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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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2014년 08월 18일 09시 25분  조회:2618  추천:5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리해못할 동창생(2)

 

 

1. 한심한 짓거리

 

화천현 성화공사교육계의“문화혁명”은 자기들이 아니고는 해낼 사람이 없다면서 맨먼저 고개를 쳐들고 무리를 만든것이 바로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이였는데 이른바“무산계급혁명자”로 자칭하고 나선 그들이 머리악을 써서 고안해낸 제일 첫 번째의 수작ㅡ 짓거리인즉은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나 이 <<김송죽이를 본래 가정출신이 나쁜사람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고개를 못들게 하고 작가로 되지 못하게 꺾구려뜨려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북방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라는 그곳에서는 한차례 유사이래 전대미문의 희한한 <<조작극>>이 벌어지게 된건데 그것인즉은 바로 나의 아버지 김병념(金丙念)이가 혁명렬사자격이 되냐 안되냐를 판명하는<<대변론>>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진노하고 개가 웃을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것은 결코 작난이 아니였다. 마음먹고 생사람잡이를 하자고 든 그몇이 굳게 다짐한 끝에 짜고서 벌린 놀음이였기에 계획이 주도면밀했거니와 따라서 살기(殺氣)가 충만해 너울쳤던 것이다. 환경이 그같이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하려고 발벗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공사기무대(公社機務隊)에서 한뉘  뜨락또르를 몰아온 리종철(李鐘哲)이였다. 군대츨신인 그는 공인대표신분으로 그번의 변론에 출면한것인데 너희들은 우선 하는 작법부터 틀려먹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리종철이 말했다. 어느 누가 렬사로 되느냐 안되느냐는 국가정부가 판정하는것이고 이미 그렇다고 판정이 됐길래“렬사증”까지 발급한 것인데 너희들이 대체 뭐가돼서 그것을 맘대도 빼앗아가고 주제넘게 이렇쿵저렇쿵인가, 무슨 말이 그리도 많으냐 하면서 우선 나의 아버지 김병념의 렬사자격문제를 놓고 변론하는것부터가 대단히 미런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장송, 장동화, 심군일 그 셋의 이름을 하나하나 찍어가면서 작태가 너무나도 방자하니 그렇게 놀지 말라고 충고를 했던것이다. 그러면서 리종철은 성화공사교육계에서는 생사람잡이를 당장 거두는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무지와 폭력이 한창 맹렬히 팽창돼서 기를 펴고 살판치는 세월이라 그 한사람의 건의와 지탄이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것이라해도 그것을 옳다고 나서서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저쪽은 기세가 점점 더올라 압도적이요 이쪽은 자연히 눌리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흑백이 전도되는 한심한 란장판이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분석해보면 그럴법도했다. 모인사람이란 리종철 하나를 내놓고는 다가 성화공사 6개마을의 소학교와 중학교의 선생들이라 그들다가 간이 콩알만해서 불이 제발등에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벌벌떠는 소지식분자들이였던 것이다. 명철보신을 상패로 삼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내본신과 내역성을 들어주는 리종철은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패배당하는 형국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하니까 앞에 놓인건 오로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감내해야 할 준엄한 시련뿐이였다. 나는 그 시련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시기시기 응변의 자세를 취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회의에 참가하라고 부르기에 중학교에 가니 집이 성화대대에 있는 조정희(趙正熙)란 노인이 와있었다. 

<<아니, 저 노인은 왜서?... 그렇지!>> 나는 그것이 혁명자들이 알심들여 꾸며낸 연극의 한 장면임을 어려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를 <<빈하중농선전대>>로 모셔다놓음으로써 내한테 저들의 위세를 보이는 판이였다.

