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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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추모글] 내가 만난 오무라 마스오 선생님 (오기활) 댓글:  조회:798  추천:0  2023-02-22
지난 년말에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서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교수가 김학철 선생님의 소설을 번역 출판하여 요즘에 출판기념회를 한다는데 본인은 불참 한답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무라 선생님의 겸손은 비록 여러모로 들었지만 당신의 저서 출판 기념회에마저 불참한다고 하니 겸손이 너무나 지나치지 않은가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런데 요즘에 알고 보니 선생님의 건강 상황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전에 오무라 선생님이 병환으로 1월 5일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뒤따라 1월 15일에 향년 89세로 타계하셨다는 급작스러운 부고에 필자는 무턱대고 무정한 코로나를 성토할 뿐이다.    “윤동주문학과 동아세아의 미래적 가치” 국제학술대회 현장 오무라 선생님은 일본의 중국문학, 조선문학 연구학자이며 평론가, 번역가이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지금부터 꼭 5년 전이다. 2018년 2월 3일에 아들의 안내로 일본 릿교대학(立教大学)에서 진행한 “윤동주문학과 동아세아의 미래적 가치”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이다. 그 국제학술대회에 오무라 교수가 사모님을 모시고 참석하였다. 곁군의 소개로 우리 부자간을 만난 선생님은 자애롭게 실눈 웃음을 지으시며 우리의 손을  잡고 기뻐하셨다.  선채로 서로 수인사를 마치고 케이오대학에서 종신 교수로 근무하는 아들이 자기의 저서를 교수님께 드리니 미리 준비가 있은 듯 오무라 선생님도 “윤동주와 한국문학”(저자 오무라), ”윤동주평전”(저자 송우혜)이란  두툼한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이어서 나도 본 국제학술회에 참가차로 준비했던 2016년에 윤동주 여동생 윤혜옥, 오형범 부부를 취재했던 길림신문기사 두 편을 선생님께 드렸다. 기사는 윤혜옥, 오형범 노부부(83세 동갑)가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진행하는 윤동주기념비 낙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연길에 들렀을 때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두 분은 당년 83세 동갑) 그 자리에서 기사를 읽어본 사모님은 기사에 나온 오형범 씨가 결혼하여 3일만에 가족들이 세운 「시인 윤동주 묘비」 낙성행사에 참가한 일, 화룡에서 살다가 1948년 6월에 한국 서울대학에서 공부하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의 형님이 쓴 시집(하늘과 바람, 별과 시 총 19편)을 가져오라는 편지를 받고 윤동주시집(노트책)과 윤동주 사진첩을 가지고 조선 원산을 거쳐 6개월만인 1948년 12월 3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정말 생동하고  인상적이라고 하였다.  그날 우리는 행사장과 점심 식사 장소, 커피숍에서  줄곧 오무라 교수님 내외분과 자리를 같이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첫 화두는 당연히 윤동주였다. 내가 선생님께 “오무라 교수님은 세월의 행간에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찾아내 세상에 알리고 시인의 고향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윤동주 연구자이다.”는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의 기사를 곁들었더니 오무라 선생님은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나는 오무라 선생님이 주신 “윤동주와 한국문학”(563페지)을 두루 펼치다가 한국 서울대학 김윤식 교수(문학평론가)가 이 책을 평론한 한 단락의 글에 눈길을 멈추었다. “우리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사적(事跡)을 발굴 조사한 지구상에서 최초의 연구가로 저자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본인이라는 당시로는 썩 유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이  저자가 윤동주의 유고 육필을 조사, 검토한 지구상에서 최초의 연구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종의 토를 달 독자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사실은 강조되어 마땅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실질적 엄밀성을 체득한 연구자의 자세, 노력 및 생동적 성실성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업적은 아니었을 터이다. 특히 경이로운 것은 탐구자로서의 저자의 이러한  열정 및 그 밀도의 지속성이 아닌가 한다.” 이 단락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으며 나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사랑하는 일본의 문학거인과 자리를 함께 한 오늘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다음의 화제는 “교수님이 어찌하여 조선족과 그렇게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습니까?”는 나의 질문이었다. 이에 선생님은 얼굴에 인자한 웃음꽃을 피우며 지난 과정을  몇가지로 나누어 간약하여 말씀 하셨다.  - 나는 사회주의 중국이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 년대에 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한 것을 계기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져 중국어와 중국문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1957년에 대학원에 들어감과 함께 조선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중국문학을 전공한 기초에서 조선반도의 문학에 대한 연구를 거쳐 중국 조선족문학연구까지 60여년을 정진하였다. -1985년도에 연변대학에서 1년간 재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연변과의 인연을 맺고 30년 넘게 연변과 중국조선족 지성인들과 끈끈한 감정과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다. 그 다음 화제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 선생님이었다. 오무라 선생님은 김학철 선생님과 오래된 마음의 지기이고 상호 가족들끼리도 30년간의 깊은 교분을 갖고있는 가까운 사이로서 김학철 선생님의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에 널리 알렸다.   끝으로 필자가 “교수님의 느낌에 로신과 김학철, 어느 분이 더 위대하다고 봅니까?”고 당돌하게 묻자 선생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인 듯  “로신 선생님은 붓으로 나라를 지켰고 김학철 선생님은 붓과 총칼로 나라를 지켰다”고 하였다.   오오무라선생님 부부와 함께(완쪽이 저자 오기활) 글을 맺는 이 시각 “연변은 나의 제2고향입니다”고 하며 연변을 자랑한 오무라 선생님, “리홍매(길림신문 특파기자)는 연변의 내 딸입니다”하며 조선족을 사랑한 오무라 선생님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는듯 싶다. 두 손 모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오기활              2023년 1월 31일  도문에서                                                                                                                                                                                                                                         潮歌网 2023-02-03 07:34 发表于广东     . 
436    가장 어리석은 사람 댓글:  조회:883  추천:0  2023-02-16
얼마전 외국서 웃음보모를 모신다는 기사를 읽었다. 원인은 출생후 아이에게 웃음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머대왕 챠플린의 “웃지 않고 보낸 날을 실패한 날이다.”는 말에 따른 “실패없는 날”을 만들기 위한 보모 모시기가 아닌가 짐작된다. 지금 심수의 웃음클럽이 인기를 끈단다. 매일 아침 련화산공원에 1,000여명이 모여 30분간 활기와 의욕으로 차넘치는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이 할수 없다는 일을 해낸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다 하는것도 못한다는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웃겨도 웃지않는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성공의 대가 트레이시는 “성공의 85%는 인간관계에 결정된다. 인간관계는 한마디로 얼마나 잘 웃는가에 있다.”고 한다. 인간관계가 깨지기전 증세는 웃음이 없어지는것부터 나타난다. 리혼부부의 대표적증세는 웃음이 사라지는것부터 발작되는것이다. 돈을 벌려면 웃으라 5분간 웃을 때 수백원의 엔도르핀이 생성된다. 웃으면서 물건을 팔면 하나 살것을 두개를 산다. 도적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않고 웃으면 놀라서 달아난다고한다. 하루 세번 크게 웃으면 그 하루는 부자다. 오래 살려면 웃어라 웃으면서 먹은 밥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1 분간 웃으면 이틀을 더 산단다. 웃음은 마음의 조강, 내장의 맛사지다. 세번 실컷 웃으면 의사를 멀리한다. 크게 웃을 때 몸속의 650개 근육중 231개 근육이 움직인단다. 유머는 웃음이란 땅에 아름답게 지은 집이고 웃음으로 만든 맛좋은 료리다. 인생은 눈물의 골짜기라 하지만 이 골짜기에도 무지개가 있거늘 그 무지개가 바로 웃음이다. 실수했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자. 기쁨이 샘솟고 웃음이 절로 난다. 행복하여 웃은것이 아니라 웃었기에 행복했다. 웃음은 전염된다. 내가 웃으면 주변이 웃고 주변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면 세상도 따라 웃는다. 가화만사성(家和万事成), 소문만복래(笑门万福来). 심수 웃음클럽은 지금 광주를 넘어 내지의 여러 곳에 한창 퍼지고있단다. 멀지 않아 우리 연변도 웃음클럽이 다가오리라 기대된다. 힘차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자.    오기활                                         《길림신문》2006.12.12.  
435    행복을 얻는 비밀 ㅡ 자선 댓글:  조회:1342  추천:0  2023-02-01
이런 말이 있다. ㅡ 한 시간을 즐기고 싶으면 낮잠을 자고 하루를 즐기게 싶으면 낚시를 하고 한 달을 행복하게 살려면 결혼을 하고 일 년을 행복하게 살려면 재산을 물려받고 일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도우라. 이로보아 세상에서 이웃을 돕는 것만큼 숭고한 일이 없다는데 실 생활에서 자선과 자비를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중국의 교육가 도행지(陶行知)는 “베풀 때는 진실한 마음 외에는 풀뿌리 하나도 바라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베풂이요 자선이다. 유태인의 유태교 경전에 “능히 베풀 수 있는 만큼 재물을 얻는다”고 했다. 선의에서 비롯된 베풂은 어둠을 밝히는 빛, 추운 겨울 날을 따뜻하게 덥히는 화로, 사막의 갈증을 해소하는 오아시스이다.  베풂은 타에게는 희망을, 자기에게는 기쁨을 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고장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혀 돈을 아끼지 않는 대 부자가 있었다. 그는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물쓰듯 돈을 쓰면서 즐겼지만 어쩐지 항상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어느날 친구의 조언으로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찾고저 어느 산사로 향했다. 산사의 주지승은 부자의 얘기를 다 듣고난 후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생에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찾지 못했군요.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이에 부자가 “그렇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가요?”고 물었더니 주지승은 “보시(布施)는 가장 큰 자비입니다. 남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면 어떻겠습니까?”고 제의했다. 그날 이후 부자는 주지승의 가르침대로 곳곳을 다니며 어려운 사람을 찾아 돈을 기부했다. 그런데 모두가 고마워할 것이라는 자기의 예상과는 달리 돈을 기부받은 사람들은 그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였다. 결국 부자는 두 달만에 더욱 불행하고 불쾌한 심정으로 다시 주지승을 찾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부자의 말을 듣고난 주시증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재물만 뿌렸지 보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행복하지 앓을 수 밖에요!”  재물로 베푸는 것은 재시(财施),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법시(法施), 두려움과 어려움으로 구제해 주는 것은 무외시(无畏施), 그리고 자비의 마음으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널리베푸는 것이 보시(布施)이다. 누구나 선한 일을 하려면 먼저 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선하고 진실하며 아무런 사심, 잡념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만이 선행이 공허한 자기 자랑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선행을 위한 선행, 심지어 다른 공리적 목적을 가지고 선행을 하는것은 자기의 리익을 챙기기 위한 장사에 불과하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고 베푸면 아무리 낯선 사람들도 령혼의 기쁨을 선물한다. 오기활
434    법과 도리 댓글:  조회:586  추천:0  2023-01-23
어느 음식점할머니의 “법과 도리” 강의라 하겠다. 작은 시내에 할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있었다. 어느 날 고관행렬이 이 음식점에 들렀다. 그들은 갈 길이 바쁘다며 음식을 재촉했다. 한 어른은 아예 주방입구에서 나오는 음식을 자기네 상으로 올릴 태세였다. 이에 주인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집은 먼저 온 손님이 먼저 먹는게 법이요!” 할머니의 말에 그 어른은 퍼그나 머쓱해졌고 다른 손님들은 맘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작은 고장이라 할머니의 “법 강의”는 입소문으로 널리 퍼졌다.  그 후 이 음식점에 한 로인이 식사하려 들렸다. 할머니는 로인손님을 자리에 안내하고는 주방에 들어가 손수 그릇이 넘치도록 국밥을 챙겨가지고 와서 로인상에 올렸다. 그러자 먼저 왔던 손님들이 볼멘소리로 불평을 부렸다. “먼저 온 손님이 먼저 먹는게 이 집의 법이라더니 왜 후에 온 손님을 먼저 주는가?” 이에 할머니가 손님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먼저 온 손님이 먼저 먹는것은 법이 고 시장한 로인을 먼저 대접하는것은 도리지요” 법이란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규범으로 국가,공공기관에서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조례 등을 말하고 도리는 사람들이 어떤 립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말한다. 법과 도리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데 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뀌고 변할수 있으나 도리는 옛부터 인간이 살면서 갖춰야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법(法)을 글자로 풀이하면 물이 흐르는 데로 가라(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인류가 살면서 욕심으로 하여 내 잘못은 묵인하고 타 잘못은 범죄라고 하기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한 삶을 위해서 법이 존재하게 되였다. 사회의 발전은 처음은 인치(ㅅ治)로 시작되여 점차 법치(法治)로 발전되였다. 법이 없다면은 사회는 강자나 권력자의 약육강식으로 백성에게 민주권리가 없게 된다. 법은 인류가 평등한 삶을 위해 만든 사회제도다. 그래서 항간에는 착한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는 말이 생겼는가 본다. 법과 도리의 관계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할것을 지키는것이 공통점이라면 지키는 과정의 강제성과 비강 제성에 차이가 부동점이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지켜야 할 범위는 법보다도 도리가 더 넓다. 법과 도리를 공기와 옷에 비교한다면 공기는 만물의 생존에 꼭 필요하지만 또 그 이상 크게 활용되지 못하고 옷은 필요한 외에도 잘 맞고 잘 어울림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옷이 날개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 “ 잘입은 거지는 얻어 먹어도 못 입은 거지는 얻어 먹지도 못한다.”는 등 옷에 관한 속담들이 있는가 생각된다 오기활                                  《길림신문》2010.10.19.                    
