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혁 작 장편소설 황혼
4. 나영이
둥둥, 둥둥둥!
저승사자 황천길을 재촉하는 북소리 요란하건만 삶의 실오리만한 미련의 꼬리가 혼을 육체한테 끄집어 당기어다 넣으려고 모지름을 쓴다.
공포가 죽음의 노래를 부르며 염라전의 층계에 도사리고 앉아 하품을 하며 낮잠을 청한다.
황천의 블랙홀에서는 억울하게 시들어간 혼들이 아우성치며 소용돌이에 휘말리어 간다.
허깨비 같은 혼은 용케도 저승의 블랙홀 절벽 틈 사이에 손톱, 발톱을 박으며 한발자욱, 한발자욱 련옥을 지나 이승으로 기어나온다.
아, 그게 단떼의 “신곡”의 지옥과 련옥을 이은 무지개 다리인가? 아니면 베니스성의 “7보한숨” 소리인지 누가 알리오?
혼은 천정에 디룽디룽 매달려 있다가 종호의 육신으로 되돌아와 안착하며 한숨을 호- 내쉰다.
“아빠! 좀 깨나세요. 이젠 보름 동안이나 누어 있었는데요. 좀 일어나세요.”
갑자기 귓구멍이 뻥 뚫린다. 온갖 잡소리 다 들리어온다.
창 밖의 새소리인가?
(아니야, 내 딸의 목멘 부름소리 아닌가?)
종호는 살며시 눈을 뜨려고 애썼다. 그러나 눈까풀은 천근 무게나 되는 것 같아 좀처럼 뜰 수 없었다.
(참, 삶의 의욕이란 고약하구나. 이 놈 세상에서 살기 싫어 왼 손목 핏줄을 끊어 자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점점 정신이 말쑥해지면서 딸을 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때 내 귀에는 분명 려향이 목소리 들리었다.
“나영 언니 아빠를 보려고 왔어요.”
(뭐? 나영이?)
이게 뭐야? 여자 이름 들리자 종호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아빠!”
려향의 걀죽한 얼굴이 흐리마리하게 보이잖겠는가?
그 옆에 웬 하얀 옷들이 빼곡이 둘러 서 있다. 무슨 구경거리 있다고 이래? 남은 다 죽어가는데. 참. 아직도 어수선한 세상이야.
내 입술이 저도 몰래 씰룩거렸다.
“나영인가?”
그러나 나영의 걀죽한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다.
려향이 내 입에 귀를 바싹 대었다.
“나영이…”
“오- 아빠, 나영 언니 급한 일이 있어 갔어요. 내일 또 올 거예요.”
려향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순간 뜨거운 눈물방울이 내 볼에, 눈확에 방울방울 떨어지었다.
려향은 아버지가 혹시 나영이 이름을 부르면 깨나겠는가 해 수를 써 보았던 것이다. 그 수는 진짜 효험을 보았던 것이다.
내 얼굴을 간지르는 나른한 머리카락 사이로 슬픔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린다. 눈물 방울 사이로 우는 사랑의 바람소리 귀를 스치며 통곡친다…
며칠 후 나는 나영이 왔다는 소리에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분명 귀여운 딸애 얼굴 옆에 나영의 걀죽한 얼굴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리선생님, 끝내 깨났군요.”
“기적이오!”
“김춘희 박사님, 감사해요. 유럽 관광을 가기로 했다던데요. 어쩜 여기까지 와서 아빠를 구해주셨어요?”
“감사는 무슨, 감사는 아버지 고중동기 딱친구 리문걸선생님한테 드리오. 리문걸선생님은 입원치료 받는 처지에서도 날 보고 종호 사장님을 꼭 구해달라고 하잖겠어요.”
“네-고마운 분이군요. 이담 꼭 찾아 인사드려야겠어요.”
종호는 흐리터분한 눈길을 려향이와 말을 주고 받는 여성한테 돌리었다. 그저 시허연 벽과 하얀 옷, 흰 모자가 희미하게 허상처럼 보일뿐이다.
(그럼 김춘희 박사가 한국까지 나와서 날 구했단 말인가? 아님, 내가 지금 중국에 돌아왔는가? 여긴 도대체 어디지?)
나는 놀랍게도 무슨 속궁리까지 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날마다 아빠하고 몇마디 말이라도 주고 받아요. 그럼 정신회복에 도움이 돼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오래 하진 마세요.”
“네. 알겠어요.”
이때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잡는 것이었다.
“리선생님, 좀 괜찮지오?”
종호는 쌍까풀눈을 크게 뜨려고 무등 애썼다.
“누, 누구…?”
그러나 입술이 무거워 온전히 말을 번지지 못했다.
나영은 뜨거운 눈물방울을 종호의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었다.