그 조정희(趙正熙)노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거느리는 정찰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인 것이다. 1946년 11월중순, 아버지는 상한에 걸려 거의 죽게된 그를 친히 업어다 벌리(勃利) 남문에 있는 그의 집 식솔과 친척들에게다 맡겨놓고는 벌리의 집에 들려서 하루밤을 지내고 돌아가 그 이흣날 새벽전투를 치르다 참모장 김해정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가 거느린 반의 전원과 함께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때의 일을 잊을수 없다. 내가 내눈으로 직접봤길래 잘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갖고 온 것이 세모꼴꺾이창이 달린 쏘련제 베르단이였는데 나는 그 총을 갖고놀았던 것이다. 며칠안되여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와서 나는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유개차에 앉아 벌리(勃利)에서 북쪽으로 첫정거장인 멍쟈강(孟家崗)에 가 역전마당에다 차례로 줄을 지어놓은 여러개의 관중에서 련장이 하나 관 뚜껑을 열어주기에 보니 그안에 전날 병에 걸린 조정희(趙正熙)를 호송하고나서 집에 들렸던 아버지가 시체로 되여 누워있었는데 웬영문인지 상반신은 적삼도 입지 않은 맨몸이였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적탄을 두곳이나 맞았는데 한방은 복부고 다른 한방은 심장이 있는 오른쪽가슴웃쪽이였다. 련장이 하는 말이 시체를 무우굴속에서 찾아냈는데 아버지는 두손에 총창을 꽉 틀어쥐고있더라면서 시체가 불에 타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라했다.

 

문화혁명직전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뒤늦게야 우리 아버지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조정희(趙正熙)라는 노인이 성화마을에 살고있다는것을 알게되여서 어느날 술근을 받아갖고 만나보러갖던 것이다. 식솔 넷에 단간방이였는데 구들에 편 까래가 매우 헐망했다. 일견하여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인정이 깊어져야 할 사연이 있는지라 반갑기가 이루말할수없었던 것이다. 

<<김반장은 나를 살린 은인일세! 김반장 아니였더면 나는 언녕 천당으로 갓을 사람이였지!>> 하면서 조정희(趙正熙)로인은 나를 만나자 손을 잡고 락루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맞이는 성명이 조이권이고 둘째는 조남권이다. 맏이는 그때 생산대서 일을 했고 둘째는 중학을 다녔던 것이다.  

한데 그 생존자 조정희(趙正熙)한테 무슨 갑작운이 붙었길래 빈하중농대표신분으로 중학교에 들어가 문화혁명을 이끄는 지도급인물로 되였을가?. 그가 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둔갑을 해도 한심하게 해서 나는 보고도 할말이 없었고 있다해도 목구멍이 메이서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그는 빈농이니 성분이 좋고 출신이 좋을뿐 판무식쟁이나답지 않은 사람이였다. 그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고 증명을 어떻게 서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부터 나의 아버지를 나쁜사람으로 몰아붙이고 그렇게 만들려고 든 그 몇몇 어리석은 자들의 작간에 끌리여서 충분히 리용된되고있은것만은 틀림없었다.

<<송죽이 너 똑똑히 보거라, 모두가 우리 편이란말이다!>> 이거였다. 그렇다해서 고개숙일 내가 아니녔다. 나는 그 몇몇 혁명자들의 얄팍한 수작질이 하도 어처구니없고 쓰거워서 속으로 웃고말았던 것이다.

<<너놈들이 아무리 지랄발광네굽질을 해도 뜨고 지는 햇길은 막지 못할것이다.>>

내앞에서 이제 당장 꼭괭이를 들고 벌리17명렬사릉원에 가서 언녕 다 썩어 진토(塵土)가 되였을지도 모를 무덤을 파버리고 뼉다구마저 없새리라면서 길길이 날뛰던 그 몇몇 무지막지한 깍다귀들의 추태를 내가 지금도 눈앞에 보는것만같다. 과연 제바지에 똥싸고 핥아먹기나 할 견강한 무산계급전사들이였다!    

조령감의 둘째아들이요 중학생홍위병들중에서도 한창 맹장으로 부상되여 머리를 저어댄 조남권이가 그래도 사람이라서 량심상 뭐가 가책되는것이 있었던지 그날 우리 집에는 까딱 얼른거리지 않고 제또래 몇을 휘동하여 대신 이모네 집에 달려들어 갖은 행패를 다 부렸다고 한다. 집을 수색하느라 발칵뒤졌거니와 뻔뻔스레도 이모부의 양복바지마저 입고 달아났다는가?...

그날에 벌어진 그 모든 작태가 정장송과 장동화, 심군일 그 셋에 의하여  꾸며진 파렴치한 략탈행위였다는것은 훗날 리지가 회복되여 정신이 자연히 맑아진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한 것이다.

