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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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채마전의 숨결 [수필] 댓글:  조회:630  추천:0  2014-09-12
채마전의 숨결 [수필]  □ 림금산           나에게는 언제부터 갖고싶어하던 채마전이 생겼다. 옆집 로인님이 88세가 되니깐 더 가꿀 힘이 모자라다면서 나한테 선물하셨다. 낚시할줄도 모르고 마작 같은거나 골프 같은데는 문외한인 나한테 이는 천하 그 무엇보다 더 좋은 굉장한 선물이였다. 너무도 감사하여 술을 사갖고 인사를 갖더니 이젠 술도 못드시고 지어 고추가루 같은것도 못잡수신다고 하셨다. 헌데 얼굴은 희고 보얗고 하여간 좋은 모습이였다. 피끗 보기에는 70 정도가 돼보였다. 퇴직하여 여직껏 25년간 채마전을 다루었다는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강건하신지 모르겠다.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역전부근 철길 건너에 300여평방메터나 되는 채마전을 가꾸셨단다. 헌데 점점 힘에 부치여 한뙈기 두뙈기 이웃들에게 선사하다보니 나중엔 나에게도 차려지게 되였다. 너무 크지도 않고 또 너무 작지도 않은  백평방메터는 실히 될 밭이였다. 로인님은 밭을 나한테 넘겨주면서 “림선생이 그 밭을 다뤄내겠나?”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밭을 넘겨받은 그날부터 가슴이 둥-둥 부풀어올라 어떻게 하나 로인님의 기대와 성의를 저버리지 않고 잘 가꿔보리라 작심했다. 남들이 채마전을 가꾸는걸 볼 때면 늘 부러운 눈길을 던지군 하면서 나도 퇴직하면 밭뙈기나 잘 다뤄봤으면 하던 나였는데 갓 쉰다섯에 일찍이도 차례진 밭이였으니깐. 헌데 말이 쉽지 가꾸기란 정말 쉽지가 않았다. 화학비료를 한줌도 안주고 순 유기농으로 만든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붕어나 잉어 같은걸 사다 먹고는 그 밸을 딴것이라든지 묵어있던 밥이라든지, 쌀뜨물 등을 푹 썩여서는 밭에 가져다 내군 하였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달씩 그 노릇을 하자니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10여가지 남새를 심어놓고도 어느곳에 뭘 심었던지가 기억 안 나서 심은 자리에 또 심는다든지 이미 심어놓은걸 매버린다든지 …또 열심히 심었어도 빈자리가 많이 나왔다. 날씨가 차츰 푸르러지면서 남새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니 너무 신기해서 가슴이 활랑거렸지만 진짜 가관이였다. 무질서하게 돋아오르는것이 참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였다. 자주 가 김도 매주고 풀도 뽑고 했지만 기타 로인들이 다루는 밭보다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출근하면서 하다보니 전문으로 하는 로인들보다는 못할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했다. 남새보다 풀이 점차 더 많아지고 어느것이 남새이고 어느것이 풀인지 가려보기조차 힘든 곳도 여러군데 있었다. 그랬어도 땅은 속일줄 모른다. 심어놓은 자리마다 우썩우썩 잘도 자라올라 6월부터 7월 사이에는 거의 사흘에 한번꼴로 달려가는 채마전엔 고추며 가지며 상추, 오이, 열콩, 호박 등이 쉴새없이 열려서 미처 뜯어올새없이 또 온 밭을 꽈악 채워주군 했다. 일상에 분주히 돌아치다 한주일만 못 가보면 벌써 어떤 가지나 호박 같은건 땅에 닿아 썩기도 했다. 잡풀도 너무 기승스레 자라올라 한번 뽑아도 언제 뽑았던가싶게 또 무럭무럭 자라올랐다. 