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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마전의 숨결 [수필]
□ 림금산
나에게는 언제부터 갖고싶어하던 채마전이 생겼다. 옆집 로인님이 88세가 되니깐 더 가꿀 힘이 모자라다면서 나한테 선물하셨다. 낚시할줄도 모르고 마작 같은거나 골프 같은데는 문외한인 나한테 이는 천하 그 무엇보다 더 좋은 굉장한 선물이였다. 너무도 감사하여 술을 사갖고 인사를 갖더니 이젠 술도 못드시고 지어 고추가루 같은것도 못잡수신다고 하셨다. 헌데 얼굴은 희고 보얗고 하여간 좋은 모습이였다. 피끗 보기에는 70 정도가 돼보였다. 퇴직하여 여직껏 25년간 채마전을 다루었다는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강건하신지 모르겠다.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역전부근 철길 건너에 300여평방메터나 되는 채마전을 가꾸셨단다. 헌데 점점 힘에 부치여 한뙈기 두뙈기 이웃들에게 선사하다보니 나중엔 나에게도 차려지게 되였다.
너무 크지도 않고 또 너무 작지도 않은 백평방메터는 실히 될 밭이였다. 로인님은 밭을 나한테 넘겨주면서 “림선생이 그 밭을 다뤄내겠나?”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밭을 넘겨받은 그날부터 가슴이 둥-둥 부풀어올라 어떻게 하나 로인님의 기대와 성의를 저버리지 않고 잘 가꿔보리라 작심했다. 남들이 채마전을 가꾸는걸 볼 때면 늘 부러운 눈길을 던지군 하면서 나도 퇴직하면 밭뙈기나 잘 다뤄봤으면 하던 나였는데 갓 쉰다섯에 일찍이도 차례진 밭이였으니깐.
헌데 말이 쉽지 가꾸기란 정말 쉽지가 않았다. 화학비료를 한줌도 안주고 순 유기농으로 만든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붕어나 잉어 같은걸 사다 먹고는 그 밸을 딴것이라든지 묵어있던 밥이라든지, 쌀뜨물 등을 푹 썩여서는 밭에 가져다 내군 하였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달씩 그 노릇을 하자니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10여가지 남새를 심어놓고도 어느곳에 뭘 심었던지가 기억 안 나서 심은 자리에 또 심는다든지 이미 심어놓은걸 매버린다든지 …또 열심히 심었어도 빈자리가 많이 나왔다.
날씨가 차츰 푸르러지면서 남새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니 너무 신기해서 가슴이 활랑거렸지만 진짜 가관이였다. 무질서하게 돋아오르는것이 참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였다. 자주 가 김도 매주고 풀도 뽑고 했지만 기타 로인들이 다루는 밭보다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출근하면서 하다보니 전문으로 하는 로인들보다는 못할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했다. 남새보다 풀이 점차 더 많아지고 어느것이 남새이고 어느것이 풀인지 가려보기조차 힘든 곳도 여러군데 있었다. 그랬어도 땅은 속일줄 모른다. 심어놓은 자리마다 우썩우썩 잘도 자라올라 6월부터 7월 사이에는 거의 사흘에 한번꼴로 달려가는 채마전엔 고추며 가지며 상추, 오이, 열콩, 호박 등이 쉴새없이 열려서 미처 뜯어올새없이 또 온 밭을 꽈악 채워주군 했다.
일상에 분주히 돌아치다 한주일만 못 가보면 벌써 어떤 가지나 호박 같은건 땅에 닿아 썩기도 했다. 잡풀도 너무 기승스레 자라올라 한번 뽑아도 언제 뽑았던가싶게 또 무럭무럭 자라올랐다. 나중엔 뽑은 풀마저 던질 자리가 없었다.밭에 미안했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옆집들의 채마전은 질서정연하고 풀대 하나 없이 깔끔한데 비해 나의 채마전엔 온통 잡풀천지이고 거기다가 땅이 선물한 각종 남새들을 제때에 받아주지도 못해 죄스러웠다.
온 여름 남새 한근 안사고 먹어댔지만 남새는 줄어들줄 몰랐다. 오- 이런 재미에 모두들 남새를 가꾸는구나 생각하면서 힘들어도 힘든줄 모르겠고 채마전에서 돌아올 때면 온몸에 싱그런 식물들의 향기를 듬뿍 안고 돌아오는 멋이 너무나 좋았다. 그때마다 나는 송나라의 저명한 문인 소식과 당나라 명시인 백거이가 생각나군 했다.
당송 8대가의 한분이며 서예, 미술, 시와 사에 능한 소식은 후세에 소동파로 그 이름 널리 전해지고있다. 그의 호를 동파거사라 부르게 된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원풍 2년(공원 1079년) 12월에 소식은 황주로 좌천되였는데 생활이 몹시 빈곤하였다. 당시 황주의 통판으로 있던 마정경이란 사람이 주부(州府)에서 얻어온 묵밭 50무를 그한테 주어 다루게 하였다. 그 밭이 바로 황주의 동쪽비탈(东坡)에 자리하고있었다. 그래서 소식은 그해 봄날에 그곳에 설당을 짓고 그 이름을 “동파설당(东坡雪堂)”이라고 하였다. 또 후에는 자신이 그렇게 우러르던 백거이거사가 역시 자기처럼 황주에 좌천되여갔을 때 그곳 동쪽비탈에 화초를 가꾸고 나무를 심으며 시를 지어 읊었던걸 생각하면서 자신을 “동파거사”라고 이름하였다.
이 시각 나의 채마전도 단순히 채마전의 의미를 썩 넘어서 소동파나 백거이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어 수확은 엄청 크다. 잘 다루지 못한 거칠지만 그래도 알찬 열매를 많이도 나한테 선물해주는 나의 채마전에서 소동파의 숨결과 백거이의 “동파를 거닐며”, “동파의 화초수목들을 리별하며” 등을 읊조리며 페부깊이 스며드는 싱그런 냄새속에 푹 잠겨버린다…
연변일보 2014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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