 

2. 해명안되는 일

 

세상에 원인없고 리유없는 사건이란 있을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까지도 동창생 심군일이가 지난날 나를 해치느라 놀아댄 그 가지가지의 극적인 극악한 행위들만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서 종시 속에 내려가지 않는다. 내려갈수 없다. 그러면서 머리를 아무리 써가며 연구를 해봐야 지금까지도 그 원인을 딱히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에라 다 지난건데 그만 잊고말자해도 전혀 잊혀지지 않는것이 상처깊은 그 단락의 력사인 것이다.

사람은 인내성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참는것도 용서하는것도 한정이 있는 것이다.

다른 생면부지의 그 누구였으면 몰라도 이건 잘아는 동창으로서 인피를 쓰고 어쩌면 그토록 사람같지 않은 야만의 짓을했느냐말이다?!

인피를 썻으니 인간인가하지 그게어디 사람인가고 내 노친은 살았을적에 여러번이나말했다. 맘속에 오죽내려가지 않았으면 그랬으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내가 한번다시 반목하게 되는 그들 세인물중 장본인이요 첫손을 꼽았던 그사람, 환갑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정장송은 그나마 보복할만한 리유라도 어느정도있어서 문화혁명이 오니 얼싸좋다고 손을 폈다만 장동화와 심군일은 도대체 왜서, 어쨌다구서 사람으로서 그같이 짐승같은 행실을 했냐 그거다.

정장송은 1964년 사청운동 때 같은 연변내기 선생 한분 김용천선생을 잡으려다가 내한테 비난받고 제지당하니 그 분풀이오 나를 기껏 때린다는게 <<원고료는 액외수입이니 받으면 학교에 들여놔야지 그것을 혼자쓰는건 철두철미한 자사자리 자산계급사상이고 행위다.>>고 망언을 했던 것이다. 그래 내한테서 <<그것도 말이라구하는가, 그렇게 공산(共産)을 부르짖겠거든 어디 당신의 녀편네를 내놔서 공산(共産)으로 만들어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은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소리를 공공장소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진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 본인한테는 대단한 모욕이고 치욕으로 느껴져서 이를 앙가물고 있다가 기회가 되니 보복을 한거지만 장동화나 심군일은 도대체 왜? 왜서 나와 명분이 없는 보복을 하느냐그거다.

정장송은 문화혁명이 끝나서 그래도 두 번이나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자기 때문에 입당할것도 못했으니 <<죄를 미봉하는 셈>> 소개인이 되어 나를 입당시키겠노라했다. 그가 그러는것을 보면 어느정도 사람이 되어간다는 감촉이 들었다. 그런데 장동화는? 심군일이는?

여지껏 표현이 그득잖다. 장동화는 뻔뻔스레도 <<난 당신한테 미안한게 하나도 없어, 쏸장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구>>였다. 그래서 내한테 한매 단단히 얻어맞았고 시궁창에 바라다니는부덕쥐로 취급받게 된것이다.
한데 심군일이는 대체 어떤가? 오늘에 이르러까지도 그래 장동화모양으로 <<쏸장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할건가?  대체 어떤 심통인지 그것을 내가 알고싶다.

 

나의 노친이 생전에 몇 번 나와함께 심군일이가 우리 집을 그토록 해친 원인이 대체 무엇이였던지 그것을 알아내려했지만 끝내 알아내지를 못했다. 나는 두가지 일이 심군일이가 나와 척을 짖게 된 원인이 아니였는가한다.

