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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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댓글:  조회:2317  추천:1  2012-04-20
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2007.07   내가 있는 곳엔 웃음이 있도다-   웃음은 우리 생활의 윤활제이고 활력소이다. 중국말에 10년 웃으면 백년 장수한다는 말이 있듯이 웃음은 우리 생활의 그늘을 가셔주고 세월의 주름을 제거해주며 또 랑만, 쾌락, 즐거움, 행복을 만들어준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로인들에겐 자식들의 효도도 효도지만 웃을 때보다 즐겁고 행복할 때가 없다 한다. 심양시조선족로인들에게 "재간둥이", "보배둥이"로 불리우는 강영삼씨, 그도 예쉰 후반의 로인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특유의 재치와 유모어로 항상 로인들을 웃기군 하여 그가 있는 곳엔 폭소가 그칠줄 모른다. 그래서 주변에선 그를 "우리의 코미디"라고 친절하게 부르기도 한다.   하하- 웃고삽시다   강영삼씨는 코미디라 불러도 손색없다.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언제나 폭소가 터지고 씨원한 웃음바다가 펼쳐지며 또 어떤 때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눈물과 코물이 나오게 하기 일쑤다.   그는 자신이 천생적으로 롱담을 잘하는것이 아니라 다만 웃기 좋아하다보니 남을 웃기게 되였다고 했다. 특히 로년생활에 접어들어 로인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가정의 불화목, 로년기에 오는 우울과 고독감, 여러가지 병으로 인한 고통... 등으로 하여 웃음을 잃어가고있는 로인들에게 웃음과 건강을 주기 위해 자기의 모든 재치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로인들이 웃으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상 쾌락을 줄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리롭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기자가 그에게 웃음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면서 "난 관상쟁이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해서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지. 다만 소품을 좀 연구하고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의 심리를 더 연구한것뿐이야."라고 실토한다.   "내앞에선 안웃는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는 그는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그와 몇마디 말을 건네보고 묘한 웃음거리를 만들어낸다. 한번은 젊은 한족음악애호가들과 한자리에 앉았는데 그중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아 서로가 어색한 분위기였다. 누구하나 말문을 먼저 열지 않자 그는 "오늘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다 나의 선배다. 이 동생이 여러 선배들한테서 많이 배우고싶다."고 말해 젊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이내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그들과 친숙해졌다한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나 생소한 장소에서도 그는 약간 분위기만 파악하면 순간적으로 머리에 웃길수 있는 령감이 절로 생겨난다고 한다. 그에게 웬간해서 웃지 않는 조카애가 있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놈은 웬간해서 웃지 않는다. 한달에 한번씩 웃지, 그래 1년에 12번 웃을가 말가."라고 그 조카도 피씩 웃고말았다 한다.   조선사람을 만나서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평양말을 흉내내여 웃겼고 로인과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는 무작정 웃음을 유발시키는것이 아니라 장소와 년령, 시간을 봐서 웃음거리를 척척 묘하게 만들어내 듣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출연한 소품에서도 그는 자신의 재치와 장기를 남김없이 연출했다. "세방살이", "감주", "바보나으리", "술친구" 등 소품에서 그는 못난이(小芻), 머저리, 바보 등 역을 맡아서 관중을 웃겼다. 평안도인 그는 평안도말 자체가 사람을 웃기기에 평소 평안도사투리를 많이 쓰고 장소마다 다른 사투리로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신이 구겨지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웃길수 없다는 그는 챠플린 등 동작을 너무 근사하게 흉내내였는데 어떤 사람은 아예 강영삼씨를 보고 "채플린" 또는 "떨만이"("세방살이"의 인물)라 불렀다. 그는 대창(對唱)을 잘 불렀는데 학교교사때 "우리 소녀 백점 맞았네"를 학생과 같이 대창하여 전교를 들썽케 했고 최근에는 "요렇게 조렇게" 라는 대창을 불러 장내를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두 누이나 녀동생들이나 또 그의 두 아들딸들이나 모두 옷기기를 즐긴다. 그래서 처녀때 새차고 말수가 적었던 그의 안해도 성격이 개변되리만치 활달해졌다. 온가족이 항상 무뚝뚝하게 있는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웃기기 시작하면 웃기기 시합이라 하듯이 우스개소리가 떨어질줄 몰라 시종 화기가 돌았다.   그는 우리말 사투리 자체가 웃긴다며 시간이 있으면 우리말 사투리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싶다고 했다.      소개신 한장에 사라진 꿈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잘해라" 부친의 이 한마디 말은 학생시절 그가 학업에 열중할수 있었던 동력이 되였다한다.   신빈태생인 그는 7살되던 해 심양으로 이사했다. 처음엔 서탑 정미소 부근 한 일본집에 들었다가 1년뒤 명렴가로 이사해서 그는 명렴대리조선족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어릴때 얼마나 까불었는지 이사오던 날 그는 남잡목역에 들어서는 기차를 불과 5메터 앞두고 레루길에 서서 놀다가 렬차관리원에게 붙들려 호된 꾸지람과 매를 맞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씨름을 잘해서인지 그를 당해낸 사람이 없는 주먹대장이다. 그의 가족이 대흥향 전성촌이라는 중국동네에 이주하는바람에 그는 소학 6학년을 졸업못하고 한족소학교에 전학하여 4학년에 입학했다가 중국어를 도무지 알아듣을수 없어 다시 3학년, 2학년, 결국은 1학년부터 다시 다녔다. 처음에는 부끄러운줄 몰랐다가 같은 또래들이 중학교를 다니는걸 보고 철이 들기 시작, 그때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4학년때 대흥소학교로 전학했고 그후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의 금이 세개 있는 완장을 두른 대대장으로 되였다.   1959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 그는 심양시1중을 지망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자기의 성적에 따라 중학교를 선택할수 있었는데 그는 어문성적은 우수해서 매번 5점이였고 수학성적이 좀 나리였다한다. 후에 통지가 왔는데 그는 지망대로 심양시1중에 진학, 대흥소학교에서 유일하게 심양시1중에 붙은 학생으로 되였다. 심양시1중은 대동구에 있었는데 왜정시대 학교건물이여서 인상에 학교건물도 좋았고 학교시설도 훌륭했다. 그는 마치 날개가 돋혀 날아갈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그때 전교에 조선족은 유일하게 강영삼씨 혼자였는데 개학해서 얼마안되여 성이 조씨라는 녀담임선생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반장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학급에 학생이 모두 55명, 유일한 조선족으로 반장이 되였으니 말이다. 전학급에서 연설할 때 그가 말을 더듬거리자 담임선생은 너무 격동되서 그런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동학들도 나이가 많은 그를 보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장"이라 깎듯이 불렀는데 그때 그는 중국어를 한족처럼 잘하겠노라고 은근히 벼르기도 했다.   하루는 부교장이 그를 찾았다. 수두룩이 쌓인 편지더미를 가리키며 조선어를 중국어로 번역해보라는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문제없다고 대답했고 며칠을 씨름하며 그 편지를 중국어로 다 번역해냈다. 이 편지들은 학교 선배들이 조선 평양중학교 학생들과 거래한 서신이였는데 마침 그가 번역해내면서 그는 학교내 유명인물로 되였다. 가정이 곤난한 그는 당시 2등 조학금 월 9원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그를 당과와 단과 학습에 참가시키면서 중요대상으로 배양하였다. 그때 그는 적잖은 자본가와 지주의 자제들이 당과 공청단에 가입하는걸 보면서 자기도 하루빨리 이 대오속에 가입하리라 결심했다. 그때는(1961년) 계급투쟁이 갓 시작되던 때였는데 도시보다 농촌에서 그 분위기가 더 짙어갔다. 여직껏 자신이 청백한 성분으로 알고있었던 그는 1년뒤 소개신을 떼러 촌에 갔다가 소개신 뒤에 써준 부농성분을 보고 눈앞이 아찔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신빈현 백기촌에 있을 때 촌장을 한적이 있어 성분이 부농이라는것이였다. 며칠동안 고민속에 모대기던 그는 담임선생을 찾아가 가정이 곤난하여 학교를 다닐수 없다고 핑계를 댔고 담임선생과 동학들과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갈망하고 열망했던 학업을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자기를 믿어주고 밀어주던 담임선생과 학교령도를 속였다는 죄책감에서 차마 부농성분이 찍힌 소개신을 내밀수 없었던것이다.    음악과 미술에 남다른 흥미가 짙었던 그는 학업도 학업이였지만 매번 활동때마다 신나게 연출하는 학교악대의 연주가 부러워했고 또 선배들의 참군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이 모든 꿈이 그 소개신 한장때문에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부농"의 자식에서 교원으로   하루아침에 "부농"의 자식으로 락인된 그는 농촌에 와서 재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부농성분으로 획분된것은 상급의 어느 지시정신에 근거한것이 아니라 농촌의 토배기정책에 의한것이였다 한다.   성분이 나쁜 사람겐 개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가슴깊이 새긴 그는 새벽 4시 이슬을 이고 들에 나가 모를 져서 논판에 펴놓고 사람들이 나오기 기다렸가 같이 모를 꽂았고 남들이 다 들어간후 일손을 거두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바람이 세차게 번지던 시절, 그가 살던 신광대대에서 투쟁대상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 결국 "부농"의 자식이였던 그와 그의 모친은 "4류분자"로 투쟁의 화살을 피할수 없었다. 그의 모친이 쓴 죄장은 남보다 좀 살았다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들 모자는 마을 소텅간 옆에 있는 헐렁한 집에 같이여 집조차 갈수 없었다. 투쟁할 때는 "강영삼을 타도하자"라는 글에 빨간 승표를 친 커다란 간판을 목에 걸고 뙈약볕에 서서 투쟁을 받았다. 모친이 투쟁당하면서 뺨을 얻어맞는걸 본 그는 모든 죄가 자기한테 있다며 조금이라도 모친의 고통을 덜어주려 모지람을 썼다.   낮에는 투쟁받고 밤에는 검토서를 써야 했는데 투쟁골간들이 일자무식쟁이라 검토서를 받아쥐고 몇장인가 세보고 적다고 다시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하루는 집을 수색하다 오선보가 적힌 조선음악책이 나오자 무슨 비밀암호인가고 따져물어 음악책이라 한적도 있었다한다. 로동개조는 동네 모든 청소였는데 소텅간에서 집집마다 변소를 청소였다. 구린내가 코를 찌르는 한여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동네에서 년세가 있는 사람들은 강영삼씨 모자가 무고함을 빤히 알면서도 누구하나 앞에 나서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하나 그들 모자와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고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가도 등록해야 했다.   그때 동네에 벽돌집 한채 없었는데 후에 한족미장쟁이들이 와서 일하는걸 훔쳐본 강영삼씨는 눈썰미가 좋아서 후에는 아예 미장쟁이가 되여 동네 집집의 굴뚝을 쌓아주었다. 