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http://www.zoglo.net/blog/wuzhixun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40 ]

60    심묘년의 일언 댓글:  조회:2943  추천:0  2012-04-27
심묘년의 일언    1/25/2011 금년은 신묘년(辛卯年) 토끼해이다. 토끼는 쥐, 소, 범 등 12간지 동물속의 하나로 토끼에 대한 사자성어나 속담, 우화가 많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생활에 시사해주는 면이 큰것 같다. 례하면 동요 “반달”에서 토끼는 달속에 나타나 령민함을 보여주고 사자성어 “토영삼굴(兎營三窟)”에서는 토끼의 삶의 지혜를 보여주기도 했다.    토끼는 이처럼 순발력과 꾀가 있으며 번식력도 강하다. 토끼의 이런 특점은 어찌 보면 전국에로, 해외에로 뻗어나가는 우리 조선족의 삶의 궤적을 방불케 한다.    200만 조선족은 19세기말 20세기초에 조선반도에서 중국에 건너와 동북에 뿌리를 내렸지만 21세기 격변기를 거치면서 현재는 중국 남부와 연해지대, 대도시 곳곳에 뿌리를 박고있으며 코리안드림으로 하여 수십만대군이 한국건설현장이나 곳곳에서 3D업종에 종사하고있으며 또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선진기술을 접하면서 열심히 자기들의 삶을 영위해나가고있다.   과거 수십년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거부기처럼 근면과 부지런함으로 피땀을 흘렸다면 2011년 신묘년부터는 이미 축적한 부를 잘 리용하고 관리, 투자하여 눈덩이 굴리듯 더 큰 재부를 만들어가는 지혜를 배워야 할것이다.    금년은 이미 세계 G2로 부상한 우리 나라의 “12.5”계획 실시 첫해이다. 중국이 세계공장에서 세계소비시장으로 부상하면서 세계경제의 초점이 중국에로 집중되고있다는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존공간을 확장하고 발전할수 있는 천재일우의 찬스이다. 고국에서 배운 선진기술이나 닦은 기량을 거대 중국시장에 잘 접목하고 활용한다면 우리에게는 무궁한 시장이 펼쳐지는것이다.   새해에는 누구나 부푼 희망과 꿈이 있기마련이다. 몸은 작지만 지혜와 총명을 상징하는 동물인 토끼의 장점을 살려 모두가 새해 소망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신묘년에는 토끼와 거부기의 경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한마리의 토끼와 거부기가 되여 총명과 근면함으로 알찬 한해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59    촌지 왜 필요한가? 댓글:  조회:2856  추천:0  2012-04-27
촌지 왜 필요한가?    12/21/2010  본지 11월 5일자 신문에 개주시 서해판사처 쌍천안촌에서 촌지(村志) 발간으로 마을알리기 프로젝트를 가동했다는 소식이 보도된바 있다. 올 들어 새 지도부가 구성되여 촌지발간을 통해 마을살리기운동의 새로운 스타트를 뗐다는것이다.   촌지란 촌사(村史)로서 촌의 력사를 기록한 책자이다. 우리 전 세대들이 살아온 력사의 기록으로서 민족의 력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소중한 자료이며 또한 민족문화의 유산이라 할수 있다. 특히 19세기말 20세기초 일제강점기 독립투쟁과 강제이민정책으로 대량 중국에로 천입해온 우리 1, 2세대들은 삶의 슬기와 지혜로 중국 동북땅에 뿌리를 내렸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성원으로 되였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21세기 격변기시대를 맞아 산업화물결을 탄 급격한 도시진출과 출국바람으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크게 위축되였으며 피땀으로 이룩해놓은 학교와 촌들이 하나하나 력사에서 사라지게 되였다.   필자가 살던 마을도 존속위기에 처해있다. 해방전 연씨라는 지주가 살았다해서 “연가황”이라 하였는데 해방후 부강한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부강”, 현재는 “흥성”으로 개명하였다. 원래 4개 자연부락으로 200여가구가 단란하게 모여사는 조선족집성촌이였으나 현재는 중청년들은 보기 드물고 로약자들과 어린이들만 남고 몇년 가도 갓난애기울음소리 한번 들어보기 힘든 촌으로 되였다. 학교는 이미 몇년전에 소실되였다. 이런 현실은 흥성촌뿐만아니다. 인구급감과 학교페쇄는 나아가 촌의 소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박한 현실에서 우리의 촌사는 매우 필요한것이다. 허나 조선족촌에서 촌사를 펴내는 일이 극히 드문데 몇년전 화평촌에서 촌사를 펴낸바 있다. 