하나는, 약혼을 한 심군일이가 잔치날을 받아놓고 당장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이다. 한학교의 젊은교원 김덕춘이가 쟈므스에 가서 이제 심군일에게 줄 결혼례물이라면서 사온것이 탁상에나 올려놓을 접시만한 동그란 체경 하나였다. 그것도 그 혼자면 몰라도 장가가는 당자를 내놓고 홍광학교선생 다섯의 명의로 주는 선물이였던 것이다. 내가 결혼했을 때와 비하면 그건 너무도초라했다.  나의 결혼식때는 생산대에서 <<100cm x 60cm>>의 커다란 유리풍경화에다 자모회에서 탁상시계까지 하나 례물로 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님동생하는 옛고향친구 김호일이가 호랑이를 그린 커다란 유리판유화를 선사하고. 그당시 형편에서 그만하면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였다. 나는 대대와 자모회의 책임자를 찾아가 심선생이 이제 곧 결혼하게되리라는것을 알리어 내가 받은것만큼은 몰라도 대대와 자모회서 알고 성의껏 례물을 준비하게 할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덕춘이가 나와는 아무말도 없이 그같이 하니 내가 그보고 그런일을 왜서 토론이 없이 혼자서 결정하느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대방은 아마 내가 돈을 내기아까와서 그러는줄로 알았던지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었던지“씨베! 씨베!”하면서 사온 체경을 내앞에다 둘러메쳐 박살을 내는것이였다. 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저돌적인 행위에 놀라고 기막혀 한참이나 쏘아보다가“젊은놈이 돼먹지 못하게 왜 그모양이냐?”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시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후 김덕춘이도 약혼을 한건데 그는 약혼녀가 달라는 몸을 주지 않는다하여 대들보에다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와의 모순은 풀지 못하고만건데 그처럼 심군일이도 뭔가 잘못오해하고 나에게 적의를 품은게나 아닌가한다. 김덕춘이나 심군일이나 보면 속이 졻아도 형편없이 졻고 다혈질인지 조폭하다. 본성이 그러하다는것을 알았으면 내가 주동이 돼서 허심탄회를 해야 옳았을텐데 여지껏 그러지를 않았으니 내탓도 있겠다.

하지만 아래의 일들은 그렇지 않다. 심군일이가 우리 홍광마을 소학교에 교장으로 부임되였어도 내집에 와서 숟가락 한번 든적없고 술한잔 같이 나눈적도 없은 그것이다. 서로간 처지가 그렇게 되였음에는 심군일가 우선 책임져야 할 곡절이 있는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성명이 강명숙(姜明淑)이였는데 홍광마을에서는 내내 산파(産婆)로 존경을 받아온 강혜선의 조카벌이 되거니와 같은 강씨라 하여 우리 집 사람을 면목을 알자마자 “언니, 어니”하면서 아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심군일의 처는 우리 집에 놀러를 자주다녔다.

어느날 우리 내외는 토론한대로 점심저녁 두끼음식을 잘 준비해놓고는 심군일내외를 청하기로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량주를 모시러간건데 문을 떼고 들어서니 심군일이가 제 처의 머리카락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구들바닥을 돌면서 질질 끌고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아프다고 아부재기를 치고 심군일이는“이 쌍년아! 이 쌍년아!”하면서 죽은 개를 끌듯 그냥끌면서 태를 쳤던 것이다. 그래 둘째젖먹이 애를  업고갔던 우리집 사람은 너무도 놀라고 억이 막혀 <<아니 이게 웬일이냐? 싸움은 왜서?>>하면서 부부간에 화목하게 살아야지 남을 웃기며 이래서야 되느냐며 말렸더니 심군일이가 <<쌍년이! 남의집일에 웬 참견이야, 나가!>>했던 것이다. 싸움을 말렸다가 되려 욕을 얻어먹은 나의 처는 분해서 돌아선 후로는 그만 발길을 끊고 만 것이다.

심군일의 처 강명숙은 그때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낮에 남편이 달라는 몸을 주지 않았다가 그같이 모진 형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불쌍한 그녀는 그후 딸을 하나 낳아주고 몇해지나 젊은 나이에 그만 죽고말았다.

<<세상에 그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어디있소?! >>  

우리집 사람은 그때의 그 일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면서 여러번이나 도리를 떨었다.  

 

3. 모욕적인 날조

 

우리 집 노친의 눈에 심군일이는 일찍부터 악인으로 각인되여 있은 것이다. <<문화대혁혁명>>때 심군일이가 그를 멸시한 것을 보면 상상키 어려울지경 이여서 언어도단이다.

<<네년이 밤마다 무슨짓을 했는지 바른대로 대라!>> 

<<내가 무슨 나쁜짓을 했다고 이럽니까?>> 

<<네가 한일 네가몰라, 이년!,,,  매일 송죽이하고 같이 한이불속에 누워서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는 남조선방송을 밤중까지 들었지?>>

매양 우리 집이 거덜이 나던 그날이였다. 이때는 쇠줄에 발이 찔려 기혼한 어머니가 문짝에 들리여 집으로 옮겨진후였는데 심군일이가 이제 태여난지 반년밖에 안되는 둘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있는 우리 처를 길복판에다 세워놓고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이같이 제마음대로 날조한 억측으로 무턱대고 따지고들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꼭마치 히스테리발작이 멎지 않은 미친개같았다.

