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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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8 ]

28    슬픔의 맨 끝엔 그리움이 아프다 댓글:  조회:1812  추천:1  2013-06-14
  그처럼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수많은 아픔을 묻어둔채 영영 곁을 떠났다 머언 그때에 하나라도 더 챙겨주지 못한 그 아픔 내 마음의 언저리에 무겁게 걸려있다 아직은 너무 이른 그 길 가는마음도 아프련만 보내는 이 마음 어찌 언어로 형언이 될수 있으랴! 한생을 너무도 힘들게 살아온 친구 그 아픔 채 쏟기도 전에 이렇게 당돌하게... 우리는 아직도 할말이 넘도 많고 해야할 문학의 우물도 퍼그나 깊은데 아픔은 처마끝을 꽁꽁 동여매놓고 조용히 떠나간 친구가  너무너무 불쌍하고 안타깝다 전혀 믿겨지지 않는 그런 아픔이 내 마음을 슬프게 다독인다 친구야,  가시는 길에 꽃잎을 즈려밟고 가시라! 친구의 명복을 두손모아 빕니다!  
27    수박 잃고 깨알 줏기 댓글:  조회:2046  추천:2  2013-06-02
  가지고 잃는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구경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잃는가에 따라 그 엄중성에 우리는 부득이 사색을 기울이지 않을수 없는것이 목전 우리 애들의 우리 말을 잃어가고 있는 가슴아픈 현실이다.  학년이 높아감에 따라 응당은 우리 말을 더욱 능란하게 리해하고 활용해야 함이 자연의 법칙이건만 그렇지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 달랠길이 없다. 억지로는 절대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기에 여러모로 방법을 구상해보지만 시원하지가 못해서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모른다.  조선어문수업시간에도 억지로 조선말을 하도록 요구를 하건만 애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찌할 방도를 모르고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생각은 캄캄하다.  이상하게도 조선말로 모르지만 한어로 슬쩍 쳐주면 인츰 알아듣는것이다.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늘 반성을 하면서 문제를 찾아보건만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꽤나 긴 시간동안 사색을 굴러보던차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에 믿음이 선다. 예전에는 한족말을 몰라서 걱정이 였건만 지금은 조선말을 몰라서 걱정인것이다. 그 주되는 원인은 바로 요즘 교육의 환경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농촌마을마다 학교가 있었고 거개가 조선족이다보니 한족말을 하는걸 보면 너무도 자랑스러웠지만 요즘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바로 애들이 생활하는 환경이 만들어낸 후과가 아닐수 없다. 요즘 농촌학교는 거의 문을 닫고 많은 아이들이 현성의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대부분이 한족이 위주인 아빠트에서 생활하다보니 언어환경은 절대다수가 한족말이다. 이렇게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애들은 조선말을 되려 외국어로 생각하고 한족말을 더 능하게 하고있으니 이제 그 후과를 어떻게 짐작할지 가늠마저 두렵다.     이제 애들이 능란하게 우리 말을 할수있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구경 무엇인지?!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가슴아파하고 그 해결방안에 마음을 쏟아야 할 때가 된것같다.  이는 오직 소학교 조선어문시간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기에 전반 사회가 관심을 모으고 바람직한 해결방안을 연구함이 무엇보다 기치있고 보람있는 일이 아닐가?!  
26    별거 아니야! 댓글:  조회:1726  추천:1  2013-05-04
       여느때와 달리 그처럼 지겹던 겨울방학이 다 지나가고 애들은 희망으로 부푸는 가슴을 열고 즐겁게 학교로 가고 있었다. 영수도 새옷은 아니지만 깨끗하게 차려입고 퍼그나 흥분하는 모습으로 교실로 들어섰다. 애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그리움을 금치 못하였다. 키가 큰 애가 있는가하면 몸이 많이 실팍해진 애도 있었고 평소에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일호가 갑자기 어른스럽게 변한것을 보고 모두가 엄지를 내밀었다. 일호는 조용히 영수의 곁으로 다가 앉으면서 뭔가를 유심히 살피는듯싶었다. 그러는 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수가 입을 열었다.   “야, 임마. 왜? 내가 어디 잘못된데가 있냐? 이상하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일호는 아무 일도 없듯이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영수를 힐끔 쳐다보면서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개학 첫날은 모두가 이처럼 반가운 기분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선생님도 애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기뻐하는 그 풍경은 실로 짙은 향기를 남기였다. 애들은 모두가 신나게 집으로 돌아갔고 교실에는 반장인 영수와 학습위원인 일호만 남아서 지저분하게 널린 교실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말없이 그저 눈길로 뭔가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딘가는 좀 이상함을 밀어내기도 하였다. 얼마후 정리가 끝나고 담임선생님께서 새 학기 반급공작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고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셨다.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처럼 태연하게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눈치를 보니 일호가 어딘가 많이 궁금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얼마나 일호가 한참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야, 영수야, 너 그일 알고 있지?” “응? 무슨 일 말이니?” “그거 있잖아. 우리 엄마하구 너네 아버지 그일 말이야.” 영수는 순간 한방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상 영수도 그 일을 언녕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 내놓고 말하고는 싶지 않았던것이다. 요즘 세월에 이런 일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영수였으니깐 말이다. 예전같으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복잡할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많이 개방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 그일. 알고있어. 그런데 왜?” “아, … 아니구. 그저 너하구 말하는거지. 말하지 않자니 어딘가 무엇하기도…” 일호는 꼭 마치도 가슴속을 오래동안 눌리웠던 그 어떤 무거운 짐을 덜어버리기라도한듯이 가벼워지는듯싶었다. 하지만 영수가 이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넘기는것이 어딘가는 많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혹시 영수가 아버지의 무슨 특별한 교육을 받은것이 아닐가하는 궁금증도 컸었다. 일호가 이생각 저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영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야, 일호야, 그럼 우리는 이제 무슨 관계가 되는거니? 형제? 아니면…” “엉? “ 두눈이 휘둥그래서 영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영수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일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는듯싶었다. “ 글쎄말이야. 우리는 구경 무슨 관계가 되는거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하, 임마, 너네 엄마하구 우리 아버지가 진짜 좋아하면 우리는 당연히 형제가 되는거지. 안그래? 왜? 나하구 형제하는거 싫은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구.” 일호는 저으기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러는 일호를 지켜보면서 영수는 조금도 이상함이 없이 그처럼 평범하였다. 둘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장 정확한 답을 찾는것만같았다. 하지만 그 정답은 그들로서의 결정이 아니였다. 그것도 부모들이 완전히 리혼을 하고 당당하게 다시 결혼식을 올린다면 모르겠지만 그냥 부모들이 리혼도 없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깐 해답을 줏기엔 많이 어려운일이기도 하였다. 영수엄마도 한국으로 간지 이미 10여년이 되였고 뭐 거기에서 애를 낳았다는 수소문도 돌았고 일호아버지도 거의 비슷한 소문을 달고 다녔다. 뭐 한국에서 연변의 어느 녀자하구 살림을 꾸렸고 애를 둘이나 보았다는 심한 소문이 날아들기도 하였다.  “일호야, 그럼 너는 너네 엄마하구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는걸 어떻게 보니?” 점점 이상한 물음을 집어내는 영수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였다. 일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실은 나도 우리 엄마가 저렇게 혼자 외롭게 사는게 보기는 좋지 않다. 너네 아버지하구 좋하나는걸 나는 최저한 반대는 안하는거야.” 실상 영수 아버지와 일호 엄마가 좋아 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어느 누가 병신이라구 펀펀한 세월을 그렇게 랑비할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애들의 눈치가 두려워서 감히 내놓고 승인하지 못했을따름이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부모로서는 하나의 큰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이제 소학교를 졸업할 나이의 자식들이깐 그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영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생각을 좀 들어보자꾸나.” 영수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더니 가슴을 쭈욱 펴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두 손 두 발로 찬성한다. 그리구 요즘은 이런 일이 뭐 별거아니잖아. 그러니깐 우리가 먼저 부모들에게 모르는척하면서 슬쩍 한코 떠보는게 어떨가?” “아, 좋다. 그렇게 하자. 괜히 부모들을 힘들게 하지 말구말이야. 내가 저녁에 우리 엄마하구 슬쩍 짚어볼게. 너두 슬그머니 한방 놓아보렴.” “그래, 그렇게 하자. 혹시 두 분의 마음에 파아란 하늘을 선물할지도몰라. 안그래?”   영수와 일호는 굳게 손을 잡았다. 아니, 형제처럼. 그처럼 정다운 형제처럼 말이다. 둘은 나란히 걸었는데 그들의 어깨우에서는 뭔가 보기좋게 움직이고 있었다.  