이제 몇년 안가면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마을이 사라지고 촌의 증인들이 없어진다면 그 촌의 력사는 영원히 없어지고말것이다.   우리에게 족보문화가 필요한것 못지 않게 촌사는 필요하다. 얼마전 연변에서 전 주에 조선족 근, 현대사문물을 기증 헌납할데 관한 발기문을 보고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족보를 통하여 종친뿐만아니라 그 민족의 력사를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듯이 촌사도 인류사회 특히 한개 민족의 력사, 정치, 문화, 경제 등 력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재산임은 두말할것 없다.   지금부터 소실된 가사를 잇는 족보도 만들어야 하거니와 촌사도 만들어 후세들에게 “대물림보배”로 남겨주어야 한다.   석천  
58    한표의 의미와 그 소중함 댓글:  조회:2966  추천:0  2012-04-27
  물 한방울한방울이 모여 하천을 이루고 강을 만들고 나아가 대해를 이루며 또 “하나”라는 수자로부터 시작하여 십, 백, 천, 만, 억 더 나아가 천문학적 수자가 이뤄지고있다는것은 자명한 리치이다. 이렇듯 불보듯 빤한 리치가 현실에서 망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일전 심양에서 있은 2011년 재심양한인회 회장선거 투표가 문득 이 “하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두명의 후보자가 나와 합동연설을 하고 투표를 진행하였는데 이례적으로 동률표라는 투표결과가 나왔다. 이는 투표사상 보기 드문 사례지만 또 한표의 귀중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였다. 현재 심양한국인회 회원은 도합 242명인데 이번 투표에 180명이 참가하였다. 심양한국인들이 수장선거에서 75%라는 높은 투표률과 개개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고있음을 잘 보여주었다는데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면이 많은것 같다.   이처럼 한표는 단순한 한표가 아니라 박빙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한표의 역할로 최종의 압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 재심양한인회 회장선거는 높은 참여에도 불구하고 동률표로 하여 재선거를 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민간단체장 선거뿐만아니라 촌간부나 인대대표 등 선거가 투표를 통해 이뤄지고있다. 아직은 형식적인 면이 있으나 그래도 어느정도 개개의 립장을 존중하고 자기의사를 표명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데서 소중하며 또한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하면 자기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려 하지 않고 “내가 뭐라해도 그렇게 될것이 뻔한데…”라는 생각으로 개인의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있다.    이번 재심양한인회 회장선거를 지켜보면서, 또한 돋보이는 심양한국인들의 높은 참여의식과 책임성을 보면서 한표의 의미와 그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석천 12/14/2010  
57    우리의 지위와 그 역할 . 댓글:  조회:2590  추천:0  2012-04-27
우리의 지위와 그 역할    12/7/2010 금번 심양에서 개최된 “동북3성 한민족경제포럼”을 지켜보면서 날로 격상되는 중국조선족의 지위와 그 역할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된다.   지난 10월말 한국에서 있은 월드옥타정기총회에서 조선족경제인 남용해씨가 상임집행위원(부회장)에 선출되였다. 그리고 현재 월드옥타 해외 6,000여명 회원중 중국회원이 1,000여명이라 한다. 또한 지난해말 한국 외교통상부의 소관으로  창립된 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협회에서 길림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부회장, 녀성협회 회장인 조선족기업인 김순자씨가 회장으로 당선되여 화제로 된바 있다.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한상대회에서도 조선족기업인들이 점차 발언권을 갖게 되였고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표성룡회장,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 길경갑회장이 한국매스컴을 타면서 중국조선족기업인들의 위치가 날로 부각되고있다. 