그리고 신광소학교 변소도 그때 그가 처음으로 직접 지었다. 후에 또 목수일까지 배워낸 그는 손재간이 너무 좋아 이불장, 가시장, 옷장도 척척 짜냈는데 쏘파도 여러개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투쟁은 좀체로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한 마을에 사는 한 녀성과 결혼했지만 태여날 자식들의 자기와 같은 "4류분자"의 신세를 면치 못할 캄캄한 앞날을 생학하던 어느 하루 자결을 시도하려 했다가 주변의 감시가 심해 결국 목숨을 끊치 못했다.   "재간둥이"이였던 그는 모진 투쟁속에서도 자기의 여러가지 재간을 익혀나갔고 더우기 음악에 심취한 그는 끝내 음악창작에서 두각을 내밀어 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있었다. 1974년 그가 작곡, 작사하고 안무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가 전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여 그는 끝내 이해 8월 오가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으로 정식 초빙되였다.   3년동안 오강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을 하던 그는 1977년 심조3중이 서면서 심조3중의 음악교원으로 전근돼서 자신의 음악재질을 과시했다. 심조3중 건립초기 그가 조직한 악대와 지휘한 "동방홍" 합창은 시조선족중소학교문예콩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로 구성된 악대를 조직하여 여러번 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으나 후에 심조3중에 고중이 없어지고 초중만 남으면서 초중생들에게 희망을 걸기엔 너무 힘이 부치다 생각하고 교원악대를 조직하여 여러차 공연하여 수상하는 실적도 쌓았다.           꺾을수 없었던 음악의 불씨   사회에선 강선생은 음악선생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전문 배운것은 아니다. 그는 피리에서 크라네트, 손풍금, 바이올린에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줄 알고 또한 작곡도 하고 안무도 할줄 알기에 로인협회에선 음악골간이다. 천생적으로 음악의 자질을 타고난 그여서인지 이 모든 악기를 놀라운 의지로 자학해내였다.   "부농"의 자식으로 억울한 죄명을 쓰고 투쟁받던 나날 그의 가슴에 지핀 음악의에 불씨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학업의 꿈을 접고 농촌에 온 그는 처음으로 신광대대선전대를 조직하였다. 그때 악기란 그가 산 낡은 손풍금 한대와 장구 하나, 그리고 만든 피리뿐이였다. 후에 크라네트 역시 그가 가마니를 짜서 판 돈으로 샀다. 농촌문화생활이 거의 없었던 시기, 그들의 공연은 삭막한 농촌마을에 생기를 부여했다. 여기서 신바람이 난 강영삼씨는 혼자서 심양시조선족문화관에 가 무용반에 참가해 춤도 배우고 장구도 배웠다. 대대에서 파견하면 보조를 받을수 있었건만 자기처럼 성분이 나쁜 사람은 파견할리 만무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신광대대에서 7,8리를 걸어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북역에 와서 내려 다시 걸어서 문화관까지 왔다. 그러나 민족음악에 청춘이 불타오른 그때 조금도 힘든줄 몰랐다. 김관장이 민족음악을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말을 듣은후부터는 조선상점에 가서 민족악기를 보고는 참대를 사다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굵은것은 단소, 중간것은 젓대, 가는것은 피리 처음에는 제대로 되지 않아 수없이 참대만 짜개버렸지만 끝내 하나하나 음이 비슷한 악기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악보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는 태원가에 있는 한 음악학교에서 배워주는 악보지식을 창문너머로 조금씩 훔쳐배웠고 후에는 다른 사람의 화성책이나 기타 음악책을 빌려서 하나하나 베끼면서 짬짬히 자학했다. 1965년 연변조선조가무단이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 참가차 심양에 들려 공연을 본 그는 완전히 민족음악에 심취해버렸다. 그때 민족음악이 그렇게 훌률하고 아름다울수 없었다한다.   그래서 한여름 비닐신을 신고 투쟁받던중 발가락으로 도레미화 하며 악곡에 골몰하다 결국 발각되여 벽돌에 꿇는 고통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1968년 심조1중 졸업생들이 하향하여 신광대대에 와 모주석어록을 선전한다고 할 때 강영삼씨는 다시 선전대로 불려가 자신의 창작을 할수 있었다. 그때 그는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해놓았던 나무를 잘랐고 거기에 성차지 않아 산골에 가서 목재를 구해다 6개의 가야금을 만들었다. 초라했지만 가야금과 같은 음이 나온다는데서 그는 매우 흡족했다. 그가 선전대에 나오면서 마을에선 민족음악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전대의 활약으로 하여 대대의 벽에 걸려있는 상장도 수두룩해졌다.   그를 최종 투쟁대상에서 벗어나게 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는 그의 피와 땀의 결정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악대 지도에서 안무, 작곡, 작사 모두가 혼자 도맡다싶이 했고 모판에 씌운 비닐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그는 동네에서 우산을 빌려다 그우에 씌운 천을 뜯어버리고 거기에 비닐을 씌워 비닐박막을 만들었으며 천둥소리를 내기 위해 모진 고민끝에 벽에 걸린 "모주석이 안원으로 가다"의 큰 철판그림을 흔들어서 같은 효과를 낼수 있었는데 그때 이 종목은 형세에도 맞고 내용도 풍부하고 기교도 뛰여나는 등으로 하여 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강영삼 이름석자를 전구에 쫙 소문냈다.   투쟁을 받던 그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괴씸하고 눈물나기도 하지만 그때 음악에 눈을 틔이고 끈질긴 추구로 오늘날이 있었다는것이 희비가 엇갈리고 만감이 교차된다고 했다.   민족음악에 여생을 불살라   1994년에 딸애의 결혼식으로 한국에 나갔다 한국채무자와의 송사건으로 제시간내 귀국 못한것으로 하여 교원직을 떼우기도 한 그였지만 2004년 귀국하여서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일하다 아리랑예술단이나 로년협회무슨 활동이 있다면 두말없이 비행기를 타고 선후 4차 날아왔는데 거기에 든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지금 아리랑예술단 악대 부단장인 그는 로인들의 합창을 지도할라 무용을 감독할라 여념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호이자 자신의 쾌락, 자신의 인생이라 한다.   민족음악을 위해 쓰는 돈은 하나고 아깝지 않다는 그는 지금도 웬간해서는 택시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한푼이라도 아껴서 민족음악을 위한 사업에 쓰고싶다는 그다. 처음으로 귀국하여 심양에 아리랑예술단이 있는것을 보고 거기에 매료된 그는 애착감을 갖고 관심하고 정력투구는 물론 물심량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재입국자 신분으로 귀국하여 다시 한국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한국에서 일하던 그는 아리랑예술단의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당 12만원의 일감도 팽개치고 사비를 팔며 심양에 돌아와 공연에 참가했고 그후에도 노가데판에서 일하다가도 로년협회 활동이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여러번 날아왔다. 그는 심양에 조선족가수들이 발전할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처음으로 조선족가수가요무대를 제안하여 실현시켰고 요새는 심양조선족노래자랑을 할뜻을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 내비치고 경비는 1차적으로 자신의 사비로 보태겠다고 선뜻 제안해 동감을 자아냈다.   1989년부터 민족악기인 장새납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접촉하기 시작한 그는 귀국하여서부터 선생을 찾아 배우고싶은 욕망에서 지난해 5월 연변에 연변가무단 1급 장새납연주원 김호윤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음색과 취법을 배워 성문예콩클에서 선후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10월 북경에서 있은 '올림픽맞이 2007-2008 화인의 별 음악콩클'(세계화인문화예술교류협회, 중화문화예술교류협회, 중국무용가협회, 중국연출가협회 등에서 조직)에서 장새납 독주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난해 5월 연변에 가서 한달간 장새납을 배울 때 어머님이 96세로 별세하였는데 만약 자신이 곁에서 돌봤다면 100세는 장수했을거라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이밖에 그는 비디어와 사진촬영에도 재간있어 사비를 팔아가며 무료로 아리랑예술단과 로년협회 활동 장면을 촬영하였고 심양한국주행사기간 여러가지 활동도 거의 빠지지 않고 록화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취미이자 자료로 남기고싶어서이다고 했다. 결혼과 축수연에도 로인들이 찾으면 가서 비지땀을 흘리며 록화해주고 사진을 찍어주느라 반찬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거의 무료로 하는때가 많았다. 또 반주곡을 미디음악(電腦音樂)을 통해 제작할줄 알았는데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자기 돈으로 CD를 사다가 공을 들여 공짜로 만들어주었다 한다.   그가 민족음악사업에 이처럼 여생을 불태우고 또 로년들을 위해 헌신할수 있은데는 문화대혁명기간 비인간적인 처우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꾿꾿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관과 시종 강인하면서도 락관하는 생활태도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그의 여생에서 웃음과 민족음악가 더북어 빛을 발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오지훈기자     
39    “3호학생” 취소 나도 한마디 댓글:  조회:3040  추천:9  2012-03-14
교육사업에 종사한 로교원한테서 “모모학생은 “똘랑분자”(말썽꾸러기)인데 지금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한다.”는 말을 가끔 듣게 된다. 오히려 말 잘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보다 더 인상깊고 례절바르다는 말이다. 일전 부분 정협위원들이 “3호학생” 취소를 공동제안했다. 필자의 세대는 “3호”가 아니라 “5호”였다. “학습, 신체, 사상, 로동, 능력” 다섯가지가 우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5호학생”이였는데 1982년부터 전국적인 “3호학생”선거가 시작되여 오늘날까지 “3호학생”제도가 실시되고있다. 덕지체 전면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교육목적을 전제로 사상품덕, 학습성적, 신체가 좋은 학생을 “3호학생”으로 선거하고  장려하는것이 그 주목적이였던 “3호”가 언제부터인가 학습성적이 좋거나 말을 잘듣는 “1호”로 변색되여 “좋은 학생”, “좋은 어린이”와 동의어로 되였다. 지어는 선거과정에 뢰물을 주고받는 사회의 부정현상까지 개입되고있다.   단지 학습성적이 좋고 나쁘거나(못하거나) 교원의 말을 잘 듣거나 안듣거나 하는 하나의 자대로 학생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장려제도가 아니라 잘못된 교육방법이라 할수 있다. 한때 공부 잘하는 반급과 공부 못하는 반급을 갈라 이른바 “콰이반(快班)”과 “만반(慢班)”제를 실시해오다 강한 사회의 반대와 여론에 밀려 결국 취소하고말았다. “3호학생” 취소는 8, 9년전 중국교육연구회 회장 고명원이 처음으로 제기해서 이번에 여러 정협위원들이정협기간 공동제안하였다. 엄격히 따지면 “3호학생”기준은 모든 학생들한테 대한 요구로 교원의 학생관리 도구로 되거나 몇몇 소수학생들의 전용물이 되여서는 안된다. 사회의 유용한 인재, 창의력있는 인재 양성에 목적을 두고 좀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장려제도가 있었으면 한다. 이를테면 “부모효도상”, “교원존중상”, “근검절약상”이나 “과학기술발명상”, “문체활동상”, “대의를 위한 행동상” “독서상”, “문명례절상” 등이다. “3호학생”선거도 발전하는 시대에 걸맞게 부단한 혁신과 개혁이 필요하다. 선거 규칙과 기준도 보다 구체화되여 “3호”에 새로운 내함이 보태여져야 할것이다.                           