433    백성의 지도자들 댓글:  조회:1164  추천:0  2023-01-11
나는 남들로부터 이런 부탁을 곧잘 받는다. “나(그)를 위해 좋은 말을 해달(주)라” “우리를 위해 할 말을 콱 해달라” “좋은 말을 해달라”는 나더러 누구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달라는것이고 “할말을 콱 해달라”는것은 백성을 위해 할말을 꼭 해달라는것이다. 나를 놓고 말하면 이런 부탁은 “위공대변(为公代辩)”하느냐 “위사대변(为私代辩)”하느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라 하겠다. 흔히 상급에서 시찰이나 검사를 온다고 하면 당지의 어른들이 사전에 시찰대상에게 “보희불보우(报喜不报忧)”를 지시 혹은 암시를 한다. 즉 좋은 말만 하고 나뿐(?) 말은 말라는 눈치다.그래서 당사자는 없는것도 있다고 적은것도 많다고 안 한것도 했다며 입발린 말만 한다. 그 결과 현지어른들은 상급에서 치적을 얻고 백성의 불신을 얻게 된다. 연변의 초대주장 주덕해동지는 당과 정부앞에서 “찬송가”만이 아닌 “고충가”도 불러 당과 정부의 집정에 도움을 주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었다. 1962년 주은래총리가 연변을 시찰할 때 주덕해동지는 “희”와 함께 “우”를 실사구시적으로 회보한데서 우리 조선족이 한족보다 입쌀공급을 더 받고 고추가루보조금을 따로 받는 등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향수하였다. 도문시초대시장(1965년) 김하권은 “문화혁명”때 쓴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집권파란 모자를 방금 벗고 1975년에 도문시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임직된지 얼마 안되는데도 곁군들의 눈총을 피해가며 성에서 온 시찰단의 숙소에 찾아가서 도문시민들이 오염된 두만강물을 먹는 “우”를 통사정을 하면서 회보한데서 도문시민들의 식수(食水)문제를 해결하였다. 2005년 연변대학 김병민총장이 국무위원 진지립(陈至立)이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변대학캠퍼스통합확장공사가 부딪친 고충을 회보하고저 하니 해당책임자가 사전에 “우”는 말하지 말것을 암시했다. 이에 진퇴량난에 처한 김총장이 성당위부서기 전철수한테 속심을 터놓았더니 전서기가 “국무위원을 모셔오는 목적이 바로 도움을 받자는것인데 왜 곤난을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꼭 제기하라”고, 그리고 실사구시적으로 수요되는 자금을 말하라고 하였다. 하여 국가의 상당한 자금을 쟁취하였다.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촌은 지난 90년대 연변의 첫 “텔레비죤마을”로 교석, 진모화, 류화청 등 국가급지도자들이 여러 차례나 시찰하였다. 언제 들었던 리춘실(서기)의 말을 적어본다. “번마다 시에서 배워주는 말만 하다보니 교석이 ‘무슨 곤난이 있는가?’ 는 물음에도 양어장을 확대개조할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말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아쉽다” “보희”는 간부들이 치적을 얻고 “불보우”는 백성들이 불익을 당한다. 필자는 주덕해, 전철수, 김하권 등 지도자들의 “보희보후”가 백성의 지도자 계주봉으로 되기를 기대한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4.1.)        
432    재미로 읽는 토끼, 토끼해 그리고 토끼띠 생 댓글:  조회:2140  추천:0  2023-01-01
새해는 (2023년) 계묘년(癸卯年), 륙십간지의 40번째로 계는 흑색, 묘는 토기를 의미하는 “검은 토끼의 해”이다.   필자는 성큼 다가오는 계묘년을 맞으며  조상들의 삶풀이에 비춰   토끼. 토끼해. 그리고 토끼띠 생을  재미로 정리해 본다.   토끼는 다산, 무병장수의 상징 밤하늘에 떠 있는 노란빛, 쟁반처럼 둥근 달은 역경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희망”을 뜻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달의 이칭을 보름, 토월(兎月)로, 달의 이지러짐과 만월의 주기가 여성의 생리 현상과 동일하기 때문에 달=여성(음)=토끼로 의미하였다. 무병장수의 상징인 토끼는 가임기간이 짧은데다 1년 임신이 5ㅡ6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풍요, 다산을 상징한다. 달토끼는 두발로 직립하며 절구공이로 무언가를 찧고 있는데 이 방아는 약초를 짓이겨 선단(仙丹,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약)으로 만들기 위한 약방아이다. 인간들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영역, 즉 달에서 불사(不死)의 약을 만들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신선들이 상상의 옥토끼 약방아로 선단을 찧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의 달토끼를 우리는 보름달을 보며 동경해왔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달토끼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옛날 산 속 작은 마을에 토끼와 여우,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마음 맞춰 불도를 닦기로 결심하고 몇 년간 계속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있는 제석천(하느님)이 얼마나 불도를 닦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이들에게 다가가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구해오라고 했다. 얼마 후 여우는 물고기를 잡아오고, 원숭이는 도토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 나타난 토끼는 마른 나무 몇 개만 주워 왔다. 토끼는 제석천에게 제 몸을 드릴테니 익으면 드시라고 말하고는 마른 나무 가지에 불을 피우고 뛰어들었다. 그걸 본 제석천은 토끼의 불심이 제일이라 여겨 달을 지키게 하였으며, 이를 월중토끼, 또는 달토끼라고 불렀다. 한편 토끼는 꾀부리는 ‘꾀보’이며 ‘재빠름’을 상징한다. 약자인 토끼를 ‘지자(智者)’로 내세우고, 강자인 호랑이를 ‘우자(愚者)’로 여겨 우리네 강산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를 골려주는 역할 역시 토끼가 맡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후기에 강자인 양반과 약자인 상것들의 관계를 희화시킨 내용과 같다.  달토끼와 더불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계수나무이다. 중국의 오강(吳剛)이라는 사람이 월궁으로 귀양을 가 계수나무를 도끼로 찍어 넘기는 일을 계속해야 했는데, 그가 계수나무를 찍을 때마다 상처 난 나무 부위에서는 새 살이 돋아 오강의 도끼질은 계속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궁의 계수나무는 베어도 넘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영생불멸의 나무로 인식되어 왔는지 모른다. 한국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김수로왕이 신하들에게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가 왕비 허황옥(許黃玉)을 궁전으로 모셔왔다는 내용이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이어지는 윤극영의 동요나 ‘달 속에 박혀 있는 계수나무를 옥도끼로 찍어 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지어 부모님과 함께 천년만년 함께 살고 싶다’는 충남 청양지방 민요처럼 우리 역시 둥근 달과 함께 계수나무를 동경해 왔던 것이다. 우주 음양에서 시작된 달은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 가족 사랑의 의미로 이어진다. 또한 소박하고 욕심 없는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조화와 융합, 삶의 운행을 제시해준다. 조선후기 유행한 민화 효제문자도 가운데 ‘치(恥)’자에 반드시 방아 찧는 달토끼가 등장한다. 이는 충신의 대명사 백이, 숙제 고사에 따른 것이다. 은(殷)나라의 제후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 숙제는 그들 나라가 망하자 나라를 위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굶어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해마다 청절의 상징인 매화와 달이 되어, 이후 매화꽃이 피고 달빛이 밝게 비추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따라 치(恥)자에는 백이와 숙제의 ‘수양매월 이제청절(首陽梅月 夷齊淸節)’을 형상화했다는 달과 매화나무를 그려 넣었는데, 달은 자연을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좋은 벗이었으며, 매화는 수많은 은일처사(隱逸處士)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정절과 고고함의 상징이었던 신성한 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 원통전 꽃창살 문짝 아래 새겨진 방아 찧는 토끼나 미황사 부도에도 방아 찧는 달토끼가 재미있게 조각되어있다.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 이야기는 그림뿐 아니라 자수, 도자기, 목칠공예, 베갯모, 보자기 등 공예, 조각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 조선시대 후기 대중문화 속에서 달이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상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달은 맑고 높은 절개의 상징이며 외로움, 슬픔, 소외, 정한의 서정성을 담고 있어 문학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나도향의 그믐달에 “보름의 둥근달은 모든 평화와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라고 읊었다. 우물 속의 달토끼는 중생들이 막연하게 꿈꾸며 동경했던 달에 그들의 최대 염원인 장생불사의 의미를 담아 그들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토끼띠 해   격동의 범띠 해가 지나면서 반갑게 찾아 오는 평온한 해이다. 우리는 지난해의 모든 전투에서 벗어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휴식을 하기 위해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만물이 다시 새롭게  빛나며 사람들은 무력보다 설득이 낫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외교와 국제관계와 정치가 다시 전면으로 부각되기에 적당한 시기에 우리는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그리 큰 어려움없이 합리적인 선에서 서로 양보를 할것이다. 법, 질서, 법률과 규칙이 엄격하게 대행되지 않지만 누구 하나 이 어색한 현실에 그리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에 바쁘거나 그저 여유있게 지내려 하는것이다.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돈이 생기며 또 우리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했던 사치품들도 가까이 있게 되므로 우리의 생활방식은 노곤해지고 한가해질것이다. 서두르지 않게 움직여도 되는 온화한 해로 예상된다. 이 한해만큼은 우리가 별다른 골치거리없이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태평해질수 있을 것이다. 한국 력사에서 토끼해에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례성에서 즉위한 해가 기원전 18년 게묘년이다. 또  광개토왕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한 것도 바로 신며년(391년)의 일이다. 또 고구려 장수왕 15년(427년)의 평양 천도나 백제 문주왕  원년(475년)의 웅진 천도도 토끼해에 일어났다. 반면 고려 인종 13년(1135년)의 “묘청의 난”이나  조선 인조 5년 (1627년) “정모효란”도 토끼해의 사건이며 조선 증종 14년 (1519년)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 세력이 피의 숙청을 당했다. 