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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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春妇传(매춘부의 이야기) 댓글:  조회:2196  추천:0  2015-03-17
  春妇传(매춘부의 이야기)  영화로 보는 일본(6)      는 전쟁편에 속하는 영화로서 연출(导演)은 스즈키 세이준이다. 그는 1965년에 일본 노가와 유미코, 카와치 등 이름난 배우들로 팀을 무어서 이 영화를 찍은것이다. 이 는 전쟁을 반대하는 영화로서 실지로 있은 사실에 근거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서 위안부로 지원해 나섯던 몇명의 매춘부들은 머나먼 동북의 만주리(满洲里)에 왔다. 거기에서 그녀들은 수백명 병사들을 위해 제 몸을 바쳐야했던 것이다. 서로의 사이가 아주 특별한 관계였지만 그녀들은 다가 똑같은 비참한 운명이였던 것이다....당시 전쟁에 혐오를 갖고 탈영을 하려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 위안부로 나선 매춘부들이 국가에 충성하게끔 지긋이 이끈데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연출자 스즈키 세이준은 이 영화를 통하여 군국주의자들의 거짓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유미코 노가와를 하이라이트(凸显)함으로써 전쟁때의 영웅이 기실은 남자들보다도 녀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양화와 비해 일본에서 찍은 과 같은 영화는 마음이 여린 여학생의 운명을 다룬것인 주제가 확연히 다른것이다. 도쿄 사우스세인트(圣南) 여자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키는 본래 무지하고도 마음이 어진 소녀였다. 그러한 그가 어느 여름날에 성격이 완전히 개변되고 마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자 교토에 있는 집으로 간 그는 어머니의 연인한테 그만 강간당했던 거이다.    이로인하여 슬프며 고통스러웠던 유키는 종내 학업을 버리고 그만 타락하고만다. 그는 갱 리더(黑帮头目)를 만나 사귄다. 공장 생산업자인 이런 사람들이 그녀로 하여금 육체적인 쾌감을 주기를 바랐다. 하였기에 유키는 시종 고뇌속에서 헤매이게되였다. 그러던 차 마침 젊은 건축사 혼마 요이치로가 나타나 유키의 애정은 그쪽으로 쏠리게됐고 그것은 기쁨을 주면서 차츰 꽃으로 피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순탄 할 수는 없었다. 얼마안되여 곧 혼마 요이치로가 물란서 류학했을 때의 연인 산드라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하여 유키의 가슴속에서는 갑자기 세찬 파도가 일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요이치로는 유키와 결혼한다. 그러나 고통은 멈추지 않았으니?.....일본여성들의 운명을 다룬 영화인데 사색해볼 가치가 있으니 괜찮아보인다.        
13    暴风女神(폭풍여신) 댓글:  조회:1762  추천:0  2015-03-17
 暴风女神(폭풍여신)    영화로 보는 일본(5)        이 영화의 배경은1945년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에다 원자탄을 던짐으로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에 이르었던 것이다. 당장 멸망에 직면한 일본은 미국의 핵폭탄발사기지를 없애버림으로써 제 운명을 건져보려했다. 하여 그 임무를 “폭풍녀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잠수함의 지휘자 해군대위 아사쿠라가 수행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당시 잠수함으로서는 세상에서 으뜸이였던  “폭풍녀신 507”은 독일에서 제조한것이였는데 무었보다 공격능력이 가장좋던 것이다. 그런것을 가지고 해군대위 아사쿠라가 제 부하들을 지휘하여 형세를 역전시켜보려고 최후의 절망적인 필사의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했건만 .결국은...... 전쟁도발자의 운명을 넉넉히 알수있는 것이다. 무력의 시위는 비극을 만들뿐이다.        히구치 신지는 활동적인 동화편제작자일뿐만아니라 성인영화제작에도 재능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서 유명한 시각적 표현자라는 평을 받고있다.  
12    百濟武士(백제무사) 댓글:  조회:2304  추천:0  2015-03-16
   百濟武士(백제무사) 영화로 보는 일본(4)       이 영화는 백제의 멸망전후 바다를 건너 일본에간 백제의 류랑자와 무사들이 란고촌(兰古村)을 만들어 발을 붙이고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기간에 일본의 무사ㅡ 사무라들과 벌어진 모순과 충돌을 애정선에 놓고 흥미있게 꾸미였다. 이 영화를 보느라면 오래전 우리 선대의 모습이 어떠하였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기원 598년, 백제의 위덕왕이 죽으니 그를 호위하던 무사가 할복자살을 했다. 450년이 지나, 즉 11세기초 한국의 3국시대에 들어와서 백제의 후손되는 무사 17명이 일본으로 도망가 한 자그마한 마을을 만들고는 거기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년만에 백제의 전사 구도(GOUdo)가 석사(师父) 정현을 찾아가 자기가 이름난 김환을 찾아가 그한테서 검술을 배우는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구도(GOUdo)는 돌아오는 길에 그곳의 군벌 사이또의 딸 오사메공주를 만나 둘은 첫눈에 그만정이 든다. 한데 오사메공주는 그 곳의 다른 한 군벌인 안도에게 시집을 가고만다. 그리하여 구도(GOUdo)는 검과 애정을 놓고 그 둘중에서 어느것을 선택이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구도(GOUdo)는 다음날 아침에 애인 오사메공주와 함께 도망친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만 안도를 따르는걸레붙이 후원자의 눈에 불행스레 들키우고만다. 안도는 구도(GOUdo)의 석사(师父) 정현을 붇잡아서..........   백제무사 결말어: 싸울아비와 사무라이의 싸움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었다. 피내림의 운명은 한가지가 되어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 땅에서 백제의 혼으로 살아 숨쉴뿐이다.   간평:  는 한국영화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조선에서도 들여다 돌린 영화다.북에서 그것을 돌린 목적은 다른게 아니다. 영화가 고대  무사들의 형상이거니와 한국과 일본이 문화교류를 하자는 목적에서 찍었달뿐  남북간의 의식형태면에는 아무관계가 없는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추천하니 시간을 짜내여 한번 보기바란다.  
11    战争弥撒曲(전쟁 미사)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5-03-16
  战争弥撒曲(전쟁 미사)  영화로 보는 일본(3)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생긴 일이다. 일본군은 원동지구에 있는 독일의 군사기지인 중국 산동의 청도(青岛)를 공점했다. 청도는 당시 아세아의 전쟁마당으로 변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5000여명의 독일군이 지키고있었는데 일본과 영국련합군 3만명이 포위공격하여 300여명을 죽이고 4천 7백명은 포로하였다. 일본은 본래 그들을 다 죽여 복수하려했다. 그런데 포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국제법에 속박되여 일본은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고 제나라에 끌고가 12개의 수용소에다 나눠서 가두었던 것이다. 1년이 지나서 포로관리의 필요에 따라 12개의 수용소를 합병하여 6개로 만들었다.         그 수용소들 중에 도쿠시마반도(德岛板东)라는 이름을 가진 포로수용소(俘虏收容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 수용소의 소장은 아이즈사람(会津人) 마츠였다. 그의 아버지가 메이지유신 때 전쟁포로로 수용소에 갇겼기에 마츠는 어린 몸에 그와 함께 수용소에서 고생스레 지내다보니 포로의 사정을 잘알았다 하기에 마츠는 웃사람의 뜻을 무시하면서 포로에 대서는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마츠는 포로들에게 토스트(烤面包)를 먹였거니와 놀이기구(玩乐器)들을 마련해주고 멕주도 마시게했다. 지어는 포로들이 자체로 인쇄하는 신문까지도 꾸리게 했던 것이다. 그같이 언어도 습관도 같지 않고 다른 그이들에게 상상밖에 베풀어 준 그의 그 배려는 포로들로하여금 속을 과연후덥게 했거니와 상상외의 인간성에 감복되여 다가 희열에 잠겨 즐거운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한편 그 당지의 일본사람들은 포로들로부터 독일의 과학기술이며 식품제조기술이며를 배워서  알게됨으로하여 혜택을 적잖게 보게되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 독일은 정전협의를 맺았고 그로인하여 자유를 얻게 된 포로들은 제 나라로 돌아가게 되였다. 일본을 떠나면서 독일군포로들은 저희들의 무대연기로써 리별을 고하려했다. 그지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은 자체의 악대까지 꾸린 상황이였데 악기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던던 것이다. 그들은 녀성이 없는 정황에서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개편하여 그것을 멋스레 잘 연주하는 것으로써 수용소 소장 마츠와 당지주민에게 감사의 답례로  선물하려했던 것이다.    악대의 연기는 성공적으로 과연 잘 되었다. 그것은 그 지방에서는 종래로 있어본적이 없는 처음의 공연이였는데 그 감격이 전 일본을 진동시켰다. 이는 실지로 있은 사실이다. 하기에 그때의 그 일은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는 것이다.                             나역시 베토벤의 그 교향곡을 듣기좋아한다.    마츠소장이 적포로를 대해준 그 너그럽고도 훈훈한 마음ㅡ 그같은 인도주의가 일본땅에서 그같이 생겼다니 초문이요 이거야말로 실로 진짜기적이 아니겠는가 한다!     难以相信的人道.      나는 할빈에 있을 때 위만시절 일제가 3천명넘는 항일분자를 잡아다는  그들을 마루다(나무토막)라 이름짓고는 각가지의 실험용으로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731부대의 유적지와 전람실에 들어가보았고 남경에 가서는 30여만에 이르는 무고한 중국백성이 학살된 장소들도 돌아보면서 인간성을 깡그리잃어버린 살인마귀들의 잔악한 야수성이 그야말로 극에 이르었댔음을 알고는 치를 떨어온 사람이다. 하기에 나는 군국주의는 악의 유령이라 여겨 저주하면서 견결히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즘 나는 일본에서 찍은 영화들을 한편, 두편 골라보느라니 여러방면으로 리해와 감상이 깊어지면서 마음상에 새로운 느낌도 있는 것이다. 일본이 군국주의를 부리더라도 마음이 이 영화에서 처럼 되게끔 그런쪽을 유도해나아가기만 한다면 국국주의도 색깔이 달라지면서 의미가 변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일본사람이면 싸잡아 다 본심이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절대 그런게 아니다.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물론 속담처럼 딱히 찍어내지는 못하겠지만은 내가 만나보고 면목을 익힌 그 몇몇 일본분들은 다가 인상이 좋았다.    한데 문제는 이미말한바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일본의 정신은 솔직히 말해 모든 국민에게 자유롭게 소유되는것이 아니라 한줌도 못되는 우익의 통치자들에게 너무나 집중되여있다. 그것이 국민을 하나같이 단합시키고 움직임에는 유리하다고 보겠지만 분별없이 놀아대는 상층인간 몇의 머릿속에 깊히 뿌리밖힌 군국주의사상이 이제 아무 때건 일을칠것 같아서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남경대도살                                                                                 南京大屠杀纪念馆 资料图 七三一部队除在室内用活人来实验所制造的各种细菌武器的效能外,为研究在战争环境中使用细菌武器并使其更好的发挥效能,凡是七三一部队研制的细菌武器都在安达特别靶场上用活人来做试验。   七三一部队除在室内用活人来实验所制造的各种细菌武器的效能外,为研究在战争环境中使用细菌武器并使其更好的发挥效能,凡是七三一部队研制的细菌武器都在安达特别靶场上用活人来做试验。                                        
10    吾为君亡(왕을 위해 죽으리) 댓글:  조회:1670  추천:0  2015-03-14
                     吾为君亡(왕을 위해 죽으리)                        영화로 보는 일본(2)        신풍특공대는 일본군의 한 특수한 비행대로서 2차세계대전때 정정당당하게 결투에 나섯다. 그들의 전투임무는 멸망해도 네놈하구는 함께 멸망할테다면서 적군함을 들이박는 것이다.    별칭이 ISLAM라는 그 테러분자는 대체 무엇이였던가? 군용으로는 돼보이지를 않는 민간용같은 자그마한 비행기가 폭탄을 싣고는 날아가 적측의 목표물을 들이박아 폭파해버는 것이였다.     하였기에 미국군은 그것을 만나는 날이면 불행을 면할수 없었다!      미국은 이러면서 분이 끌어올라 욕했다. 그러면서도 쇼를번(小日本)을 군법위반라고 국제법정에 상소할수도 없었다. 너죽고 나죽고하는 막판에 광명정대라는게 어디있고 법은 무슨놈의 법이란말인가? 도살자의 칼아래에는 정의라는것이 있을수 없다. 늙은이 부녀 어린이마저도 방패삼로 삼아 내세우면서 대방을 쳐 꺾구려뜨리려드는 자를 놓고 무슨 정의를 운운한단말인가?    자살수단은 택할바가 아니건만 일본군의 은 그것을 천황을 위한 가장 신성하고 적시적인 표현이고 행동이라했던 것이다. 하기에 신풍특공대원이 된 사람이면 그 누구나 다 자기는 천황을 위해 시시각각 신성한 죽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고 생각해야했던 것이다.    특공대의 퇀장은 그들앞에서 이틑날 새벽5시에 출발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훈화를 했다.      “적의 모든 군함을 공격한다.     하나하나 바다속에다 장송한다.     너희들은 용기를 내야한다“    황국의 운명은 너희들의 두어깨에 지워졌다.    듣거라! 천황을 위해 목숨받친다고 생각해야 한다    살아서 돌아오면 수치다.    적함을 들이박을 때는 눈을 감지 말라, 알아들었는가?“      한쪽팔에 국기를 완장으로 낀 대원들은 주먹을 불끈쥐고 히노마루를 향해 맹세하고나서 술을 한잔씩 마시고는 저가끔 비행기에 올라 적을 향해 기지를 떠났다.     그 신풍특공대를 생각해낸 사람은 군국주의자 오니시다 키지로였는데  그는 전쟁이 끝나자 목숨을 참혹하게 잃은 젊은령혼들 앞에 미안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할복자살을 하고말았다.    그당시 해군소속의 新第71部隊 나카니시(中西)에 신풍특공대원이 모두  24명이였는데 그 가운데 일본이름으로 히카루가가라 부르는 조선젊은이도 하나 끼여있었다. 독신으로 일본에 와 있으면서 평시에 자기를 늘 친아들같이 여기면서 살틀히 대하고 거두어 준 일본녀인앞에서 그는 스스로 자아모순에 빠져 출발전에 나는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왜서 죽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죽는단말인가?  심리적인 모순에 빠져 눈물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라도 못가서 발병난다.     일본녀인도 불렀다. 함께 울먹이는 감정에 목청을 떨며 불렀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죽어야한단말인가?  망국노의 설음을 잘 표현했다!