<<우리는 그런적이 없습니다.>>

나의 처도 만만치 않게 태도가 견정했다.

그러니 심군일이가 손가락을 거의 코밑까지 드리대고 바들바들 떨면서 욕지걸이를 퍼부었던 것이다.

<<요년이 로실하지 못한거 봐라, 요 개쌍년이!>> 

심군일이는 제뒤에다 세워놓은 나를 피끗 돌아보고나서 얼굴을 다시돌리더니 어성을 한층높혀 제멋대로 거짓말을 해댔다.

<<네 이년아! 송죽이가 이미 다 승인했는데두 네년이 그래 승인을 안해? 이제보니 네년은 송죽이보다 더 악질적이구나!  개쌍년같은게!>>

<<흥!>>

나는 하도어이없어서 콧방구를 뀌였다.

<<우리 집 김선생은 시간만있으면 글을 쓰느라고 라지오들을새도 없습니다.>>

나의 처의 이런 단호한 대답질에 심군일은 그냥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어가면서 요 개쌍년이 거짓말하는것 좀 봐라. 집에다 라지오를 놔두고도 그걸 듣지 않았다는게 어디 말이 되느냐고 소리를 뽑았던 것이다. 우리 노친은 저세상으로 가기 며칠전까지도 그때의 그 억울하던 장면을 회상하고는 <<나는 지금도 꿈에서라도 그놈을 다시볼까봐 무섭다.>>고했던 것이다.

과연 사람이 어떻게 돼먹었으면 그렇게까지 지독한 악물로 보였을가?

나는 요즘와서야 심군일이가 전에 그같이 동창과 이를 악문 리유를 다른 한 방면에서 찾아보게 되였다. 그러나 그역시 가설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로나  될  뿐이다..

이제는 몇십년이 지난 먼 1964년 4청때의 일이다. 그때 <<4청>>을 잘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계급교육을 첫 자이에다 놓고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리하여 한때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중시하여 열조를 일으키기에 이른것인데 이쿠쓰탠(忆苦思甜)하면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글쓰기를 무척좋아한 나는 한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수집을 다녔다. 듣자니 벌리(勃利)일대에도 우리 조선족동포가 집거해 사는 부락이 여럿되거니와 이야거리도 있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게된건데 거기 후춘툰(厚春屯)에서 산적이 있는 한 중년의 녀인이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해서 소문을 낸다는 것이였다. 그래 내가 그게 대체 누군가 알아보니 녀인은 성명이 심계화(沈桂華)라했다. 하여 한걸음 더 그의 가정리력을 알아보게된건데 그는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였다. 후춘툰(厚春屯)하면 전에 동창생 심군일이네가 살았던 마을이 아닌가? 심봉사라면 그는 심군일의 아버지일것이다. 내가 심군일의 아버지는 눈이 멀었다는 소리를 중학을 다닐때 들어서 아는것이다. 이쿠쓰탠(忆苦思甜)을 잘한다는 심계화(沈桂華)인즉 바로 동창생인 심군일의 누나였던 것이다. 심군일한테는 우로 그 누이말고도 형이 둘있는데 맏형은 팔부를 겨우면할정도에 일이나 꾸벅꾸벅 잘하고 둘째형은 마음좋고 어진데 그만 아랫것을 잘못썼다가 몇해 감옥밥을 먹은적이 있는 사람이였던 것이다. 집안형편이 대략 그러하니 힐끔하게 자랑할것이 없었다. 한데 무슨눔의 이쿠쓰탠(忆苦思甜)이란말인가? 내가 보건대는 우선 이쿠쓰탠(忆苦思甜)을 다닐 조건과 자격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봉사니 한뉘 일을 못했을거요 자연히 가난했을것이다. 그러니 자식들을 섧고 고생스레 자래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계급압박이나 계급투쟁에다 련계시키는건 개잇발을 상아로 팔아먹는 격의 억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취재한 그것을 쓰지 않고 내가 살고있는 한 공사내 성화마을에 사는 함명옥(咸明玉)녀인의 가정사를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로 만들어 신문에다  냈던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자 즉시 효력을 냈는바 반영이 좋았다. 우리 성화공사의 당위서기로 오래있다가 후에는 화천현현장으로 발탁한 선우승이라는 분이 그당시 합강지구내 여러 조선족공사들의 사청교육을 맡아서 지도했는데 내가 쓴 이쿠쓰탠(忆苦思甜)자료가 적시에 나와 좋은 효력을 냈노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심군일이 그일을 알면 혹시 불만이 생겨 분노했을수있겠다. 왜서 동창의 가정사는 몰라봐주는가고. 차라리 그일을 그가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정장송이처럼 내한테 보복할만하 리유가 생기겠으니말이다. 그러면 피장파장이 될게 아닌가!