나중엔 뽑은 풀마저 던질 자리가 없었다.밭에 미안했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옆집들의 채마전은 질서정연하고 풀대 하나 없이 깔끔한데 비해 나의 채마전엔 온통 잡풀천지이고 거기다가 땅이 선물한 각종 남새들을 제때에 받아주지도 못해 죄스러웠다. 온 여름 남새 한근 안사고 먹어댔지만 남새는 줄어들줄 몰랐다. 오- 이런 재미에 모두들 남새를 가꾸는구나 생각하면서 힘들어도 힘든줄 모르겠고 채마전에서 돌아올 때면 온몸에 싱그런 식물들의 향기를 듬뿍 안고 돌아오는 멋이 너무나 좋았다. 그때마다 나는 송나라의 저명한 문인 소식과 당나라 명시인 백거이가 생각나군 했다. 당송 8대가의 한분이며 서예, 미술, 시와 사에 능한 소식은 후세에 소동파로 그 이름 널리 전해지고있다. 그의 호를 동파거사라 부르게 된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원풍 2년(공원 1079년) 12월에 소식은 황주로 좌천되였는데 생활이 몹시 빈곤하였다. 당시 황주의 통판으로 있던 마정경이란 사람이 주부(州府)에서 얻어온 묵밭 50무를 그한테 주어 다루게 하였다. 그 밭이 바로 황주의 동쪽비탈(东坡)에 자리하고있었다. 그래서 소식은 그해 봄날에 그곳에 설당을 짓고 그 이름을 “동파설당(东坡雪堂)”이라고 하였다. 또 후에는 자신이 그렇게 우러르던 백거이거사가 역시 자기처럼 황주에 좌천되여갔을 때 그곳 동쪽비탈에 화초를 가꾸고 나무를 심으며 시를 지어 읊었던걸 생각하면서 자신을 “동파거사”라고 이름하였다. 이 시각 나의 채마전도 단순히 채마전의 의미를 썩 넘어서 소동파나 백거이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어 수확은 엄청 크다. 잘 다루지 못한 거칠지만 그래도 알찬 열매를 많이도 나한테 선물해주는 나의 채마전에서 소동파의 숨결과 백거이의 “동파를 거닐며”, “동파의 화초수목들을 리별하며” 등을 읊조리며 페부깊이 스며드는 싱그런 냄새속에 푹 잠겨버린다… 연변일보 2014년 8월 7일    
4    [실화] 내가 만난 박성화 댓글:  조회:967  추천:0  2014-08-01
소용돌이와도 같은 그 많고 많은 인파속에서 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아니, 내가 찾은것이 아니라 그녀가 유표하게 인파의 수면우로 솟아올라왔다. 하아얀 배꽃잎같은 그녀, 요즘 돈내풍기는 사람들한테서는 너무나도 찾기힘든 아주 다른 타입인 그녀, 나는 그녀와 조용히 마주앉았다. 나는 그 한잎의 하아얀 배꽃잎과 마주앉았다, 헌데 그 하아얀 배꽃잎이 점점 나의 몸에 옮아오더니 나의 가슴에 닿아왔고 나의 령혼에 까지 은은한 향기로 파고들줄이야…나중엔 아예 만무과원의 눈바다같은 하아얀 배꽃바다로 나를 깊숙히 함몰시켰다…     연변고객들의 마음속에 은은히 향기를 풍겨온 이제는 그 이름만 들어도 정다운 , 사람들은 백년돌솥밥이란 말만 들어도 그 구수하고 향기로우며 목젖을 따뜻히 데워주고 가슴을 사랑으로 올올히 녹여주며 끝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우리 계레의 맛, 민족의 맛에 살풋이 젖어든다.     백년돌솥밥, 그 향기론 들판의 한 가운데 소박하고 은은한 그, 박성화양이 차분히 서있다. 하아얀 배꽃잎처럼 수면우에 봉긋이 솟아오른다. 어찌보면 수태를 머금은 이팔 소녀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글냄새가 풍겨오르는 서생같고 어찌보면 시골집 안방의 푹 익은 가마목 새색시같은 다 층차 다 각도의 그가 지금 수면우에 부드럽게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연변의 첫 과수농장인 룡정시 대소과수농장에서 동년시절을 보낸 그한테는 늘 사과향기가 넘쳐흘렀다. 의 노래를 랄랄라 부르며 공부를 착실하게 해온 그녀는 룡정시고급중학에 입학했고 후에는 또 장춘에 있는  길림재정무역학원에 날아갔다. 