25    비여가는 애들의 구석 댓글:  조회:2081  추천:7  2013-04-08
    현재 우리 학교들에서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가 늘어나면서 교육이 많은 곤혹을 겪고있는것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이 곤혹을 마주하고 열심히 풀어가려고 노력하고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 교원들입니다. 이들은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들의 선생님이자 부모이자 후견인으로 되고있습니다.  결여된 가정교육으로 인한 페단   페단1. 심리문제   학습보다 학생들의 심신건강이 더 문제입니다. 학생들의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것이 교육에서 아주 어려운 문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마다 심리교원이 되여 학생들의 심신을 돌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있지만 그 효과가 리상적이 못되고있습니다. 어찌 친부모의 사랑으로 대체할수 있겠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이 공동으로 골머리를 앓고있는 문제입니다. 일부 애들은 휴식시간이지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모릅니다. 그리고 일부 애들은 공부에 전혀 손을 놓고 늘 말못할 고민에 잠기는것같기도 합니다. 결여된 부모의 사랑이 자식의 교육에는 최고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애들이 매일을 보낸다면 정말 그들의 래일이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모릅니다. 요즘은 애들의 공부보다 그들의 여린 심신때문에 더 걱정스럽습니다. 페단2. 학습태도문제    부모가 곁에있는 아이들의 학습태도는 어디보나 아주 빈틈이 없습니다. 결손자녀들의 학습태도는 정말 말이아닙니다. 아무런 정성도 없고 그저 되는대로 해오는 경향이 매우 많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숙제를 하는것이 공부를 위해 하는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억지로 칸을 채우기 위해 해오는 경향도 큽니다. 그들의 숙제를 검사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이 바로 애가 숙제를 할 때 근본 마음이 없는것입니다. 하나라도 열심히 하려는 그런 마음가짐이 부족하고 그저 생각나는대로 마구 하는 경향이 엄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사랑을 떠난 공부란 엉망인간 봅니다. 그렇습니다! 공부도 마음이 편해야 잘 되는것이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아픈데 공부가 잘 될리 만무한것입니다. 페단3. 생활면에서   부모가 곁에 있을적에는 애가 생활이 규칙적으로 아주 잘 되였는데 부모가 곁에 안계시니 생활이 매우 란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언어, 행동 등 면에서 아주 어지럽고 마구 나가는 현상이 존재합니다. 더우기는 개인 위생적으로 아주 차해집니다. 그처럼 깨끗하던 애가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위생이 차해지고 락후해집니다. 정말 곁에서 지켜보기마저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생이 애를 데리고 손을 씻어주지만 그것은 그 당시뿐 효과는 별로 없습니다. 부모가 곁에 있다면 설마 이럴수까지는 없을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함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펜단4. 사람의 됨됨이 면에서   부모가 곁에 없는 애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성격부터 이상하게 변합니다.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도 꽁꽁 막히고 제 밖에 모르고 언제나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격이 조폭해지고 쉽게 화를 내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남과 걸고 들려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주위를 좁히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보니 착하고 너그러운 일면들은 거의 없어지고 오직 제밖에 모르고 례절면에서도 아주 차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먹으면서 커야만 사람의 됨됨이도 절로 쑤욱 크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장에 가장 보귀한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인가 봅니다.  학교에서 결손자녀들을 위한 대책과 방안   이처럼 엄연한 현실을 하루급히 전환시키려는 취지에서 우리 학교에서는 결손자녀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대책1. 결손자녀들의 바른 심신을 키워주기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손자녀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으로 다가서는것이 바로 그들의 건간한 심신을 바르게 키워주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건강심리교육을 전문 수업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진행하면서 진정 애들의 내심의 어려움을 말끔히 씻어주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애들은 그 누구하고도 말 못할 안타까움을 심리선생님을 찾아 시원스레 털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속이 못된 아이들은 쉬이 자신의 속생각을 풀어놓지않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애들의 비뚫어진 심신을 바로 잡아주기위하여 선생님들은 보다 깊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대책2. 결손자녀들의 옳바른 학습관을 키워주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른 심신은 학습의 가장 좋은 밑거름이 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옳바른 학습관을 키워주기 위하여 모진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뒤떨어진 공부는 실속있게 제때에 잡아주고 그릇된 학습습관을 형성하도록 항상 가르침을 념두에 두고 있습니다. 수시로 애들과 속심을 나누면서 그 원인을 먼저 찾아내고 그에 따르는 해결방안을 모색하면서 보다 좋은 학습습관을 키워주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많은 애들은 그래도 어느정도 따라주는데 일부 애들은 전혀 자신과 무관하듯이 멀리하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대책3. 사랑으로 애들의 얼어든 심령을 보듬어 줍니다   결손자녀들은 사랑이 결핍함으로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즐겁게 자라야 할 애들이 너무 일찍 부모의 곁을 떠나 살아가는 그 모습도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한 사람의 성장에 부모의 사랑이 가장 좋은 밑거름인데 그것마저 잃었으니 애들인들 오죽하겠습니까! 학교에서는 결손자녀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활동을 많이 하고있습니다. 반급을 하나의 대 가정으로 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말 전하면서 보다 행복함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함께 생일도 쇠주면서 애들의 얼어든 마음을 녹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담임교원들은 질책보다는 먼저 사랑의 말로 조용히 타이르군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애들은 마음이 많이 비여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꼭 메워주면 너무너무 좋을텐데 말입니다. 대책4. 좀은 어려워도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자   부모가 곁에 없이 스스로 성장한다는 그 자체마저도 너무 불쌍한것입니다. 하지만 담임교원들은 늘 애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지금 좀은 어려워도 래일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자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인차 눈치채고 그걸 해결해주는 그런 모습으로 애들의 부모같은 선생님으로 다가서고있습니다. 부모가 곁에 안계시지만 우리는 우리를 절대 버릴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멋지게 크는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일이라고 애들에게 교육을 하면서 좀은 서러워도 마음을 좀 더 모질게 먹고 힘차게 자랄것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하지만 일부 애들은 정말 설음에 묻히워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래 몇몇 애들의 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학생1: ……밖에서는 아침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린다. 엄마생각에 눈물이 비물처럼 흐른다. 엄마는 지금쯤 날 생각하고 있는걸가? 엄마가 모질게 보고 싶다. 내 마음속에는 엄마에 대한 얄미움이 점점 커만간다. 엄마가 이젠 싫어진다. 학생2: ……요즘 공부가 정말 싫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와서 즐겁게 손잡고 간다. 나는 어깨를 푹 떨구고 발끝만 쳐다보면서 맥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설음이 내 마음속에 쌓인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공부도 참 신나겠는데!  오늘 밤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다. 학생3: ……선생님께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하셨다. 즉 이루고 싶은 꿈을 써라고 했다. 다른 애들은 뭐가 되였으면 좋겠다고 썼다. 나는 엄마와 함께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썼더니 선생님은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셨다. 눈물이 가슴을 적시며 흐른다. 학생4: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엄마베개를 들고 침대로 갔다. 할머니께서 그건 왜 가져왔냐고 묻는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했더니 돌아앉으시며 눈물을 흘린다.   들어도 가슴이 터지는 애들의 속말입니다. 애들은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걸 부모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들을 좀이라도 더 사랑하는 넓은 마음으로 교육을 해봅시다. 그럼 우리 가장들께서 애들의 교육에 아래와 같은 점에서 보다 가까운 협조를 해주셨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기대1. 애들로하여금 물질적으로 좀 공제하여 줍시다. 지나친 물질은 교육에 얼마나 큰 해가 되는지 모릅니다. 좀은 가슴이 아프시더라도 마음을 모질게 다잡고 애가 어려움속에서 크도록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질은 어디까지나 교육의 가장 큰 저애가 됩니다. 기대2. 숙제완성에서 조금이라도 같이 들여다 봐주십시오. 글쎄 가르칠수은 없어도 함께 곁에서 있어줘도 애들은 크게 힘이 되여 공부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무작정 보도반에 보내는 그런 페단은 극복했으면 더욱 좋을것같습니다. 기대3. 시험점수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공부보다 더 소중한것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애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건강하게 잘 만 커준다는것만으로 우리는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합시다.   애들은 우리 민족의 미래입니다. 우리 애들을 위하여 함께 노력합시다! 아주 자그마한 진보라도 크게 칭찬하면서 애들이 더욱 활발하고 바람직하게 성장하도록 몸과 마음을 다 바쳐갈것입니다.  
24    무너지는 우리 애들의 심신 누가 바로 세워줄수 있을가?! 댓글:  조회:1841  추천:2  2013-04-01
    해뜨는 아침이면 누구 먼저 등교하여 밝게 웃는 우리 애들을 보고 싶던 그 시절이 옛말처럼 그립다. 하루밤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침이면 만나서 서로 반가와하며 무슨 말이 그리도 많았던 우리 애들! 소곤소곤 무슨 저들의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그저 말없이 곁에서 지켜보는것마저 늘 행복하기만하였다. 누구 하나 흐려진 얼굴 없이 밝에 웃던 우리 애들의 고운 얼굴 다 어데 갔을가?! 마알간 눈동자속에는 항상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우리 애들의 그 눈동자 모두 어데 숨었을가?!    이상하게 요즘에는 그처럼 가고싶던 교정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며 걸음이 차겁기만하다. 지친 몸을 겨우 끌고 교실에 들어서는 애들의 얼굴마다에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얼굴에 웃음 대신 어두운 그림자들이 많이 덮여있었다. 어데 아프냐고 이마랑 짚어보지만 그저 말없이 도리머를 흔든다. 그 눈길속에 묻어나는 그 어떤 기대가 나의 마음을 모질게 허빈다. 녀자처럼 화작도 만들지 못하다보니 그저 등이나 다독여주는 그런 작은 움직임으로 애들의 어딘가를 위안해주고싶은 마음이다. 30여쌍의 눈길속에서 환한게 웃는 얼굴 크게 찾을수가 없어서 마음이 두렵고 아프다. 꼭 마치도 당금이라도 무슨 큰일이 발생할듯한 그런 근심어린 눈길속에는 말못할 아픔들이 찰방이고 있음을 마음으로 읽어본다. 그러다가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또 다시 무너지는 마음을 겨우 바로 잡는다. 몇명을 제외한 모두가 부모가 곁에 없는 불쌍한 애들이다. 때로는 그것마저 착각하고 왜서 숙제를 이렇게 참답게 하지 않았냐며 음성이 높았던 그 순간들이 부끄럽게 내 마음을 뒤집는다. 왜서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않고 공부를 대수대수하냐며 음성을 높였던 자신을 오늘 애들의 이슬이 맺힌 눈길속에서 깨끗이 반성해본다. 사는것마저 귀찮아 죽겠는데 숙제가 뭐냐며 하고 접어들어도 내 마음은 다소 평행을 잡을수 있으련만 가련한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애들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부모가 그리워 죽겠는데 무슨 놈의 숙제냐 하면서 시원스레 비명이라도 질렀으면 내 마음 많이 편하련만!     소리없이 무너지는 우리 애들, 생기마저 잃어버린 우리 애들, 행복이 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우리 애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마저 잃어버린 우리 애들, 부모얼굴마저 이제 생소하게 다가서는 우리 애들, 작은 마음에 큰 그리움으로 상처 자국으로 얼룩진 우리 애들, 풀이 죽어 두 어깨가 불쌍한 우리 애들……  무너지는 우리 애들을 누가 바로 세워줄가?!  수업시간에 무심결에 엄마라는 단어를 들어도 그처럼 일치하게 대롱대롱 맺히는 30여쌍의 맑은 이슬앞에서 나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불쌍한 우리 애들의 그 작은 마음속에 깊은 상처자국을 그 무엇으로 지워줄수 있을가?!    부모들이여, 불쌍한 우리 애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봐주소서. 그리움도 사랑도 모두 말라버린 애들의 마음속엔 아픔만이 꼬올똑이 채워지고 있는 그런 마음속을 좀 들여다봐주소서. 돈이 물질적인 재부라고 한다면 우리 애들은 정신적인 재부가 아닐가? 정신적인 재부를 잃었는데 물질적인 재부를 해선 뭘한담?!    
