한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한길수는 중절모를 쓴 대머리를 건뜻 쳐들고 우멍 눈으로 천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천하의 한길수가 그래 고만한 돈 주지 않으리라구 그러오?”     모두 길게 한탄하면서 대패질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한길수는 병완을 돌아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목수 간을 나섰다.     그날 일을 마치자 병완과 기준 부자는 한길수와 말하고 어금의 결혼식을 올리려고 운주동으로 돌아갔다.
37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32) 인부 모집 댓글:  조회:585  추천:0  2024-03-22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9. 인부모집              먹장구름이 뒤덮여 오더니 풍운조화를 헤아리기 어렵게 을씨년스럽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잔잔히 흐르던 조용한 개울물에 어디서 미꾸라지 한마리 기어나왔는지, 간사하게 꼬리치며 물을 흐리우기 시작했다.          최구장은 서당방이 쉬는 날이 돼서 마루에 앉아 맏손자 근형(봉인)을 안고 한가히 놀면서 담배를 풀썩풀썩 피웠다.    응삼은 끼무라와 한길수 명을 받은지라 운주동으로 가자마자  옛날 서당방 은사 최구장을 찾아갔다.     응삼은 온 낯에 나오지 않는 웃음을 지으면서 최구장을 보고 다가가 인사부터 올렸다.     “선생님, 그간 무고합둥? 몸이랑 괜찮습둥? 해해해.”    최구장은 피끗 응삼을 내려다보더니 마지못해 대구했다.    “오, 그래. 십여년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더니 무슨 일로 불쑥 찾아왔는가?"    최구장은 재수없이 턱이 뾰족하고 뱁새눈을 팬들거리는 응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할 때면 자기가 먼저 남의 뒤 골을 톡 쳐놓고서는 질책하면 다른 애를 먼저 쳤다고 물고 늘어지기가 일쑤였다.    (이 자식이 무슨 바람이 불어 찾아 왔을까?)    응삼은 제 좋은 소리를 쳤다.    “선생님, 이런 일이 있습구마. 지금 일본 사람들이 우시장에 큼직한 집을 짓는뎁쇼...”   최구장은 담배재를 재떨이에 툭툭 털더니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그래, 이 늙은이가 일본 사람들 집짓기에 가라는 건가?”    “아, 아니, 아닙니다. 은사님. 어, 은사님의 손자 놈이 정말 귀엽구먼요.”    응삼은 마루에 기어 올라가 최구장 옆에 찰싹 들어붙어 앉아 근형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머리까지 조아리면서 말했다.     “은사님, 일본 사람들은 신용을 지키는 사람들입구마. 꼭꼭 달 말이면 삯전을 주니까요. 운주동 사람들이 가서 부업이라도 하면 좀 좋아서.”     최구장은 먼 산을 바라보면서 한참 궁리하다가 담배를 길게 빨아 후— 내쉬었다.      “그래 일본 사람들이 삯전을 얼마씩이나 준다던가?”     응삼은 최구장의 턱 밑에 기어들어 말상을 갸우뚱거리면서 약사발을 올렸다.     “날마다 쌀 둬근 값은 줍꾸마. 저 영월동의 병완 영감은 목수 일을 해서 삯전으로 쌀 한 되 값은 받았습구마. 그 집 둘째아들과 셋째아들도다 공지에 갔습구마.”     “그래?”     응삼은 일 돼갈 거 같아 빈대눈을 팬들거리면서 한술 더 떴다.     “영월동의 한길수 어른이 직접 공지 총도감을 맡고 삯전을 내주고 있는데유. 틀림 있겠습둥?”     “다시 묻겠네. 우리 사돈영감이 확실히 우시장에 갔어?”     응삼은 말상을 조아렸다.     “예, 가구말구요. 병완 영감은 목수 일을 해서 맏손녀를 시집보낼 준비를 한다던데요. 정 믿어지지 않으면 가 봅소. 창준과 기준이 가지 않았는가.”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때 때마침 최구장의 맏아들 경숙과 둘째아들 경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응삼은 그들을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이 집의 끌끌한 일군들이 들어서는구먼.”   응삼은 최구장을 돌아다보면서 뾰족한 턱까지 흔들어대면서 말했다.   “은사님, 저 아드님들을 공지에 보냅소. 삯전이나 벌면 오죽 좋겠습니까? 황차 둘째아드님이 장가도 들어야 한다면서요?”  경인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귀밑까지 붉혔다.    “경인이, 자네 가시아버지 기준이도 공지에 갔네. 공지에 가서 돈을 벌어서 혼수나 준비하게나.”    경인은 응삼의 실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내 가시아버님께서도 갔소?”     “응, 그래. 지금 목수 도감을 하오. 한길수 영감이 총도감을 하는데 하루 일하면 쌀 반 되 값은 주오. 부지런히 일하면 쌀 한 되는 버오.”    경인은 퍽 호기심이 들어 했다. 그러나 경숙은 반신반의하면서 주춤거렸다.     응삼이는 최구장의 턱 밑에까지 다가들었다.     “은사님, 저 끌끌한 아드님들을 일하러 보냅소. 삯전은 근심하지 맙소. 정 받지 못할 것 같으면 한길수 어른이 있잖습둥?”    “쳇, 한길수를 믿어?”     최구장은 한길수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시장의 어떤 깍쟁이라고? 부채 아까워 얼굴을 부채에 대고 흔드는 영감. 린색하고 옹졸하기 그지 없어. 흥!)    응삼은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삯전을 받지 못하면 한길수와 달라고 하란 말입구마. 옛날에 부자 집이 넘어가도 석삼년은 걸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한영감이 그 숱한 재산을 가지고 달아나겠습니까?”    그러자 경인이가 나섰다.   “그 말에는 조금 도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지에 가본다?”   뒤이어 반신반의하는 경숙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형님, 형수가 오래잖아 해산하겠는데 쌀독을 빡빡 긁지 말구 우리 둘이 공지에 가서 일하기요. 내 가시아버지와 가시할아버지도 거기 가서 일한다구 하잖소. 갔다가 맞갖잖으면 돌아오기오.”    경숙은 동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마루 우에서 지켜보던 응삼은 일이 돼가는 걸 보고 속으로 너털 웃음을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은사님, 편안히 계십소. 선생님이 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지에 보내면 덕을 쌓는 겁구마. 보릿고개를 넘을 쌀이나 마련하게 하면 좀 좋아서?”    응삼은 오늘 따라 지나치게 해해거리면서 허리를 굽혔다.    최구장은 담배 물주리를 뻑뻑 빨다가 연기를 후 불어내더니 재떨이에 털었다.   “그러지. 일감을 알려줘서 고맙네.”    응삼은 울바자 밖으로 나가면서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해해해. 은사님이 이전에 하늘 천, 따 지를 가르쳐주시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요. 제가 어찌 은사님의 은공을 잊겠습둥? 좋은 일이 있으면 은사님 댁에 먼저 알려얍죠.”   응삼이 대문 밖으로 나가자 시끄럽던 집 울안이 조용해졌다.   경숙은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응삼의 궁둥이를 보고 돌아섰다.    “저 응삼의 말을 믿을 만 합둥? 더구나  우시장에서 이름난 난봉군 한영감을 믿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습구마. 얼마나 떼질군이라구. 흥! ”    최구장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글쎄 한길수야 소문난 깍쟁이란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허나 일본 사람들은 혹시 삯전을 쥐겠는지, 한번 가볼만한 거 같아. 사돈영감들두 갔다구 하지 않니?”    경숙은 량미간을 찌프리었다.    “아버지, 일본 놈들을 믿습둥? 그 놈들은 조선을 통채로 먹어버린 엉큼한 도둑놈들입구마."    경인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형님, 먼저 며칠 가 일해보기오. 삯전을 주지 않으면 내 가만놔두지 않겠소.”   그러자 최구장이 정색해서 말했다.    “너, 경인은 절대 공지에 검을 절대 가지고 가지 말라. 무슨 사단을 일으킬라고. 쯧쯧.”    경인은 뒤덜미를 긁적거렸다.    “옳다. 너 오래지 않으면 장가가겠는데 무사해야 해.”    경숙의 말에 경인은 형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알았소, 형님,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테니. 근심하지 마오.”     최구장은 맏아들과 둘째아들을 내려다보면서 담배 물주리를 재떨이에 툭툭 털면서 물었다.    “거 넷째하구 막내는 뭘 하니? 걔들도 데리고 가렴.”    경숙은 아버지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머리를 떨어뜨리며 경인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니?”   최구장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 지나갔다.   경인은 속이지 않고 낱낱이 말했다.   “넷째동생 경욱은 경석과 함께 또 약 담배 장사하러 우시장으로 갔습구마.”    최구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고놈새끼들, 언제 고약한 버릇을 뗄까? 너희들과는 달리 고 놈들은 부지런히 일해 살 예산이 없고 전문 약 담배 장사가 아니면 약 담배를 피운다. 어쩌겠니?”    최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엉거주춤 일어났다.    “너희들이 우시장에 가면 고놈새끼들을 붙잡아서 공지에 데리고 가라. 약 담배 장사를 하다가 언제 순사 놈들에게 잡혀서 혼나지 못해서. 쯧쯧쯧.”    한편 최구장네 집에서 나온 응삼은 온 운주동을 돌아다니면서 최구장네 아들들이 몽땅 공지로 일하러 간다며 마을 사람들을 일하러 가라고 동원했다. 최구장이라면 운주동에서 한다하는 서당 방 선생인데 그가 아들들을 공지에 보낸다고 하자 모두들 공지로 가려고 나섰다.     응삼은 운주동에서 십여 명의 끌끌한 인부를 모집한 후 운주하를 건너 신흥동으로 갔다.    응삼은 신흥동에서 한다하는 김종국 구장을 먼저 찾아갔다. 그런데 김 구장이 일본사람의 앞잡이로 된 응삼을 거들떠보지 않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응삼은 김 구장네 집 울안에 들어가 마주 나오는 김 구장을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김구장, 무사합둥? 우시장에 좋은 일감이 생겨서…”    응삼의 말이 채끝나지도 않았는데 김 구장이 빈정거렸다.    “아니, 자넨 우시장에 가서 한자리 했다더구먼. 무슨 일로 이 누추한 시골에 찾아왔는가?”    응삼은 속으로는 괘씸하였지만 일을 그르칠 까봐 꾹 참았다.    “사실 에헴, 김 구장, 저기 우시장에 일본사람들이 큰 집을 짓는데 좋은 일감이 생겼습구마…”    “응삼이, 좋은 일이 있으면 자네나 할 게지. 날 찾아와 뭘 하오? 난 허리 아파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못하네.”     김종국은 조개턱을 건뜻 쳐들고 먼 산을 쳐다보면서 대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응삼은 뒤따라가면서 김 구장의 팔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니, 김 구장, 내 말을 다 들어 봅소. 김구장, 저기, 저…”    “이 사람이, 왜 이래? 이 팔소매를 놓으라니까. 급히 가 볼 데 있는데 허리를 놔라, 놔. 이 사람이 정말 찰거머리 같다.”     김 구장은 팔을 휘둘러 뿌리치면서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응삼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고말았다.     응삼은 뾰족한 턱을 살래살래 저으면서 가마골로 향했다.     가마골의 구장은 림호라는 사람이었다.    림호는 이 마을에서 힘깨나 꽤 쓰는 힘장사이었다. 이름 그대로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호랑이같이 생긴 그는 더부룩한 구레나룻에 나비수염까지 길러서 딱 수호전의 리규 같았다.     한번은 한 마을의 석수, 용기 등이 기운봉으로 사냥하러 갔다가 간 날이 장날이라고 그만 호랑이를 만났다. 그들이 사냥총을 쏘아대면서 쫓아가자 호랑이는 겁을 먹고 절벽아래 나무숲속에 난 범의 석굴 안으로 달아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범이 굴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잡자고 하였지만 림호 만은 담대하게 혼자 범의 굴로 뒤쫓아 들어갔다.     때마침 암펌이 새끼 둘을 입에 물고 굴 밖으로 나오다가 굴 어구에서 림호와 딱 마주쳤다.     “이 놈의 범 새끼, 어디로 도망치려고?”    림호는 범의 굴 안으로 고래고래 고함치면서 뒤쫓아 들어가 뛰어나가는 호랑이의 꼬리를 꽉 틀어잡았다.    화닥닥 놀란 호랑이는 똥물을 내갈기더니 굴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뒤발로 림호를 걷어찼다.    “이 놈 범새끼, 뒤 발 질까지 해? 어디 죽어 봐라.”    호랑이는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림호는 범을 놓칠 까봐 꼬리를 단단히 잡고 발로 땅바닥을 긁으면서 뻗쳤다. 그렇게 호랑이와 림호가 반나절이나 싱갱이 질 하다나니 범이고 림호이고 다 기진맥진했다. 나중에 호랑이는 꼬리 껍질이 다 우악한 림호 손에 쭉 벗겨졌다. 그 놈 호랑이는 죽기내기로 굴 밖으로 나가려고 버둑거리다가 똥물을 열댓발 찔 갈기더니 풍덩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물앉고 말았다. 이때 바깥에 있던 석수랑 몽땅 뛰여 들어와 함께 호랑이를 비수로 찔러 죽였다.     사후에 석수가 “무슨 담에 범의 꼬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어?” 하고 묻자 림호는 범의 발톱에 긁힌 얼굴에 묻은 피를 손으로 쓱쓱 닦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허허, 내 머리 속에는 범의 꼬리는 단단히 쥐고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밖에 없었네.”     림호는 맨 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은 셌지만 머리는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나니 꾀 망둥이 응삼이가 운주동의 최구장과 신흥동의 김구장이랑 다 자식들과 마을사람들을 공지에 보낸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하자 인차 공지에 가겠다고 나섰다. 림호 구장은 당장에서 석수와 용기, 길수를 불러왔다.     “우리 이 사람을 따라 우시장에 가보자. 감자농사두 잘 되지 않았는데 얼기 전에 동삼에 먹을 쌀이라도 벌어오자.”    림호 말이라면 하느님 말처럼 따라온 용기와 길수, 석수는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응삼은 아주 쉽게 운주동과 가마골에서 만 하여도 서른대여섯이나 데리고 우시장으로 가게 됐다.     그는 신흥동에서 김 구장한테 코를 떼울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놈 영감이, 어디 황군에게 혼나봐라.”     응삼은 신흥동쪽을 손가락질하면서 욕질하더니 마을을 떠났다.     응삼은 숱한 인부들을 데리고 우시장으로 돌아가자마자 한길수를 찾아갔다.     한길수는 인부들과 응삼을 번갈아보더니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수고했네. 끼무라 국장은 자네를 꼭 중용할거요.”     응삼은 신흥동의 김 구장에게 당한 수모가 내려가지 않아 길수에게 있는 말 없는 말 다 보태 물어먹었다.     “그 놈 김 구장을 혼내줍소. 내 찾아가니 개 닭 보듯 하면서 일본 놈들 집짓기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겠습둥?”    “그 놈이 언감? 경 칠 놈, 흥!”    “헌병들을 데리고 김 구장을 혼드검 내줘야겠네. 개배때기를 차도 주인을 보고 차라고. 주리를 틀어놓지 않는가 보자.”     한길수도 분이 나서 우멍 눈을 부라리면서 이를 쁙쁙 갈았다.     그는 그 길로 끼무라 국장에게 말해 헌병 몇을 데리고 말을 타고 신흥동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둬 식경 달려 운주하를 건너 신흥동에 이르렀다.     길수는 일단 일본 헌병들을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마을에 들어갔다.     어느 한집 돼지우리에서 둼을 쳐내는 한 늙은이가 눈에 띄었다.     “저게 김 구장이 아닌지?”    그 늙은이에게 다가가서 묻자고 하니 돼지 똥 구린내가 역겨워 다가가기 싫었다.     하여 멀찍이 서서 그 늙은이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여기 김 구장 집이 어느 겐가?”      그 늙은이는 돼지 똥을 쳐내다가 머리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일본 헌병들과 낯선 한길수의 번들이마를 번갈아 보더니 대구도 하지 않고 계속 돼지 똥을 쳐냈다.     "영감, 사람 소리 들리지 않는가?"     "?"     "김구장 집이 어디 있는가?"     “몇 집 건너 저 우에 있네.”     한길수는 그 늙은이가 가리키는 대로 몇집 건너 갔다. 아낙네가 집 마당에서 한창 절구에 낟알을 찧고 있었다.    그는 아낙네에게 다가가 물었다.    “김 구장네 집이 어느 겐가?”     아낙네는 절구 공이를 놓고 한길수의 낯선 얼굴과 마을 어귀에 들어선 일본 헌병들을 의아한 눈길로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절구꽁이를 딱딱 찧어댔다.     “아니, 묻는 말을 못 들었가? 이 마을 년놈들 다 귀 먹어린가? 참 이상할 정도얘. 이년, 어느 게 김 구장네 집인가? 왜 묻는 말 답하잖아? 엉?”     아낙네는 절구꽁이로 낟알을 계속 찧으면서 반문하지 않겠는가.    “댁은 뉘신지요? 김 구장을 찾아 뭘 해요?”    한길수는 아직도 나를 모르는 아낙네들도 있나 싶어 보란 듯이 번들이마를 쳐들고 을러멨다.    “이년, 이 어른도 몰라. 이 어른은 우시장공지 총도감이야. 묻는 말이나 대답해. 어느 집이 김 구장 집인가?”    아낙네는 머리를 들어 몇 집 건너 동쪽 집 돼지굴을 치는 령감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것이었다.    눈치챈 길수는 우멍눈으로 아래쪽을 돌아버더니 아낙게네한테 발작 다가서면서 물었다.    “저기 돼지 똥을 치는 영감이 김 구장인가?”    그러나 아낙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절구질만 했다.    “맞지? 저 영감두상이 김 구장이지?”    한길수는 돼지 똥을 치던 영감이 김 구장인 걸 알아차렸다.    한길수는 마을 아래쪽으로 되 내려가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더러운 영감, 분명 자기를 찾는데 이 어르신님을 이렇게 두벌걸음을 걷게 해? 어디 혼나 봐라.”    한길수는 일본 헌병들한테로 돌아가 돼지 똥을 쳐내는 김 구장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가서 붙잡으라는 손시늉을 했다.    일본 헌병들은 말에 올라 곧추 김 구장네 집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자들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돼지우리에 뛰어들어 돼지 똥을 쳐내던 김 구장을 끌어냈다.     “김 구장, 당신은 목이 몇 개 돼 감히 이 한길수 어른이 묻는 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가? 이 어른을 두벌 걸음을 시키다니?”     김 구장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허리를 꿋꿋이 폈다.     “난 일본사람들의 그늘 밑에서 구장 질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지 오래오. 구장도 아닌 나를 찾아 뭘 하오?”    한길수는 김 구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 쳤다.    “어째 죽고 싶은가? 네깐 놈 감히 대일본제국의 경찰국 청사를 짓는 일을 방애한단 말인가?”    그러나 김 구장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백발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난 자기 집 돼지우리도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언제 일본사람들의 집을 짓는데 갈 새 있겠소? 그럴 새 있으면 내 돼지 굴이나 짓겠네.”     "뭐? 뭐?"    한길수는 김 구장의 멱살을 마구 흔들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대일본 제국의 경찰국을 짓는게 중하냐? 너네 돼지굴이 더 중하냐? 이 놈. 당장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지라 가라! ”    김 구장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릴? 한창 가을철이 돼서 마을 사람들은 감자랑 강냉이랑 걷어 들이느라고 어디 갈 새 있소?”    한길수는 김종국 구장의 멱살을 스르르 놓으면서 조금 치미는 분노를 눅잦히면서 말했다.    “가을걷이를 못해도 경찰국 집짓기를 하면 살수 있단 말이야. 공지에 가서 일하면 삯전을 준단 말이다. 그 삯전이면 겨울을 날수 있다.”     “허, 그 영감, 진짜 삶은 소대가리 다 웃다가 꾸러미 터질 소릴 다 한다. 겨울을 나고 나면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인데. 어떻게 보리고개를 넘으란 말이요?”    약이 오른 한길수는 꽥 고함쳤다.     “이 놈, 내 명을 거역할텐가? 어디 죽어봐라.”     한길수는 일본헌병들에게 김 구장을 바줄로 묶으라고 손시늉했다.     뒤이어 그는 두 팔을 뒤로 탈아 꽁꽁 묶은 김 구장을 끌고 마을 복판에 자리 잡은 널찍한 마당으로 갔다. 일본 헌병들은 김 구장을 마당 한복판에 있는 늙은 비술나무에 꽁꽁 묶어놓았다.    한길수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몽땅 이 마당에 모여라. 마당에 나오지 않는 날엔 일본제국의 총칼 맛을 보일테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비술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일 밭에 나가고 어린애들까지 다 해도 마을 사람들은 20여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한길수는 번대머리에 돋은 땀방울을 생강 같은 손바닥으로 뚝뚝 찍어  닦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우시장 일본경찰국 사무 청사 공지 총 도감 한길수야!”     그러자 마을 사람들 속에서 웅성거렸다.     누군가 “저 영감이 고개 넘어 영월동의 난봉쟁이 한길수가 아니냐?” 하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 속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이어졌다.      "저 소문난 건달놈이 일본 놈 덕분에 승급했구먼."     "저게 일본 놈들을 등에 업고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즛살을 어떻게 보겠니?"     "흥! 세상이 점점 더럽게 변해가는구먼."      허나 길수의 고함질은 계속 울렸다.     “김 구장은 대일본제국의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 공지에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애하기까지 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치는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다. 오늘 마을사람들 앞에서 처벌한다. 이후에 누구든지 자기 집일을 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일을 하러 공지에 가지 않는 날엔 이 영감처럼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길수는 숱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말채찍을 휘둘러 김 구장의 가슴이고 다리고 사정없이 쨩 쨩 후려쳤다.     김 구장은 한길수가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 베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살갗이 채찍에 묻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닥치오!”    이때 훤칠하게 생긴 중년사나이가 마을 사람들 속에서 뛰쳐나왔다.    한길수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마을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밭에서 하나둘 마을로 돌아와 비술나무마당에 모여들었다.    “네 놈은 누구냐?”    한길수는 휘두르던 채찍을 들어 그 중년사나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난 이 늙은이 맏아들 영진이오.”    중년사나이는 가슴을 쑥 내밀고 따지고 들었다.    “왜 죄 없는 우리 아버님을 이렇게 모질게 치는 거요?”    한길수는 억이 막힌 듯이 번들이마를 쳐들고 대가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 애비에 딱 그 아들놈이구나. 네 애비 대일본제국의 사무 청사를 짓는데 가지 않은 건 둘째고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방애했다. 그래도 죄 없어?! 대역죄야, 목을 쳐도 과하지 않아.”     한길수 우멍눈에서 무서운 불빛이 번쩍였다.      “이 놈, 죽어봐라! 이 놈!”    한길수는 이를 악물고채찍을 휘둘러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런데 영진은 왼팔을 들어 날아드는 채찍을 받아 꽉 틀어쥐어 홱 챘다. 채찍을 빼앗긴 한길수는 일본 헌병의 손에서 군도를 빼앗아 들고 휘둘렀다. 질겁한 애들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만두오!”    이때 비술나무에 묶인 김 구장이 피가 낭자한 얼굴을 겨우 들면서 고함쳤다.    “한도감, 우리가 역사에 나가면 그만이 아니요? 무고한 사람을 자꾸 치지 마오.”     한길수는 군도를 내리우면서 살기등등했던 낯에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기다렸던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제야 박바가지 같은 대가리 제대로 돌아섰군. 