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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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조각 추억을 고향하늘에 날리며 댓글:  조회:1713  추천:0  2013-09-17
한 조각 추억을 고향하늘에 날리며                 ▲ 류연산 문학비 앞에선 필자     다년간 조선어문교원사업에 종사해오면서 글짓기서클 학생들과 더불어 김창걸, 리욱, 김학철, 정판룡, 등 우리민족의 유명한 작가, 시인들의 문학비답사를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문학비 제막식에 참가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고향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서쪽산언덕에 친구이며 고향선배인 류연산의 “혈연의 강들” 문학비 제막식 현장에 선 나의 마음은 몹시 격동되고 설레였다. 류연산의 “혈연의 강들” 문학비앞에 주체측에서 생화를 증정하고 유명지인들의 축사와 류연산 아들의 답사를 들으면서 나의 마음은 어느덧 40여년전 고향에서의 한 조각 머언 먼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지난세기 70년대 서성중학교시절 서성에는 내가 존중하고 숭배하는 3명지성인이 있었다. 한분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문을 가르치면서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최철운 선생님이고 다른 한분은 신문에 “약혼은 상품매매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문학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량고범선생님, 그리고 나에게 독서에 힘을 실어준 선배인 류연산이었다. 당시 북대1대 류연산의 뒤 집에 살고있은 최림군은 나와 한학급에 다니는 무람없는 딱친구였다. 우리는 가끔 토봉에 올라 서성 저멀리 평강벌을 내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신변의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생산대 탈곡장에서 돼지 오중개를 불어서 뽈을 차다가 대방 허씨성을 가진애와 말다툼이 생겼다. 티격태격하다가 싸움이 붙었다. 그 일로 나는 집에서 쫒겨났다. 나는 홀로 토봉에 올라갔다. 이윽고 최림군이 찾아와서 함께 북대1대 최림군의 집으로 갔다. 최림군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있는데 최림군은 앞집 연산이네 집으로 놀러가자고 했다. 이야기를 잘하는 연산이한테 가서 놀자고 하여 선뜻 따라나섰다. 그렇게 자정이 넘도록 연산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쉽게 돌아왔다. 연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최림군은 얌전하고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놀았다. 그런 인연으로 그후부터 최림군은 연산이 한테서 빌린 소설책이라면서 나한테 건너주었다. 이렇게 나는 무작정 독서에 차츰차츰 깊이 빠져들게 되였다. 나는 처음으로 “청춘의 노래”, “붉은 바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림꺽정” 등 이런 도서들과 접하게 되였고 정신없이 책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이런 도서들을 공개적으로 볼수없었으므로 가만가만 남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읽어야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류연산선배한테 너무너무 감사했다. 말썽꾸러기였고 구레벗은 말처럼 날뛰던 나에게 독서에 다소나마 흥취를 가지게 하여 정말 고마웠다. 어느날 학급반장인 최림군으로부터 오후에 연산선배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전달을 받고 일찍이 교실에 도착하여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연산선배가 교단에 올랐다. 한주일동안 매일 오후 시간마다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중국4대명작중 “수호전”과 “삼국연의”의 이야기를 경청 하였다. 연산선배는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리게 절도있고 형상적으로 이야기를 펼치여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들은 그렇게 경양강에서 범을 때려잡은 무송, 맨손으로 버드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린 로지심, 효심이 강한 리규 등 량산박의 108명의 영웅인물들의 이야기속에 빠져들었고 도원의 결의---류비, 관운장, 장비의 이야기와 조조, 주희 , 적벽에서 싸움, 제갈량의 지혜를 알게 되었다. 당시 형세하에서 이런 이야기모임을 가지고 이야기를 선뜻히 해준 연산선배가 대단하였다. 그때 그는 벌써 많은 문학작품을 접했고 문학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선배 이야기 경청모임을 통하여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후에 직접 수호전, 삼국연의를 열독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연산선배의 뛰어난 기억력과 구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처럼 복잡한 이야기 줄거리와 세절, 다양한 인물의 특징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이야기를 펼치기는 정말 쉽지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작가, 시인이 되지 못하고 일개 조선어문교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오면서 몇십년 세월이 흘렸지만 서성중학교시절 연산 선배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생생히 나의 머리속에 남아있다. 