23    시름놓고 문을 열어놓을수 있는 친구같은 형님 댓글:  조회:1948  추천:2  2013-03-31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하리만큼 조심성을 각별히 높여햐 한다는 생각이 마음의 골목을 채울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어떤 설음같은 존재로 다가서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자신을 순응해야한다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도리같은 어색함앞에서 그럭저럭 자신을 몰아보지만 마음은 그냥 슴슴하기 짝이없다. 꼭 마치도 갑자기 낯선 어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듯한 기분이여서 좀처럼 자신을 바로잡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어줍게 일어서기도 한다. 믿음에 마음이 너른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믿음에 약하고 귀가 너른 나로서는 저으기 힘든 세상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그러는척 하면서 자신을 슬금슬금 감춰보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 어수선하고 찝질하기는 더 없는줄로 알고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고마운 분들이 많아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가끔 한가할 때엔 누워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둘 세여본다. 그러면서 만족도 가져보고 잔잔한 즐거움에 묻혀보기도하면서 나름대로의 삶의 쪼각을 꿰매기도 한다. 얼핏 세여봐도 열명정도는 쉽게 들어오지만 그가운데서도 마냥 변함없이 믿음직한 존재로 다가서는 형님 한분이 계신다. 문학이 인연이 되여 서로 알게 되였고 그 문학의 꿈을 키우느라 우리들은 정을 들이게 되였다. 언제 봐도 하냥 변함이 없고 늘 소탈한 모습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대범하게 살아가는 형님을 보느라면 너무너무 편하고 자랑스럽기만하다. 부모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고 자란 형님이 인간세상에 그처럼 사랑에 부자라는 점이 좀처럼 리해가 잘 되지 않았다. 10여년을 문학의 울타리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쏟을수 있도록 그렇게 편하게 살아왔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직 살아오면서 형님같은 사람을 만날수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인으로서는 당당한 저의 선배이지만 항상 자신을 풀처럼 낮추는 자세에서 나는 많은것을 배우게 되였다.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중견작가로는 손색이 없건만 언제 한번 자신을 올려놓고 자랑하는 모습을 여직 한번도 본적이 없다. “엄마생각”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지어 조선족의 얼굴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자랑도 크건만 늘 겸손한 마음으로 실속있는 매일을 열심히 갈고 닦는다. 세상에서 태여나 얼마안되여 엄마를 잃은 형님으로서는 정말 엄마생각이 그 누구보다 절절할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유명한 가사를 쓸수있었다는 자체에 늘 존경이 따르군 하였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문학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견해가 다르면 낯선 사람처럼 캐고 쪼개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또 하나의 곬으로 운전이 자연스럽게 되여주군 하였다. 제가 금방 문학을 시작하였을 때 졸작을 들고 형님네 댁으로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나의 글이 피바다로 자리매김을 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완전히 달리 한두곳을 간단하게 수정하고는 작품이 아주 좋다면서 긍정을 하였다. 이러는 형님앞에서 나는 또 뭔가를 새롭게 배울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자랑스럽다. 나는 쉽게 마음속의 말을 널어놓기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형님앞에서는 언제 한번 감춘적이 없다. 속에 무슨 생각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내뱉군하였다. 그만큼 형님은 그릇이 큰것이다. 그릇이 작은 사람앞에서는 반드시 실수를 조심해야 하지만 형님같은 그릇앞에서는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간혹 내가 불질없는 어떤 실수를 건드렸다할지라도 너그럽게 받아주면서 꼭 짚고 넘어가는데 그 과정에 나는 또 뭔가를 조용히 배울수가 있었다. 요즘 세월에 시름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놓을수있는 형님이 계신다는것은 모두가 행복한 행렬에 속하는 일이다. 이처럼 너그럽고 자상한 형님이 계시는만큼 나도 형님의 뭔가를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겠다. 형님을 위한 그 마음도 항상 변함없이 보다 든실한 “형제”의 정을 쌓기 위하여서는 나의 드팀없는 노력으로 모든 고마움에 형님처럼 보다 큰 마음의 그릇을 가꾸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련다. 마지막으로 형님의 건강과 행운 그리고 건필을 기원해본다.   
22    서로의 오가는 정에는...... 댓글:  조회:1599  추천:1  2013-03-31
     10여년을 서로 도우면서 형제같은 정을 돈독히 쌓아온 형님이 어린시절에 입은 화상으로 팔을 끊어야한다는 사형같은 판결앞에서 아마 모든것이 무너지는것은 그 누구의 해석이 필요없을것이다. 가면을 모르고 다년간 촌지부서기사업을 착실하게 하면서 인정으로 쌓아온 삶의 울타리는 퍼그나 밝기만 하였다. 항상 쾌활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유며적이던 형님이 이처럼 큰 타격을 받아야 한다는 자체에 얼마나 큰 서글픔이 쏟아졌는지 모른다. 바쁘다는 핑게로 늦게나마 형님네 댁으로 찾아갔을 때 나는 그만 무너지는 자신을 달랠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발달한 의학을 원망비슷하게 질책해보기도 하였다. 무작정 끊어야 한다는 의사의 판단을 들으면서 형님은 그처럼 대범했다고 형수님께서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절반 이상의 팔을 끊어낸다는 현실앞에서 만약  나였으면 아마도 열번은 무너지고 말았을것이다. 아예 삶을 완전히 포기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생각마저 두려울 일이다. 하지만 형님의 성글성글한 성격이 아마도 형님을 이처럼 높은 경계로 끌어올렸는지 모른다. 내가 형님을 만났을 때 그처럼 반가와하며 나의 손을 잡고 한참은 놓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움켜진 손안에 형님의 그 어떤 의지가 새롭게 숨쉬고 있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알듯하였다. 형님은 조용하게 수술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절대로 평소의 자그마한 병일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꼭 정확하게 대하라면서 몇번이고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는 형님을 지켜보면서 나는 속으로 말없이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심한 화상이 몇년전부터 이상을 보이기 시작하여 여러번 한국에서 수술을 받아 비교적 온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 병에 대하여 등안시하게 되고 기쁨의 술잔도 몇순배 돌게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 작은 소홀함이 오늘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면서 형님은 조금은 안타까와하는 마음을 담았다. 팔의 3분의 2정도를 끊어낸다는것은 한 사람으로 말하면 어지간한 정신상태로는 도저히 받아낼 가망이 적은것이다. 하지만 형님은 그처럼 대범하게 모든것을 꼭 마치도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역시 쾌활한 웃음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행히 왼팔이니 말이지 오른팔이면 아마도 많은 고생을 해야할것이라면서 되려 만족의 웃음을 만들었다. 그러는 형님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엉망이였다. 끊어낸 자리가 아프지는 않는가고 물었더니 형님은 아주 재미있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끊어낸 수술자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그냥 그 팔이 아파서 가끔은 죽을것만 같다고 하였다. 어안이벙벙해서 쳐다보는 나를 보면서 형님은 신비한 그 무엇을 아야기하듯이 입을 열었다. 다른게 아니라 그냥 그 팔이 남아있는 환각으로 그 팔이 그렇게 참지 못할정도로 아프다는것이였다. 나로서는 저으기 믿음이 가지 않았다. 형님은 그저 팔을 끊어내면 모든 고통에서 시원스레 벗어날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였다는것이였다. 그 무서운 환각이 아직도 그냥 남아서 형님을 못살게 군다는것이였다. 팔이 너무 아파서 무심결에 손이 닿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 고통은 아마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리해를 못할것이라고 형님은 더붙였다. 그러면서 아픈것은 진통제로 다소 누를수 있는데 가려운것이 그처럼 사람을 괴롭힌다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원래 가려움에 약하니깐 말이다. 너무 가려워서 긁자고 보면 역시 아무것도 없는것이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님에대한 불쌍함이 우욱 하고 치밀어올라 하마트면 눈물을 쏟을번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당당한 형님앞에서 그노릇이 그처럼 부끄러울듯하였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될수록이면 형님의 마음을 즐겁게 끌어갈수 있는 그런 화제를 고르느라고 부지런히 움직이였다. 그날 점심, 나는 형님과 형수님께 술 한잔을 부어 올렸다. 사실 병에는 해가 될수 있으련만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처럼 시원하게 한잔술을 비웠다. 그러면서 형님의 건강이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속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많은것을 깨치게 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깨우침이 바로 서로의 오가는 정에는 그처럼 놀라운 행복이 꿈꾸고 있음을.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두손을 곱게 마주잡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21    안해의 심전에 뿌리는 향기 댓글:  조회:1859  추천:1  2013-03-31