삯전도 주는데 왜 공지에 나가지 않아?  일본제국의 총칼 맛을 볼 게 있는가!”     한길수는 득의양양해 마을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들어! 무릇 열여섯 살 이상 되는 사내들은 몽땅 내일부터 우시장에 가서 공지 일을 해야 해. 가지 않는 자가 발각되는 날엔 대일본제국의 법에 의해 엄벌을 가할 거야. 알겠는가?!”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못마땅해 웅성거렸다.      “그래 저 밭의 감자랑 강냉이랑 제때에 걷어 들이지 않으면 어쩌오?”     “곡식이 눈 밑에 들어가면 뭘 먹고 산다오?”     “멧돼지 성화에 밭에 묻어둔 감자 아까워 죽겠는데."     “별 영감을 다 보겠네. 어째 조선 사람이라는 게 일본 사람 편에 서서 말하오?”     지어 이런 말소리마저 들리었다.     “우린 조선 사람들인데 일본 사람들의 일을 하지 않는다고 일본법에 의해 처형해? 이거 참, 원.”     “글쎄 말이요. 그래 답답하다는 게오.”     한길수는 마을사람들을 노려보다가 세길 네길 펄쩍 뛰며 꽥 고함쳤다.     “헛소리를 작작 쳐라. 이젠 일본과 조선은 하나로 됐다. 우린 대일본제국의 법을 따라야 한다. 내일 나를 따라 몽땅 우시장으로 가자. 가지 않는 놈은 몽땅 김 구장처럼 엄벌할테야."   그는 발로 탕탕 땅을 구르며 땅방울같이 을러멨다.    "일하러 가지 말자고 선동하는 자가 있으면 이 일본 군도로  목을 치겠어! 알았어?! 엉?”     한길수는 마을사람들을 위협하려고 일본 헌병의 허리에서 군도를 쓱 빼들어  늙은 비술나무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군도로 내리찍었다. 비술나무껍질이 군도에 찍혀 한 뼘이나 벗겨져 누런 살이 드러났다.     한길수는 한 고향 사람들을 다 잡아서라도 경찰서를 지으려고 미쳐 날뛰었다. 경찰서를 빨리 지어 바쳐야 끼무라한테 잘 보여 바라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길수는 말을 타고 우시장으로 돌아가면서 엉큼한 궁리를 다 굴렸다.    (흥, 온 명천 간나새끼들 다 일본 콧수염쟁이한테 팔아 먹지 않는가 봐라. 대가루 경찰서장 쯤 얻어 해야겠는데. 으흠, 건데 마을 놈들 반발이 심해 식은 죽 먹긴 아냐.)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핍박에 못 이겨 이불 짐을 꿍져 지고 한길수와 일본 헌병들을 따라 우시장으로 떠났다.    신흥동에서 20여명의 끌끌한 인부들을 끌고 가게 됐다. 한길수는 한 고향 영월동에서도 숱한 사람들을 강제로 공지로 끌고 갔다.     인부들을 끌고 우시장으로 가는 길에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가 으쓱해져 더 못된 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명천 땅에서 누가 감히 이 어른 말을 거역해? 목이 날아나지 못해? 허허허. 인부들에게 삯전도 줄 필요없어. 내 돈은 뭐 벼락 맞은 소고기라더냐? 네깐 놈들이 감히 어쩐단 말인가? 으흐흐. 흐흐.)     옛 말에 마을에 부자 한 놈 있으면 온 마을 사람들 다 잡아먹는다고 했다. 바로 한길수 같은 놈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37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31)콧수염쟁이와 뜨개소 댓글:  조회:751  추천:0  2024-03-22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8. 콧수염쟁이와 뜨개소        품삯이 일루 희망의 꼬리를 쳐 숱한 농사군들을 유혹해 공지로 모여들게 했다. 돈의 마력은 고달픈 한숨을 쉬는 가난한 백성들을 고난일지 복일지 모를 쁠랙홀에 엉큼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상호는 병완을 따라 공지에 와서 첫날부터 목재를 메 나르는 일을 했다.     (부지런히 일하면 품삯이야 벌겠지. 아버지 치료비라도 벌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빚을 다 물고 둘째누나까지 데려 내왔으면 더좋구.)    상호는 이런 일루의 희망을 품고 목재를 메고 병완 등이 일하는 목수 간으로 들어갔다.    한편 그는 한길수가 품삯을 선대해준다니 믿음이 가지도 않았다.   (그 영감은 고뿔도 남을 안 줄 깍쟁이 아닌가! 어쩌다 선심을 쓸가?)      대패질하던 병완이 상호를 보고 히죽이 웃었다.     “첫날에 너무 무리하게 메지 말고 천천히 해라.”    “예, 많이 나르면 삯전이랑 많이 주겠지유? 그 깍쟁이 영감이, 정말 해 서산에서 뜨잖습둥?”     “글쎄, 그 깍쟁이 웬 영문인지 삯전도 푼푼히 주더라.”     상호가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나가는데 기준이 목재를 메고 들어섰다.     “아버지, 쉬엄쉬엄 일합소.”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나무를 들어 왼눈을 지긋이 감고 곧게 대패질했는가 보았다.     “에이구, 이런 목재로 어떻게 층집을 짓는다고 이래?”    기준이 볼라니 대패질한 나무에 나무벌레가 먹어 들어 간 자리가 있었다. 저쪽 나무통에 보니 톱질하다가 잡아낸 나무벌레가 몇이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아니, 저 벌레가 나무를 파 먹으면 집 기둥도 다 끊어나지 않겠습둥?”    기준의 눈이 다 휘동그래졌다.    병완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나무로야 기둥이나 대들보를 못하지. 몇 해 가지 않으면 요 놈의 나무 벌레 때문에 대들보가 끊어지고 말겠다.”     병완과 기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이런 나무야 마루나 깔았지. 별수 있습둥? 쯧쯧쯧.”    기준의 맥 빠진 말이다.    병완은 대패질한 나무를 훌 쥐어 뿌리였다.    “마루에도 어디 쓰겠니? 마루도 몇 참 못가서 꺼지겠다. 한 영감은 이런 목재를 주구서도 어찌나 재촉하는지 어디 쉴 새 있느냐? 이제 금방 기초를 쌓아놓았는데 올 가을 전에 3층짜리 목조건물을 다 지으란다. 그 것도 본 적도 없는 일본식 건물로. 헤이.”    병완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더니 계속 대패질을 했다. 두 팔이 힘을 쓸 때마다 두 팔에 근육이 불뚝불뚝 살아났다. 마치 성난 용 두 마리가 꿈틀거리는 상 싶었다.     기준은 아버지 옆에 다가서서 근심어린 말을 올렸다.     “아버지, 이 많은 목수 일을 어떻게 아버지와 몇 사람이 다하겠습둥? 나도 하랍둥?”    병완은 기준한테 근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글쎄, 넌 여편네가 막달이 돼서 몇 날이나 하겠니? 예산날이 언제쯤이라던?”      “아마 음력으로 시월 중순 쯤 이랍더구마.”     “음, 그럼 한달 푼히 있구나. 한영감하구 말해보고 그렇게 하자.”     창준도 한발 나섰다.     창준은 아버지를 닮아 훤칠하게 생긴 동생 기준과는 달리 보통 키에 호리호리하게 생겼다. 성격도 아버지를 닮은 동생 기준은 시원시원하게 툭툭 내쏘았지만 창준은 선비의 틀이 좀 난데다가 침착했다.     “아버지, 나도 목수 일을 배워서 하면 안 되겠습둥?”    병완은 대패질을 하다 말고 창준을 정색해 바라보면서 말리였다.     “얘, 넌 몸이 약해서 이렇게 힘든 목수일은 못한다. 삼부자가 다 목수 일을 하면 남들이 뭐라겠니? 저 놈들이 삯전을 많이 타자고 목수 일을 한다 할 게 아니냐? 기준은 어금의 결혼잔치준비를 해야 하지 않니? 그래 기준은 돈이 바쁜 것도 있다. 그러나 넌 급히 쓸 돈도 없는데 계속 잡일이나 해서 먹을 벌이나 해라.”    아버지 성미를 잘 아는 창준은 더 말해보았자 쓸 데 없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떴다.    이때 때마침 한길수가 중절모를 비뚤랑하게 쓰고 개화장을 휘두르면서 일본경찰국 국장 끼무라와 함께 목수 간에 들어섰다.    끼무라는 경찰국장에 헌병대 대장까지 겸하고 있어 우시장에서는 최고로 세도를 부리는 자였다. 사무실에 들어앉으면 국장사무를 보고 어디에 사고가 생기면 헌병대를 불러 출마하면서 헌병대 대장질을 했다. 이걸 두고 한길수가 아첨하는 말을 빈다면 "말을 타면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끼무라는 "낮에는 조선의 백성들을 못 살게 굴고 밤이면 미녀들을 껴안고 허리 불러지게 해대는 색마"였다.     끼무라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병완의 가까이에 다가섰다.     그러나 병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패질을 계속 했다.     한길수가 중절모를 벗어 바로 쓰면서 끼무라 국장에게 병완을 소개했다.     “끼 국장님, 아니, 에헴, 끼무라 국장님, 이 목수는 우리 공지 목수 일을 책임진 김 도감입니다.”     통역 류강철이 통역해주었다.     끼무라 국장은 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병완의 우람진 체구와 근육이 불뚝불뚝 살아난 팔뚝을 보았다.     그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긴상(김군), 하지메마스데(처음 보는데). 도조 요로씨꾸(잘 부탁하오).”      "뭐 하지마. 마슨다구?" 병완은 코수염쟁이를 피득 쳐다보고는 손을 잡지 않았다. 일어로 지껄이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본 사람의 손을 잡기도 싫었다. 그는 대패질을 계속 하면서 먼지 묻은 왼손을 쳐들어 손가락을 폈다 꾸부렸다 했다. 뜻인즉 손에 먼지가 묻어 악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핑계였다.      끼무라는 자존심이 상한대로 손을 되돌려가면서 대패질한 나무판자를 쥐여 어루만지었다.     “요로씨이(좋아)!”    끼무라는 엄지를 내밀었다.    류강철은 옆에서 한길수와 병완에게 통역해주었다.    “대패질을 잘했다고 치하하네. 감사를 드리게나.”    병완은 끼무라의 코 수염과 한길수의 번대머리를 번갈아보다가 대패질을 계속했다.    “빈 입만 놀리지 말고 삯전이나 푼푼히 달라고 하게나.”    류강철은 그 당돌한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한길수도 황급해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끼무라는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류강철을 돌아다보았다.    한길수가 제꺽 받아넘겼다.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통역하게나.”   그러자 류강철은 “고노 히도와 ‘간샤시마시다’ 또 이이마시다.( 이 사람은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고 되는대로 통역해 주고나서 한숨을 푸- 내쉬였다.    “요로씨이, 요로씨이(좇지, 좋아)!”    목수 간을 나서자 끼무라는 한길수를 돌아보고 말했다.    “금방 본 그자는 이름이 뭔가?”    “김병완이라고 부릅니다. 목수이름을 알아 뭘 합니까?”    끼무라는 도리머리 질을 했다.    “아니야, 그자는 장수같이 생겼어. 그런데 눈길이 곱지 않더란 말이야.”    한길수는 끼무라의 속심이 뭔지 몰라 우선은 병완이를 헐뜯어놓고 볼 판이었다.    “그 놈은 힘이 무 짐작이지만 우직하기로 뜨개 소 같은 놈입니다. 그래서 그 놈을 도감으로 시킨 겁니다.”    유심히 듣던 끼무라는 한길수를 정색해서 보면서 말했다.   “저런 우직한 놈은 소처럼 잘 얼려서 부려먹어야 하네. 자칫하면 뜨개 소처럼 뜰 게 아닌가?”    한길수는 끼무라 앞에서 연신 허리를 굽씬거리었다.    “예, 알았습니다. 끼 국장님, 아니, 끼무라 국장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뜨개소가 뜨기만 하면 가차 없이 메로 대가리를 까 부셔 뿌리를 뽑아버리겠습니다. 헤헤헤.”     “아니요. 내 말은 뜨개소가 뜨지 말게 잘 얼리라는 게요. 잘 얼려서 우리 황군의 경찰국 사무 청사를 잘 짓게 하란 말이요?”    “에- 예, 예, 알았습니다.”    자기까지는 아주 일본상전의 뜻을 잘 이해한 것 같았는데 틀릴 줄이야.    “예, 예, 먹을 풀을 푼푼히 줘서 뜨개소를 잘 얼립죠. 저 놈이고야 저 많은 인부들을 이끌고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지을 수 있으니까.”    끼무라는 몸을 한길수에게 돌리면서 물었다.    “저자가 인부들의 우두머린가?”    “아니, 내놓고 그런 건 아니지만 인부들이 저 놈의 말을 잘 듣지요.”      한길수는 병완을 헐뜯는다는 것이 그만 말이 빗나간 것을 알고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 감빨았다.      끼무라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목수 간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김병완이라? 알았네.”    끼무라는 나무를 나른다, 톱질을 해 원목을 끊는다하면서 들끓는 공지를 돌아 보고 나서 한길수가 이 많은 인부를 데려다가 일을 해재낀다고 일본말로 연신 치하했다.    그는 코수염을 매만지면서 한길수의 번들 이마와 우멍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상은 정말 능력이 있는 놈이야, 이번 일만 잘하면 자위대 대장쯤은 시켜야겠어.)    한길수는 상전의 치하에 어깨가 으쓱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끼무라는 한길수의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분부했다.    “한상, 이제 가을 전에 2층집을 다 지어야겠네.”    “품삯만 푼푼히 주면 저 놈들이 문제없이 지을 겁니다.”    강철이 통역해주자 끼무라는 히죽이 웃더니 한길수의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치면서 말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국을 짓는데 무슨 놈의 삯전이야?”    통역을 들은 한길수는 낯으로부터 번들이마까지 뻘겋게 번져갔다.    “난 이미 숱한 삯전을 주었소이다. 이젠 재물이 거덜 날 지경입니다.”    한길수가 손수건을 꺼내 번들 이마에 송골송골 돋은 식은땀을 뚝뚝 찍으면서 말했다.    끼무라는 군도자루를 바른 손에 바로 잡아 쥐더니 눈알을 부라리면서 한길수를 쏘아보았다.     “한영감, 대일본제국을 위해 죽으면 어떤가?"     한길수는 두 손을 쳐들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건 아니구. 저."     끼무라는 한길수를 쏘아보며 지껄여댔다.    "그까짓 몇 푼 안 되는 재물 그렇게 아깝소이까?”    한길수는 무릎이 다 나른해져 비칠거렸다.    그는  끼무라가 간을 빼가는듯 배 아팠다. 그러나 그는 발바리로서 머리도 빙글빙글 잘도 돌아갔다.    그는 용케도 발라맞췄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내 집을 팔아서라도 경찰국을 져야 하죠.”     그제야 끼무라는 한길수를 웃음기 담긴 눈길로 보면서 어조를 낮췄다.    “한상, 이제야 대일본제국의 충신답네그려. 껄껄껄.”    끼무라는 몇 대 안 되는 코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한상 가을 전에 집을 다 짓자면 이 인부들로는 안 되네. 더 모집해오게나.”    “예, 응삼을 운주동과 신흥동, 가마골에 보냈습니다. 근심하지 마시오.”    “응, 요로씨이(좋아), 우린 한상만 믿겠네. 올 가을에는 새 경찰국 사무 청사에서 사무를 봐야 하겠네.”    한길수는 끼무라 앞에서 연신 중절모를 벗어 쥐고 아픈 허리를 굽혔다.   한길수의 비굴한 모양을 목수 간에서 내다보고 병완은 건 가래를 퉤 내뱉었다.    “퉤! 언제부터 저렇게 구역질나게 번졌어?”    덕팔도 손바닥에 침을 뱉어 톱자루를 잡고 쓰르륵쓰르륵 톱질하면서 코웃음쳤다.    “흥! 더러워서. 보아하니 일본 경찰서나 파출소를 짓는 모양이오.”    최동욱은 자귀질하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지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고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큼직한 집까지 져 들고 안방주인행세를 할 예산이구만.”    “글쎄 말이네. 정말 삯전이 아니면 일본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지 않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삯전을 벌 일루의 희망을 품고 목수 일을 하다나니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판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프르러 다 올려다보였건만 일제 철발굽 아래 인간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37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 (30) 일루의 희망 댓글:  조회:581  추천:0  2024-03-22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7.일루의 희망     병완은 영월동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덕팔의 집부터 들렸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삯전이라도 좀 벌어 바쁜 목이라도 열게 하려고 일루의 희망을 품고 마을 사람들을 공지에 불러가려고 서둘렀다.     덕팔이네 낮다란 초가삼간은 목수네 집 같지 않게 지붕 중간이 푹 꺼져 있었다. 그만큼 안주인이 시시콜콜 앓는 이 집의 푹 꺼진 살림형편을 보여 주는 상 싶었다.     덕팔은 어찌나 살림형편이 구차하였으면 서른 살이 퍽 넘어서야 마대치기장가를 다 들었겠는가.     어느 날 밤에 덕팔은 병완과 함께 가마 골에 가서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과부네 집에 뛰어 들어가 딸 필순을 마대 안에 넣어 메다가 장가들었던 것이다. 후에 필순의 본가집 엄마가 알고 찾아왔을 때에는 필순이가 배가 남산만할 때였다. 그리하여 필순의 본가 집에서는 필순을 데리러 왔다가 덕팔이가 사람이 좋은데다가 기왕 쑤어놓은 죽을 밥으로 짓는 수가 없는지라 별수 없이 그만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병완이 삽작문을 열고 들어서자 점순과 철규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큰아버지!”     “오, 그래. 엄마는 더 앓지 않았니? 에이고, 이젠 점순이도 처녀티 나는구나.”    병완은 점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열네살인 점순은 정말 마치 시골에 방실 피어나는 물기 머금은 민들레 같았다.    병완은 마른기침을 깇으면서 윗방으로 들어갔다.     “아주버님 오셨소? 쿨룩쿨룩.”    아래 방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동인 필순이 겨우 일어나 앉으면서  인사했다.    병완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일어나지 마오."    그는 괴춤에서 1원 20전을 꺼내 철규의 손에 쥐어주면서 아내에게 주라고 아랫방 쪽으로 손시늉했다.    "이건 어디서 난 돈입둥?"    필순은 철규가 받는 엽전을 보고 반색했다.    "한길수 영감이 미리 삯전을 줘서 가지고 왔소이다."    필순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고, 그 구두쇠 어쩌다가 인심을 다 쓴다우?”    필순은 삯전을 보자 주름진 얼굴에 웃음기를 띠였다.      “전번에두 말했잖소? 우리 신설집 병관 형님을 찾아가서 병을 보이라는데. 어째? 치료비 모자라면 내 병관형님과 말할 테니까. 어서 가 병 보이오.”    병완의 말에 필순은 흰 수건을 동인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인정빚까지 지고 살겠습둥? 쿨룩쿨룩, 에헴. 차라리 내가 빨리 죽고 말아야지. 헌데 죽어지지 않는단 말입구마. 쿨룩쿨룩.”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제 초겨울에 집짓기 끝나면 덕팔이하구 같이 우리 형님을 찾아가 보이기오.”    한참 후 그는 우쭐 일어났다.     “아무튼 우리 돌아올 때까지 몸조리를 잘하오. 철규야, 밭일을 그만 두구 오후에 한 영감네 마차에 앉아 우시장에 가거라. 날씨가 싸늘하니까 꼭 아버지하구 네 이부자리를 가지고 가라.”     “예. 그러잖아두 강냉이랑 뜯어 들여오면 아버지랑 일하는 공지루 찾아가보자 했습구마.”    철규가 뒤더수기를 긁적이면서 씨물씨물 웃었다.   아랫방에서 필순은 넉두리를 해댔다.    “에이고, 그 강냉이를 집에 들여올게 얼마나 남았다구 그러냐? 한 영감한테 가져 가구나면 온 한해 농사를 지은 게 남는 게 있다구 그러우? 아예 우시장에 가서 한날에 쌀 서너근씩 버는 게 낫지.”     병완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점순을 바라보면서 문 밖으로 나와 짚신을 신었다. 그는 덕팔이네 앞날이 근심스러워서 땅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쩌면 마흔살을 갓 넘긴 아낙네 저렇게 못쓸 페병에 걸려 쿨룩거린단 말인가? 에이, 내  돌아오면 꼭 형님네 집에 데려다가 병을 보여야지.)     그는 점순과 철규의 배웅을 받으면서 최동욱의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최동욱의 아내 박경돈은 마흔이 넘었건만 의연히 옛날 고왔던 모습이 엿보였다. 그녀는 애를 낳지 못했기에 맨 날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쪼그리고 앉아 살았다. 자식이 없어서 적은 집식구들의 입을 건사하기 쉬울 것 같았지만 최동욱의 집은 살림이 피지 못했다. 그만큼 동욱은 집으로 들어오면 아내와 신경질을 썼고 술만 마시면 도깨비장물을 먹은 사람처럼 경돈을 때리곤 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병완이한테 혼 난적이 있었다. 정말 경돈은 이름처럼 돼지마냥 동욱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살았다. 그래서 경돈은 앓지 말라고 본가 집 아버지가 돼지라고 이름을 지은 것마저 탓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타고난 팔자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을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고 되는대로 살고 있었다.     병완은 동욱의 아내 박경돈의 처지가 불쌍해 한숨을 푸푸 쉬면서 개울을 건너 둔덕으로 올라갔다.     경돈이 마당에서 뭘 주섬주섬 주어 돌려놓다가 인사를 했다.     병완은  삽작문 밖에서 경돈한테 삯전을 건네주었다.     “이 돈 1원 20전은 이 집 나그네 엿새 일한 삯전이오. 이부자리나 저 한 영감 집에 가져다주오.”    경돈은 병완의 믿음직한 태산 같은 뒷잔등을 바라보며  뒤에서 푸념질했다.    “에이고, 이 놈의 집에 돈을 서 말이나 쌓아 놓은들 무엇에 쓴담?”     병완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개울물을 건너 창렬의 집에 터벅터벅 올라갔다.    (집집마다 읽기 어려운 경이 있다더니 이 마을에 어느 집엔들 답답한 일이 없겠는가. 덕팔은 아내가 앓고, 동욱은 자식이 없어 대사고, 창렬은 집기둥 같은 창렬이 폐병을 앓아서 근심이 태산 같지 않은가. 쯧쯧. 세월이 더러워서, 원.)     병완은 이번 걸음에 상호를 공지에 데리고 가려고 마음먹고 올리막을 성큼성큼 걸어올라갔다.     상호는 집울안에서 마른 나무장작을 팡팡 패고 있었다. 그는 나무장작을 주어 땔나무무지에 쌓다가  병완을 발견하고 허리를 펴고 환성을 질렀다.    “큰아버지, 우시장에 갔다가 언제 왔습둥?”   병완은 삽작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문안부터 했다.    “아버지랑 무사하냐?”  상호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아버지는 병이 괜찮습구마. 큰아버님이 준 은덩이를 가지고 신설집에 가서 약을 져다 대접하였더니 많이 낫습구마.”   이때 창렬과 명순이 웃으면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래, 공지에서 벌이가 되던가?”   창렬이 묻는 말에 병완은 창렬의 어깨를 다독이며 선선히 대답했다.   “밥벌이는 될 거 같네. 하루에 쌀 서너 근 품삯은 주더구먼. 한길수 어쩌다가 인심을 써서 제 돈으로 품삯전을 푼푼히 주더구먼.”   병완은 마루에 걸터앉아 두리번두리번 집안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어째, 은녀는 보이지 않소?”    창렬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다시 한길수가네 집으로 들어갔소.”    금방까지도 벙긋거리던 창렬의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병완은 그 모양을 보고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병완의 물음에 창렬은 그저 머리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명순이 문설주에 기대여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닦으면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 피뜩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소?”    그러나 창렬은 병완을 믿는 터라 넉두리를 했다.    “은녀는 부엌데기로 들어가고 가을에 감자랑 강냉이랑 다 한길수를 주고나니 새해 보릿고개를 넘길 것 같지 못하오.”    병완은 창렬의 손을 잡고 상호를 바라보며 간곡히 말했다.    “그럼 상호를 공지로 보내오. 삯전이라두 얼가간 벌면 살림에 보탬이 되겠는데."    창렬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상호는 도끼를 놓고 땀을 씻으면서 아버지를 보고 간청했다.   “나를 공지에 보내줍소. 겨울 죽벌이는 되겠는뎁쇼.”   창렬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어서 큰아버지를 따라 갈 차비나 해라.”   상호는 허리를 꿉썩 굽혔다.   "예. 알았습구마."   병완은 점심때가 된지라 엉덩이를 우쭐 들었다. 그러자 창렬이 손을 덥석 잡았다.   “이보게. 점심이나 잡숫고 가게나.”   “아니, 나도 집에 가서 점심 전에 이불 짐을 챙겨서 한 영감네 집에 가져가야 하네. 상호는 근심하지 마오. 내가 있으니까.”   병완은 창렬의 생강처럼 메마른 손을 놓고 삽작문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창렬은 병완의 등 뒤를 믿음에 찬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창렬이네 빚을 물고 은녀를 데려 내 오려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상호 등 숱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데리고 공지로 가는 길을 떠났다.      병완은 위망이 높아 우시장 부근에서는 병완의 말이라면 누구나 다 따랐다.  숱한  마을 사람들은 품삯을 준다는 말에 경찰국 사무 청사를 짓는 공지에 개미떼처럼 몰려갔다.