문화적으로는 신라 성덕왕 26년(727년)에 혜초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지었으며 신라 경덕와 10년(751년) 신모년에는 불국사가 창건됐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몰래 들여와ㅏ 서민들의 생활에 현신을 이룬 것도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토끼해의 일이다.   토끼띠 생의 성격   토끼띠는 12띠 중 네 번째의 띠이다. 12띠 중 네 번 째 띠로 묘년 생(卯年生)을 가리킨다. 묘시(卯時)로는 오전 5시부터 오전 7시까지, 방위로는 정동(正東), 달은 봄 2월, 계절은 2월 경칩에서 3월 청명 전까지, 오행으로는 목(木), 음양으로는 음(陰), 대응하는 서양 별자리로는 물고기 좌에 해당한다. 착한 천품을 타고난 토끼띠 생은 리상주의자이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유머가 풍부하여 예능 계통에 재능을 보인다. 토끼띠 생은 쉽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다툼에 빠지는 것을 싫어한다. 또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간단히 뛰어넘으며 뛰어난 탄력으로 재난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토끼띠는 꿈을 중요시하고 항시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노력이 부족하고, 재능만 믿고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결점도 보이고, 좀 게으르고 수동적인 게 흠이다. 토끼띠 생은 의지와 담력을 키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고, 급병·사고 등을 조심해야 한다. 토끼띠 생은 평화와 고요 그리고 쾌적한 환경을 즐기면서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것이다.그는 내성적이며 예술가적기질과 훌륭한 판단력을 갖고있다. 그는 또  완벽성을 좋아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것이다. 토끼띠 생은 사업이나 금전거래에서 운이 매우 좋다. 흥정을 아주 잘하는 그는 늘 자기에게 유리한 적당한 제안이나 대안을 불쑥 들이미는 재주가 있다. 사업데 대한 그의 날카로운 안목과 탁월한 협상기술은 그에게 무슨 일을 하든 신속한 출세를 보장한다. 토끼띠 생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겉보기에는 무관심한 기색을 나타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가 비판에 겁을 내고 있는것이다. ”싸우기보다는 피해서 가라”는것이 그들의 자우명이다.  토끼띠 생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외부인들과의 거래에서는 피상적인 태도, 심지어 무자비한 태도까지 드러내게 된다. 그는 리해심이 많고 겸손하고 사려깊은 사람이기때문에 불편한것을 아주 못견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는 서로에게 잘 대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돈이 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깊이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늘 친절하고저 노력한다. 토끼띠 생은 보통 나무랄데없는 태도를 갖고있다. 그는 좀체로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욕설이나 쌍소리에 의존하는 법이 결코 없다. 자신의 반대파들을 약화시키려 할 때도 례이로 대할것이다. 점잖을 빼는 토끼띠 생 부인은 자기 친구들에게 매우 사례가 깊고 리해심있게 행동한다. 같이 일하고 산보 나가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그야말로 백점짜리 녀자이다. 그녀는 늘 따뜻한 은정과 활달한 기지를 보여주기때문에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체적으로 토끼띠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말로 알고있는 사람이다. 토끼띠 생은 비판을 해서는 안될 때를 잘 알고있다. 그는 사람을 남들앞에서 당황하게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체면이든 남의 체면이든 그것을 살리는데 매우 능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방법만 있으면 당시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늘 배려하는 자세를 취한다. 토끼띠 생 남성은 굉장히 사근사근한편이다. 그는 당신을 칭찬하면서 당신의 가장 좋은 술을 다 비우면서도 점잖은품위와 매력을 잊지 않고 신사다운 태도로 행동한다. 퇴끼띠 생은 사교계의 중심으로 점점 더 가가가면서 점잖은 여가를 즐기려 한다. 토끼띠 생은 손님대접대를 아주 잘하는 훌륭한 집주인이다. 따뜻하고 명량한 친구인 그는 누구에게나 좋은 말을 해준다. 토끼띠 생의 마음속에서는 이렇다 할만한 선악사이의 내부 투쟁도 없다. 그는 자신의 생존능력을 믿으며 자신의 판단애 의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평화를 유지한다. 토끼띠 해에 태여난 사람들은 행복과 만족을 가장 쉽게 발견할것이다.   토끼띠와 다른 띠와의 관계 (기혼한 분들에게 재미로 제공합니다) 토끼+쥐띠 : 상호 존중관계이며 공통의 관심사가 많다. 토끼+소띠 : 적당히 받아들일 만한 관계이다. 토끼+범띠 : 적대 및 오해관계에 있다. . 토끼+토끼띠 : 상호 협조 속에서 주도권 투쟁도 없다. 평화적인 협력이 가능하다. 토끼+용띠 : 공통의 이해 기반이 있다. 토끼+뱀띠 : 협조관계가 가능하다. 토끼+말띠 : 적대감 속에서의 강한 충돌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의 유대가 불가능하다. 토끼+양띠 : 가장 좋은 짝들 가운데 하나이다.. 둘의 결합은 성공과 번영을 약속한다. 토끼+원숭이띠 : 약간의 성격 차와 경쟁의식이 존재한다. 토끼+닭띠 : 충돌과 견해차가 많다. 토끼+개띠 : 아주 바람직하고 성과가 클 관계이다. 서로간의 깊은 신뢰와 이해 속에서 번영과 행복을 찾는다. 토끼+돼지띠 : 상당히 좋은 관계이다. 충심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의 느낌에 아주 큰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오기활                (2022년 12월 29일 정리)  
431    《새해에 복 많이 만드세요!》 댓글:  조회:848  추천:0  2022-12-31
일전에 도문라지오텔레비방송국 주필을 지낸 박상룡선배님이 2급장애자 최원의 제2창업을 소개한 신문기사《방법>문제는 영원한 진리》를 읽고《최원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며 감탄했다. 3살때 소아마비로 《앉은뱅이》된 최원(녀, 49)은 장해적보다도 더 뼈를 가는 노력으로 《자학성재(自學成才)》하여 《최원단란글방》주인, 연변주《자강모범》으로 성장했다. 지난 여름, 동네서 《안해머리 남편다리》, 《인생의 강자 마음의 부자》로 불리우는 최원부부가 제 2 창업으로 목욕탕을 꾸리려하자 주변의 조선족들은 물론 이름 모를 80대 한족로인까지 나서서 물자, 기술, 자금 등을 내놓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인복(人福)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는 복을 말한다. 지난 세기 50년대,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배움과 창업에서 성공하고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는 자서전을 펼쳐낸 백영중(79)은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만큼 인복이 많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내 옆에는 나를 성심껏, 최선을 다해 도와 준 고마운 분들이 항상 있었다》 《나의 인복의 비결은 항상 사람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한것이다》고 자서전에 밝혔다. 정직은 최선의 책략이다. 배영중의 인생3계명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부지런 하라》 《사랑을 베풀라》이다. 백영중은 이 3계명을 좌우명으로 했기에 《낯선 미국땅에서 당당하게, 장애물 앞에서 슬기롭게, 유혹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며 《사람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하면 그들이 나의 우군이 되고 응원단원이 된다》고 했다. 영국의 지질학자 휴 밀러의 백부는 늘 밀러한테 《사람과 교제할 때 다소간 상대에게 리득이 있도록 해라. 상대의 편리를 도모하고 뭐든지 충분히 제공하려는 정성, 결코 린색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결국은 자기의 리득으로 돌아온다》고 훈계(訓戒)하였고 한다. 인복이 있으면 일복도 있다. 백영중은 인복이 있었기에 일복이 따라 그가 꾸린 회사는 미국 경량철골류통 1위기업으로, 배영중은 아시안 공동사회대표로 백악관은 물론 클린턴대통령의 생일파티에까지 초대될수 있었다. 누구든 마음이 정직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며 인간관계에 충실하면 인복이 따르기가 마련이다. 복은 지은만큼 돌아오고 《뿌린만큼 거둔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원래는 《인복의 비결》로 작명했다가 세모에 새해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새해에 복 많이 만드세요!》로 개명하였다. 오기활                               길림신문  :  2009-12-24
430    지난해를 돌아보기 댓글:  조회:1269  추천:0  2022-12-26
필자는 이 몇 년간 해마다 년 말이면 “가족 10대 뉴스”를 선정하여 친족모임에서 “회보” 하는 습관을 양성했다. 뉴스선정에 물론 가족전체가 참여한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건전한 년말 총화문화의 중요함은 보내는 해에 대한 검토, 계승, 오는 해에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 모두가 “함부로 살지 않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각에 올해의 잘한것은 칭찬하고 잘못은 반성하고 개선하는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아봐야 할것 몇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난 해에 대한 점검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해 점검하고 반성이 있어어야 만이 그 일의 옳고 그름을 가르고 개변, 보완할수 있다. 흐지부지 하거나 잘못된 일은 그대로 넘겨버릴것이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새해에 반드시 그것을 발전시켜 성공으로 이끌어 줄수 있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로 지난해에 좋은 사람을 얼마나 만나고 가졌는가를 돌아본다. 사람만큼 큰 자산이 없다. 지난해가 좋은 사람을 많이 알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해였다면 진정 부자가 된 해라 하겠다. 반면 그 반대경우라면 새해에 보다 더 발전된 인간관계형성을 계획하고 다짐해야 한다. 필자는 올해도 훌륭한 두 분을 얻은것으로 만족한다. 셋째로 마음의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주변사람들과의 무거웠던 관계를 훌훌 털어 버리는것이다. 대신 따뜻한 사랑, 배려를 통해 새해에 서로 리해하고 인정하고 도우며 사랑하는 인간관계 100점을 맞도록 새해를 준비해야 한다. 넷째로 내 맘속에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있었는가를 돌아본다. 긍정적인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그를 향해 나가려는 목적의식이 생겨나고 어떠한 장애물 앞에서도 희망, 열정, 용기, 도전을 잊지 않는 인생의 지남침이 될것이다. 올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한 해였다면 내 맘속에서 긍정의 단어들이 어는 순간에 살아 지지 않았는가를 반성해 보라.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퍽 괜찮은 해로 만들고 싶다면 부정적인 마음가짐을 빼버리고 “된다” “한다”로 꽉 채워 넣으라. 한해가 지면 또 다른 새해가 뜬다. 떠 오르는 새해를 특별한 해, 나만의 한 해로 만들어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맘속으로 웨치는 자기만의 몇 마디 구호가 필요하다. 례하면 매일마다 맘속으로 “나는 40대다. 튼튼한 몸이 있고 늘푸른 꿈이 있어 뭐든지 할수 있다”를 외우던지 말이다. 오기활                           《길림신문》2011.1.7.                