9    太平洋的奇迹 (태평양의 기적) 댓글:  조회:1602  추천:0  2015-03-14
   太平洋的奇迹 (태평양의 기적)                                 영화로 보는 일본(1)          1944년 6월,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남양에 있는 일본군의 주둔기지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사이판으로부터 가장 잔인한 순간이 닥쳐왔다는 것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만명에 이르는 미국군대가 이제 당장 그 자그마한 섬을 점령하려고 일본군의설치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훼멸성적인 타격을 안기리라는 것이였다. 일본의 결정적인 패배는 목첩에 닿고있었다. 사태가 그러함에 륙군보병 제18련대의 대위 사카에는 사이판에 있는 모든 군민은 천황을 위해 자기와 함께 자기의 생명을 깨끝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여 육박전을 벌린데서 온 사이판이 피못에 잠겨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512일간의 지속된 결사적인 싸움에서 2000여명의 미국군이 죽고 일본병은 4000명이나 생명을 잃어 살아남은것이 겨우 47명밖에 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육군보병 제18련대의 대위 사카에 보고 손을 들고 투항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카보는 호리가우치, 무구토시오 등과 함께 자기들은 “투항을 모르는 민족”이라면서  상급의 명령이 내리기전에는 절대 투항하지 않으리라 뻣히면서 최후의 결전을 다짐했다. 그 섬에는 일본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산속깊이 들어가 숨었다. 그런판에 형세는 점점 더 함악해갔다. 깊은 산속에 숨어들고 보니 우선 먹을것이 없었고 병구완을 하려해도 약이 없었다. 하여 백성들은 흰기를 만들어 들고 산속을 나가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위 사카에는 병사들을 향해 자기와 같이 끝까지 투항하지 말고 싸워야한다고 명령했다. 허나 그 자신이 모르고있었지 일본천황은 이미 투항조서를 내렸던 것이다. 미국측은 산속에다 삐라를 뿌리고 스피카를 리용해 어서빨리 투항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대해서 적은 자기를 유혹하느라 거짓말을 하는줄로만 알았던 사카보는 립장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오내에는 동요하는 자가 나타났고 천황의 투항조서를 스피카로 들은 사카에는 하는수없이 미국군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천황의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했기에 추호의 수치감도 갖지 않았다.   그는 전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은 그 어떠한 수치도 없다. 정정당당하게 앞가슴을 내밀고 산을 내려가라. 앞을 내다보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의 새로운 사명인 것이다!”    1945년 12월 1일 그들은 국기를 들고 열을 지어 군가를 부르면서 보무당당히 탑파산(塔波山)서 내려온다. 생존자 47명은 포로수용소에 이르러 멈추어 투항했고 대위 사카에는 자기가 차고있던 군도를 미군에 바친다.                    
8    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2) 댓글:  조회:2068  추천:0  2015-03-11
  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2)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가 일본민족에게 미친 영향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기원 4세기말에 이르러 전국이 통일된 일본은 8세기에 사무라이가 생겨나 그것이 줄곧 19세기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 기간은 순 “검객독재”시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기나긴 세월에 일본민족문화가 바로 그 민족의 성격을 길러냈고 따라서 민족의 정신을 길러낸 것이다. 사무라이가 오랜세월 군권과 정권을 틀어쥐고 사회 엘리트(精英)의 위치를 차지했으니 일본사회의 인센티브 메커니즘(评判과 奖惩机制)은 다가 사무라이를 둘러싸고 존재하면서 공식화되였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의 무사도(武士道)에 대한 지어 맹목적인 숭배는 그 민족의 심리에다 사악(邪惡)을 길러주었던 것이다. 미국의 녀인류학가 베네딕토는 사무라이의 윤리와 악의 이중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중하게 천술했다.    “덕과 악에 대한 리해를 보면 서양사람과 일본사람은 판판 다르다. 이는 독특한 시스템(体系)이다. 불교도 아니고 유가(儒家)도 아닌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시스템인바 그것이 일본의 힘으로 되겠지만 일본의 치명적인 약점으로도 되는 것이다.”       무사도(武士道)의 침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무라이정신은 곧바로 일본정신의 핵심이였다. 하기에 일본의 국민성 정신문화에는 사무라이의 무사도낙인이 또렸이 찍혀있다는 얘기다.    일본의 근대 저명한 사상가인 니토베작가는 무사도(武士道)를 일본의 영혼으로 간주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멋진 선물은 사무라이를 통해 전승되였다. 그들 사무라이는 일본민족의 뿌리다. 그렇지만 그렇다해서 그들이 나라의 꽃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하면서 니토베작가는 “일본은 일본국가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촉진하려한다”고 했다.    미국의 학자 벨라는 사무라이가 일본의 핵심가치를 반영한다고는 하겠지만 실제상 무사도윤리는 도쿠가와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이에 완료된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것이 적어도 국가윤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리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중국 학자들의 리론도 역시 가장 지속적인 문화적 가치는 일본 사무라이문화가 일본사람의 문화와 국가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데 있다고 점을 찍었다.    사실이 번연한바 일본의 군국주의는 곧바로 무사도의 변형인 것이다.    개발과 진화의 긴 역사를 거쳐 생겨난 무사도는 이 세상에서 한갈래의  검은선이 되어 인류를 괴롭히고있다. 사무라이의 군사서비스, 특히는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일으켰던 지난때의 세계 대전에서의 일본군의 패배나 그 끝의 운명은 꼭 같음을 력사가 가르친 것이다. 필연이라해야겠다. 왜냐하면 군국주의와 무사도(武士道)는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일맥상통하는 것은 붉은선도 흰선도 아닌 군국주의의 검은선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일본국민은 거의 다가 한결같이 군국주의 의식형태의 지배에 따라서 움직이고있는 것이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되고 메이지(明治) 이후에 설립 된 현대의 무사도는 새정부와 군사와 더 가까이 더 밀접하게 연결되여있는 것이다. 하기에 bbs에다 글을 낸 자는 아마 “우리는 선진기술, 성숙된 경험, 단결정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편벽한 비좁은 땅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탄식해야합니다.>> 하면서 하고 비명을 지르는 모양이다.               근대의 무사도(武士道)는 고대의 무사도(武士道)를 계승하면서 일련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전에는 사무라이들이 저가끔 저의 마스터(主君)께 충성했다면 지금은 천황(天皇)께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변했다는 그것이다. 그러면서 서양 문명의 영혼을 받아들이여 서양의 자본주의 요소로 경제발전을 꾀하면서 천황은 다시금 무사도 코드로 저의 국민의 정신을 무장시키고있는 것이다. 그 정신이란 다시말해 군사주의에 의한 군사도구, 전쟁기둥으로   국민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가의 침략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19세기후반에 이르러 메이지 정부가 서양 문화를 소화함에 변화를 일으켰는바 민족 메이크업 중심의 서비스(本民族服务)를 강조했던 것이다. 부국강병(富国强兵)을 제창하면서 아시아 사람의 때를 벗어버리고 유럽인처럼 되자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구호를 내놓았으니 그것인즉은 바로 유럽은 건드리지 말고 아시아부터 쟁취하자는 것이였다. 우선 이웃 국가들에 최후 통첩내리고 그 다음에 가서는 세계를 병합한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을 고려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봐가면서 다른 나라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간다는 것이다.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사도의 군사 정신을 부활시켜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잠간 되돌려 회억해보면, 당시의 실정은 심지어 메이지 정부와 중국정부는 하위(中下级)관계로 되다싶히했던 것이다. 중국은 그같이 무기력한 꼴이였다는 얘기다.    일본은 각 팬중 사무라이가 모든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보면 메이지때의 바루스(翻的)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같은 인물들인데 그들은 다가 옛군인의 출신이였던 것이다. 다이쇼(大正)시대 국무총리 원다이킨, 쇼화(昭和)시대의 군부 파시스두목 도죠히데끼, 이타가키기호네 등은 다가 사무라이계층과 관계가 밀접해 마치 실뭉치같이 얽혀있은 것이다. 하기에 무사도의 조화와 군사주의는 상호 작용하면서 분리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무사도(武士道)가 군사주의를 수요하고 군사주의는 무사도(武士道)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원 527년에 일본왕이 원정부대를 보내여 신라에 침범했고 기원663년에는  일본이 26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내여 한반도에 잠식해서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치게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1591년에 일본을 통일하고나서 얼마안되여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발동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 군대로 약소한 봉건 국가를 삼키려는 야심은 좀치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대하는 사고 방식이 일본의 침략야심과 확장야심을 낳은 것이다    노부히로 사토의 "건물 또는 비밀정책을 혼동" 으로부터 유명한 "다나카기념“이나 "여덟매크로 단어" 같은것은 일본민족의 최고의 리상으로 되었다.  신사 메이지시대는 정치적 기능이 부여 된 미카도와 결합(天皇制相结合)된 국가 신도로 개발되였던 것이다.    1882년, 메이지 정부는 "군사 법령을."공포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라고 했다.    1890년에 반포한  "교육 법령"에 규정 된 것을 보면 교육의 근본목적은 전체국민으로하여금 “황제에 대해 충성해야한다”면서 전투 침략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국가신도는 "거룩한 전쟁"을 웨쳐야한다고 했다. 일본은 여지껏 세계 정복과 지배를 꿈꾸어왔다는것를  말한다.    에는 일본의 군국주의사상이 깊이 배어있다. 지금까지도  잘못을 승인하지 않고 거부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그네들은 전 사무라이 무사도의 정신을 "일본인의 영혼."으로 믿고있기때문이다.      일본파시스군대는 지금 투기장을 찾고있다. 1890년에 반포된 "교육법령"의 메이지천황 교육법령(教育敕谕)에는 사무라이와 같은 "애국충성"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만리파도헤쳐 나라위엄 사방에 떨치라“했다.     1912년, 육군 장군 노기키텐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을 매장하는 날 자기가 황제에 "충성“을 다함을 보이느라 배를 가르는 할복순교의 죽음까지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무라식의 자살을 대단히 칭찬했다. 일본에서는 그를 메이지 하나님의 육군으로 ”봉”한 것이다.       "군사 법령"에 이르기를  다케오(武勇)는 고대로부터 일본의 가장 뛰어난 특징으로서 “일본사람으로 태여나 무용(武勇 )이 없으면 자신을 일본사람이 아님을 알고 부끄러워 하라.”고까지 했다. 무사도(武士道)는 천황과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전념하게끔 하는데,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천황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 전념하면서 헌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과 학살의 길로 용감히 매진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위태로운 작란이 아니겠는가!    다시한번 반복한다.    나는 지금의 일본천황은 아키히토로 들었다. 지금도 건재한지? 건재하다면 자국이 전쟁을 일으켜 스스로 망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정신차려 선대를 본받아 이럴때 구세주로 용감히 나서줄것을 다시한번 진심으로 권하는 바이다.  