37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29)똥벼락을 맞은 번대머리 댓글:  조회:706  추천:0  2024-03-05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6. 똥벼락을 맞은 번대머리               친일 주구 한길수의 야망을 실은 마차가  일본 경찰서를 멀리하고  황홀한 꿈의 절주에 맞춰 귀딸까닥딸까닥 귀맛좋게 달린다.       마차가 보름달을 품에 안은 색마를 싣고 시골길로 한참 달릴 때다.      색마 한길수가 마차 위에서 무릎을 탁 쳤다.      “아차, 깜빡 잊었구나."     그는 응삼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 최구장의 서당방에 가서 공부한 적이 있지 않은가?”     “예.”      한길수는 응삼의 어깨를 탁 쳤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먼. 자네는 이 길로 먼저 최구장을 찾아가서 운주동 사람들을 동원해 달라고 하게나. 끼무라 국장이 다그치라고 하던데.”     응삼은 뱁새눈이 실눈이 돼 상을 찡그리었다.    "좀 살살 칩소. 간 다 떨어지겠습구마."     “잔말 말구 어서 운주동하구 신흥동, 가마골에두 돌아다니면서 인부를 모집하라구. 한 백명 있어야 돼. 알겠는가?!"    “백명이나?"    "백명이면 백명이지. 뭐 잔말이 그렇게두 많아?"    "예, 알았습구마.”    응삼은 땅방울같이 을러메는 길수 앞에서 잡소리 집어삼켰다.    마차는 둬 시간 달려서 운주동과 영월동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 갈림길에 들어섰다.    병수가 마차를 세우자 응삼이가 마차에서 노루새끼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응삼은 떠나가는 마차에 대고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꿉썩거렸다.    마차는 또다시 한참 제방둑길로 달렸다.     그때 병완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차를 세워. 병완이, 웬 일인가?”    한길수가 이상해했다.    득호가 말고삐를 채 달리는 마차를 세웠다.    병완은 제방둑길 옆으로 내려갔다.    “저 산등성이에 있는 감자밭에 좀 가봐야겠네. 제때에 거둬들이지 못해 멧돼지들이 파먹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    “음, 알았네. 자네도 마을사람들을 많이 동원해보게나.”    “그러지.”    병완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산등성이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마차는 계속 어두워져가는 강둑길로 달려갔다. 저 멀리 어슴푸레 마을이 다가왔다.    한길수는 고을에 기생년을 가득 두고서도 영월동에도 놀이개계집을 둘 예산으로 은녀를 한사코 자기 집에 끌어다 넣었던 것이다.   (성칠이, 그 새끼, 사냥해서 엄창렬의 빚을 문다고? 사냥하기 어디 그리 식은 죽 먹긴가? 쳇!)    순간 길수는 눈앞에 머리채를 치렁치렁 땋아 늘인 풍만하고 생생한 은녀의 반달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은녀는 정말 우리 산골 치고는 이뻐. 토스래기 감자처럼 복실복실 하구 사과처럼 사박사박한게. 고 계집 정말 통 채로 먹어도 비린내 나지 않을 거야. 으흐흐.)    그는 본처를 맏아들 철주와 함께 서울로 보내고 월선을 들여앉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월선은 어려서는 순수한 계집으로 써먹기는 좋았다. 그런데 마흔 고개가 가까워 가면서 우악스러워져 쩍 하면 한길수가 어데 가서 다른 계집을 데리고 노나 눈만 밝히고 심술을 부리는 것이었다.    (에참, 월선이 눈치가 보여서 어디 은녀를 데려와도 챌 틈이 있는가? 흥! 참 재수 없어. 처녀라면 눈독을 들이는 줄 알고 눈깔이 화등잔이 돼서 살핀단 말이야.)    순간 그의 눈앞에는 마름의 색시 춘실의 모습이 피뜩 떠올랐다.    (그래, 은녀를 삼키지 못하면 춘실이라도 데리고 놀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오늘 응삼이를 가마골에까지 가보라고 해놨으니 이 틈에 스리슬쩍. 으 흐, 흥.)    춘실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이모부가 세상 뜨면서 이모계부가 들어왔는데 그자는 색정광이었다. 이모가 없기만 하면 춘실에게 슬금슬금 다가들어 손을 잡고 지분거렸다. 춘실은 능구렁이 같은 이모계부의 능욕에 신물이 나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는 우시장의 거리를 헤매다가 그만 건달 놈들에게 걸려들어 혼난 적이 있다. 그 후 춘실은 건달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마구 굴렀다. 하여 이모네는 춘실이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스물다섯 살이나 연상인 응삼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춘실이, 그년이 걀쭉한 게 예쁜 거야. 으흐흐, 오늘밤에 놀아 볼가? 춘실을 건사하느라고 응삼이가 야단치라지. 이 어른 앞에서는 안 될 걸. 흥!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춘실이구, 은녀구 다 한가마에 삶아 먹을 거야. 으흐흐흐.)    그는 눈을 지긋이 감고 걀쭉한 춘실을 끌어안고 풍만한 젖무덤을 주물렁 주물렁 주무르는 꿈도 꾸었다. 그런데 불시에 그의 눈앞에 춘실의 몸에 휘감긴 숱한 사내들이 떠올랐다. 순간 역겨운 반감이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었다.    (춘실의 몸뚱이는 기생년들보다 더 더러워. 안 돼, 그년은 한물 지나간 년이야. 에- 퉤, 퉤!)     그는 다시 머리채를 치렁치렁 땋아 늘인 은녀를 떠올렸다.     (오, 은녀, 그 년 터질 것만 같은 하얀 젖무덤, 펑퍼짐한 엉덩이, 아이고 생각만해도 죽을 거 같애.그래, 춘실이 같은 건 열개 주고서도 못 바꾸지.)    은녀 하얀 허벅다리와 엉덩이를 련상하자 한길수는 그게 불끈 일어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성욕으로 온 몸이 찡 전률했다.    "오홍!"    그가 고양이 불알 앓는 소리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아이쿠!”   마차가 제방둑길 굽인 돌에서 그만 운주하 강바닥에 쿵 굴러떨어졌다. 하도 강둑의 팔뚝만큼 한 버드나무들이 굴러 떨어지는 마차를 조금 막아주었으니 말이지. 무슨 사고가 났을지 몰랐다.    마차가 굴러떨어지는 순간,  득호는 훌쩍 뛰어내렸다. 하지만 한길수는 마차와 함께 그만 사품 치는 차디찬 가을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마차 밑에 깔린 길수는 강물에서 허우적거렸다. 다행히도 가을이여서 강물이 얕았으니 말이지. 여름철 같았으면 길수는 영낙없이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득호는 제방둑아래로 느릿느릿 내려가면서 물었다.    “주인님, 괜찮습둥?”   한길수는 물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상을 찡그린 채 호통쳤다.   “야, 이 놈아, 아이고, 번마다 사고내니?! 아이고.”   득호는 이를 쁘드득 갈았다.   (개새끼, 항상 내 머리를 개화장으로 딱딱 치던 놈. 이번에도 썩어지지 않았구나. 내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게 한이야.)   “빨리 내 다리를 빼내라. 애고고, 아파 죽겠다. 사람을 살려라. 아이고, 나 죽는다, 죽어.”   득호가 느릿느릿 내려가 안간힘을 다해 마차 한쪽을 들었다.  그제야 길수는 마차 밑에 깔린 다리를 빼내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물에서 벌떡 일어난 말이 똥물을 쫙 내갈겼다. 그 통에 한길수의 번대머리는 말똥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에퉤, 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 등을 깬다더니, 에퉤, 퉤. 번마다 똥물 벼락이야. 이게 무슨 꼴이람?”   한길수는 양손으로 낯에 뛴 말 똥물을 쓱쓱 닦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개자식, 마차를 어떻게 몰았으면 이 넓은 길에서 강바닥에 처박힌단 말이냐? 에, 퉤, 퉤, 더러워라. 이전에도 딱 여기서 당나귀차를 번지더니. 이제 집에 가봐라. 네놈을 가만 놔두는가. 개 놈 새끼!”   득호는 손바닥에 물을 담아 길수의 번대머리를 빡빡 닦어주면서 중얼거렸다.   “죽었는가 했는데. 죽지 않았으면 다행입지.”   길수는 아픈데 약을 올려 주는 것 같아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개놈아, 내 죽기를 그리두 바랐느냐? 개자식! 말하는 거 보면 고의로 차를 번지지 않았어?!”   길수는 부아가 터져 똥물이 다 씻어진 번대머리로 득호의 면상을 들이받았다.   떵 소리와 함께 득호는 면상이 쥐가 밟아놓은 장마당이 돼서 강물 속에 썩박나무처럼 쓰러졌다.   “아이고, 주인님도, 살려주니까. 뜨개소처럼 뜨긴?”   길수는 강물에서 절버덕절버덕 걸어 제방둑으로 나가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개자식, 집에서 쫓아내지 않는가 봐라.”   길수는 제방 둑에 올라서서 발을 탕탕 구르면서 운주하강반이 다 떠나가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저 물에 빠진 마차를 어쩌느냐? 엉?”   득호는 마차에서 말을 벗겨내면서 대구했다.   “말이나 가져가고 마차는 내일 사람들을 데려다가 끌어 올려가지.”   한길수는 야단쳤다.   “마차를 잃어버리는 날엔 네놈의 목을 썩 베서 마차에 제사를 지내겠다.”   득호는 말을 제방 둑에 끌어올려가면서 계속 맞대구를 했다.   “무슨 장사가 있어서 마차를 강바닥에서 끌어다가 가져간다고? 해가 다 졌는데 내일 와서 끌어가지.”   “무슨 일이오?”  그들이 강바닥에 떨어진 마차를 내려다보면서 한참 찧고 박고 할 때다.  생각지도 않은 병완이 돌아왔다.   “저걸 어쩌느냐? 이 놈 새끼, 마차를 어떻게 몰았으면 강바닥에 처박혔다니까. 난 마차에 깔려 하마터면 죽을 번했네.”   병완은 강바닥에 절벅절벅 내려가 마차를 들여다보더니 소리쳤다.   “득호, 마차에 말을 메우게나. 내 뒤에서 밀게.”   득호는 제방 둑에 떡 서서 두덜거렸다.    “아무리 힘이 세도 말도 못 끌어올리는 마차를 어떻게 건지겠소? 내일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가 끌어올리기오.”    길수가 발을 탕 구르면서 득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냉큼 말을 메우지 못할까?”    득호는 병완이 마차를 바로 잡아 세워놓기를 기다려 말을 마차에 메웠다. 말이 앞에서 끌고 병완이 뒤에서 끙끙거리면서 힘써 떠밀자 마차는 힘겹게 한발자국한발자국 제방 둑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원래 경사도가 급하여 말이 그만 무릎을 꿇었다.    “말을 채찍으로 치게!”    병완의 고함소리에 득호는 말 잔등을 채찍으로 짱 내리쳤다. 놀란 말이 벌떡 뛰어 일어나면서 우로 껑충 뛰어올라갔다.    그때 병완은 마차 뒤끝을 번쩍 들어 둔덕 우로 떠밀었다. 마차는 제방 둑으로 올라갔다.    병완은 손에 묻은 모래먼지를 툭툭 털었다.   길수는 병완의 소 같은 힘에 혀를 끌끌 찼다.   “아직도 힘이 무짐작이군.”   길수는 분질러진 개화장을 들어 득호의 어깨를 탕 치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놈새끼, 네놈은 한뉘 머슴질이나 하다가 썩어질 놈이야. 죽을 번 한걸 생각하면 네 각을 다 뜯어 버려도 원수를 다 하지 못하겠다.”   “아이고, 주인님, 왜 이렇게 모질게 치오? 내일부터 내 마차를 몰지 못하면 누구 마차를 타고 명천에 갑둥?”   득호가 익살을 부리자 길수는 뺨을 찰싹 갈겼다.   “다시 마차를 몰 거 같아? 병수를 몰게 하면 했지. 네놈한테 마차를 맡겼다간 언제 깔려 죽겠는지 몰라. 흥, 가서 마구간이나 쳐내라.”     마차는 다시 어둠을 밟으면서 느릿느릿 달려 끝내 영월동에 이르렀다.   높다란 토성 앞에서 한길수는 개화장을 짚고 쩔뚝거리면서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한길수는 집대문 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엄살을 부렸다.    “여보, 아이고, 나 죽소.”   월선이 버선 바람으로 황급히 마루 아래로 뛰어내려 암범처럼 달려 나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영감, 어찌된 일이예요? 어데 아파요?”   월선은 한길수의 팔을 부축하다가 상을 찡그렸다.    “으, 차가와! 아니, 옷도 폭 젖었구먼요. 어떻게 된 거요? 또 허리 뚝 부러지게 기생년들하구 놀았는가요? 풍류를 즐기구 아픈 건 괜찮지요?”    한길수는 월선의 살진 팔에 몸을 기대면서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마차 번졌어. 아이고, 허리, 다리 다 아파 죽겠소. 아니, 팔만 부축해 되오?”    그러자 월선은 팔마저 활 놓아버리면서 발까지 동동 굴렀다.    “어데 가서 오입을 하다가 혼나고 집에 돌아와 여편네하구 생 지랄이야!”   길수는 절뚝거리면서 겨우 다리를 옮겨 디뎠다.   “그런 일 없어!”   그때 응삼의 집 방문이 배시시 열리였다.   응삼의 처 춘실이 걀쭉한 낯을 반쯤 드러내며 바깥동정을 살폈다. 은녀도 물동이를 이고 대문 안에 들어섰다.    한길수는 여자들을 보자 더 죽는 소리를 냈다.    “이 쌍년들아, 제 집 주인이 아파 죽어도 대갈도 내밀지 않느냐? 저런 못된 계집들이라고야. 아이고, 나 죽는다, 나 죽어.”   그제야 춘실은 끌신을 작작 끌며 달려 나와 한길수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   “아니, 주인어른, 어쩌다가 이렇게 모질게 다쳤어요?”    길수는 침방울을 튕기면서 고양이 불알을 앓는 소리를 쳤다.    “아이고, 저 득호란 녀석이 마차를 운주하에 처박았댔어. 아이고.”     “저런! 우둔한 놈. 그래 마차는 마사지지 않았어요?”    월선이 마차를 벗기는 득호를 흘겨보면서 묻는 말에 길수는 월선을 활 밀치면서 버럭 화를 냈다.    “저리 비켜! 내 상한 게 중요하냐? 그따위 마차가 중요해?”    그제야 월선은 혀를 홀랑 내밀었다.    “당연히 우리 주인님이 중요하지요. 해해해.”    월선은 부엌 문선을 잡고 서있는 은녀가 눈에 뜨이자 호통 쳤다.    “이년아, 멀쩡히 서서 뭘 해?! 주인어른을 부축하지 못하고.”    월선은 참말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는 격이라고나 할까.    은녀는 머리를 숙이고 바삐 춘실과 함께 한길수를 거들어 마루에 올랐다.   한길수는 겨우 걷네 마네 하면서 호통 쳤다.    “저리, 피하란 데도! 보기도 싫다.”    월선은 눈을 흘리기면서 영감의 팔을 활 놓아 버렸다.    (에구, 어째, 어떤 땐 내 궁둥이를 졸졸 묻어다니다가, 흥! 이젠 다 파먹은 김치 독이라고 헌신짝 버리듯 하려고? 흥, 바람둥이 개 버릇을 개를 떼 주겠어? 양태머리 체네 보니 또 싱숭생숭해나나 보지.)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한길수는 앓음 소리를 내며 쿵 쓰러졌다.    “아이고, 나 죽는다. 아이고, 내 다리야, 허리야! 여보, 젖은 옷을 벗기고 새 걸로 바꿔 입혀주오. 허리에 요도 깔아주오. 아이고, 저기 냉수도 한 사발 떠오오.”     월선은 밀창을 활 열고 들어와 두덜거렸다.    “어떤 땐 ‘저리 피켜!’라고 호통질치더니, 흥! 어떤 땐 시중이 끝이 없어? 쳇!”    월선은 영감의 젖은 옷을 와락와락 벗겼다.    한길수는 황급히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월선은 춘실과 은녀를 올려다보면서 호령햇다.    “잠간만 나갔다가 들어오너라.”    춘실과 은녀가 나가면서 미닫이를 닫아버렸다.    월선은 사타구니에 걸친 젖은 것마저 벗기고 고리궤짝 안에서 새것으로 꺼내 바꿔 입혔다. 그리고 고리궤짝 우에 얹어놓은 요를 와락와락 내리워 길수의 허리 밑에 펴주면서 두덜거렸다.    “에구, 한 둬달은 편안히 자게 됐구먼.”     한길수는 신음소리를 연신 내면서 요를 깔고 들어 누우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고, 남은 아파 죽겠는데 계속 악다구니질이야.”    월선은 젖은 옷을 훌 안아 미당이를 열고 활 내던졌다.    “은녀야, 그걸 씻어 말리어라. 이 바쁜 양반이 래일 입고 가야지.”    은녀가 젖은 옷을 들어 부엌 쪽으로 내려갈 때였다.    “아이고, 나 죽는다. 춘실아, 들어오너라. 은녀도. 얼른!”    한길수는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는 춘실을 보더니 우멍 눈에서 한 가닥의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춘실아, 여기 다리를 좀 주물러라. 아파 죽겠다.”   춘실은 감히 손을 척 대지 못하고 월선의 눈치를 올려다보았다.   월선은 또 빈정거렸다.    “주물러 줘라. 젊은 년의 손길이 더 좋은 모양이야.”    월선은 아예 안방에서 훌 나가더니만 미닫이를 쾅 닫아버렸다.    (허리와 다리를 상한 놈이 설마 일을 치겠어? 흥!)   월선은 안방에 대고 소리쳤다.    “은녀야, 넌 부엌에 내려와서 저녁상이나 차려라.”    “예.”    은녀는 위방에서 나와 부엌에 내려가 젖은 옷을 함지에 불러놓고 저녁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것부터 먼저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위방에서 색정광 한길수가 수작을 피우는 소리가 역겹게 들리었다.    “아이고, 좀 우로 올라가면서 꽝꽝 주물러라. 오, 오호, 그래, 어 시원하다.”    춘실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리었다.    “주인어른, 우리 집 사람은 함께 오지 않았어요? 아니면 우시장 공지에 있어요? 좀 우리 집사람을 많이 봐주세요.”    “그래, 근심하지 말라. 오늘 신흥동에 인부들을 모집하라고 보냈다. 에구, 아픈 데를 그렇게 주무르면 어찌나? 살살 만져라. 응, 응, 오호, 그래, 그렇게 살살. 그래. 아, 참 좋아.”    월선은 아래 방에서 위방에 대고 입귀를 비쭉거렸다.    (에구, 연놈들이 한창 논다. 음특한 놈, 허리 분질러져 가지고도 또 거기 근질거리는 모양이지.)    이때 안방에서 길수의 소리가 울렸다.    “거게 은녀 있냐? 춘실이 힘들어하니까. 이젠 네가 올라와 문질러라.”    월선은 듣다못해 위방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 저녁밥상을 차리는 애를 불러 가면 저녁은 언제 들겠어요?”     “안 먹어도 돼. 아파죽겠는데 저녁은 무슨 놈의 저녁. 아픈 데부터 만져야지. 으 흐, 시원하다.”     월선은 두덜거리면서도 은녀를 올라가라고 눈짓했다.    은녀는 행주에 손을 닦고 나서 위방 미닫이를 주르륵 열고 들어갔다. 이윽고 위방에서 한길수의 만족한 말소리가 들렸다.     “어, 시원하다, 시원해. 에구, 젊은 년의 손이 다르긴 달라. 보들보들한 게, 어, 시원하다. 시원해.”    “퉤!”     아랫방에서 월선은 위 방에 대고 하고 침을 뱉더니 입귀를 비쭉거리었다.    유흥을 즐기는 색마의 걸걸한 콧노래와 질투에 찬 아낙네 눈길이 반공중에서 부딪힌다. 보이지 않는 번개가 번쩍이더니 무수한 별찌가 마룻바닥에 쏟아져 내린다.
37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28) 고양이 쥐 생각 댓글:  조회:677  추천:0  2024-03-05
                   5. 고양이 쥐 생각              길수와 응삼은 웃음주머니 흔들거렸다. 둥글소 같은 병완이 모르쇠를 댈까 봐 은근히 근심했댔는데 일이 술술 풀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 했다.      길수는 막걸리 기운이 점점 피자  한시름을 턱 놓고 목침을 베고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져 굳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숱한 미녀들을 끼고 황제처럼 놀아대는 황홀한 꿈 속에서 자맥질하기 시작했다.     응삼은 몸채에서 나오자 사랑채로 나갔다.     문소리 들리자 춘선이 도도거리기 시작했다. 그 잔소리 오뉴월에 장독에 서리 낄 지경. ㅋㅋ    “병완이 뭐 그리 대단해 주인은 하느님처럼 모신대요? 흥, 제 애비라도 그렇게 모시지 않을 거야.”    “쉿-”    응삼이 뾰족한 턱으로 몸채를 가리키었다.    춘선은 눈을 흘기며 혀를 날름거리며 계속 도도도거리었다.    “듣겠으면 들으라지. 뭐? 당신 사사건건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독집 한 채도 주지 않는대요? 병완이 뭘 했다고 도감에다가 은덩이까지  얹어 준대요? 이른 아침부터 불러다가 상빈대접하면서. 흥.”     응삼은 여윈 주먹을 춘선의 머리 위에 쳐들었다.     “야, 이년아,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들어. 작작 떠들어라. 입이 성해있는 게 원수냐?”     춘선은 주먹을 피해 저쪽으로 드텨 앉으면서 계속 종알거렸다.     “에이고, 바보 같은 나그네. 여편네와나 우쭐거렸지. 한뉘 꿉씬거려도 차례진 게 뭔가요? 맨 함경도 머저리들이 산골에 처박혀서 노는 꼬락서니 보기도 싫어, 진절머리 나! 흥!”     춘선의 콧방귀에 응삼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었다.     “빌어먹을 년, 너네 남대치는 뭘 그리 잘 났냐? 굶어 죽는 거 주인이 데려다가 걷어 주고 이렇게 유식한 나그네한테 시집보내주니 어째 배때 쑤셔나니? 응?”    춘실은  “빌어먹을 년”이란 말이 제일 귀에 거슬리었다. 그건 길거리에서 빌어 먹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가 한길수를 따라 응삼에게 시집왔기 때문이었다. 응삼이 금방 “빌어먹을 년”이라고 했다고 그녀는 가마뚜껑을 들었다 쟁강 놓으며 가마뚜껑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댔다.      “에이, 빌어먹을 년.”      꼴보기 싫어 응삼은 길죽한 말대가리를 흔들면서 바깥에 나가 버렸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병완은 집 식구들에게 금방 한길수에게서 들은 말을 죽 했다.     성칠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아버지, 좀 심중하게 고려하시오. 한 영감이 무슨 일로 선심을 다 쓰겠습니까?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난 믿어지지 않습구마.”     그러나 병완은 자기 주견을 세웠다.     “밑져 본 전이라구 삯전만 주면 해 볼만 해. 어금의 혼수도 마련하구. 마을 사람들도 몇 푼 되지 않는 밭을 믿고 어떻게 명년 보리 고개를 넘기겠니? 이 좋은 기회에 좀 벌어서 쌀이나 사서 보태면 좀 좋아?"     성칠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러다가 한길수 삯전을 안 주면 어쩝둥?"    "삯전을 주지 않는 날부커 일하지 않지. 뭐.”    병완은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불 같은 성미였다. 그 성미를 알고 있는 성칠은 더 말리지 못했다.    병완은 마른기침을 하며 우쭐 일어났다.     “난 우시장 갈 차비를 하겠다. 너희들은 밭에 가서 감자나 파오너라.”     병완은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성칠을 되돌아보면서 부탁했다.     “며칠 사냥을 못하더라도 밭일을 해라.”    “예, 아무튼 우시장에 가서 몸조심 합소.”    성칠도 우쭐 일어나 바깥에 나갔다.    그는 외양간에 들어가 소를 풀어내다가 소 수레에 메웠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를 수레에 앉히고  감자밭으로 떠나갔다.          한참 후 응삼이 영팔을 데리고 헐레벌떡거리면서 올리막으로 올라왔다.     “김 도감, 주인어른께서 허리 아파서 오시지 못하고 분부를 전하라고 하시여 왔습네다. 헤헤헤.”     병완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세 귀 눈으로 응삼을 건너다보았다.     “금방 다 말했는데 또 무슨 잔소리 그리 많느냐?”     이번에는 영팔이 썩 나서면서 대답했다.     “저, 주인어른은 김도감이 혼자 우시장에 가지 말구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가랍디다.”     병완은 목수도구를 넣은 멜 통을 메고 둔덕 아래로 내려가면서 대답했다.     “알았네. 내 저기 덕성과 덕팔이, 창렬이, 동훈이랑 다 데리고 가지.”    응삼과 영팔은 기뻐서 병완의 앞에서 춤이라도 출 듯 껑충껑충 뛰어 개울물 쪽으로 달려갔다.     영팔은 징검다리를 단숨에 달아 건너갔다. 그런데 응삼은 징검다리를 토끼새끼처럼 뛰어 건너가다가 그만 돌을 빗 디뎌 그만 개울물에 풀러덩  빠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물병아리를 방불케 하는 응삼은 실 돌피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켰다. 이윽고 그는 저 멀리 뛰어간 영팔에게 손을 휘저으면서 토성 안으로 오소리처럼 쫑드르르 달려갔다.     병완은 그 우스운 모양을 보고 피씩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먼저 덕팔네 집을 찾아갔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덕팔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시름시름 앓는 노친으로 하여 속을 여간만 태우지 않았다. 며칠 전에 병완은 덕팔에게 둬 냥짜리 은덩이를 가져다주면서 노친을 데리고 운주동에 있는 신설 집 자기의 관준 형님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병완의 형님 병관의 맏손자 관준은 이조말년 궁정의 어의였던 할아버지 김승중의 한의술을 물려받아서 어진간한 병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도 척척 진단해 처방을 떼였는데 약이 병에 말을 참 잘 들었다. 그리하여 병완이가 한번 관준 손자를 찾아가보라고 하는데도 고지식한 덕팔은 말을 들을 염을 하지도 않았다. 하긴 덕팔은 천생 남의 빚을 지거나 공짜를 얻어먹으면서 살지 않으려는 외고집쟁이였다. 그는 병완이 공짜로 주는 은덩이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관준 의사를 찾아가 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이번에 덕팔도 돈을 벌어 노친의 병을 치료하게 해야겠는데.)     병완은 이런 생각을 구을리면서 개울 건너편에 있는 덕팔의 낮다란 초가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때마침 덕팔이 넓은 어깨에 통나무를 메고 뒤울 안에서 앞마당으로 나왔다.     병완은 삽작문을 열고 울안에 들어서면서 덕팔의 어깨 우에서 통나무를 받아 내려놓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시장에 좋은 부업거리 생겼네. 우리 함께 가 보기오. 한두 해 일하면 노친의 치료비두 벌게 아닌가?”     덕팔은 통나무를 턱 깔고 앉더니 숨을 헐떡거리면서 자세히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가을걷이도 하지 않고 우시장 한끝으로 가겠소?”    병완은 덕팔의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담배물주리를 꺼내 담배를 꿍꿍 다져넣고 붙여 물었다.    “한길수가 우시장에 가서 층집짓기를 맡아 왔다오.”    덕팔은 네모 번듯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쳇, 한길수를 믿고 돈 벌자구?  한길수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못하겠소. 죽게 일해서 그 놈이 좋은 노릇을 하자고? 쳇!”    “길수는 달마다 품삯을 딱딱 주겠다고 했소. 한마을 사람들인데 선전을 줄 수도 있다고 하더구먼. 품삯을 주지 않으면 돌아오면 되지. 뭐?”    병완의 말에 덕팔도 담배를 붙여 물더니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그럼 한번 가 본다? 가을은 철규와 점순에게 맡기지.”    이렇게 돼 병완은 덕팔을 데리고 떠나게 됐다.     병완과 덕팔이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개울을 건너 둔덕에 올라서는데 창렬이 허리를 구부정하고 나왔다.     “형님네는 어디로 가오?”    병완은 걸음을 멈추었다.    “우시장에 집짓기부업을 하러 가는 길일세. 그런데 몸은 어떤가?”    덕팔도 시시콜콜 앓는 창렬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창렬은 삽작문을 열고 나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 간신히 말했다.    “그래도 병완 형님이 준 은덩이로 약을 지어다가 먹었더니 많이 낫소.”    그는 덕팔한테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혹시 흙짐이나 멜게 있으면 나도 좀 부르오.”    병완은 생강처럼 바짝 마른 창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동생, 이 몸으로 어데 가서 일을 한다고 그러오. 집에서 병 치료나 잘하게나.”    창렬은 바깥으로 나오면서 부탁했다.   “저 상호라도 좀 데리고 가면 좋겠는데.”    은녀와 상호가 삽작문을 나서더니 허리를 굽히면서 이구동성으로 곱게 인사했다.     병완은 상호를 대견스레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얘들, 이젠 어른이 다 됐구나.”     창렬은 집안형편이 가난하여 겨우 늦장가라도 들어서 얻은 은녀와 상호를 바라보면서 희죽이 웃음을 지었다.     순간 그의 이마에 난 밭고랑 같던 주름살이 쭉 펴졌다.     “우리 먼저 가서 품삯을 제대로 받게 되면 상호도 데리고 가지.”         병완과 덕팔은 곧장 토성 안에 있는 길수네 팔간대청으로 들어갔다.     그때 대문 앞에 진작 한길수와 응삼, 영팔이 진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병완은 걸어 나가 문안부터 했다.한 영감,  밤새 허리 아파 고생이 많았겠소.”      한길수는 반색을하였다.    “자네가 일하러 가겠다니 허리 병이 뚝 떨어 기는 것 같네. 흐흐흐.”    뒤이어 그는 개화장으로 땅을 짚고 서서 말했다.    “아무튼 우시장에 가서 응삼과 합작해 일군들을 잘 관리해서 집짓기를 잘하게나. 내 여기서 마을사람들을 더 동원해가지구 며칠 후에 따라가겠네. 그럼 어서 길을 다그치오. 난 집에 들어가 좀 누워야겠소.”     병완은 덕팔, 최동욱과 함께 병수가 모는 마차에 앉아 우시장으로 떠났다.     개화장을 짚고 대문어귀에 선 한길수의 우멍 눈에는 살기에 찬 음흉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은녀를 당장 빼앗아 와야지. 아니야, 괜히 병완과 성칠이 펄쩍 날뛰겠다. 그러면 집짓기가 끝장나고 내 창창한 앞길이 막힐게 아닌가? 안되지. 꾹 참아야지. 내가 이 영월동과 운주동을, 아니야, 온 상우남면 나가서 우시장까지 쥐락펴락 할 때는 은녀 하나뿐이겠는가? 온 우시장의 계집들을 몽땅 내 집에 잡아와야지. 으흠!)     한길수는 제 좋은 궁리를 하면서 대문어귀에서 떠나 집울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병완이네는 경찰국 대문 앞에서 총창을 비껴든 일본 헌병들에게 몸수색부터 당했다. 병완은 머리가 썩둑 잘리어 나간 것 같은 일본 놈 군모 밑의 짧은 머리를 보니 사람 같지 않아 보이었다.    응삼이 무슨 종이장을 꺼내 일본놈 한테 건네고나서 뭐라고 손방아를 찧어댔다. 헌병은 종이장과 응삼이네와 병완이네를 번갈아 훑어보더니 응삼을  2층집 대문 안에 들어가게 했다.    한참 후 응삼이 강철을 데리고 나왔다. 강철은 병완을 보고 아는 척 했다.    “아니, 이거 퍽 눈익은 분이구먼."    응삼은 실돌피 같은 허리를 쭉 펴고 병완을 춰 올렸다.    "이 분은 씨름장수 김병완 어르신님이네."    "오- 글쎄 면목 있다니까."    강철은 병완의 두툼한 손을 잡아 흔들었다.    "장사님, 반갑습니다.”    수다스러운 그 인사수작에 병완은 그저 눈인사를 할 뿐이었다.      응삼이 어색한 기분을 깨려고 병완과 강철의 앞에서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꼽싹거렸다.      “김령감, 이 양반은 내 동창생 류강철입구마. 이전에 운주동의 최구장에게서 천자문이랑 함께 배운 동창생이오. 류 선생은 일본까지 유학갔다가 와서 우시장에서 아주 갑부로 됐지요. 그래서 이번에 3층집을 짓게 됐소.”      강철은 없는 배를 쓱 내밀고 어깨가 으쓱하여 부자인 척하면서 거들먹거렸다.      “집만 잘 지읍시우. 삯전은 근심하지 맙소.”     사실  일본 경찰국을 짓는 일이라면 병완이랑 목수를 그만 둘 것은 불 보듯 빤했다.  그래서 응삼과 한길수는강철의 집을 짓는다고 거짓을 꾸며댔던 것이다.     병완은 그 놈들의 수다에 시끄러워 묵묵부답하고 돌부처처럼 덤덤히 앉아 있었다.     그는 류강철이 일본 헌병군복을 입은 것을 보고 눈에 거슬렸다.     (이 놈도 일본 사람들의 덕분에 갑부로 된 게 아닌가?)     류강철과 응삼은 병완 등을 마차에 싣고 경찰국에서도 한 1리쯤 떨어진 뒤 산 쪽으로 달려갔다.      둔덕진 곳으로 올라가 한참 걸으니 평평한 땅이 나졌다.      류강철은 모자를 벗어 땀을 씻으면서 가죽장화를 신은 발까지 탕탕 구르며 지껄여댔다.     “바로 이곳이네. 풍수쟁이를 청해 우시장 주변산수를 답사시켰지. 풍수쟁이는 이곳이 바로 우시장에서 집을 지을 천하제일 명당자리라더구먼.      병완이 그 곳을 둘러보니 참말로 명당자리인 것 같았다.       동쪽과 북쪽에는 기운봉에서 뻗어 내려 온 깎아지른 듯 험산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서있었다. 서쪽에는 남대성하 지류가 흘러 지나가고 있었으며 둔덕아래 남쪽으로는 우시장 시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참말로 우시장 시내에서 개미새끼가 기어가도 손금 보듯이 환히 살필 수 있는 천혜의 군사요충지였다.      병완은 류강철을 피뜩 곁눈질해보며 속궁리했다.      ( 저눔이 갑부는 갑분 모양이지. 무슨 돈으로 3층집이나 짓는단 말인가?)      병완은 류강철에게 “그래 집 도본은 어디 있소?” 하고 물었다.      류강철은 없는 배를 쑥 내밀고 날카로운 낯을 이쪽에 돌렸다.       “도본이라니?”    그는 의아해 병완이를 돌아다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머리를 꺼떡거렸다.    “아, 설계도를 그러겠구먼. 근심하지 마시오. 이제 일본 설계사가 설계도를 가지고 올겝구마.  오늘은 공지나 돌아보고 푹 쉽소. 요 사람들로야 어떻게 일을 시작하겠습둥?”    그러나 병완은 조급해났다.     “이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우린 밭에 강냉이하구 감자를 걷어 들이지 못하고 널어 놓은 채 하루 품삯이라도 더 벌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요.”    대뜸 붉으락푸르락해 지는 병완을 보자 강철이 쪽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눈알을 굴리면서 떽떽거렸다.    “이 영감이, 어느 안 전이라고 함부로 고함질인가? 품삯은 무슨 엿 먹을 품삯이란 말인가? 일하기 전부터 품삯을 달라고? 흥!”     응삼은 실눈으로 병완의 노한 얼굴을 살피더니 손으로 강철의 허벅다리를 스리슬쩍 툭 치며 뱁새눈을 찔끔해보였다.     “김 도감, 노여워하지 마오. 오늘 놀아도 삯전은 우리 한 어른께서 다 주오. 삯전 근심은 하지 마오. 오늘은  이제 일군들이 오면 그들을 지휘해 먼저 토성을 파면 되오.”    덕팔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강철과 병완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근심에 찬 그림자가 얼굴에 흘러지나갔다.    강철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씨근덕거리다가 발로 돌 쪼각을 탁 차버리고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저 멀리로 가버렸다.     바빠 맞은 응삼은 강철을 따라가 팔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나무람했다.     “자네 어째 일을 망치자고 이래? 지금 일손을 하나 얻어 온다는 게 하늘에 별 따기인 걸 모르는가? 우리 주인어른이 손이 발로 되게 빌어서 데려온 일군들이네. 우리 주인어른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품삯을 주기로 했네.”        강철은 침까지 퉤 내뱉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국을 짓는데 무슨 놈의 삯전인가?”    “언성을 좀 낮추게나. 저 영감들이 듣겠네. 성질이 불 같아. 벽이라도 마구 박차고 나갈 령감이야.”    응삼은 뱁새눈으로 힐끔 저쪽 병완을 훔쳐보았다. 다행히도 병완과 덕팔도 뭐라고 쑤근거리면서 이쪽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덕팔은 병완에게 근심을 털어놓았다.    “저 일본 군복을 입은 치머리가 삯전을 정말 주지 않으면 어쩌겠소?"    "삯전을 주잖으면 그만 둘판이지.뭐."     "저 말하는 거 보오. 무슨 경찰국을 짓는다고 하지 않소?”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못 들었겠지. 우시장에 경찰국이 있는데 또 무슨 경찰국을 짓는다고 그러오? 우리 처음 들렸을 때 일본 헌병이 총창을 꼬나들고 보초를 서던 대문 안 집이 바로 일본경찰국이라던데.”    그러나 덕팔은 계속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살림집터가 이렇게 엄청나게 클 수 있소?”   병완도 반신반의했다.    “글쎄 일본 사람을 초과하는 부자가 우시장에 있을 수 있소?  이제  도본이 오면 대개 알 수 있겠지.”     “삯전을 주기만 하면 뭘 짓던지 관계는 없지.”     덕팔은 더부룩한 구레나룻을 매만지면서  땅바닥에 누워있는 너럭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품삯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 한 영감과 따지겠소.”     병완의 그 말에 덕팔과 동욱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때 응삼과 강철은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먼지를 뽀얗게 일구면서 달려가 버렸다.      한참 후 류강철과 응삼이 일본 군복을 입은 자와 함께 마차에 앉아 달려왔다.     마차에서 내린 일본 사람이 누런 종이 장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하자 류강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응삼이 병완과 덕팔을 불렀다.      그들은 일본 설계사의 설계도대로 먼저 동서가 한 150미터, 남북이 한 100여미터 되게 말뚝을 박고 하얀 실을 쭉쭉 쳐 놓았다.      한참 역사를 하고나니 해가 중천에 둥실 걸렸다.      응삼이 우시장에 내려가더니 뭔가 한보자기를 사들고 왔다.     “자, 풍찬노숙하면서 우리 동창의 집을 짓느라고 고생들이 많소. 오늘은 이걸로 점심과 저녁이라고 먹소.”     응삼이 보자기를 풀자 누런 강냉이떡에 마늘짠지였다. 병완이네는 집을 떠난 이상 별수 없이 그들은 강냉이떡도 맛있게 먹었다.     덕팔은 강냉이떡을 한입 뚝 떼여 씹으면서 또 근심을 털어놓았다.      “이제 해가 저물면 밤에 어데서 자오?”     응삼은 뱁새눈을 한껏 크게 뜨면서 대답했다.     “옳소. 오후에는 저기 가져온 재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초막을 짓소.”     병완 등은 점심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먼저 토성을 쌓기로 한 북쪽에 인부들이  들 수 있는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해질 때까지 경사진 둔덕을 파고 반토굴 움막을 대충 지어놓았다.       엿새 후에 한길수가 직접 마차를 타고 공지로 찾아왔다. 그는 개화장을 짚고 다 지어놓은 인부가 들 움막을 둘러보더니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병완이, 수고 많았네. 먼저 엿새 품삯을 주겠소.”     보통 하루품삯이 8전이나 10전이면 대단했는데 한길수는 한마을의 사람들이라면서 20전씩 주는 것이었다.     병완은 한길수를 보고 “허리는 괜찮소?” 하고 문안부터 했다.     한길수는 허리를 만지면서 상을 찡그렸다.     “아직도 조금만 힘써도 아프오.”     병완은 대통을 꺼내 담배를 쑤셔 넣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좌우간 품삯을 주니 고맙소. 그런데 어째 류 통역이 삯전을 주지 않고 한영감이 주오?”     한길수는 그들이 든 움막 구들에 걸터앉더니 둘러댔다.     “류 통역이 돈이 바빠서 그러는데 좀 기다리오. 그건 그만두고 병완이, 자네는 아직 목수 일을 할 게 없으니까 토성을 쌓는 일에서 손을 떼게나. 우리 마을 일군들로는 근본 이 집을 명년까지 다 짓지 못하오. 운주동과 신흥동, 가마골로 나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일군들을 더 모집해 와야겠네. 자네 아들과 손자들까지 다 데려오오.”      한길수는 우멍눈으로 묵묵히 앉아있는 병완의 눈치를 힐끔 살피였다.     거부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자 뒷말을 이었다.     “거 최구장이 아들이 여럿이 되던데. 사돈인 자네가 나서서 좀 동원해보게나.”     병완은 귀가 솔깃해하겠는가 하였는데 병완이 벌컥 성을 낼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한영감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얕잡아보기 시작했소? 내가 그까짓 도감을 바라고 여기로 왔는가 하오? 삯전이라도 벌어서 맏손녀 혼수 감이나 마련할 까고 온 게지.”     한길수는 번들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난 땀방울을 팔소매로 뚝뚝 찍었다.     “허허허, 김 영감, 내 말을 잘못해 미안하오. 품삯은 꼭 줄 테니 좀 동원해주오. 하루에 쌀 너 근씩 버는데 좀 좋아서 그러오? 한 일 년 일하면 농사 질을 하기보다 훨씬 낫게 벌게 아니오?”     “에헴!”     병완은 마른 기침을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품삯만 주면 누군들 일하러 오지 않겠소?  동원해 보지.”      “알았네."    한길수는 개화장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이유, 요 허리가 아파서.”라고 하면서      한길수는 움막 앞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병완을 되돌아보았다.     “내 마차에 앉아 집에 갔다가 오오.”      병완은 덕팔과 동훈을 되돌아보면서 작별을 고했다.     “내 집에 갔다올테니까. 마가을 추위에 몸 주의하게나.”     덕팔은 “형님, 잘 갔다가 오오. 우리 집사람과는 무사하다고 잘 전해주오.” 라고 말했다.     그는 삯전 1원 20전을 병완한테 건네주면서 부탁했다.     “내 노친한테 전해주오. 삯전을 버는데 철규도 오라고 전해주오.”      그러나 최동훈은 자식을 하나도 보지 못해 그저 삯전만 병완의 손바닥에 달랑 올려놓았다.      “이거나 우리 집 사람에게 주오.”     병완은 품삯을 잘 건사한 후 한길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서산을 바라보니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서 땅에 얼굴을 비빌 지경이었다. 마차는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산둔덕을 내려 영월동을 바라고 달려간다. 비굴한 친일 아첨군들의 아부가 마차 뒤를 쫓아가며 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코노래를 흥얼흥얼 부른다.