일이 될라고 그랬던지 마침 함께 룡정고중에 다니던 상급학년생 련인도 장춘에 있는 같은 대학에서 만났다. 둘은 꿈을 위한 학문도 다지고 래일의 단란한 가정을 위한 약속도 꽤고소하게 속삭였다. 푸르른 남호공원의 벤취에서 둘은 서로서로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을 두근거렸다.     사랑도 무르익어갈무렵, 그들은 함께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당시로 말하면 너나가 모두 부러워할 자치주 물자국, 자치주 인민은행에 각각 일터를 잡게 되였다. 단란한 가정, 남부럽잖은 일터…이제 그녀한테는 욕념이란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다. 더구나 그녀의 일욕심과 착실함으로 그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과장자리에 까지 발탁됐다. 하지만 그녀로 말하면 이것도 너무나 늦은 속도였다.   (내가 대소과수농장에서 나와 중점고중으로, 성소재지에 있는 대학교로 가고 졸업하여 안온한 일터에 배치받고 가정을 이루어 남편을 섬기고 …이게 나의 인생인가? 인생의 종점이 바로 요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게 인생이 아니다.)그녀는 저 일망무제한 만무과원을 꿈꾸었고 그 흐드러진 꽃잎바다, 꽃잎폭포를 꿈꾼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가? 인생의 가치란 구경 어디에 있을가?   그녀는 결코 이에 만족할 그녀가 아니였다. 박성화(朴星花), 그 이름 자체가 하늘의 별꽃인데 별꽃은 무수한 빛을 우주공간에 발사한다. 구경 나의 몸에 얼마마한 빛이 있을가? 나는 이 빛을 한껏 우주공간 그 광막한 천공에 발사하련다. 빛이 없는 인생은 슴슴한 맹물과도 같거늘 나는 바다의 등대처럼, 천공의 별처럼 빛을 발사하련다. 내 몸을 빛으로 갈아내여 온 천하만방에 그 빛을 휘뿌리리라…그녀는 입을 옥물었다.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주물자국, 그녀는 이 철밥통을 헌신짝처럼 내치고 당당하게 찬바람부는 거리로 걸어나왔다.. 사실 그당시 철밥통을 버린다는건 왼간한 담략이 없이는 안되는 일이지만…   친척친우들 한테서 모아온 땀절은 17만원, 이제 이 꿔온 17만원이 그의 명줄이고 그의 인생줄이였다. 그는 처음엔 광명가의 어느 작으마한 골목에 을 세운다, 반년좌우는 손님하나 없다, 어떻게 할것인가? 속은 바질바질, 마음은 안절부절, 잠도 안오지 밥맛도 없다…당시로는 꽤나 큰 돈인 17만원, 음식점이라고 버젓이 벌려놓으면 고객은 밀려오고 돈은 쌓여지는게 아니였다. 아예 문을 닫아버리자! 그녀는 맥을 활- 놓고 싶었다. 헌데 이때라 바로 이런때 고객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먼저는 잡지사의 시누이가 손님들을 데리고 왔다, 이튿날엔 신문사의 아저씨가 단위분들을 모시고 왔다. 동창생들도 가끔씩 들러 매상을 올려주었다, 시동생이 또 력사연구소분들을 모시고 왔다. 이래 저래 차츰 단골이 생기고 음식이 맛스럽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하면서 작으마한 이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을 이루기가 일쑤다, 연길시에서 고객들은 하면 를 련발하였다.       그녀는 3년후인 2003년에 을 꾸려 모은 자금과 경험으로 그 이름도 후덕하고 탄탄한 을 처음으로 앉혔다, , 과연 나의 돌솥밥이 백년을 끌고 나갈가? 과연 백년의 우리 민족 음식전통이 그 대를 이어갈가? 하많은 서양음식과 신식음식이 줄을 쳐 내달아오는 때, 가장 민족적이고 풍토적인 돌솥밥이 이 땅에 자리를 틀고 앉을가? 또 한차례의 심한 고험이 그녀를 시험치고있다. 그녀는 밥의 맛에 연구에 연구를 깊이 해갔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주방칸에서 여러가지 돌솥밥을 수십차 손수 해본다. 