7    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1) 댓글:  조회:2169  추천:0  2015-03-07
             일본정신을 분석해본다(1)                                    김송죽        올해는 세계반파시스전쟁승리, 중국의 항일전쟁승리70주년이 되는 해다. 서방에서 독일의 반성은 허심하거니와 개정표현도 아주좋았다. 그러나 히틀러시대의 독일과 함께 그당시 침략전쟁을 발동함으로 하여 동방에서, 특히는 중국에다 막대한 재난을 들씌웠던 일본은 대체 어떠한가? 일본은 아직까지도 제가 저지른 죄를 모르고있는것 같다. 일본은 자기를 반성 할 대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저히들이 지난날 감행했던 천추에 용납못할 그 침략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나서고있으니 뻔뻔스러워도 한심하게 뻔뻔스럽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일이 아닌것 같다.    일개 평민백성에 지나지 않은 내가 왜서 이런글마저 쓰게 되는가? 나는 “8‘15광복”이 나던 해에 한 일본장교의 식솔 다섯이 야외에서 가족자살을 하는 소름끼치는 장면을 목격한바 있다. “도대체 왜서? 어떻게 돼먹은 사람들이길래?” 그때로부터 나의 머릿속에 “일본사람은 과연 지독다”고 각인되여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저 일본민족의 전통과 그것을 산생시킨 과정을 놓고 나름대로 일본정신을 분석 할뿐 그 나라국민의 인격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론하는게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의 정신은 모든 국민에게 자유롭게 소유된것이 아니라 한줌도 못되는 통치자에게 너무나 집중되여있다.     지난해 중순의 일이다. 나는 일본의 bbs에서 인기가 매우높은 글이라 해서 읽어보았는데 그것은 9년전에 이미 벌써 지상에 공개 된 것이였다.    그 글에서 몇단락 추려 보기로 하자.                  이같이 전제조건을 내놓으면서 글은 이어서 섬나라의 운명은 최종 바다밑에 종결될 것이라면서 자원의 결핍은 최종 민족의 발전과 전진의 제일 큰 걸림돌이라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공공연히 피력했다.                 이 글을 보면 우환의식을 갖고있는 일본사람이면 거개가 가질수 있는 심정을 그대로 적라라하게 드러냈다고 볼수있다.    점수를 매긴다면 그 솔직함에 만점을 줘야겠다.    한데 그가 들고나오는 주장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으니 뺨을 맞을 짓이다..        분명한바 이런 공공연한 선동은 광신적인 침략자만이 죄칠수 있는 잠꼬대인 것이다. 한마디로 미친자의 망발이라해야겠다!    일본민족의 생존, 생로가 과연 그래 그길 하나밖에 없단말인가? 왜서 달리는 생각을 못해본단말인가?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니 나는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몇해전이다. 나는 에서 일본의 어느 한 녀작가가 쓴 소설을 보고 놀랍게 깨다른것이 하나있었다. 그 소설은 정사(情思)를 다룬것인데 내용인즉은 일본남자들은 출국만 하면 외국여자를 품에 넣을 궁리부터 한다는 것이다. 여자만 보면 그저 들어붙으려 하니 천성인지 오입질에 찔난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작가는 그것을 그저 폭로하는데만 그쳤지 타매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다 일본종자를 뿌리니 민족의 생존에 되려 공이 되지 않을가 여기는 모양이다. 나의 생각에도 그쪽으로 돌려지게 되였다. 일본은 이제 또 다시금 침략전쟁을 발동하려하지 말고 그 녀작가의 발상대로 차라리 그렇게해서라도 일본사람의 번식능력을 발휘함이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가 한다. 그 모양으로 종자를 불쿤다해서 세계가 그것을 비난하거나 “침략행위"로 까지는 보지 않을것이다.    세계는 여지껏 전쟁이 재발되는것을 반대하면서 방지해왔다. 평화공처5항원칙에 따라 국가와 국가지간의 우의를 돈독히 키우면서 공존하는것을 목표로 세우고 줄달음쳐 온 것이다. 엄연히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누가 또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재난에 빠뜨려 혼란케 한다면 그것이 허용될가? 불작란을 좋아하는 종족과 그런 종족의 나라는 제가 지른 불에 제가 타죽는 꼴이 되여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전과 달라 세계는 안정을 제일바라기라고 있기에 모다들어 그한테 불벼락을 안길것이니까!      일본을 보면 여지껏 야스쿠니신쟈나 다오제도 등 문제에 대한 변명꺼리를 만드느라 머리악을 무던히 써왔다. 그 표현으로는 그들이 지어 헌법을 개정하는 유희까지 놀고있는데서 찾아볼수있는 것이다. 일본이 말로는 저희들 손에 피해받은 자의 량해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같은 일련의 불협화음이 어떻게 지난날 저히들의 손에 피해입은 아시아 여러 나라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량해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일본은 자신이 호전광의 본색을 버리기 전에는 주위나라들의 호감을 사기도 량해를 구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와서야 드디여 깨닫게되는것이 있다. 무엇인가? 우리는 일본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내자면 그 나라백성이 살아온 역사궤적에서만 찾을것이 아니라 좋기는 여지껏 그들의 심령을 지배해온 근원으로 되고있는 "전통문화"에서 찾아보고 연구해야 옳겠다는 생각이다.      일본의 국립정신은 바로 무사도(武士道)에 뿌리를 박고있다. 박아도 너무나깊이 박고있다.    무사도(武士道) 즉 사무라이정신이 생기게 된 근원과 그것의 발전, 변화과정은 도대체 어떠한가? 그에 대해서 연구하노라면 우리는 여지껏 군국주의길을 걸어온 일본이 지금물론이고 장래에도 그 길을 버리지 않고 어김없이 계속걸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다면 무사도(武士道)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래에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명하련다.                      ㅡ. 무사도의 산생과 특점          원시적인 신앙과 숭배는 언제나 한 민족의 심리에다 뿌리를 깊히내리기에 말그대로 그 값은 옵션(选项)제약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일본신도(日本神道)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려주었다는 세가지 기물이 있는데 그것인즉은 거울(镜), 옥(玉), 검(剑)이다. 그 세가지가지 기물은 지혜, 인자, 용감성을 표명하는데 그에 대한 숭배가 바로 그들 일본사람에게는 민족문화의 뿌리가 되어 오래동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들의 심령을 지배함에 거대한 힘이 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내려주었다는 그 세가지 기물중에서 검(剑)은 용기를 뜻하는데 이는 일본민족이 제일선호하는 것이다. 세상 그 어느 나라, 어느 종족들보다도 그들은 지금까지도 무력을 제일 숭상(崇尙)하고있음을 알려준다.  옛무덤을 파보면 순장품으로 제일많이 나오는 것이 검, 칼, 갑, 투구, 마구라니 그것들이 곧 일본은 력대로 내려오면서 무력을 가장 숭배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원시적인 신앙이 그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었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무사도(武士道)ㅡ 그것이 지금까지도 일본민족의 힘으로 되고있는 것이다. 력사에 맞추어 보면 여지껏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오래지속될 것이다.      와 에 보면 이탈리아 법사 코넛은 문득 지혜가 생겨 신검으로 불신(火神)의 머리를 베여버렸다면서 나중에는 그 신검을 일본의 타케루에게 넘겨주었고 타케루는 그 신검으로 동쪽으로 에조지방을 평정하고나서는 신검을 아츠타신사에 모셔 보관하게했다고 했다. 력사를 보면 고대로부터 그 자그마한 일본렬도에서는 제국간의 싸움이 끊을새없이 빈번했다. 일찍이 8, 9 세기부터 사무라이 무사도가 역사무대에 올라 주인공이되엇던 것이다. 하기에 무력에 대한 숭배가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전국민의 전통으로 되여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검은 살인무기건만 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그것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되고있다. 일본은 바로 검이 빛을 내는 그러한 나라인 것이다.      일본에서 가족 개인문화란것은 운운하기조차 어렵다. 력사에 기재된 것을 보면 간사이장군 요리토모 그룹이 관동 라노그룹을 정복해버렸다고 했다. 1185년에 카마쿠라는 군사 독재정부인 막부(幕府)를 세웠는데 일본에서는 그것이 력사상 맨처음의 사무라이 정권이였던 것이다. 일본은 그때로부터 사무라이가 봉건영주로 되었고 일반 사무라이는 그 영주에 충성해야하는 것이 공식적인 기풍으로 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무사도(武士道)는 자기의 정치가를 길러냈다. 무로마치 막부 사무라이의 무사도가 현대 무사도를 개발한 경로를 보면 바로 그러하다.    사무라이는 그의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급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라이는 전문 군인으로, 막부의 중추지만, 정치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은 정치를 위해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무사도의 본질은 "기사도충성"이다    그것의 특점들이 어떤한가를 보기로 하자.        (1) 최고의 충성.    무릇 사무라이면 자신을 소유하고있는 자에게 사심없이 헌신해야 한다.  무사도의 미는 완정한 순종인것만큼 무조건 복종하면서 철저히 복무해야 하거니와 목숨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최고로 되는 고상한 미덕이라 여긴다.      (2) 명예와 죽음 .    사무라이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을 초개같이 여겨야 한다.  명예를 지키느냐 생명을 보존하느냐가 문제되여 진퇴양난에 빠졌을 경우에 그들은 서슴없이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택하는 것이다. 명예라는 그것이 그 자신의 리해득실과 관계되거니와 가족의 영예와 리익과도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하기에 귀중한 목숨을 서슴없이 버리는 것이다. 무사면 죽음으로 명예를 지킬줄을 알아야 자격이 되였다. 하기에 는 경구가 생긴것이다.     제9권에 기재 된것을 보면 사무라이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것은 “겸손하고 충격적인 희생”이라고까지 좋게 평가했다.       (3) 무용(武勇)을 지향.    사무라이는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음을 당하는 살벌한 폭력세상을 지내는것 만큼 반드시 무술이 높아야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라이직책은 곧바로 전쟁이였다. 하기에 내가 사느냐 죽느냐, 승급을 하느냐 못하느냐와 가정의 부귀빈천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무용(武勇)에 달린것이였다. 하기에  군사가족 커뮤니티는 무술과 용기를 가장 존경했고 그당시 사람들의 심목중에 미야모토장군은 영웅의 본보기로 떠올랐던 것이다. 사무리이의 령혼은 바로 칼이였다. 하기에 그것을 손에 잡고 피를 보지 않으면 사무라이가 아니라했다. 무용(武勇)이 없으면 사무라이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4). 똑바른것과 에티켓(礼仪).    문명(文明)이 혼돈 될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에 이르기를 “신(神)은 똑바로 말했나니, 이른바 정직하다는 것은 스트레이트 심장(直心)인바. 마음가짐이 바르고 깨끗한 것이니라” 하면서 더하여 똑바로 말해둘것은 리테이너(家臣)를 대함에 정직해야한다고 했다. 일본의 고대사회력사를 보면 등급관계가 몹시삼엄했다. 사무라이, 다이묘, 장군 층층이 충성해야했던바 각종의 체제가 사무라이로 놓고 보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군주의 은덕에 보답해야지 그를 배신하거나 역행하여 반란을 한다면 그것은 씻지 못할 치욕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5). 미화된 할복자살.     군사가족 커뮤니티(社会)에서의 값은 죽음을 “영광스러운 구호법”으로 여기는 그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런 죽음은 후반생의 안식으로 여긴것이다. 온 사무라이시기를 놓고 보면 그들이 자살하는 유일한 방법이 거의가 한본새 즉ㅡ 할복자살을 하는 그것이다. 사무라이가 할복자살을 할 때면 선자세와 앉음자세 두가지였는데 그 방식은 여러가지다. 一字腹, 二字腹, 三字腹과 크로스 복부(十字腹) 네가지였다. 사무라이의 그같은 할복자살 모델로는 구스노키 마사시게(1294ㅡ1336)때와 히데요시(1522—1591)를 서브(侍奉)했던 그때일 것이다.    국민은 사무라이들이 활복방법으로 스스로 제 생명을 끓어버리는 행위를 거부가 아니라 칭송과 절찬으로 받아주고 좋게 보았던 것이다.       에도시대에 일본에 려행왔던 서양사람 미트포드는 사부로 타키자와가 할복자살하는 전과정을 직접보고나서 자기는 하마터면 기절할번했노라고 여행노트에다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장소에 같이 있었던 일본사람들의 반응은 자기처럼 그렇지 않고 그 표정들이 전혀 다르더라면서 그네들은 탄복하고 지어는 선망하더라고 자기의 여행노트에다 감상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할복자살을 그같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니와 지어는 여럿이 모여서 순교의 죽을을 맞기도 하는데 많을 때는 지어 수백명이 한군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자살동기를 보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그런 방식의 죽음을 지어는 영광으로 생각하거니와 완벽한 승화로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은 리해못할 일이다.                     =. 무사도의 진화      유교(儒教)와 선종(禅宗)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일본사람들은 그것을 취사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호상간에 작용을 하다보니 사무라이들의 사상과 행위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중국유학의 핵심 미덕인 “인(仁)”에 반하여 일본유학의 핵심은 “충(忠)”이였다. 중국의 유학이 당연히  “충효(忠孝)”를 말했고 일본의 유학역시 당연히 “인자(仁慈)”를 말했다. 하지만 어느것을 선차적인 위치에다 놓는가에는 대해서는 주장이 달라 각기 저마끔이였던 것이다. 중국은 “인(仁.)”을 첫 자리에 놓았지만 일본은 그것이 아리라면서 “충(忠)”을 첫자리에 놓으면서 유가의 “충(忠)”, “례(礼)”, “지(智)”, “신(信)”을 부대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중국의 유가문화를 대표하는 골수(骨髓)인 “인(仁)”, “의(義)”를 그들은 그것과는 뜻이 전혀다른 “인(忍)”과 “광과용(旷课勇)”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들의 연역과정과 변천을 보면 거기에는 일본사람들은 잔인과 용기를 선호했음을 볼수있는 것이다. 총적으로 사무라이는 아무 때건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맹세를 해야한다는 것이였다. 이로보아서도 일본의 사무라이내에서 수괴(首魁)들은 아래것들을 자기 하나를 위해서는 잔인과 용기를 다할것을 설교(說敎)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아무 때건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할 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일반백성의 생명같은건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평민백성의 목숨은 값으로 치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일본의 지난력사를 보면 그러한데다가 테러가 극단에 이르러 무참한 살인이 끊을새 없었던 것이다.       내가 소시적에 들은 사무라이 얘기다.    어느날 애비가 죽으니 그가 차고다니던 검을 유물로 물려받은 아들은 검을 칼집에서 뽑고보니 피를 볼수 없었다. 그래서 제 어미를 불렀던 것이다. 아들의 낌새를 알아챈 어미는 제 목을 들이밀 수는 없는지라 모이를 쫓고있는 닭을 제꺽 붙잡아 아들한테 던졌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들은 닭을 베여 피를 보고는 시원스레 웃었다는 것이다.    검을 칼집에서 뽑았으면 피를 봐야 한다는 사무라이의 잔인이 그 정도에 이르었던 것이다.       “용(勇)”이 사무라의 랭혹한 살육을 부추겼다면 참을“인(忍)”은 사무라이로 하여금 되도록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게끔 억제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볼수있다. 사무라이력사를 보면 섬기는 주인이 갖잖은 사무라이들은 다른무리를 우연히 만나도 칼부터 빼드는 것이 습관이였다. 그러다가 기분이 틀리면 맛붙어 격투를 하기가 일수였으니 그때는 피를 보기마련이였다. 형편이 그럼으로 하여 불필요한 죽음이 자주생겼던 것이다. 하여 일본교는 참을 “인(忍)”을 제창하여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죽음을 의식 할 때는 참는 것으로 자신을 목숨을 불필요한 죽음에서 건지게끔 유도(誘導)했던 것이다.    선종(禅宗)에서의 생사여일(生死如一)의 리념은 오해되였던바 그것이 지어는 일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되다보니 “제가끔 제멋대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의 경지에 이르어 “죽을 마음은 가졌다면 아주 용감해야한다” 로 풀이되였기에 사무라이를 죽음에 미치게 할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제 목숨을 그같이 값없이 여기는 자가 그래 다른사람의 생명을 아껴줄수 있었겠는가?  아예바랄수도 없었다. 사무라이 자체가 창도(唱導)한 것이 바로그런것이였다.     한데 그 창도(唱導)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내려와 이제는 전쟁을 도락으로삼는 군국주의자들의 비위에 맞춰 리용되고있는 것이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토착(土着) 종교다. 일본은 그런 교를 갖고있는 국가인 것이다. 일본사람은 저히들의 국가는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태양손자의 나라라는 거다. 하기에 천황은 하나님같이 떠받들리면서 국민모두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우상으로 모셔지고있는 것이다.    정치적 기능을 감안할 때 신도교(神道敎)는 황제가 나라를 지배함에 기둥으로 되는 것이다. 국가신도(國家神道)는 일본민족의 우월감과 근대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수립함에 중요한 사상근원으로 되고있다. 그것은 고대에 확고히 뿌리를 밖았음으로 해서 일본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숭배사상은 지어 그것이 종교적인 경지에 까지 이르고있는 것이다. 하기에 그것은 일반 정치 설교보다 더 자극적이다. 흥미로운 것이니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다.      한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일본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복잡하고도 심한 위기감으로 하여 괴로워하고있는것 같다. 앞에 놓인, 국가와 민족의 존재여부를 갖고 bbs에서 공개적인 토론을 벌린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그 괴로움을 풀어줄 사람이 누군가? 내생각에는 오직 맨 웃꼭대기에 앉아있는 그 한사람밖에 없다고 본다. 일본에는 그것의 시범이 될만한 재미나는 례가 하나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일본이 망하면서 그들 자신이 겪어 본 일이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그때의 일본수상 스즈키 간타로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참가자는 전쟁을 지휘한 최고급위원 6명이였는데 론의된 의제는 이제당금 새로 덥치게 될 재난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그날 아침에 160만에 이르는 쏘련군이 만주에 대한 전면진공을 발동했던 것이다. 일본은 저들의 뜻대로 쏘련이 평화조약을 맺을것이라여겼지만 현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스즈키 간타로가 손을 들고 투항하자는 리유는 7월말에 동맹군이 일본에 투항할것을 이미 권고해왔었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전쟁을 그냥 할 수 없다. ‘포츠담공고'를 접수하는 외에 다른출로는 없다.”    년세맣은 수상은 이같이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부대신(战争部大臣) 아나미 고레치카의 태도는 그와달랐다. 그는 “그 누가 우리는 꼭 패한다고 긍정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수상의 제의에 분노했다. 대가를 그 얼마치르던간에 끝까지 해보자는 것이였다. 하여 6명의 요원은 두파로 갈라졌던 것이다.      사흘전에 미국의 첫 번째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져 도시는 훼멸되였다. 한데도 그냥해본단말인가? 미국에서 던진 두 번째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온 도시가 또 훼멸되고말았다.     여지껏 실패란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일본국민 전체가 6일간 꼬박 공포와 절망속에서 떨었다.    이런때에 생각밖에 놀랍게도 영웅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영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로히토 천황이였다. 기원7세기부터 내려오다보니 124대 황제로 된 히로히토는 명예가 천황(天皇)이랄뿐 실상은 여직까지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니 허재비나답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도 수줍고 연약해보이면서 해양생물학이나 연구하는줄로 알았던 44살나이의 이 사나이는 제 민족과 국가가 멸망에 직면했음을 알고는 관건적인 시각에 대담히 나섯던 것이다. 우리는 손을 들고 투항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구하자면 오직 그길밖에 없다고 했다. 하여 일본은 훼멸되지 않았고 그는 구세주(救世主)로 떠받들리게 되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의 일본천황은 아키히토로 알고있다. 지금도 건재한지? 건재하다면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망하기전에 히로히토천황처럼 나서서 제 국민의 구세주가 되여주기를 바란다.  