37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27) 꼬임수 댓글:  조회:659  추천:0  2024-03-05
                   4. 꼬임 수        한길수는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응삼의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비틀비틀 집에 들어섰다.    월선과 후처의 아들 선주는 마중 나왔다가  무슨 큰 봉변을 당하기나 한 것처럼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번대머리 뒤에 둬자나 되던 머리채가 보이지 않찮는가.     “아니, 영감, 그 몇 대 안 되던 머리털마저 어쨌어요? 홀랑 벗어진 게 무슨 꼴인가요?”    월선의 말에 한길수는 손을 내저으면서 돌려 맞췄다.     “모르는 소리를 작작 해. 이 어른은 일본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구 총도감을 바꿔 온 거야. 이후에 누구든지 머리채를 자르고 하이칼란지 하이딸인지 해야 된돼.”     생벼락 같은 소리에 월선과 선주는 입을 함박만큼 쫙 벌렸다. 그들은 머리채를 감싸쥐고 덴덥해 눈마저 휘둥그래졌다.     “철주넨 왜 보이지 않느냐?”     월선은 어둠 속에서 눈을 흘기면서 선처 아들을 헐뜯었다.     “서울로 떠났어요. 뭐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합디다.”     “그래? 그래도 그 녀석이 장차 큰일 할 놈이야. 지금 세월에 일본말을 배워 두는 게 낭패 없어. 이 골짜기 둼 무지에 박혀서 애비 벌어 놓은 걸 받아먹겠어? 그 녀석 둘째 놈보다 썩 나아!”    그 소리에 월선은 두덜거렸다.    “영감도, 정말 손바닥과 손등이 다르다고 어쩌면 내 난 새끼를 그렇게 낮잡아 말해?”     한길수는 허리를 만지며 상을 찡그리면서도 끼무라 국장의 위엄스러운 목소리가 귀전에 들리는 상 싶었다.     “내일부터 목수와 인부를 구해서 경찰국청사를 짓는 일을 시작해야겠네.”    길수는 방에 들어가 누웠다가 앓음 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기여 일어났다.    “게 응삼이 있는가? 고새도 참지 못해 여편네 궁둥이를 쫓아갔는가?”    온 울안을 울리는 그 고함소리에 누가 태만하겠는가.    응삼은 끌신을 작작 끌고 부랴부랴 본채에 들어왔다.    “주인님, 찾았습둥?”   응삼이 다급히 마루에 올라왔다.   “앉게. 긴히 의논할 일이 있네.”    길수는 등잔불 밑에 베개로 왼쪽옆구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기대 누워 우멍눈으로 응삼을 마주보며 말했다.   “끼무라 국장은 내일부터 목수와 인부를 끌어다가 경찰국청사를 지으라고 하였네. 그런데 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목수는 저 병완을 초과할 사람이 없는데. 그 뜨개소 같은 놈이 고분고분 말 듣겠는가? 숱한 인부를 며칠 새에 어떻게 끌어간단 말인가? 여기 영월동의 열대엿 살 이상 되는 사람을 몽땅 끌어가도 3층집을 짓기에는 엄청나게 모자랄 텐데 말이야. 아이고,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한길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응삼은 옆에서 길쭉한 박대가리를 기웃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얍슬한 입술을 나불거렸다.   “병완은 억지로 우격다집해선 안됩구마. 우시장에 절대 끌어가지 못합구마. 얼려 데려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삯전을 주겠다 했습둥?"    “삯전 같은 소리를 다하네. 남의 나라두 통 채로 빼앗아간 그 도적놈들이 삯전을 주자겠는가?"   응삼은 한숨을 푸 내쉬었다.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을 욕하지 마옵소. 말말 간에 그런 말이 불쑥불쑥 나가면 큰 야단이 나겠습구마.”     “그래, 그건 네 말이 옳아.”    길수가 혀로 입술을 감빨면서 수긍했다.    응삼은 뒤이어 이런 수를 내놓았다.   “이렇게 하깁소. 좋은 청부업거리가 생겼는데 삯전도 푼푼히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살기 바쁜 가난뱅이들이 좋다고 왁 쓸어 갈 겁니다.”     그제야 한길수는 일어나 상을 찡그리면서 허리를 붙잡았다.    “그래도 자네 그 박대가리에서 잔꾀가 잘 나오네그려. 허허. 아이고, 허리야.”      응삼은 바삐 길수를 부축해 눕혔다.     “근심맙소. 이 응삼이 있는 한 경찰국청사 아니라 온 우시장을 다시 지으라고 해도 근심할게 없습구마. 인부가 모자란다는 구실로 주인어른은 운주동과 신흥동, 가마골까지 온 상우남면을 다 관할하게 해달라 하깁소.  인부도 채우고 장차 일이 잘 되면 면장이나 군수로 승진하는데 길을 닦아놓는게 아입둥?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이지요. 헤헤헤.”     한길수는 응삼의 말에 귀맛이 당겼다.    “그래? 그래. 내가 면장이나 군수가 되면 자넨 꼭 아전이  될 수 있어. 허허허.”    이튿날 기운봉 쪽에 해가 두둥실 뜨기 바쁘게 응삼은 영팔을 데리고 병완을 부르러 떠나갔다.     그들은 여우들처럼 징검다리를 홀짝홀짝 뛰어넘어 개울물을 건너 둔덕우로 올라가면서 보니까. 식전아침부터 뭘 찧는지 물레방아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병완은 마당에서 도끼로 나무를 팡팡 패다가 응삼과 영팔이 다가오자 패놓은 나무토막들을 한쪽에 주어 쌓아놓았다.     “영감, 주인어른이 도감어른과 긴히 상론할 일이 있다고 모셔오라 합더구마.”    “또 무슨 일로? 혹시 은녀를 데려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응삼은 허리를 꼽싹거리었다.     “예, 아닙니다. 가보면 알겁꾸마. 좋은 청부업거리가 생겼습꾸마. 어서 가시죠.”    그는 가슴츠레한 뱁새눈으로 병완의 눈치를 살폈다.    “좋은 청부업거리면야 자네들이나 가서 할 게지. 당장 감자도 파구 강냉이도 뜯어 들여야겠는데 바쁜 사람을 찾아와 뭘 하오?”    응삼은 진작 병완이 이렇게 나오리라고 진작 짐작했었다.     그는 웃음을 낯에 게 바르면서 지껄였다.    “김도감어른, 우리 주인어른은 도감어른하구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자고 은덩이도 드리고 은녀도 내보내 주었소. 지금 주인어른이 허리를 상해서 오지 못했는데 한번 가보면 어떻습둥?”    병완은 너무 한감이 들어 도끼를 스르르 놓았다.    “그래, 주인어른이 모질 상했는가?”    “예. 당나귀차 운주하에 떨어져 허리를 모질 상했소.”    응삼의 말에 병완은 나무토막을 모아놓고 일어서면서 “가봅세.”라고 했다.   성칠이가 집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아버님, 어데로 갑니까?”    병완은 되돌아보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한 영감이 허리를 상했다는데 피뜩 가보고 오겠다."    물레방아를 찧던 성희와 하옥은 떡가루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둔덕 아래로 내려가는 병완의 뒤 잔등을 바라보면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병완이 토성 안 대문에 들어서자 한길수는 우멍눈으로 쏘아보며 속으로 윽별렀다.   (저 놈을 그저 방망이로 뒤대가리를 쳐 죽였으면!)     그러나 그는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짐짓 마루에까지 나가 마중하며 아닌 보살을 떨었다.     “김 도감, 어서 오오. 아이유, 내 허리 아파서 땅바닥까지 나가 마중하지는 못하겠소. 어서 올라오오.”    병완은 마루에 성큼 올라서며 문안부터 했다.     "허리를 모질 상했다던데. 어떻소?”      길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병완의 손을 잡고 비틀비틀 웃방으로 들어갔다.    “김 도감을 보니 허리 병이 낫는 것 같네. 허허허. 아이유.”     한길수는 입술에 게발린 소리를 하다가 앉으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응삼이 달려들어 와 한길수를 부축하여 앉혔다.     병완은 앉자마자 머리채를 싹둑 잘린 번대 머리를 마주보면서 놀라 했다.     “아니, 머리채는 어쨌소?”    한길수는 번대 머리를 손으로 쓱 씻어 올리면서 지껼였다.    “시원한 게 너무나 좋아서? 우시장에 갔다가 일본 사람들 신식을 따라서 머리채를 잘라버렸소.”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청부업거리가 생겼기에 이른 아침부터 나를 불렀소? 난 할 일이 많으니까 얼른 말하오.”    그러나 길수는 정지를 내다보면서 소리쳤다.     “여보, 김 도감이 왔는데 술상이나 차려 가져오오.”    병완은 넉가래 같은 손을 저으면서 사양했다.     “이러지 마오. 한 영감, 난 가을이 돼서 일이 바쁘오. 어서 할 말이나 하오.”     그럴수록 한길수는 늦장을 피웠다.     어느 결에 월선이와 둘째며느리 남복금이가 술상을 맞들어 들여왔다.       “아무리 농번기라도 술이야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기요. 자, 한잔 받소.”     한길수가 놋 술잔에 막걸리를 부어 권하자 병완은 어찌는 수가 없어 받고 길수 앞에 놓인 놋 술잔에 한잔 따랐다.     길수는 술잔을 들고 수작을 피웠다.      "병완이, 우린 씨름판에서 싸움 끝에 정 든  형제간이 아니고 뭐요?  자, 한잔 들기요.”    병완은 마지못해 놋 술잔을 들어 댕그랑 마주 치고 굽을 쭉 냈다. 길수는 곁의 응삼에게도 한 잔 부어주었다.     응삼은 속으로 슬그머니  병완을 질투하였다.    (네깐 놈이 주인어른을 도와 뭐 해준 일이 있느냐? 상대접을 받아? 흥!)    그는 한뉘 슬슬 기면서 고생한 자기를 푸대접하는 주인어른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쓸개가 다 쓰려났다. 그는 그런 질투와 원망을 놋 술잔에 담아 단숨에 쭉 들이켰다.     막걸리가 서너 순배 돈후에야 한길수는 무거운 입을 떼였다.     “이보게, 김 도감, 이번에 내 좋은 청부업거리를 얻어놨으니까. 우리 마을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 예산이네.”     병완은 세 귀 눈에 의아한 눈빛을 띠우면서 턱밑에 바투 들이댔다.    "툭 까 놓고 말하오. 무슨 청부업거리오?”     길수도 더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어제 우시장에 가서 3층집 짓는 일을 맡아 놨네. 자네 좀 목수 일을 맡아주게.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이 좋은 청부업에 동원해주게나. 삯전을 딱딱 주는 일이니까. 참 좋은 돈벌이기회네.”     병완은 닭다리를 하나 쥐여 한입 뚝 떼여 씹으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숱한 감자와 강냉이는 누가 걷어 들이겠소? 맏손녀 어금이가 추석이 지나면 당장 결혼해야 하겠는데 혼수 감을 장만해야겠는데.”      길수와 응삼은 개의치도 않았다. 병완은 십중팔구는 그렇게 나오리라고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다.     응삼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는 주인을 보자 팔을 걷도 나섰다. 그는 바가지로 오지독안의 막걸리를 푹 퍼서 병완의 앞에 놓인 놋 술잔과 길수의 앞에 놓인 놋 술잔에 찰찰 넘치게 따랐다.     “김도감, 집일이야 성칠이나 안분들이 하면 되지. 이런 청부업거리 어데 가 얻소? 우리 주인어른이 얻지."    병완은 눈을 떡 감고 묵무부답하고 목석처럼 떡 앉아 있었다.    응삼은 한길수한테 뱁새눈을 찔끔해보이고나서 뒤를 이었다.    "한번 우리 주인을 돕는 셈 치고 나서줍소. 그러면 우리 주인어른께서 그 감자와 강냉이를 판 돈만큼 벌게 하지 않으리라고 그럽둥? 거저 김 도감에게 은덩이를 수무 냥이나 줄라니 고만한 게야 어련히 봐주지 않으리라고 그럽둥?”     응삼의 말은 실로 그럴듯했다.     “그런데 우시장에 무슨 부자가 있어서  3층집을 다 짓는다오?”     병완이 묻는 말에 응삼이가 제꺽 “그거야…” 하고 입을 열려는데 길수가가 손으로 슬쩍 그의 허벅다리를 꼬집어놓았다.     “양, 저, 우시장에 그런 대부자 있소. 삯전은 근심하지 마오. 내 달마다 딱딱 주겠소. 한마을에서 살면서 내 거짓말을 하겠소? 자네 정 믿지 못하면 선전을 줄 수도 있소.”     그제야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막걸리 잔을 또 들었다.     “글쎄, 돈을 벌수만 있다면 가서 목수 일을 할 수도 있지.”     한길수는 대번에 찌푸렸던 낯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말끔히 걷으면서 놋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자, 김 도감, 오늘 통쾌하게 한잔 듭세."     병완은 한길수 잔과 마주치고 막걸리잔을 굽냈다.      길수는 사기나 너스레를 떨어댔다.     "자네 도감까지 맡소. 영월동 사람들을 집짓기에 동원해주오. 영월동에서 자네 말이라면 누가 듣지 않겠수?"    병완은 생각 밖으로 손사래를 치며 사양할줄이야.    "아니, 도감은 그만 두오. 무슨 일인지 모르구 어찌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겠소?"    한길수는 소발굽 같은 주먹으로 병완의 어깨를 툭 쳤다.    "야따, 목수하구 도감 삯전은 따로 한몫씩 줄 테니. 근심하지 말게나. 하하,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라 일거양득이 아니겠소? 자, 한잔 들기오.”    그제야 병완은 웃으면서 통쾌하게 한 잔 냈다.    일이 돼가는 걸 보고 응삼도 따라 막걸리를 한 사발을 죽 굽을 낸 후 병완을 쳐다보면서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37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 (26) 총도감의 꿈 댓글:  조회:594  추천:0  2024-03-05
              3. 총도감의 꿈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한길수와 류강철이 끼무라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다.  뜻밖에도 월향이 콤파스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표독한 눈길로 쏘아보지 않겠는가.      한길수는 월향한테 손삿대질하면서 이빨을 악물고 당장 잡아 먹을 상 했다.      “이년, 팬티를 다  내 머리에 씌워?"      월선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더러운 두상, 날 버리고 젊은 년들과 놀아? 오늘 내 죽고 네 죽고 해보자!”     월향은 이를 악물고 걸레대를 마구 휘둘렀다.            “콘칙쇼(닥쳐)!"      끼무라는  한길수 부처간이 고양이와 쥐처럼 싸우는 꼴을 보다 못해 꽥 고함쳤다.      경호원들이 우르르 뛰어들어왔다.      월향은 한길수를 손가락질하며 대성통곡쳤다.      "끼무라 국장님, 저 놈을 박살냅소, 저놈, 오전에 광기를 부리던 저 놈을 잊었습네까?"       끼무라는 엉거주춤 일어서 월향을 손삿대질했다.     "경호원, 저 년을 끌어 내가!”     승냥이가 병아리를 채가듯 경호원들이 월향의 팔을 잡아끌고 나갔다.     그제야 한길수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가 둘러보니 100 평방미터는 실히 될 사무실은 일본 냄새가 물씬 풍겼다. 끼무라 국장이 앉은 정면에는 고약딱지 일본국기와 “무훈영구”라는 글자를 새긴 무사도 기발이 걸려있었고 사무실 양옆 벽 밑에는 사꾸라 꽃이 만발한 그림으로 단장한 병풍이 둘러서 있었다. 그 앞에 좌우로 참대의자가 죽 두 줄로 놓여 있었다.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끼무라 국장은 군도를 왼손으로 잡고 거만하게 다가와 한길수의 손을 꽉 잡으면서 아래위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군, 당신의 성선은 잘 알았소이다. 한군, 우린 영원한 친구로 될 수 있네.”    이제껏 우시장에서 누구에게 허리를 한번 굽혀보지 않은 한길수였다. 하건만 일본 사람의 세상이 되고만 우시장 땅에서 이젠 끼무라 국장한테 처음 허리를 굽혔다.     “끼 국장님, 저는 강철통역을 통해 어르신님의 천하에 빛나는 슬기와 뛰어난 무공을 널리 알았습구마. 오늘 또 드넓은 흉금으로 오전에 있은 오해를 일소해버리고 포옹해주니 정말로 자식을 안아주는 친부모처럼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류통역의 통역을 듣고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한길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마치 사냥군이 사냥개 대가리를 다독이듯이.     "허허. 별말을. 녀색을 밝히는덴 자네나 나나 피차일반이지. 주색잡기엔 자넨 내 버금은 가겠어."     끼무라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사냥개 앞에서 체모를 잃는 것 같았다.     끼무라 국장이 제자리에 가서 앉아 이렇게 달리 말했다.     "사내대장부란 드문드문 유흥을 즐길 수도 있네. 그러나 한도를 넘어선 안돼."    "네, 네. 그렇습죠."     한길수는 허리를 꿉썩거리며 어깨에서 금덩이 주머니를 끌러서 끼무라의 사무상 위에 올려놓았다.     “끼 국장님, 이건 국장님을 처음 만난 인사입니다. 적은대로 받아주시고 저를 믿어주십시오.”     끼무라는 사무 상에 부딪쳐 묵직한 소리가 나는 주머니를 내려다보면서 눈이 둥그래졌다.     한길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황금빛이 반짝이는 금덩이들을 꺼내 사무상 우에 죽 내놓았다. 황금 쉰 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끼무라 국장의 표정이 대번에 바위돌처럼 굳어졌다.     “이이에(아니),  간상(한군), 난 황금덩이보다 당신의 충성심을 요구하네. 그게 황금보다 더 귀중하네. 알았소이까?"      류 통역이 통역해주자 한길수는 잔등에 식은땀을 쪽 흘리면서 오리무중에 빠졌다. 속으로는 황금덩이보다 더 좋은 것이 뭐가 있어서 이러나고 원망했다.     “끼 국장님, 이 황금덩이는 저의 충성심입니다. 이 금덩이는 내 어떻게 마련한게라구 이럽둥?”     무지한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라고 하니 성이 끼고 이름이 무라인가고 끼 국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융통성이 있는 류 통역이 끼무라 국장이라고 다 붙여 통역해주었기에 오해는 사지 않게 됐다.     끼무라 국장은 안경알 너머 한길수를 쏘아보면서 총알을 내뱉듯이 한 마디 한 마디 내쏘았다.     “난 황금보다도 한상이 대일본제국 위해 목숨 바칠 충성심을 더 요구하네.”     류 통역이 통역해주자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의 사무 상 앞에 털썩 꿇어앉아 맹세하듯이 말했다.     “끼 국장님, 저는 목숨을 다 바쳐 대일본젝국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는 끼 국장님의 한 팔이 돼 이 우시장일대를 대일본제국 끼 국장님의 새 세상으로 만들어 드리겠습구마.”     끼무라는 안경알 밑으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껄였다.     “요로씨이(좋아), 바로 그거네.”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길수의 앞에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두 팔로 한길수를 끌어안아 일으키면서 자리를 권하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길수는 손수건으로 번들이마에 돋아난 땀방울을 닦으면서 오전에 있은 일을 구구히 설명했다.      끼무라 국장은 말을 질질 늘여놓는 걸 딱 질색했다.      끼무라는 한길수의 잔등을 툭툭 다독여주면서 뇌까렸다.      “괜찮네. 중국 속담에 ‘싸우지 않으면 사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린 첫 만남이 참 우스웠지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한 친근한 벗으로 될 수 있네.”     “고맙습니다.”     끼무라 국장이 박수를 툭툭 쳤다.     일본 시녀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푸짐한 술상을 차렸다.     “간상이나 내나 다 술을 좋아하지 않소. 자, 한잔 들면서 이야기하기요.”     그들이 댕그랑 술잔을 마주칠 때다.     병풍 뒤에서 화복차림을 한 일본 기생들이 악기랑 들고 게다짝을 짝짝 끌고 사뿐사뿐 걸어 나와 곱게 인사를 드렸다.     끼무라 국장은 한편으로 조선 사람들과 싸우면서도 항상 경찰 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 기생집 사꾸라관의 기생들을 데리고 놀았다. 오늘도 우시장에서 처음으로 친일 하려는 조선 사람을 접대하려고 일본 기생년들을 경찰국에까지 불러 왔던 것이다.     일본 전통민요 “사꾸라” 곡이 은은히 울렸다. 일본 기생 년들이 돌아가면서 사꾸라 춤을 곱게 추었다.     피리소리에 맞춰 병풍 뒤에서 게다소리가 딱딱 나고 가늘고 하얀 손들이 병풍우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한다. 뒤이어 반 라체를 한 일본 기생 년들이 병풍 뒤에서 흘러나와 춤판을 벌렸다.     일본 기생 년들이 추는 춤판을 한참 멍하니 쳐다보는 한길수는 선경에 들어선 것만 같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한참 후 끼무라는 술상과 기생 년들을 물리고 사무 상에 되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만난 첫날부터 일을 좀 시켜야 하겠소. 지금 이 사무실이 너무 비좁아서 멋있게 3층집으로 지어야 하겠네. 간상이 총도감을 맡게나.  지금부터 목수를 구해 박달령의 적송을 많이 베서 실어 와야 하겠소. 장차 우리 대일본 제국에서 백두산의 적송을 실어가려면 갑산으로 가는 길도 잘 닦아야 되겠네.”      끼무라 국장은 작은 일부터 시켜보고 능력을 보아서 한길수를 써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눈치를 챈 한길수는 대뜸 “제가 도맡아서 새 경찰국청사를 짓겠습니다. 목수랑 목재랑 인부랑 근심하지 마십쇼.”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끼무라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술잔을 들어 한길수에게 주었다.     “자, 간상(한군), 간상이 경찰국 청사를 명년에 멋있게 지을 것을 미리 축하하여 한잔 듭세.”     끼무라와 한길수는 술잔을 부딪치고 나서 죽 들이켰다.     “간상, 우리 일본대제국을 위해 일하려면 우리 일본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야 하겠네.”     끼무라 국장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연신 “예, 예.” 하고 대답했다.     끼무라 국장은 강철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강철은 병풍 뒤로 가더니 이발사를 데리고 왔다.      강철은 한길수가를 보고 “끼무라 국장은 어른님을 관심하여 머리를 깎아드리라고 하였습니다.”라고 공손히 말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한길수는 자기 외채머리를 만지면서 끼무라 국장의 희죽이 웃는 낯을 바라보았다.      “부모가 준 머리털이 아까운데..."     "고린내 나는 머리카락마저 아까워?”     끼마라 국장의 위엄에 찬 말을 강철이가 통역해 듣고 별수 없었다. 한길수는 끼무라 국장이 지켜보는데서 둬 자 길이나 되는 머리채를 썩뚝 베 버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칼, 한칼 발치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한길수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끼무라는 거울을 손수 들어다 한길수에게 비춰 보이면서 지껄였다.      “보라니깐. 간상, 하이칼라 번대머리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허허. 얼마나 신사다운가? 이제야 진짜 우리 대일본제국의 총도감 같네그려. 흐흐흐.”     끼무라는 손벽을 딱딱 쳤다. 시녀들이 술 두 잔을 쟁반에 들고 다가왔다.     끼무라는 한길수와 잔을 마주치고 굽을 죽 내였다.     한길수는 울분과 함께 그 술을 목구멍에 부어넣었다.     끼무라는 술잔을 놓으면서 명했다.     “한 군, 내일부터 목수와 인부를 징집해 경찰국 청사를 짓게네.”    강철이 옆에서 일일이 번역해주자 한길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 아니, 당장 동삼이 닥쳐오는데 어떻게 집짓기를 합네까?"    "뭐라고? 초겨울이 돼 괜찮아."    그래도 한길수는 어정쩡해 서서 끼무라 정신 있는가 쳐다보았다. 강철이 옆에서 허벅다리를 툭툭 치며 눈짓했다.     그제야 한길수는 마지못해 연신 번들이마를 조아리었다.     “알았습구마. 명령대로 하겠습구마.”     끼무라 국장은 새로 얻은 개 한 마리를 귀여워하듯 한길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었다.     한길수는 어깨 축 처져 경찰국 대문 어귀에서 진작 기다리던 당나귀 차에 올라탔다.     가을해도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장들에도 불이 달린 듯이 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길수는 당나귀차에 앉아 건들건들 몸을 흔들며 시내거리를 달렸다. 이때 술집 부근에 이르자 큰길 옆에서 진작부터 기다리던 응삼 등이 마중했다.      “일이 어떻게 되였습둥? 아니, 머리채는 어쨌습둥?”     응삼이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묻자 한길수는 언짢은 기분을 감추면서 큰소리부터 쳤다.     “끼무라 국장은 대일본제국의 사람이 되려면 머리채부터 바치라고 해서 바쳤네. 끼 국장은 네 눈깔로 그래도 이 한길수가를 알아보더구나. 날 총도감으로 임명했어.”     “예? 아, 예. 감축드립구마.”     응삼과 영팔, 수길은 모두  숱한 금덩이를 내밀고 고작해야  고까지 총도감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상우남면 파출소 소장도 아니고.      한길수는 제 좋은 꿈을 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총도감을 잘하면 이제 경찰서장을 시키겠는지 누가 아느냐?)      그는 버릇처럼 득호 잔등을 구두발로 툭 찼다.      "어서 가자, 해 넘어가는구나.”     “이라! 쨔!”     득호는 당나귀 엉덩이를 채찍으로 연신 갈겼다.     "주인님, 빨리 가겠으면 날 차지 말고 당나귀를 찹소."    허길수는 단통 우멍눈을 부라리면서 욕했다.     "웬 대꾸질이냐? 널 차면 어째? 당나귀를 차면 말을 알아듣니?"     당나귀는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차를 끌고 네 굽을 안고 달렸다. 그 뒤로 응삼과 수길, 영팔이 말을 타고 전후좌우로 옹위하고 달렸다.     한길수는 가을바람을 한껏 들이켜니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해났다. 그는 말 이발을 입술 새로 드러내면서 음흉한 낯에 별의별 엉뚱한 궁리를 다 하고 있었다.     (흥, 이제 일본 경찰국장을 등에 업었으니 영월동이겠는가? 아니야, 온 명천일대를 독점해 버릴 테야. 병완이, 네 놈이 나한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어디 배겨내는가 보자.)      병완을 떠올리자 으쓱해졌던 어깨가 축 처지는 감이 들었다. 이전에 병완을 얼리고 닥쳐보았지만 후려채지 못한 것이 속에 걸리었다.      그러나 끼무라 국장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끼무라 국장을 등에 업은 이상 병완 같은 시골 놈이 언감 나와 어쩐단 말인가? 은녀랑 되빼앗아와야지. 흥!)      그는 눈을 떡 감았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이런 흐뭇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기가 권총과 군도를 척 차고 일본군모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가죽장화를 척 신고 병완이랑 호령한다. 은녀랑 월향이랑 옥설이랑 숱한 미녀들이 전후좌우로 자기를 옹위하면서 애교를 부린다.     