중국의 세계 G2 경제지위 부상과 더불어 중국내수시장에 대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중국조선족기업인들에 대한 관심과 중시가 이뤄지고있는것이다. 해외 최초의 글로벌한상대회가 심양에서 개최된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국내 재외동포정책 일환으로 재중동포에 대한 개선책도 단계적으로 실시되고있고 무연고동포에 대한 방문취업제 실시, C-3 중국동포에 대한 한국기술연수 및 교육프로그램도 출범되였다.   중국조선족은 중국 대외개방정책 실시를 전후로 하여 전례없는 격변기를 겪고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중국으로 천입하면서 반일독립투쟁과 중국해방투쟁에 투신하여 많은 렬사를 배출, 신중국 창립후 중국 56개 민족의 떳떳한 일원으로 자신의 천부와 지혜를 발휘해 55개 소수민족중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산업화물결, 도시진출, 해외출국 특히는 “코리안드림”으로 하여 마이너스인구 성장, 학교 페쇄, 가정파탄이라는 전례없는 “대파동”을 겪었고 민족정체성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하였는데 21세기 력사대세로 보면 자기의 지위와 역할을 갖고 새로 태여나기 위한 진통기라 할수 있다.  처음으로 동북3성 조선족기업인과 한국기업인이 한자리에 모여 상호 정보교환, 리해증진, 협력강화의 장을 마련한 금번 “동북3성 한민족경제포럼”이 하나의 격식과 틀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과 발상을 잉태하여 상호 윈-윈관계를 구축하는데 있어 좋은 찬스가 될것으로 기대해본다. 석천  
56    한국어시험과 “코리안드림” 댓글:  조회:2638  추천:0  2012-04-27
한국어시험과 “코리안드림”    09/21/2010 그동안 바람잘날 없이 원망이 무성했던 방취제 한국어시험이 지난 9월 12일, 제19회 시험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따라서 우리 조선족을 울렸던 인터넷등록전쟁, 원정고시, 시험을 둘러싼 브로커들의 각종 사기행각 등이 다시는 우리들을 울리지 않을것으로 본다.   방취제는 어찌 보면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해볕정책”이라 할수 있다. 한국정부는 중국, 로씨야 등지의 무연고동포들의 고국방문취업을 위한 정책 일환으로 방취제를 실시키로 하고 2007년 9월부터 실무한국어능력시험을 치러 합격자에 한해 전산추첨을 통해 5년 유효 방취제비자를 발급해주었다. 3년 동안 6회 시험에서 7만 2,215명이 방취제비자를 발급받은 반면에 8만 3천여명의 추첨대기자가 나타났다.   그사이 12회 합격자 전원에 H-2방문사증을 발급해주고 13~15회 합격자에게는 1년복수종합사증(C-3)을 발급해주는 등 완화정책으로 상당수의 추첨대기자들을 한국에 입국시켰으나 아직도 많은 추첨대기자들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한국행을 하지 못하고있는 상황이다. 이에 금년 5월 23일 한국법무부는 무연고동포의 선발방식을 변경하여 2012년부터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전산추첨과 면접으로만 비자발급 대상자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법무부에 의하면 현재 한국내 재한조선족 총수는 38만명인데 방문취업(H-2) 체류중국동포가 28만 4,591명, 재외동포(F-4) 체류 중국동포가 1만 7,687명에 달하는데 외국적동포 방문취업자(2010년 7월말기준 29만 1,687명)중 중국동포의 방문취업자가 거의 다수를 차지한다.   방취제로 하여 우리가 큰 은혜를 입은것만은 사실이다. 비록 일신은 망가졌지만 기타 민족보다 빨리 돈을 벌수 있는 지름길이 생겨 자식들의 생활과 공부를 뒤바라지해줄수 있는 돈도 마련했고 시골에서 도회지로 이사했고 남부럽잖은 아파트도 마련했다. 그러나 “코리안드림”은 결코 순탄하지 않은 길이라는것을 명기하고 한국로무길을 윤택한 삶을 위한 기회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창조하는 기회로 간주해야 할것이다.   한국어시험 대신 곧 실시될 전산추첨과 면접을 통한 선발제도가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석천  
55    “은혜이슬”과 감로수 댓글:  조회:2480  추천:0  2012-04-27