38    훈풍속의 심양미소캠페인 댓글:  조회:2646  추천:0  2012-03-06
3월의 단상   미소가 꽃피는 봄을 부른다     Date:3/6/2012    한겨울 얼어붙었던 대지에 훈풍이 불어오면서 료심지역에 “미소시대”가 열렸다.   심양시는 시직속 창구단위로부터 시작하여 시민들의 생활속에 미소서비스를 침투시킬 의지로  대대적인 미소캠페인 홍보를 개시하였다. 미소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다. 조사에 의하면 인간이 소통에 있어서 7%는 언어, 38%는 억양이고 나머지55%는 신체언어로 표현되는데 그중 미소가 바로 가장 좋은 신체언어이다.   미소는 돈 한푼 들지 않는 인류의 가장 좋은 선물로 그 가치는 매우 값지고 영원하다. 가정과 직장, 사회 그 어디에서나 미소가 있는 곳에는 서먹서먹한 관계나 비틀어진 관계도 모두 원활하게 되고 무궁한 에너지가 산생된다. 하기에 국외의 대회사나 기업들에서는 미소캠페인을 통해 사내 동료들간, 상하급간 화기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있다. 실제로 TV아나운서도 시청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하여 평소 입에 저가락을 지긋이 물어 입꼬리가 약간 내려오도록 미소훈련을 진행하고있다 한다. 또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김치” 하며 웨치는것도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기 위한것이다.   이처럼 미소는 교육이나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습관화할수 있다. 웃는 낯에 침 뱉을가 하는 속담이 있듯이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누가 욕을 하고 낯을 찡그리겠는가? 미소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대문을 여는 만능열쇠이다. 이번 “미소심양”활동이 간단한 미소가 아니라 조화로운 심양사회 구축, 사회관리의 혁신, 시민문명의 향상에 그 진의를 보태기 바란다.           심양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참여, 실천만이 진정한 미소시대를 맞아올수 있다.                                           석천
37    뢰봉정신의 내함과 시대적가치 댓글:  조회:3984  추천:8  2012-03-06
뢰봉정신의 내함과 시대적가치    Date:3/6/2012   어떤 사람은 뢰봉정신은 3월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뢰봉정신에 대한 곡해는 물론 뢰봉정신의 내함에 리해가 부족한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지나친 형식위주의 사회풍조에 대한 야유도 있다.  필자가 태여났을 때 뢰봉은 이미 저세상사람으로 되였지만 소학시절부터 우리 세대는 “따라배우자 뢰봉을…”이란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아마 50, 60, 70 세대는 거의 뢰봉정신을 먹으며 자라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생활이 날로 풍부해지고있는 오늘 사회공중도덕이 무너지면서 뢰봉정신은 갈수록 우리와 멀어지고있다는 느낌이다.   뢰봉은 현시대 공민도덕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본보기이다. 뢰봉(1940~1962)은 원명이 뢰정흥,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고아로 되였고 해방을 맞아 참군하여 3년 사이 2등공 1차, 3등공 3차를 기입하였으며 어느 한번의 차사고로 조난당한다. 이처럼 22세의 짧은 인생을 산 그가 한시대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퇴색되지 않는 시대정신을 가진 인물로 부각되는데는 그의 값진 삶에 있다. 그는 짧은 삶이지만 오로지 타인을 위하여 사심없는 봉사를 하였는데 1963년 3월 5일 모택동주석이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라는 친필제사를 쓰면서 전국적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붐이 일어났고 매년 이날을 계기로 다양한 이벤트가 이어지고있다. 특히 올해는 뢰봉이 순직한 50주년이여서 그 의의가 더 깊은것 같다.      오늘날 뢰봉정신이 계속 고양되는것은 뢰봉정신이 “영원히 녹쓸지 않은 나사못”과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인류의 지고지상의 삶의 근본이 담겨있기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뢰봉정신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한 군사학교에 가면 뢰봉의 초상화가 걸려있으며 “학생수칙”에도 “한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하는데는 끝이 없다”라는 뢰봉의 명언이 적혀있었으며 학생들은 이 명언을 자기의 인생격언으로 삼고있다. 미국에는 또 전문 뢰봉의 우수한 사적을 배우고 연구하는 “뢰봉학습연구회”도 있는데 사람들이 사회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있다. 스위스의 수도 스톡홀름거리에서도 뢰봉초상이 찍혀있는 티를 입은 청년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있는 광경을 가끔 볼수 있으며 타이정부에서도 “뢰봉”소책자를 배포하여 국민들이 뢰봉정신을 배우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도록 유도하고있다.  “당대뢰봉”으로 불리우는 곽명의나 “뢰봉식소방영웅”으로 명명된 김춘명도 모두 뢰봉정신을 전승하고 발양한 현시대의 전형이다. 안산철강그룹 광업회사의 보통 도로관리원인 곽명의는 30년을 자기의 맡은바 직장에서 타인을 돕는것을 락으로 삼고 불우이웃들을 도왔으며 헌혈에도 앞장서왔다. 김춘명은 수십차 사선을 드나들면서 나라의 재산과 타인의 생명을 구하였으며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남을 위한 “애심”과 “봉사”에 있다. 김춘명씨는 조선족으로 당당하게 “뢰봉식”계렬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감동이 아닐수 없다.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다”는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발로로 은혜를 베푸는것과 일맥상통한것이다. 뢰봉정신속에는 사람들간에 상호 믿음과 도움을 주는 인간의 고상한 미덕이 포함돼있다. 금욕주의가 팽창하고 부패와 비리가 만연되고 공중도덕이 무너져 빈부격차가 날로 커지는 현실에서 조화로운 사회 구축과 사회주의핵심가치 실현에 있어서 뢰봉정신은 심원한 력사적의의와 현실적의의가 있다. 뢰봉정신은 전인류적인것으로 영원한것이 아닐가.               석천  
    예술인들 직거래 전자상성 “문화예술품상성” 심양서 설명회 개최 2/28/2012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창작품을 직거래할수 있는 전문 전자상성ㅡ“문화예술품상성(商城)”(www.5S5U.com)이 최근 오픈되여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복음을 주고있다. 2월 25일 북경자회문화광파유한회사는 심양에서 지역문화예술품시장개척세미나를 갖고 이 “상성”의 산생배경과 발전방향, 경제수익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북경자회문화광파유한회사에서는 우리 나라의 “문화강국”전략에 적극 부응하여 “예술재부를 개발하여 품위있는 삶을 창조한다”는 취지하에 중국 제1의 민간문화예술품장랑을 구축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문화산업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이 “상성”을 개설한것이다. 회사는 인터넷상 예술품거래와 문화산업창업련맹(창업대리) 두가지 조직형태로 중국의 민간문화예술애호자와 문화예술전문일군가운데 문화예술품교류분회 및 회원을 모집하고 문화예술품교류와 회원간 교류를 추동하여 문화예술품의 생산과 소비를 이끌어나갈 계획이다. “상성”은 지난해 10월에 공식 가동되여 현재 창업대리가 북경지역만 2,000여명이고 심양 중심의 동북지역에도 약 200명에 달하고있다. “상성”은 중국내 첫 문화예술품의 전문 전자상성으로서 당면 문화예술품의 매매난 문제해결에 포인트를 두고있어 문화예술가, 수장가뿐만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창업의 기회가 주어질것으로 기대된다. 지훈기자
35    도로변 제멋대로 주차 빨간불 댓글:  조회:2388  추천:0  2012-02-29
                                   최근 심양공안기관이 중국최초로 산하 파출소에 위임하여 도로변 제멋대로 주차하는 행태에 벌금을 허용하는 조치를 강구하여 날로 혼잡해지는 심양도심 교통에 강한 브레이크(제동)카드를 꺼내들었다.   몇년전만 해도 신분을 과시하고 편리한 교통도구였던 차가 심한 교통체증으로 하여 인제는 골치거리가 되고있다. 소개에 의하면 현재 심양자가용차량이 하루에 600~700대의 속도로 늘어나 심양시내 설계 교통차량수용능력 120만대에 육박하여 출퇴근시간이면 차가 정체되는 상황이 날로 심각해지고있다. 차량이 급격히 늘어나는것도 중요원인이지만 도로변에 제멋대로 주차하여 도로가 막히게 하는것도 도로정체의 홀시할수 없는 원인으로 떠올랐다. 이에 심양공안기관은 전 시 교통경찰 1천여명의 경력(警力)으로는 도로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파출소경력 800여명에게 도로변 제멋대로 주차에 벌금을 허용하였다.    수차 한국을 드나들면서 마비상태에 빠진 한국 수도권교통을 실감한 필자는 최근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량을 보면서 심양도 이런 날이 곧 오겠구나 은근히 걱정하였었다. 기인우천(杞人3l天)인가 했는데 이렇게 빨리 눈앞의 현실로 될줄이야. 서울 골목길마다 꽉 들어찬 차량을 보면서 저 차들의 1/3을 한강에 처넣으면 마비된 서울교통문제도 해결하고 또 자동차산업을 더 크게 발전시킬수 있다고 롱을 한적 있었는데 자동차산업에 매달린 중국도 결국 그 전철을 밟고있다.     자동차산업이 관련산업 발전을 추동하여 도시발전을 이끄는 주요산업이라는 점에 리해는 간다. 그러나 우리 말에 잠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속담이 있듯이 도시의 주차장이나 도로설계능력을 넘어선 무작위적 발전은 오히려 시민출행에 불편을 가져다줄뿐만아니라 도시공해를 유발하는 주원인으로 되고있다.   5~6년전만 해도 중국 도시의 록색교통으로 불리웠던 자전거물결로 넘쳤던 거리에 언젠가는 귀청을 찢는듯한 경적소리, 검은 매연까지 마구 내뿜는 차량들의 조음, 심한 대기오염에 인제는 대도시가 별로 반갑지 않다.   다행히 심양공안기관의 이번 결단력있는 단호한 조치로 도로변 제멋대로 주차현상이 차단되여 도로정체현상이 개선될지 큰 기대를 걸어본다.                                           
34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같은 존재 댓글:  조회:2102  추천:0  2012-02-14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같은 존재        2010.02.26. 20:39 .bbs_contents p{margin:0px;} [removed]//[removed]         한국의 중국시장수출의존도가 20.5%(미국과 일본의 수출량을 합한것보다 더 많음)에 달하면서 중국 13억 내수시장 확보여부가 한국의 살길이라고 할만큼 중국시장에 대한 비중이 크게 실리고있으며 삼성, LG 등 대기업들의 새해화두 역시 중국을 제2의 르네상스로 대중국출구전략을 구사하고있다고 한국언론은 전하고있다.     따라서 중한경제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하고있는 중국조선족기업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때보다 값진 테마로, 시급한 연구분야로 떠오르고있다. 이에 한국 전남대학교가 앞장에 서고있다. 기자는 일전 한달동안 심양에 체류하면서 료녕성조선족기업인들을 집중 인터뷰하며 연구사업을 수행하고있는 이장섭교수와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문: 중국조선족기업을 연구하게 된 배경 및 그동안의 진전상황은?   답: 700만 재외동포를 민족자산화하자는 정책하에 한상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전남대학교는 2002년에 한상문화연구단을 발족하여 2003년에 한국정부 유일의 재외동포연구단체로 선정되였으며 단장을 비롯해 연구교수 및 보조원 등 70여명 연구진을 갖추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33권의 전문서적외 국제학술대회 약 70회, 국내학술대회 150회 및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한상문화연구단은 11개 분과로 나뉘는데 그중 중국한상팀은 중국진출 한국기업 및 중국조선족기업을 연구, 특히 중국조선족기업을 집중연구하고있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중국조선족기업수는 1만 7,500여개소인데 이들은 많이는 한국기업과의 합작, 합자방식으로 운영되며 상호간 밀접한 관계로 상생의 길을 열어가고있다. 그동안 연변, 심양, 북경, 청도, 상해, 할빈 등 조선족기업인을 방문 면담해 중국조선족기업관련 3권의 책을 집필했고 여러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이 기초에서 중국 각 지역별 각론을 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미 연변, 흑룡강지역 기업인들과의 인터뷰를 마쳤으며 이번에 료녕지역 기업인들을 방문 면담하였다.     특히 《중국조선족기업네트워크》저서에서 그동안 면담하고 설문한 내용을 도표로 제작하여 독자들이 한눈에 중국 여러지역 조선족기업인들의 네트워크 상황, 진전과 그 필요성을 알게 하였는데 중국조선족기업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자료로 될것이다. 이 도서는 2009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문학분야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문: 이 몇년간 중국 여러 도시들을 누비면서 적잖은 조선족기업인들을 인터뷰했는데 조사연구에서 착중한 점과 조선족기업들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은?       