한참 후 우멍 눈을 스르르 떠보니 당나귀 차는 어느덧 운주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치마봉 기슭을 달리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개울물이 은빛달빛과 구름을 싣고 쏜살 같이 흐르고 있었다.      길수는 술기운이 뻗치는데다가 가을바람을 맞으니 열기를 띤 얼굴이 선선해나고 배가 울렁거렸다. 이제 바야흐로 군도와 권총을 차고 경찰두목질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뿌듯해나고 별스레 울렁거리었다.      “오─”      “예?”     득호는 주인이 무슨 분부가 있는가 하여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빨리 몰게나.”      “예. 짜! 짜!”    당나귀는 채찍을 맞고 대가리를 양쪽으로 떨어대더니 네 굽을 안고 딸까닥 딱까닥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달리는 당나귀 차의 바퀴처럼 길수의 사유도 다급해졌다. 술기운이 도도해지자 혈액순환도 생각도 빨리 굴렀다.    순간 월향에게 오전에 개꼴망신을 당하던 일이며 그 젊고 예쁜 기생 옥설을 가지고 놀지도 못하고 끼무라가 휘두르는 군도를 피해 달아나던 일이며를 생각하니 세상이 더럽게 변했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월향이 원망스러웠다. 이전에 자기가 10여년 다닐 때 언제 한번 자기에게 소홀히 대하였던가. 그런데 지금은 일본 끼무라 경찰국장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기를 개 닭 보듯 한단 말이다. 그뿐인가! 끼무라 국장을 등에 업고 나를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 번들 이마를 치고 더러운 속옷을 벗어 내 머리 꼭뒤에 씌우기까지 하다니?     (참 야속해!)    (월향이, 마흔 고개를 쳐다보는 네년이 없으면 데리고 놀 계집이 없을 것 같냐? 얼마든지 있지, 있어. 옥설이, 만금이, 뽕녀. 어허이구, 보름달 같은 그년들이면 네년보다 훨씬 낫고 실컷 놀 수 있다. 퉤!)     해가 뜨자 달이 지듯이 옥설이랑 길수의 눈앞에 나타나자 월향은 매력을 잃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월향에게도 끼무라 국장이 나타나자 건달부자 길수가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월향은 그날 오후에 끼무라 국장의 사무실에 가서 자기 기생방에 와서 옥설이랑을 끼고 애를 먹이는 한길수를 없애치워 달라고 고발하러 갔던 것이다. 그러나 끼무라 국장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쫓기어 났던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한길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당나귀 차 우에서 자기 좋은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월향의 기생방에 있는 옥설이랑, 뽕녀랑, 만금이랑 예쁜 기생들을 몽땅 데리고 놀겠는가고 궁리했다.     (아니, 이 세상의 미녀들이란 미녀는 몽땅 데리고 놀고 싶다. 아이고, 세상의 미인들아, 어째 내 애간장을 이다지도 애태우게 하느냐?)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오전에 옥설과 뽕녀, 만금을 만나 술을 몇 잔 마셨지만 월향과 10년 동안 논 것보다 기분이 훨씬 좋았다. 그런데 월향을 외면하고 그 애들과 논다는 것은 암 펌의 입안에서 토끼를 빼내는 격이기도 했다. 황차 월향은 일본 경찰국 국장 사무실에도 드나드는 수기생이 아닌가?     (어떻게 한다?)    저 멀리 어슴푸레 마을이 다가온다. 그는 집에 있을 때에는 마을의 고운 계집애들을 데리고 놀고 고을에 가면 옥설과 만금이, 뽕녀와 놀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월향과 함께 기생집에 있던 월선이도 한때는 아주 예뻤다. 그래서 기생집출입을 밥을 먹듯이 하던 길수는 기생집만 가면 월선이 아니면 월향에게 달라붙어 술을 처먹고 녀색을 즐기었다. 월선에게 빠져버려서 그는 어떤 때에는 영월동에서 내려오면 한 보름동안 아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본댁이 철주를 싸 업고 우시장에 내려와 기생집에 와서 길수를 불러 가기도 한 적이 있었다.     길수는 본댁이 미워서 기생집 주인에게 황금덩이를 쥐어주고 월선을 떼 내 영월동에 데려다 첩으로 들여앉혔다. 그리하여 본댁은 철주를 싸 업고 서울 쪽에 있는 본가 집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길수는 말을 타고 쫓아가 본댁에게 황금덩이를 주면서 로비라도 하라고 했다. 그러나 본댁은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그 황금덩이를 한 냥도 받지 않고 가버리었던 것이다.    길수가 월선을 첩으로 데려온 데는 그럴만한 속셈이 있어서였다. 수기생 월선이가 기생집에 들어앉아 있는 한 월향을 비롯한 다른 기생들과 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월선을 집에 데려오니 집에 있을 때에는 월선과 놀고 고을에 가서는 월선의 여동생이자 처제인 월향을 비롯한 더 젊은 개생들과 마음껏 놀 수 있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 월선도 월향도 다 늙었어. 고 옥설을 월선 대신 둘째 첩으로 들여앉히고 고을에 가서는 뽕녀와 만금을 데리고 놀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 암범 같은 월선이가 가만 있겠는가! 시골의 은녀를 부엌데기로 들여와도 어찌 하나 퉁 사발 눈깔에 쌍불을 켜고 달려드는 게. 에이고.)     순간 그의 눈앞에는 마름 응삼의 색시 춘실의 고운 모습이 피뜩 떠올랐다.     경상북도에서 난 춘실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춘실은 이모부가 죽고 이모계부가 들어오자 팔자가 바뀌어 버린 여자였다. 글쎄 이모계부가 쩡하면 달려들어 어린 그녀를 능욕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모네 집에서 뛰쳐나와 조선 팔도를 헤매다가 우시장 거리에서 밥을 빌어먹으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길수에게서 밥을 몇 때 얻어먹고 이 시골에 따라와 응삼의 처로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춘실은 주인어른이라면 응삼보다도 아버지처럼 공대했다.     (아무리 계집이 없어도 내 어찌 굴 어귀 풀을 뜯어 먹으리오?)     이때 그의 눈앞에는 또 새별 같은 깜장 눈에 쌍 머리채를 치렁치렁 땋아 늘인 은녀가 피뜩 떠올랐다. 점점 능금같이 익어가는 그 복성스러운 얼굴이 그의 가슴마저 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억대우 같은 병완이 떠올랐다. 설상가상으로 은녀를 좋아한다고 온 마을에 소문난 성칠을 떠올리자 도리머리 질이 나갔다.    “안 된다! 안 돼! 오! 안 된단 말이다!”    “예?”    득호는 주인어른의 말에 당나귀고삐를 쥔 채 몸을 뒤로 돌렸다. 그 바람에 당나귀 고삐를 왼쪽으로 꽉 당기고 말았다. 당나귀가 코 구멍이 아파 왼쪽으로 대가리를 돌리면서 달려 나갔다.    “아이쿠!”    당나귀 차가 길수와 득호를 실은 채 낭떠러지에서 굴러 개울물에 풍떵 떨어졌던 것이다.   “ 빨리 주인어른을 살려라!”    응삼이랑 바삐  개울물에 우르르 쓸어달려 내려갔다. 길수는 다행히 깔려죽지는 않았다.    대신 당나귀차  밑에서 구렁인지 뱀인지 욕지거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개자식, 어떻게 차를 몰았기에 이 지경 만들어?!” 그런데 이번에는 기어 일어나는 길수의 낯에 당나귀가 걸쭉한 똥물을 찔찔 쏴놓았다.     “에 퉤퉤! 득호, 이 자식 어디 죽어봐라!”    길수는 차밑에서 벌벌 기여 일어났다.    “아니, 주인어른, 죽지 않았습둥? 천만다행입구마.”    “뭐라고? 이 자식!”    길수는 일어나자마자 득호에게 주먹을 턱 안겼다.     득호는 개울물에 벌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때 응삼 등이 내려와 당나귀 똥을 낯에 바른 번들이마를 보고 겨우 웃음을 참았다. 그들은 길수를 부축하고 개울물에 똥투성이 머리를 닦아주었다.   “에, 퉤, 퉤!”   수길과 영팔이 양쪽에서 길수를 부축해 둔덕으로 올라갔다.    당나귀차는 또다시 어둠을 타 분주하게 산골 길로 달리었다.
37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김장혁 (25) 먹은 소 똥을 눠 댓글:  조회:599  추천:0  2024-03-05
                        2. 먹은 소 똥을 눠        한길수는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부랴부랴 당나귀 차에 앉아 꼬리 빳빳해 도망갔다. 그는 당나귀차에 앉아 자꾸 뒤돌아 보았다.     콧수염쟁이 군도를 들고 쫓아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제야 그는 한숨을 푸 내쉬었다. 드디어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착잡한 생각에 잠기었다.      (젠장, 우시장에서 한다하는 한길수가 이게 무슨 꼴이람? 머리에 털이 돋아나서부터 언제 오늘처럼 이렇게 개꼴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는가? 참, 일본 사람들과 놀기 힘든데. 이럴줄 알았더라면 영팔과 응삼을 데리고 왔겠는 걸. 그래두 병완을 꺾자면 참아야는가? 흥! 더러워서, 원? 어떻게 해야 끼무라 국장과 친해질 수 있을까?)      득호는 해도 중천에 걸렸는지라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당나귀차를 몰고 영월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에끼, 이 등신 같은 물건짝아, 일본 사람들과 친하기는커녕 개꼴망신을 당하구  어떻게 머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느냐?”     한길수가 꽥꽥거리자 당나귀차는 시내 쪽으로 되달렸다.     한길수는 한 주막집에서 내린 후 득호를 보고 영월동에 가서 응삼과 영팔, 수길을 데려오라고 했다.    득호가 황급히 당나귀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다.    한길수가 불러세웠다.     “잠간! 응삼을 보고 금덩이도 푸짐히 가지고 빨리 오라구 해라!"     그는 호주머니를 쳐들어보였다.     "요걸루 될 거 같잖다."     “예. 주인어른!”    득호는 당나귀 잔등에 채찍을 안기면서 영월동으로 부랴부랴 떠나갔다.    한길수는 주막집에 들어가 조용한 쪽으로 가서 빈 상에 마주앉았다.    그는 주인 보고 개고기를 한 사발 달라고 해 막걸리를 게걸스레 쭉쭉 들이켰다.    한참 막걸리로 답답한 마음을 지지니 그제야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상 싶었다. 그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일본 사람들과 다리를 놓겠는가고 머리 속에서 궁리가 뱅뱅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갔을까. 해가 거의 중천에 걸렸다. 한길수가 답답한 막걸리를 쭉쭉 들이켜고 있을 때다.     바깥으로부터 응삼과 영팔, 수길이 달려 들어왔다.    응삼이 실 돌피 같은 허리를 꿉썩 굽혔다.    “주인어른님,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둥?”    “그래, 자, 앉아라. 너희들도 막걸리 들어라.”    한길수는 주인답게 막걸리를 권했다.     막걸리를 한 순배 돌린 후 한길수는 통탄했다.     “야- 이전에 이 우시장에 오면 누가 감히 나와 말대구나 했겠느냐? 그런데 지금 바깥세상은 영 딴 판이구나. 철주 말처럼 우시장도 영 일본 사람들의 세상이 돼버렸구나.”      그는 뒤이어 울분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술상을 탕탕 치면서 근심했다.     "이후에 일본 사람들이 내 밭과 삼림을 내놓으라면 어쩌지?"       응삼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뱁새눈이 실눈이 돼 쑹얼거렸다.      "일본 놈들도 푹 삶아논 개다리 잘 삶아놓으면 근심할게 없습구마. 차마 웃는 낯에 침을 뱉겠습둥? 해해해."     그는 주인에게 막걸리를 따라 올렸다.      “주인어른, 먼저 통역이나 만나 끼무라 국장과 만나게 다리를 놔달라고 해봅시다."      한길수는 응삼한테 손삿대질하면서 명했다.     "당장 일본 놈들 초소에 가보게나."      "옛!"     응삼은 영팔과 함께 일본 헌병이이 지키는 초소 앞에서 경찰국 2층 양옥 쪽을 들여다보면서 군관 같은 놈이나 통역 같으루 한 놈을 눈뿌리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종시 그런 놈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국장과 강철이 혹시 아짇고 기생집에 있을 수도 있어.)     응삼은 영팔을 데리고 기생집 쪽으로 가 기웃거렸다.     “뭘 해? 가라, 가!”     일본 헌병이 총박죽으로 응삼과 영팔을 떠밀면서 꽥꽥거렸다.     이때 기생집에서 군도를 찬 콧수염쟁이놈과 통역 같으루 한 조선인이 기생 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떠들면서 나왔다.     그런데 그 조선인은 눈에 퍽 익어보였다.     (아니, 저게 서당방 친구 류강철이 아닌가? 살았구나. 살았어. 하느님이 류강철이를 보내주는구나.)     응삼은 끼무라 국장에게 허리를 90도로 꿉썩해보이고 나서 강철을 보고 소리쳤다.     “이보게, 강철이!”    그런데 강철은 응삼을 몰라보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응삼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누구던가?”     “응삼이, 응삼이네. 우리 운주동에서 최구장의 서당 방에서 천자문을 배우지 않았는가?”     그제야 강철은 아는 척 했다.      “아, 이제야 알기는구먼.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소?”     응삼은 동문서답했다.     “일본에 유학 갔다더니 높이 솟았구먼."     강철은 안경알을 춰올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경찰국장의 통역을 해 밥벌이나 하네."    "때마침 잘 됐네."    응삼은 강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나직이 말했다.    "좀 시간을 내오. 긴히 여쭐 말이 있네.”    옆에 서 있던 끼무라 국장은 버릇처럼 깍지를 건 엄지와 식지로 콧수염을 쓸쓸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다레까?(누군가?)”    강철은 일어로 “내 소굽시절의 친구지요.”라고 대답했다.    뒤이어 그는 “점심에 다른 일이 없으면 이 친구하고 만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을 들었다.    “요로씨(좋아.)”    찌프차 한대가 달려와 앞에 멈춰 서자 끼무라 국장은 호위병과 함께 척 앉아 먼지를 뽀얗게 일구면서 사라졌다.    강철은 응삼이 이끄는 대로 한길수가 기다리는 술집으로 갔다.     그는 술집에 들어갔다가 한 시간 전에 난동을 피우던 건달의 번들이마를 보고 뒤지참하더니 되나가려고 했다.    “어이, 통역선생. 섭섭히 대하지 않겠으니 가지 마오.”     강철은 문 밖에 나가 뒤따라 나온 응삼에게 물었다.     "저건 씨름판에서랑 생떼질 쓰던 그 건달 아니야?”     응삼은 홱 뒤돌아다보더니 입가에 식지를 댔다.     “쉬- 말조심하게나. 저 양반 이 우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대장부야. 내 주인어른이야.”     그제야 강철은 주춤 멈춰섰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응삼은 뱁새눈으로 술집 주위를 흘끔흘끔 둘러보았다. 뒤이어 호주머니에서 잔등에서 둘러멘 주머니를 끄르더니 금빛이 번쩍번쩍 하는 금덩이 하나 꺼내 스리슬쩍 강철의 손에 쥐어 주었다.     “부탁이네. 우리 저 주인어른을 경찰국장에게 연줄을 달아주게나. 우리 주인어른은 자네 은공을 잊지 않을게요.”     “그 일?”    강철은 서너 냥은 될 금덩이를 놓칠 수 없었다.     (밑져 본전이니까. 한번 나서 보자.)     그는 대번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금덩이를 호주머니에 슬쩍 주어 넣더니 응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동기친구를 봐서라도 한 영감을 한번 도와주지. ”     “고맙네. 우리 어른께 여쭈어서 자넬 꼭 후한 대접을 하게 하겠네.”    그런데 강철이가 상을 찡그리면서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네 주인이 주색에 너무 빠졌더라. 오늘도 대취해 개꼴망신했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일하려면  주색에 너무 빠져선 안 돼. 아까도 끼무라 국장앞에서 그게 뭐야? 쯧쯧."     응삼은 강철한테 바짝 다가섰다.     "꼭 잘 말해주게나. 사내가 어찌 한두번이야 주색에 빠지지 않겠는가? 꼭 잘 말해주게나. 부탁이네."     강철은 짐짓 제빠드해보였다.     "내 말은 해보겠네만은 끼무라 국장님이 한 영감을 받아주겠는지 잘 모르겠어.”    응삼은 강철이 금덩이를 더 받아 먹으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불 보듯  꿰뚫어보아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척 하면서 바싹 달라붙었다.    “이보, 들어가 우리 주인을 보기오. 우리 주인은 인심이 후한 분이야."   강철은 마지못해 응삼에게 끌려들어가듯 술집으로 되들어갔다.    한길수는 우멍눈을 활짝 뜨며 반색하였다. 그는 손으로 버릇처럼 번들이마를 쓱쓱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면목 있는 분이구먼. 아까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오.”    한길수는 기생집에서 추태를 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만에 말씀. 피차일반입구마.”    류강철이 발라 맞추는데 한길수는 응삼에게 눈짓했다.    응삼이 금덩이가 들어찬 주머니를 어깨에서 끈을 끌러 내려놓았다.    한길수는 가래짝 같은 손을 주머니에 쑥 넣더니 단번에 금덩이 두개나 꺼내 류강철의 앞에 척 내놓았다.    “자, 받게나."    강철은 황금덩이를 보고 반색하면서도 사양하는 척 했다.   한길수는 우멍눈으로 강철을 엄엄하게 바라보며 입을 뗐다.   "무거운 부탁을 합세. 나는 대일본제국을 위해 일하고 싶은데. 으흠, 경찰국장님에게 알선해주게나. 이후에 내가 허리를 펴게 되면  자네를 잊지 않을게.”    류강철은 금덩이를 스리슬쩍 받아쥐고 허리를 꿉썩거렸다.     “우시장에서 한 어른의 성선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압니다. 저는 한 어른을 위해 할 일이 있는 것만도 아주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이 금덩이 없어도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해주지 않으리라고 이럽니까?”      한길수는 금덩이를 손수 쥐여 영팔이 손에 쥔 주머니에 넣어 강철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거 무거운 부탁을 하기오. 이후에 사노라면 이거겠겠소? 허허허.”     그제야 류강철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묵직한 금주머니를 받아 챙기었다.     “근심하지 말고 기다립시오. 오늘 오후에 꼭 한 어른을 만나도록 끼무라 국장에게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례하면서 술집 바깥까지 바래다주었다.     한길수는 류강철에게 부탁했다.     “좋기는 경찰국청사에서 국장님을 만났으면 좋겠소.”     류강철은 “그게 좋겠습니다. 기별을 기다리십쇼.”라고 한마디 말하고는 자리를 급급히 떴다.     응삼은 밖에 나가 득호를 보고 당나귀 차에 류강철을 모셔다주라고 분부했다.     류강철은 당나귀차에 앉아 떠나가면서 어깨가 으쓱해났다.      (어떤 금덩이야? 이런 거간이야 말로 백번이라도 설 수 있지. 한길수 영감에게 면목을 내고 금덩이도 챙기니 . 헛참, 이거야 말로 꿩 잡고 알도 먹고 둥치를 털어 불을 때는 격이 아니겠는가. 흐흐흐.)      그는 당나귀차를 타고 부랴부랴 집에 가서 금덩이 세 덩이를 아내에게 맡기였다. 그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당나귀차를 타고 단숨에 우시장경찰국으로 달려갔다.     우시장에서 2층 양옥집은 일본 경찰국 청사 밖에 없었다. 경찰국을 둘러싼 벌건 토성 네 귀의 초소에는 총칼을 비껴든 일본 헌병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자못 경계가 삼엄했다.      강철이 통행증을 내보이자 대문보초병은 들여보냈다. 그는 곧추 끼무라 사무실 앞 복도 걸상에 앉아서 경호원과 함께 이 말 저 말 하면서 끼무라 국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끼무라 국장은 경호원과 함께 뚜벅뚜벅 2층 복도로 올라왔다. 류강철은 기립하여 서 있다가 끼무라 국장이 다가오자 허리를 구십 도로 꿉썩 굽히며 인사했다.     끼무라 국장은 사무실에 들어가 틀스럽게 군도를 벗어 검 틀에 걸어놓고 의자에 앉았다.     강철은 인차 끼무라 국장의 옆에 다가가 무거운 입을 떼였다.     “국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이전과는 달리 너무나도 굳어진 류강철의 표정을 보고 “무슨 중대사가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왼쪽앞자리를 권했다.     류강철은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다.     “이 우시장을 다스리자면 순수한 일본헌병들로만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일본제국을 도와 일할 당지 조선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끼무라는 류강철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소우데스네(그렇습니다). 나도 그 일 때문에 요즘 류 군과 말하려던 참이요. 좋기는 우시장에서 아니, 온 명천에서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면 더욱 좋소. 그런 자들을 우리 옆에 사냥개처럼 길러두면 우리 안보에 좋지.”     끼무라가 의기투합해 하자 류강철은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국장님, 그 적임자가 나졌습니다.”    끼무라는 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어떤 사람이요?”라고 물었다.     “그 어른은 이전부터 이 우시장이고 온 명천까지 쥐고 흔들던 깡패두목입니다.”     류강철의 말에 흥미가 갔던지 끼무라는 벌떡 일어났다.    “빨리 그 자를 내앞에 불러오오. 바로 그거네. 나는 우시장의 한다하는 깡패, 건달들을 묶어세워 우리 대일본제국의 충실한 제2의 헌병대나 다름없는 조선인경찰대를 묶어세우겠네. 지방관리도 몽땅 우리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시킬 예산이네. 그게 누군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가?”     그런데 류강철은 그 다음 말을 인차 하지 않고 차물을 마셨다. 그러자 끼무라 국장은 아주 조급해 류강철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류강철은 차잔을 놓으면서 천천히 입을 떼였다.     “끼무라 국장님은 그분을 진작 오늘 오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끼무라는 안경알 안으로 사기 눈을 희번뜩거리더니 책상을 탕 쳤다.    “혹시. 오전에 옥방에서 기생 년을 셋이나 데리구 놀던 그자 말인가?”    류강철은 우쭐 일어나서 끼무라 국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맞습니다. 이전에 이 우시장에서 그분의 이름만 들어도 어린애들도 울음을 다 그칠 정도였습니다. 지금 영월동에 숨어서 살지만 그분의 수하에는 이 우시장이고 명천에고 숱한 주먹치기친구들이 있습니다.”     끼무라 국장은 의자에 되 주저 앉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자는 내 검도를 대여섯 번이나 피했소. 사람이 주먹치기군은 틀림없소. 아주 날랜 사람이지.”     그 말에 강철은 일이 돼 단다고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그런데 끼무라의 그 다음 말은 아주 실망스러웠다.     “류군은 사람을 잘못 보았네. 그렇게 아침부터 주색에 빠진 자가 어떻게 우리 대일본제국 경찰국장의 한 팔이 되겠는가?”   (쳇, 자기는?)    먹은 소 똥을 싼다고 강철은 거기에서 물러설 인간이 아니었다.    “주색에 빠진다고 다 국장님의 한 팔이 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잖습니까? 문제는 일본제국을 위해 일을 하려는가 하지 않으려는가 하는 마음이, 아니, 충성심이 관건이라고 봅니다. 그는 능력도 있고 주먹도 세고 친구나 부하가 많습니다. 장차 국장님을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니 한번 기회를 주어 보십시오. 낭패는 없을 겁니다. 또 장차 목숨을 걸고 사람 잡이를 해야 할 사람들이 한가할 때에는 주색에 조금 빠진들 무슨 큰 일입니까?”     끼무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손가락으로 사무 상을 똑똑 치면서 한참 궁리를 굴리었다.     드디어 그는 버릇처럼 코 수염을 쓸면서 자기 충실한 통역 류강철을 유심히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먼저 만나봅세.”    “하잇(옛)! 와까리마시다(알았습니다)!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류강철은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린 후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는 사무 청사 마당에 나가 일본 헌병이 모는 삼륜오토바이에 앉아 인차 약속한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헐레벌떡거리면서 술집에 뛰어 들어가자마자 한길수에게 구십도 경례를 올렸다.     “한 어르신님, 끼무라 국장께서 지금 당장 한 어른을 만나겠답니다.”    한길수는 번들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응삼에게 눈짓했다.    응삼이 제꺽 눈치채고 또 금덩이 하나를 꺼내 류강철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강철이는 감히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러지 맙소. 내가 어디 금덩이를 받자고 나섰습니까? 한 어른은 우리 이 우시장의 영웅호걸인데요. 금더이를 보고 나선게 아닙니다.”     한길수는 더는 굳이 주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강철이가 아주 역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네놈이 언감 금덩이에 눈이 어두워 너무 욕심을 쓰면 이담 가만놔들 거 같애? 흥, 이 어른이 장차 칼자루를 쥐면 네놈에게 준 금덩이의 두 배도 더 받아낼지 모르니까.)    “으흠, 가보세.”    한길수는 일어나 떠나려다가 되앉으면서 머뭇거렸다.    “그런데 오전에 일을 쳐놓아서 망신스러워 어떻게 국장님을 만나겠소. 인상이 영 좋지 않겠는데 가서 되겠소?”    류강철은 허리를 굽히면서 여쭈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국장님께 오전의 오해를 풀리게 잘 해석해드렸으니까 끼무라 국장은 양해하였습구마.”    “그래? 으흐흐. 참 수고 많았네.”    한길수는 용기를 얻고 강철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오토바이가 있었지만 한길수는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기 당나귀 차에 오르려고 했다.     강철은 바삐 말리면서 한길수가를 자기 오토바이 쪽으로 부축해갔다.      한길수는 응삼을 보고 금덩이보자기를 달라고 하여 어깨에 둘러멨다.    “자네들은 저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기다리게나.”     분부를 마치자 강철한테 손을 홱 휘둘렀다.     응삼과 영팔, 수길은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멀어져가는 한길수 잔등에 대고 구십도로 경례를 꿉썩 했다. 발바닥을 핥으라고 해도 핥을 졸개들의 비굴한 상통들...