인생은 누구나 자기만의 행복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만족할 때 행복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다를 수 있고 내가 느끼는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행복의 정의는 각자들의 추구와 실천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두어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로 정의된다. 이는 지난 11월 22일, 내고향 달라자의 동생벌 친구 리영식(75)네 부부가 동네잔치를 마련하고 기뻐서 하는 영식씨의 “머리 말”의 중심이다. .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삶법이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이 물론 남들에 비하면 별로겠지만 나는 우리네 삶이 결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만하면 살만하고 오늘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네 수준으로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75세 나이에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는 영식씨의 미덕이라 하겠다. 영식씨는 왕청현(현 도문시) 석현진 달라자(1911년에 건툰)원주민의 2세로 리경렬, 오채옥부부의 4남 3녀 자녀중 맏이이다. 가야하와 해란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달라자는 10년에 6,7년은 큰물이져 지난세기 60, 70 년대까지만해도 식량을 거의 해마다 국가의 반소량(구제량)에 의거하였다. 리경렬네는 식솔이 많고 게다가 식성이 세다보니 먹거리고생으로 해마다 도문에 다니며 도시사람들의 옥수쌀을 꿔먹고는 번마다 좁쌀이나 입쌀로 갚아주었다.                                                                                                                                          사진                                                     환갑상을 받은 리경렬 오채옥 가난의 년대에 소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군 영식씨는 선천적으로 말이 적으나 마음이 한량이 없이 고우며 유전적으로 술은 못 마이지만 일찍부터 담배를 피우고 고기잡이에 빠진데서 동네서 “담배지골”에 “강태공”으로 불렸고 “영식이는 법이 없어도 산다”는 평이 뒤따랐다. 리경렬네 집이 가난하기로 동네의 1,2번인데다가 영식이가 책가방끈이 짧고 7형제 맏이다보니 같은 또래에 비해 결혼이 지체되다가 “집체호 년대”에 달라자동네가 도시교구이고 총각이 하도 마음이 곱다는 말에 외지의 “도시호구”처녀를  만나 결혼하였다. 지난 “문화혁명” 때 나의 백부님이 억울한 “특무”모자를 쓰고 타살되자 20대 나이에 큰집에 얹혀 살던 나는 정치적권리를 박탈당하고 생산대양돈장에서 사양원으로 5년간을 지냈는데  영식씨가 2년을  나와 함께 돼지사양원으로 일했다. 그때 영식씨는 남들이 감히 우리 집에 나들지 못하는 정치환경에서도 매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 놀려와 나를 동무했는데 그가 원래부터 말이 없고 잠이 많다보니 동무를 한다는 것이 초저녁부터 한쪽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자다가 늦밤에 깨여나서 돌아가군 하였다. 속담에 "밭머리 벗어놓은 사갓도 동무가 된다"고 나는  영식이가 매일 저녁 책을 보는 나에게 코콜이로 동무해준 것에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겹게 감사하다. 영식씨로 말하면 “도시청년들이 성시로 돌아 가는” 나라의정책이 영식씨부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철도가속의 큰딸인 그의 안해 (崔成子)가 취직하자 큰아들로 부모동생들과 한집에서 동거하던 영식이네(딸 2명)가 분가하여 도문에 집을 잡았다. 도문철도 모건축회사에 배치받고 한동안 출근하는 그의 안해는 엉뚱한 생각으로  어느날에 단위의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 남편이 달라자 건축기건대에서 일을 하는데 남편의 농민신분을 그대로 하고  내대신에 남편을 출근 시키면 더 좋지 않습니까?”는 건의를 했더니 책임자가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다”며 통쾌하게  동의하였다. 그레서 영식씨는 고정적인 건축일을 하면서 장끼를 피운데서 북경유람까지 하였고 조선보따리장사가 한창일때 성자씨는 도문통상구의 우세를 리용하여 도문서 선참으로 해삼장사를 하다가  수입이 짭짤하자 손하의 두 시누이를 이끌고 해삼장사를 크게 벌려  몫돈을 벌었다.                                                                                                                                            사진                                                오늘의 생활에 만족하는 행복한 부부 손에 몫돈을 쥐게되자 성자씨는 아빠트에 상업가계(门市房)까지 사놓고 “뿌리있는돈벌이”를 하면서 두 딸을 미국과 일본에 출국시켜 홀로서기를 시겼다. 영식이네 부부는 “저희들이 탈없이 잘 살면 된다”면서 지금까지 손군까지 있는 두 딸의 결혼식 차림은 념두에도 없다. 한편 성자씨는 “일이 없이는 못 산다”며 닭사양을 하면서 도시주변에 버려져 있는 땅을 찾아 가꾸며 생산한 농산물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베품의 삶”을 살고 “강태공”인 영식씨는 전주 낚시경지에서 “낚시 대왕”으로 오토바이대상을 쟁취하였다. 이번 코리나가 터지자 영식씨네는 달라자에 회농하여 농사일과 짐승치기로 재미를 보고 있다. 이것이 영식씨가 말하는 ”그들만의 행복한 삶법”이다. 영식씨가 마련한 22일 동네잔치에는 외국에 갔던 동생들, 사촌형제, 조카들, 그리고 동네분들로 30여명이나 한자리를 하였다. 온돌구들이 모자라서 젊은들의 술상은 부엌의 마루장판에 차렸건만 서로가 불편이 없다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날 영식씨의 감동적인 모듬발언 몇단락이다. ㅡ 우리 동네사람들은 코로나로 하여 더욱 뭉쳤습니다. 서로간 채소나 토닭알을 나눠먹고 서로를 도와 줍니다. ㅡ 요즘에 내동생(리창식)한국에서 한족제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는 한족제수씨가 맘에 들어 빼울가봐 걱정합니다.(웃음소리) 이에 따라 그의 큰 녀동생(리미숙)이 말참견을 하였다. “나도 손자자랑을 하겠습꾸마. 우리 큰 손자가 대학 2학년에서 입당을 한답니다” ...이날에 특히 사람들의 인기화제로 한국에서 온 한족제수가 팔을 걷우고  가마목에 않아 후근을 거의 전담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처음 만난 강씨(한족제수)를 불러 자아 소개를 부탁한뒤 이 동네는 지난 80년대에 전국인대주임 교석이 방문한 영광의 동네라고, 이 집은 큰시형의 사촌동생 리영춘네 집인데 37년(1985년)전에 이집에서 이 동네를                                                                           사진                                                             웰남전쟁영웅보고단의 “새각씨”류호련 참관할때 동네부녀들이 이집에서 “월남전쟁영웅보고단”의 유일한 영웅기장 류호련 에게 첫날 각시 한복을 입혀 줬다고, 그리고 37년후 이집에서 영식씨가 한족제수씨를 맞이 한다며 이집은 한족녀성들과 특별이 인연이 깊은 집이라고 소개하자 “그렇구나!”는  기쁨의 환성을 울려퍼졌다.                                                                                            사진                                                                                                                                                     리창락부부 자기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리없이 살아가는 영식씨부부의 인생이야말로 비범한것으로 한낱 돋보인다. 필자는 이날 모임에서 향양촌의 선임 서기와 선임촌장들이 하던 말로 이 글을 맺는다. “그래도 이 동네서 작은 일까지 눈에 밟혀 베풀며 사는 영식이네 삶이 진짜 멋지고 행복해 보입니다.”  오기활 2022년 12월 15일    
428    “내 탓”이라 생각하는 행복한 삶 댓글:  조회:1310  추천:0  2022-12-01
혹시 일신쌍두(一身双头)로 태여난 아이를 두사람으로 볼가? 아니면 한 사람으로 볼가?  는 이 물음에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다른 한쪽 머리가 비명을 지른다면 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이 그냥 반응이 없으면 두사람이다”고 했다. 내가 아파할때 너도 아파하면 두 머리가 한사람으로되는 것이다. 일신쌍두인이 한 머리(头)가 “내 탓”이란 마음을 가지면 다른 한 머리도 “내 탓”의 마음을 갖게 된다.  “내 탓”으로 여길 때는 용서와 리해가 쉽고 너에 대한 정겨움과 고마움이 우러나지만 “네 탓”으로 여길 때는 불신이 싹트고 미움과 증오가 커진다. “내 탓”이란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믿음과 꿈, 사랑과 감사로 살기에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고, 장애로 불편하게 산다고 해도 행복을 누릴(느낄) 수 있다. 행복은 전염되는 것으로 내가 행복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따라 행복해지고 “내 탓”이란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럴 때  나, 너, 우리가 가장 진실한 숨결을 함께 나누며 심원하고 경건한 만남을 이룰수 있다. 설령 마주보지 못해도, 말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만남을 통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어느 시인의 시다.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임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여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임을 알겠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할 때이다.  필자는 비록 후회에는 약이 없다고 하지만 늦게나마 “이는 내 탓입니다”는 마음의 가치를 알게되여 “내 탓”이란 비방으로 전생의 후회를 미봉할 것이다. 오기활 
427    어금니례찬 댓글:  조회:956  추천:0  2022-11-30
일전에 치과의사가 하던 얘기다 흔히 치과의사를 찾는 손님들이 어금니는 눈에 잘 띄우지 않으니 아무거나 값싼 걸로 하고 앞 이는 비싼 걸로 예쁘게 해달라고 한다. 분명 어금니는 남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치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중한 일을 하기에 더 소중하게 다루며 대접을 잘해야 하는데 말이다. 치과의사의 “어금니례찬”에서 허상림선생님(원 연변대학공학원원장)이 소개하던 방학봉교수가 떠올랐다. 방학봉교수(80)는 “발해사연구”를 위해 남모르는 “어금니’로 묵묵히 일해왔다. 1949년 9월 연변대학력사계 1기생 방학봉은 돈화현 륙정산에서 정혜공주묘와 진릉의 발굴, 정리에 참가하고 우리민족의 발해사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려는 뜻을 품고 심신을 바쳐 고군분투로 75세에 이르러 “발해사연구”총서 등 발해사연구관련 저작을 35부나 펼쳐냈다. 그간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의 역경속에서도 갖은 억울함을 당했어도 자기만의 큰 뜻을 접지 않고 발해사연구의 “어금니”로 되여 51세—59세 사이에 6부의 저작을, 60세—75세 사이에 29부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기간 그가 혼자몸으로 심산속을 헤가르며 발해무덤탑고찰을 다니다가 외로운 죽음을 당할번한 사례가 몇 번이나 된다. 칠십고령에도 려행단체를 따라다니며 가이드로 “알바”를 하면서 저작출판 경비를 해결하였다. 그가 펼쳐낸 저작은 중국조선족의 발해사연구에 공백을 메웠고 한국, 일본 등 국외 력사학계의 권위들은 방교수를 “발해왕” “중국발해연구의 최고권위자”라 칭한다. 외적으로 드러나 눈에 반짝거리는것만이 보석이 아니다. 우리가 가져야 함은 마음의 량식이다. 민족의 력사의 발굴, 정리를 위하여 반짝거리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숨긴 곳에서 자기 혼자만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보배로운 걸음을 걸어온 방교수야 말로 참된 보석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만이 보배인양 다투어 나서서 일순간을 반짝하고는 어느새 퇴색해 버린다. 또 어떤 사람은 윗사람에게만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보여진다. 외면보다도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보석처럼 진선미로 꾸며진 삶이 참된 삶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망은 그래도 주덕해를 대표한 개혁개방 전 30년 우리민족의 로혁명가, 과학가, 로력모범들의 덕망과 위훈으로 하여 수립되였다.”는 허상림선생님의 사관에 동감이다. 최근 30년에 반짝이는 우리 민족의 앞니들도 예쁘지만 30년전 우리 민족의 “어금니”들이 그립고 거룩하다. 이 시각 발해사의 발굴, 정리를 위해 일편단심 “어금니”로 일해온 방학봉교수를 좀 더 일찍 “60주년에 만나본 60인”(《길림신문》공화국창건60돐특별기획)에서 정체적으로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오기활                          (《길림신문》2009.5.11.)    