“은혜이슬”과 감로수   8/24/2010  “은혜이슬”이 사랑의 단비가 되여 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촉촉히 가셔주고있다.   2004년 김기식 등 심양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20명이 작은 정성을 담은 “은혜이슬”은 6년이 지난 오늘날 회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70여명의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주고 소외계층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 희망의 돼지새끼를 전달하여 중국인들속에서 진한 감동을 자아내고있다.   중국속에 살며 중국의 불우이웃이나 소외계층에 작더라도 사랑과 희망을 주고싶은 한국인들의 선행이 일궈낸 소중한 중한친선의 열매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작은 정성은 마침내 “동전의 희망” 발대식을 계기로 하여 심양에서 중국 전역에로 확산되여 한국인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중한 량국간 친선과 우의를 도모하며 한국인의 협동정신과 봉사정신을 함양하는 하나의 운동으로 번져졌다. 신형근 심양한국총령사는 심양에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이 많지 않지만 한국과의 여러가지 교류협력의 대표적도시라며 “동전의 희망” 저금통운동을 격려하였다.    풀잎에 맺힌 령롱한 이슬이 아름다운 애심으로 되여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로 중국인들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이제 작은 저금통에 사랑을 듬뿍 담은 “동전의 희망” 저금통 3만여개가 중국 곳곳에 배포되여 11월이면 수백만원의 거액이 모아지고 이 돈이 다시 중국의 불우가정 및 빈곤학생에 전달되여 더 큰 감동이 중국 대지로 흘러들고 혐한의식도 불식될것으로 기대된다.   중한수교 18주년을 맞아 중한 량국간 무역거래량은 1,500딸라를 넘어섰으며 인적교류도 갈수록 활발해지고있다. 한국은 중국인들에 대한 비자제한을 풀고 한국방문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불신과 반목의 골을 넘어 더 큰 교류, 더 큰 협력, 더 큰 친선이 우리를 부르고있다. 한국인의 “은혜이슬”은 감로수마냥 우리들의 가슴에 흘러들고있다. “꽉찬 저금통 하나면 희망 돼지 한마리를 키울수 있다.” 우리도 딸랑거리는 동전을 “동전의 희망” 저금통에 넣어보자.       석천   
54    공무원과 그의 역할 댓글:  조회:2292  추천:0  2012-04-27
공무원과 그의 역할     8/10/2010 요즘 한 한국공무원의 전임이 조선족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고있다.  친분이 있는 개인외에도 여러 관련단체들의 초청이 줄을 잇는바람에 업무에 지장줄가봐 전화번호를 바꾸었다는 후문이다. 리임이나 전임은 일상적인 일인데 한사람의 전임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리유는 무엇일가?   조선족사회에서는 정윤식령사를 “조선족동포의 훌륭한 친구, 대한민국의 우수한 외교관”이라고 칭하고있다. 그의 공무원으로서의 헌신적인 정신과 개인의 인격적 매력에 대한 인정이며 존경이다. 심양에 첫 한국령사사무소가 개소될 때 근무한바 있는 정령사는 이번에 두번째 심양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전임한다. 그는 심양 근무기간 정열적으로 일하며 “발로 뛰는 령사”로서의 매력을 발산하여 조선족사회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다. 특히 조선족의 재외동포비자정책 개선에 있어서 현지사회의 목소리를 적시적으로 전달하였고 조선족기업인들과 한국기업인들간 단합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건설적인 대안을 내놓았으며 금년 심양에서 처음 개최된 중국글로벌한상대회에도 그의 숨은 노력과 로고가 크다.    과거에 비하면 심양한국총령사관 문턱이 정말 많이 낮아졌다. 심양한국총령사관은 민원인들을 “외면”하던데로부터 부단히 공관업무시스템을 혁신하여 현재는 “민원인들에게 다가서는 공관”으로의 이미지를 수립하였으며 중한 량국간 부단한 인적교류와 경제협력에 부응하는 기관으로 떠오르고있다. 이는 력대 총령사들의 간단없는 혁신과 정령사와 같이 본분을 확고히 지키면서 헌신적으로 일해온 령사들의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중한 량국간 경제무역거래량이 상상을 초월하고 인적교류가 활기를 띠고있는 오늘날 중국에서 근무하는 한국공무원들의 역할을 간과할수 없다. 이들의 바른 근무자세와 노력, 열성, 정열이 “밑거름”이 되여 중한간의 친선을 더욱 돈독하게 하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한 한국공무원의 전임이 우리 사회의 공직자나 우리 겨레사회에 시사하는바가 너무 크다.   