6    인생요지경(人生瑤池鏡) 댓글:  조회:3081  추천:6  2014-11-25
  인생요지경(人生瑤池鏡)    우리 여기 북경 통주의 신화련로인회를 보면 총인원이 70명을 넘어 거의 여든명에 이르고있는데 연변, 흑룡강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 여러 도시와 농촌들에서 모여들다보니 초면이요 각자 지내온 경력이 다 다르다. 하지만 그런것을 놓고 따짐이 없이 여지껏 서로 존중하면서 한집안식솔같이 어울러 지내고 있으니 시종 화기애애한 기분이다. 한데 번마다 보면 모이는 인원수는 무려 40여명좌우가 경상이다. 그러니 반수를 좀 넘길 뿐이다. 전체인원이 다 모이기는 불가능이다. 하지만 한주일에 한번씩 고정된 날자에 고정한 장소에서 드팀없이 이어지고있는 활동은 번마다 그야말로 활기에 넘치고있다. 실로 명실공히 사람마다 바라는 만년의 락원이라 하겠다! 북경의 신화련로인회가 운영이 이같이 잘되여 감에는 이 로인회를 조직하고 처음부터 10여년간 줄곧 맡아서 이끌어 온 김경덕회장을 비롯한 그 몇몇 지도팀 성원들의 사심없이 열정적인 로고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제 활동일을 맞으면서 모임에 술한잔을 썻다. 저세상에 간 내 부인 강순희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부인은 북경에 이사와서 살아온 10년 넘는기간 로인회에 들어서부터 친구들을 많이 사귀였고 이 한 조직의 관심속에 내내 마음즐겁게 지냈길래 죽어도 잊을 수 없다면서 리별전에 두가지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하나는 자기를 대신해 꼭 한번 인사술을 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보고 이제는 국가당안서류들을 그만뒤지고 모택동을 그만욕하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나는 굴복을 모르는 배짱센 인간이다. 하길래 혹독한 세월을 넘겨 여지껏 목숨을 부지하면서 억척스레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그렇다. 나는 누가 나를 해치면 그가 누구던간에 나는 그를 원쑤로 여기고 저주할 것이다.    여기 북경에 이사오기 전이던 1998년 3월에 나는 에 올라 국가로부터 "영예증서"를 받은바있다. 너가 이제는 나라의 명인이 되었으니 그런줄을 알라면서 떼여준 증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된 1949년 10월 1일 그날부터 1997년 8월까지 계산하고 금을 그어 대만,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한 중국대륙전반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각 부문들을 통털어 성적이 돌출해서 공이 있는 인재들을 뽑아내여 건국이래 처음으로 되는 (상, 중, 하)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오른 총인원은 35506명이다. 그 가운데 나 이 김송죽이도 든 것이다. 전혀 꿈밖의 일이요, 너무나도 아름찬 영광이라 나는 여지껏 감히 남앞에 내놓고 자랑못하고 있다가 요즘에 와서야 그것을 로인회에 들고가 보라고 내놓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고회를 넘도록 살아오면서 내가 보아낸 이 인간세상은 내가 바라는것 같이 그정도 화애로운것이 아니라 한심하게도 험악했던 것이다. 초중을 졸업할 때 내가 일기책에다 써놓은 는 글귀가 문혁 때 혁명자에 의해 발각되여 대중앞에 나서서 첫투쟁받던 날 한마을에 사는, 내가 맘속으로는 제일 믿고 존경해왔던 리청룡어른이 나하고 “네가 대체 공부를 얼마했느냐?”고 묻는것이였다. 그래서 내가 곧이곧대로 초중을 다녔노라 대답했더니 그가 침을 탁 뱉으면서 하는 말인즉은 “야 이놈아, 꺽구로 들고 쪽  훑어봐야 똥물밖에 나올게 없는 주제에 네가 다 작가가돼?... 야야, 메스껍다, 메스꺼워!" 하고는 저놈을 단단히 혼내워라 했다. 하여 코빠는 애들이 새끼로 내 목을 매여 개처럼 끌고다녔던 것이다. 관속에 들어가는 사람한테라도 막말은 말라했다. 앞길이 천리같은 젊은이를 세워놓고 아무럼 어쩌면 그렇게 까지 지독하게 군단말인가? 나는 그때부터 공산당원이라면 다시봤다. 견해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세상에 제일 좋은사람이 공산당원중에 있거니와 제일무지하고 악한자도 공산당원중에 있는것이다.  물론 세월이 달라져 지금은 많이 좋아진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름놓고 락관할 수도 없는것이 인간이 붐벼대면서 살아가고있는 이 세상, 이놈의 인생요지경(人生瑤池鏡)같은 사회인 것이다. 지금도 내가 남과  나는 ‘중화인물사해’에 오른 사람이요 하거나 내가 ‘명인’이요 한다면 대방은 어떻게 생각할가, 어떤 반영일가?   겉으로는 아 그런가 감탄하겠지만 속으로는 단통 자식이  제자랑하구있네 하거나 아니면 무슨 후춘개나발을 부는거야 하고 되려 욕을 하기가 첩경이다. 공연히 사서 말밥에 올라 씹히면서 미움사거나 사이를 버성기게 만들 필요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와 우리 집 식솔들은 다가 여지껏 가족의 영광과 기쁨을 속으로만 간직하면서 입을 조심해 온 것이다.  그러다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등에 지고 오던 짐을 부리듯이 내 속을 시원히 드러내는바다.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오래살지. 요즘 만든 일대기를 내놓는다. .    作家一代記     金松竹,  男, 朝鮮族。   1940년2월 중국의 흑룡강성 화남현 복가툰에서 당악김씨 김병념의 아들로  태여나 가문의 삼대독자가  됨. 1947년11월17일: 토비숙청에 나섰던 아버지가 영평강전투에서 자기가 거느린 정찰병전원과 함께 불행히 전사. 어머니가 부대재봉소에 계속근무했기에 3년간 부친의 생전소속부대에서  군인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라남.                  1953년여름: 조선전쟁이 끝나갈무렵, 흑룡강성 화남현 팔호력 중심촌소학 5학년시절 동시 을 지어 소년간물에 발표. 난생처음 원고료를 받아 쓰면서 희열을 느낌과 동시에 문학의 묘미를 깨닫게 됨.  1954년7월: 부친의 묘지ㅡ17렬사릉원이 가까이에 있는 벌리조선중학에 입학. 재교기간 동반생 박억만, 소학시절동창 조용환이와 문우가 되여 편지형식으로 서로 련계하면서 열심히 문학을 탐구하기시작. 1957년7월: 3년간의 초중공부를 끝내고 졸업. 생활체험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생각과 쏘련작가 고리끼를 본받으면 자습으로도 능히 성공할수있다는 신심에 스스로 승학마저  포기하고 화천현 성화향에 돌아가 농사일에 종사.  8월: 본인이 소시적 부대에서 자라는기간 특공훈련을 받은 경력이 있음을 알고있은 유관부문으로부터 송화강이북 "련강구로개농장"에 경찰로 가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경찰로 되고푼 맘이 전혀없었기에 그에 불응함. 1959년8월: 본지에서 소학교편을 잡음. 마을에서 농사일하는 초학자ㅡ 김인세, 김성일과 함께 공사당위의 허락을 받고 문학쿠르쇼크를 조직. 업여로 “중국민족해방운동사”와 “문학론초고”를 학습하면서 습작을 시작. 1962년7월: 조선문판 “흑룡강일보”에 처녀작 시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조선작가동맹위원장 리기영선생과 련계. 그의 부름에 응하여 조선에 나가 작가수업을 하려고 떠났다가 그런다면 그것이 어머님과의 영결이 될것같아 중도에서 발길을 되돌려 중국에서 계속 자학(自學)의 길을 걸음. 1962년12월: 연변에서 태여나 자랐지만 내내 한족학교에만 다녔기에 중국말에 능란한 진주강씨녀인 강순희(姜順姬)를 알게되여 결혼. 그를 종생의 반려로 삼음 1963년11월: 장남 김성해(金星海) 태여남. 1965년5월: 첫장편소설 을 씀. 원고를 할빈시조선문화관 “송화강”잡지사에 투고. 1965년10월 딸 향단이 태여남. 하지만 의사의 오진으로 3살먹던해에 아깝게 잃음. 1966년8월: 문혁(文革)시작. 나라정세가 점점 란잡해짐에 불안하여 장편소설원고를 되찾아옴.       9월에 이르러 원고를 사청때 원고료는 액외수입인데 학교에 들여놔야지      받아서 혼자쓴건 자산계급행위라고 망언을 했다가 되려 망신스레 퇴박맞은 정장송이 보복을 목적해 성화공사 교원반란 퇀을 조직하더니 보고서는 돌려주리라 거짓말을 하고 빼앗아 감.  1968년2월: 차남(次男) 김성천(金星泉)이 태여남.  그해의 8월말에 이르러 초중시절부터 써온 일기책과 습작자료 10권마저 압수당했거니와 9월에는 정장송(鄭長松)을 비롯한 혁명자악한 몇의 작간에 의해  아버지의 렬사증과 추도식사진마저 빼앗겨 찢어없어지며 공사당위의 인준하에 마을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여 문학공부하면서 소설창작을 해온것마저 억지죄로 꾸며져 투쟁받기시작. 따라서 소설자료들을 건사해준 어머님마저 아들의 보황파로 몰려 모진구타와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음. 1972년4월:  ,,, 등등 10여가지에 이르는 근본 되지도 않은 죄명으로 4년간 공사내 돌림투쟁까지 받았거니와 나중에는 현에서 열린 만인투쟁대에까지 오른 후 현감옥에 투옥. 하지만 옥고를 치르는 45일간내에 벌어진 4차의 법정변론에서 번번이 이김으로 해서 결국 무죄로 석방 됨. 집에 돌아오니 “강화발표30주년응모통지”가 기다렸기에 이틑간 쉬고나서 빼앗겨 없어진 첫장편을 비밀리에 다시쓰기시작.          1972년 7월: 장편제목을 으로 고쳐 “흑룡강신문”에 투고. 1974년 5월, 퇴자맞은 장편을 비밀리에 전부다시 수개끝냄.            6월: 소설제목을 현재의 으로 고쳐 연변인민출판사에 투고함. 1979년1월5일: 억울한 안건으로 평판되면서 드디여 인신자유와 창작자유를 완전히 되찾게 됨. 1980년 6월: 연변작가협회에 가입.            8월: 흑룡강작가협회에 가입. 1981년10월: 5차수개끝냄. 1983년 3월: 장장 18년간의 진통끝에 첫저작이 마침내 세상을 보게 됨. 1983년12월: 흑룡강작가협회 제2차 대표대회에 출석. 1984년ㅡ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첫장편 을 두달가량 방송.               자치주는 이 책을 전주종업원 “삼열애교육필독서(三熱愛敎育必讀圖書)”로 추천함. 1985년1월: 흑룡강성문학예술계련합회 제2차 대표대회에 출석. 1986년7월: 국가로부터 칭호를 받음. 1987년6월: 흑룡강작가협회 제3차 대표대회에 출석.          7월: 력사총서 “중국조선족이 걸어온 발자취” 과외편집작가로 초빙받아 한동안          민족력사자료수집과 연구에 몰두 함. 1987년9월: 中國社會科學院 當代文學硏究所에서 본인의 작가당안건립.         첫장편소설과 함께 전부의 초고들을 당안고에 입고. 1988년9월: 수년간 교편을 잡아오던 화천조선중학에서 퇴직하고 창작에 정진.         10월: 佳木斯市에서 “優秀作家”영예를 수여함.         11월: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에 가입. 1992년8월: 북경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작가 제1차필회에 초청참가.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소개인 조선족시인 金哲, 만족시인 中流.) 1998년3월: 사적이                                                                                                                        등 여러사전에 수록되면서 略歷이 (당  대 문화권)에 올라 “영예증서(榮譽證書)”를 받음. 2000년 1월: 南京 中山文學院에서 客座敎授로 초빙했으나 본인이 한어지식 구술능력이 부족함에                   통감하여 스스로 그에 불응함. 2003년11월: 국제펜클럽에 가입(총부 런던)   지금껏ㅡ  소설, 시, 수필, 에세이 등 500여편(수) 창작 발표. 중편소설 (1987. 연변인민출판사) 장편소설 (1983. 연변인민출판사) 장편전기 (1994.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장편소설 (2008년. 민족출판사)출간 대하력사소설 3부작 조글로 인터넷에 발표. 련재및    수상정황:              아동중편소설 ㅡ 1987년도 길림성우수도서.              장편전기 ㅡ 1994년도 흑룡강성 우수도서.              수필 , , .              단편소설 등이 우수상.              중편소설 이 국제펜클럽한국본회주최 제4회 한국해외동포창작문학  우수상. 본소설은 2001, 11. 에 발표된 후 국제펜큽럽 한국본부의 에 다시 등재 됨.   2014년 6월 30일가정에 액운이 떨어짐:                문학의 길에 올라선 남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가정총목을 짊어지고 한생을                분투해온 부인이 오랜 병환 끝에 타계. 향년 73세.                 성공한 남자뒤에는 그를 받들어 세워준 성스러운 녀인이 있었다!                위대한 조국이 있기에 성공하는 내가 있다!                          