답: 처음으로 시도하는 연구인만큼 조선족기업들의 창업동기, 성장과정, 판매거래처 상황, 그리고 한국기업과의 관계 등 네트워크정보와 향후 희망업종에 대해 많이 질의하였다.     조선족기업에 대한 느낌을 아래 몇가지로 개괄해볼수 있다. 첫째, 조선족기업 다수가 채무가 없이 자기 자본력에 의해 알찬 성장을 이루어왔다. 둘째, 끊임없는 노력과 정직, 성실성을 통해 성공을 이뤘다. 기업운영과정에서 상호신뢰를 원칙으로 파트너에 대한 최선의 배려와 투명, 신뢰경영을 엿볼수 있었다. 셋째, 년령층을 볼 때 30-4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20대나 50대는 적었으며 교사출신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기업에서 4-5년간 근무하다 경영기법을 배운후 자체로 창업을 시작하였다. 지적수준이 높은데다 한국의 선진기법을 배워서인지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넷째는 민족의식이 강한것인데 어렵게 성공하였지만 민족교육과 민족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있다는 점이다. 우에서 말한것이 장점이라면 단점으로는 첫째는 지나치게 내실경영만 추구하다보니 기업성장에 한계가 있다. 둘째는 중국기업들과의 네트웍이 미약한데 특히는 중국내 대기업과의 협력이 부족하다. 셋째는 단순한 제품모방 즉 기존모델에 의한 생산판매에만 그치는데서 기업이 더 크지 못하고있다.   문: 조선족기업은 부의 축적에서 자본력을 키우고있는 중인데 아직은 걸음마를 타는 단계라 할수 있다. 조선족기업이 어떻게 하면 빨리 성장할수 있을지?     답: 방금 우에서 말했듯이 젊고 진취적이고 지적수준이 높고 중국내수시장이 크다는 장점을 잘 활용하여 성장을 꾀해야 하고 IT, BT, NT, ET 등 미래성장이 가능한 첨단산업에 과감히 뛰여들어 제품을 개발하여 중국내수시장뿐만아니라 세계시장에도 진출할 꿈을 키워야 한다. 그동안 한국기업과의 합작, 합자과정에 서로 언어적, 문화적 차이 등에 의한 상호갈등도 빚었지만 이제는 상생을 위한 리해폭을 넓히고 상호 신뢰와 투명경영을 통해 윈-윈관계를 모색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한국기업이 중국내수시장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자체의 이중언어구사나 기존 판매네트웍 등 우세로 립지를 굳히고 탄탄한 경제기반을 마련하여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문: 현재 한국에선 중국조선족기업을 어떻게 보고있는지?     답: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와도 같은 존재이다. 중국내수시장 확장에서 중국조선족은 천혜의 자원이라고 할수 있다. 이 점은 일본기업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점이다. 한중수교후 량국간 무역거래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데는 조선족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특히 한상문화연구단의 중국조선족기업연구는 한국사회에 중국조선족기업을 알리는 계기가 되였다. 한국언론에서도 조선족기업을 적극적으로 취재하여 홍보하고있어 한국내 조선족기업들의 위상이 높아지고있으며 한국기업들도 조선족기업을 과거보다 많이 신뢰하고 상호 합작이나 합자를 통해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나고있다. 또한 매년 한국에서 개최하는 한상대회에 중국조선족기업대표단이 참여하면서 상호리해 및 협력의 장이 마련되고있다.     아직은 힘이 약하나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에 편승해 발전잠재력을 갖고있는 조선족기업은 한국의 선진기술이나 우수제품을 리용하여 중국시장을 확장하는데서 성장가능성을 발굴할수 있다고 본다.     이장섭교수는 중국출장에서 촘촘한 스케줄을 갖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손을 잡고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는 조선족기업인들을 대할 때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책임감이 더 커진다며 자신들의 연구가 단지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업들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자그마한 힘이 되였으면 한다고 했다.            오지훈 기자  
암 결코 두려울것 없다 -안산시제2병원 이비인후과 주임의사 김귀덕씨 암을 말한다   암은 죽음의 대명사와 다름없다. 암은 불치의 병으로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인류를 죽음의 공포속에 몰어넣고있어 인류의 암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 할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매년 약 850만명이 암으로 사망되고있으며 우리 나라도 매년 190만명이 죽어가고있다. 특히 35살 이상 년령대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암은 정말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가?   안산시제2병원 이비인후과 주임의사 김귀덕씨(1957년 생)는 “결코 두렵지 않다”고 대답하고있다. 10년전 암환자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경력을 통해 인류가 암과 싸워이길수 있다는 희망과 신심의 메시지를 주고있다.                     암과의 인연   내가 암환자를 만난것은 1968년 11살때이다. 개원에 사는 잘아는 사람이 위암에 걸렸는데 나는 어머니가 안산의 한 병원에서 지어준 위암약을 들고 네시간 남짓이 홀로 기차를 타고 또 한시간 농촌길을 걸어서 그 환자에게 약을 갖다드린적이 있었다. 그러나 1년도 못가 그 환자는 죽었는데 그때부터 암이 무서운 병임을 알게 되였다.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하향지식청년이였던 나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심양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의학학부에 진학하였고 암을 정복하겠다는 꿈을 갖고 의학공부에 진력하였다. 졸업후 기층병원에 배치받았고 림상실천속에서 암증이 이미 인간생활에서 일상적인 병, 다발적인 병임을 발견하게 되였다.   1987년 12월 어머니가 불행하게도 위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하였어도 별 효험이 없자 당시 곽림(郭林) 신기공을 접촉한 나는 이듬해 봄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공원에 가서 기공을 련마하였는데 2,3개월의 기공단련과 기타 재활치료를 거쳐 어머니의 기력은 많이 회복되였다. 그러나 위암말기여서 병세는 계속 진전되였고 경부와 복부에도 림파전이현상이 생겨 부득불 료녕성종류병원에 가서 화학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개 치료과정을 거치니 몸은 더욱 허약해졌으며 정상외출마저 힘들어졌다. 후에 일루의 희망을 안고 침구치료를 시작하였는데 강호(江湖)의사는 어머니의 복부 림파덩어리에 작은 걸상으로 못을 박듯 침을 박아넣었다. 한번 치료하면 반년 문제없고 세번 치료하면 4년 문제없다고 하였지만 결국 한번 맞은 뒤 어머니는 식음까지 전페하였고 정맥혈액주사로 목숨을 부지하다 한달 좀 넘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이러한 일들은 나를 더욱 암연구에 집념하게 하였다. 나는 여러사람들이 암과의 싸움 특히 “암정복스타(抗癌明星)”들의 치료과정을 연구하면서 단순한 의학치료수단으로 암을 치료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심리요소를 통한 암치료의 중요의의에 대해 갈수록 깊은 인식을 갖게 되였다.   그런데 나에게도 암이 광림할줄이야. 2001년 2월 9일, 변혈(便血)로 반년 남짓 고생하던 나는 “직장암(중도분화)”으로 진단받았다. 이때 나는 그 어떤 공포와 근심을 갖지 않았다. 하느님이 나에게 실전의 기회를 준것이였기때문이였다. 나는 당황함이 없이 이미 받은 6,7명 환자들의 수술을 마친 뒤 1주일 뒤인 2월 17일 “직장암수술”을 하고 60€L?0미리메터의 종양을 제거하였다. 가운데에 궤양이 생긴걸 봐 조기는 아니였다. 수술후 12일만에 걸어서 퇴원하였고(집이 병원에 있었기에) 그뒤부터 거의 매일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회진하였으며 한달 좀 넘어서는 병원에 가서 병자들을 위해 직접 수술을 하였다. 나는 수술한후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를 받지 않았고 또 한약이나 건강식품도 먹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기의 강한 신념을 갖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심태조절에만 주의하였다. 이렇게 십년 세월이 흘렀다. 내가 “암환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심신이 건강해졌고 얼굴에도 붉은 기색이 돌았다. 나는 친선경력을 통해 암을 정복할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암이 결코 두렵지 않다는것을 세인들에게 과시하였다.                 왜 암에 걸리나?   암의 유발원인에는 내적 외적 요소가 있다. 동등한 환경, 식습관, 돌발사건, 유전요소, 불량생활습관 등 외부환경속에서 암에 걸리는 확률은 매우 작다. 그러나 흡연은 직접 암을 유발시키는데 비흡연자에 비해 흡연자의 암확률은 몇배에 달한다. 그렇다면 암환자와 정상인간의 부동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마다 면역상태가 같지 않은데 있다. 정상적인 면역상태에서 기체(机€|?는 치밀한 자체회복과 완성능력을 갖고있지만 면역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는 파괴된 세포조직을 회복할 능력을 상실하여 국부에 암변이가 생긴다. 그렇다면 기체면역력의 실조는 왜 생기는가? 개체의 심태균형파괴(火, 화)라 본다. 심태의 실조는 왜? 개괄해서 말한다면 개인의 기대치(욕망)와 객관현실간 차이나 충돌 및 돌발사건의 의외적인 타격, 장기간 불량정서의 자극 등이라 할수 있다.   무릇 암환자는 개개가 이러한 심리특점을 갖고있다. 승벽심이 강하고 일정한 능력이 있으나 일이 순탄하지 않고 마음이 선량하고 일의 완벽을 추구하며 또 내심의 충돌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압력을 감당하기에 오랜기간 내심이 초조한 상태여서 자주 실면하는것으로 나타난다. 병리생리상에서 볼 때 장기실면하면 과도긴장되고 초조한 심리는 신경을 지나치게 흥분시켜 과다한 호르몬을 분비하게 하여 기체의 면역기능을 피로하게 만든다. 인체가 “면역피로상태”에 처하면 면역계통이 제구실을 할수 없게 된다. 따라서 “면역피로상태”가 즉시적으로 해결되면 면역계통이 정상기능을 하여 암세포의 생장을 억제할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 면역기능이 감퇴되고 쇄갈상태에 이르게 되고 병이 “골수”에 박히게 된다.   내가 암에 걸릴 때도 이와 비슷했다.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성미로 기층병원의 의사로 최고수준의 의사가 되는것을 목표로 했고 언제나 “제일”을 추구했다. 렬악한 조건에서 본 전업과 관련된 대수술들은 거의 내가 하였고 선진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지만 계속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집착하다보니 결국 암에 걸리고말았던것이다.                    몇가지 암치료법   암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아래 몇가지만 요약 소개한다.   (1) 수술치료법. 국부의 암조직에 수술이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술은 국부의 암조직을 제거하여 수량적으로 암세포를 감소시키는것을 통해 환자를 위해 면역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쟁취하는데 있다. 그러나 “면역피로상태”가 지속된다면 암세포가 계속 생장할수 있고 지어 사망을 초래할수 있다. 그러므로 수술을 만사대길이라 할수 없다.   (2)  화학치료법. 혈액계통의 악성종양을 치료하는 주요 치료법이다. 화학치료는 혈액계통의 악성종양을 철저하게 제거할수 없을뿐더러 엄중한 부작용이 있어 앞으로 개진하고 보완할 부분이 많다. 화학치료는 암세포를 완전제거한다는 리론을 근거로 하고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못하며 기체의 면역력을 손상주기에 면역학원리와는 배치되고있다.   (3) 방사성치료법. 비인암(鼻咽癌) 등 모종의 특정된 종양에 대해 효과가 있다. 또한 수술치료를 받을수 없는 환자에게는 역시 적합한 방법이다. 그러나 부작용은 화학치료법과 마찬가지이다.   (4) 면역치료법. 암환자가 “면역력저하”라는 리론의 근거하에 외부로부터 면역인자(因子)의 수량을 증가시켜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량의 면역인자를 얻는 방법조차 해결되지 못하고있다.   이밖에 중약치료법, 기공치료법, 운동치료법, 음식치료법, 건강식품치료법 등이 있다. 이런 치료법들은 다 장단점이 있는데 중요한것은 수술치료를 받아 빠른 시간내 면역기능의 정상을 회복하는것이라 본다.           암 과학적으로 대처해야   나의 경험으로 보면 “과학적으로 암을 대처하는것(科.A抗癌)”이다, 암은 조기와 중기에는 “면역피로”에서 만기(:錮?에는 “면역저하”이고 말기에는 “면역쇄갈”이다. 그러므로 “면역실조”를 둘러싸고  “조절”해야지 “제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체는 하나의 완벽한 자체귀환과 자체완성의 체계를 갖고있으며 환경에 대해 아주 강한 적응성과 자체의 조해와 회복능력을 갖고있다. 따라서 암은 외부의 힘에 의해 치료하려 하지 말고 자체면역력에 의거해  전승해야 하며 자력갱생을 위주로 외부의 지원을 받는것이 암정복에서 취할바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암치료에서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암치료에서 사람들은 왕왕 이런 중요사실을 홀시하고있다. 