426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댓글:  조회:847  추천:0  2022-11-22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나이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기없는 말이다. 나이는 먹을수록 정신은 강해진다고 한다. 부분적인 기억력이 떨어지는것은 뇌가 쇠약해져서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익숙해져서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늘 세상을 살피면 백살에도 치매를 모른다.”고 한다. 일본의 “백발”족들은 후반생을 제 2 인생의 시작이라며 사회에 다시 진출한다. 단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흥취를 발휘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생활을 보탬하며 움직일 때까지 일하고 공부한다. “자신이 아직도 젊었음을 과시하고 사회에서 아직도 자기를 수요한다”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연길성보호텔 정영채회장은 60을 시작으로 혼자 몸에 연변에 와서 역경을 이겨내며 오늘의 성공을 이룩했다.   유용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손자병법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한다.”고 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그러니 잘 싸워 승리할 밑천이 있다. 최종승부는 후반전에 난다. 후반전에 승리한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세계 1000명 발명가를 조사한데 따르면 창조력의 평균년령이 74세로 나타났다. 젊음은 선택이다. 미국의 랑만시인(롱뗄로)은 백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시를썼다. 그는 싱그러운 피부를 유지하며 활기찬 여생을 보냈다. 청춘의 비결이 무엇인가는 물음에 “나이가 든다고 생각하기보다 매일 조금씩 성장한다고 생각하는것”이라고 답했다. 로쇠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기를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온다. 남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즐기는 일을 찾아 하는 활동적인 사람이면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것은 어찔수 없지만 정신을 젊게 함은 스스로가 선택할수 있다. 늘 웃고 활동적으로 살면 주름은 늘어도 생기가 넘친다.   “신문독서와 즐기는 일로 현대화를 따라 간다”는 김봉구옹(84세)이 이를 말해준다. “인간은 자신의 립장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변화 시킬수 있다” 긍정의 힘으로 자기의 선택을 1%만 바꿔도 인생은 달라진다. 한국인간관계교원 정태일원장의 말을 추천한다. “정년을 마치고 발견한것이 있습니다. 60대는 설계의 초반이고 70대는 중반, 80대가 되여야 완성합닌다.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길림신문》2009.1.6.)                    
425    보이지 않는 도움의 힘 댓글:  조회:1375  추천:0  2022-10-17
성공이라는 정상에 올라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과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들의 주위에는 그를 아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황금열쇠는 결코 혼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지 않고 독불장군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만심이 가득하기에 제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혼자서는 많은 일들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설사 그런 리기적인 마음으로 운이 좋게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얼마를 버틸수 있을가를 본인도 잘 모르고 지낸다. 모두에게 타인들과 서로 힘이 되여주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때문에 모든 일이 잘되여 성공했을 때에는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세계적인 명작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친구가  알렉스 헤일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 친구는 친구의 사무실에 걸린 사진을 보고 의아해 하였다. 사진은 거북이 한 마리가 높은 담장 위에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였다. 그래서 친구는 비양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웬 거북이 사진인가? 이 사진은 자네의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초라한 작품이로군.” 이에 헤일리가 대답했다. “례사로 보면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진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는 둘도 없는 사진이네.  거북이는 걸음이 느리고 또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담장 위에 오를 수 없지,. 분명히 누군가 도와준 것이야. 이 사진은 ‘내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만에 빠질 때마다 큰 가르침을 주네.” “거북이처럼 모자라고 부족한 내가 이 높은 자리에까지 어떻게 올라오게 되였는가를 말이야. “이 사진은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굉장한 사람’이가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일세.” 친구는 ‘굉장한 사람’의 이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뭇사람들의 조그만한 정성이 쌓이고 쌓임으로써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저는 원님의 덕분에 나팔을 많이 불었습니다”는 말처럼... 오기활
424    우리가 마음속에 誠자 하나만 갖고 살면... 댓글:  조회:1400  추천:0  2022-10-01
사람은 권력, 돈, 명예...등 모든 걸 다 갖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도 거의 많은 사람들은 모든 걸 다 갖고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고뇌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이 정신적 만족을 얻었다면 곧 행복한 삶이다. 정신적 만족을 느끼는 자만이 진정 성공한 자이고 진정 행복한 자이며 보람있게 사는 자이다. 고금중외의 인생사를 살펴보면 정신적 만족을 느끼려면 그저 마음속에 성(誠)자 하나를 깊이 뿌리내리고 살면 될것 같다. 성(誠)”은 이쁠 성이요 공경할 성이며 또 살필 성이고 진실 성이며 정성 성이라고 하겠다. “성”은 믿음을 갖고 사는 것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갖고 사는 것이며 주위를 두루 살피면서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거짓도 없이,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의 길”을 걸으며 사는 것이다. “誠”은 말씀 언(言)에 이를 성(成)의 합자(合字)로 “말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誠”자를 좌(左)순으로 보면 “말(言)이 된다(成)”로 이는 일이 잘 풀려 해결될 실마리가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誠”을 마음에 품고 살면 모든 일이 수월히 풀리고 겪어야 하는 괴로움에서 절로 풀려 나오게 된다. 또 “誠”자를 우(右)순으로 보면 “성공(成)적인 대화(言)”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성공적인 대화”는 혼자서 떠벌리며 살거나 혼자서 독차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말을 나누며 가진것은 함께 나누면서 성심성의로 남을 돌보며 부드럽고 일관하게 산다면 곧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곧 시작할 때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건성건성 살지 말고 “성”자 하나를 마음에 두고 살면 건강, 행복, 성공을 이룰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열심히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옳게 판단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뜻을 바로 세우고 모든 열과 성을 다해 살아 간다면 바로 당신이 뜻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하늘은 근로한 사람을 도우니까(天道酬勤).   오기활
423    밀려난 “孝”일가? 소외된 “孝”일가? 댓글:  조회:2979  추천:0  2022-08-12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情谊)와 사랑만은 수치로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다처럼 넓고 하늘 같이 높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비록 컴퓨터 만능시대라고 하지만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딱 집어 “이만...한 것”이라고 밝힐 수 없다는 점이 과학문명에 쫓기고 있는 우리가 한 가닥의 구원을 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일전에 도문시 옥림1구 사회구역 물업사무실 사무원이 하는 말이다. “이번에 도문서 크게 소문을 놓게 되였습니다. 글쎄 역병통제기간에 도문서 한 로인은 집에서 자살하고 다른 한 로인은 층집에서 뛰여내리는 투신 자살을 하였답니다.” 실로  놀라운 소식이였다. 필자는 두분 로인의 확실한 자살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그들의 자살원인이 밀려난 “효”? 아니면 소외된 “효”일가에  의문이 따른다.  필자가 금년 봄에 목격한 일이다. 어느 날 아침 8시 경에 필자가 도문시법원부근을 지나는데 한 로인이 두 팔목 걸음으로 다리를 끌면면서 큰길을 건너였다. 이에 호기심은 물론 측은한 생각이 떠올라 로인분한테 다가가서  아침부터 어디로 가는가고 물으니 한심하게도 자식들을 고소하려고 법원으로 간단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인을 물었더니 “나는 곡수촌에서 회계, 서기를 지낸 진x x요, 올해 80인데 다섯 자식들이 모두 부모를 멀리 하기에 자식들을 고발하려고 법원을 간다오”라는 것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떠올라 한동안 생각해 보니 이분이  40년 전에 필자가 홍광향정부에서 사업할때 홍광향 홍위촌남새대대(현 곡수촌)에서 회계로 지내던 “말더듬이” 진모모(한족, 당원)였다. 물론 80로인의 말씀만 듣고서 사실의 진가를 알수는 없지만 아무튼 부모가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밀려난” 것만은 확실한듯 하였다. 두 로인의 자살, 그리고 80대 진 옹의 처사는 가정에서 소외당하는 로인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함을 말해주는 충격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학술적인 조사통계에 의하면 가정에 있는 로인이 복지시설에 있는 무의탁 로인보다도 소외감을 더 느끼고 우울증도 심한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는 봉양할 자식이 없는 로인에 대한 양로보호를 운운할 단계를 넘어서 바로 집안에 있는 로인에 대한 경로문제가 사회의 관심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례의가 바르고 “효도” “효순”하며 도덕을 으뜸으로 숭상하던  전례의 미풍량속과 우리의 윤리관이 근대화의 세례에 이처럼 핵분렬로 가치관이 뒤집힌 것을 보면 인간이정의와 사랑에만 안일할 수가 없다는 차가운 느낌이 든다. 사회에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채찍질하는 세대교체는 무직업 로인층의 증가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로인문제를 사회의 정책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시급한 대책을 강구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에 앞서 경로와 “효”의 현대적 해석과 실천이 보다 선결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복고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교사상을 주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납득되고 리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양로, 경로, 효도 기준을 계시해 주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도문 ㅡ 연길택시에서 목격한 일이다. 동석했던 60대 남성이 택시기사와 오가는 말이다. 손님:  “연길에 가서 한 20분을 기다려 주오. 내가 일을 보고 인츰 돌아 설테니...” 기사:  “어머니를 보려 간다면서 어찌 인츰 돌아섭니까?” 손님:  “한 20분이면 되지. 엄마가 내가 가면 손을 잡고 울면서 놓지 않소. 남들 보기가 민망스러워서...” 기사:  “그게 바로 부몹지...” 손님:  “11시전에 돌아가서 마작을 놀아야 하오. 어떤 날에는 한 2000원씩 나드오...꼭 기다려 주오...” 그가 내리자 기사가 하는 말이 저 손님이 엄마를 보러 해바라기를 사들고 간다는 것이다. 손님이 내린후 동석한 70대 할머니의 넉두리다. “지금은 별난 세월이오. 자기를 낳아준 에미도 모르니...”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아들의 손을 잡고 우는 제 에미가 그렇게 민망한가? “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에 “글쎄...”라고 답할가 아니면 저런일이 많겠습두...” 어쩐지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효부모”는 있어도 “효자녀”가 없다던 누구의 말이 떠오른다. 오기활        2022년 “로인절”을 맞이하며 (8월 12일)  