53    “신립촌문제”가 주는 계시 . 댓글:  조회:2271  추천:0  2012-04-27
“신립촌문제”가 주는 계시    4/27/2012 “신립촌문제” 해결(본지 3월 13일자 신문 참고)의 실마리가 풀려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번 “신립촌문제” 해결에서 당사자와 촌지도부의 꾸준한 노력, 그리고 민간단체, 조선족언론 등 여러 방면의 힘이 큰 역할을 한것으로 나타났다.   “신립촌문제”는 어느 한개 농촌의 문제가 아니라 당면 도시화진척에 따른 농촌토지징수와 “촌툰개조”및 파가이주 과정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21세기 중국농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전 사회의 고도로 되는 관심과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있다. 현행 집체토지징수에 있어서 법률 및 정책규정 등에는 제도적결함이 존재하여 농민들의 토지권익이 엄중하게 침해당하고있다. 자칫하면 토지를 상실함과 동시에 기본생활보장까지 상실되여 취업이 어렵고 보장이 없는 사회의 새로운 군체로 전락될 지경에 이를수 있다.   심양주변 조선족농촌들에 이런 토지관련 문제가 엄중하게 존재하고있는 실정이다. 이미 거주주택 철거와 농작지를 “회수”당한 우홍구 대흥가두의 흥성촌, 철거문제로 싸우고있는 심북신구의 영풍촌, 그리고 “촌툰개조”로 골머리를 앓고있는 화평구의 만융촌 등 농촌문제는 촌민 개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로 생존공간 존립과 직접 련관되는 문제이다.   일전 최고인민법원은 《인민법원에서 국유토지주택 징수보상강제집행을 신청처리할데 관한 몇가지 규정》을 출범하였다. 이 《규정》은 사건의 관할, 접수 조건과 절차, 심사기준과 순서, 사건처리기한  등에 대해 명시했고 또  가옥징수보상이 불공정하다고 판정될 경우 강제로 집행못한다고 했다.   상기 사법해석과 농촌토지징용보상관련 법률이 출범되여 이른바 중대프로젝트를 빙자해 무작위로 농경지를 점용하는 행위와 행태들이 근절되고 또한 이 과정에서 촌간부들이 관련 규정을 제멋대로 무시하고 직위를 람용하여 광범위한 농민들의 합법적권익이 침해당하는 사건들이 최대한 억제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석천  
52    “오원춘사건” 또한번의 경종 댓글:  조회:2703  추천:0  2012-04-27
“오원춘사건” 또한번의 경종    4/24/2012 지난달 한국 수원에서 한 20대 녀성 살인사건이 발생, 결국 그 시신을 2백여토막낸 희대의 살인범이 조선족인 오원춘(“오원춘사건”)이라는것이 밝혀지면서 한국사회는 물론 전반 조선족사회를 경악케 하고있다.    이 “오원춘사건”으로 하여 경찰총수가 경찰의 부실대응책임을 지고 결국 물러났고 한국사회안팎에서도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한국의 한 매스컴에서 조선족에 대해 부정적시각을 가졌던 한국인이 47%로부터 이번 사건이 터진후 70%로 급증하였다는 보도, 또한 조선족이 일용직을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조선족제노포비아(혐오증)”정서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재한조선족사회가 위축을 받고있다는 등등의 뉴스를 접하는 필자의 심정도 자못 무겁고 복잡하다.   중한수교 20년간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3D”에 종사하면서 한국 경제발전과 사회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였고 제나름대로 기업인, 학자, 류학생들로 무어진 조선족엘리트군체를 형성하여 재한조선족의 권익수호와 조선족이미지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처럼 수십년간의 코리안드림속에서 부를 축적하며 보다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고있는 조선족들에게 이번 사건은 실로  큰 충격이 아닐수 없다. 