5    시 내앞에서 별이빛나 댓글:  조회:2029  추천:4  2014-11-11
  시  내앞에서 별이빛나                김송죽 나는 반생을 달려왔다 인생종점은 어디? 꼬부라진 의문부호 앞에 던지고 나는 다시 신들메조인다。   내 심장에서 설설 끓는 피 동토대의 천년설도 녹이거니 천산만악이 그냥 앞을 막아도 나는 가리라 내가 갈길을。   얼음같이 차가운 랭소  엄한보다 혹독한 인정 무슨 맛이면 보지 않았으랴 담즙같이 쓰거운 나의 생로。   하지만 내 앞에서 별이 빛나 마음은 하냥 희망속에 웃어 용기는 장엄한 맹세 이루더라 용사답게 살다 죽으리라는。   오 그때가 되면 내 한몸 한줌의 재로 되어도 내 이름도 류성으로 남을가 태공을 가르는 빛이 되어!   (1988. 1. 16 > 진달래)
4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댓글:  조회:2672  추천:5  2014-08-18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1. 한심한 짓거리   화천현 성화공사교육계의“문화혁명”은 자기들이 아니고는 해낼 사람이 없다면서 맨먼저 고개를 쳐들고 무리를 만든것이 바로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이였는데 이른바“무산계급혁명자”로 자칭하고 나선 그들이 머리악을 써서 고안해낸 제일 첫 번째의 수작ㅡ 짓거리인즉은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나 이 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북방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라는 그곳에서는 한차례 유사이래 전대미문의 희한한 이 벌어지게 된건데 그것인즉은 바로 나의 아버지 김병념(金丙念)이가 혁명렬사자격이 되냐 안되냐를 판명하는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진노하고 개가 웃을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것은 결코 작난이 아니였다. 마음먹고 생사람잡이를 하자고 든 그몇이 굳게 다짐한 끝에 짜고서 벌린 놀음이였기에 계획이 주도면밀했거니와 따라서 살기(殺氣)가 충만해 너울쳤던 것이다. 환경이 그같이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하려고 발벗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공사기무대(公社機務隊)에서 한뉘  뜨락또르를 몰아온 리종철(李鐘哲)이였다. 군대츨신인 그는 공인대표신분으로 그번의 변론에 출면한것인데 너희들은 우선 하는 작법부터 틀려먹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리종철이 말했다. 어느 누가 렬사로 되느냐 안되느냐는 국가정부가 판정하는것이고 이미 그렇다고 판정이 됐길래“렬사증”까지 발급한 것인데 너희들이 대체 뭐가돼서 그것을 맘대도 빼앗아가고 주제넘게 이렇쿵저렇쿵인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하면서 우선 나의 아버지 김병념의 렬사자격문제를 놓고 변론하는것부터가 대단히 미런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의 이름을 하나하나 찍어가면서 작태가 너무나도 방자하니 그렇게 놀지 말라고 충고를 했던것이다. 그러면서 리종철은 성화공사교육계에서는 생사람잡이를 당장 거두는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무지와 폭력이 한창 맹렬히 팽창돼서 기를 펴고 살판치는 세월이라 그 한사람의 건의와 지탄이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것이라해도 그것을 옳다고 나서서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저쪽은 기세가 점점 더올라 압도적이요 이쪽은 자연히 눌리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흑백이 전도되는 한심한 란장판이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분석해보면 그럴법도했다. 모인사람이란 리종철 하나를 내놓고는 다가 성화공사 6개마을의 소학교와 중학교의 선생들이라 그들다가 간이 콩알만해서 불이 제발등에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벌벌떠는 소지식분자들이였던 것이다. 명철보신을 상패로 삼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내본신과 내역성을 들어주는 리종철은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패배당하는 형국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하니까 앞에 놓인건 오로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감내해야 할 준엄한 시련뿐이였다. 나는 그 시련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시기시기 응변의 자세를 취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회의에 참가하라고 부르기에 중학교에 가니 집이 성화대대에 있는 조정희(趙正熙)란 노인이 와있었다.  나는 그것이 혁명자들이 알심들여 꾸며낸 연극의 한 장면임을 어려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를 로 모셔다놓음으로써 내한테 저들의 위세를 보이는 판이였다. 그 조정희(趙正熙)노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거느리는 정찰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인 것이다. 1946년 11월중순, 아버지는 상한에 걸려 거의 죽게된 그를 친히 업어다 벌리(勃利) 남문에 있는 그의 집 식솔과 친척들에게다 맡겨놓고는 벌리의 집에 들려서 하루밤을 지내고 돌아가 그 이흣날 새벽전투를 치르다 참모장 김해정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가 거느린 반의 전원과 함께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때의 일을 잊을수 없다. 내가 내눈으로 직접봤길래 잘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갖고 온 것이 세모꼴꺾이창이 달린 쏘련제 베르단이였는데 나는 그 총을 갖고놀았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와서 나는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유개차에 앉아 벌리(勃利)에서 북쪽으로 첫정거장인 멍쟈강(孟家崗)에 가 역전마당에다 차례로 줄을 지어놓은 여러개의 관중에서 련장이 하나 관 뚜껑을 열어주기에 보니 그안에 전날 병에 걸린 조정희(趙正熙)를 호송하고나서 집에 들렸던 아버지가 시체로 되여 누워있었는데 웬영문인지 상반신은 적삼도 입지 않은 맨몸이였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적탄을 두곳이나 맞았는데 한방은 복부고 다른 한방은 심장이 있는 오른쪽가슴웃쪽이였다. 련장이 하는 말이 시체를 무우굴속에서 찾아냈는데 아버지는 두손에 총창을 꽉 틀어쥐고있더라면서 시체가 불에 타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라했다.   문화혁명직전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뒤늦게야 우리 아버지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조정희(趙正熙)라는 노인이 성화마을에 살고있다는것을 알게되여서 어느날 술근을 받아갖고 만나보러갖던 것이다. 식솔 넷에 단간방이였는데 구들에 편 까래가 매우 헐망했다. 일견하여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인정이 깊어져야 할 사연이 있는지라 반갑기가 이루말할수없었던 것이다.  하면서 조정희(趙正熙)로인은 나를 만나자 손을 잡고 락루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맞이는 성명이 조이권이고 둘째는 조남권이다. 맏이는 그때 생산대서 일을 했고 둘째는 중학을 다녔던 것이다.   한데 그 생존자 조정희(趙正熙)한테 무슨 갑작운이 붙었길래 빈하중농대표신분으로 중학교에 들어가 문화혁명을 이끄는 지도급인물로 되였을가?. 그가 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둔갑을 해도 한심하게 해서 나는 보고도 할말이 없었고 있다해도 목구멍이 메이서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그는 빈농이니 성분이 좋고 출신이 좋을뿐 판무식쟁이나답지 않은 사람이였다. 그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고 증명을 어떻게 서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부터 나의 아버지를 나쁜사람으로 몰아붙이고 그렇게 만들려고 든 그 몇몇 어리석은 자들의 작간에 끌리여서 충분히 리용된되고있은것만은 틀림없었다. 이거였다. 그렇다해서 고개숙일 내가 아니녔다. 나는 그 몇몇 혁명자들의 얄팍한 수작질이 하도 어처구니없고 쓰거워서 속으로 웃고말았던 것이다. 내앞에서 이제 당장 꼭괭이를 들고 벌리17명렬사릉원에 가서 언녕 다 썩어 진토(塵土)가 되였을지도 모를 무덤을 파버리고 뼉다구마저 없새리라면서 길길이 날뛰던 그 몇몇 무지막지한 깍다귀들의 추태를 내가 지금도 눈앞에 보는것만같다. 과연 제바지에 똥싸고 핥아먹기나 할 견강한 무산계급전사들이였다!     조령감의 둘째아들이요 중학생홍위병들중에서도 한창 맹장으로 부상되여 머리를 저어댄 조남권이가 그래도 사람이라서 량심상 뭐가 가책되는것이 있었던지 그날 우리 집에는 까딱 얼른거리지 않고 제또래 몇을 휘동하여 대신 이모네 집에 달려들어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고 한다. 집을 수색하느라 발칵뒤졌거니와 뻔뻔스레도 이모부의 양복바지마저 입고 달아났다는가?... 그날에 벌어진 그 모든 작태가 정장송과 장동화, 심군일 그 셋에 의하여  꾸며진 파렴치한 략탈행위였다는것은 훗날 리지가 회복되여 정신이 자연히 맑아진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한 것이다.   2. 해명안되는 일   세상에 원인없고 리유없는 사건이란 있을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까지도 동창생 심군일이가 지난날 나를 해치느라 놀아댄 그 가지가지의 극적인 극악한 행위들만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서 종시 속에 내려가지 않는다. 내려갈수 없다. 그러면서 머리를 아무리 써가며 연구를 해봐야 지금까지도 그 원인을 딱히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에라 다 지난건데 그만 잊고말자해도 전혀 잊혀지지 않는것이 상처깊은 그 단락의 력사인 것이다. 사람은 인내성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참는것도 용서하는것도 한정이 있는 것이다. 다른 생면부지의 그 누구였으면 몰라도 이건 잘아는 동창으로서 인피를 쓰고 어쩌면 그토록 사람같지 않은 야만의 짓을했느냐말이다?! 인피를 썻으니 인간인가하지 그게어디 사람인가고 내 노친은 살았을적에 여러번이나말했다. 맘속에 오죽내려가지 않았으면 그랬으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내가 한번다시 반목하게 되는 그들 세인물중 장본인이요 첫손을 꼽았던 그사람, 환갑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정장송은 그나마 보복할만한 리유라도 어느정도있어서 문화혁명이 오니 얼싸좋다고 손을 폈다만 장동화와 심군일은 도대체 왜서, 어쨌다구서 사람으로서 그같이 짐승같은 행실을 했냐 그거다. 정장송은 1964년 사청운동 때 같은 연변내기 선생 한분 김용천선생을 잡으려다가 내한테 비난받고 제지당하니 그 분풀이오 나를 기껏 때린다는게 고 망언을 했던 것이다. 그래 내한테서 는 비난의 소리를 들은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소리를 공공장소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진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 본인한테는 대단한 모욕이고 치욕으로 느껴져서 이를 앙가물고 있다가 기회가 되니 보복을 한거지만 장동화나 심군일은 도대체 왜? 왜서 나와 명분이 없는 보복을 하느냐그거다. 정장송은 문화혁명이 끝나서 그래도 두 번이나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자기 때문에 입당할것도 못했으니 소개인이 되어 나를 입당시키겠노라했다. 그가 그러는것을 보면 어느정도 사람이 되어간다는 감촉이 들었다. 그런데 장동화는? 심군일이는? 여지껏 표현이 그득잖다. 장동화는 뻔뻔스레도 였다. 그래서 내한테 한매 단단히 얻어맞았고 시궁창에 바라다니는부덕쥐로 취급받게 된것이다. 한데 심군일이는 대체 어떤가?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그래 장동화모양으로 할건가?  대체 어떤 심통인지 그것을 내가 알고싶다.   나의 노친이 생전에 몇 번 나와함께 심군일이가 우리 집을 그토록 해친 원인이 대체 무엇이였던지 그것을 알아내려했지만 끝내 알아내지를 못했다. 나는 두가지 일이 심군일이가 나와 척을 짖게 된 원인이 아니였는가한다. 하나는, 약혼을 한 심군일이가 잔치날을 받아놓고 당장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한학교의 젊은교원 김덕춘이가 쟈므스에 가서 이제 심군일에게 줄 결혼례물이라면서 사온것이 탁상에나 올려놓을 접시만한 동그란 체경 하나였다. 그것도 그 혼자면 몰라도 장가가는 당자를 내놓고 홍광학교선생 다섯의 명의로 주는 선물이였던 것이다. 내가 결혼했을 때와 비하면 그건 너무도초라했다.  나의 결혼식때는 생산대에서 의 커다란 유리풍경화에다 자모회에서 탁상시계까지 하나 례물로 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님동생하는 옛고향친구 김호일이가 호랑이를 그린 커다란 유리판유화를 선사하고. 그당시 형편에서 그만하면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였다. 나는 대대와 자모회의 책임자를 찾아가 심선생이 이제 곧 결혼하게되리라는것을 알리어 내가 받은것만큼은 몰라도 대대와 자모회서 알고 성의껏 례물을 준비하게 할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덕춘이가 나와는 아무말도 없이 그같이 하니 내가 그보고 그런일을 왜서 토론이 없이 혼자서 결정하느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대방은 아마 내가 돈을 내기아까와서 그러는줄로 알았던지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었던지“씨베! 