36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24) 친일 주구 김장혁 댓글:  조회:562  추천:0  2024-03-05
                제5장 음모궤계                    1. 친일주구       앞을 가리기 힘들게 눈보라치는 을씨년스러운 겨울. 박달나무가 얼어 탁탁 터지고 여우도 엄동설한에 눈물을 흘리면서 눈 덮인 수림으로 도망간다.     휘몰아치는  친일 주구의 우멍눈이 눈보라 속에 숨어 교활한 눈빛을 번쩍인다. 아첨이 눈발 속에서 해해거리며 거만하게 딸까닥거리는 게다짝에 비굴하게 절을 꾸벅꾸벅한다.      당나귀차가 명천 우시장 큰 거리 돌바닥길을 딸까닥딸까닥 절주 있게 달렸다. 당나귀차에는 중절모자를 쓴 한길수가 개화장을 짚고 앉아 우멍눈을 떡 감고 구두발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집에 마차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빨리 닫는 마차에 앉았다가 사고라도 날가 봐 당나귀차에 앉아 길을 떠났다.          그는 지금 철주가 꼬드긴 대로 우시장에 와서 일본 쪽빨이들 품에 안기러 오는 길이었다. 한길수는 날개가 돋혀 한시급히 일본 사람들이 욱실거리는 명천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 놈새끼 말대로 일본 사람들을 등에 업고 병완을 꺾어버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 맏아들 말이 맞아. 이런 세월에 순풍에 돛을 달고 제 노릇이나 하는게 제일이지. 모슨 놈의 만세야?)       그런데 한길수는 일본 말을 통 모르는 것이 참 답답했다. 불시로 배우는 수도 없는 일이어서 먼저 일본말 통역을 찾기로 했다.     득호는 차를 세우고 뒤돌아다보면서 물었다.     “주인어른, 우시장에 다 왔습구마. 어디로 가겠습둥?”     “에이, 듣기도 싫은 함경도 도둑놈 사투리! 흥!”     한길수는 우멍 눈을 번쩍 뜨더니 두덜거리며 등의자에서 몸을 뗐다. 한참 두리번거리던 그는 일본 병사들이 보초를 서는 초소가 있는 쪽을 개화장으로 가리켰다.      “저리 가자.”      득호는 기절초풍한 나머지 고삐를 쥔 채 멍해 주인어른을 뒤돌아다보았다.      "아니, 쪽발이새끼들한테 무슨 경을 치자구 이럽둥?"     한길수는 개화장으로 득호 잔등을 툭 치면서 재촉했다.     "빨리 가잖고 뭘 해?"    득호는 시에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 고삐로 당나귀 잔등을 탁 치면서 중얼거렸다.    “저쪽은 허월향 기생집인데요.”     길수는 발로 득호 엉덩이를 탁 차놓으며 왈칵 성냈다.    “야, 이 놈아, 가라면 갈 게지. 뭘 알아서 꾸물거리느냐?"    득호는 그제야 이 늙은 두상이 또 속이 근질거려나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나귀 잔등을 쳐 차를 동남쪽으로 빨리 몰았다.     “득호야, 집에 가서 기생집에 갔다는 말 절대 하지 마라. 알만 하냐?”     “예, 목이 떨어지자고 혀바닥을 놀리겠습니둥?”     “음. 우리 집에서 일하자면 입이 무거워야 해. 알만해?”    "네. 주인어른이 기생집에 들린 걸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습구마."    ''에끼, 이 놈아, 차나 잘 몰아라!"     한길수는 이젠 우멍 눈을 크게 뜨고 등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떼고 여기저기 살피면서 득의양양해 코 노래를 흥얼거리었다. 그는 어쩐지 기생 월향의 기생방에 갈 때면 흥이 났던 것이다.     (이래서 사내대장부는 창검 속은 쉽게 지나가도 미인관은 넘어가지 못한다고 하는 거야. 어험.)      한길수는 여편네 월선이 허벅다리를 꼬집어 놓으면서 기생집출입을 하지 말고  해 넘어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도 귀 등으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하긴 이 근년에 마흔 고개도 넘은 월선과 밤잠을 억지로 자고 나면 이전에 애교가 찰찰 넘치던 월선이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됐다. 그리하여 흘러간 세월로 하여 마음이 별스럽게 쓸쓸해나기만 했다.      그새 변화가 눈 뜨이게 생겼다. 허월향 기생집 옆에는 양옥으로 일본 기생집 사꾸라관이 일떠섰다. 일본 기생 년들이 게다짝을 짝짝 끌면서 화복을 입고 궁둥이를 비뚤거리며 기생집에서 나와 거리를 나돌아 다녔다.     거리 곳곳마다 초소를 세우고 일본 헌병들이 시퍼런 총창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몸과 짐을 꼼꼼히 수색했다. 한길수 네가 초소로 다가가자 일본 헌병 둘이나 다가와 총창을 들이대고 내리라고 시늉하면서 뭐라고 씨부렁거렸다.    “에참, 세상이 더럽게도 변했네. 이 우시장에서 누가 언감 내 앞길을 막는 놈이 다 있었던가? 오래 사노라니 원, 별것들을 다 보겠다.”     “고노 빠까새끼(이 바보새끼)!”    한 일본병사가 일어에 조선어를 섞어 고함치면서 총 박죽으로 길수의 턱주가리를 들이갈겼다.    싸움꾼 출신인 길수는 낯을 옆으로 피하면서 날아드는 총 박죽을 왼손으로 비껴 치우면서 두덜거렸다.     “야, 정말 이 새끼들!”    길수는 개화장을 쳐들었다가 치미는 밸을 억지로 꾹 참았다. 그는 바위돌처럼 굳어졌던 박대가리 근육을 풀면서 억지로 웃음지으며 뭐라고 손시늉했다.     그제야 일본 병사들은 한길수를 당나귀 차에서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그 놈들은 몸부터 수색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당나귀 차까지 이리저리 수색한 후에야 놓아주었다.    길수는 투덜거리면서 기생집 앞에 간신히 이르렀다. 그러자 벌써 문어귀에 서있던 기생 년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아양을 떨고 교태를 부리면서 마중했다.     “아유, 오랜만인데요. 영월동의 한 양반!”     “어서 오세요. 당신 생각에 잠도 안 오데요.”     “그래, 그래. 어험.”      그제야 한길수는 금방 당한 굴욕감에서 서서히 풀려나오면서 길죽한 낯에 웃음 구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기생이 한길수의 양팔을 안고 기생집에 들어가 복도의 층계를 올라갔다. 그래도 길수는 어쩐지 이맘 때면 언제나 달려 나와 자기를 마중하던 월향이 보이지 않는 것이 속에 걸리었다.     “월향이 없냐?”     팔을 낀 기생년은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잠하다가 입귀를 배시시 열었다.     “월향 언니는 오늘 귀한 손님이 있어요. 우리와 폭 취토록 술을 마시면 어때요?”    길수는 성이 꼭두까지 치밀어올라 꽥꽥 고아댔다.      "이 우시장에 날 내놓고 또 누가 있다고 그래? 그년 보고 얼른 나와 마중하라고 햇! ”      이때 옆에서 부축하면서 층계를 오른 기생들이 기겁해 손으로 한길수의 입을 막으면서 월향의 방을 눈짓했다.      한길수는 우멍눈을 가슴츠레 뜨면서 뭔가 눈치 챘다.      (어떤 놈이 왔기에 이 지랄들인가?)     길수는 월향을 찾아와 중대사를 토론하여야 하겠는데 웬 놈이 와서 붙들고 앉아있는 것이 아주 불안했다.     그러나 옆에 꼭 붙어 옥방으로 들어가는 기생 년들이 어찌나 예쁜지 월향이고 일본 놈의 통역이고 만나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색마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양옆에 예쁘고 살 냄새 풍기는 기생 년을 두고서도 모자라 복도 벽에 줄느런히 걸어놓은 반라체기생년들의 사진을 흘끔흘끔 도적눈을 팔았다.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고 두 손으로 반 라체 하신을 가린 기생, 일본 녀인머리처럼 부푼 머리카락을 휘감아 올려 동이고 젖가슴을 살짝 반쯤 드러낸 채 외면한 기생, 그 기생들의 사진을 보는 길수의 눈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아이유, 이 양반도. 우리 뭐가 짝져서 어디에 눈을 팔아요?”      “빨리 우리 방으로 들어 가자요.”     기생들이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한길수는 기생 년들의 야들야들한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구슬렸다.     “그래. 어서 들어가자. 요것아.”    길수는 월향의 방을 그저 건너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월향의 방에서는 웬 왜놈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알아듣지도 못할 일본 노래를 부르면서 저인지 숟가락인지 술잔인지 사라인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잘됐다. 이 젊은 기생 년들과 놀면 좀 좋아서. 월향은 월선처럼 이젠 한물 지나간 년이야.)    길수는 복도 마지막까지 나가면서 칸칸의 미닫이문 옆의 벽에 걸린 기생 년들의 사진을 몽땅 점검했다. 그래도 어째 시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양팔을 안고 있는 기생 년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왼쪽팔을 안은 기생은 얼굴이 걀쭉한 년인데 외까풀 눈으로 생글 웃으면서 애교를 부리는 그 눈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이름이 뭐지?”    걀쭉한 기생은 해시시 웃으면서 “뽕녀얘요.”라고 대답하며 몸을 비비 탈았다.    “뽕녀? 좋아. 너와 함께 한판 하면 뽕뽕 가겠구나. 허허허.”    길수는 이번에는 눈길을 돌려 오른팔을 안은 년을 훑어보았다.    반 너머 드러난 풍만한 젖가슴이 백설같이 희고 보름달같이 둥근 우유 빛 얼굴이라든가 진주같이 반짝이는 쌍가풀 눈이라든가 오똑한 코에 키스를 기다리는 빨간 작은 입술이라든가 실로 정이 찰찰 흘러넘치고 그녀의 온몸에서 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에라, 오늘 질탕하게 놀아야겠다. 잘 모셔야 돼.”    길수의 욕망에 찬 말에 기생 년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미닫이문을 열고 길수의 팔을 감싸 안은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에이구, 한 양반. 진짜 황금 한양반을 가지고 왔나 봐.”     “그래. 영월동 한 양반이 그래도 황금 한냥 반이야. 호호호.”     안방에 있던 기생년도 일어나 사뿐사뿐 다가와 길수를 반겨 맞았다.     “안녕하세요?”     한길수는 탐스레 그년의 온몸을 눈으로 쓸어 만졌다.    절반밖에 비단으로 가리지 않은 온몸이 다 익은 감같이 말랑말랑해보였다. 그래서 바삐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복숭아이마에 키스부터 뻑 안겼다.     “넌 이름이 뭐냐?”     “만금이예요. 이뻐해줘요.”     한길수는 양팔에 계집 하나씩 끼고 구들에 들어앉으면서 떠들어댔다.      “그래, 그래. 에이고, 요것들아. 오늘 늘어지게 놀자구나. 누가 소리할 줄 아냐?”      “예. 옥설이가 소리야 잘하지요.”      뽕녀의 말에 옥설은 벽에 기대놓은 가야금을 내려다 술상 저쪽으로 하여 놓았다.     뽕녀와 만금은 바삐 술상을 차려놓고 한길수의 잔과 자기 앞의 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부었다.     뽕녀와 만금이가 한길수의 양 무릎에 올라앉아 잔을 들었다.     “자, 한잔 드세요. 우리 친애하는 한 양반.”      “오, 그래, 그래. 너희들 남대치 말이 우리 함경도 말보다 참 듣기 좋구나.”     한길수는 한잔 쭉 굽냈다.     “캬- 거, 술맛이 좋다. 옥설아. 유행가 한곡 불러라.”     옥설은 꽃방석 우에 치마를 꽃처럼 동그랗게 씌우면서 들어앉아 가야금을 둥기 당당 탔다. 뒤이어 온방에 둥기 당당 가야금소리에 맞추어 은방울 굴리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울렸다.         첫사랑에 마음을 적시던 그 날 밤       오동추야 기나긴 정열의 깊은 밤       나는야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내 사랑 멀리멀리 가버린 첫사랑         가야금아 둥기 당당 울려라       강남에 날아갔던 제비는 돌아오고        훈훈한 봄은야 찾아왔건만       언제 돌아오랴  기약없이 떠나간  첫사랑          “그래, 그래. 너의 첫사랑 내가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그런 의미에서 한잔 들자. 오, 요것아. 헤헤.”       길수는 왼팔로 뽕녀를 안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데 만금이 술잔을 앗아 입에 가져갔다.      길수는 양팔에 뽕녀와 만금을 안고 만금이가 입에 부어주는 대로 술을 마셔댔다. 입귀로 술이 흘러 비단적삼을 적셨다.     “어, 술맛 좋구나. 옥설아, 거 쓸쓸한 노래 그만 부르고 여기 와서 술이나 따르라.”     옥설은 가야금을 내려놓고 나비가 날아와 꽃 위에 옮겨 앉듯이 다가와 섬섬옥수로 술병을 들어 놋 잔에 찰찰 넘치게 부어 길수의 앞에 드렸다.     “아이고, 요 손이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매끌매끌하냐? 요 손으로 입에 부어넣어라.”     옥설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한길수의 침이 발린 입에 술을 부어넣었다.     “어허, 술맛이 참 좋구나. 세상에 이런 재미보다 더 좋은 게 있다더냐?”     한길수는 만금과 뽕녀의 허리를 놓고 술병을 쥐어 두 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붓더니 한잔은 옥설에게 주고 나머지 잔은 자기 손에 쥐였다.     “옥설아, 너를 만나 정말 기쁘구나. 한잔 들자.”    댕그랑.    한길수와 옥설은 놋 술잔을 마주치고 기분 좋게 죽 들이마셨다. 술이 묻은 옥설의 빨간 입술은 앵두처럼 더욱 빨갛게 물기가 돌았다. 옥설을 쳐다보는 한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며 음탕한 웃음을 술이 발린 입가에 띠웠다. 뒤이어 그는 두 손으로 옥설의 하얀 얼굴을 받쳐 들고 은은한 정이 그윽한 깜장 눈을 들여다보면서 지껄였다.    “야, 요년. 하늘이 어쩜 오늘 나에게 너같이 예쁜 애를 주었을까. 네 고향은 어디냐?’’    옥설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김해예요.”라고 대답했다.    한길수는 “그래? 김해라. 멀기도 먼 곳에서 왔구나.”라고 하면서 기막힌지 옥설을 놓아주었다.    “얘, 앉아라. 김해가 얼마나 좋은 고장이니 이런 시골에 와 이런 돈을 버느냐?”   옥설의 깜장 눈에는 이슬이 반짝였고 머리는 폭 숙여졌다.   “너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말해라. 이 영월동의 한길수는 여기 우시장의 왕이니까 어느 놈이 너를 업신여기거나 못살게 굴면 내가 어디까지라도 쫓아가 그 놈의 대갈통부터 박산내겠다. 겁나 말고 어서 말해라.”    옥설은 고개를 천천히 들고 한길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눈치 빠른 한길수는 얼른 옥설의 손을 잡고 잔등을 살짝살짝 다독여주면서 지껄여댔다.    “자, 어서 말해봐. 객지에 나와서 고생이 많지? 성씨부터 말해봐. 집에는 누구랑 있냐?”    만금과 뽕녀는 질투의 눈길로 옥설을 쏘아보았다.    옥설은 눈물을 흘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김해에 있는 김해 김 씨예요. 우리 집에는 우리 오누이밖에 없어요.”    “그래. 네 집이 아주 가난한 모양이지. 이런 일을 하러 이런 시골에 보낸걸 보면.”    한길수가 아무래나 지껄이는 말에 옥설은 화도 내지 않고 묵묵히 하얀 볼에 눈물만 하염없이 줄줄 흘리었다.      그러자 한길수는 가래 같은 손으로 옥설의 볼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울지 마라. 얘, 네가 울면 내 가슴에 칼이 박히는 것 같이 아프다.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필시 무슨 말 못할 연유가 있겠다. 어서 말해 봐.”      이때 말수 적은 옥설이 갑자기 한길수의 손을 뿌리치면서 훌 일어나면서 그릇이 깨지는 듯 악청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가 여기 오기 싶어서 고향을 떠나 왔는가 해요? 누가 이런 노리개질을 하고 싶어 하겠어요? 저 일본 놈들이 붙잡아 와서 여기까지 끌려왔지.”     한길수는 펄쩍 놀라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일본 사람들이 말이 아니구먼. 이런 일이야 어디 강박하면 되는가? 혹시 너 네 집에서 일본사람들에게 빚을 많이 진건 아니야?”     옥설은 문께로 나가면서 “쳇, 우리 집은 김해에서도 한다하는 부자 집인데 바다를 건너온 일본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진단 말인가요? 만금과 뽕녀와 술을 천천히 드세요. 난 오늘 기분이 엉망이 돼서 나가봐야 하겠어요. 후에 놀러 오세요.”    “아, 아니. 옥설아, 가지 말라.”    한길수는 보배나 잃은 듯이 허전해 옥설을 따라 막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 바람에 중절모자가 벗어지면서 번들 이마가 드러났다. 만금과 뽕녀는 배를 끌어안고 깔깔깔 웃어댔다. 그녀들은 황급히 중절모자를 주어준다 번지진 술잔을 주어다 놓는다 하면서 킬킬거렸다.    원래 이마 벗겨진 사내가 바람기가 세다고 했다. 또 월향의 말대로라면 번들 이마 한길수는 너무 바람을 피워 여인들과 섹스를 하다나니 여인들이 너무 바빠 위의 한길수의 머리를 끄당겨서 머리털이 다 빠져 번들 이마로 됐다고 하기도 했다.    이때 바깥에서 웬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이 년아,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잘한다. 네가 감히 내 발등을 디뎌? 이년, 이 경칠 년아. 오늘 죽어봐라.”     찰싹!    옥설의 새된 비명소리 들려왔다.    한길수가 나가 보니 개 난장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글쎄 월향이가 옥설의 귀를 삐틀어 쥐고 방치로 옥설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월향은 한길수를 발견하자 독살스런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퉤, 더러운 영감태기, 그 우멍 눈깔에도 젊은 계집이 보이는 모양이지. 옛날에 누구 덕에 영월동을 가진 걸 다 잊었어? 배은망덕한 더러운 영감태기!”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고 월향은 옥설의 머리채를 휘감아 쥐더니 마구 끄당겼다.     옥설은 두 손으로 머리를 틀어쥔 월향의 손을 잡고 “애고고.” 하며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나체나 다름없는 옥설의 우유 빛 젖가슴이 반쯤 드러나 출렁거렸다.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며 색정광이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큰 구경거리나 생긴듯이 한길수와 월향을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월향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한길수를 망신시켜주려고 한손으로 옥설의 머리채를 틀어쥔 채 다른 손으로 불시에 한길수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그 바람에 한길수의 중절모자가 월향의 손에 빗맞아 벗겨지면서 잔등으로 굴러 땅바닥에 뚝 떨어져 나뒹굴었다. 순간 한길수의 번들 이마가 훌렁 드러나 전등불빛아래 번들거렸다. 한길수는 번들 이마의 땀을 뚝뚝 손으로 찍으면서 월향을 콱 밀치고 옥설의 머리채를 틀어쥔 손을 풀려고 모진 애를 썼다.     “옳다! 잘한다. 이 년 놈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때리려고? 아이고, 분해라! 나 죽는다! 아이고, 이 개 쌍년아, 죽여치우겠다!”     월향은 원통해 악을 딱딱 쓰면서 고함치고 옥설을 꼬집고 쥐어뜯어댔다. 갑자기 그녀는 옥설의 머리채를 놓고 번들 이마를 찰싹찰싹 갈겼다.     구경꾼들은 복도가 꽉 차고 떠나갈듯이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이때 어느 방에서 나왔는지 한 주정뱅이가 장단까지 메고 나와서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러댔다.     “얼씨구 좋다 둥둥. 절씨구 좋다 둥둥. 잘도 싸우라 둥둥. 무기를 대줄게 둥둥. 죽을 내기로 싸워라, 둥둥. 우리 선수 잘 한다 둥둥. 죽여라, 살려라! 둥둥 당당 둥둥 당당!”     갑자기 월향의 방문이 쭈르르 열리더니 코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허연 훈도시 바람에 튀어나왔다. 주정뱅이들과 색정광들이 죽 비켜섰다.    “콘칙쇼(닥쳐)! 난노 고도까(무슨 일이냐)?”    코 등에 붓으로 점을 똑 찍어놓은 듯 코 수염은 아주 위엄스러웠다. 그 뒤로 갱핏하게 생긴 조선인이 뒤따라와 머리를 조아렸다.    뒤이어 그자는 주정뱅이들에게 위엄스런 눈길을 돌리고 우쭐해서 고함쳤다.     “우리 우시장 일본제국 헌병대 대장이시자 총경찰국 끼무라 국장이시다. 너희들이 언감 여기 와서 끼무라 국장의 주흥을 깨뜨리느냐? 어째 대가리가 목에서 떠나고 싶으냐?”     한길수는 제 정신이 펄쩍 들어 코수염을 바라보았다. 보통 키에 똥똥한 땅딸보 끼무라 국장은 옴몸에서 위엄과 힘이 빛발 쳤다.     끼무라는 한길수를 보더니  꽥 고함쳤다.     “빠까새끼 모노라!”     무지한 길수는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저 양반, 뭐라구 하오? 뭐? ‘바가지새끼 못 놀아? 내가 바가지라고? 원, 참.”    그 말에 통역 강철이는 어처구니없어 손으로 입을 싸쥐고 웃었다.    끼무라는 강철과 길수를 번갈아보더니 더구나 언성을 높여 욕지거리를 했다.     “빠까모노(바보)라! 혼야꾸시데(번역해줘)!”     “뭘? 빠개지게 못 논다고?”     끼무라 국장은 다가오더니 한길수의 귀 쌈을 찰싹찰싹 갈겼다. 그가 뭐라고 꽥꽥 고함치자 통역이 이렇게 번역해주었다.     “온 조선이 일본제국의 땅이 됐으니 이 땅 우의 산이고 강물이고 계집이구 몽땅 우리 황군의 것이야! 네가 함부로 놀라는 계집들이 아냐!”     길수는 얼얼해나는 귀 쌈을 손바닥으로 붙들고 그 말을 들으면서 귀뿌리가 웅 하는 것을 느꼈다.     (별 놈 다 있구나. 네놈들이 오지 않았을 때 이 우시장에서 누가 감히 이 어른의 뺨을 쳤니? 우시장의 계집은 몽땅 내 것이었는데 이 오랑캐들에게 수모를 당하다니? 시비도 없는 일본 놈들과 못 놀겠다.)     밸 같았으면 옆에 보이는 걸레대로 오랑캐 개 대가리를 박살나게 때리고 싶었다. 젊었을 때 같으면 그의 소 발굽 같은 주먹이 진작 코 수염의 면상에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영월동을 독차지하려면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볼을 싸쥔 길수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고 끼무라 국장은 기생방에 되들어가 군도를 들고 나왔다.    그때 옥설과 만금이가 끼무라의 양팔에 매달리면서 말리였다.     “류 통역 좀 일본말로 말리세요. 영월동 갑자 한길수 어른이시오.”     옥설의 말에 그제야 제 정신이 펄쩍 든 통역 류강철은 끼무라국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쑹얼거렸다.    끼무라 국장은 한길수의 번들이마를 쏘아보다가 자기 팔을 감싸 안은 하얀 두 팔을 내려다보더니 군도를 든 채 지껄였다.    “고노 빠까 또 난노 간께이까(이 바보와 무슨 관계인가)?”      기생 년들이 끼무라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 턱이 있는가? 그저 머리만 끄덕이면서 군도를 앗아내려고 했다.     화날대로 난 끼무라 국장은 두 기생 년을 활 뿌리치고 서리발치는 군도를 들고 한길수에게 덮쳐들어 내리찍었다. 하도 한길수가 옛날 솜씨가 있어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날아드는 군도를 피하였으니 말이지 몸이 진작 두 동강이 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한길수는 일본 국장에게 반격을 가할 수도 없는지라 이리저리 날아드는 군도를 좁은 복도에서 피하다가 다리야 날 살리라고 층계 쪽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이때 월향은 그 꼬락서니가 보기 좋다고 손벽을 쳐댔다. 그녀는 진물로 더러워진 팬티를 쭉 벗어 자기 옆으로 달려 지나가는 한길수의 번들 이마에 꾹 씨워 놓았다.     뒤에서 끼무라가 군도를 휘두르면서 달려왔다.    "사람 살려라!"    한길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번들 이마에 팬티를 뒤집어 쓴 채 아래층으로 달아났다.    그는 황급히 당나귀 차에 달려가 올라 앉으려고 버둥거렸다. 갑자기 일본 헌병 놈들이 달려들어 허리춤을 꽉 잡아챘다. 그 바람에 바지가 쭉 벗겨지면서 한길수의 함지만한 엉덩이가 훌렁 드러났다.     한길수는 인력거에서 허망 눈길에 떨어져 굴면서도 바지춤만은 춰 입었다. 월향의 팬티를 번들 이마에서 벗겨 던지며 일어섰다. 그는 이쪽에 군도를 쥔 끼무라 국장의 뒤를 따라오는 통역에게 고함쳤다.     “이보게, 국장님께 잘 말해주게나. 사실 저분께 드릴게 있어 왔네.”    통역은 재미나서 구경만 하다나니 또 통역할 것마저 다 잊고 멍해 서있었다.     이때 옥설과 뽕녀가 끼무라 국장의 뒤를 쫓아와 양팔을 안고 군도를 휘두르지 못하게 말리면서 살뜰한 몸짓으로 애교를 부렸다.     끼무라 국장은 통역을 되돌아다보면서 꽥 고함쳤다.     "류상(류군), 하야꾸 혼야꾸(빨리 번역해)!”     강철은 한길수란 건달두목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지라 길수에게 좋게 마구 날조해 통역했다.     “저 영월동 한길수령감은 대일본제국 끼무라 국장에게 선물과 함께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계집들은 마음속에 끼무라 국장 밖에 없다면서 오늘 밤에 둘이 다 국장님을 잘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끼무라는 군도를 든 채 두 계집을 차고 월향의 칸으로 되들어갔다.     옥설은 끼무라를 끼고 기생집 문턱을 넘어서면서 당나귀 차에 올라탄 한길수에게 눈을 찔끔 감아보였다. 월향은 길수를 허비고 뜯고 싶었다. 그년은 끼무라가 옥설을 안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끼무라에게 원망에 찬 눈길을 보냈다.    주정뱅이는 모든 일이 끝났는데도 또  뜨르륵 딱딱 둥둥 장단을 치면서 흥타령인지 넉두린지 지지벌거렸다.    “얼씨구 좋다. 둥둥. 절씨구 좋다! 둥둥. 잘도 싸워. 둥둥. 무기를 대줄게, 둥둥. 죽을내기로 싸워라. 둥둥. 우리 선수 잘 한다 둥둥. 죽여라 살려라 둥둥!”