한민족 한피줄로 서로간 갈등과 반목의 골을 넘어 서로간 동정과 리해, 포용과 배려의 무드로 전환되는 이때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도랑물을 흐린다는격으로 오원춘이라는 한 인간때문에 재한조선족사회가 다시 공포속에 휩싸인다하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한국에 가면 엄연하게 한국 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법을 무시하고 질서의식을 파괴하는 현상이 엄중하다고 한다. 다른것은 몰라도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대림 등 “차이나타운”지역에 가면 아무데나 담배꽁초를 던지고 가래침을 뱉고 밤낮없이 마작판을 벌리고 지어 싸움박질하는 등 현지인들의 정연한 삶의 질서를 꺼리낌없이 파괴하고있다. 이는 조선족이 한국인들에게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또 혐오하는 존재로 만들고있는것이다.   살인범은 마땅히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할것이지만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심각하다. 재한조선족들은 물론 전반 조선족사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고 법의식과 질서의식을 가진 건전한 재한조선족사회를 만들기 위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십몇년전의 페스카마사건 악몽에서 이번 “오원춘사건”은 우리에게 또 한번의 경종을 울려주고있다.      석천  
51    심양시 조선족인구 9만 2천 백여명 댓글:  조회:1871  추천:0  2012-04-20
심양시 조선족인구 9만 2천 백여명 5차조사때보다 마이너스성장 본사소식 지난 제6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심양시 조선족인구가 9만 2,114명으로 집계, 이는 제5차전국인구보편조사시의 9만 4,600명보다 2.6% 감소된 수치이다. 따라서 5차조사때의 9만 4,600명은 4차조사때(8만 3,329명)보다 만여명 더 많아 이 시기가 현재까지 심양시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은 시기로 기록된다.   현재 심양시조선족인구는 심양시의 화평, 심하, 대동, 황고, 철서, 소가툰, 동릉, 심북, 우홍, 료중, 강평, 법고, 신민 등 소속 11개 구(시), 현에 분포되여있는것으로 나타났다. 행정구역간 상호 이동변화도 컸는데 인구가 크게 증가된 구(시), 현을 보면 아래와 같다. 화평구는 1만 2,936명(5차조사)에서 1만 7,282명으로 4,346명이 더 늘어났고 황고구는 1만 623명(5차조사)에서 1만 5,145명으로 4,522명이 더 늘어났으며 철서구는 3,116명(5차조사)에서 7,316명으로 4,200명이 더 늘어났다. 반면 동릉구, 우홍구, 심북신구, 료중, 강평, 법고, 신민 등 농촌지역의 조선족인구가 정도부동하게 줄어들었는데 이는 도시에로의 이동변화를 반영했다. 그중 동릉구는 1만 7,449명(5차조사)에서 6,529명으로 1만 920명이 줄었고 우홍구는 1만 8,542명(5차조사)에서 1만 3,752명으로 4,790명이 줄었다. 여기서 동릉구의 현격한 인구급감은 원래 동릉구에 소속되여있던 만융, 하하만 등 여러개 조선족촌이 화평구로 귀속,행정구획조정에서 나타난 변화로 분석할수 있다.    6차조사에서 보다싶이 현재 심양시조선족인구가 1만명 이상 집중된 구는 화평, 황고, 소가툰, 우홍 등 4개 구이다. 한편 심양경제기술개발구(193명)와 기반산(335명)에도 조선족이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심양시통계국 인구처 장향양처장은 이번 인구조사에서 심양시의 소수민족중 5대 민족으로 불리우는 만족, 몽골족, 조선족, 회족, 시버족중 조선족과 회족이 마이너스성장을 보인 외에 기타는 약간 증가되여 총 6만 1천명이 증가되였고 또 5차조사때는 전 시 소수민족이 47개였는데 이번에는 5개가 늘어난 52개로 집계, 55개 소수민족이 거의 다 있다고 소개했다.   이밖에 심양시소수민족인구중 상기 5대 민족은 76만 6천명으로 전체 소수민족인구의 99%를 점한다.     6차조사에서 보면 심양시조선족인구는 5차조사때보다 2,486명이 감소, 매년 약 250명이 줄어든것으로 계산된다. 그 감소원인은 매년 인구출산률이 줄어든데다 외지와 해외에로의 활발한 진출, 그리고 자연적인 사망 등을 꼽을수 있다.                                오지훈기자  