“리선생님, 저, 나영인데요. 선생님, 왜 이렇게 바보처럼 짧은 생각을 하는가요?”
종호는 눈을 맥없이 스르르 감아버리었다.
나영은 종호의 손을 잡아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흑흑, 선생님, 선생님은 이전에 제가 자살하려고 했다고 이렇게 일깨워주지 않았던가요? ‘왜 죽겠소? 죽을 용기 다 있으면 왜 살 용기 없소? 악을 쓰면서 살아야지.’”
(그래, 아리숭하게 기억나. 그때 나영한테 그런 말 했지.)
나영은 종호의 두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말했다.
“리선생님, 선생님은 저의 목숨을 구한 구명은인인데요. 이젠 제발 잡생각 마세요. 병마를 훌훌 털어버리고 어서 일어나세요.”
갑자기 종호가 입을 열었다.
“그만 두오. 세상이 더럽소… 보기 싫어…”
“끝내 말하시는군요.”
나영은 너무 기뻐 환성을 지르며 려향을 돌아보았다.
려향도 아빠 손을 맞잡았다.
“뭘요? 뭐가 자꾸 보기 싫어요.”
“암범, 악처, 색마…”
려향은 아빠 손을 활 놓아 버리며 두덜거리었다.
“왜 자꾸 어머니를 그래요?”
종호는 맥없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정호는 감옥에 있는데요. 보이지도 않아요.”
“아니야. 금방 그 놈 내 추, 추모사를…”
“환각인데요. 아빠, 근본 추도대회도 열잖았는데. 어디서 난 부패분자 정호가 추도사를 했다고 그래요? 허깨비 왔다 갔겠어요.”
나영은 너무 한심했다.
그녀는 종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우리 함께 용기 내 삽시다.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리선생님처럼 정의감이 있고 남을 잘 돕는 착한 마을 가진 선량한 분들도 많찮 아요? 우리 착한 사람들끼리 함께 삽시다.”
종호는 쌍까풀눈을 살며시 떴다. 기대에 찬 미소를 짓는 여인의 얼굴, 걀죽한 우유빛얼굴이 어슴푸레 보인다.
(우리 함께 살자고? 나하구 살겠다고?)
종호는 삶의 의욕이 은은히 생기어 나는 감을 느꼈다.
(사람이란 고약해. 금방 세상이 더러워서 죽어버릴 상 하더니 또 살겠다고 돌아누어?)
그는 손을 들어 눈물을 흘리는 나영의 걀죽한 얼굴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팔은 바위돌을 처매놓은듯해 들래야 들 수 없었다.
그는 모진 세상풍파를 겪으면서도 의악스레 살아온 걀죽한 여자의 얼굴에서 내비치는 강인한 빛을 보아냈다.
나영은 계속 사랑이 넘치는 말을 했다.
“저의 목숨을 리선생님이 준 거나 다름없어요. 저는 리선생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종호는 도리머리를 젓고 싶었다.
“이 놈 세상 보기, 보기 싫어.”
나영은 해쭉 웃어 보이었다.
“그럼 눈 감고 사세요. 저만 보고 사세요.”
“세상 모든게 듣기 싫어.”
“저의 말도?”
종호는 도리머리를 젓고 싶었지만 머리 무거워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귀를 막고 사세요. 려향이와 저의 말만 듣고 살면 되지요. 호호호. 드문드문 전유진이나 정수주의 아름다운 노래소리나 듣고. 호호호.”
종호는 점점 정신을 차리었다.
그는 나영한테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세상 모든 걸 보지도 않고 듣지 않으면서 살아서 뭘 해? 렬사하고 영웅들의 책도 쓰잖고 살아서 무슨 삶의 가치 있어? 난 죽어야 해.)
그러나 이런 말을 번질 수 없었다. 입술이 점점 말을 듣지 않았다.
“난, 난 실패한 인, 인생이야…”
“아니예요. 리선생님은 신문사 사장 아닌가요? 우리 민족의 렬사와 영웅들의 사적을 숱한 책으로 출판하잖았는가요? 한국 젤 큰 서점에서도 선생님의 책이 팔리던데요. 리선생님은 성공한 인생인데요. 그보다 선생님은 곤경에 빠진 저 같은 여자를 구해준 좋은 사람이죠.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분인데요. ”
나영은 종호의 두 손을 꼭 잡고 발까지 동동 굴렀다.
“리선생님, 어서 병마와 잡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세요. 흐흐흑, 흑흑.”
그녀는 흐느껴 대성통곡치었다.
정호의 혼은 이번에는 흑흑 흐느끼는 나영의 콧구멍으로 해 심장으로 스리슬쩍 들어가보았다. 그녀가 혹시 가살을 피우지 않는지 속을 들춰보기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심장은 이렇게 흐느끼며 속삭이고 있지 않겠는가.