     어언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열심히 엮으면서 열개의 년륜을 새겨왔다. 력력히 새겨진 그 심륜들을 응시하느라면 이름못할 고마움들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다가선다. 이제 40대를 넘고보니 내 삶의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그처럼 고맙게만 느껴진다. 지어는 한점의 쓰레기까지도 나를 위한 그 어떤 고마움을 만들기까지 한다. 옛날에는 안해자랑을 하는 남자는 별로 좋은 꼬리표를 달지 못했지만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지다보니 안해의 자랑을 할줄 모르는 남자들은 그 꼬리표가 별로라는 생각이다.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만은 정말 안해를 잘 얻었다는 만족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술상에서 친구가 나보고 안해를 잘 얻었다고 하기에 인차 그건 하나님이 나를 귀엽게 여겨 보내오신 선물이라고 말했더니 모두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안해에게 고마웠는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가난을 밥먹듯이 하면서 살아온 저로서는 제일 큰 꿈이 꼭 가난에서 벗어나는것이였다. 그 가난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중퇴하는 아픈 추억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제 생각해보느라면 그런 모습을 지켜보시던 부모의 마음도 얼마나 아팠을가 가히 짐작이 간다. 어느쪽을 잃으면 어느쪽은 얻는다는 그 말씀의 진리를 다시금 터득하기도 한다. 그래도 하냥 공정한 하늘에 늘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나를 위해 움직이는 모든것에 항상 소중함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이제 점차 나이가 들면서 안해의 소중함도 깊이 터득이 가는듯하고 늘 안해가 고마웁고 또 이 가정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는 안해가 너무도 고맙기만 하다. 아마도 이제 철이드는 모양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만족한다. 하루라도 빨리 저에게 이런 소중한 깨우침을 주어서 너무 고맙기만하다. 예전에는 마누라가 아프다면 짜증부터 나기가 일쑤였는데 요즘에는 마누라가 아플가봐 늘 걱정하면서 될수록이면 내가 스스로 집안일을 찾아하면서 마누라를 쉬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 무슨 억지로의 움직임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인생이란 아마도 그 깨우침이 소중한듯하다. 한생을 살아도 그 깨우침을 바로 줏지 못했다면 역시 헛살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깨치는 인생에는 고마움이 더욱 물씬거리는지도 모른다. 여직 이 가정을 열심히 지켜왔고 이 가정을 위하여 그 어떤 서글픔도 말없이 삭이면서 너무 힘겹게 걸어온 안해의 심전에 고운 향기를 뿌려주고싶은 마음이 저 봄하늘의 따스함과 함께 살포시 내려앉는다. 어려움으로 구겨진 안해의 마음속의 어떤 구석들을 열심히 다림질해주고 싶다. 그 무슨 슬픔보다는 웃음을 더 주고 싶고 그 무슨 질책보다는 믿음을 더 주고 싶고 그 무슨 랭정함보다는 따스함을 더 주고 싶고 그 무슨 아픔보다는 잔잔한 행복을 더 주고 싶고 그 무슨 욕심보다는 하나라도 더 주고싶은 그런 절절한 마음을 곱게 꿰매여 안해의 심전에 곱게 뿌리를 내리고 향기를 뿌려주고 싶다. 비록 요란스러운 랑만은 만들지 못할망정 잔잔한 움직임으로 안해에게 보다 많은 웃음을 정성스레 만들어 열심히 살아갈것이다. 안해의 얼굴에 행복의 잔물결이 끊임없이 흐르도록……
20    깨여진 우정 댓글:  조회:1631  추천:1  2013-02-19
  깨여진 우정 리창현 깨여진 우정은 예리한 화살이다 온기를 잃어가는 차거운 마음에 살얼음이 덮인다 뜨거운 마음에 비명을 몰아온다 정겨운 두눈에 장막을 드리운다 깨끗한 두손에 원한을 풀어놓는다 부지런한 걸음속에 아픔이 고인다 믿음이 절음으로 절룩거리며 다가선다 깨여진 우정은 예리한 화살로 마음을 향해 활시위를 당 긴 다
19    설날의 풍경 댓글:  조회:2040  추천:1  2013-02-12
     설날이 내리는 눈송이와 함께 깨끗한 축복을 싣고 다가온다.  수많은 그리움을 힘겨웁게 등에 지고 갈곳을 열심히 찾아 간다.  내리는 눈송이마다에는 그리움의 자욱이 력력하기만하다. 부모, 형제, 부부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샘물에 헹구어 마음의 빨래줄에 열심히 걸어둔다.  마음의 언저리에 어지럽게 쌓였던 오물들을 세척하면서 잔잔한 행복으로 삶에 또 다른 산소를 공급하는 그런 기다림의 설이건만 말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으로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점점 비여가는 마음의 구석은 채울길 막막하고 서글픔은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분주하기만 하다.  낡은것은 비우면서 자리를 내줘야 더 많은 아름다움이 다가선다고들 하지만 비울길 없는 구석에는 석유등잔만 가물거리며 얄미운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힘든 마음 가볍게 정리하고 뜨거운 정으로 마음청소 해야 할 때건만 청소기는 줄끊어진 존재이고 걸레마다는 물기를 가두지 못한다. 엄마의 잔소리도 당시(唐诗)처럼 골동폼으로 굽은 등 펴지 못한채 한많은 사연을 거문고에 쏟는다. 줄 끊어진 거문고의 존재는 그냥 아픔만 반주할 뿐 모든 음조는 나무속에 묻혀버렸다.  거부기의 울음소리엔 바다속에 갇힌 모든 사연들이 그대로 연주를 하고 있다.  비행기의 고동소리에는 조상들의 숨결을 담은 바이올린의 아츠러운 연주가 날개에 젖은 그대로 구름의 희롱을 당하고 있다.  당하는 곳마다에는 촉촉한 그리움들이 쌓인다.  설날이다.  가족의 열기로 싸우나를 하고싶은 절절한 마음엔 파아란 잎들이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옆집의 나무는 무성하게 잘도 자라건만 내속의 나무엔 가지마저 찾아볼길이 없었다. 남으로 길게 끊어진 흔적은 그대로 보이건만 드리운 아픔은 모든 나무를 통채로 삼켜버리고 있었다. 바람이 두렵고 비가 두려워서 몸부림을 남긴 유표한 흔적앞에서 새들마저 둥지를 털어간다.  스스로 무너지는 마음을 달래면서 어설프게 널려있는 꼬챙이에 색갈을 올리지만 나약한 힘앞에서 무너지는 어린 마음을 가슴으로 누를길이 없어진다.  옆집의 수도물은 성수나게 잘도 흐르건만 녹이 가득 쓴 끊어진 수도꼭지에는 파아란 이끼가 검푸르게 신음을 흘린다.  메마른 물방들은 갈길을 찾느라 방황하건만 여전히 길은 막혀있었다.  이처럼 좋은 아침에 갈곳도 없었고 오는 길도 없었으니 하얀 벽에 그림을 풀어본다.  층계는 분주하게 동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닫겨진 문은 손잡이가 끊어졌다. 아예 손잡이가 필요없는 존재가 더욱 편하고 아팠다.      풍경아닌 풍경이 설날을 만들건만 시간은 허리띠에 묶이운채 내 몸에 또 하나의 년륜을 그려넣는다. 그처럼 아프게.
18    낡은것은 버릴줄 아는 교원이 되자 댓글:  조회:2268  추천:4  2012-12-11
     조선어가 지구촌에서 점차 인기를 가지게 된지도 어언 몇년이 잘 된다. 이처럼 몸값이 바야흐로 오르는 우리 조선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일부 한족들은 조선어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한낱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저기에서 우리 조선어가 인기를 가지고 자랑스레 울리는 장면들을 목격하느라면 자연 긍지감에 흐렸던 기분도 삽시간에 사라지고 행복이 조용히 마음의 골짜기를 메운다. 동시에 조선민족의 밝은 미래가  서서히 막을 내리며 안겨온다. 이와 동시에 근심도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우리 조선어의 위망이 점차 높아감에 따라 위기감도 없는것은 아니다. 많은 위기감들이 슬그머니 도전을 걸어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성스레 가르치고 깨우친다면 두려울것이 없다. 지금 조선어문은 개편을 거쳐 낡은 울타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대지만 아직도 구석구석들에서는 옛날의 그림자들이 나름대로 허둥대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버려야 할것들을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요즘 우리 조선어문 교원들은 실로 량손에 쥔 떡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감히 자신의 생각대로 엄두도 못내고 그냥 그대로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는 상황이다. 이젠 버릴것들을 마음대로 버리며 나름대로의 인격을 살려 조선어문 교수를 진행해야한다. 문제는 교원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할지 몽롱한것이다. 교수대강대로 교수를 한다해도 어쩐지 늘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스럽고 불안한 정서를 피할길없어한다. 이것이 바로 버려야할것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그냥 낡은것에 미련을 두고 자신을 정지시켜 괴롭히는것이다. 낡은것을 버리지 못하면 새것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단은 먼저 낡은것을 미련없이 확 버려야한다. 무작정 낡은것이라면 아까움이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먼곳에 버려야한다. 그러느라면 자연 새것이 생기는 법이 아닐가?! 문제는 적잖은 교원들이 시험에만 응하다보니 죽은것에만 늘 치우치게된다. 그러느라니 너무도 많은 산것을 죽이기가 일쑤이다. 토하나 받침하나에 이르기까지 미주알 고주알 캐다보니 힘든것은 교원뿐이다. 글쎄 기초지식에 중시를 돌리는것은 부정할수없는 중요한 과업이지만 일정한 기초지식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는 반드시 생활과 교수를 밀접히 결부하면서 살아가는데 힘이 될수있는 지식점에 초점을 맞추고 교수를 조직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존에는 수많은 방법과 수단이 필요한것처럼 교수도 항상 서면지식에만 치우치지말고 생활의 각양각이한 정서속에서 지식을 줏는것도 해볼만한 수업이다.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데서 서면지식이 절대적인 영향을 일으키는것이 아니다. 관건은 그 사람의 잠재력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잠재력은 너무도 놀라운 힘이 되는것이다. 언제가 갑작스레 자신의 삶에 큰 기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삶의 질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조선어문 교수에서 아래와같은 몇개 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버려서 없는것이 절대 거지가 아니다. 소유하고 있는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거지인것이다. 어찌보면 조선어문 교원만큼 구차한 사람은 너무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늘 에 몸과 신경을 쏟다보니 그냥 그 그늘밑에서 세상을 보내기가 일쑤이다.  그냥 소로만 밭가리를 해야만 시름을 놓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할때가 되였다. 부동한 시대에는 부동한 방법과 수단으로 자신을 개변할줄 알아야 한다. 소가 없으면 그 무엇으로도 밭을 갈아야하는 새로운 수단과 방법을 부단히 탐구하면서 기다리지만 말고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조선어문 교원은 생각할줄아는 사람이 먼저 되여야 한다.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여야한다. 어느 한 골짜기로만 무작정 자신을 몰아넣지말고 보다 넓은 대지로 자신을 몰아봄도 너무도 바람직하다. 첫째; 교수를 기계처럼 몰아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선 애들을 내가 다루는 일종의 기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무작정 자신이 지휘관이 되여가지고 기계를 다루려는 헐망한 욕심을 버리고 모든 기계의 설명서랑을 잘 읽어보면서 나름대로의 우세를 발휘하도록 공간을 주어야 한다. 공간을 잃은 기계는 페물에 불과하다. 그런 페물을 운전하는 기사는 구경무엇에 불과할가? 애들의 모든 생각과 사유를 존중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나타낼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 무작정 자신의 생각과 사유를 주장하면서 힘들게 하지말고 가끔은 부질없는 욕심들을 버려보는것도 해볼만한 장사이다.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삶의 공간이 자연 졻아지게 되는법이다. 그러니 애들에게 나름대로의 사유의 공간과 활동의 공간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배움의 진미를 느끼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열심히 배우려는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둘째; 애들을 먹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일부 교원들은 늘 문제의 정답에 욕심이 형편없다. 무조건 자신의 생각대로 답안을 작성해주어야만 시름을 놓고 교단을 떠난다. 실상은 애들을 믿어봄도 교원의 매력이 아닐수 없다. 일부 문제는 애들이 자체로 얼마든지 해결할수 있건만 무조건 자신의 존재를 따르게 하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교수를 진행하느라니 애들도 힘들고 자신도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글쎄 먹여주려는 마음가짐만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도 때와 시가 따로 정해지는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장소도 모르고 무작정 먹이려는 생각은 어딘가 실리에 어긋나는 어리석은 노릇이 되기도 쉽다. 하물며 그 많은 애들에게 골고루 먹여주려는 욕심에 얼마나 큰 기력이 필요할가? 어찌보면 조선어문 교원은 밭을가는 농부의 형상에 너무도 가깝다. 한번 갈고는 어디가 잘 갈리지 않았는가 꼭 다시한번 돌아보고야 시름을 놓는 그런 형상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필자도 조선어문 교원이지만 부정할수없는 현실임을 자인하는 바이다. 이젠 애들을 믿어보면서 꼭 쥐였던 스케줄을 가끔은 느슨하게 풀어볼때가 된것같다는 생각이다. 과감하게 애들을 인정하면서 가끔은 그늘밑에 앉아서 지켜보는것도 조선어문 교원의 고급적인 향수가 아닐가? 셋째; 자아만족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교수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진행하는 노릇이 아니다. 관건은 애들이 만족하는 그런 수업이여야만이 가장 완미한 수업이라고 인정할수가 있다. 