심군일이는 하여간 대단히 약은사람이다. 사람을 때이고 뚜드려마스고 빼앗는것을 따쟈챵(打砸强)이라는데 그 최선봉이였던 심군일이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거니와 되려 중학교장으로까지 급을 춰서 해먹다 오솝서리 퇴직한것을 보면 처세술(處世術)이 대단하다. 아니면 그놈의 정책락실기관이 눈이 멀었던지.

문화대혁명때 겪은 일을 하나 더 말해야겠다.

그는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제 심리상의 쾌락과 야릇한 만족을 느끼기를 좋아하는 악성을 갖고있는 철면피한 인간인 것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는데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심군일은 애들을 시켜 나를 교무실에 불러다 꼭괭이로 학교서쪽켠에 있는 몇군데 남아있는 낡은나무뿌리를 꼭 파버려야한다고 명령하고나서 집으로 가면서 일이 끝나면 자기한테와서 꼭 보고하라는 것이였다. 하여 비를 후즐근히 맞아가면서 나무뿌리를 다뽑고나서 그의 집으로 가게된건데 가보니 희한했다. 벽과 천정을 빈자리없이 몽땅 도배를 했는데 책장과 화보장들은 몽땅 나의 소설책과 화보를 파한 것이였다.

그가 흐믓해서 나를 향해 거즈너기 웃는 꼴이 어떠냐, 봤지, 가슴아플거다 하고있었다. 바로 그것이였다, 나에게 자극해서 심리상 고통을 주자는 그것!... 나는 파렴치한 그 낯짝을 정말 올리차놓고 싶었지만 그냥 참는수밖에 없었다. 

 

4. 고인의 안식을 빌어       

 

<<내가 둘째를 남이 달라할때 줫더라면 글쎄 어쩔번했소?... 죄를 짖지!>>

노친은 생전에 남과도 이런 소리를 한것이다.

둘째란 나의 둘째아들 성천(星泉)이를 가리키는데 내가 판결에 넘겨져 미결수감방에서 지내는 그 45일사이만도 새끼 둘을 데리고 살아가는 처의 처지는 말이아니였다. 남편이 이제 20년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무기도형에 떨어지리라는지 아예 총살을 당하고말리라느지 갖가지 요언이 무성해 심리고통이 심한데다 농촌이니 먹을건 그런대로 있었으나 병이 나니 돈이 한푼도 없어서 그게 문제였다. 월급을 끊고 주지 않은지가 4년철,  손에 푼전한잎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혈을 몹시했다. 의사를 보이고 치료를 받으려해도 할수가  없었다. 이런때에 쟈므스탕창(사탕공장)에 있는 한 무자식부부가 어떻게 알고 기저귀와 싸개를 해서 갖고와서 젖먹이 둘째를 저들이 기르겠으니 달라했던 것이다.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됩니다.>>

<<아니 왜 그러오? 얘를 우리가 복받게 잘키운다니까 그러네?>>

그들은 달라면 인차주리라 여기고왔던 것이다.

나의 처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키워야지 하고 굳게 결심하니 그들은 다시두말없이 오섭서리 되돌아가고말았다.