50    료녕성 조선족인구 1,500여명 줄어 댓글:  조회:1857  추천:1  2012-04-20
우리 성 조선족인구 1,500여명 줄어 현재 조선족인구 23만 9천 5백여명, 대련시 만명 가까이 증가 본사소식 제6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우리 성 조선족인구가 지난 5차 조사때보다 1,515명이 더 감소된것으로 나타났다. 5차 조사때는 24만 1,052명이였지만 6차 조사에서는 23만 9,573명으로 마이너스 0.6% 성장하였다. 제4차 조사때는 23만 719명이였다.   제6차료녕성조선족인구상황을 보면 5차조사때와 마찬가지로 성 산하 14개 시에 조선족이 모두 분포되여있음을 알수 있다.   인구가 1만명 이상인 도시는 아래와 같다. 심양(9만 2,114명), 무순(3만 8,688명), 대련(2만 3,268명), 철령(1만 8,057명), 단동(1만 6,974명), 본계(1만 3,599명) 등이다. 6차조사와 5차조사시 각 시별 수자를 비교해보면 대련, 본계, 단동, 영구 등 시가 정도부동하게 증가되였고 심양을 포함 나머지 10개 시는 모두 정도부동하게 감소되였다. 그중 대련은 9,422명이 증가되여 가장 큰 증가폭을 나타냈다. 반면에 반금시는 3,395명이 줄어들어 가장 큰 감소폭을 나타냈다. 인구가 비교적 많이 증가된 도시는 연해도시로 이는 우리 성에서 연해경제벨트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조선족인구도 이런 도시로 많이 흘러들고있는 추세로 분석된다. 특히 대련시나 단동시의 경우 성내 인구보다 외지에서 흘러든 인구가 더 많을것으로 보여진다.   성통계국 인사처에 따르면 현재 료녕성내 소수민족성분은 55개로 그중 만족이 533.7만명, 몽골족이 65.8만명, 회족이 24.6만명, 조선족이 약 23.9만명, 시버족이 13.2만명으로 우리 성 5대소수민족으로 불리운다. 우리 성 소수민족인구수는 664.3만명으로 료녕성 총인구 4,374.6만명의 15.2%를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전체 소수민족인구가운데 3.6% 차지한다.                                       오지훈기자  
49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발굴하고싶다 댓글:  조회:2175  추천:0  2012-04-20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발굴하고싶다    2009.04 “북경아가씨”의  작곡가 정원수씨   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성공적으로 데뷰시킨 한국작곡가 정원수씨(1960)를 만났다. 한 무명 조선족가수의 음반취입을 위해 심양을 방문한 그는 “생각외로 조선족가수들의 음악기초와 자질이 좋았다. 누가 곁에서 잘만 이끌어준다면 빨리 가수로 될수 있다.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한국에 데뷰시키고싶다”며 대화를 풀어나갔다. 그는 중국말도 비교적 류창하게 구사하였는데 일찍 중국에서 사업한적 있어서인지 중국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있었고 리해도 깊었다.   김월녀를 “북경아가씨”로 일약 성공 정원수씨가 “북경아가씨”를 작곡한것과 김월녀가 이 노래로 한국에 성공적으로 데뷰한데는 그 원인이 있었다. 지난 1993년 KBS의 “전국은 지금” - 제주도에서 장백산환경캠페인 프로그램을 위해 천진에서 입경한것이 첫 중국행으로 되여 그는 이듬해 대련에서 1호 중한합자 천청궁찬음오락유한회사를 담차게 꾸렸다. 1년뒤 부득이한 원인으로 회사를 정리하게 되였는데 그때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정들었던 한 녀인과 갈라지게 되였다. 눈물번벅이가 된 그녀의 영상과 1년간 추억은 그에게 불쑥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내에서 “북경아가씨”를 작사 작곡하였고 누구를 통해 음반을 취입할가 하다 여러가지 사항으로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뒤 1997년 중국록가수 최건씨를 만났다. 