422    “최상의 대잔치”에 최상의 영광 댓글:  조회:1375  추천:0  2022-08-10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 기념해이다. 필자는 자랑찬 주민(州民 )으로 우리 민족자치주 70수연을 열렬히 축하한다.  나는 1963년도에 중학을 졸업하고 귀향농민으로부터 도문시홍광공사,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에서 공무원, 연변일보기자로 근 60년간을 지냈는데 그중 기자로 근 40년을 활약하였다.   40년간 필자는 연변일보사 특파기자로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를 취재하였고 중한수교의 전기인물 한성호를 비롯하여350여 명의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 들을 인터뷰를 하였고 정년퇴직후에도 많은 신문기사와 언론을 발표하고 연변대학건교70주년 헌례작품으로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조,한문)을 비롯한6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필자는 자치주70주년수연을 맞으며 37년전  “중국인민해방군윁남전투영웅방문단”의 연변방문환영행사를 나의 고향 달라자에서 진향할때 그 행사를 내가 총기획한 그때를 떠올리게 되였다.  그번 행사는 나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최대의 영광이고 자랑이였으니 말이다. 내가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로 활약하던 때인 1985년 11월 중순 어느 날, 도문시당위 선전부 조호길 부부장이 나를 찾더니 오는 11월 30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웥남전투영웅보고단”이 연변에 오는데 주에서는 연변을 대표하여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 달라자에서 영웅보고단 환영행사를 진행하가로 결정했다면서 이 행사의 조직사업을 달라자 출신인 오기자가 맡을수 없겠는가는 물음었다. 이에 나는 그자리에서 동의 하고 조직에서 절대적으로 나를 믿으라고 하였다. 달라자는 당의 개혁개방정책후에 연변의 첫 “부자동네”와  첫 “텔리비죤마을”로 소문을 떨친데서 곡목을 비롯한 전기운, 류화청, 진모화, 왕광미 등 수명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달라자를 방문한 연변의 전형적익 농촌이다.  나는 조부장의 부탁을 맡자 달라자에 주재하면서 촌 당지부, 생산대 대무위원회, 부녀회, 로인협회에 상급의 정신과 기대를 전달하고 그들과  함께 반복적으로 토론하고 이런 원칙과 내용을 제정하였다. 1, 행사를 조선족의 미풍량속으로 ‘최상의 대잔치’를 베푼다. 2, 전체 촌민들이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첫날 새각시를 맞이하듯이 보고단일행을 맞이한다. 보고단의 유일한 녀성인 영웅기장 류효련을 조선족온돌방에 따로 모셔 우리 민족의 첫날색시옷단장을 시킨다. 3, 조선족의 풍속을 살려 큼직한 미닫이문짝위에 잔치상차림을 하고 붉은고추를 물린 삶은 수탉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상을 차린다.      4, 항미원조 전투에 참가여 부상을 입은 최창욱(64세)이 영예군인, 군속(막내아들이 군복무중), 로인협회, 전문호(양계전문호)를 대표하여 환영사을 올리고 잔치상의 첫술을 붓는다. 5, 마을의 젊은 각시들이 전체 영웅들에게 우리 민족 첫날각씨들이 남성들에게 드리는 전통적인 례물로  꽃쌈지와 꽃방석을 선물한다. 6,  조선족의 특색음식으로 “신선로”를 올리고 연변의 신제품을 홍보하고저 도문시 고체연로 화학공장의 최신 제품인 “고체연료”를 윁남 참전용사들에게 선을 보인다. 이런 원칙과 내용으로 “최상의 대잔치”는 조선민족이 친자식처럼 영웅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멋과 맛을 한껏 풍기였다. 29일밤, 영웅기장 류효련에게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첫날옷을 입히고 춤추고 노래하며 맞이하자는 합의는 보았는데 대체 류효련의 키와 몸배가 어떤지,... 이 밤에 어디서 옷을 챙길가... 등등의 궁리늘 돌리던 부녀대장 김숙자의 머리에 불시에 며칠전에 리순임이 새로 치마저고리를 준비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임이는 키가 크고 몸매도 고왔다. 그래서 이틑날 이른 아침 식전에 순임이를 찾아가 사연을 말했더니 순임이도 기뻐하며 자기도 입어 못 본 새치마저고리를 선듯 내놓아 큰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류호련에게 첫날옷차림을 시키고보니 키가 1.73메터나 되는 류효련에게 저고리는 그런대로 품이 맞는데 치마가 무릎치마여서 키골이 장대한 영웅색시의 무릅팍에 동동 매달릴 줄이야... 그래도 ”첫날 색시”는 허물을 모르고 기뻐하며 제법 조선족의 절까지 올리고 “이후에 북경에 갈 때마다 이 조선족옷을 입고 가겠다”고 말했다. 꽃방석과 꽃쌈지를 영웅들에게 선사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선포되자 동네의 새각시들이 저마다 농짝을 뒤졌다. 김옥자녀성은 이것저것을 고르다가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어머니를 졸라서 시집올때 시아버님게 올렸던 꽃방석을 도로 찾아냈고 한복순아주머니는 시집 간 딸의 몫까지 꽃방석을 네개나 준비했다. 부녀대장 김숙자는 새 꽃방석에 주름이 간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산뜻하게 다리미질하고도 성차지 않아 포근한 새솜을 더 놓았다.  환영사와 첫 술잔 “임무”를 맡은 최창욱로인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항미원조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상처를 매만지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새하얗게 보냈다. 이틑날 이른 아침, 최로인은 시집 간 큰딸에게 도문에 가서 제일 고급적인 포도주를 사오라고 부탁하고 로친에게 제일 큰 수탉을 잡아서 통채로 삶고 입에 커다란 붉은 고추를 물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큰상에 오른 붉은 고추를 문 수닭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던 영웅들이 안내자의 번역소개를 듣고서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최상의 대잔치”를 보았다며 열정적인 박수로 사의를 표하였다. 최창욱의 환영사가 끝나자 당년에 항미원조전투에 참가했던 “훌륭한 간부”대표 장옥루가 제꺽 일어나 최령감위 손을 굳게 잡더니 오늘이 뜻 깊은 로전우와의 만남이라며 기자들을 청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첫술잔을 받은 “독담영웅” 진흥원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 서더니 “나는 이때까지 상한 눈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만은 최아바위와 함께 술잔을 나누렵니다.”며 단모금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입에 술잔을 대지도 않던 최령감도 두손 들어 술잔을 굽을 내고 나서 “나를 선배로, 전우로 대해주는 젊은 영웅들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고맙다”며 허리굽혀 감사를 표하였다.... 오후 세시경, 영웅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자 뻐스가 “뿡” “뿡”경적을 울리며 몇번이나 시간을 재촉하는데도 군민들은 석별의 눈물을 머금고 끼리끼리 모여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조선족들은 우리 자제병에게 특수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친인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리를 눈물로 바래겠습니까!  우리들은 돌아가서 잘 싸우겠습니다. 절대로 조선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독담영웅”진흥원이 눈물을 머금고 하는 말이다. 차들이 부르릉 거리며 당금 떠나려는 때였다. “좀 기다리세요, 이걸...” 멀리서 부녀대장 김숙자가 헐금씨금 달려 오더니 “책임자 동무 , 이 치마가 꼬리 치마여서 류호련에게 딱 맞을 겁니다.”며 곱게 싼 치마를 주었다. 그때야 사람들은 어느 사이 에 숙자가 자기가 입었던 비로도치마를 바꿔 입은 것을 발견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사랑만은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도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과 같이 높다고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사가 끝난 이틑날 출근하니 조호길부부장이 기자사무실을 찾아와 “오기자, 어제 대잔치를 정말 멋지고 뜻깊게 조직하였습니다.”며 감사해 하였고 며칠후 도문시당위 반공실 김두국주임이 나를 만나 “지난 행사를 총 책임진 주당위 문교서기(김성화)가 오기활기자가 쓴 “최상의  대잔치”를 잘 보았다면서 도문서 이번 행사를 참 잘 조직하였다는 표양전화가 방금 왔다고 하였다. 최상의 영광은 이뿐만아 아니다.  이듬해  8월초 “최상의 대잔치”에  무상으로 신선로 설비와 연로를  제공했던 도문시 고체화학연료공장 리흥범공장장이 필자를 찾아와 “오기자가 “최상의 대잔치”에 선을 보인 우리공장제품이 “ 8.1특별 선물”로 선정되였답니다”며  자랑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86년 6월 26일, 이 공장의 회계(김광훈)가 일로 하여 성도 에 가는 걸음에 지난번에 “최상의 대잔치”에 성도군구 윁남전투영웅들에게 선을 보인 고체연료를 우(雨)량이 많고 우기가 긴 남방지구에서 홍보하고저 샘풀을 가지고 갔다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중윁전쟁의 제1선 참전군인 성도군구 정치부 군중사업부를 찾아가서 자기네 공장에서 생산하는 고체연료를 “”8.1 선물”로 증송하겠다고 하니 군중사업부 주임이 “성의는 반갑게 받겠지만 지방의 위문품을 받지 말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다”고 하기에  한번만 써보라면서 고체연료샘풀을 넘겨주고 주숙처를 알려주고 돌아 왔더니 이틀후  낯모를 군인 2명이 찿아와서 동무네 제품을 시험사용을 해보고 너무나 좋기에 군구 제1사령원인 료사령원이 “동무네 공장의 위문품을 받으라는 특별허가를 하였습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이 공장에서 지난 7월 24일 자기공장 제품 10상자를  “8.1특별위문품””으로 청도군구에 부쳤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각 필자는 37년전의 “최상의 대잔치”를 떠올리 최상의 영광을 만끽한다. 필자는 이 글을 연변조선족자치주 70수연례의 “최상의 대잔치” 선물로 올리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쟈유(加油)!! 를 높이 웨친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2.7.27
421    내가 본 중국인민해방군 대좌 댓글:  조회:1327  추천:0  2022-08-01
《8.1》 건군절을 며칠 앞두고 필자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리광남을 만나 1박 2일을 함께 식사하고 주숙한 기회를 가졌다. 리광남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장비부 고급공정사, 전문기술대좌이다.  리광남(1950년 출생)은 1970년에 참군, 1995년 대좌계급을 수여받았다. 그는 선후로 과학연구항목 수십건을 완수하여 1, 2, 3등 공을 기입받고 3차나 파격진급을 하였다. 리광남은 1994년 전군영웅모범대표, 공군사회주의정신문명건설 본보기, 제1차중국청년과학기술창업상 수상자, 북경인민정치협상회의 제10기 위원이다. 2006년 예술영화 《은제비의 수호신(猎鹰守护神)》은 국산 전투기의 고장을 해제하여 막대한 손실을 제거한 업적을 주제로 한 공군 1등 공신인 리광남의 사적과 형상을 노래한 영화이다. 그런데 필자가 만난 리광남은 수수한 평복차림에 류창한 우리 말 사투리를 하는 소박하고 열정적인 《농촌생산대장》이였다.  그래서 필자가 고 물었더니 고 답했다. 부모님들이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 하는 말이 고 하더란다. 그로부터 리광남은 부모님들의 기대에 따라 이 안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자기만이 아닌 그의 두 딸도 덜된사람이 아닌 참된사람으로 키우려고 집에서 조선말을 하도록 강요했단다.   음식을 주문할 때 그는 수수한 민족음식, 평민들이 즐겨마시는 연변산 술 등으로 접대측의 고급술과 비싼 료리를 대체하였다. 우리 둘만의 간단한 아침식사때에도 그는 《오랜만에 맛본 어머니 손맛》이라며 우리 민족의 음식을 제일 좋아하였다. 그리고 식비 결산도 기어코 자기가 나서서 결산했다. 필자는 50년대에 마을에 주둔한 부대사관들을 본적 있는데 군관들의 일상적인 생활 잔일은 통신병 혹은 보위병들이 모두 챙겨드리는것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모한 수장들을 통신병이나 보위병들이 수행하며 여러모로 도와주는줄로만 믿어왔다. 그런데 리광남공군대좌는 호텔에서 손님에게 빨래봉사도 해주는것을 알면서도 자기 손으로 여러 벌이나 되는 옷을 깨끗이 빨았다. 심지어 때밀이 손수건까지 휴대하고 다니며 평민들마저 찾는 때밀이도우미를 청하지 않았다. 필자가 더욱 감동을 먹은것은 그가 《흰 빨래는 자신이 없어 부인에게 의탁한다》며 입었던 흰적삼을 그렇게도 정연하게  차곡차곡 개여 트렁크에 넣는 모습이였다. 《어쩌면 대좌가 그렇게도 세심하고 알뜰합니까?》 《40여년간 해온 군생활 습관이지요.》 실로 한방울의 물방울로 태양을 볼수 있었다. 리광남의 고향사랑, 민족사랑은 보통정도가 아니였다. 그는 번마다 인터넷에 오르면 습관적으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연변인터넷방송 순으로 신문공부를 한단다. 그리고 길림신문은 집에까지 배달된다면서. 지금 화룡시경제고문을 맡은 그는 이번 걸음에도 피뜩이나마 화룡과 룡정에 다녀왔다며 연변의 발전에 일가견을 내놓았다. 이번 자치주 60환갑에 몽골족이 축가를 부른다는 필자의 말을 듣고 《그러면 안되지, 그래도 춤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는 민족으로 소문난 우리 조선족이 주제가를 불러야 한다》며 당장 구체정황을 알아보겠단다. 리광남은 자기의 모교도 잊지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리는 시각부터 스케줄이 촘촘이 째였지만 그는 아무리 바빠도 새 교사를 짓는다는 건공소학교를 찾아 봐야 한단다. 모교를 사랑하고 모교의 건설에 한몫을 담당하는것은 학생의 직책이라면서. 내가 만난 공군대좌는 간고소박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조선족의 중국인민해방군으로 초심을 잊지않는 학습형의 비범한 조선족 공군대좌였다. /오기활   [ 길림신문 ]:  2012-07-30