오늘 고향선배 류연산선생의 문학비 “혈연의 강들” 제막식에 참가하여 고향서성 진달래민속촌의 서산 언덕에 올라서서 60리 평강벌을 바라보면서 한쪼각의 추억을 더듬어보노라니 서성인으로서 무한한 자랑을 느끼게 되며 다재다능한 작가이고 학자인 그의 문학정신과 고향애가 길이길이 남아 우리민족 후대들에게 귀감으로 전해지길바라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빈다. [교원수기]고향땅에 세워진 문학비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0-02 15:40:49 ] 클릭: [ ]   다년간 중학교에서 조선어문교원사업을 하면서 글짓기써클조 학생들을 이끌고 윤동주, 김창걸, 리욱, 김학철, 정판룡 등 우리 민족의 유명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문학비답사활동을 수차 조직했고 이런 활동들을 학생들의 문학활동의 중요한 일환으로 배치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찬란한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게 하고 연변이 낳은 문학인들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소개하기 위한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비 제막식에 참가해보기는 난생 처음이였다. 그것도 고향인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서산언덕에서. 지난 8월 24일, 친구이며 선배인 류연산의 《혈연의 강들》 문학비 제막식 현장에 선 나의 마음은 몹시 격동되고 설레였다. 문학비에 생화를 올리고 유명지인들의 축사와 가족의 답사를 들으면서 나는 저도 몰래 40여년전의 먼-먼 기억을 더듬어가고있었다. 진달래촌 서산에 경립된 류연산문학비 《혈연의 강들》. 지난세기 70년대 서성중학교시절, 서성에는 내가 존중하고 숭배하는 3명 지성인이 있었는데 우리들에게 조선어문을 가르치면서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최철운선생님과 연변일보에 《약혼은 상품매매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문학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량고범선생님, 그리고 나에게 독서를 알게 하고 독서하도록 이끌어준 선배인 류연산이였다. 당시 북대1대 류연산의 뒤집에 살고있던 최림군은 나와 한학급에 다니는 무랍없는 딱친구였다. 학급 반장인 최림군이 공부도 못하고 싸움질에만 이골이 튼 나와 어떻게 가깝게 놀았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가끔 토봉에 올라 저 멀리 평강벌을 내려다보면서 신변의 이야기와 리상에 대해 담하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생산대 탈곡장에서 돼지 오줌개로 만든 뽈을 차다가 허씨성을 가진 애와 말다툼이 생겼고 티격태격 말싸움끝에 손부림까지 벌어졌다. 그 일로 집에서 쫒겨난 나는 홀로 토봉에 올라갔다. 홀로 토봉에 앉아 어떻게 집에 들어갈가 고민하는데 최림군이 찾아왔다. 그는 내 사정을 듣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죄짓고 집에서 쫓겨난 놈이라 친구의 집에 가서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먹는둥마는둥 숟가락을 내려놓자 최림군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그러는지 연산이네 집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학교에서 이야기군으로 소문높은 연산이한테 놀러 간다니 귀가 솔깃해났다. 그날 저녁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성품이 어진 류연산은 소문과 같이 입을 열면 청산류수였다. 고담준론을 시작하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류연산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최림군은 얌전하고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놀았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학교에서 8리나 떨어진 북대에서 도보로 다니는 그애가 부럽기만 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와 앞뒤집에서 산다는게 얼마나 행복한가고. 그것을 인연으로 최림군을 통해 류연산의 책을 빌려보게 되였다. 학교에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일으키고 싸움판이란 싸움판엔 다 참가하던 내가 독서에 빠져든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나는 처음으로 《청춘의 노래》, 《붉은 바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림꺽정》 등 책을 읽었고 정신없이 책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이런 책들을 공개적으로 볼수 없었으므로 나는 남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읽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저녁 류연산을 만난것이 나의 일생의 전환점이 된것 같다. 말썽꾸러기였고 굴레벗은 말이였던 내가 먼 후날 조선어문교원으로 살아가게  될줄은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랴. 어느날 학급 반장인 최림군으로부터 오후학습이 끝난후 류연산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배치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일찌감치 교실로 나갔다. (이야기 들으러 오는 학생이 많아 늦게 나가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동안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류연산선배의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류연산선배는 《수호전》과 《삼국연의》를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절주를 잡아가면서 구수하게 이야기를 펼쳐갔는데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것은 더 말치 않겠다. 우리는 그렇게 경양강에서 범을 때려잡은 무송, 버드나무를 뿌리채 뽑은 로지심, 효심이 강한 리규 등 량산박의 108명 영웅인물들의 이야기속에 빠져들었고 도원결의 3형제인 류비, 관운장, 장비의 이야기와 조조, 허저, 그리고 적벽에서의 싸움, 제갈량의 지혜를 알게 되였다. 당시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연산선배의 독서량은 대단했고 연박한 지식은 선생님들을 초과할 정도였다. 그때 그는 벌써 많은 문학작품을 섭렵했고 일정한 문학재능을 발산하고있었다. 