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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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끄러움... 댓글:  조회:1442  추천:4  2012-01-30
  연길의 공공뻐스는 기존의 소형에서 새로운 중형(?) 뻐스로 바뀌었다. 1월 현재까지 모든 선로가 그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뻐스에 타보면 알겠지만, 자리수는 여전히 적다.   며칠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할머니 한분이 어렵게 뻐스에 올르셨다. 량손에는 짐이 들려있었고 추운 날씨에 옷도 많이 껴입은 관계로 거동이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이럴때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또 이럴때에 어떤 마음씨 고운 분이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권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날따라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모든 이의 눈길을 집중시킨것은 곱상하게 생긴 젊은 녀성이였다. 그 녀성은 사람들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리자 약간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눈길을 창밖에 돌렸다. 그리고 내내 미동도 안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예절이 없는 젊은이라는 비판이 막 쏟아져 나올것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나 그 녀성이 좀 아니꼬왔다. 뻐스안은 조용했다.   그리고 몇개 정거장을 지났을가, 그 녀성이 일어섰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것도 좀 심하게...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그 녀성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차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채 아무 말도 없었다.   다들 무엇을 생각했을가?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 그 녀성을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서 자리를 내주지 못한것을 스스로 부끄러워 했을가, 아니면 상황도 모른채 남을 탓한 자신의 경홀함을 원망했을가?    뻐스를 타면 그 작은 공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집약적으로 연출될때가 많다. 자그마한 욕심과 욕망이 절제되지 못하고 그대로 적라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오늘도 내 모습을 돌아본다.  
3    왜 나부터인가? 댓글:  조회:1825  추천:15  2011-06-24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볼때 그 문제의 근본 모순이 내적 요인인가 외적 요인인가를 따지게 됩니다. 대개 우리는 객관환경을 탓하는것에 익숙해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돌아보기보다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면 문제 해결의 근본에 다다를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야기가 좀 어렵게 시작됐습니다. 제가 이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것이 며칠 안됐기 때문에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는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저의 글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긴것 같아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어떤 분이 <과학적인 비판관>이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하셨는데, 좋은 주장입니다. <과학적인 비판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짐작을 해본다면 사람과 사람간에 비방이나 인격에 대한 모독이 없는 건전한 비판이 설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것 같네요. 또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 역시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론제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왜 나부터인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부연설명해보고 싶습니다.   하나, <과학적인 비판관>이 정착된 사회의 선결 조건은, 나 자신이 바로 서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가 빠져있는 세상 담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부터 잘하려는 진지한 자세와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 더불어 함께 노력합시다~라는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는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잘 안되는 일은 절대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것이 <선진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자주 듣지요. 일년 가도 책 한권 읽지 않는 부모나 교원이 자녀와 학생들에게 공부 잘하라, 책 많이 읽으라고 해서 그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효과를 볼수 있을가? 이신작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둘, 서로 다른 생각을 자유 혹은 개방적이라는 리유로 모두 다 말할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보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와 개방이라는건 나의 사고, 행동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그것 이전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할때에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비판의식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가 하는 점도 한번쯤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상대방에게 충분히 설득되지 못할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보았을겁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점은 여러분도 공감하실겁니다. 내가 하는 말이 좋은 효과를 보게 하기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나의 말이 타인의 자존심이나 기분을 상하게 할수 있다면 삼가해야 하는것이 또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가요?   셋, 말이란 -아-가 다르고, -어-가 다릅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좋게 표현해주면 비판도 칭찬처럼 들릴수 있습니다. 나를 진심으로 위해서 하는 말이구나, 나를 존중하면서 하는 말이구나 하고 기분 좋게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칭찬을 한다고 해도 말투가 곱지 않으면 비판처럼 꼬여서 들릴수도 있습니다. 사람 기분이라는게 그런거 아니던가요?   <과학적인 비판관>이 정착된 사회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비판을 조금 더 순화해서 표현하는 노력이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좀 더 <기분좋게>, <점잖게>, <우아하게> 대화를 해봅시다.   총적으로, 서로 생각하고 있는바가 많이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가장 바라고 싶은 점은, 글의 주제(핵심)에 대한 이견이 있을시에는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개개인의 의견을 개진할수 있지만, 글속의 핵심이 아닌 지엽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핵심론제로 삼아 크게 비약하거나 문제삼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런건 정말 말 그대로 지엽적인것으로 보고, <적절하지 않은것 같다>는 식으로만 살짝 짚어줘도 글을 쓴 사람은 다 알아들을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글쓴이의 기본 뜻과 취지는 동의하면서도 지엽적인것으로 자꾸 말이 오가는건 정말 정력소모라고 보아집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얻어가야 하는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밀려오는데 불필요한 공론으로 웹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가요?   다 함께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좋은 대화를 통해 좋은 생각들을 길러올릴수 있기 바랍니다.