가끔은 교원의 만족끝에 애들에게는 수많은 아쉬움이 잠자고 있을지 모른다. 조선어문 자체가 다방면의 해결을 요구하듯이 애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인식과 견해를 피력할수 있도록 해야지 절대로 자신의 만족에 올가미를 걸지 말아야 한다. 아무튼 얄팍한 대답일지라도 부정은 절대로 내세우지 말고 항상 애들로 하여금 자아만족의 순간을 만들게 해야 한다. 그러는 속에서 배움의 향수를 감각하면서 조선어문 신선함도 느끼게 되는것이다. 너무도 의미심장한 말들은 될수록이면 적게 하고 애들이 쉽게 받아 들일수있는 언어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심각한 말 한마디로 애들의 사유에 서리발을 쳐놓을 우려도 생길수있으니 부동한 단계에서 부동한 언어수단이 필요한것이다. 그저 자아감각에만 만족되지말고 가끔은 애들의 만족에 마음을 쏟는것도 교원으로서의 긍지가 아닐가? 넷째; 너무 자신을 자랑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글쎄 애들에게 교원의 신성한 존재를 가르치는것은 나쁜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자랑에 너무 지나치다보면 오히려 인기가 폭락할 우려도 있는것이다. 그러느라면 저도몰래 애들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되는것이다. 항상 애들앞에서 겸손해야지 입을 열면 자신의 자랑부터 늘여놓는 교원이 되여서는 안된다. 가끔 자랑도 할수 있겠지만 순간과 기회에 맞게 간단하면서도 애들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수있는 그런 순간을 만들어야한다. 실상 애들은 말은 없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는것이다. 알고 있는것에 대한 긍정은 오히려 부정이 될 가능성도 없는것은 아니다. 애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고 느끼게 해야지 절대로 자신을 거쳐서 알게 하고 느끼게 하려는 부질없는 욕심을 버려야한다. 한번 알면 마음에 그대로 남고 자꾸 알게되면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되는것이다.  이젠 작은 강에서 개발헤염을 치는 시대가 지난것같다. 보다 넓은 강에서 남들이 모르는 자세를 부단히 탐구하면서 어려움도 두려움도 모두 버리고 새로운 헤염방식을 탐구하는것이 현대 교원들의 신성한 의무가 아닐가?!    조선어가 지구촌에서 점차 인기를 가지게 된지도 어언 몇년이 잘 된다. 이처럼 몸값이 바야흐로 오르는 우리 조선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일부 한족들은 조선어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한낱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저기에서 우리 조선어가 인기를 가지고 자랑스레 울리는 장면들을 목격하느라면 자연 긍지감에 흐렸던 기분도 삽시간에 사라지고 행복이 조용히 마음의 골짜기를 메운다. 동시에 조선민족의 밝은 미래가  서서히 막을 내리며 안겨온다. 이와 동시에 근심도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우리 조선어의 위망이 점차 높아감에 따라 위기감도 없는것은 아니다. 많은 위기감들이 슬그머니 도전을 걸어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성스레 가르치고 깨우친다면 두려울것이 없다. 지금 조선어문은 개편을 거쳐 낡은 울타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대지만 아직도 구석구석들에서는 옛날의 그림자들이 나름대로 허둥대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버려야 할것들을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요즘 우리 조선어문 교원들은 실로 량손에 쥔 떡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감히 자신의 생각대로 엄두도 못내고 그냥 그대로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는 상황이다. 이젠 버릴것들을 마음대로 버리며 나름대로의 인격을 살려 조선어문 교수를 진행해야한다. 문제는 교원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할지 몽롱한것이다. 교수대강대로 교수를 한다해도 어쩐지 늘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스럽고 불안한 정서를 피할길없어한다. 이것이 바로 버려야할것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그냥 낡은것에 미련을 두고 자신을 정지시켜 괴롭히는것이다. 낡은것을 버리지 못하면 새것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단은 먼저 낡은것을 미련없이 확 버려야한다. 무작정 낡은것이라면 아까움이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먼곳에 버려야한다. 그러느라면 자연 새것이 생기는 법이 아닐가?! 문제는 적잖은 교원들이 시험에만 응하다보니 죽은것에만 늘 치우치게된다. 그러느라니 너무도 많은 산것을 죽이기가 일쑤이다. 토하나 받침하나에 이르기까지 미주알 고주알 캐다보니 힘든것은 교원뿐이다. 글쎄 기초지식에 중시를 돌리는것은 부정할수없는 중요한 과업이지만 일정한 기초지식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는 반드시 생활과 교수를 밀접히 결부하면서 살아가는데 힘이 될수있는 지식점에 초점을 맞추고 교수를 조직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존에는 수많은 방법과 수단이 필요한것처럼 교수도 항상 서면지식에만 치우치지말고 생활의 각양각이한 정서속에서 지식을 줏는것도 해볼만한 수업이다.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데서 서면지식이 절대적인 영향을 일으키는것이 아니다. 관건은 그 사람의 잠재력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잠재력은 너무도 놀라운 힘이 되는것이다. 언제가 갑작스레 자신의 삶에 큰 기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삶의 질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조선어문 교수에서 아래와같은 몇개 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버려서 없는것이 절대 거지가 아니다. 소유하고 있는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거지인것이다. 어찌보면 조선어문 교원만큼 구차한 사람은 너무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늘 에 몸과 신경을 쏟다보니 그냥 그 그늘밑에서 세상을 보내기가 일쑤이다.  그냥 소로만 밭가리를 해야만 시름을 놓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할때가 되였다. 부동한 시대에는 부동한 방법과 수단으로 자신을 개변할줄 알아야 한다. 소가 없으면 그 무엇으로도 밭을 갈아야하는 새로운 수단과 방법을 부단히 탐구하면서 기다리지만 말고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조선어문 교원은 생각할줄아는 사람이 먼저 되여야 한다.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여야한다. 어느 한 골짜기로만 무작정 자신을 몰아넣지말고 보다 넓은 대지로 자신을 몰아봄도 너무도 바람직하다. 첫째; 교수를 기계처럼 몰아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선 애들을 내가 다루는 일종의 기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무작정 자신이 지휘관이 되여가지고 기계를 다루려는 헐망한 욕심을 버리고 모든 기계의 설명서랑을 잘 읽어보면서 나름대로의 우세를 발휘하도록 공간을 주어야 한다. 공간을 잃은 기계는 페물에 불과하다. 그런 페물을 운전하는 기사는 구경무엇에 불과할가? 애들의 모든 생각과 사유를 존중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나타낼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 무작정 자신의 생각과 사유를 주장하면서 힘들게 하지말고 가끔은 부질없는 욕심들을 버려보는것도 해볼만한 장사이다.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삶의 공간이 자연 졻아지게 되는법이다. 그러니 애들에게 나름대로의 사유의 공간과 활동의 공간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배움의 진미를 느끼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열심히 배우려는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둘째; 애들을 먹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일부 교원들은 늘 문제의 정답에 욕심이 형편없다. 무조건 자신의 생각대로 답안을 작성해주어야만 시름을 놓고 교단을 떠난다. 실상은 애들을 믿어봄도 교원의 매력이 아닐수 없다. 일부 문제는 애들이 자체로 얼마든지 해결할수 있건만 무조건 자신의 존재를 따르게 하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교수를 진행하느라니 애들도 힘들고 자신도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글쎄 먹여주려는 마음가짐만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도 때와 시가 따로 정해지는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장소도 모르고 무작정 먹이려는 생각은 어딘가 실리에 어긋나는 어리석은 노릇이 되기도 쉽다. 하물며 그 많은 애들에게 골고루 먹여주려는 욕심에 얼마나 큰 기력이 필요할가? 어찌보면 조선어문 교원은 밭을가는 농부의 형상에 너무도 가깝다. 한번 갈고는 어디가 잘 갈리지 않았는가 꼭 다시한번 돌아보고야 시름을 놓는 그런 형상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필자도 조선어문 교원이지만 부정할수없는 현실임을 자인하는 바이다. 이젠 애들을 믿어보면서 꼭 쥐였던 스케줄을 가끔은 느슨하게 풀어볼때가 된것같다는 생각이다. 과감하게 애들을 인정하면서 가끔은 그늘밑에 앉아서 지켜보는것도 조선어문 교원의 고급적인 향수가 아닐가? 셋째; 자아만족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교수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진행하는 노릇이 아니다. 관건은 애들이 만족하는 그런 수업이여야만이 가장 완미한 수업이라고 인정할수가 있다. 가끔은 교원의 만족끝에 애들에게는 수많은 아쉬움이 잠자고 있을지 모른다. 조선어문 자체가 다방면의 해결을 요구하듯이 애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인식과 견해를 피력할수 있도록 해야지 절대로 자신의 만족에 올가미를 걸지 말아야 한다. 아무튼 얄팍한 대답일지라도 부정은 절대로 내세우지 말고 항상 애들로 하여금 자아만족의 순간을 만들게 해야 한다. 그러는 속에서 배움의 향수를 감각하면서 조선어문 신선함도 느끼게 되는것이다. 너무도 의미심장한 말들은 될수록이면 적게 하고 애들이 쉽게 받아 들일수있는 언어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심각한 말 한마디로 애들의 사유에 서리발을 쳐놓을 우려도 생길수있으니 부동한 단계에서 부동한 언어수단이 필요한것이다. 그저 자아감각에만 만족되지말고 가끔은 애들의 만족에 마음을 쏟는것도 교원으로서의 긍지가 아닐가? 넷째; 너무 자신을 자랑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글쎄 애들에게 교원의 신성한 존재를 가르치는것은 나쁜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자랑에 너무 지나치다보면 오히려 인기가 폭락할 우려도 있는것이다. 그러느라면 저도몰래 애들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되는것이다. 항상 애들앞에서 겸손해야지 입을 열면 자신의 자랑부터 늘여놓는 교원이 되여서는 안된다. 가끔 자랑도 할수 있겠지만 순간과 기회에 맞게 간단하면서도 애들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수있는 그런 순간을 만들어야한다. 실상 애들은 말은 없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는것이다. 알고 있는것에 대한 긍정은 오히려 부정이 될 가능성도 없는것은 아니다. 애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고 느끼게 해야지 절대로 자신을 거쳐서 알게 하고 느끼게 하려는 부질없는 욕심을 버려야한다. 한번 알면 마음에 그대로 남고 자꾸 알게되면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되는것이다.  이젠 작은 강에서 개발헤염을 치는 시대가 지난것같다. 보다 넓은 강에서 남들이 모르는 자세를 부단히 탐구하면서 어려움도 두려움도 모두 버리고 새로운 헤염방식을 탐구하는것이 현대 교원들의 신성한 의무가 아닐가?!  
17    만남의 소중함 댓글:  조회:1917  추천:1  2012-11-28
만남의 소중함 리창현 싸늘한 가을이지만 늘 포근하고 따스한 그런 만남이 너무 좋았다. 허물은 언녕 묻어버렸고 믿음과 정성으로 가꾸는 그런 만남이여서 너무너무 편하다 호상간의 존중과 배려 가면이 아닌 진정어린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 그래서 앉는 장소마다에는 웃음이 그칠줄 모른다 누이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형님같은 푸근한 마음으로 우리의 만남엔 래일이 늘 포근하다.