색갈은 고우나 맛은 없다, 색은 그닥잖으나 맛은 톡-친다, 색과 맛이 다 괜찮다, 아니, 근데 탄내가 난다. 그을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남편은 돌솥밥만 먹는다고 미간을 또 찡그린다. 그의 고심과 로력적 땀방울이 염글어 빛을 발한다. 새로 개업한 밥점이 생각밖에 잘 되여갔다. 돌솥밥에 맛을 익힌 단골들이 점차 줄을 섰다 너무 작은 감이 났다. 기업을 확대하자, 그녀는 두번째 을 공원가에 앉혔다. 역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녀는 세번째 을 고려촌 맞은켠에 앉혔다. 역시 대박이였다.    기업이 커져갈수록 그녀는 지식이 필요했다, 새로운 시장조사, 새로운 경제리념, 새로운 경쟁력 대응…그녀는 그 드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여 국내 국외로 공부하러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녀는 북경, 상해 등 지에 달려가 유명대학 교수들을 초청하여 새로운 경영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과학기술대학에 달려가 ceo 학과를 연수받으면서 또 그 기회에 많은 경험다분한 기업가들과 횡적 련계를 달았고 자기보다 우수한 기업인들 한테서 허심하게 배우면서 자신을 착실히 다져가고 재충전하여 거듭나기를 반복한다. 이것도 부족했다. 그녀는 또 매년 몇차씩 한국으로 일본으로 날면서 동양음식문화의 최신정보와 최고의 맥을 자주자주 진맥했다. 그러는 가운데서 새로운7가지의 메뉴가 줄달아 나왔다…      지금쯤 연길시에서 이름있는 브랜드 음식문화로 부상한 , 그녀는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시에서 진달래광장 서쪽에 새로 아리랑민속거리를 앉혔다. 이 거리에는 몽땅 명브랜드 음식업만 들어갈수 있단다. 진달래냉면, 풍모뀀점, …그 가운데 당당하게 800여평방되는 이 보란듯이 태질하고 앉았다. 헌데 이상하리만치 인가가 적은 치벽한 곳인 미식거리에, 그것도 아직은 영업이 시작도 채안된 거리에서 그녀의 이 더운 김을 모락모락 서려올리며 많은 고객들을 불러들인다. 해마다 300명한테 주어지게 하는 취업의 장으로, 연변의 납세대호로, 직원들한테 집과 자가용을 갖추도록 하려는 등 경영리념, 참으로 그녀의 작은 가슴은 벅차오르고만 있다…연변의 한 시인은 이 광경을 들여다 보고 이렇게 읊조렸다.     살짝 훔쳐보는 눈빛이 창가에서 빛납니다 따뜻한 사랑이 당신 앞에 앉아있습니다 한술 두술 넘겨도 채울수 없는 당신의 맛 향기 밴녁을 넘어서 천년으로 뜨겁게 피여 오릅니다 숫가락 위에 백년이 저물어갑니다 세월의 백년언약 바로 당신 앞에 손을 내밉니다.     허나 겉보기에는 차분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박성화는 이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연길사람들만이 향수하는 이 백년의 향을 전 연변인민들한테 고스란히 보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유관부문에 신청하고 련계를 달았더니 수십집에서 전화가 오고 메일이 오고 사람을 파견해왔다. 지금은 연변의 8개현시에 모두 가맹점들이 별무리처럼 뿌려져 백년의 쌀밥향기 타래쳐 오른다. 헌데 모두가 그렇게 고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장사가 흥성하고 민족의 향이 서리쳐 오른단다.   박성화는 이에 또 만족할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또다시 한걸음 성큼 크게 내디뎠다. 전국에 우리의 백년 쌀밥향기를 보내주리라 그는 아름다운 해변도시 청도에 백년의 향기를 보내주었다. 