씨베!”하면서 사온 체경을 내앞에다 둘러메쳐 박살을 내는것이였다. 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저돌적인 행위에 놀라고 기막혀 한참이나 쏘아보다가“젊은놈이 돼먹지 못하게 왜 그모양이냐?”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시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후 김덕춘이도 약혼을 한건데 그는 약혼녀가 달라는 몸을 주지 않는다하여 대들보에다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와의 모순은 풀지 못하고만건데 그처럼 심군일이도 뭔가 잘못오해하고 나에게 적의를 품은게나 아닌가한다. 김덕춘이나 심군일이나 보면 속이 졻아도 형편없이 졻고 다혈질인지 조폭하다. 본성이 그러하다는것을 알았으면 내가 주동이 돼서 허심탄회를 해야 옳았을텐데 여지껏 그러지를 않았으니 내탓도 있겠다. 하지만 아래의 일들은 그렇지 않다. 심군일이가 우리 홍광마을 소학교에 교장으로 부임되였어도 내집에 와서 숟가락 한번 든적없고 술한잔 같이 나눈적도 없은 그것이다. 서로간 처지가 그렇게 되였음에는 심군일가 우선 책임져야 할 곡절이 있는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성명이 강명숙(姜明淑)이였는데 홍광마을에서는 내내 산파(産婆)로 존경을 받아온 강혜선의 조카벌이 되거니와 같은 강씨라 하여 우리 집 사람을 면목을 알자마자 “언니, 어니”하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우리 집에 놀러를 자주다녔다. 어느날 우리 내외는 토론한대로 점심저녁 두끼음식을 잘 준비해놓고는 심군일내외를 청하기로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량주를 모시러간건데 문을 떼고 들어서니 심군일이가 제 처의 머리카락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구들바닥을 돌면서 질질 끌고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아프다고 아부재기를 치고 심군일이는“이 쌍년아! 이 쌍년아!”하면서 죽은 개를 끌듯 그냥끌면서 태를 쳤던 것이다. 그래 둘째젖먹이 애를  업고갔던 우리집 사람은 너무도 놀라고 억이 막혀 하면서 부부간에 화목하게 살아야지 남을 웃기며 이래서야 되느냐며 말렸더니 심군일이가 했던 것이다. 싸움을 말렸다가 되려 욕을 얻어먹은 나의 처는 분해서 돌아선 후로는 그만 발길을 끊고 만 것이다. 심군일의 처 강명숙은 그때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낮에 남편이 달라는 몸을 주지 않았다가 그같이 모진 형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불쌍한 그녀는 그후 딸을 하나 낳아주고 몇해지나 젊은 나이에 그만 죽고말았다.    우리집 사람은 그때의 그 일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면서 여러번이나 도리를 떨었다.     3. 모욕적인 날조   우리 집 노친의 눈에 심군일이는 일찍부터 악인으로 각인되여 있은 것이다. 때 심군일이가 그를 멸시한 것을 보면 상상키 어려울지경 이여서 언어도단이다.     매양 우리 집이 거덜이 나던 그날이였다. 이때는 쇠줄에 발이 찔려 기혼한 어머니가 문짝에 들리여 집으로 옮겨진후였는데 심군일이가 이제 태여난지 반년밖에 안되는 둘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있는 우리 처를 길복판에다 세워놓고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이같이 제마음대로 날조한 억측으로 무턱대고 따지고들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꼭마치 히스테리발작이 멎지 않은 미친개같았다. 나의 처도 만만치 않게 태도가 견정했다. 그러니 심군일이가 손가락을 거의 코밑까지 드리대고 바들바들 떨면서 욕지걸이를 퍼부었던 것이다.   심군일이는 제뒤에다 세워놓은 나를 피끗 돌아보고나서 얼굴을 다시돌리더니 어성을 한층높혀 제멋대로 거짓말을 해댔다. 나는 하도어이없어서 콧방구를 뀌였다. 나의 처의 이런 단호한 대답질에 심군일은 그냥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어가면서 요 개쌍년이 거짓말하는것 좀 봐라. 집에다 라지오를 놔두고도 그걸 듣지 않았다는게 어디 말이 되느냐고 소리를 뽑았던 것이다. 우리 노친은 저세상으로 가기 며칠전까지도 그때의 그 억울하던 장면을 회상하고는 고했던 것이다. 과연 사람이 어떻게 돼먹었으면 그렇게까지 지독한 악물로 보였을가? 나는 요즘와서야 심군일이가 전에 그같이 동창과 이를 악문 리유를 다른 한 방면에서 찾아보게 되였다. 그러나 그역시 가설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로나  될  뿐이다.. 이제는 몇십년이 지난 먼 1964년 4청때의 일이다. 그때 을 잘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계급교육을 첫 자이에다 놓고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리하여 한때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중시하여 열조를 일으키기에 이른것인데 이쿠쓰탠(忆苦思甜)하면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글쓰기를 무척좋아한 나는 한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수집을 다녔다. 듣자니 벌리(勃利)일대에도 우리 조선족동포가 집거해 사는 부락이 여럿되거니와 이야거리도 있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게된건데 거기 후춘툰(厚春屯)에서 산적이 있는 한 중년의 녀인이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해서 소문을 낸다는 것이였다. 그래 내가 그게 대체 누군가 알아보니 녀인은 성명이 심계화(沈桂華)라했다. 하여 한걸음 더 그의 가정리력을 알아보게된건데 그는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였다. 후춘툰(厚春屯)하면 전에 동창생 심군일이네가 살았던 마을이 아닌가? 심봉사라면 그는 심군일의 아버지일것이다. 내가 심군일의 아버지는 눈이 멀었다는 소리를 중학을 다닐때 들어서 아는것이다.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한다는 심계화(沈桂華)인즉 바로 동창생인 심군일의 누나였던 것이다. 심군일한테는 우로 그 누이말고도 형이 둘있는데 맏형은 팔부를 겨우면할정도에 일이나 꾸벅꾸벅 잘하고 둘째형은 마음좋고 어진데 그만 아랫것을 잘못썼다가 몇해 감옥밥을 먹은적이 있는 사람이였던 것이다. 집안형편이 대략 그러하니 힐끔하게 자랑할것이 없었다. 한데 무슨눔의 이쿠쓰탠(忆苦思甜)이란말인가? 내가 보건대는 우선 이쿠쓰탠(忆苦思甜)을 다닐 조건과 자격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봉사니 한뉘 일을 못했을거요 자연히 가난했을것이다. 그러니 자식들을 섧고 고생스레 자래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계급압박이나 계급투쟁에다 련계시키는건 개잇발을 상아로 팔아먹는 격의 억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취재한 그것을 쓰지 않고 내가 살고있는 한 공사내 성화마을에 사는 함명옥(咸明玉)녀인의 가정사를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로 만들어 신문에다  냈던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자 즉시 효력을 냈는바 반영이 좋았다. 우리 성화공사의 당위서기로 오래있다가 후에는 화천현현장으로 발탁한 선우승이라는 분이 그당시 합강지구내 여러 조선족공사들의 사청교육을 맡아서 지도했는데 내가 쓴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가 적시에 나와 좋은 효력을 냈노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심군일이 그일을 알면 혹시 불만이 생겨 분노했을수있겠다. 왜서 동창의 가정사는 몰라봐주는가고. 차라리 그일을 그가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정장송이처럼 내한테 보복할만하 리유가 생기겠으니말이다. 그러면 피장파장이 될게 아닌가! 심군일이는 하여간 대단히 약은사람이다. 사람을 때이고 뚜드려마스고 빼앗는것을 따쟈챵(打砸强)이라는데 그 최선봉이였던 심군일이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거니와 되려 중학교장으로까지 급을 춰서 해먹다 오솝서리 퇴직한것을 보면 처세술(處世術)이 대단하다. 아니면 그놈의 정책락실기관이 눈이 멀었던지. 문화대혁명때 겪은 일을 하나 더 말해야겠다. 그는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제 심리상의 쾌락과 야릇한 만족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악성을 갖고있는 철면피한 인간인 것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심군일은 애들을 시켜 나를 교무실에 불러다 꼭괭이로 학교서쪽켠에 있는 몇군데 남아있는 낡은나무뿌리를 꼭 파버려야한다고 명령하고나서 집으로 가면서 일이 끝나면 자기한테와서 꼭 보고하라는 것이였다. 하여 비를 후즐근히 맞아가면서 나무뿌리를 다뽑고나서 그의 집으로 가게된건데 가보니 희한했다. 벽과 천정을 빈자리없이 몽땅 도배를 했는데 책장과 화보장들은 몽땅 나의 소설책과 화보를 파한 것이였다. 그가 흐믓해서 나를 향해 거즈너기 웃는 꼴이 어떠냐, 봤지, 가슴아플거다 하고있었다. 바로 그것이였다, 나에게 자극해서 심리상 고통을 주자는 그것!... 나는 파렴치한 그 낯짝을 정말 올리차놓고 싶었지만 그냥 참는수밖에 없었다.    4. 고인의 안식을 빌어          노친은 생전에 남과도 이런 소리를 한것이다. 둘째란 나의 둘째아들 성천(星泉)이를 가리키는데 내가 판결에 넘겨져 미결수감방에서 지내는 그 45일사이만도 새끼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처의 처지는 말이아니였다. 남편이 이제 20년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무기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아예 총살을 당하고말리라느지 갖가지 요언이 무성해 심리고통이 심한데다 농촌이니 먹을건 그런대로 있었으나 병이 나니 돈이 한푼도 없어서 그게 문제였다. 월급을 끊고 주지 않은지가 4년철,  손에 푼전한잎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혈을 몹시했다. 의사를 보이고 치료를 받으려해도 할수가  없었다. 이런때에 쟈므스탕창(사탕공장)에 있는 한 무자식부부가 어떻게 알고 기저귀와 싸개를 해서 갖고와서 젖먹이 둘째를 저들이 기르겠으니 달라했던 것이다.  그들은 달라면 인차주리라 여기고왔던 것이다. 나의 처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키워야지 하고 굳게 결심하니 그들은 다시두말없이 오섭서리 되돌아가고말았다. 그후 나의 처는 하혈이 점점 더 심해 부득불 시집올때의 천날옷을 비롯해 좋다는 견지들은 다 팔아 돈을 만들어 병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사나이뒤에는 그를 받들어 성장시킨 위대한 녀인이 있었다. 올해의 6월30일 오전여덟시반경, 52년간을 고락을 같이해온 내 노친이 불치의 심장병을 앓다가 73세를 일기로 끝내 내곁을 떠나고말았다. 그러니 그가 세상을 하직한지가 어느덧 두달이 되여온다. 하건만 나는 한시도 끊지 않고 내내 회억속에 묻혀지낸다. 이역시 내 인생궤적의 프로그램이 아닌가한다. 7월 2일, 내노친의 장례를 치른 그날의 정경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각인되여 영원히 잊혀지지않고 생생히 남을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생각밖이였다. 우선 수도빈의관의 그 고급스럽고도 문명한 현대식의 시설과 정경에 나는 감동하면서 모든 근심을 풀어놓아 마음이 편해지게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인터넷 자은천하(慈恩天下)를 찾아 거의 매일이다싶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있으니 그 효성이 과연 지극하다. 내가 만약 지난날 그 무리에 목숨을 잃었더라면, 그자들의 야심대로 처와 자식들이 멸살을 당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였겠는가? 이 세상에 나와 내 식솔을 추억해주는 망령(亡靈)이라도있을가? 그날 노친의 유상을 중간에 놓고 13개의 커다란 화환으로 장식된 장엄한 장례식장에세 묵도를 올린이가 40명을 넘었으니 그들 거의가 나의 두자식의 동창아니면 극진한 친구들이였다. 사업이 바쁘건만 원지에서 온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72세나는 다다히로 타무라선생의 래림에 나는 정말 고마와 감탄했다. 그는 한해전 노친이 병원에 입원했을때도 고맙게도 일부러 찾아와 기도를 올리기도했던 것이다. 우리 큰애 친구의 벗이란다. 나는 효성을 다하는 아들들이 있음으로 하여 여지껏 시름놓고 내쓸 글이나 쓰면서 자유로이 편안히 살아온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나와 내 집을 멸망시키려고 기껏 발악했던 그 동창을 생각하면 오직 멸시와 비웃음만 나온다. 포부가 바다같이 넓지 못해서 숨기지 못하는 내 감정으로 치부하면 되겠다.   심군일이는 아들이 없다. 있다면 개아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비가 사람이아니기에. 딸이 커서 남편을 얻었는데 그 사위라는것이 심군일이가 지금 데리고 사는 후처가 낳은 아들이다. 그러한즉 군일이는 지금의 노친을 뭐라 불러야 옳은가? 처라불러야옳은가 아니면 사돈이라불러야 옳은가?  사전에 거기에 대서는 해석이 없다. 그따위 란혼은 짐승이나할것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다 코를 쥐고 웃으면서 이런일은 머리에 털나서 처음본다고 말한다. 남을 욕하기 좋아하는 심군일이가 허세를 부리느라 제꺽하면 서슴없이 내치는 소린데 이런 쌍욕을 진짜먹어야 할건누군가? 내가 보건대 이 쌍욕을 얻어먹어야 할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심군일이밖에 없는것 같다!        