420    자치주 창립 60돐에 선물하는 나의 기자생애 30년 댓글:  조회:1069  추천:0  2022-07-24
        9월 3일은 우리 주 환갑날이다. 이 기꺼운 명절을 맞아 필자는 영예로운 주민(州民)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산파이며 초대주장인 주덕해동지를 심심히 추모한다. 1984년 5월 12일, 중공중앙 호요방총서기는 연변을 시찰하며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의 아주 훌륭한 동지이며 조선족의 수령이다》, 《모주석과 주총리는 여러번이나 주덕해동지를 훌륭한 동지라고 말씀하셨다》며 연변에 주덕해기념비를 세울것을 지시하였다. 1986년 7월 3일, 《주덕해기념비》제막식에서 당중앙을 대표해 황광학동지는 《주덕해동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걸출한 대표이며 중국조선족인민들이 공인하고 경모하는 지도자이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이 60년이라면 필자는 거의 30년을 기자로 지냈다. 이는 자치주가 30년간 필자를 기자로 키웠다는 말이다. 오늘 필자는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나는 이렇게 기자사업을 하였다》는 내용을 자치주 환갑에 올리는 선물로 올린다. 2006년 11월 21일, 나는 《기자와 꽃》이라는 글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다. 아래는 《기자와 꽃》전문이다. - 11월 8일은 기자절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연길시당위에서 기자절 축하로 드린 생화바구니가 신문청사 로비에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 시각 나의 기분은 1988년 2월 14일, 도문시 김종수시장이 전 시 년말총화대회에서 《오기활기자를 표창할데 관한 도문시인민정부문건》을 읽으며 《연변일보사 오기활기자에게 기공(記功)표창을 한다》고 선포하던 그때만큼 기쁘고 감사했다. 나는 언제부터 기자를 꽃에 비교한다. 지난 1964년 연변인민방송국 서명준기자가 사회주의공작대로 우리 마을에 파견되여왔다. 그때 서기자는 우리에게 많은 세상사를 들려주었다. 나는 기자가 정말 부러웠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한대로 된다》고 하더니 서명준기자를 만나 꼭 20년만에 나는 행정승진을 포기하고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로 입선되였다. 나는 기자를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해사, 《신》(상급)의 뜻과 인간(백성)의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천사》라고 말한다. 바로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거금을 주고 살수 없다는 우량고추종자(황관단)를 무상으로 기증받아 연변의 남새생산발전에 일익을 주기도 했다. 또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엄동설한에 강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원한 도문시양로단의 고만길의 영웅적사적을 신문에 발표하여 전 연변은 물론 전 성교통분야에서 《뢰봉학습 우수로동자》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를 일으킬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자의 사회적책임감으로 연변의 《이웃절》을 발기하였다. 나는 기자를 꽃에 비긴다. 옛날 하늘의 《신》이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3가지 아름다움을 보고 돌아오라고 했다. 천사는 천상과 손색없는 아름다운 꽃과 어린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지상의 아름다움으로 선택하였다. 꽃은 지상과 천상의 미의 상징이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다. 꽃은 묵묵히 향기를 뿜는다. 꽃은 철을 어길줄 모르며 음지와 양지를 탓할줄 모른다. 눈속에서도 어김없이 약속대로 제철에 핀다. 아름다운 련꽃은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삭막하고 어두울 때 꽃을 보면 저도 몰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다. 사색, 사랑, 희망, 용기를 주는 꽃은 인생의 영원한 오아시스다. 나의 좌우명은 《먼저 인간이 되고 후에 기자로 되자》이다.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로 되지 말고 참다운 언론인이 되자, 독자들의 가슴속에 메아리를 치는 글을 쓰며 꿈틀거리는 사건현장에서 십자가의 참된 천사로 되자.) 이는 내가 기자사업을 시작한 초심이며 기자로서 지켜야 할 도덕이며 평생을 지켜갈 맹세이다. 필자는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소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오염을 모르는 《련꽃기자》가 되려는 다짐으로 이 밤을 설친다. x x x 실로 그랬다. 나는 지난 30년간 수십만자에 달하는 기사를 써내 연변의 물질문명건설과 정신문명건설에 기여를 했다. 아래에 《기자와 꽃》에서 곁들었던 세가지 실례로 이를 증명하련다. 먼저 고추종자이야기다. 1987년 1월 10일, 《연변일보》는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는 나의 기사를 톱기사로 발표했다. 기사 전문이다. -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 당장 청년들을 묶어세워 문화실이라도 꾸려야 하지요.》 지난해 순수입을 만원이상 올린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 리명달농민이 지난 12월 26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농민들의 절박한 수요는 무엇입니까?》 《과학기술전수와 기술정보이지요. 전 시적으로 우리네 오이생산량이 제일 높은 축입니다. 그런데도 지난해에 포기당 오이가 60여개씩 열렸지만 대부분이 절로 떨어져 결국 한포기에서 10개밖에 뜯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제문제를 가지고 과학기술부문에서 단위당 수확고를 높일데 관한 기술을 전수해준다면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내가 어느 잡지에서 보았는데 산동성 이남지구에 외국에서 인입한 고산량 고추품종이 있다는데 고추 하나 무게가 250그람 내지 750그람씩 된답니다. 이런 우량종자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면 어느 농민이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기자의 물음에 주는 보통농민의 갈망적인 대답이다. x x x 이 기사가 발표된 후 필자는 이 신문기사와 함께 조선족농민들의 간절한 념원을 담은 편지를 산동성 이남현남새연구회에 부쳐보냈더니 1987년 2월 16일에 이 연구회의 주순(朱順)이 조선족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담은 간단한 편지와 함께 다 팔고 더는 없다며 30여개의 귀중한 미국품종 《황관단》고추종자를 보내왔다. 기자로서는 너무도 뿌듯하였다. 나는 이 고추종자를 리명달농민에게 전달했다. 몇년간 노력으로 리명달이 번육한 《황관단》고추는 매 평방메터당 10킬로그람의 고산량을 따내 동네를 놀래웠다. 《황관단》고추의 한개의 평균 무게는 450그람, 큰것은 750그람이나 되였다. 이로 하여 주변에서 《오이보다 더 무거운 고추가 나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며 이 고추가 길림성우량고추품종에 평선되였다고 했다.   1989년 6월 11일 연변일보 1면에 실렸던 《황관단》고추 보도   다음은 고만길에 관한 보도다.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는 1면 톱기사로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라는 제목으로 나의 글을 실었다. 글은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이 1986년12월 24일 엄동설한에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낸 감동적인 사적을 소개하였다. 그때 필자는 40여일간 고만길이 걸어온 발자국을 밟으며 근 100여명의 목격자를 취재하였다. 고만길은 1971년이후 몇년간에 선후로 4차례나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했고 남을 위하여 가는 곳마다 수두룩한 좋은 일을 하였으며 5차례나 선진생산자로 표창을 받았다. 1987년 3월 10일, 중공도문시위와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고만길에게 《자기를 잃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그에게 1등공을 기입하였다. 동년 8월 7일, 중공연변주위와 주인민정부는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1988년 5월 28일, 길림성교통청은 도문서 전 성 교통계통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우수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도문시인민정부에서 필자를 기공(記功)표창하자 연변일보가 《본사 력사에서 본사기자가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기는 오기활기자가 처음이다》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고만길취재를 마치고(뒤줄 왼쪽부터 고만길, 필자, 도문양로단 당지부서기 박봉구) 올해는 뢰봉 타계 50주년이며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 배우자》는 제사를 쓴 49주년 기념해다. 중국공산당 제17기 제6차 전체회의에서는 《뢰봉을 따라배우기 활동을 깊이있게 전개할데 관한 결정》을 지어 뢰봉을 따라배우는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를 구축하는 필요한 고리이며 사회주의 문화강국을 건설하는 유력한 조치라고 하였다. 지난 2월 29일 필자는 당의 호소에 따라 25년만에 두번째로 고만길을 취재하고 《80년대 연변의  오늘은 어떻게 지낼가?》는 기사와 함께 당년에 연변일보에 실렸던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란 기사의 전문을 인터넷길림신문에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기사전문을 인민넷(조선문판)을 비롯한 흑룡강신문, 연변인민방송국 등 신문매체에서 전재하였다. 그 다음은 《이웃절》발기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간 화목은 조화사회를 건설하는 기초의 기초의 기초다. 그런데 도시의 거주문화변화와 농촌호도거리보급은 도시와 농촌에서 《이웃사랑》이 식어가는 현실을 초래했다. 이런 실정을 파악하고 필자는 2005년 10월에 《이웃절을 내오자》는 글을 《지부생활》편집부에 보냈다. 글에서 필자는 《이웃절》이 있게 되면 사회공덕, 후대교양, 민족단결에 유리하고 간부와 백성 관계를 개선하는데 필요하며 빈부차이를 줄이는데 리롭다는 근거를 밝혔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조화사회건설에서 《이웃절》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때에 가늠하고 필자의 글과 함께 편집부의 글을 실었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이웃절》전문란을 설치하고 전문기자를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로 《이웃절》을 보도하고 《이웃절》에 따르는 지상토론을 벌였다. 지상토론에서 지부생활편집부는 《편집자의 말》2편, 문자기사 29편, 사진보도 19폭을 발표, 독자, 사회구역, 주, 시 관계부문 책임자들이 참여한 《이웃절좌담회》를 조직하며 《이웃절》토론을 종심에로 이끌었다.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은 지금 연길, 왕청, 룡정, 돈화 등 시와 현에 파급되여 《이웃절》이 자원적이고 대중적인 《필요명절》로 부상, 몇년전의 《친척잔치》로부터 오늘의 《동네잔치》로 파급되고있다.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은 연변서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의 《이웃절》활동을 취재, 정치문화부 원건달부주임은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이라며 인민일보에 연변의《이웃절》을 대서특필하였다. 나의 30년 기자생활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키워낸 30년이다. 나는 기자사업을 무한히 사랑한다.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지금까지 길림신문사에 초빙되여 1선기자로 활약하고있다. 2009년 11월 10일, 나는 기자절 10주년을 맞이하여 《기자정신만세!》를 발표했다. 필자는 글에서 《엄격한 자기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 거기에 평생 분투한 정신이 오늘의 기자정신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언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자치주 환갑에 필자는 30년간 기자선문집인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오기활기자가 만난 사람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다-오기활 일사일언》을 책으로 출판해 《환갑선물》로 하고저 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 교부했다. 나는 이 책이 출판되면 연변의 두가지 문명건설에 단 얼마만의 힘으로라도 될것임을 굳게 믿는다. 나는 《비문없는 벼슬》선배님들을 본보기로 《평생기자》에 도전하며 평생을 《피줄속에서 잉크 흐르는 기자》로 될것임을 다시금 다져본다. 이 글을 맺으며 힘차게 불러본다. 연변 화이팅! 기자정신 만세!   오기활        길림신문              2012-09-17  