이제도 심양, 대련, 북경, 상해,광주 등등 많은 곳에 우리의 향기를 보내주자…박성화의 은은한 눈빛은 또다시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다. 사회에서 오는 지지와 성원에 박성화양은 따뜻이 화답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의 마음을 정성껏 담아 불우이웃이나 빈곤학생, 조선족기업가협회, 경로원의 로인님들, 가두의 사업…등등에 수십만원을 헤아리는 정성을 보내주기도 했다… 하아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만무과원, 꽃을 따라 꿀벌은 붕-붕- 날아든다. 수십차의 전화가 날아들고 수백편의 메일이 날아들고 수천의 마음들이 날아온다. 박성화의 쌀밥향기는 더욱 무르녹아 그 맛에 맛을 더한다. 말없이 일을 내미는 성화양은 말속에 말을 감추고 감춤속에 안으로 내밀하게 무르익어간다. (2008), (2012), (2013), 연변청년련합회 상무리사, 연변주조선족전통음식협회상무리사, 연길시ceo구락부 부회장, 연변기업가협회 부비서장…꽃밭이던 과수원에 이젠 주렁주렁 과일들이 달려 바람에 설레인다. 그의 돌솥밥도 더욱 구수한 향기를 만방에 전한다…   밥은 말이 없습니다 맛이 말입니다 향기가 말입니다 밥은 가슴 없습니다 뜨거움이 가슴입니다 숨결입니다 말이 많은 세월에 말이 없는것은 산입니다 님입니다 백년을 살아 맛이 말을 합니다 천년향이 말을 합니다 오늘도 어느 골목 누비며 님을 부르는 내 사랑입니다 겨울 골목길 녹이며 불러주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입니다 한 돌솥 넘기면 다시금 당당한 고향 아들로  나섭니다 백년을 녹이고 천년을 사는 돌솥밥은 우리 사랑입니다.                                    사과의 맛은 상큼하고 향기로우며 청신하고 깔끔하다. 사과를 씹으면 싹-싹 씹는 소리까지 맛망울을 돋군다. 돌솥밥도 구수하고 향긋하고 은은하다. 씹으면 부드러우면서 담백하고 어딘가 밥으로는 조금 쫄깃한 맛이랄가 하여튼 독특한 우리 음식맛이 온 입안을 감돌다가 온 마음을 뿌듯이 채워올린다. 맛의 말이 입말을 삼켜버린다. 박성화의 말수적은 향기랄가 늘 은은한 그녀의 맛, 그 맛이 곧 백년의 맛이요 박성화만이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고향의 맛 사과의 향, 돌솥의 향이리라…
3    [수필] 렬차속의 미녀 댓글:  조회:667  추천:1  2014-08-01
기자사업을 시작해서 얼마 안되던 때의 일이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의 일이겠다… 도문-북경행렬차에 몸을 던졌는데 렬차안엔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온통 사람천지다.  장춘역을 지나니 모두 하품이 나오기 시작했고 피곤기가 갈마들어 시들어갔다. 온 차바곤은 생기라곤 없고 차체는 거의 죽은 뱀이 그냥 꾸물거리며 기여가는상 싶다…  심양역에서 한 25-30세쯤 되여보이는 미모의 녀인이 우리 차바곤에 올랐다. 사람들이 너무많아 앉을 자리는커녕 설자리조차 거의 없는데 그녀가 미니스커트를 따악 받쳐입고 우리옆에 다가와 멈춰섰다.  그녀의 몸과 머리에선 진한 향수냄새가 가득 풍겨나와 주위의 오염된 공기를 세탁해주고 있었다. 하아얀 신다리까지 미끈하게 올리신은 스타킹과 두귀에 달랑거리는 귀걸이며 더우기 호수같이 찰랑이는 눈동자는 온 차바곤을 환히 비춰주었다.  줄곧 내앞자리에 앉아 끄떡끄떡 졸고있던 한 사십대의 사나이가 깨여나더니 푸접좋게 일어나 그녀한테 자리를 권하는것이였다. 그분도 아마 이 천하절색인 처녀가 그냥 서있는것이 못마땅하다고 생각되였던 모양이다.  피곤에 몰리고 로독에 주눅이 들던 려객들이 그녀의 출현으로 하여 차츰 기분이 피여나기 시작했다. 지독한 쌈지담배도 그녀앞에선 말아물기 점직해하는 려객이 있는가하면 자기의 흩어진 자세를 바로 잡느라 어색하게 움직이는 치들도 있었다.  서있던 그녀가 앉으니 앉은 자세 또한 별멋이다. 