3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1) 댓글:  조회:2763  추천:7  2014-08-13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1)     이 글은 가슴에  맺힌 원한을 생전에 풀지 못한채 그대로 저세상까지 가지고 간 나의 두 친인ㅡ 존경하는 어머님과 사랑하는 처의 유언에 좇아서 쓰게됨을 말하면서 독자는 내심하게 한번 읽어보고 사색해보기 바란다. 그런다면 과연 고맙겠다. 이라 하면 한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였거나 함께 졸업한 관계여서  상식적으로도 사이가 좋아서 자연히 가깝고 친하게 지내기 마련이건만 내가 초중다닐 때 벌리중학을 같이 다니고 같이 졸업했던 심군일(沈君日)이만은 왜 그렇지 않은지 지금까지도 그 영문을 모르니 답답하고 리해가 안된다. 그러니 아직도 적원(積怨)만이 쌓이여 하는 생각뿐이다. 가슴에 여적지 서려든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더욱 가슴아프다. 고 과연 속담그른데 없나보다. 짐승도 유정(有情)해서 아는 사이면 꼬리를 젖는데 사람으로서, 더구나 동창으로서 아무렴 어쩌면 그렇게까지야 지독하고 악독하게 놀아댄단말인가?...과연 귀신이 들어도 피똥쌀 일이다.... 딱친구는 못될지언정 그래도 우리는 동창생이 아닌가? 하건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같이 서로간 원쑤로되고 말았던가? 아무리 따져봐야 학교같이 다닐때는 물론 그후 사회에 나와 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선생질을 하면서도 우리는 낯한번 붉힌적이 없는 사이가 아니였던가. 한데 왜서? 왜서 우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이런사이로 돼버렸냐말이다?    아래것은 이 끝나가면서 나를 평판하는 성화공사혁명위원회에다 내가 피해받은 상황을 간단히 써서 올려바치면서 보태진 원본을 종근으로 남겼던것인데 오늘 그것을 그대로 베껴 대중앞에 내놓는다.      격강이 천리라지만 결국은 모두가 내탓이였다. >때 자기혼자면 몰라도 죄없는 어머님마저 그같이 련루시켜 이루형언키어려운 곡경을 치르게 만들었던 이 불효자는 멀리떨어져있음을 빙자하여 이붓자식의 손에서 병을 앓고있은 어머니를 제때에 자주가보지 않았거니와 시간이 긴박한 사정이라지만 아무튼 돌아가신 어머님의 장례에마저 불참했으니 낯이 뜨겁기만하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서 세상뜨기 한해전 내가 문안을 갔을 때 어머니께서 내한테 토로한 원한에다 나의 처ㅡ노친의 유언까지 있었기에 나는 부득불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하면서 어머니는 같은날 8촌짜리 사진을 찢어버린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심군일이였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앞에 무릎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 그저 이 아들이 너무나도 무능하고 못나서 무고한 어머니를 련루시켜 욕을 보게했거니와 국가에다 목숨바친 아버지마저 받아야 할 대접을 못맞게 만들었으니 그저 죽을 죄를 졌다고 했다. 그러고나서는 나는 어머니와 심군일 걔가 나하고 어느때 무슨일로  원쑤지간이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노라했다. 사실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사실 나도 동창생인 그가 왜서 그같이 미친개같이 포악스레 행패부렸는지 그게 전혀 생각밖인 것이다. 그렇다는것을 솔직히 말하고나서 나는 어머니와 그 원인을 이제 아무 때든 살아서 꼭 밝혀내리라했던 것이다.             내가 복수심을 품었고 복수를 하면 무자비하게 하리라는것을 잘알고있었던 어머니는 집요한 눈길로 쏘아보면서 절대그러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했던 것이다. 내가 세운 손날로 붉은벽돌 한장을 단번에 두동강내는것을 친히 본  어머니였다. 벌리중학에 붙기직전이니 그때 내나이 14살이였다.         하면서 어머니는 여지껏 용케 참고지냈을라니 이제와서 더 못참겠느냐 하면서 제발 미런한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어머님의 그 당부는 옳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그런식의 복수는 현명하지 못한것 같다.    하여 나는 여지껏 어머님의 권유에 따른것이다.        심군일은 그날 나의 어머니와 이렇게 따지고나서는 제 호주머니에 넣고있었던 “렬사증”을 꺼내여 흔들어 보이더란다.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니 심군일이는 그 렬사증을 갈기갈기 찟어버리고는 어머니의 얼굴에다 침을 뱉았다고 한다.          그 소리에 격분하여 어머니는 그를 쏘아보면서 맞받아 네놈이 지금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치는거냐했던 것이다.    나의 부친은 성명이 김병념(金丙念)인데 위만때 징병에 뽑혀 석두하자(石斗河子)에 가 훈련을 받은 후 돌아와 쟈므스철로경호대에 배치되여 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은건데 광복직후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 조선독립영이 생기자 거기에 가입해 교련이 되어 의란(依蘭)에서 부대의 정편훈련을 맡아 지도했고 그것이 끝나자 이어 토비숙청에 나선건데 참모장 김해정과 함께 자기의 정찰반을 거느리고 화남현경내에 있는 영평강금광을 보위하러 갔다가 1946년 11월 17일, 전투에서 희생되였던 것이다. (관련글: , )       나의 아버지 김병념(金丙念)이 렬사가 옳으냐 아니냐는 국가정부가 판정하고 을 내준건데 일개 소학훈장질이나해먹은 보잘것 없는 녀석이  제밸대로 그것을  찢어버렸으니 뭐라했으면 좋을가? 제가 대체 뭔데? 이래서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고 내가 늘 말하는것이다.   1964년도여름,“4청”때의 일이다. 화천현성화공사교육계의 공청단선전위원에다 소선대총보도원이였던 내가 당시 공청단중앙서기 호요방의 문건을 절달할 때였다. 그 문건에 호요방이 고 한 구절이 있어서 그것을 내가 그대로 읽어내려간건데 심군일이가 문화혁명이 오니 나보고 걸고들면서 나의 불통을 차놓았던 것이다. 이건 악한이 아니고는 하지 못하는 짓이다. 홍광대대위원회 판공실은 모두 세칸이였는데 맨서쪽칸에서 내가 xxx에게 얼굴을 맞아대고 맨 동쪽칸에서 어머니가 심군일에게 구타를 당했던 것이다. xxx는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그냥 때렸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붓고 얼굴이 퉁퉁부어 호박같이 된건데 나중에는 눈을 뜰수없어서 앞을 제대로 보기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지경이 되면서도 나를 때리는자의 그 요구를 절대들어줄수는 없었다. 나도 공산당에 가입하려 애썻을 뿐 반당심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서 기어코 반대한다고 대답하라는건가? 나는 그가 내 입에서 한사코 그 한가지 대답을 받아내려드는것을 보고 명백히 깨달은것이다. 매를 못이겨 그렇다고 말만하면 그건 승인하는 것이니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는것이요 자기에 대해서 자진 사형선고를 내리는 꼴이 되고마는 것을!....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이들 셋은 짜고서 나와 내집식솔들을 한꺼번에 멸살하려들었던 것이다. 이 일은 훗날 인간성이 부활해서 스스로“我看错人了"하면서 내앞에서 머리숙여 자기를 뉘우친 그 사람이 토로한 것이다. 하는 심군일의 질문에 나의 어머님은  했더니 심군일이가 하면서 귀뺨을 때리더란다. 그래 어머니가 격분해서 고 힐란했더니 그가 하면서 두 주먹으로 량볼을 마구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통에 머리가 헝클어져 내렸다. 그것이 손에 감겨드니 심군일은 싸그쟁이같은 그 중학생계집애를 시켜 가위를 가져오게해서는 그것으로 어머니의 머리를 반남아 마구깎아버렸다. 그리고는 계속 때렸던 것이다. 이러는 판에 중학교의 김용일과 오상국교장 등 몇이 거기에 나타났던 것이다. 년세많은 오교장은 젊은놈이 제에미벌되는 사람에게 마구행패질이니 보기가 너무안돼서 라 지시했는데 너무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심군일이가 그를 향해 고 눈을 부라렸다고한다. 중학교의 그 싸그쟁이 홍위병계집애가 우리집 탁상뻬랍에서 들춰낸 8촌짜리 커다란사진ㅡ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17명렬사추도식장을 찍은 사진을 가져다 바쳤다. 심군일은 받아 보고는 이를 앙물더니 그것마저 갈기갈기 찢어서 어머니의 낯에다 뿌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격노하여 그를 욕했다. 그랬다고 심군일이는 중학생홍위병총지휘였던 김용일이가 손에 들고 꺼들거리는 굵은쇠줄꼬쟁이를 채듯이 가져다가 그것으로 어머니의 왼쪽발등을 찔렀는데 기술을 어떻게 부렸는지 꿰구멍이 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다..... 여기까지는 어머님이 나에게 들려준 사실 진술이다.   바로 이때 서쪽방에서 머리에 혹이 나도록 되게 얻어맞은 나는 하라는대로 목에다 란 패쪽을 건채 밖에나와 서쪽의 대대혁명위원회판공실과  우리 집 사이의 큰길복판에 사원들이 실컷 구경하게 서있었기에 어머니가 문짝에 들리여 집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목격한건데 검정고무신에 차고 넘치는 피가 길에 점점이 줄을 그으면서 떨어졌다. 오상국교장이 따라가면서 혀를 찼다. 나는 격분이 끓어 부르짖었다. 어머니는 내목소리를 잡아듣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를 덤비지 말고 꾹 참으라는 당부였다. 나는 구곡간장이 끊어지는것만 같았으나 별수없었다. 네녀석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부모를 우롱하고 손을 댄단말인? 달려가 심군일이를 당장 각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없어서 원통했다. 나는 눈에서 불이 일었다. 벌레나답잖은 하찮은 놈이 눈깜짝새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로 둔갑한것에 나는 적이 놀랐거니와 가슴에 증오와 저주가 부글부글 괴여올라 속으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님 역시 일개농촌부녀였다. 하지만 그이와 같은 농촌부녀는 아마 썩 드믈것이다. 어머님의 생평을 보면 결코 보통이 아니였다. 나의 어머니 최정순(崔正順)은 시집오기전 어릴때 의란, 화남일대에서 발생한 토룡산폭동(土龍山暴動)을 겪었거니와 폭동 후 항일련군 8군의 항일때도, 동북민주련군의 토비숙청때도 자기가 갖고있는 손재간ㅡ 재봉기술로 헌신했거니와 토지개혁시기에 들어와서는 주둔부대재봉소의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마을 빈농회의 부녀주임을 겸하여 지내기도했던것이다. 그같은 나의 어머님은 정직하고 대바르고 의지굳은 것으로 하여 이 아들의 거울이 되고 귀감이 된 것이다. 내가 문학의 길에서 이만큼이라도 성공을 보게되였음에는 어머님의 공이 큰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여러번이나 일깨워준 말씀이다. 인생이 한번뿐인데 사람은 리상이 있어야한다면서 무엇에든 성공하자면 노력을 끊지도 잃지도 않는 견강한 투지가 있어야 한다면서 나를 격려했고 분발하게끔 이끌어주었던 어머니인 것이다. 하기에 나는 마음속에 어머님 하나만을 우상으로 모시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2    에세이 무지한 자들의 각성 댓글:  조회:3411  추천:9  2014-07-26
  에세이 무지한 자들의 각성     마음선량한 사람들은 아마 거의가 지금도“무산계급혁명”하면 무조건 신성하게 여기는데 습관돼서 그것을“위대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혹자는 나를 인식이 틀렸다할것이요, 혹자는 립장이 틀렸다 할것이요  혹자는 지어 나를 반동이라고까지 말하겠지만 방법없다. 나는 살아서 제 속심말을 해야겠다. 이건 내가 보고 겪은일이였으니 절대거짓말이 아니요 지어서 보태는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네가 성분이 빈농이면 깨끗하다는 그게 아니다. 그따위 계급각성을 갖고 무슨눔의“무산계급혁명”을 한다고 떠다고은단말인가? 따라서 한가지 단언하게되는건 네가 출신이 아무리좋고 성분이 아무리 깨끗하다해도 무지하면 야만이 되고 악한이 되고만다는 그거다. 그래서“유일성분론을 부르짖지 말라”는 주장이다. 지난일, 겪은 일들을 보면 그저 한심한 것들이라 죽어도 눈을 감을것 같지 않아서 말을 하게 되는데 혹자는 우선 나의 글 제목부터 신통치않게 여길것이요 이게 어느땐가 몇십년전의 일을 아직도 끄집어내서 곱씹느냐면서 나를 속이 좁아도 한심하게 좁아 피지 못한 사람이라할것이요 사사의 감정에 잡혀 개인보복이나한다고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겪은 아래의 몇가지만은 세상이 알게 공개해야겠다. 그래야만이 내 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풀리고 체증도 다소해소될것같다. 어떤이는 저세상으로 이미 가버렸으니 불귀객이 된거고 어떤이는 아직도 눈이 멀뚱멀뚱 살아있는걸로 알고있다. 이 글을 그의 자식들이 본면 아마 다가 저으기 놀라면서 의문을 사고 불만을 품기마련이지만 달리는 방법없다. 미런스레 악한 짓을 하고서도  한마디 반성도 없는자를 나는 인간으로 치지 않으니 그 장본인의 이름들을 그대로 밝혀 놓으련다. 과연 고맙게도 성화의 백성들은 나를 혹독하게 굴지 않았다. 그런데 그몇은....    (1)   화천현 성화향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6개촌락으로 무어진건데 거기 동북켠 맨 안쪽에 있는 마을ㅡ 홍광촌에는 리원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이가 나와 비슷한데 “문화혁명”직전에 외지 어디에선가 이사를 왔길래 숙친한 사이가 아니였다. 그는 대대정미기를 다루었다. 어느해 겨울인가는 홍광대대혁명위원회에서 “관제대상"인 나를 그의 조수로 일을 하게끔 배치했던 것이다. 헌데 재수없을라니 어느날 밤참을 먹고나서였다. 집에 와보니 장갑을 식당에 두고왔길래 나는 그것을 가져오려고 대대식당을 다시찾아갔던 것이다. 이틑날 아침에 일하러 가야하는데 추운 겨울이라 장갑을 꼭 껴야했다. 그래 별생각없이 문을 뚝 떼고 들어갔더니 그사이 그 리원식이라는 이 "빈농혁명자"가 아래도리를 내놓은 채 식모하고 들어붙어 씩씩 방아를 찧으면서 그짓을 하고있는 것이였다. 우연이지만 나는 보지말아야할것을 보았길래 스스로 앙화를 빚은 것이다.   이틑날, 낮에 이어서 밤에도 계속 정미소일을 해야하는데 누구의 발상이였던지 그 리원식이가 식모의 남편과 정미소안에 있는 자그마한 휴식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였다. 정미기는 그냥돌아가고 나는 마대에다 나오는 싸래기를 받아 정리했다. 그러고있는데 아느새지나서 술에 취한 리원식이가 씽 나오더니 너 이놈아 싸래기에 왜 굵은 쌀알이 섞이는거냐 하면서 그 우악진 주먹으로 내 머리를 힘껏 답새기는 것이였다. 은연중 심한 타격을 받고보니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틑날 아침에는 구토를 심하게 했다. 그래서 부득불 공사병원에 가 의사를 보이게 된건데 그한테 맞은게 “뇌진탕”이라고 진단이 나왔던 것이다. 싸래기레 굵은 쌀알이 섞이는가 안섞이는가는 그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부릴탓에 달린건데 나를 왜 때리는가? 그리고 기실은 그날 싸래기에 굵은 쌀알이 섞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리원식은 남의 녀편네와 불륜의 그짓을 하다가 들키우고서는 내 입을 막아놓느라고 기껏 머리를 쓴다는게 그꼴이였던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내가 앓아서 일을 못하게 되니 리원식은 도루 투쟁대에 올라 망신을 하고말았다. 그것이 그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망신이 아니고 뭔가?  미런한자의 총명함!  忍忍忍 !... 忍忍忍.!... 나는 내 가슴속에다 눈물을 떨구면서 참는수밖에 없얶다. 소시적에 부대에서 자라면서 안충모아저씨한테서 배운재간 하나만은 당당했다. 엄지손가락 한번 면바로면 그자의 명줄을 얼마든 당장 끊어버릴수 있는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않았다. 그럴수 없었다. 가뜩이나 반혁명분자의 집이라면서 용맹무쌍한“혁명자”들이 온 가족을 멸살하겠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날뛰는 때가 아닌가. 내 하나의 목숨을 그자와 막바꾸면 몰라도 나는 자식 둘과 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갈리는 이를 앙물기만했다. 증오의 피눈물을 그저 가슴속에다 뚝 뚝 떨구기만했던 것이다. 忍忍忍 !....忍忍忍 !....   (2) 내가 반혁명분자”란 커다란 패쪽을 목에다 걸고 이웃마을 료신촌에 가 투쟁받을 때의 일이다. 