그렇게 많은 치료법이 있지만 림상에서 경전으로 알려진 3대, 4대 치료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사람들이 죽고만다. 그러나 산 사람들중 3대 치료법보다 한가지 혹은 두가지 치료법(주요하게는 수술)이나 아예 이런 경전치료법을 쓰지 않은 사람도 많다.   심리심태조정도 암치료의 중요수단이다. 먼저 병자와 그 가족의 공포심리를 해결해야 한다. 암진단이 내려지면 사망판정이나 다름없어 환자 본인뿐만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까지 공포의 심리속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암은 심근경색, 뇌출혈, 교통사고에 비해 치료할 기회가 많다. 중국의 “암정복사령(抗癌司令)”으로 불리우는 고문빈(高文彬)은 1976년 페암에 걸려 북경301병원에서 수술후 3개월을 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깨고 20여년간 살아왔는데 이미 80고령을 넘겼다. 그러므로 가정의 사랑과 지지는 암치료에서 절대 홀시할수 없다. 다음 자책심리를 해결해야 한다. 많은 환자들이 지나친 기대치로 인해 암에 걸리거나 또 완벽주의때문에 암에 걸리기에 심신부담을 덜어야 하는데 특히 자책심리를 떨쳐버려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강조할것은 수면이다. 정상수면이 보장되면 피로했던 면역기능이 회복될수 있다. 나는 매일 오후에 1, 2시간 수면을 취하고 저녁에도 6,7시간 잔다. 그러므로 수면은 암정복에서 매우 중요한것 같다.   20여년간의 림상실천과 십년간의 자신의 경력을 통해 암과 싸우는데 있어서 치료법보다 살아남은 사람을 관심하는데 있으며 암유발원인을 찾아내는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암은 치료해서 나은것이 아니라 자체 심태조절을 통해 좋아지는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의대 졸업생에서 주임의사와 심리자문사로, 료녕성의덕기준병에서 안산시명의로 암과 당뇨 자체치료과정의 체험을 아래와 같이 적어본다. “자기의 마음을 조절하고 자기의 입을 조심하고 타인과 적게 비교하며 하루하루를 괘활하게 살아간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암환자의 직접비용이 1,000억원으로 인당 평균 12만원 이상이다. 그러나 김귀덕씨는 암을 치료하는데 과학적인 대처방법과 심태조정으로 2만여원밖에 쓰지 않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쾌활하게 산다는 김귀덕씨는 암에 대해 “면역피로상태”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기하고 자신이 암과 싸워온 경력을 《나의 이야기》 책자속에 담을 계획이라고 한다.  오지훈기자  
32    폭죽놀이 적신호 오는가? 댓글:  조회:2597  추천:0  2012-02-06
폭죽놀이 적신호 오는가?   2012.02.03       폭죽놀이 하면 필자는 아예 질색이지만 오랜 전통으로 못말리는 중국인들의 폭죽놀이로 하여 설만 되면 또 어떻게 설을 쇨지 즐거움보다 우려와 걱정이 앞섰다.    작년만해도 폭죽놀이로 하여 크고작은 대형화재에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다른것은 차치하더라도 작년 설 전날인 그믐날에 심양랜드마크로 불리우는 심양매리어트호텔의 일부 건축이 하루밤사이에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폭죽의 종류도 일반에서 “대포”같은 폭죽이 줄줄이 생겨나면서 폭죽은 귀신을 쫓고 장사가 잘되기를 기원한다는 중국인들의 소망에서 벗어나 소음에서 폭죽쓰레기, 대형화재 악재의 발생원인이 되였고 또 인명상망피해와 엄중한 대기오염의 주요인으로 되였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단지도 이 몇년 동안 귀청을 찢는듯한 천둥같은 폭죽놀이로 하여 텔레비프로도 제대로 시청할수 없었고 창밖은 금방 싸움을 마친 전장터마냥 시꺼멓고 자욱한 연기로 뒤덮여있었다. 언제면 소름끼치는 요란한 폭죽소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설을 쇨수 있을가 기대하고있었는데 생각밖으로 그날이 빨리 다가오는 느낌이다.   심양에서 1월 22일부터 28일까지 청소한 폭죽쓰레기가 50,881톤으로 작년보다 일평균 429.1톤이 적어진 7,268.7톤이였다 하니 폭죽놀이가 훨씬 줄어든 셈이다. 련휴가 끝나고 첫 출근당날 “개문포(開門炮) ”(단체나 업체들에서 터뜨리는 폭죽)로 인한 폭죽쓰레기를 보더라도 북경에서만 지난해의 2,380톤보다 957톤 줄어든 1,423톤, 심양도 작년보다 20톤이 줄어든 80톤으로 집계되였다.   금년 음력설기간 폭죽놀이로 인한 큰 인명피해나 대형화재가 거의 없었고  대기오염도 작년과 재작년에 비해 많이 좋아지고있다는 보도다. 과거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폭죽을 터뜨리는것으로 설분위기를 조성하는것이 다수였지만 정부의 자제유도와 폭죽놀이로 인한  여러가지 피해나 위험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폭죽놀이에 서서히 제동이 걸리고있다.   특히 폭죽놀이에 있어서 정부의 “금지에서 제한적”인 유도정책으로 하여 폭죽놀이가 최초 2년에 최고점에 올랐다가 매년 하강되는 추세이다. 반이상 사람들이 폭죽을 사지 않고 터뜨리지 않고있다는 보도를 보면 중국인들의 문명자질도 많이 제고되는 표현이다. 또한 작년에 PM2.5를 대기질 측정기준으로 발표하면서 중국인들의 환경보호의식이 수립되여 대기오염에 주는 폭죽의 영향으로 그에 따르는 자제력도 작용했다고 볼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폭죽놀이에 대한 세대차도 감지되였는데 30살 이하 년령층은 폭죽놀이에 별로 관심없다는것이다. 과거 폭죽놀이는 아이들과 기성세대들의 “대물림”이라 할 정도로 심취되여있었지만 “90후”세대는 전세대보다 폭죽에 대해 퍽 “둔감”함을 발견할수 있었다. 이밖에 작년한해 세계적인 경제위기 여파로 중국의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는 말할것 없고 물가지수인상으로 인해 1년 은행 정기예금도 190원이 마이너스라고 하니 주머니사정이 궁색해진것도 그 원인중 하나다.    한편 관광, 쇼핑, 외식 등 설을 쇠는 방식이 다원화되고 물질문명과 함께 정신문명이 수립되면서 중국인들의 전통에도 서서히 변화를 보이고있다.   전 국민의 문명자질 향상이나 환경보호의식 수립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언제나 중요한것만큼 정부의 지속적인 유도와 교육은 지금이나 앞으로도 필요하다. 또한 세계 경제대국에 걸맞는 중국인들의 자질향상과 문명사회 건설 노력은 절박하고 시급한것이라 본다.   래년에는 문명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설날을 기대해본다.     석천
31    중국화속의 향촌마을” - 안휘 굉촌 10/28/2011 댓글:  조회:1932  추천:0  2012-01-17
중국화속의 향촌마을” - 안휘 굉촌     황산 여맥의 양천령, 뢰강산 등에 의지하고있는 안휘 이현의 동북부에 위치한 굉촌(宏村)은 면적이 19.11헥타르로 지세가 높은데 운무가 드리워졌다 가셨다 하는것이 한폭의 긴 산수풍경화처럼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이 어우러져 “중국화속의 향촌마을”로 불리우고있다. 남송 소희년간(기원 1131년)에 건설된 고대건축들은 800여년이 넘지만 지금도 옛 건축모습이 잘 보존되여 관광철이 되면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객들의 발길이 끊길줄 모른다. 사진은 굉촌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행렬.            
30    중국의 첫 습지국가공원ㅡ서계습지국가공원 11/25/2011 . 댓글:  조회:2368  추천:0  2012-01-17
중국의 첫 습지국가공원ㅡ서계습지국가공원    항주라면 쉽게 떠오르는것이 서호지만 서호외에 최근년에 관객들의 발길을 끄는 또하나의 풍경구가 생겨났다. 이 풍경구가 바로 절강성 항주시의 서부에 위치해있는 서계(西溪)습지국가공원이다.   강택민 전 국가주석의 친필제사 "서계습지국가공원"   서호에서 5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속 차생(次生)습지로 생태자원이 풍부하고 자연경관이 질박하며 문화침적이 두터운 곳으로서 일찍 서호, 서랭(西冷)과 함께 항주의 “3서”로 불리우기도 했다. 현재는 국내의 최초이면서도 유일한 도시습지, 농경습지, 문화습지를 아우르는 국가습지공원이다.   일명 또 “항주의 신장(腎臟)”이라고 불리우는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동쪽의 자금항로의 서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도시순환도로 동쪽까지, 남쪽의 연산하에서 북쪽의 문이로에까지 이르는데 부지면적이 약 10.08킬로메터이다. 현재 개방된 구역은 3.46평방킬로메터로 유원보행도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시간이 3시간 반이 소요된다. 고장마을 루각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습지의 조화된 모습   관객들은 서계습지국가공원 문앞에서 입장권을 뗀 다음 공원안에 들어서서 축전지차를 타고 배를 타는 곳으로 향한다. 여기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가다렸다가 다시 축전지배를 타면 즐거운 서계습지의 유람이 시작된다. 유유히 달리는 배우에서 관객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풍경구의 소개를 들으며 대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어간다. 강폭처럼 때로는 좁아졌다 때로는 확 넓어지기도 하는 물줄기를 따라 습지소택지에 무연하게 펼쳐진 감나무, 매화나무 등 이름모를 나무들과 풀로 우거진 대자연의 조화에 감탄을 련발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서계습지국가공원이 개방되면서부터는 항주의 서호를 보고난 다음 전당강대교보다 이곳을 더 찾는다고 한다. 습지 한가운데서 유유히 달리는 유람선   배에서 내려 돌다리를 건너니 고건축의 마을이 나타났다. 서계산장이라는 고장(高庄)마을이다. 청나라 순치14년€뿰??년 사이 청나라 대학자인 고사기(高士奇)가 머물렀다던 별장으로 고장, 또는 서장이라고 부른다. 강희황제는 남방을 순라하면서 고장에 들려 “죽창(竹窓:)”과 시 한수를 하사한적 있다. 현재 고장은 고사기의 사택, 죽창, 서옥, 동음당, 초원시사 등 건축이 복원되여 당년의 강희황제가 고장에 묵었던 력사장면을 재현하고있다.   서계동북쪽에는 하저가(河渚街)라는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저자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유람객들의 휴식터이자 쇼핑장소였다. 거리 량켠으로 나란히 늘어선 다방과 상가들에서는 갖가지 명차와 서계의 작은 바구니, 막걸리, 떡, 죽순, 어류제품 등 특산물을 팔고있었다. 그리고 룡주(|基?전시관의 여러가지 룡주조각과 배, 서계극장에서 펼치는 월극공연 등으로 하여 하저가에는 먹을거리, 볼거리로 풍성하였다.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또한 젊은 련인들의 데이트장소이기도 하다. 강소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작한 181부의 대형교우(交友)프로 “비성물요”(非f%勿6[, 2010년 1월15일부터 방송되면서 전 23주 전국위성텔레비죤방송국의 련속 15차 주간시청률 1위에 오르기도 함)중 일부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여 강소, 광동 남방의 텔레비죤방송국에 의해 방영된후 이곳을 찾는 젊은 청춘남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다.   서계습지를 개발하면서 개발자들은 생물, 생태 등 천연자연보호와 이곳의 력사유적지 발굴, 보호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음을 곳곳에서 볼수 있었다. 서계습지는 2005년 2월 국가로부터 첫 습지국가공원으로 명명되였고 2009년 11월 3일 국제 중요습지명록에 수록되여 우리 나라에서 습지공원개발의 전형으로 되고있다.           
29    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 개최 댓글:  조회:2157  추천:0  2012-01-17
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 개최 -김희성 조선족협회 신임 리사장으로 당선  본사소식 11월 26일, 료녕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가 료녕인민빌딩에서 개최, 심양과 대련, 안산, 무순 등 여러 지역의 조선족, 몽골족 회원 100여명이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먼저 박재림씨(조선족협회 리사장)가 제9기리사회를 대표하여 지난 4년간의 사업성과를 회고하였으며 오옥성씨(몽골족협회 리사장)가 “료녕성민족과학보급협회정관을 수정할데 관한 결정(초안)”(이하 정관)을 선독하였다. 이번에 통과된 “정관”에는 협회활동에서 학술교류와 과학보급활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을 명시하였는가하면 회원성분에 여러 과학연구기관 중고급과학기술연구원과 대학교수외 중소학교교원도 회원자격을 가지며 리사회의 임기를 기존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는 등 내용이 포함된다.   대회에서는 제9기리사회에서 대회에 제출한 제10기리사회 리사장 등 리사진 후선인명단을 다수가결로 통과하였고 선거를 거쳐 조선족협회에서는 료녕전자기술정보소 김희성소장이 제10기 신임리사장으로, 몽골족협회에서는 심양농업대학 식물보호학원 부주범원장이 신임리사장에 각각 당선되였다.   신임리사회를 대표한 발언에서 김희성씨는 “전기 리사회는 협회발전에 량호한 토대를 닦아놓았다”며 “민족과학보급사업에 대한 더 큰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협회를 진정한 ‘민족과학사업일군들의 집’으로 꾸리며 협회자원을 충분히 발굴하여 민족과학보급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해나갈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소식에 의하면 료성민족과학보급협회는 회원들간 원활한 정보교류와 상호련계 강화를 위한 협회사이트 www.lnmzkp.com를 이달 24일부터 공식개통하였다.                         