진짜 선녀가 내려앉은것 같다. 복장모덜들은  서있는것도 멋지지만 걷는 자세나 지어 엉뎅이를 삐딱거리는것까지 아름다운것과 같은 리치이리라.  여기서 피끗 저쪽에서 피끗 꽃같은 그 얼굴을 감상한다. 한번 피끗 보고는 그냥 눈감고 오래오래 그 꽃맛을 새김질하는이가 있는가 하면 좀 수준이 낮은치들과 뻔뻔스런 치들은 지어5분내지 10분까지도 남들의 어깨너머로 그냥 퀭-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하건만 그녀는 도고하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오래오래 꽃같은 얼굴에 부드런 빛만을 달고 있는게 고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사건이 생겼다. 그녀가 귀걸이 하나를 살짝 뽑아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그만 부주의로 떨궈버렸다. 몇천원은 잘될것 같은 귀중품이니깐 그녀는 저으기 당황해했다. 주위사람들이 하나 둘 자기의 의자밑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누구든 그 귀걸이를 감히 자기가 주어가지려는 기색은 없었다. 이 아름다운 녀인을 위해 저그나마 자기들의 성의를 보이고 싶어하는 낌새였다. 이 경우 만약 다른 그 어떤 불청객이 이렇게 귀걸이를 떨구었다면 서로 찾아주기는커녕 임자가 찾는것마저 짜증낼것이다. 허나 이 녀왕앞에선 누구도 유순한 지원자의 손길을 내미는게 퍼그나 흥미로왔다.  바로 내옆에 앉은 나그네가 자기의 의자밑 멀리에 반짝거리는걸 발견하고는 환성을 올렸다. 뿐만아니라 그녀를 눌러 앉히고 자기가 손수 허리를 깊이 구부려 손을 뻗쳐서는 그 귀여운 귀걸이를 짚어내여 옷소매에다 살살 문질러 그녀에게 공손히 바치는것이였다.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우며 하고 머리를 까땍인다.  두어시간만에 처음 뿜어낸 그녀의 음성, 실로 사과같이 맛있는 사근사근한 음성이다…  미인이 웃고있는 렬차는 화기애애하다. 미인이 많은 민족은 행복하다. 미인을 존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자는 진짜 멋진 남자다.  뿡- 렬차는 미인을 싣고 평화를 싣고 동북평원을 쭉-가르며 화북평원에 들어선다…    
2    [수필] 옥천행 댓글:  조회:406  추천:0  2014-08-01
 바곤이 여섯개밖에 안달린 작은 렬차가 옥천역에 도착하니 옥천역 자그마한 건물에 “명시 “향수”의 고향입니다.” 라는 그리 크지않은 현수막 글발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려보자- 이번까지 세번째로 오는 곳이지만 그래도 이곳이 바로 내가 그토록 그리던 옥천땅, 대시인 정지용님의 고향이 여서 올때마다 새로운 감수를 받아안게 되니 말이다!) 나는 청주에서 일하는 동생을 만나러 함안에서 “시조경창대회”행사가 끝나는 길로 상행차를 잡아탔지만 결국 동생이 있는 청주먼저 옥천땅에 내려버렸다. 깨끗한 려객휴식실을  빠져나오니 역광장 남쪽으로 치우쳐 조용한 “정지용시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자를 보니 2003년에 세워진 시비여서 그런지 그리 물이 낡지않았고 깨끗하고 우아한 멋이 다분히 풍기였다. 옥천읍쪽으로 향한 남쪽면엔 동시 “할아버지”가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고 역전을 마주한 면엔 명시 “고향”이 새겨져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힌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을 읽으면서 나는 어쩐지 좀 쓸쓸한 분위기에 차분히 말려들었다.  