그후 나의 처는 하혈이 점점 더 심해 부득불 시집올때의 천날옷을 비롯해 좋다는 견지들은 다 팔아 돈을 만들어 병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사나이뒤에는 그를 받들어 성장시킨 위대한 녀인이 있었다.
올해의 6월30일 오전여덟시반경, 52년간을 고락을 같이해온 내 노친이 불치의 심장병을 앓다가 73세를 일기로 끝내 내곁을 떠나고말았다. 그러니 그가 세상을 하직한지가 어느덧 두달이 되여온다. 하건만 나는 한시도 끊지 않고 내내 회억속에 묻혀지낸다. 이역시 내 인생궤적의 프로그램이 아닌가한다.

7월 2일, 내노친의 장례를 치른 그날의 정경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각인되여 영원히 잊혀지지않고 생생히 남을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생각밖이였다. 우선 수도빈의관의 그 고급스럽고도 문명한 현대식의 시설과 정경에 나는 감동하면서 모든 근심을 풀어놓아 마음이 편해지게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인터넷 자은천하(慈恩天下)를 찾아 거의 매일이다싶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있으니 그 효성이 과연 지극하다.

내가 만약 지난날 그 무리에 목숨을 잃었더라면, 그자들의 야심대로 처와 자식들이 멸살을 당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였겠는가? 이 세상에 나와 내 식솔을 추억해주는 망령(亡靈)이라도있을가?

그날 노친의 유상을 중간에 놓고 13개의 커다란 화환으로 장식된 장엄한 장례식장에세 묵도를 올린이가 40명을 넘었으니 그들 거의가 나의 두자식의 동창아니면 극진한 친구들이였다. 사업이 바쁘건만 원지에서 온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72세나는 다다히로 타무라선생의 래림에 나는 정말 고마와 감탄했다. 그는 한해전 노친이 병원에 입원했을때도 고맙게도 일부러 찾아와 기도를 올리기도했던 것이다. 우리 큰애 친구의 벗이란다.

나는 효성을 다하는 아들들이 있음으로 하여 여지껏 시름놓고 내쓸 글이나 쓰면서 자유로이 편안히 살아온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나와 내 집을 멸망시키려고 기껏 발악했던 그 동창을 생각하면 오직 멸시와 비웃음만 나온다.
<<네가 잘되나 내가 잘되나 어디두고보자!>>

포부가 바다같이 넓지 못해서 숨기지 못하는 내 감정으로 치부하면 되겠다.
 

심군일이는 아들이 없다. 있다면 개아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비가 사람이아니기에.

딸이 커서 남편을 얻었는데 그 사위라는것이 심군일이가 지금 데리고 사는 후처가 낳은 아들이다. 그러한즉 군일이는 지금의 노친을 뭐라 불러야 옳은가? 처라불러야옳은가 아니면 사돈이라불러야 옳은가? 

사전에 거기에 대서는 해석이 없다.

그따위 란혼은 짐승이나할것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다 코를 쥐고 웃으면서 이런일은 머리에 털나서 처음본다고 말한다.

<<쌍개색끼!>>

<<쌍개간나색끼!>>

남을 욕하기 좋아하는 심군일이가 허세를 부리느라 제꺽하면 서슴없이 내치는 소린데 이런 쌍욕을 진짜먹어야 할건누군가? 내가 보건대 이 쌍욕을 얻어먹어야 할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심군일이밖에 없는것 같다!

<<제명을 못살고 뒤여질 쌍개색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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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동창
날자:2014-08-19 04:00:14
송죽아: 문화운동때 넌 정말 한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걸 지금와서 폭로하면 어떤 사람들은 리해를 못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얻어맞은 사람들은 그 원통이 눈을 감아야 사라질거다. 눈을 감기전에 곪아있는 속을 털어놓는것이 속시원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게 맞은것이 사회현실때문이라고만 볼수는 없다. 문화운동을 놓고 보면 성격 행위상으로 건달, 악한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며 죄없는 사람들을 고양이가 쥐를 앞에 놓고 양공질하듯 놀아난것이다. 지금와서 그때의 일을 폭로하면 단결에, 사회의 안정에 불라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는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매를 맞은 사람이 아픔을 말하는것은 최저로 자기의 인권을 행사하는 일인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심군일은 잘 알고있다. 동창이니까. 남을 때리고도 지금껏 무사히 보내면서 한마디 죄송하다는 말한마디 없는 놈, 모택동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변명하는 놈, 최저로 마음의 가책은 느껴야 되지 않을가.이런 인간에게 맞은 아픔을 털어놓는게 잘못된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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