2    너나 잘 하세요~ 댓글:  조회:2564  추천:17  2011-06-22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가 어려워짐을 느낀다. 전에는 쉽게 터져나왔던 <이건 왜 이래?>, <넌 왜 그것밖에 못해?> 등 객관환경과 타인에 대한 비난이 이제는 쉽지 않아졌다는 이야기다. 어릴적에 많이 들어왔던, <살다보니 그렇게 되더라>는 어른들의 변명도 요즘 곧 잘 공감하고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나 역시 잘못할때가 있고 그래서 타인의 잘못에 대해 좀 더 관용을 베푸는것이 마땅하다. 그런 리유로 현명한 사람들은, 남을 향한 한 손가락을 보기에 앞서 나머지 네 손가락은 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충고한다. 몇년전 한국에서 히트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명한 한마디가 유행어로 된다. <너나 잘 하세요~> 나에게 향한 그 누군가의 비난에 사람은 다들 한번씩 마음속으로 <너나 잘해!>라는 말을 웨치고 있다. 주인공 이영애는 좀 더 <신사적>으로, 그리고 좀 더 <시니컬>하게 그런 비난을 맞받아쳤을 뿐이다. 최근 삼성과 애플이 표절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에 중국의 한 IT전문 포털사이트는 <삼성의 표절병은 이미 중독수준>이라는 보도를 냈다. 이에 외국의  네티즌들은 <그건 중국이 할 말은 아닌것 같은데…>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할때에도 자격이 요청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안하느니만 못할 뿐만 아니라 괜한 웃음거리가 된다. 내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무슨 상관이랴! 라는 식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바보스러운 발상이라 할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웃음거리를 유발하는 그런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 나나 잘하자. 나부터 잘하자. 최소한 이런 마음이라도 있어야 남을 향한 나의 질타가 겸손함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서 조금 더 순하게 상대방에게 전달될수 있지 않을가!
1    다시 돌아보는 일본 쓰나미 댓글:  조회:1511  추천:34  2011-06-09
   과거의 일본, 그러면 내 머리속에는 대개 안좋은 기억들로 도배돼있다.  현재의 일본, 그러면 내 머리속에는 눈부신 발전과 그 세계에 대한 미묘한 동경이 오버랩돼있다.      나는 일본어도 배운적이 없고, 일본에 가본적은 더더욱 없다. 일본 국적을 가진 친구 한명 없고, 책을 통해서 배운 짧은 일본에 대한 지식외에 일본에 대해 아는게 전무하다. 그런 내가 이렇듯 긴 시간 동안 일본국민과 일본을 깊이 생각해본적은 전에 없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고요한 오후 일본 해변가 도시를 강타한 진도 9.0의 대지진이 몰고온 쓰나미는 1만 1천명을 넘는 피해자(사망자, 실종자)를 냈다. 일본 열도에 닥친 쓰나미는 전세계를 경악시켰고, 그런 재해속에서 보여준 일본국민들의 질서의식은 다시 한번 세계를 경악시켰다.    한 언론은 일본의 절제된 시민의식은 -인류정신의 진화-라고까지 표현했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 세계 종말이 온다고 할때, 우리 모두의 모습이 지금의 일본인들 모습과 같았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수천년 재난이 끊이지 않았던 땅에서 살면서 생득적으로 터득한 그리고 후천적으로 훈련받은 그들의 재해 대처 정신은 가히 놀랄만한 수준이였다.  대개 그 정도의 피해앞에서 인간은 이성을 잃기 마련이고 참혹한 현장은 아비규환으로 눈뜨고 차마 보기 어렵게 되는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혈육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도 절규가 없는 그들의 침착한 모습은 조금은 인간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도 했지만 고도로 된 절제와 이성적인 반응은 전사회에 닥친 비극을 최소화하고 하루 빨리 안정을 되찾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됐음에 틀림없다.   쓰나미 이후, 일본산 기저귀를 경쟁적으로 사들인 홍콩, 한국, 대만의 애기어머니들과 중국을 발칵 뒤집은 <소금파동>을 돌아보면 사뭇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고 우리 또한 느리기는 하지만, 현재에 멈춰있지 않음에 감사한다. 과거에 지은 죄값을 받는다, 잘코사니야! 라는 식의 생각없이 웨치는 사람에 대해 질타하는 사회분위기가 한결같았고, 재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과거를 들먹이는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지배적이였다. 어제는 얼굴 붉히는 사이였을지라도 남에게 닥친 어려움을 몰라라 하지 않고 앞다투어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반인륜적이고 나 또한 언제 어떻게 재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역지사지의 감정이 우리를 조금 성숙하게 만든것 같다.    우리 지구는 아직도 어떤 곳은 내전에 시름시름 앓고 있고, 어떤 곳은 기아에 허덕이고, 또 어떤 곳은 열악한 정치환경에 로출돼 있다. 하지만 세계는 또 서로 보듬으며 진정 하나가 되어가려고 화합의 몸짓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우리 기억속에서 옅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피해지역의 일본국민들은 고난의 련속일것이다. 아무쪼록 일본 국민 모두가 이번 재앙에서 보여준 침착함을 잃지 말고 복구사업에 전력할수 있기를 두손 모아 기원한다. 아울러 세계 모든 인민들이 지혜를 모아 자연재해를 줄여갈수 있는 기술들이 나날이 업그레이드 될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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