28    사증령사면담제 3개월간 800여건 접수 11/29/2011 댓글:  조회:2068  추천:0  2012-01-17
사증령사면담제 3개월간 800여건 접수 -사증신청불허에 대한 불만요소 대폭 감소 본사소식 주심양한국총령사관(아래 한총관으로 략칭)은 지난 8월부터 여러가지 원인으로 사증을 거부했던것을 령사면담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구제하는 등 사증령사면담제 시행으로 큰 효과를 거두고있다.    사증령사면담제는 담당령사가 사증발급을 희망하는 민원인들을 직접 만나 면담을 시행하는 제도인데 신청한 사증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불허되여 쉽게 불법중개업자들에 속아 사기당하는것을 막고 또 일부 미비한 서류때문에 한국행사증을 발급받지 못하는 조선족들을 구제하자는 취지이다.  한총관에 의하면 령사면담은 매주 목요일에 예약없이 방문선착순대로 면담하고있는데 3개월간 13회 실시하여 도합 817명을 면담, 그중 400여명을 구제하였다. 이 과정에 하루종일 면담을 수행하는 담당령사는 물론 밤늦게까지 불만없이 초과근무하는 접수창구의 직원, 보안요원 등 관련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많았다.   구제된 사례중에는 입국금지자에 대하여 다시 법무부 사증발급승인 상신을 통해 사증을 발급했거나 수차례 사증신청이 불허된 자에 대한 사증발급 사례외에도 입국금지자중 동명인으로 이미 출국하여 사증이 불허되는 억울한 사례도 있었다. 김모씨는 밀입국후 2006년 11월 강제퇴거되여 입국금지되였는바 이후 한국어시험에 합격하여 추첨에 당첨되였음에도 입국금지로 사증발급이 불가하였는데 령사면담을 통하여 사증을 발급받았다. 이런 사례가 5건이나 된다. 불법취업하던 허모씨는 2008년 10월 강제퇴거되여 입국금지조치, 한국국적을 취득한 모친의 병이 위중하여 사증신청하였으나 계속 불허되다 역시 령사면담을 통하여 사증이 발급되였다. 정모씨는 제12회한국어시험에 합격, 추첨에 당첨되였지만 한국어구사능력이 미약하다는 사유로 련속 4회 신청이 불허되여 령사면담결과 한족학교를 다녀 언어구사는 약하나 한국어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한국어실력이 된다는 점이 인정되여 사증이 발급되였다. 또 김모씨는 2004년부터 불법체류하다 2008년 3월 자진출국후 입국금지되였다  2009년 4월 입국금지가 해제,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투병중인 부친의 병간호를 위하여 사증을 신청하였으나 2회 련속 신청이 불허되다가 령사면담을 통해 사증을 발급받을수 있었다. 불법체류로 입국금지규제에 묶였던 리모씨는 면담을 통해 올해 1월 규제기한이 만료된 사실을 알아 사증발급을 신청할수 있었다.    사증령사면담제가 시행되면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민원인들은 불허된 리유나 입국 금지기한, 보완해야 할 서류 등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며 령사관의 조치에 환영하고있다.   한달에 2만건 이상 사증신청서류 접수로 초부하업무를 수행하고있는 한총관으로 볼 때 사증령사면담제는 가히 파격적인 조치라 할수 있다. 사증령사면담제는 사증신청불허에 대한 민원인들의 불만요소를 대폭 감소하여 대민원서비스를 제고하였을뿐만아니라 사증관련 궁금사항에 대한 자세한 설명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증브로커의 유혹에 현혹될 위험성을 대폭 감소하였다는 평이다.   사증담당 김영근령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령사면담을 통해 한국에 꼭 갈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사증을 못받아 가지 못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는것을 새삼 알게 되였다”며 “사증령사의 주요임무는 문제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증을 발급하지 않는것이기는 하나 한국에 갈 타당한 사유가 있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사증이 불허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것도 중요하다. 우리 공관은 앞으로도 불필요하게 사증신청이 불허되는 일이 없도록 심사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것이다”고 하였다.    해외한국공관중 처음으로 사증령사면담제를 도입한 한총관은 앞으로도 계속 사증령사면담제를 지속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지훈기자  
방문취업신규입국신청등록 첫날부터 먹통 -왜 이렇게 힘들지… 또 불만의 목소리 본사소식 11월 15일 오후 1시, 중국전역은 또다시 코리안드림분위기에 휘말렸다. 2012년 상반기 방문취업신규입국자 사전신청이 일제히 개시되여 조선족이 사는 곳마다 피말리는 컴싸움에 들어간것이다. 그런데 웬걸 법무부의 지정 신청등록사이트(www.hikorea.go.kr)에 도무지 접속할수 없었다. 서로 전화로 그 영문을 알아봤지만 신통한 답이 없었고 사이트에는 “시스템에 사용자가 많아 접속이 지연되고있습니다. 리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잠시후 다시 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란 량해메시지만 뜰뿐 여전히 열려지지 않았다. 후에 알아보니 신청자가 폭주하여 사이트가 다운로드되였다는것. 컴 전체가 다시 거의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하이코리아에서는 급히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www.immigration.go.kr)의 홈피로 이전할것이라며 공지사항을 띄웠는데 첫날 알려준 홈피주소가 틀려 부득불 검색하여 찾아야 하는 불편을 겪은데다 또 “방문취업기술교육 신청절차 및 요령안내”파일도 “아래한글”(文杰)프로그램으로 되여 중국에서 많이 쓰이는 워드파일로 도무지 열수 없는 일도 벌어졌다.     브로커의 원천차단과 신청자편의를 위한 하이코리아를 통한 프로그램개발에서 한국법무부와 주심양한국총령사관의 사전설명 등 철저한 대비책에도 불구, 예상외의 일이 발생하자 컴에 우두커니 앉아 접속을 시도하던 사람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컸다.  결국 지난번의 중국교육부고시중심을 통해 신청하는것보다 별로 더 낫지 않다며 한국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원성과 불만이였다.     개인집과 컴퓨터방, 직장 등 여러곳에서 컴접촉을 시도하였지만 다 별로 순조롭지 않았고 컴을 모르는 신청자들을 위해 령사관이나 비영리단체에서 대리등록을 한다고 하였지만 역시 접속이 여의치 않아 신청사이트의 프로그램과 시스템 자체가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김모씨는 인터넷접속에서 중국망통(W욝?은 접속이 그대로 가능하나 중국전신(K儒?이나 철통(p`通)은 접속도중 자꾸 애로가 생겨 신청이 더 어렵다는 기술적문제도 제기하였다. 이처럼 여러가지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신청등록을 마쳤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다행히 이번 신청이 11월 15일에서 12월 15일까지 한달기간으로 여유는 좀 있었으나 하루빨리 신청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이 바질바질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이다. 언제쯤 통쾌하게 컴이 열려 신청이 접수되려는지?    지난 8일에 있은 령사관의 심양과 연길에서의 사전설명회에 많은 인파들이 몰린것을 보면 어림잡아도 한국행희망자가 10만명을 헤아리고있어 자칫하면 이번에도 또다시 중국조선족사회를 울릴가봐 심히 걱정된다.                           
26    만융촌 만융제3산업협회 설립 11/1/20 댓글:  조회:1825  추천:0  2012-01-17
만융촌 만융제3산업협회 설립 본사소식 중국조선족제1촌으로 불리우는 심양시 화평구 혼하참서가두판사처 만융촌이 심양경제발전의 주요 행정구인 화평구에 귀속되면서 발전속도가 빨라지고있는가운데 10월 28일, 이 촌에서는 만융제3산업협회를 설립하였다.      이날 만융빌딩에서 열린 만융제3산업협회설립 및 제1차리사대표대회에 성민위 장덕수부청급순시원, 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장현환리사장,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표성룡회장, 심양시위 선전부와 정책연구실 관계자, 심양시조선족련의회 길경갑회장, 월드옥타 심양지회 리성국회장 등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현재 1,600여세대에 6,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만융촌에는 크고작은 식당과 마트, 약방, 리발관 등 제3산업관련 업소가 도합 109개로 경제수익 및 고용창출에 일조하고 만융촌민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편의를 주고있다. 만융촌지도부에서는 촌내 제3산업이 업종규범과 서비스기준, 서비스질, 서비스수준, 환경 등 방면에서 변화발전하는 시장수요와 소비자들의 기대에 부응할수 없는 등 점을 감안하여 만융제3산업협회를 설립키로 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만융제3산업협회정관을 채택하고 회장단을 선출, 만융빌딩 김은형총경리가 초대회장에 당선되였다. 그는 회원사간 일심협력하여 깨끗한 만융, 쾌적한 만융, 민족특색이 있는 만융을 건설하는데 기여할것이라고 했다. 회의에서는  관홍검 혼하참서가두판사처 당공위서기), 리문길(만융당위서기), 조성남(만융촌민위원회주임)을 명예회장으로, 표성룡, 길경갑, 박해천, 리성국, 리철 등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리문길서기는 “협회가 성신경영으로 만융제3산업을 좋고도 빠르게 발전시킬것”을 당부하였고 길경갑회장은 “협회가 제3산업활성화로 만융경제발전에 일조할것”을 기대하였다. 장덕수부청급순시원은 “만융의 력사, 만융의 발전변화는 전반 조선족사회발전에 큰 힌트를 주고 귀감으로 된다. 이번 만융제3산업협회 설립은 획기적인 시대의의를 가진다”며 “만융촌이 계속하여 경영모식, 경제발전 탐구에서 새로운 돌파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진은 지도부 성원들이다.                                
내실 다져 상호윈윈 기한다 ㅡ주심양한국총령사관 조백상총령사 인터뷰 본사소식 11월 실시예정인 한국정부의 방취제관련 신규 입국정책을 앞두고 일전 기자는 주심양한국총령사로 취임한지 7개월이 된 조백상총령사를 단독인터뷰하여 그동안의 사업실적과 추진상황, 향후 계획,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관심사 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조총령사는 흔쾌히 취재에 응하면서 “료녕성은 한국과 력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내 그 어느 지역보다도 긴밀한 뉴대관계가 있는 지역으로서 마치 고향을 방문한것처럼 친밀감을 느끼는 한편 이 지역 총령사로서 막중한 책임을 갖는다”고 했다. 아래는 인터뷰내용이다.   문: 총령사로 부임이후 지방정부와의 주요 사업실적과 협력사항 및 진척현황은?   답: 지난 3월 부임이후 동북3성 각 지역 정부인사를 면담하고 한-동북3성간 경제, 문화, 교육 등 제반 분야의 교류협력 강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금년 7월 심양시정부와 함께 제10회심양한국주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금년 한국주에 한국의 중진급 국회의원들이 대거 방문하여 심양시의 발전된 모습과 미래 계획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란타공연을 심양시민들과 함께 향유하는 기회도 있었는바 이를 통해 한국과 심양시간 우호협력관계가 더욱 깊어진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한국주행사기간 당관과 화평구 만융경제구간 심양한국국제학교이전에 관한 의향서도 달성하였다.   래년 한국주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이를 기념하는 행사로 치룰수 있도록 준비하고 더 많은 한국기업인과 우리 정부측 인사들이 방문할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들을 준비중에 있는바 심양시정부의 협조하에 더 알찬 한국주행사가 열릴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금년 8월에는 이규형 주중대사 등 많은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제5회할빈한국주간행사가 개최되였는바 동 행사를 통하여 한국과 할빈시간 협력수준을 한단계 격상시켰다.      갈수록 중요해지고있는 동북3성과의 협력강화 필요성을 감안, 금년 9월 코트라 주심양대표처가 개관한데 이어 현재 주대련령사사무소 설치를 추진중에 있다.  또한 금년도에 전두환 전 대통령, 이홍구 전 총리, 노신영 전 총리, 김문수 경기지사, 김두관 경남지사, 안상수의원 등 주요귀빈이 상당수 동북지역을 방문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한국과 동북3성간 협력이 강화되고있다.    래년도 한중수교 20주년을 계기로 한국과 동북3성간 협력이 도약해나갈수 있도록 제반 분야의 교류를 더욱 강화해나가는 한편 6만 5천여명 교민의 안정된 생활과 합법적인 권익보호를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나갈 계획이다.      문: 동북3성 특히 료녕성은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한 중요한 중심지로 부상하고있다. 미래에 한-료녕성간 경제무역합작에 기대되는 새로운 계획이 있다면?                                                                                                               답: 중국정부의 동북진흥정책 등에 힘입어 료녕성을 포함한 동북3성지역에 최근 대기업을 위주로 한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증가되는 양상이다. 우리 나라의 대중국 전체투자중 동북3성 투자비률은 2006년 6.6%에서 2010년 19.5%로 대폭 증가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한-동북3성 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빠른 발전세를 나타내고있다.    특히 료녕성은 심양경제구건설과 료녕연해경제벨트계획의 중국국가전략 채택으로 2010년도 14.1%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자기업의 투자는 207억딸라로 중국내 31개 성시중 2위를 기록하였는바 이런 발전잠재력으로 하여 향후 보다 많은 한국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질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동북3성에는 4,500여개의 한국기업이 진출해있으며 이중 3,900여개의 기업이 심양 및 대련 등 료녕성에 집중되고 그 투자분야도 종전의 제조업에서 IT, 부동산, 금융, 서비스업 등으로 다양해지고있다.    