썩 후에 《수호전》, 《삼국연의》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연산선배의 뛰여난 기억력과 구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처럼 복잡한 이야기 줄거리와 세부, 다양한 인물의 특징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이야기를 펼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것이다. 비록 작가 시인이 되지 못하고 일개 조선어문교원으로 보통삶을 영위해 가면서 몇십년 세월이 흘렸지만 서성중학교시절 연산선배에 대한 기억은 항상 나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저 멀리로 60리 평강벌과 류연산선배의 고향마을, 조개산, 토봉이 한눈에 안겨온다. 고향땅에 세워진 《혈연의 강들》 문학비, 나는 마지막 사람으로 문학비가 세워진 서산을 내려왔다. 멀리 60리 평강벌과 류연산선배의 고향마을이 바라보인다. 돌아보니 연변작가협회와 고마운 지인들에 의해 고향땅에 세워진 류연산선배의 문학비가 푸르른 가을하늘에 비껴 한결 돋보인다. 나는 친구와 후배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다재다능한 작가이고 학자인 류연산의 문학업적과 문학정신이 그의 애틋한 고향애와 더불어 길이길이 전해질것을 기원했다. /김정섭특약기자    
1    서울대방장 려관에서 당한 봉변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2-04-20
        서울대방장 려관에서 당한 봉변   한국에서 귀국한지도 인젠 한달이 다 되여가지만 서울시 대림동에서 발생했던 일은 내 평생을 두고 지워버릴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것이다. 생각만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허구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사람이 사는 세상사가 각양각색이라고는 하나 이른바 선진국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리해가 가지 않는다. 발전도상의 국가인 중국에서 선진국인 한국으로 연수생활을 가게 된 나는 너무도 흥분되고 설레였다. 한양대학 한국어 문화원에 도착하여 시작된 연수생활은 참으로 감동적이였고 이어지는 문화체험활동은 말그대로 깊은 감회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런대로 연수생활의 일정을 아쉽게 마무리짓고 자유활동을 가지게 되였다. 처음으로 한국에 온것만큼 형제자매들도 만나보고 친척친우들도 만나봐야 했다. 우리 연수생들은 서로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 행동을 시작했다. 나는 안해가 일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시 창곡3리에 행장을 풀어놓았다. 다음날 홀로 오이도로 갔다가 돌아와서 안해가 근무하는 아비숑모텔 리사장 그리고 안해와 함께 근무하는 2명 일꾼과 더불어 저녁식사를 하는데 문득 동료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귀국전에 가볼 곳이 있는데 동행하지 않겠는가는 내용이였다. 안해와 상론하고 매제도 만날겸 이튿날 서울로 향했다. 서울시 영동포구 지하철입구에서 매제를 만나 대림동 연길랭면집에서 오래만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매제가 거처하는 곳에 가지 못할 형편이라 대림동 도림로 523 대방장려관 103호에 투숙하기로 하였다. 수속을 끝내고 샤와를 마치고 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매제 동료한테서 전화가 왔다. 중국에서 온 형님을 모시고 나오라는것이였다. 매제의 청구를 거절할수 없어 따라 나섰다. 사건이 발생한후 경찰이 뒤짐을 지고 출동했다.  대방장려관 부근의 호프점에서 맥주를 좀 마시고 이튿날 강원도로 가야 하기에 일찍 려관으로 돌아왔다. 매제도 고달픈 현장일에 지쳤는지 자리에 눕자마자 잠들었고 나도 피곤기가 몰려오면서 어느새 혼곤히 잠들어버렸다. 새벽 다섯시 반쯤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는데 나의 가방과 옷가지들이 사처에 널려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급히 매제를 흔들어 깨우고 열려있는 가방을 뒤져보니 돈이 없어졌다. 몸이 썩 좋지 않은 안해가 땀흘리며 벌어 이 못난 남편을 쓰라고 준 65만원(한화)과 인민페 6백원이 깜쪽같이 사라진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있단 말인가? 눈앞이 아찔해났다. 나는 쑈파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물었고 매제는 려관주인을 찾아 사연을 캐물었다. 주인은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 뗀다. 주인이 자기 려관에서 일이 발생했는데도 아닌보살하는 태도는 참으로 꼴불견이다. 기분이 상한 매제가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당도하여 주인과 쑥덕거리더니 수사방법이 없다는것이였다. 어찌보면 경찰과 주인이 짜고 드는 느낌이 들었다. 매제가 다시 과학수사대에 신고를 했다. 젊은 경관이 아주 싹싹하게 문의하고 사진을 찍고 나의 주소를 기록하고는 노력해보겠다고 했으나 글을 쓰고있는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만약 이런 일이 중국에서 발생했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적어도 경찰이 출동하여 낱낱이 조사를 진행하고 외국인이 피해를 보지 않았나 꼼꼼히 체크한후 감시카메라를 판독하거나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았다면 려관주인한테 벌금이라도 시켰을것이다. 려관에 투숙한 손님이 그것도 외국인이 피해를 입었지만 나몰라라 하는 시민의식, 이것이 오늘날 한국 전체의 시민의식은 아니라고 보지만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대가의 학습과 실망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제와 이틀후에 만날것을 약속하고 서울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속초로 가는 고속뻐스에 앉아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료가 무슨 좋은 일이 있었길래 혼자 웃는가하고 물어왔지만 나는 아주 희한한 일을 겪었다고 그냥 얼버무렸다. 오늘도 한국의 선진화를 부르짖고 국민들의 높은 각성을 역설하는 한국의 TV방송들을 보노라면 그때 대방장려관에서 겪었던 일 특히는 연변말을 하는 우리를 아니꼽게 내려다보던 려관주인과 경찰의 그 차거운 눈길과 시끄럽다는듯 잔뜩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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