16    교류의 창을 열어라! 댓글:  조회:2141  추천:12  2012-10-25
    무릇 교원이든 부모든지를 막론하고 아이들과의 교류를 떠나서는 신성한 교육의 목적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안겨올 때가 많다. 이처럼 교류가 교육이라는 운전에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에 처해있다는 말이겠다.       요즘 학부모들이 교원을 만나면 보편적으로 하는 첫마디가 바로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고있다는것이다. 어려서는 그렇게 말을 곰상곰상 잘 듣던 아이들이 점차 크면서 말을 듣지 않는것도 역시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어떤 아이가 어려서부터 그냥 부모의 말씀이나 교원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것이 아닐가? 아이들은 점차 커가면서 자신의 생각도 놀랍게 커간다. 그러면서 남의 말을 듣던데로부터 자신의 주장이 생기면서 한번쯤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나갈 준비가 되여있는것이다. 그저 시간의 차이가 좀 있을뿐이다. 이런 현상들은 실상 정상적인데 일부 부모들은 너무 크게 놀라면서 복잡하게 만들군 한다. 결국은 자신만 힘들뿐 아무런 성과도 없다. 날로 커가는 아이들의 생각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의 교류만 따라간다면 가정교육이든 학교교육이든 잘 되여갈것이 아닐가.      이제라도 결핍했던 자식과의 교류에 힘을 써보자는 건의를 제기하는바이다. 학부모들은 마음이 너무 성급한것이 큰 흠이다. 자식의 생각들을 알아볼념은 않고 무작정 자식을 부모의 운전으로 밀고가려는 우둔한 생각들을 이제는 깡그리 집어치웠으면 한다. 우선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면서 미흡한 점들을 옳바르게 인도하는것이 진정 교육의 목적에 도달하는것이다. 시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그냥 한사람으로 만들려는 우둔한 생각도 깔끔히 씻어버리고  이 순간에라도 새로운 부모의 형상을 가꾸어 자식의 곁으로 다가서는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아닐가? 그리고 부질없는 짜증도 슬그머니 한쪽으로 밀쳐놓고 기회만 있으면 아이와 함께 서로 교류의 마당을 가져보는것이 얼마나 좋은 교육인지 모른다. 부모도 반드시 가면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아이와 진정 마음이 통하는 그런 생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저 자신의 욕심은 어둡게 감춰두고 겉으로 아이들과 교류하는척 하는 헐망한 순간을 만들려다가 자칫하면 부모가 먼저 아이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기가 일쑤이니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아이를 얼리려는 부모는 영원히 교육이라는 자루를 쥘수 없다는 도리도 상식적으로 알아둠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진정 아이를 위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면 우선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는 자세로 교류에 들어서야지 몇분도 안돼 음성이 높아가고 분위기가 깨여진다면 아예 시작도 말라는 권고도 함께 해보는 바이다.      실상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부모들과 하고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고 많은지 모른다. 문제는 부모가 아이들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을 쏟기 전에 밀막아버리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예 부모와의 마음의 창을 꽁꽁 닫아버리고만다. 그 순간 가면이라는 무기를 만들어가지고 부모와 재미나는 숨박꼭질을 시작하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은 아이들의 숨박꼭질에 얼리워 세월 가는줄 모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믿어주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문제는 부모들이 자식을 믿어주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아이로만 간주하고있으니 말이다. 부모가 자식을 믿어주지 않는데 부모를 믿어줄 자식도 아마 없는줄로 알고있다. 부모라면 반드시 자식을 굳게 믿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피줄도 믿지 못하면 이 세상에 누구를 믿어야 할지 마음만 무거워진다.       순간순간의 교류는 서로의 감정을 깊이 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시원한 길을 열어주는것이다. 우선은 길부터 통해야 교육이라는 무기를 세워둘 자리가 생기는것이 아닐가? 교육에서 교류는 너무너무도 좋은 무기이다. 서로간에 조용한 교류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해결못할 문제가 또 있으랴?!       무작정 어른의 위치에서 자식을 몰아갈 생각들은 이제 접어두고 여직 교류가 결핍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식과의 알뜰한 교류의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조금은 어색하고 힘들지라도 점차 시간이 감에 따라 교류가 제 자리를 찾는다면 부모로서의 또 하나의 보다 보람찬 성공이 아닐가 하는 권고이기도 하다. 조급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조용한 어조로 서로의 교류를 만들어보자. 사람은 세월을 먹고 크는 존재라면 아이들은 교류를 먹고 보다 훌륭하게 커가는 존재가 아닐가?!         교류의 창을 열어라! 그러면 아이의 미래도 열린다. 부모의 성공도 열린다.      
15    자식과의 소통 어떻게 이룰것인가? 댓글:  조회:1975  추천:1  2012-10-25
           들어가는 말: 목전 조선족 교육의 속성을 두루 살펴보느라면 일면의 소홀함으로 국면이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돌려 세우기 어려운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것이다. 그 주되는 근원은 바로 결손자녀가 늘어나고 교육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으며 서로의 물욕으로는 부유하지만 정신적으로 날로 야위여가는 심성에 끼치는 해를 바르게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부득이 조취를 취하여 최소한 영향을 줄이는것이 목전 우리 조선족교육의 급선무라고 인정한다. –“사랑이 결핍하면 모든것이 망가진다. 물질은 임시일뿐 영구한것이 아니다.” 화제에 대한 재사고:    “좋은 교류는 모든것을 한순간에 개변시킨다”  교류의 핵심: ♥사랑은 교류의 가장 믿음직한 포장돌이다.   물질적인 만족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그건 오직 일종의 만족에 그칠뿐이다. 절대로 사랑이라는 매개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요즘 우리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두루 살펴 보느라면 “소경의 막대질”이 너무 보편적이다. 엄중하게 말하면 교육이 아니라 눈먼 사랑이다. 오직 애들의 만족에 신경을 도사리고 있을뿐이지 애들의 부족점이나 진정으로 바라는것이 구경 무엇인지를 깜깜 모르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에서 금물이 “눈먼 사랑이다”하지만 요즘 애들은 거개가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것이 아니라 할머니나 친적집에 얹혀 살거나 아니면 남의 집에 얹혀 생활과 학습을 이어가고 있는 현황이다. 이러다보니 자연 후견인들은 애들이 무엇보다 잘 먹고 무사하면 최고의 교육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근심없이 흘러내리깐 자연 애들의 진정한 교육을 홀시하고 순간의 기분에 의해 좌우지 되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 교육이라고 론할수 있으랴! 이것을 어찌 후견인으로서의 책임을 원만하게 감당했다고 자부할수 있으랴! 사랑을 떠난 교육은 소경의 막대질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사랑을 구립시킨다해도 그건 서로의 숨박꼭질이뿐이지 아무런 효득도 없으며 더 나아가서 서로의 기편으로밖에 남지 않는 무서운 장난이나 다름이 없음을 그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자연 애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무형의 영향속에서 실속을 잃고 방황하게 되며 때늦은 후회만 저 멀지 않은 언덕위에서 물질의 도가니를 뒤집어 쓴 채 신음을 토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교육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더우기 물질적인 만족이 아님을 후견인으로서는 자아의식이 급선무라는 깨침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여기서 반드시 하나만을 꼭 짚고 넘어가야 겠다. 안 짚고 넘어가면 또 다른 놀라운 결실을 초래할가 걱정스럽다. 바로 애들을 무작정 보도반에 보내는 문제이다. 보도반에 다니는 애들을 두루 살펴보면 학습이나 생활에서 별로 큰 진보를 보이지 않는다. 진보라면 예전보다 숙제의 질이 좀 제고 되였을 뿐이다. 그외에는 남는것이 별로 없다. 글쎄 그 어떤 무형의 제고가 있을런지는 몰라도 현미경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벙어리 랭가슴 앓는 격이 아닐수 없다. 애들 보도반에 보내는 목적이 명확하지 못하다. 그저 오직 숙제 완성을 위해 보낸다면 그건 되려 애들에게 해가 될뿐 도움이 별로 있는것 같지 않다. 숙제란 자기의 힘으로 능히 할수 있을 때라야 진정으로 지식으로 남는데 말이다. 좀은 부질없는 화제 같아서 할말은 많지만 요만큼만 제기하고 생략하련다. 교류의 징검다리: ☺ 믿음은 교류의 징검다리이다.     믿음은 교류의 가장 믿음직한 조수이다. 믿음을 떠난 교육은 가면의 탈이나 다름이 없다. 진정한 믿음이 생길 때라야 교육이 스스로 탄생을 기하는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아예 부질없는 노릇에 불과하다. 그저 교육자와 비교육자의 언어 장난에 힘들 뿐 남는것은 허구함뿐이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가장으로서 자식을 구경 얼마나 믿어주는지 알고 싶다. 진정 자식을 믿어주는 부모라야 교육의 연줄을 잡아쥘 권리를 가졌다고 말할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의 자격증을 지녔다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믿음이라서 무작정 믿음은 역시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믿음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또 다른 어떤 신성한 매개물일 때라야 진정으로 교육이 바르게 서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자식을 진정으로 믿어주는 그런 마음 준비가 무엇보다 소중한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수박 겉할기격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믿어주고 마음으로 다가서는 그런 믿음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인격이 있는 한 우리는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것이다. 세상에 자기 자식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구경 무엇을 믿고 살아 갈가? 자식을 믿지 못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과 동위각이 아닐가 싶다. 이제 라도 자식을 믿어주고 진정으로 믿음으로 가득찬 그런 교육의 망을 열어가야 한다. 교류에서 믿음은 서로의 가장 밝고 깨끗한 뉴대로 다가서면서 보다 좋은 교육의 효과를 달성하게 된다. 관건은 누가 먼저 믿느냐에 따라 그 성공의 지수가 높아간다는 말이겠다.    여기서 각별히 말하고 싶은것은 믿음은 애들의 잠재력 발굴에 그 무엇보다 놀라운 힘으로 다가선다는것이다. 일부 가장들은 너무 쉽게 자식에 대하여 실망의 연줄을 풀어놓는다. 열달이라는 긴긴 잉태도 이겨왔으련만 그 한순간의 어려움으로 자식에 대하여 실망한다는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아닐가하고 질문하고 싶은 충돌이 생긴다. 교육에서 가장 무서운것이 너무 쉬운 실망이다. 무릇 모든 사람들이 실망의 태줄을 풀어놓는다해도 부모로서는 절대로 풀어 놓아서는 안되는것이다. 그리고 부모로서 실망의 태줄을 풀어 놓을 자격이 없거니와 그런 권리도 없는것이다. 례를 들면 전 세계를 놀래운 발명의 왕인 에디슨도 그 당시 선생님들마저 에디슨에 대하여 완전히 실망의 끈을 놓았지만 엄마많은 그 끈을 굳게 잡고 있었다. 만약 그 당시 엄마마저 실망의 노끈을 풀어 놓았다면 아마도 위대한 발명왕이 그저 묻혀버리고 말았을것이다. 이로보아 가장으로서 반드시 자식을 굳게 믿으면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리상을 구상한다면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없을것이라고 믿어보는것마저 너무도 행복하고 행운스러운 일이 아닐가?!     교류의 잔디밭:  ☞ 공간은 교류의 잔디밭이다.   서로의 공간의 서로의 발전에 매우 좋은 게기이다. 다시말하면 공간은 서로가 제고하고 발전하는 편하고 포근한 잔디밭이다. 파아란 잔디의 속삭임같은 그런 교류라야 진정 좋을 결실을 물어오는것이다. 그 공간은 넓을수록 좋은것이고 높을수록 편한것이다. 서로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그런 교류의 장을 장식해가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소중한것이다. 여기서 가장으로서 반드시 명기해야 할것은 애들은 성장하는 과정에 부단히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런 실수를 통하여 보다 훌륭하게 크는것이다.  일단 이런 마음가짐을 갖춘다면 교육은 실상 너무 힘든 일이 아님을 스스로 자각하게 될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제고하고 발전하려면 우선 넓은 공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 공간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호흡도 하고 생각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편안한 기회를 만들게 된다. 실수한 사람에게 될수록이면 질책보다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을 바르게 세울수 있는 기회를 주는거나 다름이 없는 자랑스러운 노릇이다. 어찌보면 많은 애들은 그런 공간의 부족함으로 자신을 바르게 세울 기회마저 잃게 되고 나중에는 막나가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는것이다. 교육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용서이지 꾸짖음이 아님을 한 교육자로서는 명실공히 자각해야 한다. 또한 애들의 실수는 더 크려는 욕망이 로출한 일종의 신호이기도 한것이다. 이로보아 성급함보다는 그들에게 자신을 바르게 세울 공간을 충분히 마련해주는것이 교육자의 몫이 아닐수 없다. 이런 공간은 우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하고 신선해야 한다. 더럽고 슴슴한 그런 공간은 절대로 불허이다. 일단 공간의 분위기가 어지러우면 그 교류도 결곡은 아무런 결실을 가져 오지 못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니 교육자는 반드시 보다 넓은 공간을 보다 편한 공간을 보다 높은 공간을 보다 포근한 공간을 보다 배려하는 공간을 만들기에 서둘러야 하고 비교육자는 반드시 교육자의 건전한 구미에 맞게 스스로 다가서도록 연줄을 풀어 놓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기회는 수시로 다가서는 것이 아님으로 반드시 순간을 잘 기다렸다가 낚아야 한다. 그래야만 생각과 같은 결실을 가져올수 있고 그 결실로 만족과 행복을 맛보게 될것이다. 나오는 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교육은 영원한 주제이다. 이런 주제는 꼭 마치 대기층처럼 지구를 둘러싸고 부단히 자전하면서 진정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참답게 감당하려고 늘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바람직하고 자랑스럽고 행복한것이다. 오늘의 모습에 너무 많은 주름을 만들지 말고 그 주름이 스스로 펴지면서 주름마다에 뭔가 남실거릴 그 때를 기다려보자! 기다림도 역시 하나의 멋지고 자랑찬 교육이 아닐수 없다.   