그렇다 고향이라고 찾아왔어도 그 색동꿈 곱던 오색찬연한 고향일수가 없고 스산하고 망가진 동네일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태를 묻고 이역만리 넘나들다 그리워 달려오던 고향임은 숨길수 없고 자나깨나 베개머리에선 고향기슭을 누볏음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리라. 생가로 가는길엔 촉촉히 싸락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옥천의 비를 맞으면서 마음까지 촉촉히 적셨다. 생가는 3년전 보던 모습 그대로인데 삽작문이 반쯤 열려있고 웃방문이 활짝 열려있어 마치도 지용님께서 나더러 어서 오라고 부르시는것 같았다. 생가로부터 “정지용문학관”으로 가는 소로길은 온통 짚부스러기에 묻혀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촉촉히 내리다 보니 나의 신발엔 짚부스레기들이 가득 게발렸다. 문학관 정문앞에서 나는 신에 게발린 짚을 다 떨어버리고 정중히 문을 열고 문학관에 들어섰다. 나젊은 남성접대원 두명이 달려와서 반가히 맞아주었다. 나는 신을 벗고 끌신을 갈아신은다음 먼저 정지용님 동상앞에 가서 꾸벅 90도 경례를 드리고 다시 접대원실에 들어섰다. 나는 중국에서 올때부터 혹시나 해서 준비해온 “중국조선족소년보”를 꺼내서 접대원한테 정중히 드렸다. 그날 우리 신문엔 “정지용문학관”을 상세하게 소개한 나의 글이 실려있었던 것이다. 접대원은 아주 고맙게 우리 신문을 넘겨받아서는 유심히 들여다 보는것이였다. 그리곤 향기롭고 따뜻한 록차를 가져왔다. 조금후 다른 접대원이 증정본으로 갖만들었다는 “정지용시선집”을 선물했다. 받아보니 정지용님의 동시들도 거기에 실려있어 나는 더 기뻤다. 여러해 문학편집을 해오면서도 나는 정지용님의 동시들을 우리 신문에 소개하지 못하여 늘 민망한 마음을 안고있던 차라서. 문학관을 자세히 돌아보면서 나는 다시한번 지용님의 시세계에 포근히 잠겨버렸다. 문학관내에는 나외에 또 지식인인듯한 늙은 부부가 이쪽저쪽 거닐면서 사진자료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를 더욱 기쁘게 한것은 내가 지용문학상을 타서 찍은 나의 수상시집도 진렬대에 정연히 놓여있었다… 나는 시낭송실에 들어가서 이어폰을 귀에 걸고 목청돋우어 “향수”랑 읊으면서 오래만에 시예술의 향연에 포-옥 젖어 온몸을 시흥으로 가뿐히 샤워하였다… 내가 알고있는 원옥천군문화원장 박효근님을 찾아따난것은 그날 오후였다. 골프련습장을 꾸리고 있는 박원장댁에까지 찾아가니 원장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셨다. 나는 중국서 갖고갔던 흰술한병과 조선명태를 인사로 내여놓고 박원장님이 차례주는 술상을 마주하고 긴 회포를 풀었다... 자유시장으로 가니 무우, 홍시, 배추 등이 우리 연변과 별반 차이없이 팔리고 있었다. 상냥한 얼굴을한 아줌마들이 곰살궂게 굴었다. 나는 팥죽집에 들어가 2천원을 내고 팥죽한그릇 맛보았는데 그렇게 향기로울수가 없었다. 저녁엔 또 옥천역앞에 있는 보리밥집에 들어가 보리밥에 된장국을 맛나게 먹었다. 진짜 조종의 음식맛(순맛) 그대로여서 뼈속으로 우리맛을 느껴봤다. 청주에 있는 “동양일보”에 전화를 넣으니 조철호 회장님께서 함께 진천군에 있는 조명희시비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문학을 즐기는 나의 동생도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너무 좋다고 하셨다. 편집 실장 유영선님이랑 함께 간단다. 보고싶었던 얼굴들이다. 나는 지용님의 고향을 떠나는 마음이 퍼그나 서운했지만 또 포석님의 생가에 안길걸 생각하니 마음이 또다시 설레이기 시작했다…
1    내가 좋아하는 일 댓글:  조회:1051  추천:1  2013-06-28