그 마을의 군인출신이며 일잘하고 부지런한 장말생의 처 리옥선녀인이 씽 달려나오더니 나에게 따지고 드는것이였다. “이놈아, 네 애비 어떻게 죽었니?” “토비를 숙청하다가 죽었습니다.” “네 애비 잘 썩어졌다, 잘 썩어졌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손에 쥐고 나온 꼬챙이로 내 입을 쑤셔놓았다. 토비를 잡느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렇게 치떨린단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쌍년아!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개보다못한 년!... 숨이 넘어갈 듯 아파난 나는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뱉으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너무너무 통탄해 속으로 부르짖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피를 헛흘렸습니다! 헛흘렸습니다! 정말 헛흘렸습니다!”   (3) 공사내 여섯개마을“혁명자”들이  중성촌 구락부에 모여 나를 투쟁할 때였다. 집이 료원촌에 있는, 위만때부터 한마을에서 살았길래 우리 부모님들과는 잘아는 사이였던 강봉학이라는 안로인이(남편은 성명이 김홍주고 아들은 명철, 그는 소시적부터 내동무였다)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더니 남들은 전혀모르는 일 한가지를 적발하는것이였다. “내가 모르는줄아니, 너의 할애비는 이름이 김석길이구 독립군이였다, 독립군이였어. 그래가지구두 무슨... 내가 모르는줄아니, 너의 할아버지 독립군이맞아! 맞단말이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에구!!”했다. 대단한 놀램이였는데 그들 다가 독립군이라는것이 무엇인지도 분명 모르고들있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그 어떤 다른 무슨 나쁜것으로 인식하고들있는것 같았다. 투쟁대회가 끝나 문으로 나올 때 젊은 놈 하나가 지키고있다가 발로 코를 올리차서 나는 그날 숱한 피를 흘렸다.               더구나 제가 글을 배워줫던 제자한테 그같이 당하고보니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4) 판결에 넘겨졌던 내가 무죄석방이 되어 이웃마을 료신소학교에 가 다시금 교편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이제 출근한지 사흘째되는데 그날은 공사방영대가 와서 영화를 돌리기에 학교는 교학을 중지했다. 료신마을에서 뒷줄 도랑 가까이에 있는, 촌위생소가 붙어있는 서켠의 빈집에서 낮에 영화를 돌렸는데 중간에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불시로 와야와야 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나는 영화에 정신이 팔리다보니 맨마지막에야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보니 마을사람들이 한군데모여“이걸 어쩌오! 이걸 어쩌오!”하면서 복대기치고 안달을 떼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급히 헤집고 들어가보게된건데 댓살난 어린 계집애가 사선에 들어 생명이 오락가락했다. 제 할머니를 찾아 오다가 물이 고여있는 종자굴에 미끌어떨어진것을 건져다나. 계집애가 생명이 그같이 경각에 이른판에 누가 내놓은 구급법이였는지 비누물을 먹인다면서 야단법석을 치는것이였다. 내가 보니 애는 입을 꼭 다물었는데 입술은 진한 푸른잉크빛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 질식상태였다. “나좀 봅시다!” 나는 무작정헤집고 들어가 애의 입을 벌리고는 오른쪽 식지를 넣어 목구멍을 막고있는 혀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그랬더니 아이는 나의 손가락을 깨물었다가 “휴ㅡ”하고 숨을 톱아내는 것이였다. 죽어가는 애의 생명을 내가 그렇게 구해낸 것이다. 모두들 귀인이 면바로 나졌다고 감탄에다 칭찬이 대단했다.  “지식분자가 다르긴다르구나! 사람이 살자면 지식이 있어야겠다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보니 그는 키가 꺼두룩한 신창섭이라는 어른이였다. 언젠가 혁명자들이 내가 쓴 장편소설원고며 편지며 사진들로 선전판을 만들어 그것들을 나의 등에 지워가지고 각 촌을 조리돌림하면서 투쟁할 때였다. “네가 무슨눔의 개발을 그렇게 잔뜩그렸느냐?”며 투쟁하던 분이였는데 아들셋에 딸이 있지만 그는 어느 하나도 공부를 제대로시키지 않았다. 하니 그런 집안에서 지식인이 생기긴 천부당만부당한 일. 그런분이 이제라도 지식의 중요성과 귀중함을 그같이 깨달으니 아무튼 대단히 반갑고 고마운일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그를 만나면 꼭꼭 인사를 먼저하군했다. 나도모르겠다, 그의 무엇이 좋은지? 아마 이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는 모양이다.    (5)   하나더있다. 문화혁명 때 나의 일기책들을 거둬가면서 다 보고는 꼭 돌려주리라 명백히 말해놓고 결국 한나도 돌려주지 않고 말끔히 없애치운 더러운 자ㅡ 내가 어느글에선가 사람이 아니라 시궁창에 바라다는 부덕쥐라고 묘사했던 장동화는 아직도 살아있는걸로 알고있다. 딸농사만 착실하게 지었다고 조물주가 불쌍히여겨서 그런지 그가 오래사는게 과연 희한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나보다. 나의 장편소설원고를 빼앗아다 말끔히 없애치웠거니와 장동화와 짜고 근본 있지도 않은 “죄”10여가지나 만들어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요 지어는“후환이 없게 하자면 그늠의 새끼들까지 싹 다 없애치워야한다”면서 한때 구체적인“전략”까지 비밀리에 내왔다는 정장송은 공사무장부장이 되어 권총차고 꺼들거리면서 나를 포승지워 감옥에다 처넣더니 결국 무슨꼴이 됐는가? 그는 제가 뿌린 작탄에 한쪽눈알이 빠졌거니와 장암에 걸려 환갑도 못쇠고 그만 죽고말았다. 죄를 만난것이다. 그의 큰딸은 어디로 가느라 차타러 나갔다가 날아오는 차바퀴에 가슴을 맞아 즉살하고. 그 장면을 내가 직접목격했다. 횡래지액(橫來之厄)이란 곧바로 이런것을 놓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는 중학다닐 때 내한테서 배운 제자였다. 한창나이에 애비먼저 죽었으니 과연 불쌍하다. 한데 따져놓고보면 그건 다 그의 前代가 지은 죄악탓이아니겠는가십다. 자작지얼(自作之孽)이란 바로 이런걸 보고 하는 말이다. 헌데 정장송 그자와 같이 처음부터 짜고 꼴보기싫게 교활하고도 극악스레 놀아댔던 장동화는 어떤가, 그가 천벌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니 과연 별일이다. 하나님이 눈이 멀었는지?...   량심을 떼여 개를 먹였는지 “무죄석방”이 된 내가 이웃마을에 전근하여 소학생을 가르치면서 빼앗겨 잃어진 첫장편소설을 비밀리에 다시썼더니 그걸 어떻게 냄새맡고는 또 잡자고들었던 자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와서는 우리 집에 잘다닌 할빈하향지식청년 장재윤이더러 나의 반동적인 언행을 적발하라 꼬드겼거니와 “송죽이! 왜 또 글을 쓰는가? 전공사 군중이 몇해간이나 동원되여 사람이 되라고 도와줬건만 지금까지도 글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니 과연 정말 너무 악질적이다.”고 하였던 그였다. 과연 그야말로 희한한 계급각성이다! 소설을 계속쓰면 그게 악질적인가? 작가로 되면 그게 사람이 못되는건가? 문화혁명이 끝나가고 내가 죄없는 사람이라는것이 판정됐건만도 눈이 빨개서 그냥 생사람잡이를 그같이했으니 그놈의 불굴의 혁명정신에 과연 탄복이간다. 무지하지 않고서야 사람이면야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할수가 있으랴!? 장동화한테  묻고싶은건 한가지ㅡ 도대체 과연 누가 악질인가? 내가 악질적인가, 아니면 네가 악질적인가? 허심하지 못하면 무지해지고 무지해지면 그렇게 죽을때까지 자기를 뉘우칠줄을 모르는 것이다. 장동화는 지금와서까지도 그냥 "쏸장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 할건가? 내가 어느글에선가 시궁창에 바라다니는 부덕쥐라고 묘사한바있는데 이제 아무때건 다시만날이 있을것이다. 말한마디 천량빛감는다했다. 장동화는 한매 더 맞지 않겠거든 늦지만 지금이라도 지난날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게 마땅할 것이다. 권고한다. (관련글 에쎄이 "사람과 짐승의 차이" )  
1    에쎄이 노친과 함께 불상을 우러르던 날 댓글:  조회:3112  추천:5  2014-07-14
   에쎄이 노친과 함께 불상을 우러르던 날   나한테는 남들이 알면 이상해하리만큼 고집스러운 버릇이 하나 있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아는 중요일이나 행사같은것은 종이장에다 담은 얼마간이라도 기록해놓아야 속이 편해지는 그것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먼 훗날 아무 때건 자기가 살아온 인생궤적을 얼마간이라도 돌이켜볼수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래회를 넘기니 이제는 전만 기력이 퍽 못해지는게 알린다. 없던 건망증까지 겹치니 어떻게 한다?...  하길래 더구나 부득불 그렇게할수밖에.   나는 본래 소학 5학년을 다닐때부터 일기(日記)쓰는 습관을 길러 그후 거의 하루도 빼놓지를 않았다. 그래서 중학을 다닐때는 물론 졸업하고 농촌에 와 3년간 농사일을 할 때에도,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고 선생으로 사업을 하면서도 내내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은것이다. 그래서 여러권의 책이 된건데 생각지도 않은 “문화대혁명”이 오는 바람에 그것들은 나의 "죄증"을 만들려고 접어든 고약한 보복자의 작간에 의해 전부잃어지고말았다. 가져다 보고돌려준다했지만 하나도 돌려주지 않아 전부없어지고만 것이다. 아무렴 목숨같이 귀중히 여기는 개인이 귀중한 보물을 가져다 그같이 깨끗이 혁명해치우다니 원, 뻔뻔스럽고도 야만스런 개같은 인간들이지!. 지금도 그일만 생각하면 복통이 터지면서 이가 부득부득 갈리지만 별수없다. 누가 이런 미개한 나라에서 태여나라던가?....   내가 지금은 전처럼 일기를 쓰지 않고 그저 “비망록”이나 만들어놓고는 가담가담 몇글자 적어놓군한다. 이제 또 어느때  빼앗길까봐 겁나 그러는게 아니다. 사람이 나이를 주어먹어 늙어가니 점점 게을러져 자연히 그렇게 하게된다. 그러면서도 옛습관을 영 버리지 않은것은 한가지 명확한 깨달음ㅡ 이제는 중국도 깻으니 다시는 지난때처럼 그렇게 야만적인 혁명은 하지 않을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망록”을 보니 우리가 할빈을 떠나 북경에 이주한 날이 2004년 8월 27일. 그러니까 이제 두달이면 북경시민으로 되어 산지도 어언 만 10년이 되여오는 것이다. 광음이 여루라더니 아닌게아니라 빠른게 세월이다. 북경은 생각한것과 같이 력사유구한 고성(古城)이라서 도처에 볼거리들이 많고도 많다. 그런데도 그지간 나는 글만쓰느라 노친을 데리고 잘나다니지를 않았으니 지금은 후회된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날에 北京龍行天年商貿有限公司에서 저들의 상품을 팔아먹기위해 그것을 선전하느라고 원명원(圓明園)유람을 조직하길래 노친을 데리고 한사람이 45원씩 팔면서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적어놓은것이 있고 또 하나의 비망록은  “2008년 10월 21일오후 지하철편으로 가까이에 있는 韓美林藝術館을 찾아 그의 탁월한 예술작품들을 관람하고 돌아옴.” 이라고 되여있다.  나는 그날의 행차가 어제일같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앞의 果園站에서 동쪽으로 달리는 지하철에 올라 세정거장만인 림허리(臨河里)역에 내리면 곧바로 “한미림예술관”이니 전체로정을 다해봤자 거퍼 5~6분도 채 안걸리는 거리다. 문건에 기재된것을 보면 여기 북경에는 1999년에 한미림예술진렬실(韓美林藝術陳列室)이 락성되였고 2008년 6월 25일에는 바로 내가 있는 통주에서 한미림예술관(韓美林藝術館)락성식을 올리고 문을 연 것이다. 이 예술관을 내놓고도 수도에는 그 한해전이였던 2007년에 개관한 “北京韓美林藝術館”이 있어서 6차례 전람을 시킨건데 내놓은 예술품이 무려 5000여점이 된다고 한다. 그 개인의 이름을 띈 이같은 예술관(藝術館)은 항주에도 하나있다. 뿐만아니라 거기는 그것말고도 “천서루(天書樓)”라 이름을 지은것도 하나 더있다. 사실이 그러한즉 그가  창작해 이 세상에다 내놓은 예술작품이 대체 얼마나될까!? 그 수자는 딱히 통계를 내기도 어려울지경이라니 입이 딱 벌어진다! 관람자는 그 누구나 그의 예술작품들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뿜지 않은이가 없다고한다. 그러한즉 한미림이야말로 명실공히 세계급의 일류의 예술대사(藝術大師)인 것이다. 벌써 1980년6월25일에 한선생은 미국의 뉴욕, 보스턴 등 21개의 도시에서 개인 그림전람을 꾸렸던바 그로인하여 뉴욕과 샌디애고에서는 그에게 그 도시의 영예시민열쇄까지 내주었던 것이다. 너는 아무 때건 마음대로 와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아닌가! 그리고 뉴욕, 보스턴에서는 지어 1980년 10월 1일을 “한미림의 날”로 명명할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우리 중국사람 중 그 누가 또 그같은 영예을 받아봤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품전람은 무려 20여개 국가에서 열렸으니 그는 그야말로 과시 세계적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한데 그의 성장을 보면 생각밖으로 과연 눈물겨워 다시금 사색하게된다.   한미림선생은 산동제남의 사람인데 음력으로 1936년도에 태여났으니 나보다 세 살우인것이다. 그렇지만 초기의 공부는 내보다도 썩 더 못했다. 두살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제남1중을 겨우 3개월다니고는 군대에 나갔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12살이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문화대혁명”때 혁명파들의 작간에 걸려들어 감옥밥을 먹은게 1,900여일이였다니 제천이 흐려 피똥싸고 통곡할 일이 아니였는가! 하지만 그런속에서도 그는 예술가로 성장할수 있음에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그는 줄곧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수감생활을 하는 기간 그는 작디작은 미세한 개미로부터 먹거리를 훔쳐내는 쥐새끼에 이르기까지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에 대해서 비교연구를 깊이깊이 한 것이다.  감옥에서 종이를 구할수 있는가, 어디 있기나한가, 그에게는 부러뜨린 젓가락이 화필이였고 옷자락이 화판이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바지에다 그림을 그렸다. 그게 모자라니 옥졸친구들의 해여진 옷자락마저 달라해서 화판으로 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고 덧붙인것이 4백여쪽. 그림공부를 그렇게 한 한미림이였다.   “한미림예술관”을 들어가 보는데는 돈주고 표를 살 필요없다. 신분증만 내놓으면 그가 누구건간에 가리지 않고 다 들어가 구경할 수 있게끔 되여진 곳이다. 지금 그렇고 앞으로도 내내 그럴것이다. 이건 예술가 韓美林선생의 후더운 인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가! 한미림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자연히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지어 쾌락해질때도 있다. 그가 그리거나 조각한 것들은 거의가 동물들의 각이한 형상들이다. 창작시 작자의 심정과 관찰력이 환히 알린다. 어느 한 전람실에는 각가지 개들의 형상을 조각한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여보, 이 사람이 아마 개를 무척 사랑하는모양이요!” 내가 노친과 이런 말을 하면서 안색을 살피는데 느닷없이 내옆에 한사람이 나타나 끼여드는 것이였다. “그말씀 맞습니다. 그 사람은 개를 무척좋아하지요. 건 왜서일까요? 감옥에서 나오니 모두들 슬슬 피하는데 개만은 반갑다고 꼬리를 저었던겁니다.” 훗날 나는 사진을 보고 그가 바로 그 기념관의 주인이요 우리  중국은 물론 세계적인 탁월한 예술가로 첫손을 꼽는 한미림예술대사인것을 알았다....    그날 나와 노친은 벽한켠을 다 차게 만들어 고정시켜놓은, 한백옥으로 제작된 굉장히 큰 불상 반신상앞에 이르러 발목이 잡혀서 오래도록 서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정교한 조각품도 다 있을가!” 나도 노친도 생전처음보는지라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그것이 나와 노친의 속심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성품을 나타내는 불상의 그 그지없이 인자해보이는 모습은 우리들 가슴속에 그토록 영원히 지울수 없는 표상으로 남은것이다! 불상의 도가 펼쳐지는 세상은 그 얼마나 평화로울가!... 악이 없고 자유로운 그 세상은!!..... . 韩美林     5165 刘大为 已售           이 불상은 한미림의 다른예술관에 있는 것임. 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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