14    고마움에는 얼룩이 없었다 댓글:  조회:1918  추천:4  2012-09-26
       우리들의 삶에는 언제나 고마움이 양념같은 존재로 풍요로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고마움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우리는 늘 잔잔한 행복을 만들면서 세상살이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간다. 우리들만의 좋은 추억으로 세상을 쌓으면서 밝은 일상에 힘을 더해간다. 요즘에는 늘 고마움에 감동을 만들군한다.    20여년의 교육생애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세울수가 있어서 한편 두렵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하였다. 필자가 사업하는 학교에서 9월달에 흑룡강성 조선어문년회가 있었는데 조선어문교원들이 전업소양전시를 맡아하게 되였다. 그 전시는 다름아닌 과문극을 선보이기로 하였다. 심리소질이 약한 저로서는 지옥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늘 마음은 긴장을 함초롬히 머금고 있었고 두려움은 무섭게 자신을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넣군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몸을 빼려고 하였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열심히 극본을 외우면서 노력하는 동료선생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돌아서는 마음을 막을길이 없었다.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과문극 연출에 몸을 점차 맡기기 시작하였다. 교무주임의 애처로운 모습과 연출의 정성앞에서 나는 결코 최선을 다하여 연출에 마음을 쏟았다. 종래로 많은 사람들앞에 나설 엄두를 갖추지도 못했고 나선다해도 동료선생님들의 공을 한순간에 말아먹을가봐 저으기 걱정은 높아만 갔었다. 하지만 연출과정에  고마움의 끈은 늘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못해도 칭찬의 그 한마디에 점차 신심이 생겼고 그 고마움에 마음은 늘 뜨겁기만 하였다. 이렇게 근 열흘간의 연습을 거쳐 이제 곧 수십명의 손님들앞에서 선보일날이 돌아오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전날밤은 정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하는건 괜찮은데 나 한사람때문에 동료선생님들의 노력이 하루 아침에 나무아비타불이 될가봐 걱정이였다. 하지만 늘 고마움으로 자신을 고무해주고 격려해주는 너무도 고마운분들의 뜨거운 눈길과 마음이 하나의 든든한 포장돌이 되여 나는 장하게 실수없이 이번의 연출을 원만히 결속지었고 형제학교에서 오신 손님들의 절찬을 자아냈다. 실로 나로서는 하늘의 별이라도 딴 격이였다. 들려오는 칭찬속에서 다시금 절실히 느껴지는바가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한구석에는 숱한 고마움의 비줄이 실실히 드리우고 있었다.   그 고마움의 연줄을 곱게 받쳐들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고마움에 보다 큰 고마움을 전달하려는 생각을 마음속깊이에 뿌리를 내렸다. 이처럼 고마운분들의 존재로 나는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커가는 그 자욱마다에는 고마운분들의 고마움이 물씬거림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고마움에는 얼룩이 없음을 오늘 이 순간 다시금 절실히 느끼면서 고마움이야말로 진정 사람의 성장에 너무너무 소중한 존재임을 가슴속깊이에 새겨둔다, 묻어둔다.
13    일기책 갈피속에 묻힌 애들의 비감 댓글:  조회:2703  추천:16  2012-08-13
     매일 애들의 일기책을 피개하면서 무너지는 마음을 달랠길이 없었다. 오리오리 피발처럼 늘어선 애들의 비통한 부르짖음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기만 한다. 아래 다년간 애들의 일기책 갈피속에 묻힌 비통한 흐느낌을 적어본다. 학생A:……엄마가 곁을 떠난지도 8년이다. 이젠 엄마의 얼굴마저 희미해진다. 내 기억에 엄마가 점점 지워지기전에 엄마가 어서 나의 곁으로 다가왔으면 얼마나 좋으랴! 매일 매일 기다리는 나의 그림자에는 슬픔만 가득찬다. 학생B: ……밖에서는 아침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린다. 엄마생각에 눈물이 비물처럼 흐른다. 엄마는 지금쯤 날 생각하고 있는걸가? 엄마가 모질게 보고 싶다. 내 마음속에는 엄마에 대한 얄미움이 점점 커만간다. 엄마가 이젠 싫어진다. 학생C: ……요즘 공부가 정말 싫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와서 즐겁게 손잡고 간다. 나는 어깨를 푹 떨구고 발끝만 쳐다보면서 맥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설음이 내 마음속에 쌓인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공부도 참 신나겠는데!  오늘 밤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다. 학생D: ……선생님께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하셨다. 즉 이루고 싶은 꿈을 써라고 했다. 다른 애들은 뭐가 되였으면 좋겠다고 썼다. 나는 엄마와 함께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썼더니 선생님은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셨다. 눈물이 가슴을 적시며 흐른다. 학생E:……엄마의 손이 무척 그립다. 아플 때 만져주면 금시 아프지 않던 엄마의 손이 너무 그립다. 엄마의 손이 지금쯤은 어디에 있을가? 눈물이 기억을 말끔히 씻어낸다. 학생F: ……선생님께서 엄마의 발을 씻어드리라는 숙제를 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눈물만 흘렸다. 엄마를 애먹이던 일들이 가슴에 박힌다. 엄마의 발을 열심히 씻어드리고 싶다. 하지만 엄마가 곁에 없다. 학생G: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엄마베개를 들고 침대로 갔다. 할머니께서 그건 왜 가져왔냐고 묻는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했더니 돌아앉으시며 눈물을 흘린다. 학생H: ……엄마의 욕이 그립다. 엄마의 매도 무척 그립다. 이젠 엄마가 없으니 모든것이 그립기만 하다. 엄마는 나를 버리고 떠난지 9년이나 된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그래도 엄마가 보고싶다. 학생 L:…..내가 태여나서 한달도 안되여 엄마가 나와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달아났다고 할아버지께서 이를 갈며 말씀하신다. 아빠가 매일 술병을 들고 다녀서란다. 이제 엄마가 나를 찾아와도 절대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학생M: ......엄마가 곁에 없으니 밥도 맛이 없고 잠도 잘수가 없다. 공부도 하기 싫고 모든것이 다 귀찮기만 하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금시 훌륭하게 클것같다.   매일 애들의 아픈 마음을 읽으면서 일기책 갈피속에 묻힌 애들의 비통한 마음은 날로 높아만 간다. 애들의 빈 마음을 구경 무엇으로 채워줄지 안타까움은 저 밤하늘의 별찌앞에서 소원으로 바뀐다.