료녕성을 포함한 동북3성의 중요성을 감안, 당관은 2010년 12월에 동북3성 한중경제포럼을 심양에서 개최하였고 금년 8월에는 장춘에서 제2회 행사를 성과있게 개최하였다. 동시에 한국과 동북3성 정부간 경제협력채널을 체계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하여 래년도부터 정기적으로 한국과 동북3성 정부 및 기업 관계자가 참여하는 한국-동북3성 경제협력협의회 개최방안을 적극 추진중에 있다.    문: 최근에 한국정부는 중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한국려행편의조치와 민원서비스개선책을 마련한것으로 알고있는데?     답: 당관은 한국관광공사 심양지사와  공동으로 각 시의 교육국 관계자를 면담, 방학기간 한중 량국 청소년교류를 위한 초중고생의 한국방문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팸투어도 실시할 예정이다. 미래의 주역인 량국 청소년 교류확대를 위하여 다양한 수학려행코스를 개발, 방한시 한국학생들과의 교류프로그램, 공연참관, 기념품제공, 방한일정추천, 각종 물품지원 등을 지원하고있다. 한국관관공사는 2010년 서울 FIT관광을 위한 가이드북을 발간하였으며  2010~2012년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한국방문객들에게 쇼핑할인혜택 등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하고있다. 이밖에 로인단체 방한상품, 의료서비스와 관광금융복합상품, 고가의 럭셔리상품, K-pop 참관상품, 제주노비자 골프단체상품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있다.                           사증발급관련 민원편의서비스를 강화하였다. 중국211대학의 재학증명서가 있는 경우 재정보증서류 제출 면제, Fax민원 접수처리 및 관리강화, 사증대행려행사대상 간담회 주기적 개최, 령사면담제 실시(금년 7월부터), 사증대행려행사대상 순회간담회 실시계획, 콜센타운영 등이다. 특히 령사면담제 실시, 홈페이지 및 SNS 구축, 경제사랑방 및 각종 간담회 개최, 순회령사, 뉴스레터 발송 등을 통하여 교민 및 조선족동포와의 소통을 강화했다.    문: 중국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중한경제협력의 강화속에서 중국조선족기업인은 최근년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조선족기업간 상생협력 구축방안이라면?   답: 최근 한국기업들은 동북3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나가고있는바 중국내수시장개척을 위해서는 중국어 및 중국문화에 정통하고 중국내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있는 조선족동포와의 긴밀한 협력이 긴요한 상황이다. 한중수교이후 조선족기업은 무역, 제조업 및 로무수출 등을 통하여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한중 량국간 관계발전과정에 중요한 교량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당관은 경제사랑방 정례개최와 한중기업인교류회 개최 등을 통해 동북3성내 한국 및 조선족 기업간 상생협력을 강화하고 내수시장개척을 지원하고있다. 또한 조선족기업들의 한국투자도 적극 추진하고있는바 조선족기업들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동북3성에서 한국기업과 조선족기업간 상호 교류협력이 잘 이뤄지고있는데 한국주행사와 같은 행사에서 조선족기업인들의 지원이라든가 심양한국국제학교에 대해서도 조선족기업인들이 지원의향을 밝혀오고있는데 이를 기쁘게 생각한다.     문: 방취제는 중국조선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1월에 실시예정인 방취제의 신규 입국정책에 대해 조선족사회는 아주 관심하고있는데?    답: 한국정부는 방문취업사증 발급대상 선발방식을 한국어시험합격후 전산추첨방식에서 인터넷사전예약후 전산추첨방식으로 전환하고 11월초경 인터넷예약을 접수받을 예정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사전예약한 사람에 대하여는 매년 추첨에 의하여 방문취업사증 발급대상자를 선발할 예정이며 그중 학원에서 기술연수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는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게 된다.    인터넷예약, 특히 기술연수희망자에 대한 선착순예약이 공정하게 실시될수 있도록 기술적인 사항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으므로 동포들은 사증브로커 등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한국정부 및 당관의 안내를 특별히 류의하시기 바란다. 또한 사증브로커의 개입을 차단 내지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당관은 모든 사증신청은 대행사를 통하지 못하도록 하고 신청인 본인이 직접 당관을 방문하여 접수하도록 할 예정이다.   조백상총령사는 “조선족동포들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중 량국관계의 교량역할을 하는 동시에 중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할수 있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지훈기자  
24    2012년은 "변(變)"의 해 댓글:  조회:2353  추천:0  2012-01-17
2012년은 "변(變)"의 해                  석천 올해는 임진년(壬辰年)으로 60년만에 한번씩 온다는 흑룡의 해다. 그래서 상서롭고 길함이 더 크다. 필경 룡은 12가지 동물중 장점만 골라 탄생시킨 동물이여서인지 편안함과 부귀영화의 상징이요, 권력의 상징이다. 룡해에 거는 기대와 희망 또한 크다. 올 한해만 세계 20여개의 나라에서 대선 또는 정권교체가 이뤄진다하니 격변의 해가 아닌가싶다.       우리 사회도 커다란 변혁의 시대에 처해있다. 조선족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과 미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룹을 형성하여 글로벌시대를 맞이하고있다. 한국에 나가있는 조선족만 50만으로 한국 전체인구의 “1%시대”를 맞고있다. 이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 나아가 삶의 방식 전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고있다. 하나는 G2경제대국으로 궐기한 중국이라는 주류사회의 발전속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는 지혜를 습득하여 경제기반을 확충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무대 진출을 겨냥해 우리의 지적수준과 기술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것이다.   수십년의 “코리안드림”속에서 우리는 몸부림쳐왔다. 지난해 한국 “위대한 탄생” 오디션에서 연변의 백청강이 무수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성공한것도, 재한 로무일군 석기호씨가 한국 KBS “우리 말 겨루기”에서 당당하게 우승보좌에 오른것도 우리의 각성과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사례라 할수 있다.   《역경》에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말이 있다. 우주만물의 법칙을 말하는 이 말구는 막히면 변화를 꾀해야 하고 변화하면 통하게 되며 통하게 되면 영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주변세계가 변하고 생활이 변화되는 환경속에서 “코리안드림”을 단순한 렴가인력수출이 아니라 부의 축적과 함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바꾸는 기회로 간주하고 보다 주동적이고 능동적인 변화로 삶의 질적변화를 꾀해야 할것이다. 사고방식이 바뀌는것만큼 시야도 트이고 목표도 보이고 우리의 국제무대도 넓어질것이다.   개천에서 룡 나온다는 속담처럼 우리들속에서 더 많은 성취자가 나오고 이와 더불어 우리 사회가 비상하는 흑룡의 기운과 지혜를 받아 새롭게 변화발전하는 2012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프랑스 오리지날와인 심양 첫 진출 -심양훙카이모우무역유한회사 노평환사장의 “와인꿈” 심양에서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비즈니스를 한다는 한단성 오피스텔 23층 37호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여기저기에 무져있는 와인박스들이 눈에 뜨인다. 프랑스 오리지날와인을 들고 중국시장을 노크하고싶다는 한국인 노평환씨(1972년생)가 기자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무수한 아이템중 와인을 첫 중국사업으로 선정한데는 와인의 특유매력도 있었지만 중국 와인시장의 흐름을 읽은데있다는것. “와인 역시 주류에 속하고 술을 좋아하는 중국에서 앞으로 2~3년이면 와인붐이 일것이라 생각되였어요.” 한국에서도 1990년대말에 와인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초기에는 선물용이나 고급상품으로 선호되였으나 현재는 와짝 일었던 와인붐이 점차 가라앉고 가정에서 부부가 텔레비를 보면서 여유작작 마시는 건강에 좋은 “약주”로 각인되고있다.    노사장이 한국인으로 심양에서 처음으로 직수입하는 프랑스와인은 세계 와인의 “제왕” 또는 “녀왕”으로 불리우는 프랑스 보르도의 300년 력사를 자랑하는 와이너리(酒莊)의 시그네회사에서 만드는 유명 포도주다. 그는 프랑스는 워낙 수질이 나빠 포도주를 개발하게 되였는데 기름진 음식을 즐겨먹는 프랑스인이 심장질환이나 발암률이 낮은데는 와인의 기능이 작용한것이라고 했다. 포도는 자랄 때 뿌리에서 빨아올린 천연수로 즙이 생겨나기때문에 와인을 마시는건 영양이 살아있는 청정샘물을 마시는것과 마찬가지, 즉 “건강”을 마시는것과도 같다. 해외에서는 와인을 “태양이 준 선물, 천연음료”라고 한다고 한다.   노사장은 이처럼 포도에 인체에 좋은 물질이 함유돼있기에 포도를 먹을 때 포도씨와 껍질을 꼭 먹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따라서 포도를 주원료로 만드는 와인은 심장질환예방, 항암효과, 피부미용 등 효과가 있다. 특히 로화예방 3대 기호식품중 하나로 고령화시대, 건강을 중시하는 웰빙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진국에서는 와인이 효도선물 또는 랑만의 선물로 선호되고있다. 이런 세계적주류문화의 발전흐름을 감안할 때 중국에서도 불원간 와인붐이 일것이라는것이 그가 중국와인사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다.    금년 3월부터 심양서 와인사업을 본격 시작한 그는 기존의 한 회사를 인수하여 서류준비를 다그친데서 금년 7월말에 1차물량을 수입했고 2차물량도 11월 22일에 대련에 도착하였다. 적포도주(4종) 시음회를 통해 좋은 평가를 받은 그는 2차물량을 계약하여 동북3성 독점수입계약을 따냈다. 2차물량은 품종을 다양화하여 기존 와인뿐만아니라 샴페인, 백포도주와 고급 레드와인을 수입, 다양한 소비계층을 위한 마케팅전략이다.   아직은 와인을 파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와인에 대해 잘 모르기에 중국시장에서 펼치는 와인사업이 한결 더 간고하지만 “와인은 문화산업으로 부흥할수 있고 얼마든지 성장할수 있는 산업이다”는것이 와인사업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거래를 시작할 때 와인초보임을 안 프랑스의 와이너리사장이 “와인은 녀성과 같다는걸 잊지 말라”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 사장은 와인과 녀성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스러워지는 공통점을 갖고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중한간 무역업에 종사해오던 그는 와인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단순한 와인무역업자에서 인제는 와인에 매료되여 와인사업자로 변신하게 된것이다.   그가 취급하고있는 와인은 프랑스국가관리등급중 가장 높은 A, O, C 등급의 높은 품질로 소비자들이 거부감 없이 편하게 마실수 있는 와인들이였다. 이 “시그네”와인은 이미 광동성과 산동성에 진출하여 중국인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아 철저한 품질보장, 중국소비자에 맞는 마케팅전략과 적정한 가격대를 구사한다면 동북시장을 얼마든지 개척할수 있다는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는 초창기로 와인을 판매하는 업체나 마트에 납품하고있고 또 회사나 단체의 행사용선물, 주류취급가게에 판매하고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와인동호회(서탑에 오픈하는 프랑스빵집에 전문 와인코너를 설치)를 통한 와인문화의 전파와 함께 개인판매, 온라인판매와 지역별 대리점모집을 하여 판매망을 확대할뿐만아니라 전문와인매장을 오픈한 와인바사업을 하고싶다고 노사장은 말하였다.       오지훈기자  
22    "당뇨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댓글:  조회:2989  추천:0  2012-01-06