(리선생님, 어서 일어나세요. 리선생님은 저의 구명은인인데요. 저는 알아요. 선생님은 저를 좋아한다는 걸. 나이 차 때문에 저를 감히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요. 선생님은 저를 잘 몰라요. 저는 선생님이 좋아할 여자 아닌데요. 아니, 죄범인데요. 저는 탐오죄를 범해 한국에 도망쳐 나온 여자인요. 저는 정파답지 못한 패륜여자인데요. 정호와 더럽게 몸과 마음을 섞은 적 있는 화냥년인데요. 일순간 육신의 괘락을 위해 정조를 지키지 않은 불결한 년인데요."
나영의 심장은 자책감에서인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심장의 뜨거운 피는 갑자기 주춤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제가 이런 나쁜 년인지도 모르고 제가 일하는 음식점에 와서 연길냉면을 잡수시면서 자주 찾아 주었지요. 저는 정호와의 맺은 악과가 배 속에서 뚱뚱하게 부펄어 올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모텔에서 깨진 유리병 조각으로 배를 찌르고 손목을 베 자살을 시도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선뜻이 나서서 애나게 번 돈으로 저의 구급치료비와 개왕절개 시술비를 다 대주었지요. 지금도 기억나요. 저를 자기 집에서 자게 하려고 엄동설한에 종각 지하철역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새우잠을 자던 리선생님의 그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과일구럭을 들고 저의 병문안을 오던 리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방불히 보는 거 같았어요.)
나영은 눈물 코물 흘리며 감등을 먹는 거 같았다. 그녀의 심장의 맑은 피는 진실을 담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제가 탐오범죄자라는 걸 알아도 저를 좋아하겠는가요? 그래 진정 저를 좋아했나요? 딸 같은 저를 동정한 건가요? 나무리지 않는다면 언제든 저는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줄래요. 마음의 문을 열어 줄거요…어서 깨나세요. 리선생님, 흑흑, 흑흑흑…)
내 혼은 나영의 머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얼빠진채 멍해 나영의 심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영은 그저 구명은혜에 보답하려는 거겠지. 그걸 바라고 나영을 도운 건 아닌데…)
혼이 나영의 속에서 기어나와 다시 링겔 쇠걸개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영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희죽이 웃는 내 표정을 보고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뜨거운 눈물 방울이 방울방울 내 얼굴에 떨어지며 뭐라고 속삭이고 있지 않겠는가.
그때 종호는 감히 나영을 쳐다보지 못하고 놀랍게도 손가락으로 려향을 가리켰다.
(뭐야? 시집도 안 가고? 불효녀야! 난 아들도 없어. 세종대왕의 후손인데. 조선을 500년이나 통치한 우리 전주 리씨 집안 대를 끊는 불효자야. 이젠 책도 온전히 내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뭘 하겠느냐?)
눈치 빠른 려향이는 아빠가 지금 자기를 질책한다는 것을 아픈 가슴으로 느꼈다.
“아빠, 제가 불효를 저질렀어요. 이젠 제가 시집 갈게요. 아빠한테 손주 서넛 안겨 줄게요. 아빠를 도와 영어, 일어로 책을 낼 거예요. 책으로 우리 민족에게기념비를 세워 줄테요.”
종호는 웃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얼굴이 새까맣게 질리어 갔다.
“아서라.”
종호는 속으로 딸한테 충고했다.
(아서라, 아들딸을 낳아 기르면서 편안하게 살겠으면 나처럼 책짐을 메고 사막에서 마라톤을 하지 말라. 물 한방울도 차례지지 않는 사막의 외길에 들어서지 말라. 난 그 책더미 때문에 집 다 팔아먹고 네 박사 청춘마저 엄청 허비했다. 절대 아빠 따라 하지 마. 그러나 사회를 위해 정의롭게 살겠으면 … 아, 나도 몰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갑자기 혼이 육신에서 쑥 빠져 산소호흡기를 타고 바라올라가더니 천정으로 훌 날아올라가 찰싹 붙어 버리었다.
“아빠!”
려향은 종호를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치었다.
“리선생님, 깨나세요! 네? 절 버리고 제발 혼자 가지 마세요.”
“그만 하세요. 리선생님은 피곤해 쉬는 거예요. ”
김춘희 박사가 황급히 다가와 려향이와 나영을 말리었다.
종호의 허약한 혼은 천정에 디룽디룽 매달리었다가도 너무 피곤해 내 육신에 스며들었다.
천정과 육신 사이에서, 나와 나영이, 려향의 사이에서 지친 혼은 사랑의 자장가를 부르며 날아옌다.
려향과 나영의 혼도 종호의 혼과 함께 참된 신생의 삶으로 서정시를 쓰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트롯미스 전유진의 청아한 노래소리 은은히 들리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