36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23) 읽기 힘든 경 김장혁 댓글:  조회:648  추천:0  2024-03-05
                                      6. 읽기 힘든 경          자오록한 안개 카텐이  서서히 걷히며 하루 서막을 멋지게 열어놓는다. 보이지 않는 화가가 파란 하늘 도화지에  꽃구름도 둥실 띠워 놓고 자취를 감춘다. 아침 햇살이 은침, 금침으로 이영납새를 송곳질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기지개를 켠다.     병완은 마루에 앉아 대통을 뻑뻑 빨면서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변화 무쌍한 하늘을 내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안돼. 우리 집 대 끊기게 할 순 없어. 첩을 들여앉혀서라도 성칠한테 떡돌 같은 손자를 안겨 줘야지.)        마당 백약나무 가지에 난데 없는 까치 날아와 꽁지를 달싹이며 까깍, 까깍 울었다.        (오늘 무슨  기쁜 소식이 있다고? 흥, 누가 오겠는가? 옛날부터 여자가 애를 낳지 못하는 건 칠거지악중의 으뜸가는 죄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옥은 시집 온지 10년이 넘도록 애를 하나 낳지 못하지 않는가.)      집집마다 읽기 힘든 경이 있다고 병완은 하옥이 애를 낳지 못해 속이 다 대통 속 불처럼 빠직빠직 타들어갔다. 대통을 마룻바닥에 탁 털어버리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장손을 안아보지 못하구 말겠다. 그만 기다렸으면 잘 기다렸지. 흥!”      그는 지난해 가을 달밤에 성칠과 은녀가 한길수네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방둑 버드나무아래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후에는 착잡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은녀 영월 엄 씨만 아니어도 진작 새 며느리로 맞아들여 왔을 걸.)      성칠의 일에 골머리가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막내딸 곰순마저 운주동의 전주 김씨네 맏며느리로 범석에게 시집 간지 석삼년이 지나가도록 태기가 보이지 않아 큰 근심거리였다.      단오명절에 병완의 4대 스물일여덟이나 되는 식구들이 몽땅 영월동에 다시 모여 명절을 쇠게 됐다. 그런데 이튿날에 운주동의 최구장이 사촌동생 최구철과 조카 진달래, 맞아들 경숙과 둘째아들 경인을 데리고 영월동으로 찾아왔다.     병완의 온 집안 식구들이 몽땅 나가서 마중하여 인사를 나눴다.     특히 성칠은 구철의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까지 올렸다.     그때 얼굴이 가맣게 탄 진달래가 나와서 성칠의 손을 잡고 생글방글 웃으며 반기었다.      "오빠, 그간 잘보냈는가요?"     하옥은 먼 발치에서 두 손을 앞섶에 모아쥐고  멍해 서있었다. 성칠은 아내 하옥을 보기 민망하여 뒤를 흘끔 돌아보면서 인차 손을 뺐다.       모두들 집안에 들어와 좌석을 정하자 최구장이 염소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지난해 이 집 맏아드님 신세에 감자농사도 지켜내고 멧돼지고기도 잘 먹었어요. 참말로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을. 우리 두 집안이야 진작 서로 사돈이 아닌가요. 내 막내며느리 최사련이는 개성 최 씨 아닙니까? 그 집과 한집안 사람들이 아니고 뭣이요.”      한참 족보를 따지더니 최구장은 최사련이 자기 집안 누이벌이 된다는 것을 인차 확인했다.      작달막한 막내며느리 최사련은 임신한 몸으로 최구장과 최구철에게 인사를 올린 후 부엌에 내려가 동서들과 함께 점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참 후 병완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또 인사를 올렸다.      “어느 해 가을에 내 맏아들 성칠이 백두산까지 갔다가 최구철 영감의 신세를 많이 졌더구먼. 정말 감사하오.”       최구장과는 달리 억대우같은 최구철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단마디로 뚝 찍어 말했다.       “우리 사냥꾼들이야 세상을 다 자기 집으로 여기죠. 수림 속에서 서로 만나면 형제처럼 생각하지요.”      진달래는 성칠의 처 하옥만 자꾸 쳐다보았다.     사실 최구장이 이번에 진달래까지 데리고 온 것은 진달래의 청에 못 이겨 성칠의 집안형편 특히 성칠의 아내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려는 것도 있었다.     최구장은 확실히 성칠에게 예쁜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 진달래의 혼사말은 접어두기로 했다.     이때 최구철이 형님에게 눈짓했다.     최구장은 뜻밖의 혼사 말을 꺼냈다.     “김 영감, 우리 두 집안은 세세대대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보냅시다. 하긴 이번 걸음에 우리 집 둘째아들 경인과 이 집 맏손녀와의 혼사 말을 하러 왔소이다.”    병완은 놀랍기도 하고 기뻐서 바로 앉으면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저, 칼을 잘 쓰던 총각과 말이요?”     최구장은 “예, 그렇소이다.”라고 대답했다.     병완은 경인을 마주 보면서 거듭 치하했다.     "전번에 청명절에 굿 구경을 하다가 보니 칼도 잘 쓰고 날래더구먼.”      경인은 제꺽 일어나서 허리를 굽히며 겸손하게 답례했다.     “재간 없는 놈을 치하해주어 고맙습니다.”    병완은 인사를 받고나서 기준을 돌아보았다.     “ 좋은 일이오. 그러잖아도 맏손녀가 이젠 시집갈 나이도 돼서 신랑감을 찾아주자고 하였소이다. 이제껏 혼사 말이 많이 들어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는데 잘 됐소이다. 어금이 애비는 어떻소?”     기준은 경인을 다시 여겨보더니 시원하게 한마디로 뚝 찍어 말했다.     “아버지 의향을 따르겠습구마. 아버지께서 결정을 내립소.”      “이 일만은 아비가 결정하오.”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와 함께 부엌일을 하던 어금은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병완은 원래 불같이 급한 성미인지라 이 혼사 말을 응낙했다.     “좋소이다. 귀 댁 둘째아들을 둘째 손녀 신랑으로 맞아들이겠습구마.”     “감사하옵니다. 경인아, 이젠 가시조부모부터 인사를 올려라.”     최구장이 부탁하자 경인은 가시집 어른들에게 순서대로 일일이 큰절을 올렸다.     병완은  성희를 보고  술상을 차리게 했다. 이윽고 뜨거운 사돈의 정을 나누는 술판이 벌어졌다.      운주동에 돌아온 최구장은 둘째며느리를 삼게 되여 속이 흐뭇하기로 더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정작 사돈보기를 하고 결혼잔치를 치르자니 돈이 없어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나갔다.      집집마다 읽기 힘든 경이 있다고 최구장의 집에도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다섯째아들 경석은 막내라고 응석받이로 자랐다. 그는 장가를 든 지 몇 해 되건만 어찌나 약 담배를 피웠는지 집 안에 큰 경을 칠 지경이었다.     경석은 최구장의 집 앞 몇 집 건너 세간나서 살았다.     최구장은 경석이 서당방을 나온 후 형내 할아버지 관준에게 보내 형내와 함께 한의를 배우게 했다.     경석은 게을러 공부나 일이나 다 하기 싫어 했다. 그는 관준 스승한테서 귀동냥이나 해 침도 놓고 한의 처방도 좀 뗄줄 알게 됐다.  그런데 량혜자한테 장가를 들어 세간 난 후부터 가장이노라고 병이나 봅네 하면서 집 일에는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후 우연히 약 담배에 맛을 들인 후부터 집구석에 들어 누어 약 담배만 풀썩풀썩 피웠다.     혜자는 게으름뱅이 남편을 믿고 살기 힘들다고 내내 시아버지한테 찾아와서 고청을 들이군 했다.     어느날 혜자는 경석이 시아버지 질책했건만 계속 집구석에 들어누워 약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는 것을 보고 눈이 퉁퉁 붓게 대성통곡쳤다.  나중에 그녀는 애 띠를 들고 뒤 산으로 스적스적 올라갔다. 그녀는 이를 옥물더니 정말 나무에 올가미를 매놓고 목을 턱 걸고 매달리고 말았다.     경숙이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뒷산에 뒤쫓아올라갔다. 제수는 글쎄 나무 가지에 애 띠로 목을 매 둥둥 달려 있지 않겠는가.     경숙은 황급히 축 늘어진 제수 몸을 무릎으로 받치고 왼손으로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목을 맨 띠를 풀었다.    그는 지체할세라 제수를 들쳐 업고 집으로 달려왔다.    제수 몸이 축 처져서 자꾸 내려가 춰 업느라고 엉덩이에 두 손이 가닿았다. 그러자 혜자의 몸이 옴찔 움직이지 않겠는가.    “부끄러운 걸 아는 거 보니 살아났구나.”    경숙은 중얼거리면서 제수를 업고 집에까지 돌아왔다.    시어머니 성단은 작은며느리를 경숙의 잔등에서 받아 함께 가마 목에 눕혔다.    성단과 옥실은 혜자의 손을 주물러 준다, 수건을 젖혀 이마를 닦아준다 하면서 분주히 서둘렀다.    소문을 들은 형내가 달려와서 발바닥과 코에 침을 몇 대 놓았다.     한참 후 혜자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젠 살았구나. 아가야, 물을 받아넘겨라.”      혜자는 시어머니가 숟가락으로 떠 넣는 물을 받아 겨우 넘기었다.      그녀의 눈귀로부터 눈물이 주르르 흘러 양 볼을 적시면서 베개 잇에 뚝뚝 방울져 떨어졌다.      최구장은 며느리 옆에 다가앉아 달래였다.      “아가야, 내 경석이, 그 놈을 톡톡히 혼내 줄 테야. 다신 멍청이 짓 하지 말라우."      혜자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간신히 띠염띠염 말했다.     "아,아버님, 어, 어떻게 저런 나, 나그네를 믿고 살아-요. 죽, 죽기보다 못 해-유. 흐흐흑, 흑흑.”      “쯧쯧쯧,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새파란 나이에 이를 악물고라도 살아야지.”     최구장은 답답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집 안에서는 여인의 흐느껴 대성통곡 소리가 동네 떠나가게 끊임없이 울렸다. 애닲은 울음소리 사람들의 마음을 칼로 에이며 깊숙이 파고 들었다. 딱 마치 초상난 집 같아 스산하기 그지없다.      집 앞의 살구나무에 웬 비둘기가 앉아 날개를 파닥이며 하옥의 처지 불쌍해 굿이나 하듯 섧게 꾸- 꾸- 울고 있다…
367    아동소설 꿈 많은 향화 김장혁 댓글:  조회:695  추천:0  2024-02-23
       아동소설       꿈 많은 향화                      김장혁                                     1     향화, 참말 이름처럼 어여쁜 애지요. 외씨같이 걀쭉한 얼굴에 예지로 반짝이는 새별눈, 항상 응석을 부리는 작은 앵두입, 실로 비너스 버금으로 곱게 생겼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옥에 티라고나할까요. 그 걀쭉한 얼굴 왼쪽볼에는 좁쌀만한 기미가 괘씸하게 나 있었어요. 말도 말아요. 그 기미 때문에 우리 귀여운 향화가 닭똥 같은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요?    향화는 원래 계산문제풀이는 번개불이 번쩍나게 풀어 학급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꼽히였고 “패뜩골”이란 별명까지 딱 들어붙었어요. 그런데 요즘 그는 영희랑 무용써클실에서 디스코와 발레무용을 배워 신나게 추는 것을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지요. 그 후부터 그는 어쩐지 응용문제풀이가 딱 싫어졌어요. 공부하기보다 춤추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고상하다고 생각됐던 것이지요.   어느 날, 향화는 영희를 앞세우고 무용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저를 무용써클에 받아주겠어요?”   향화는 간절한 눈길로 무용선생님을 바라보며 애원했어요.  무용선생님은 향화의 얼굴로부터 발끝까지 참빗질했어요. 그런데 무용선생님의 눈길이 향화의 볼에 피뜩 멎더니 도리머리질했어요. “돌아가 공부나 잘 하세요.” “녜? 요 기미 때문인가요?” 향화의 손이 기미에 가 멎었어요. “동문 무용하긴 좀 그래요.”   향화는 무용교연실에서 나온 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나 패뜩골인 그의 머리에는 패뜩 한 가지 꾀가 떠올랐어요. 그는 침대에서 바시시 일어나서 어머니 화장품통을 들춰 가지고 거울에 마주 섰어요. 뒤이어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던 눈언저리를 싹 닦고 그 얄미운 까만 기미에 새하얀 분을 발랐어요. 그러나 청어름에 서리 내린듯해 괘씸한 기미 형체를 감출 길 없었어요.    애탄 나머지 그는 아예 분세수를 하다시피했어요. 거울을 들여다보니 실로 온 얼굴은 밀가루주머니에 빠졌다 나온 것 같지 않겠어요. 눈섭은 서리를 맞은 것 같았고 오똑한 코마루 량옆의 물기어린 깜장눈만 가려볼 수 있었어요.     순간 향화는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량볼 우로는 줄 끊어진 구술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렀어요. 이튿날 아침, 향화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을 훔치다가 걀쭉한 얼굴에 웃움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어요. 어여쁘게 생긴 얼굴과 몸매를 보고 자신감이 생겨났어요.    (무대와 열대여섯미터 밖에 있는 관중들이 어찌 화장하고 뺑뺑 돌아치는 요 작은 기미를 보아낸단 말인가! 우리 어머니 주근깨 다닥다닥해도 열다섯미터 밖에서 보면 미인이여서 “열댓미터 밖 미인” 아닌가. 나도 이제, 호호호.)     그는 축 처졌던 어깨가 당금 으쓱해졌어요. 무용수로 될 꿈이 새록새록 다시 싹 텄어요. 하여 그는 새 희망을 품고 재차 무용선생님을 찾아가 울먹울먹해서 기미 있어도 괜찮다고 실토정하면서 애원했어요.    그러나 무용선생님의 말씀은 이러했어요.   “향화, 꿈은 좋은데요. 누구나 춤추고 싶으면 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딱 기미 때문만이 아닌데요. 향화는 예쁘긴 한데요. 키가 좀 작아서 무용하기는 좀 그래요.”    원래 무용선생님은 처음에는 향화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같아 완곡하게 거절했지요. 그러나 한 학생의 전도와 관계되기에 이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향화는 어깨가 맥없이 축 늘어졌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기보다 한뼘씩이나 더 큰 무용써클 애들이 춤을 추며 골리는듯한 눈길로 힐끔거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향화는 그만 위축감이 들어 엉엉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는 책상다리라도 발 밑에 이어놓고 싶은 애절한 심정이었어요. “울지 마세요. 정 무용을 배우고 싶다면 오후부터 배우세요.” “예? 정말입니까? 야, 좋아라!”     향화는 언제 울었는가 싶게 눈물을 싹싹 닦고 무용선생님의 손을 잡고 퐁퐁 뛰다가 와락 안겼어요. 오후부터 향화는 영희네와 함께 아름답고 경쾌한 선률에 맞춰 무용을 배웠어요. 얼마나 신났는지 몰랐어요.    요즘 그는 벌써 명무용수로 돼 오색찬연한 무대에 올라 선녀처럼 날씬한 몸매를 놀리면서 장고를 둥기당당 치며 장고춤을 추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무용배우기도 향화의 생각처럼 순풍에 돛을 단 격이 아니었어요. 아니,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졌어요. 날마다 무용선생님의 장고를 치는 박자에 맞춰 반시간씩 련속 팔다리를 놀리면서 기본동작을 익히느라면 온몸이 해나른해졌어요. 좀 고달프긴 했지만요. 향화는 한학기 배운 후 어지간한 춤은 출 수 있어 고달픔을 어지간히 참아낼 수 있었어요. 한창 자랄 나이여서 그런지 그새 문턱에 올라 키를 재여보니 둬센치미터는 더 자란 것이 아니겠어요.    (그럼 그렇지. 이제 반년 지나 솜옷을 입을 땐 더 크겠지. 등산복도 언니 것만큼 큰 걸로 사야지.)    그런데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됐어요.    무용선생님은 발레무용 기본동작을 배워주기 시작했어요. 발끝으로 서기를 배울 때 실로 참기 어려운 아픔을 참아내야 했어요. 향화는 열개를 셀 때까지도 서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앉고 말았어요. 향화는 발가락이 바늘로 쑤시는듯이 아파 널장판에 물앉아 두 손으로 발가락을 붙잡고 만지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어요.    “울긴? 어서 서요. 이번엔 열다섯개 셀 때까지 서야 돼요.”   “선생님, 발가락이 아파서 못 서겠어요.”   향화는 집에서 부모한테 응석을 부리듯이 어깨마저 흔들며 칭얼거렸어요.    무용선생님은 향화의 발을 매만지면서 차근차근 일깨워줬어요.     “향화, 무용써클에 올 때 그 강렬하던 욕망은 어디 갔어요? 왜 요만한 아픔도 참지 못하고 물앉아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려면 몇분씩 서야 하는데요. 몇초 밖에 서지 못하고서야 어찌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자, 강자가 돼야죠. 견지하면 아픔이란 놈도 달아나요.” 향화는 마지 못해 일어나서 또 연습했어요. 그러나 나흘도 못돼 발가락이 부어오르더니 이젠 발목까지 팅팅 부어올랐어요. 발가락 뼈가 땅바닥에 닿기만 하면 뼈 속까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 눈물을 찔끔찔끔 짰어요. 게다가 발가락 끝은 이젠 걷기만 해도 아파났어요.    고통에 모대기는 향화의 내심을 꿰뚤어본듯이 무용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충고했어요.    “꼭 견지해야 해요. 이 고비만 넘기면 썩살이 생겨 괜찮아요.”    (흥! 남은 아파서 이가 다 쫓기는데. 춤? 무슨 놈의 뚱딴지 같은 바레무용이야!)   향화는 무용선생님의 충고를 들을 염도 하지 않았어요. 게사니무리 속의 병아리처럼 키 큰 영희랑 애들 속에서 춤을 출라니 얼마나 위축감이 들었는지 몰라요. 향화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는지 분이 콱 치밀었어요.    그 후 영희가 와서 무용실로 가자고 잡아끌었어요. 그러나 향화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면서 다시는 무용실로 가지 않았어요.                                         2       한편 무용실에 발길을 끊으니 진절머리나게 매서운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길을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어느 날, 청신한 아침 공기에 답답한 마음을 말끔히 씻으려고 향화는 운동장에 나갔어요. 자오록한 안개 속에서 어디에선가 둥기당당 가야금을 타는 은은한 선률에 맞춰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소리가 향화를 확 잡아 끌었어요.     천천히 다가가 보니 안개 속에 명암이 분명하게 실실이 내리드리운 수양버들가지 아래에서 이웃집 은희가 쪽걸상에 앉아 가야금을 둥기당당 타고 있지 않겠어요.     (호- 저렇게 걸상에 착 앉아 가야금을 타니 얼마나 편안해. 뼈마디 아프게 발레무용을 출게 뭐야?)    향화는 또 패뜩골이 패뜩, 꿈도 패뜩 바뀌었어요.   그는 은희와 지청구를 들이대 그날 오전에 가야금선생님을 만나보게 됐어요.   “오- 아주 곱게 생겼구먼.”   가야금선생님은 향화의 량손을 쥐어 손가락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말했어요.    “손가락도 길죽하니 실로 가야금타기에는 훌륭한 싹인 것 같아요.” 가야금선생님은 향화를 끌어당겨 맞은켠에 앉히면서 당부했어요.   “가야금타기도 이를 악물고 배우지 않으면 발레무용공부처럼 중도낭패하게 되오. 견지할만 하오?”   “예! 어떤 곤난이 있어도 꼭 견지하겠어요.”    한참만에야 향화는 해말쑥한 얼굴을 귀 밑까지 붉히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어요.   (무용선생님이 벌써 뭐라고 쑥덕거렸는가?)     가야금선생님의 짙은 눈섭 아래 맑은 눈은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과는 달리 상냥해 보이었어요. 향화는 머리를 푹 떨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생각할수록 별로 무용선생님이 자기를 무용써클에 받기 싫어서 마지 못해 받고서는 고의적으로 발이 아프게 굴어 저절로 물앉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됐어요.    사실 무용선생님은 향화를 잘 배워주라고 가야금선생한테 주탁했는데도 말이지요.   향화가 뾰로통해 침대에 걸터 앉아 있을 때었어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들가방에 뭘 들고 들어왔어요.   “향화, 월병!”   “야, 내 좋아하는 월병!”    향화는 어느결에 들가방을 채다가 월병을 량손에 쥐고 게걸스레 먹어댔어요.    “어머니, 가야금을 사줘요? 예?”   “얘, 얹히겠다. 천천히 먹어라.” 향화는 월병을 량볼이 볼록하게 넣고 오물거리다 콜록콜록 기침을 깇었어요.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칭얼거렸어요.    “어머니- 가야금을. 예?”   어머니는 향화 잔등을 다독여주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어요.   “춤을 추는데 가야금을 해선 뭘 하느냐?”   향화는 입이 뾰로통해졌어요.   “어머니, 발가락이 아파 발레무용을 추지 못하겠어요. 이젠 가야금써클에 갈래요.”   “그래?”   어머니는 한참 뭔가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얘야, 한창 꿈이 많을 때지만 자꾸 꿈을 바꿔서 되겠니? 뭐 하나 한 가지를 꾸준히 해야지. 우물을 파도 한 곳을 파라고 하잖았니?”   향화는 발을 들어 속살까지 파난 발가락을 보이면서 불평을 털어놓았어요. “보세요. 발가락이 끊어질 지경인데요. 그래도 계속 발레무용을 춰야 하는가요?”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어요.   “아이고, 이게 웬 일이냐? 아프겠구나.” 어머니는 입으로 호호 발가락을 불어주면서 중얼거렸어요. “아프면 가지 말아야지. 괜히 발가락을 다 잃어먹겠다. 내 가슴이 막 미여지는 것 같아. 가야금을 사줄게. 가야금타기는 앉아서 하는 거니깐. 아프잖겠지.” “가야금을 사주겠다는 말씀이죠?” “그래, 우리 요 무남독녀를 사주고 말고.” “야- 좋아라.” 향화는 기뻐 퐁퐁 뛰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들어왔어요.    사연을 안 아버지는 입에 빗장을 지르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날 밤 향화는 꿈을 꾸었어요.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새하얀 백두폭포가 청석옥석을 부시면서 천길만길 하늘가에서 쏟아져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무대배경 앞에서 향화가 걸상에 편안히 앉아 칠색단색동저고리 옷고름을 날리면서 송학이 나래치듯 둥기당당 가야금을 타는데요. 박수갈채가 장내가 떠다갈듯했어요.   “아갸갸!”   비명소리와 함께 향화는 발딱 뛰쳐 일어났어요. 꿈이었어요.   무용선생님이 억지로 무대에 끌어내가는 바람에 향화는 발레무용을 추게 됐어요. 그런데 얼마 추지 못하고 무대에서 뾰족한 못을 꽉 밟고 말았어요.     실로 진저리나는 춤이 그의 황홀한 미몽을 깨뜨렸어요. 그 후 향화는 가야금선생님의 상냥한 눈길을 받으면서 쪽걸상에 편안히 앉아 어머니가 사준 새 가야금을 재미나게 튕겼어요. 무용써클에 가서 은희랑 함께 달타령 곡조에 맞춰 걸상에 착 앉아 가야금타기를 배우는 것이 발레무용배우기보다 식은 죽 먹기로 느껴졌어요.    그러나 오선보 우에 다닥다닥 들어붙은 콩나물대가리를 익히기는 실로 머리가 아픈 일이었어요. 성급한 향화는 그 놈의 콩나물대가리를 쟁개비에 기름을 달이다가 볶아 먹으면 머리에 곡조가 막 떠올랐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럼 얼마나 쉽고도 신나게 가야금을 타겠어요.    가야금선생님은 향화의 곁에 다가와서 차근차근 타일렀어요.    “향화, 어찌 단숨에 배를 불리겠소.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야지.”    뒤이어 식보지식을 개별보도까지 해주었어요.    향화는 울며 겨자먹기로 도레미 콩나물대가리를 익히기 시작했어요.     오선보 악보에 따라 가야금을 타자고 하니 이번엔 두 손이 착착 배합되지 않았어요. 은희랑 다른 애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둥기당당 신나게 탔어요.    그런데 향화가 타는 소리는 애처로운 외마디 비명소리에 달가닥거리며 가야금줄을 받쳐 든 나무 조각이 공명밑판을 두드려 듣기도 역정 났어요.     애탄 향화는 가야금줄을 마구 쥐어뜯다가 꽝 밀어버렸어요. 심지어 어떤 때에는 신경질적으로 가야금을 마구 발로 차버렸어요.    그때 가야금선생님의 말씀이 귀전을 아프게 때렸어요.    “이를 악물고 배우지 않으면 춤배우기처럼 중간낭패를 하게 되오.”    향화는 눈물을 훔치고 마지못해 다시 가야금을 탔어요.    련 며칠 가야금을 탔기에 오른손 식지와 중지 끝에는 콩알만한 물집이 생겼어요. 가야금줄을 튕길 때면 손가락으로부터 팔을 타고 심장마저 바늘로 찌르는듯 찡찡 아파났어요.   “선생님, 이걸 보세요.”   “오-”  선생님은 다가와 향화의 손가락을 쥐고 여겨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성냥곽을 들고 왔어요. “터치기오.” “어마나, 아프지 않습니까?” 향화는 새별눈에 겁기를 꽉 싣더니 손을 뒤로 움츠려뜨렸어요. “겁쟁이야, 우리도 몇 번씩 터치우고 이젠 아프잖아.” “호호호!” 은희랑 코까지 싸쥐고 웃었어요. 선생님은 억지로 향화의 손을 쥐어다가 식지 물집 우에 성냥가치 꼬투리를 대고 화약껍데기를 쪽 문질러 딱총을 놓았어요. 피씩- “아이고머니! 선생님, 살랑살랑!”     향화가 엄살을 부리는 사이에 피씩- 소리와 함께 딱총을 맞은 물집이 데여 터지면서 진물이 주르르 흘렀어요.   “엄살쟁이야, 이제도 두개 더 터치워야 해.” 은희랑 떠들었어요. 피씩- 피씩- 향화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집에 돌아온 후에도 손가락으로부터 가슴까지 찡찡 아려났어요. “아이유, 아파라. 아이고-” “뭐? 어째?”    향화가 문을 떼고 들어서면서 싸맨 손을 쥐고 죽는 상을 했어요.     어머니는 물기어린 눈으로 향화의 싸맨 손을 보더니 호호 불어줬어요. 뒤이어 어머니는 향화를 집에 데리고 들어가 밥상을 마주 앉혔어요. 손수 어린애처럼 밥과 국을 입에 한술한술 떠넣어주기까지 했어요.   말수 적은 아버지는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더니 건가래를 뗐어요. “그렇게 어린애처럼 키우니깐. 의력이 없지.” 향화는 아버지가 얄미워 새별눈을 곱게 흘겼어요.     이튿날 향화는 손가락을 싸맨채 가야금써클실에 갔어요. “싸맨 걸 풀고 가야금을 타오.” “예?”    순간 향화는 새별눈이 화등잔처럼 휘둥그래졌어요. 상냥해보이던 가야금선생님의 눈길이 무용선생님의 엄한 눈길로 변해 겹쳐보이었어요.    그는 흐릿한 눈길로 가야금줄을 내려다보다가 곡조고 뭐고 마구 쥐어뜯었어요. 물집이 터진 손가락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려 가야금줄을 타고 눈물이 흥건한 향화의 얼굴에 마구 튕겼어요. 손가락, 팔, 가슴, 머리에까지 줄이 뻗치며 바늘로 찌르는듯이 아파났어요. 가야금줄은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어요.    향화는 가야금을 활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쿵 쓰러졌어요.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섧게 엉엉 울었어요.                       3      이젠 당장 초중입학시험을 쳐야 하는데요. 향화는 응용문제풀기는 싫고 발레무용 꿈도 가야금 꿈도 다 수포로 돌아갔어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어느 날 저녁, 향화는 텔레비죤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어요. 그물 우로 쉭- 솟으면서 강타를 안기는 랑평, 지도원으로 된 랑평, 열렬한 박수소리 속에 수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받는 중국여자배구팀 여자선수들.     웬 일일가요?    향화의 눈 앞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게 뭐지요? 향화는 수상대 선수들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발견했어요. 관중석에서 부러운 눈길로 하염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영희, 은희. 숱한 동창생들의 눈길이 따가웠어요.    향화는 가슴이 부풀어올라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운동장으로 나왔어요.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이 넘실넘실 춤추는 사이로 보름달이 두둥실 걸려 은빛이 부서졌어요. 그 선경 같은 경치 아래에서 노랑저고리에 연분홍치마를 입은 은희가 가야금을 둥기당당 타고 있었어요. 그 선률에 맞춰 칠색단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영희가 선녀처럼 장고춤을 나풀나풀 추는 것이 아니겠어요.    무용선생님과 가야금선생님이 웃음을 지으며 팔을 홱 휘둘렀어요.    저건 웬 일인가요?    은희와 영희는 가야금을 타고 춤을 추면서 오선보 같은 오색령롱한 칠색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고향의 산마루를 훨훨 날아넘더니 예술학원으로 날아가지 않겠어요.    학교 여자축구팀 말괄량이 경자 등 녀학생선수들은 축구공을 탕! 차더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축구공에 매달려 날아올라 체육학원으로 날아갔어요.    숱한 동창생들은 제마끔 입학시험지를 두 손에 들고 하늘로 쌩쌩 날아오르더니 자기 꿈대로 학교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함께 가자! 영희야, 은희야-”    향화는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목놓아 소리쳤어요.    이때 쏴-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산더미 같은 쓰나미가 덮쳐왔어요. 선생님들이 주는 가야금과 장고를 급급히 받아쥐고 타기도 하고 두드려도 보았어요. 하지만 가야금타기와 장고춤 실력이 차해 한키쯤 몸이 솟다가 되떨어져 내려오군 했어요.     “향화, 뽈을 받소!”    졸지에 체육선생님이 툭 친 배구공이 씽- 날아왔어요.    (옳지. 배구명장으로 돼 내 꿈을 실현해야지.)    향화는 황급히 받아치려고 손을 내밀었어요. 그런데 배구공이 소녀의 가슴에 쨩 맞았어요. 숨이 컥 막히게 찡 아파났어요. 가야금줄을 튕길 때 생긴 물집보다 더 아파났어요.    “에잇, 배구도 못할 노릇이구나.”     이때 쓰나미가 당장 학교 담장을 박차고 들이닥칠 판이었어요.    향화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엉엉 울었어요.    저게 뭐지요?    갑자기 사나운 파도 속에서 고무풍선 세개나 불쑥 솟아올랐어요. 고무풍선 세개에는 각각 가야금, 장고, 배구공이 새겨져 있지 않겠어요.    향화는 머리 우에 둥둥 뜬 그 고무풍선 끈을 황급히 붙잡고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어요. 이젠 고향의 산도 저 먼발치의 모래무지처럼   아득히 내려다보이었어요.    그런데 고무풍선은 영희와 은희가 간 예술학원이거나 경자가 간 체육학원 쪽으로도 날아가지 않았어요. 고무풍선은 아득히 높고 푸른 하늘 우의 먹장구름 속으로 날아들어갔어요. 그 먹장구름 속에 글쎄 올림픽 배구장이 있지 않겠어요. 향화가 구름과 고무풍선을 타고 바야흐로 배구장에 내리려는 순간이었어요.    펑! 퍼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무풍선이 몽땅 터졌어요.   “앗!”   향화는 비명소리와 함께 끊어진 풍선 끈을 잡은채 두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떨어졌어요.   귀뿌리에서 윙윙- 소리났어요.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쳐 내려갔어요.    “어머니!”      향화는 두 손에 식은 땀을 쥐고 고함쳤어요. 그는 몸부림치다가 그만 침대에서 방바닥에 뚝 떨어졌어요. 그제야 향화는 자기가 이제껏 황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꿈, 고무풍선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 꿈많은 향화가 이제 또 무슨 꿈을 꾸겠는지요?     아무리 패뜩골이라고 해도 자꾸 패뜩패뜩 꿈을 바꿔서야 되겠어요?   