내가 좋아하는 일 한국의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선생의 수필을 좋아했다. 그의 수필집 《수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란 수필이 있는데 나는 한때 그 수필에 반해 그 수필을 거의 외우다싶이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오늘 여기에 수필을 써 올리자고보니 그 수필 제목이 생각나 나도 한번 “내가 좋아하는 일”이란 제목으로 감히 글을 써보고파 이렇게 제목을 달아보았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참으로 많았다. 스케트 타기를 즐겨서 젊은 시절 한때는 현겨울철운동회에까지 선수로 참가한적 있다. 그것도 속도스케트선수가 아니라 호케이선수로 말이다. 물론 후보로 참가하긴 했지만… 또 등산도 좋아하는 나는 산악회에 참가하여 련속 3년간 산을 실컷 오른적도 있다. 연길 도심에서부터 걸어서 모아산 정상(그때는 모아산으로 오르는 길도 없었다)까지 오르기도 했고 연길 도심에서 출발하여 마반산 정상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뻐스타고 석문에 가서 오봉산이란 산에 올라 다섯 봉우리를 모두 점령한적도 있고 유수천에서 걸어서 차굴로 빠져나와 보원의 절벽에 오른적도 있고 룡정의 대포산, 소화룡의 산들, 천보산 중계탑이 있는 산, 도문의 일광산 그리고 뾰족산 등에 자주 올랐었다. 나는 또 음식을 무지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토산물을 특별히 좋아했다. 나는 곰취쌈, 고사리채, 고사리찌개, 김치, 절인 오리알, 돼지간볶음, 찰떡 등을 좋아하는데 그것도 산에서 직접 뜯은 곰취랑 고사리랑, 직접 캐낸 산더덕이랑 민들레랑, 직접 뜯은 참치랑 우정금이랑 닥지싹이랑을 특별히 좋아한다. 모두부를 너무 좋아하고 콩장, 콩죽, 콩물, 초두부 등 콩으로 만드것이면 다 좋아한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만든걸 특별히 좋아한다. 된장, 고추장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 지난 일요일, 25선을 타고 태암까지 가서 고사리랑 있음직한 산기슭을 3시간 정도 돌면서 고사리, 기름고비, 우정금, 함박꽃대, 고추나물, 참취 등을 거의 다섯근 정도 뜯어왔다.그걸 데쳐서는 매일 무쳐먹었는데 한주일째 이어졌다. 지난해 나는 서시장에 가서 전문 조선물건을 파는 곳에서 140원을 주고 손매돌을 사다가 자주 콩장이랑 초두부랑 모두부랑 해먹는다. 지난 달에만도 벌써 네번이나 초두부를 해먹었다. 조선족으로 태여나 순 우리 음식의 고유한 맛을 좋아한다. 우리 음식은 담백하고 정갈하고 맵싸하고 톡 쏘는 맛이 있기도 해 감칠맛이 더 난다. 그리고 우리 음식은 자연의 원맛을 그대로 살려서 좋다. 김치도 그렇고 여러가지 야채무침도 그렇고…돼지고기도 수육으로 만들어 마늘간장에 찍어 먹으면 제일 고소하고 원맛 그대로여서 좋아한다. 더덕무침, 고사리무침, 콩나물무침, 달래무침, 도라지무침, 파전, 야채전, 감자전 등등 대부분 경우 원맛을 살리면서 얼큰하고 거뿐한 그 맛이다… 나는 또 뭐나 흰걸 좋아한다. 더덕이나 도라지나 흰술이나 하얀 쌀밥이나 찰떡이나 송편, 만두기나 설기떡이나 두부나 다가 흰색갈이 많다. 이불안도 하얗고 빨래도 하얗게 말쑥하고 앞치마도 하얀 색을 쓰기 좋아하고 집도 하얀 회칠을 한 벽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흰것으로 상징되는 우리 백의민족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어느 시인이 자기는 순 조선토종이라고 하더니만 아마 나도 토종이여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좋아하는게 많다. 헌데 따지고보니 많이는 우리 민족의것을 좋아하는것 같다. 고로 나는 이 위대한 민족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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