 "당뇨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당뇨에 희망을 주는 송문기박사   재미과학자 송문기박사(78세)는 세계 100인의 유명 인명록에 등재된 인물이다. 그는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론문과 저술을 통해 생화학분야와 의과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 심어놓았으며 이러한 론문과 저서들은 미국 의학계의 많은 지침으로 되고있다. 특히 그는 40여년간 인체의 당뇨병과 비만 같은 난치병을 공략하여 많은 성과와 업적을 이뤄냈다. 일전 기자는 중국과학원의 초청으로 대련에서 열리는 세계생물과학협회의 국제학술대회(IBS-2008)에 참석하여 론문을 제공한 120여명의 세계적과학자중 주요 주제발표자 4명중 한사람으로 대회에서 발언하게 되는 송문기박사를 심양에서 만났다.   기자는 지난 2006년 료녕중의약과대학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학술대회때 잠깐 인사를 드린적이 있으며 이번에는 송박사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할 행운의 기회를 가졌다. 그는 기자에게 당뇨의 발병원인, 치료가능성 등에 대해 자상히 설명해주었는데 과학자로서의 진지한 탐구정신을 보여주었다.   현재 송박사의 당뇨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리론과 림상실험은 상당한 결실을 보이고있다. 당뇨병은 1형당뇨(소아당뇨, 10%에 해당)와 2형당뇨(성인당뇨, 90%)로 구분되며 송박사의 연구는 2형당뇨의 원인과 치료에 초점이 맞추어있다. 2형당뇨는 주로 현대인이 나쁜 생활습관에서 기인된것으로서 과다한 영양을 섭취하고 상대적으로 운동량이 적어 발생하기에 성인병 또는 문화병이라고 한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면 소화가 되여 에너지원인 당으로 전환되는데 이때 이 당을 세포안으로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있다. 인슐린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호르몬물질로서 당과 함께 세포안으로 들어간다. 당은 세포내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에너지로 사용되고 인슐린은 세포내에 있는 인슐린소화효소에 의해서 소화되여 소멸되며 수용체인 세포의 문은 다시 세포의 표면의 문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세포에 들어온 인슐린이 사용후에 찌꺼기형태로 세포내에 남아 적체되면 세포의 신진대사기능이 저하된다. 이렇게 되면 인슐린은 당을 세포내로 류입시킬수 없기에 인슐린저항상태에 이르게 되고 당이 세포내에 들어오지 못하므로 하여 혈액은 끈적끈적하게 되고 모세혈관이 막혀 당은 합병증을 유발하게 된다. 합병증으로 손, 발, 안구, 심장 등 모세혈관이 많이 지나가는 장기 및 신체부위에 손상을 주게 된다. 또한 세포의 에너지원인 당을 적절히 사용할수 없으므로 저혈당증을 일으켜 어지럽고 힘이 없어 활동의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성인당뇨의 주원인을 인슐린저항증에서 찾았다. 즉 인슐린저항의 주원인은 음식의 과다복용에 의한 인슐린 과다사용에 있다. 인슐린의 과다사용은 사용된 인슐린의 페기물이 너무 많이 세포내에 쌓이므로 세포내에 있는 페인슐린 쓰레기를 소화시키는 소화효소가 부족하여 발생한다. 몰론 이외에도 췌장의 기능이 저하되여 인슐린분비가 적은 원인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당뇨병에 걸려 당뇨병합병증으로 췌장이 손상되여 발생되는것이므로 인슐린저항이 가장 원천적 원인제공자라고 했다. 송박사는 오랜 연구를 통해 이 인슐린 소화효소를 활성화시킬수 있는 물질을 찾아내였는데 그 물질의 이름을 싸이클로지(Cyclo-Z)라고 명명하였다. 아연(Zinc)을 싸이클로히스프로(CHP)라는 물질과 혼합하여 조성한 물질로 인슐린쓰레기 소화효소(IDE)의 생성과 활성화를 가속화시키는 성질이 있다.    송박사의 연구는 현재 1단계에서 2단계에로 들어갔는데 이미 현저한 효과를 보이고있다. 임상보고에 의하면 싸이클로지를 복용한 당뇨환자들이 3개월에서 6개월이상인 경우 현재 맞고있는 인슐린주사를 중단하거나 회수를 줄일수 있고 혈당강화제도 줄이거나 끊을수 있는 가능성과 결과를 보여주고있다. 싸이클로지는 미국련방 재향군인병원 특허로 5년전부터 처방없이 자유롭게 복용할수 있는 보건식품을 출시하였으며 동시에 제약으로 등록하기 위하여 FDA 지휘하에 임상실험을 진행하고있다.   송박사는 당뇨약을 당뇨치료제와 혈당강화제로 구분할수 있는데 혈당강화제는 일시적으로 혈당을 조절해주어 합병증에 가는 형태를 막아주거나 지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면서 병원의 당뇨관련 처방약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당뇨치료제는 2000년도에 처음으로 개발한 아반디아가 최초이나 독성이 강하고 그 후유증이 심하여 이를 변형한 액토스가 개발되였으나 효과가 별로 없다. 그러나 싸이클로지는 부작용이 없이 당뇨병을 치료할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임을 림상실험에서 립증해주고있으며 갈수록 환자들의 호평과 의학계의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있다고 했다.    송박사는 1959년 도미하여 하와이의과대학에서 생화학과 분자생물학 등의 학위를 받았고 UCLA의과대학 교수 겸 연구원으로 재직, 1994-1996년 해외우수두뇌초빙프로그램 한국과학기술원 초청으로 2년간 연구에 전념한바 있으며 현재는 미국련방 재향군인병원의 당뇨병 및 성인병의 연구원, 미국 국립보건원 농림부 등 미국 주요기관의 자원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있다.   그는 또 지난 2004년부터 중국을 방문하기 시작하여 수차례의 학술세미나 및 의학세미나에 참석했고 지난 2006년에는 료녕중의약과대학 초청으로 2일간 특강을 진행한바있다. 그는 특히 조선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선족의학도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있다. 기전학분야 송박사가 펴낸 많은 론문과 저서로 하여 중국 내분비과에서도 송문기박사의 이름을 높이 하고있으며 현재 그의 싸이클로지는 연변한미병원뿐만 아니라 중국의 십여개 의과대학에서 림상실험을 하고있다. 그는 또 중국 미래생물과기유한공사, 연변한미병원 등과 협력하여 싸이클로지가 더많은 당뇨환자들에게 복음을 줄것을 기대하고있으며 제2단계로 제약화사업에도 열정을 보이고있다.    송문기박사가 개발한 싸이클로지는 현재 중국 위생부이 허가신청을 획득하였고 늦어도 10월중 허가가 완료될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싸이클로지로 하여 한국인으로서 송문기박사가 노벨의학상을 받을수 있는 기회가 또 마련될것을 기대해본다.   (2008/10/16)
21    지진구재현자의 사선을 넘나들며 댓글:  조회:1960  추천:0  2012-01-06
지진구재현자의 사선을 넘나들며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의 항진구재의 나날   5월 14일 오후 4시 본계소방항진구재소분대는 사천성 광원시 청천현 목어진에 도착했다. 이번 사천특대지진 진중앙에서 백여킬로로 안되는 목어진은 전체 건물의 80%가 거의 무너져 평지가 되다싶이했다. 사천지진구조팀의 한 성원으로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일행의 눈앞에 나타난 정경은 참으로 눈뜨고 볼수 없는 현실이였다. 건물들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린 페허더미속에서 친인의 생존희망을 애타게 바라고있는 그 가족들과 필사적으로 구조작업을 벌리고있는 사람들... 2차로 사천지진구재현장에 투입된 료녕성소방구조팀에 맡겨진 임무는 피해현장에서 계속 인명을 구조하고 재산을 하나라도 건져내 피해를 최대한 줄이라는것이다.   마지막 희망이라도 건지자   김춘명소속 구조대는 차에서 목어진에 내리자마자 리재민들에게 곧 포위되고말았다. "저희 부친이 저속에 있어요. 아직 신음소리가." 한 중년남자의 다급한 목소리다. 구조팀의 손에 들고있는 생명탐측계기엔 건물더미에 묻힌 사람의 생존기미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가닭 마지막 희망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그 중년남자와 가족들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선에서 김춘명은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곧 구조에 뛰여들었다. 부대가 현장에 도착한지 얼마안되여서 대형 기계설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조립식판넬과 철근, 별돌을 제껴내야 안에 깔린 사람을 구해낼수 있었는데 사천가옥의 건축구조는 북방과 달라 천장이 정방형 모양의 2,3메터에 두께가 2,30센치메터되는 조립식판넬이여서 몇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김춘명 등 10명 구조대는 두손과 구조용바줄로 안깐힘을 써가면서 그 커다란 조립식판넬을 옮기고야말았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그들은 한 조난자의 손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맥박을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김춘명과 구조대원들은 수난자의 몸을 조심스레 페허더미속에서 끄집어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김춘명과 대원들은 현지의 풍속대로 하얀 천으로 수난자를 덮었다. 수난자의 사체를 담가대우에서 올려놓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소방전사들이 수난자에 대한 존경에 모두들 눈물범벅이가 되여 무릎을 꿇고 오래동안 일어설줄 몰랐다.   이번 사천지진구조대에 김춘명은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당시만해도 김춘명은 곤명소방대학교 학원신분이여서 임무가 그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5월 12일, 사천특대지진소식을 접한 김춘명은 더는 잠을 이룰수 없었으며 이튿날로 상급을 찾아가 강의한 태도로 요청했고 최종 료녕성소방총대의 비준을 받아 본계소방소분대 일원으로 될수 있었다. 퇴근무렵 그는 련풍소학유치원에서 근무하고있는 안해 우영을 찾아가 "이번 지진파괴가 참혹한데 우리가 갈수 있을것 같아서......"라고 말을 던졌고 조국의 부름이라면 서슴없이 나서는 김춘명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리해하고있는 우영씨도 "알아요..."라고 짧은 말로 남편을 지지해나섰다. 그리하여 김춘명은 대리대장으로 임명되여 구조대에 합류할수 있었다.     하루에 14구 사체를 사출   5월 15일, 목어진천황가 48호 층집에 아직도 6명이 묻혀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춘명은 주동적으로 구조작업에 뛰여들것을 신청했다. 그는 구조팀을 이끌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상황을 살피고 생명탐측계기로 세세히 탐조해서야 한 남성조난자가 묻혀있는곳을 찾아낼수 있었다. 조난자의 몸이 두개의 콘크리판에 끼여있어 기중기로 콘크리판을 들어내야 했는데 그 콘크리판에 작은 틈새조차 없어 기중기의 철사를 끼워넣을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김춘명은 곧 도기로 내리찍고 손으로 파서 겨우 철사를 넣을만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구조과정에 콘크리판이 수난자의 몸에 떨어질것이 우려돼 김춘명은 기중기로 콘크리판을 1메터가량 옮기게 한후 원목을 그 콘크리판밑에 놓고 계속 콘크리판을 옮겨 수난자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이어 김춘명 소속 구조대는 페허더미속에 갇힌 사람이 어데 있는지 몰라 당황해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반복적인 탐사를 진행하여 층계위치에서 조난자가 있다는것을 발견하였다. 한시간남짓 간고한 구조작업끝에 4명의 수난자 사체를 찾아냈다.   긴장한 하루의 구조작업이 끝나자 대원들이 대충 요기하고있을 때도 김춘명은 지친몸을 이끌고 계속 수색작업을 벌렸다. 대원들이 두쪼각의 과자를 굽내기전에 김춘명이 뛰여와서 "또 한 수난자를 찾아냈소"라고 했다. 김춘명과 대원들이 그 수난자를 페허더미속에서 끄집어내자 가족들은 김춘명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김춘명과 대원들은 평소 련마한 구조기능과 쌓은 경험으로 악전고투하여 페허속에서 14구의 사체를 찾아냈다.   당신들은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이오   5월 17일, 목어진의 구재현장. 한 사람이 본계소방장병들이 위험한 건물에서 구해낸 카메라를 들고 감동되여 전체 장병들과 촬영을 요구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소방대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만원의 케메라기자재를 구해주었던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점심을 먹지 못한 본계소방구조대원들이 지친 몸으로 숙영지로 돌아와서 요기하려 할때였다. 한 사람이 "본계소방'의 이름을 듣고 찾아와서 자기재산을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김춘명 등 대원들은 점심도 먹지 못한채 곧장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참으로 아슬한 현장이였다. 사진관은 3층으로 된 작은 층집이였는데 이미 무너 내려앉은 천장아래로 벽돌장이 수시로 떨어지고있었다. "귀중물품이 몇층에 있어요?" 김춘명의 말에 "저 3층에"라고 주인이 대답했다. 주인의 기대어린 시선과 수시로 위험이 덮칠 현장을 지켜보면서 잠깐 침묵을 지키던 김춘명은 량자지간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가 선참으로 층계에 뛰여오르자 그를 따라나섰던 5명의 소방대원들도 곧 구조작업에 뛰여들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듯한 벽체의 갈라지는 소리는 매 한발자욱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것을 의미했다.   먼저 텔레비, 다음 랭장고, 오디오 하나하나의 물품이 위험이 도사리고있는 건물에서 빠져 안전한 지대로 옮겨졌다. 세심한 소방대원들은 마지막에 집주인의 생계가 달려있는 카레라기자재를 찾아냈다.   사선을 넘나들며 필사적으로 자기의 재산을 구해준 소방대원들에게 감동된 사진관주인은 당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며 소중한 기념사진 한장을 찍자고 부탁했다. 작별시 주인은 김춘명에게 주소를 남기게 하고 "사진을 씻아서 꼭 보낼거요"라고 거듭 말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찾아와 페허더미속에서 생활필수품을 건져달라고 간청했다. 여진이 수시로 일어나는 페허더미에 다시 들어간다는것은 말그대로 생사의 판가름이였다. 그러나 김춘명은 그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고 층집 계단이 완전히 두쪼각난 상황에서도 방법을 대여 층집에 뛰여들었다. "그 침대매트를 던져줘요. 우리가 잘수 있도록....." 김춘명이 매트를 제끼자 그 밑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돈이 발견됐다. "매트밑에 무슨 물건이 없어요?" "없는데요" "돈이 없어요?" "없을건데, 없어요....." 그가 매트밑에서 찾아낸 돈을 건네주자 그 집주인은 떨리는 두손으로 돈을 헸다. 모두 850원이였다.     이날 김춘명과 그의 대원들은 무너져내린 페허속에서 가치가 2만여원의 가전 등 물자와 현찰 2580원을 구해내여 모두 주인들에게 돌려줬다.   사천지진현장에서 8일간 주야 구조작업을 펼쳤던 김춘명소속 구조대가 귀로에 올랐다. 5월 21일, 큰비가 내리는 도선공항. 비속에서 료녕성상무부성장 허위국은 귀로에 오른 료녕소방장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사람이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입니다." 료녕소방총대 대대장 장고조가 마르고도 캄캄한 얼굴을 한 소방전사를 가리키며 허부성장에게 소개한다.   얼마전 곤명소방대학교를 졸업한 김춘명은 본계소방지대명산중대대리패장에서 지도원으로 승급했다.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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