419    품격 있는 인간으로 가는 첫걸음 댓글:  조회:1979  추천:0  2022-07-13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상치 못했던 이(일)들이 큰 도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사실 세상일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아군이 되고 래일에 또다시 적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가능하면 많은 이들로부터 호감을 사두는 게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인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다고 해도 서로 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알 수가 없다. 대화를 하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서로 알기 전에는 각기 다른 섬과 섬으로서 그 섬에 다리를 놓는 것이 바로 인사이다. 이런 실화가 있다. D라는 영업사원이 어느날 수차나 다녔지만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거래처에 또 다시 갔다. D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중년 사내가 허겁지겁 뛰여오는 것이 보였다.  D는 열림 버트를 누르고 기다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날이 덥지요?” 중년 사내는 D를 힐끗 돌아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D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후 이 회사의 자재 과장을 찾아가 자기 회사의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열심히 제품카탈로그를 보이면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자재 과장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 오늘도 틀렸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좀전에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D는 다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니,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 우리네 부사장님을 어떻게 아세요?” 자재과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놀란 D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 부사장이 D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자재 과장의  설명을 들은 그는 잠시 D네 회사의 카탈로그를 살펴보았다. “김 과장, 이 회사에서 생산한 자재라면 믿어도 돼.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직원들이 생산한 자재거든.”   D가 일 년 동안 드나들고도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회사와 단숨에 거래를 틀수 있게한 것은 화려한 미사려구도, 여러 차례의 접대도 아닌 단 두번의 인사였다. 성공한 사람은 대개 인사를 잘 한다고 한다.  1990년 11차 북경아세아경기때에 필자가 경험한 사례이다. 그번 기회에 한국 통일원에서 중국 연변일보사에 무상으로 기증할 채색텔레비와 사진기(각각 10여 건)를 갖고 왔다며 연변일보사 림장춘부사장이 북경아세아경기 취재팀 부주필 팀장에게 한국 통일원의 서씨를 찾아가 한국에서 보내온 기증품을 찾으라고 하였다. 이에 팀장이 기증품을 찾으려고 북경공항 해관에 갔더니 공항측에서 상당한 액수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하기에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림장춘부사장이 그 임무를 필자에게 맡겼다. 그래서 한국통일원 서씨와 함께  직접 북경공항해관관장실을 찾아갔더니 사무실의  문은 열려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것으로 알고 기다리던중 관장사무상의 유리밑에 깔려 있는 “전국우수해관관장회의 기념사진”을 발견하였다. 필는 혹시 그 사진에  도문해관관장이 있는가는 호기심에서 사진을  한참 보고 있는데 키골이 장대한 녀성이 들어왔다. 필자는 그분을 관장으로 짐작하고 "관장님 안녕합니까?"며  허리굽혀 인사를 올리고 나서 “내가 이 사진에 혹시 도문해관의 염홍록과장(전국 해관일꾼모범임)이 있는가고 함부로 사진을 보는 중입니다”며 미안함을 표했더니 그 녀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나와 함께 사진을 보면서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나는 바로 이 때를 기회로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 녀가 하는 말이 “기증품”과 “증정품”은 의미가 다르다고 해석하고 나서 “원래는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오늘은 세금을 내지 말고 그냥 찾아 가세요”라고 하였다. 그때 한국통일원의 서씨는 "오선생이 신문사 령도분이 못해 낸 일을  해냈습니다”며 정말 대단하다며  기뻐하였다.  .  인사란 한마디로 인간생활의 “상식”이다. “동의보감”에 “인사는 사람으로서 할 일과 해야 할 일이다”고 하였다. 인사는 노력하면 누구나 다 잘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인사를 아부로 여기거나 느끼하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성공은 커녕 사회 생활을 할 자격조차 없다. 출군할때 아내에게 “여보, 갔다 올게, 감사해”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하시네요.”  회사에 도착하면 “안녕하세요,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 따라 얼굴이 환해 보이시네요” “아마도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 ...등 고운말로 인사 하는 습관을 기르자.   훌륭한 인사는 품격있는 인간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오기활  
418    자택양로를 선도하는 《의창가호》(医创家户) 댓글:  조회:1964  추천:0  2022-07-10
‘양로’는 로인을 봉양하는 일로서 고령화시대 뭇사람들의 보편적인 관심사로 되고 있다 .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19사태로 하여 많은 로인들이 병을 보이는 면에서 불편을 겪는 실제문제에 립각하여 연길시 익수당종합진료소(益寿堂综合门诊) 리철범 원장은 ‘의창가호'(医创家护)라는 양로브랜드를 개발하고 경영에 들어섰다. 의창가호는 병원을 기반으로 하여 가정도우미와 온라인, 오프라인 방문 및 병치료를 일체화한 회사차원의 양로브랜드이다. 이 품목은 엄격한 전문양성훈련을 거친 가정보호사(가호사)와 심리자문사들로 봉사가 필요한 로인들이 자택에서 생활보호와 건강회복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생활기구 수리며 생활용품 구매, 비용납부 등 일상 처리를 대신해주고 로인들의 식사와 약 복용을 관리해 드리면서 로인들로 하여금 자택에서 편안한 양로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의창가호의 총경리 일을 맡고 있는 리경옥 녀사는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가 불편한 점이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전문적이지 못하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여 병원을 기반으로 로인들의 건강을 책임지면서 어떻게 로년생활을 안전하게 편안하게 의미있게 보내게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에서 10년 생활했고 귀국하여 대련에서 16년간 살면서 중국의 전문학교들과 손잡고 간호사며 가호사를 양성하여 일본양로시설에 보내는 사업을 해 오던 중 년로한 친정어머니를 돌보러 연길에 와 눌러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선진적인 양로시스템과 이곳 양로현실을 비교해 보면 ‘도와주는 것’과 ‘도맡는 것’이 전체적인 차이”라고 한다. 일본은 최대한 로인들의 자립성을 강화하고 못하는 부분을 도와주면서 될 수 있는 한 로인들을 고무격려하여 자립하도록 한다.그리고 식단을 보면 로인들마다 다르고 매끼마다 다른 것에서 참 존엄있고 인격 있는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은 가정보호사들이 모든 일을 도맡아하면서 로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하고 또 그것을 서비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의창가호는 이런 차이를 고려하면서 아픈 로인들한테 치료를 거쳐 될 수 있는 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서비스를 하려는 가호사들과 서비스를 받으려는 로인 쌍방에 대한 교육을 우선 하면서 쌍방의 존엄과 인격을 수호하고 보호받도록 하며 쌍방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적합한 관리를 한다. 다음은 가호사들의 마음가짐, 기교, 기능을 가르쳐 전문성을 높이고  ‘보모'나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도우미'로서 로인들이나 한 가정을 보호하고 문화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제2인생을 산다'는 인식을 바꾸도록 교육을 한다. 또한 서비스를 원하는 로인들 가정방문을 하고 로인들 신체상황, 경제조건, 가정환경을 체크하여 서비스가 필요한 부분과 합당한 시간대며 양로방식을 합의하고 3방계약을 맺고 관리를 진행한다.  가정보호사는 남녀를 불문하고 50세로부터 70세에 이르는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이 년령대에는 시간이 많은 분들이 많다. 50세-70세의 건강한 분들을 교육시켜 이런분들이 지금 80세-90세 로인을 섬기면 자신들도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고 또 그들이 80-90대가 될 때면 전문성이 높고 존엄있고 인격있는 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란다. 현재 의창가호에서는 로인들의 실제상황에 따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주1차서비스- 일주일에 한번(월 4차) 씩 영양음식 마련, 약 사용관리, 청소와 목욕, 빨래를 책임지며  기타 비용 대리납부,각종 기구 수리. 둘째, 반자립양로- 청소, 빨래, 목욕, 음식 서비스 제공, 수리, 구매, 비용납구 대신 처리, 필요시 의사 왕진 치료.  전문 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하며  8시간-24시간씩 매주 월요일-토요일. 셋째, 완전보호양로 –청소,빨래, 목욕, 대리 사무처리, 영양음식 마련, 약 사용 관리와 지도, 필요시 왕진 치료. 전문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 매일 8시간-24시간 월요일-토요일까지.  넷째, 일탁식(日托)양로-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 저녁 두끼 식사, 물리치료, 문체활동, 저녁 귀가. (현재 환경조건 마련 중) 다섯째, 룸메이트식(合伙) 양로- 3명, 4명 로인들이 한집에서 보호사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가정적인 생활을 한다. 청소, 빨래, 영양음식제공, 약 사용 관리와 지도, 필요시 왕진치료. 전문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 로동시간 (8시간-24시간). 리경옥 총경리는 “새로운 양로문화를 만들어 어머니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들까지도 쭉 이런 인격있는 양로를 받고 싶어 스타트를 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양로문화를 바꾸는 일은 현시대인들의 사명이고 이런 효문화를 실천하는 것 역시 신생사물로서 사회 각계의 지지와 성원이 필요하며 많은 봉사자분들이 동참하여 함께 노력할 것을 권장한다. /김청수기자                                       길림신문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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