36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2) 운주동 검객 김장혁 댓글:  조회:801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5. 운주동 검객            해빛도 따사로운 새 봄이 왔다. 치마봉과 기운봉 기슭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온 산이 연분홍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뻐꾹새들이 수림 속에서 뻐꾹뻐꾹 울고 들에는 종달새가 지종지종 울며 밭갈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운주동 마을 옆의 운주하 개울물이 구름 싣고  파란 하늘을 싣고 조잘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마을 동구 밖의 기운봉 협곡을 흐르는 맑은 벽계수는  조약돌과 민들레꽃과  뭐라고 조잘조잘 속삭이고는 누구를 또 만나 봄날의 사랑을 속삭이려는지 갈 길을 재촉하며 무거운 이별을 한다.          운주동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운봉은 누르스름한 바위와 토색 흙으로 단장한 뭇 산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기운봉의 들쑥날쑥한 갈색바위절벽은 사시장철 구름 속에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안개처럼 물기어린 구름들이 절벽을 씻어 올리다가도 풀렸다. 구름이 천천히 걷히면서 가파른 절벽이  드러나기도 하고 다시 모려오는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기도 하면서 절경을 이루었다.        천태만상의 구름송이는 기운봉의 허리에 감겨 한참씩 쉬다가는 갈 길이 바쁜지 어디론가 총망히 사라져버렸다. 기운봉과 치마봉에 먹장구름이 감돌고 번개가 산허리를 번쩍 칠 때는 꼭 얼마 안 있어 소낙비가 쏟아지군 했다.     비온 뒤면 기운봉과 치마봉 사이 산골짜기에서 쿨쿨 솟는 샘물과 비 물이 갈색바위를 부시며 쏟아져 쏜살같이 흘러 운주동 골짜기를 휩쓸며 흘러 신흥동 쪽으로 내달아간다.     운주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몇 백미터씩 내려가면서 드문드문 통나무집들이 스산하게 널려있었다. 그 통나무집들은 대부분 기와나 벼 짚이거나 조 짚 대신 널판자를 기와처럼 지붕에 얹고 못으로 고정시킨 “널기와 집”이였다. 다만 서당을 차린 최구장의 집만은 청기와를 얹은 목조 팔간 집이었다.      어느 날, 병완은 자식들을 몽땅 안방에 불렀다. 쉰 고개에 오른 병완의 머리에 서리가 새하얗게 내리였다。      병완은 대통에 담배를 꿍꿍 쑤셔 넣고 붙여 물고 뻑뻑 빨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옛말에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우리 집은 커서 사대가 한 구들에서 살아도 된다. 요즘 한길수가 얼리고 닥치고 하는 수작을 봐라. 묵밭마저 더 일구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살겠느냐? 스물두 넘는 식구들이 한 구들에서 손바닥만 한 돌밭을 믿고선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한다.”      병완은 눈 굽에 눈물마저 픽 돌았다.      그는 비장한 결심을 내린 듯이 뒷말을 이었다.     “이젠 별수 없구나. 난 맏이 성칠과 함께 여기서 살 테니까 창준과 기준은 운주동에 세간나 살아라.”      기준은 근심스러워 했다.      “우리 다 가면 저 길수가 아버지 네를 업신여기지 않겠습둥?”      병완은 대수로워하지도 않았다.      “까짓놈들, 흥!"      성칠이 옆에서 위안했다.     "나두 있으니까. 근심할게 없다.”     그리하여 며칠 후 창준과 기준 형제는 상우남면 운주동에 세간나갔다.      운주동에는 키 넘는 새가 들어 누워 있어 새골이라고도 불렀다. 새밭이 무연하게 펼쳐진 골 안에 창준은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짓고 들었다. 그때로부터 창준네 집안은 웃새집이라고 불리웠다.    기준 네는 운주동 웃새집에서 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때로부터 기준네 집은 성남집이라고 불리웠다.      기준은 맏아들 상우와 맏딸 어금이, 그리고 임신한 아내 사련을 데리고 봄에 누런 잔디가 말라붙은 바위틈새에 듬성듬성 난 묵은 풀에 불을 달아 태워 버리었다. 잔 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낸 후 소대가리 같은 나무뿌리들을 괭이로 파내고 도끼로 패서 집에 날라 갔다.    기준은 해뜨기만 하면 온 집 식구들을 데리고 바위 틈 사이에 재를 펴 놓고 나무로 구멍을 뚫고 기밀을 심었고 운주하 강변에 일군 황무지 밭에는 감자를 심었다.     어느 날, 어금은 사철 맑은 운주하 개울물에 빨래하러 나갔다.     빨래터 개울물이 어찌나 맑은지 조약돌이 다 들여다보였고 물고기 몇 마리가 조약돌 틈새에서 지느러미를 하느작거리는 것이 다 들여다보였다.     어금이 한창 개울물에 빨래를 휑구어 납작한 빨래 돌에 올려놓고 방치로 쨩쨩 칠 때다.     애래 쪽 개울가 백사장에 머 태가 치렁치렁한 한 총각이 나타났다. 어금은 누군지 똑똑히 볼 새 없이 빨래를 방치로 땅땅 두드려 개울물에 활활 휑궈 버드나무가지에 널어 말리었다.     그녀는 피뜩 아래쪽을 바라보다가 한 총각이 검술을 익히는 멋진 모습을 보았다.    “어덴가 퍽 눈 익은데?”     그 총각은 시퍼런 검로 몸 주위를 휘감으면서 휘두르는데 서리발이 사처로 빛발쳤다. 총각은 훌 뛰어 날면서 칼로 내리찍었다. 두 다리를 앞뒤로 모래바닥에 쭉 펴고 앉았다가도 훌쩍 뛰어 일어나면서 턱을 발로 차는 동시에 옆으로 칼로 가로 찔렀다.      총각이 검술을 연습하는 장면은 정말 신출귀몰해 보기 장관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앞발을 쳐들고 구름 속의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가도 구름 속에서 날아 내려오면서 꼬리로 땅을 치는듯하고 닭이 외발로 선후 원숭이가 왼팔을 이마 위에 얹고 해를 가리고 먼 곳을 보는 듯 했다. 꿈틀거리는 용이 대가리를 쳐들고 영용무쌍하게 앞으로 무찔러 나가는 듯이 검을 춤추면서 앞으로 찔러나갔다.       그 날랜 검술장면을 보다나니 어금은 그만 손에 쥐였던 빨래를 모래바닥에 뚝 떨어뜨렸다.        “어마나!”       어금은 화뜰 놀라면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녀는 인차 모래가 다닥다닥 매달린 빨래를 들고 개울물가에 가서 훌훌 씻어 버두나무 숲에 널어 말리었다.     이때 허옥실이 봉인을 업은 채 빨래함지를 이고 사뿐사뿐 빨래터에 다가왔다.     “아니, 언니, 참 오랜만이요.”     어금은 방치를 놓고 옥실한테로 다가가 빨래함지를 받아 내려놓고 어린애의 볼에 뽀뽀를 했다.     “아이유, 애기 곱다야, 봉인아, 뽀뽀하자.”     옥실은 빨래 돌을 바로잡아 놓으면서 “봉인이 이름을 우리 시아버지가 근형이라고 고쳤소. 봉인이라는 이름은 애명이라오. 그래서      우리 요 14대 장손부터는 뿌리 근자 돌림으로 애들의 이름을 짓는다오.”라고 했다.     “근형이, 그 이름 좋다. 최구장어른이야 훈장이기에 아무튼 이름도 잘 지을 분이죠.”     그들이 한창 빨래를 하는데 징검다리로 한 총각이 검을 들고 건너왔다.     어금과 옥실이 여겨보니 칼을 둘러멘 총각은 다름 아닌 옥실의 시동생인 경인이었다. 어금이가 바라보니 아까 저기에서 검술을 익히던 그 총각 같았다. 그리하여 어금은 대뜸 머리를 숙이는데 넙죽한 얼굴이 귀밑까지 홍당무가 돼버렸다.     “아주머니, 아직 빨래하자면 물이 차갑겠는데 어째 애까지 업고 나왔소?”     훤칠하게 생긴 경인은 성큼성큼 빨래터에 다가왔다.     “일없소. 시동생, 검술을 익혔소?”     옥실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동생을 바라보며 빨래를 했다. 그런데 어금은 경인이가 다가오자 머리를 점점 더 수굿하고 몸을 외로 탈면서 빨래를 했다. 어금은 웬 일인지 경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높뛰는 것을 느끼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옥실은 어금의 어깨를 톡 밀었다.    “얘, 우리 시동생이야. 은인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 해서야 되니?”    어금은 경인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간 잘 지냈소?”    경인은 검을 뒤로 가져가면서 인사를 받았다.    “양, 그쪽에서도 잘 보냈소.”    그는 서리발치는 칼을 모래바닥에 놓고 개울물에 근육이 울뚝 뿔뚝 한 팔부터 썩썩 씻더니 푸푸 물을 불면서 세수하는 것이었다.     “어, 시원하다.”    옥실이 자기 머리 수건을 벗어주려다가 어금의 옆구리를 톡 건드렸다.     어금은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눈을 곱게 흘기며 옥실을 바라보았다.      옥실은 어금의 옆구리를 더 세게 서너 번이나 톡톡톡 다쳤다.      어금은 그제야 별수 없다는 듯이 머리 수건을 벗어 경인에게 내밀었다.      “옜소. 수건으로 얼굴을 닦소.”     경인은 인차 그 수건을 받지 못하고 옥실을 건너다보았다.    옥실은 눈을 찔끔해보였다.     “아주머니, 이래도 되오?”     “별소리를 다한다. 초면도 아닌 오랍누이 같은 사이에."     옥실은 말을 마치자 어금의 눈치를 살피었다.        어금은 그 자리에 앉아있기 어색해 빨래를 대충 휑구어 꽉꽉 짜더니 함지에 담아 이고 일어났다. 그녀는 몽당치마를 걷어 안은 채 바람이 일게 버드나무숲에 가서 그 곳의 빨래도 걷어 함지에 담아 이더니 머리를 이쪽에 돌렸다.     “언니, 먼저 집에 가겠소.”     “응, 그래라.”     어금은 경인에게 눈인사를 곱게 하고는 머리를 돌려 사락사락 모래를 밟으면서 동네 쪽으로 멀어져갔다.     옥실과 경인은 토론이나 한 듯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동네 쪽으로 빨래함지를 이고 몽당치마자락을 휘날리면서 가는 어금의 뒤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한참 후 옥실은 빨래를 물에 활활 휑구면서 옆에 앉아 칼자루를 매만지는 경인을 보고 넌짓이 말했다.    “시동생, 저 어금은 예쁜데다가 마음씨 또 착한 애요. 저 애를 내 둘째동서로 삶았으면 좋겠는데 아주버니 생각에는 어떻소?”     경인은 외까풀 눈을 끔뻑했다.     “그럼 오죽 좋겠소? 그런데 명천의 울뚝이라고 소문난 기준이라는 양반이 맏딸을 쉽게 줄까?”     그러자 옥실은 정색하여 경인을 바라보면서 힘 주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오. 시부모와 말해볼게.”     경인은 신심이 한 가슴 뿌듯이 생겨났다.     “글쎄 우리 아버지와 병완 영감은 아주 가까운 사이 돼서 아버지가 나서면 설득시킬 것 같기도 하오만.”    청명절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모두 한복차림에 지지고 볶은 제물을 갖춰가지고 조상의 산소로들 갔다.     운주동 뒤 산에는 성처럼 돌담을 쌓은 옛성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옛 성은 고구려 옛성이라고도 했다. 최구장은 그 성안을 명당자리라고 했다. 그 바람에 운주동과 영월동, 신흥동의 사람들은 그 성안 평평한 산중턱에 앞 다투어 산소를 썼다.      청명이 되자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상들의 산소에 와서 가토를 하고 제주를 올리고 절을 올렸다. 성안 평평한 산중턱에서는 무당들이 한창 굿을 하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사람들은 제사를 끝내자 이 곳에 모여들어 무당들이 굿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요염하게 치장한 무당이 무대에 올라서서 굿을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천하의 악귀들을 몰아내고 천하의 어진이들을 잘살게 도와주옵소서. 남자귀신이면 지고 나가고 여자귀신이면 이고 가주옵소서. 조상신들이여, 이 불쌍한 후손들을 도와주옵소서. 병마를 몰아내고 오곡이 풍성하게 복을 내리옵소서.”     무당의 굿이 끝나자 사람들은 제사상에 올렸던 통돼지를 칼로 저며 내 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래야 굿이 잘 든다고 했다.    뒤이어 악귀를 몰아내는 검술표현이 있었다.    그때 산소에 갔던 병완이 일가도 굿 구경을 하러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다. 검객 경인이 나서서 머리태를 휘날리며 훌 날아오르면서 앞으로 검으로 내찔렀다. 그는 땅바닥에 앞뒤다리를 펴서 대고 앉았다가도 하늘로 훌쩍 뛰어 오르면서 옆으로 찍었다.  발로 턱 차기를 하고 뱀이 굴속에서 나오듯이 앞으로 검을 찌르면서 나가다가도  뒷발질을 하며 몸을 홱 돌려 뒤를 찌르기도 했다.     그 날랜 장면을 보고 모두들 혀를 끌끌 찼다.        어금도 아버지 기준의 옆에서 경인오빠의 서리발치는 날랜 검술표현을 보고 박수를 연신 치였다.      “잘한다!”     기준도 그 놀란 검술표현에 고함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장내 숱한 사람들은 경인의 검술솜씨에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병완이 기준을 보고 검객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눈에 익은데. 누군지 모르겠냐?”      기준은 아버지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최구장네 둘째아들이 아닙니까? 전번에 최구장 네 맏아들이 큰잔치를 할 때 신랑의 말고삐를 잡았던 그 총각 말입구마.”        병완은 검술재주를 피우는 경인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경인은 곤두박질재주를 부리며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서리발치는 칼로 악귀를 찍어 토막 내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36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1) 꿍꿍이 김장혁 댓글:  조회:665  추천:0  2024-02-18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4. 꿍꿍이                 바깥에서는 아직도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휘몰아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날려 갈 것만 같았다. 엄동설한에 여우가 눈물을 다 흘리고 박달나무가 얼어서 탁탁 터질 지경이었다. 허나 높다란 토성 안에 자리 잡은 한길수의 집 안에는 불을 어찌나 땠는지 봄날처럼 후끈후끈했다.     본 채에서 응삼은 한길수와 마주 앉아 음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뱁새눈이 실눈이 돼가지고 길쭉한 말상을 찌푸리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병완이 우리 집 도감을 하지 않을 거 같소이다.”      길수는 반쯤 모로 돌아앉으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건 무슨 소리야? 먹은 소 똥을 눈다고 은덩이까지 받았지. 은녀까지 찾아갔는데 안해?”     그는 속으로 응삼이 괜히 병완이가 들어와 자기 위에 앉는 것을 시샘한다고 여겼다.     한길수의 속내를 모르는 응삼은 뱁새눈을 콩알처럼 동그랗게 뜨고 정색해 말했다.     “옛날에 토끼새끼가 용왕을 속여 넘긴 이야기 기억나지 않습둥? 토끼는 거부기 등에 앉아 바다에서 빠져나가 뭍으로 오르자마자 간이고 뭐고 하나도 주지 않고 달아나지 않았고 뭡둥?”     길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건 다 옛말이지. 병완이 그렇게 쉽게 신의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잘 대해주는데 언감 변심한단 말이요?”     그래도 응삼은 계속 쏭알거렸다.    “은덩이는 주더라도 은녀는 인질처럼 붙잡아둘 걸 그랬소이다.”     월선은 길수 옆에 앉아 며느리와 함께 밥상을 손수 거두다가 신경질을 썼다.      “뭐 어째? 그년을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그 굼뜬 년을 내보내고 이제 나이도 듬직하고 역빠른 여자를 들여와야네.”     월선은 밥상을 거두면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저 나그네 곰의 열을 먹더니 그게 놀랍게 세졌단 말이야. 항상 은녀 몸을 흘끔흘끔 훔쳐보군 하던데 언제 일을 칠지 몰라. 은녀를 첩으로라도 들여앉히기 전에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닥치지 못할까!”    한길수가 밥상을 탁 치는 바람에 국물그릇들이 왱그랑 절그랑 부딪쳐 국물이 주르르 구들에 흘러 떨어졌다.    “제길 할, 은녀를 빼가고도 들어오지 않아만 봐라. 내 살려두는가!”     길수는 퉁방울눈알을 부라리었다. 번들이마의 피줄마저 노기에 지렁이처럼 살아나 풀떡풀떡 뛰었다.     뜻밖에도 이튿날에 병완이 또 찾아왔다.     그는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짓고 길수의 집에 들어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물었다.      “오늘 무슨 할 일이 없소?”     한길수는 응삼을 흘겨보았다.     (봐, 내 말 맞지? 신의를 저버릴 병완이 아니지? 흥!)     길수는 병완을 돌아보며 알은체 했다.     “오, 왔는가? 병완이, 자넨 낯만 보이면 되네.”     병완은 허리에서 보자기를 풀어내더니 길수 앞에 쓱 밀어주는 것이었다.     “이건 뭐요?”     한길수는 우멍눈이 휘둥그래났다.     “은녀를 내갔으면 됐지. 친구지간에 은덩이는? 어련히 한 주인의 도감이 되지 않을라고.”     병완의 말에 길수는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은덩이를 도로 받자니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고 도로 줘 보내자니 병완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백설같이 반짝이는 은덩이가 아깝기도 했다.      그때 응삼이 뽀족한 턱을 쳐들고 끼여들었다.       “주인어른, 정 받지 않겠다면 먼저 받아 둡소.”     길수는 짐짓 “에끼, 이 사람아, 내 어찌 줬던 걸 도로 받는단 말인가!” 하고 능청스레 아닌 보살을 떨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은덩이를 싼 보자기를 스리슬쩍 응삼의 앞에 밀어 보냈다.    주인의 눈치를 챈 응삼은 제꺽 그 보자기를 받아 쥐었다.    “이후에 수고비로 드려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철주는 병완이 빈 손으로 문 밖을 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기 꾀가 드는 것 같아 속으로 흐뭇해했다.     한길수는 응삼과 철주를 불러놓고 다음 일을 상논 했다.     “얘들아, 아무리 봐도 성칠에게 속힌 것 같다. 창렬 네 빚 대신 그 곰의 열을 받아 먹은 게 영 속에 내려가지 않는단 말이야.”      응삼은 뱁새눈을 간사하게 뜨며 끼어들었다.     “이젠 병완이 우리 사람이 됐으니 창렬이 누굴 믿고 빚을 갚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번 기회에 창렬을 보고 은녀를 되돌려 보내라고 하든지, 아니면 빚 문서를 다시 꾸며 돈을 내라고 하든지 합세다.”     길수는 조왕 쪽의 월선과 며느리 눈치를 힐끔 보면서 중얼거렸다.     “에이고, 빚 문서를 다시 꾸며서야 언제 그 가난뱅이한테서 받아내겠소? 아예 다시 은녀를 붙잡아 오는 게 상책이야.”     “안돼! 그년을 데려다 첩년이라도 시킬 예산인가요? 이제 내보낸 지 며칠이라고 그년을 또 끌어들인단 말이요? 그저 은녀, 은녀 하면서. 원,  더러운 꼬락서니를 못 보겠어.”     월선은 구들에서 일어나 호랑이 궁둥이를 흔들면서 발까지 탕탕 구르며 야단쳤다.     그때 철주가 나서서 난처한 기분을 돌려세웠다.     “엄마 말에도 도리 있습니다. 이제 은녀를 들여다 앉히려면 병완이가 또 은녀 역세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덮어놓고 있다가 우리 빚 문서에 그대로 적어두었다가 아무 때 건 병완이 눈을 감아주게 한 후 받아내면 됩니다. 문제는 병완이 이 마을 가난뱅이들의 역세를 들기에 우리 집에서 빚을 받아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응삼은 그러지 않아도 그 놈 우직한 병완이 자기 우에 와서 누르고 앉는 것이 속에 걸렸는데  한술 더 떴다.    “아예 저 병완 놈을 없애치우면 우리가 이 마을에서 쥐락펴락 하면서 살겠는데.”    그러자 철주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누가 듣겠습니다. 이 일은 천천히 의논해봅시다. 그래도 병완이 우리 집에 들어와 도감을 하겠다고 하니 천만다행입니다. 이후에는 창렬의 빚을 받아도 아버지가 나설게 없습니다.”     “그럼 누굴 내세우겠니?”     “병완을 내세우십시오. 빚도 받아내고 병완과 창렬을 리간 놀면 일거량득이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철주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를 끄덕였다.     며칠 후 길수는 병완을 불렀다.     병완이 길수네 으리으리한 울안에 들어서니 길수가 번들 이마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집 도감이 왔소? 오늘 내 요긴한 일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자, 안에 들어가 의논합세.”    길수는 병완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이런 일이오. 저, 전번에도 말이 있었지만 그 곰의 열이 되면 몇 원이나 되겠소? 그러니 자네가 응삼과 함께 창렬의 집에 가서 빚으로 한 십 원이라도 받아오게나.”    병완은 건 가래를 떼더니 도리머리질했다.    “이보,  너무 염치없이 놀지 마오. 그 곰의 열은 우리 성칠이 창렬의 폐병을 떼라고 준 게요. 그걸 가져다 먹고 빚을 받지 않겠다구 했으면 다지. 이제 와서 또 번져 누우면 이후에 영월동의 몇 백 집에서 누가 자네의 말을 믿겠소. 난 그런 일을 돕지 못하겠네.”     병완은 아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려고 했다. 길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멍해 앉아서 떠나가는 병완의 떡돌같이 넓은 뒤 잔등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듯 했다.     길수는 어린 아들 철주의 말을 들어 병완에게 놀림을 당한 듯 하는 감이 들었다. “제길 할, 병완에게 도감을 맡기니 이 집안 일이 더 시끄러워!” 그 말에 철주의 색시 단춘이 정주에서 입귀를 비쭉했다.     안방에서 철주는 아버지를 일깨워 주려고 들었다.     “아버지, 지금 서울이고 어디고 일본 사람들이 게다짝을 딸까닥거리면서 욱실거리고 있습니다. 전번 3월 1일에 조선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하겠다고 ‘만세’를 부르면서 야단쳤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길수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내 명천과 우시장에 내려가니까 몇몇 조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만세!’ 하고 외치더라. ‘만세!’ 하고 소리쳐 뭘 한다니? 쪽발이들이 만세소릴 듣고 도망간다더니?”      철주는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홰홰 돌렸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았기에 장차 살기 더 힘들게 될 것입니다. 맨 우리 조선 사람들만 살아도 손바닥만 한 땅에서 살기 힘든데 일본 사람들까지 들어와 빼앗아 먹으니 말입구마.”      한철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3.1운동 때 서울 광화문 앞에서 시위행진을 했다가 일본 놈들한테 쫓겨 고향으로 피신해 왔습구마. 이다음 이 골 안에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을 거 같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마을의 인심을 틀어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눈앞의 이익을 너무 차리지 말구 인심을 내야 합니다. 병완 같은 힘장사들도 도감자리를 주어서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이거야 말로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이 골 안의 큰 이익을 통 채로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인심이 천심이라고 이 골 안에서 병완에게 인심이 쏠렸기에 자칫하면 이 골 안의 실제 주인은 병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가 일본사람들과 먼저 손을 잡는 날엔 우리 땅이고 뭐고 다 빼앗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가? 그런데 네가 일본 사람들과 등을 졌으니 큰일이고나.”     철주는 개의치 않았다.     “근심 마십시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아들의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씃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었다.     한참 후 길수는 선수를 치려고 들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명천 고을에 가서 일본 사람들을 친해 놓는 게 옳지 않는가?"     철주는 입을 함박만큼 딱 벌리었다.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통 채로 먹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자들이 삼림이 우거진 우리 이 골 안을 와서 보면 놔 둘 것 같습니까?”     “그럼 어찐단 말이냐?”    아버지가 난감해 상을 찡그리자 한철주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당면에 이 골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빚을 받지 못할 까봐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기실 일본 사람들을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 말은 일본 사람들을 친해놓자는 게다.”     그 말에 응삼이가 말대가리를 흔들면서 찬동했다.     “주인어른의 말씀이 옳습구마. 일본 사람들도 사람이겠지요. 우리가 그자들을 잘 친해놓으면 등에 업고 병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 골 안을 쥐락펴락할 수 있습지요.”     “음.”    길수는 번들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우멍 눈을 흡떴다가 떼룩거리면서 속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응삼이 길쭉한 말대가리를 길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지, 그래. 음, 그 수가 참 좋아. 눈앞에 이익만 볼게 아니구나. 음, 그래, 그거야 말로 돼지들에게 겨를 주고 통째로 잡아 돼지고기를 먹는 격이지. 허허허.”     토성 안 집에서는 해 질 때까지 간사한 웃음소리,  음흉한 꿍꿍이 끊이지 않았다.    토성 밖에서는 밤  늦게까지 음산한 눈보라가 온 마을에 공포와 날벼락을 휘몰아 오고 있었다. 공포에 얻어 맞은 벌거숭이 나무와 초가집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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