12    구경 누굴 위해서 일가?! 댓글:  조회:2158  추천:51  2012-08-13
    요즘 조선족애들의 생활의 현장을 두루 살펴보느라면 기가 막힐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말 그대로 엉망이다. 공부도 생활도 모두 헐망하기 짝이없다. 정말 곁에서 지켜보기마저 구차할 정도이기도 하다. 엄마가 곁에 있는 아이들을 보느라면 희망과 미래가 보이지만 엄마가 곁에 없는 아이들을 지켜보느라면 마음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생활에서 보면 개인위생부터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엄마가 곁에 있을 적과 엄마가 곁에 없는 이 순간은 그 대비가 전혀 말이 아니다. 한 학생애가 너무도 한심하기에 엄마가 한국에서 걸어온 전화에 이야기를 했더니 그저 안타까와 할뿐이지 들어와서 애를 지키겠다는 기미같은것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애들이 일단 생활이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공부도 당금 따라서 망태기가 되기 싶상이다. 정말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말이 아니다. 애매한 애들이 정말 불쌍하기 짝이없다. 게다가 요즘 조선족애들은 젊은 부모가 곁에서 지키는 프로수는 총수의 10프로 정도이다. 나머지는 모두가 년로하신 할머니들이다. 자신의 몸도 가꾸기에 귀찮은데 언제 손자애의 몸까지 깔끔하게 관리할수 있을가? 가끔 부모들이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오면 많은 말을 하지만 내가 그중에서 하는 한마디가 늘 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자식을 키우는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부라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들은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지금 이렇게 아글타글 고생하는것이 결국은 자식을 위한다는것이다. 이런 말을 들을적마다 정말 리해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데도 그냥 그렇다고 고집쓰는 우리 조선족들을 지켜보면 안타깝기만하다. 요즘 조선족학교는 정말 가르침보다 교육이 더 힘들다. 부모가 곁에 없는 집 애들은 물질적으로 아무런 근심도 없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애들의 의사에 백분에 백으로 따르다보니 애들은 이상하게 성장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 나쁜것에 대한 호기심만 잔뜩 커가고 공부에는 전혀 뒤전으로 다가선다. 더 엄중한것은 이런 애들은 거개가 1학년부터 보도반에 다니면서 숙제같은것을 완성한다. 할머니들은 가르칠수없다는 핑게로 그저 보도반에 보내놓으면 임무완성을 착실하게 하는 줄로 알고 있다. 이러다보니 이런 애들은 과당시간에 근본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찾아 물어보았더니 보다반에 가면 다 안다는것이다. 이런 애가 이제 성장의 길은 구경 얼마나 믿음직할가? 의심스럽다. 안타깝다. 정말 요즘 우리 부모들은 애들을 위하는것인가? 아니면 저들의 삶을 위한것인지? 저들은 저들대로 좋아서 돌아가고 애들은 애들대로 운전없이 마음대로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그 책임은 구경 누가 져야 할가? 20여년의 담임교원 생애에 어느 한 학생도 비뚤지 말고 바른 길로 나가길 간절하게 기대하는 마음이지만 이렇게 많은 운전을 어찌 담임교원 한사람의 힘으로 될수 있을가? 애들이 불쌍하다. 이제 가정을 이끌고 먼 려정을 해야 할 애들이 이렇게 성장한다면 그 결실은 구경 어떠할가?  
11    선택은 가치이지 만족이 아니다 댓글:  조회:2069  추천:2  2012-08-02
        우리의 삶은 곧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하면 오늘의 선택이 래일의 가치를 위한것인가 아니면 래일의 후회를 만드는가가 자못 중요한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선택이 옳바른지 아니면 그른지 하는것은 그 누구도 가늠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존재로 되는것이다. 여기서 가장 핵이 되는것이 바로 사사로이 눈앞의 욕심을 버리고 장래성이라는 매개물에 초점을 맞춘다면 선택의 정확률은 높아가게 되는것이다. 가장 간단한 사례를 들어본다면 가히 리해가 설수도 있는것이다. 한 처녀가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자못 심각하기도 하다. 바로 지금 두 남자가 선택의 존재로 나타났다. 한 남자는 가정배경도 좋고 자연조건도 우월하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은 별로이다. 다른 한 남자는 지금 눈앞의 가정배경이 그닥잖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의 우월성은 보여지고 있다. 이럴 경우에 대다수 처녀들은 부모의 동원아래에서 전자를 선택하기 쉽상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데 있는것이다. 하지만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난뒤에 전자는 직장도 없고 그저 이럭저럭 대충 밥벌이를 하면서 살아간다. 절대다수가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여러모로 후원을 받는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보잘것없던 후자가 차츰 능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인생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착실하게 완성해나간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처녀에게는 행복이라는 매개물이 아닌 후회라는 매개물이 다가서게 된다. 그런대로 받아들이면 괜찮으련만 그런 후회를 감추려고 모지름을 쓰다보면 인생은 점점 어렵고 힘든 존재로 다가서게 되는것이다.  여기서 선택은 가치이지 눈앞의 만족이 아님을 우리는 가히 리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너무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함에 있어서 반드시 초점을 자래성에 두어야 하지 절대로 눈앞의 리익에 두지 말아야 한다. 선택을 어느 위치에 놓느냐에 따라서 행복의 지수와  후회의 지수가 부동하게 다가서기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의 바람직한 자세를 갖추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선택이라는 한낱 소중한 과제를 인생의 바른 위치에 올려놓고 가늠질함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가치이지 눈앞의 만족이 아니다.
10    스스로 구하기 댓글:  조회:2106  추천:2  2012-07-24
                                                                                                    스스로 구한다는것은 총명을 의미하는 말이다. 까치가 물병의 물을 마이기 위해 골똘히 생각한끝에 조약돌을 물어다가 물병에 넣는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장한 모습이 언녕 우리들에게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다가서기도 하였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알고 구하는 모습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도전임을 우리는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생각처럼 그렇게 완미하지 않다보니 저도몰래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특히 삶을 살다보면  그렇지가 아니함을 절실히 느끼게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경험하게 된다. 초심같아서는 뭐든 다 이루고말것 같지만 현실은 그처럼 참혹함을 감안하면서부터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죽이기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죽이기 연습을 한다는 자체가 바로 삶을 베여버린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사랑에서도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던 “영원히”라는 단어를 슬그머니 감추기 시작하였다. 실상 이 세상에 영원히란 의미가 근본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뭐 영원히 널 사랑한다든가, 영원히 네 곁을 지켜준다던가, 영원히 너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다 바친다던가, 영원히 네 생명을 더 중히 여긴다든가 하는 등등의 허망한 말들이 많고 많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해보느라면 이런 말들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가?! 궁금스럽기만하다.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우리들도 사랑을 할적엔 말끝마다 영원히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장난을 했는지 모른다. 이제 생각하느라면 안해보기에 미안함도 얼마나 큰지 모른다. 요즘 세월에 이런 말이 류행처럼 돌고 있었다.    “한 남자가 평생에 녀자 한사람과 살면 속물이고 둘이면 인물이고 셋이면 동물이다.” 로인님들이 들으시면 당장에서 지팡이를 휘드를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어렵잖게 볼수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속물이 되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마음에 드는 아낙네의 뒤를 따르면서 기회를 엿보느 사람들도 기실은 적지 않다는 말이다. 글쎄 서로 헤여져있는 환경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리해는 가지만 그래도 너그럽게 절제함이 보기가 좋지 않을가 하는 건의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점은 남이 그런다고 따라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남의 흉내내기를 좋아하는것이 가장 큰 흠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죽이는 가장 허줄한 방법이다. 남은 남대로 살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작업이 목전 우리가 해야 할 과제임을 우리는 한시 급히 절제의 바줄을 틀어쥐고 옳바른 언덕을 향해 먼지 묻은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퍼붓는 소나기에 말끔히 씻어보는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까지 죽이기에 용기를 냈다면 이제라도 구하기에 최선을 몰부어야 한다. 우리는 매우 연약한 존재이다. 이처럼 연약한 존재를 죽이기에 신나지 말고 이젠 구해야 할 때가 온것같다. 온것같은것이 아니라 이미 와서 우리의 삶의 창을 노크하고 있다. 그런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고 나의것으로 만들어가는것이 자신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을 구하는 작업만큼 자랑스럽고 성스러운 일이 없는것이다. 모든 어색함과 부끄러움은 깡그리 버리고 이제라도 자신을 구하는 실제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함이 없는 그런 삶을  영위해가는 모습으로 다가선다면 우리들의 삶의 현장은 더더욱 아름다울것이다.    자신을 구하는것이 결국은 타인을 구하는 신성한 작업이요, 타인을 구하는것은 결국 자신을 구하는 성스러운 직책임을 우리는 가슴치며 자부감을 느껴야 한다. 모든 놀음을 멀리하고 이제라도 자신을 구하는 자랑찬 인생의 멜로디를 연주해보자! 크게 웃을 가정의 찬란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9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누님"을 보면서 댓글:  조회:1918  추천:0  2012-07-24
       옹근 16년을 함께 머리를 맞대고 허물없이 사업해온 누님같은 동료선생이 중병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소문을 접하고 한참은 얼마나 슬프고 아팠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저 스쳐지나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다면 다소 안위라도 되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무너뜨리는 유선암이라는 청천벽력의 진단앞에서 아마도 사람이라면 거개가 무너지는수밖에 없을것이다. 제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이처럼 무서운 진단앞에서는 지탱이란 너무도 어려운 일일것이다. 요즘에는 글쎄 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놀라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들 하지 않는가! 다행히도 초기에 발견을 하였기에 병세는 생각처럼 엄중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의사의 말을 접하면서 무너지던 마음도 다소 온정을 취할수가 있었다. 하지만 소리없이 다가서는 설음과 아픔은 금할길이 없었다. 나와 마누라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차안에서 내내 "누님"을 만나서 뭐라고 안위를 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어서 뻐스가 병원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을뿐이였다. 애타는 마음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어느새 우리는 병원에 이르렀다. 이리저리 물어보고나서 마침 병실로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돌리는 순간 병을 손에 들고 힘들게 걸어오시는 "누님"을 발견하였다. 순간 아픔이 가슴을 여미면서 울컥 치밀어올랐다. 며칠전까지만 하여도 펀펀하던 사람이 오늘 내 앞에 선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고 불쌍하였다. 우리는 손을 부여잡고 병실로 모셨다. 해쓱해진 얼굴에는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띄우느라 애쓰는 "누님"을 지켜보면서 속으로는 언녕 비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억지로 웃는 모습으로 신심과 용기를 선물하기에 바삐 보냈다. 텅빈 병실에는 슬픔과 그리움이 언녕 물씬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을 하였기에 병세가 생각보다 많이 괜찮다면서 자기로 안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너무 무정하다는 집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해본적도 없이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주변의 사람들을 보살펴주는 그런 "누님"이 아니였던가! 법이 없이도 살아갈수있으리만큼 그처럼 선량하고 착하던 "누님"이 아니였던가! 누구네 집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발을 벗고 나서던 "누님"이 아니였던가! 애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누님"이 아니였던가! 남편을 외국에 보내놓고 혼자의 몸으로 두 딸을 모두 대학에 보내놓고 이제 향수라는 언덕을 좀 오를가 하니 하나님도 무정하게 이런 아픔을 만드시다니?! 지지리도 .나쁜 사람들에게 이런 벌을 선물하였다면 다소 마음의 평행이라도 잡을수 있으련만 평생을 이처럼 착하고 어질게 살아온 "누님"에게 이런 고통을 안긴다는것이 전혀 마음의 평행을 잡을수가 없었다. "누님"은 우리와 함께 많은 말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절대로 건강에 소홀히 하지 말고 제때에 병원을 찾아 보라고 몇번이고 당부를 해왔다. 그러는 "누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듯하엿다. 그래도 "누님"의 정신상태가 엄청 좋아서 다행이였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이제는 더욱 건강하게 더욱 보람차게 매일을 살아갈 생각을 허물없이 내보였다. 아마도 사람은 앓고 보면 모든것이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법인가 싶었다. 우리는 수많은 걱정과 아픔을 묻어둔채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멀리서 손짓하는 "누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남겨둔채. 이제 "누님"의 건강이 회복되고 우리 모두가 웃으면서 새날을 맞이할 "누님"의 새 아침을 기대해본다. 매일 매일 "누님"의 건강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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