여러 한국방송사와 회사들에서 방한공연을 추진하였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모두 무산되였다. 그와 만나 이 얘기를 꺼낼때는 벌써 27번째였다. KBS에서도 성사시키지 못한것을 그는 밀어부치기로 작심했고 최건을 포함한 공연단원들의 출국수속을 마쳤는데도 문화부에서 쉽게 허가를 주지 않았다. 입국하는 날, 그는 미리 공항에  “카메라부대”를 동원하여 입국을 기정사실화시켰고 자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건의 방한공연을 성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98년 북경에서 1년간 체류할 때 한 지인이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추천했다. 그러나 김월녀가 출국중이여서 만나지 못하고 1년뒤 귀국하여 그와 전화를 통했다. 그는 “북경아가씨”를 김월녀에게 주면서 잘 련습하고 자신이 있으면 한국에 나와 음반취입을 하자고 건의하였다. 한달뒤 계획대로 김월녀는 한국에 와서 음반취입을 했고 생각밖으로 노래를 잘 부른 김월녀에게 신심을 갖고 정원수씨는 설운도나 남진 공연때에 가끔 김월녀를 등장시켜 친분을 쌓게 했다. 과거 설운도나 현철의 매니저였고 이때는 남진, 김혜영의 매니저인 그에게는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띄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다. 중국에서도 김월녀의 “북경아가씨”음반이 급속도로 퍼졌고 지어 평양에서도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는 멜로디와 전주, 간주를 모두 중국풍이 짙게 했고 특히 가사에 중국말을 첨가해서 그런것 같다고 그 원인을 이야기했다. 김월녀를 자기가수로 키우고싶다는 그의 아집은 대단했다. KBS PD와 싸우면서 2002년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2003년 새해를 알리는 KBS생방송에 첫 스타트로 차이나복을 입은 80명 연원들이 춤추는 가운데 김월녀를 등장시켜 주변으로부터 한국가수를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고싶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속속 밀려들면서 추석이나 설명절때 동포들을 위한 노래자랑이나 위문공연에도 그는 발벗고 나서고있다. 또 누구보다 중국과 조선족사회를 많이 리해하고 재한조선족의 처우를 동정하면서 “신도라지”, “그리운 내아들아” 등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이국만리 한국에 나와 홀로 지내는 아줌마들이 고향을 그리고 자식들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과 향수를 담은 노래들이다. “중국노래들은 음악이나 멜로디가 서정적이거나 시적이지만 한국노래는 비정서적으로 흐르면서 템포가 빠르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그는 기회가 되면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고싶다고 했다. 이를 통해 동북3성에 있는 조선족가수들을 도와주고싶다고. 중한교류에서 한국인들이 더는 실수하지 말고 사기하는 일이 적어졌으면 하는것이 그의 바램이며 문화교류를 통해서 조선족과 한국인간의 반목의 곬을 메워주고싶은것 역시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려는 또하나의 리유다. 최근에 그는 안산에 있는 조선족기타리스트 허국철의 딸 허여나(21살)의 음반을 중국과 한국에서 준비하고있으며 기회가 닿으면 4,5월경에 출시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꼬치, 고수풀(香菜)과 같은 중국음식을 즐겨먹을 정도로 중국을 좋아한다는 그는 또 한국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류덕화의 노래) “심우”(心雨), “달이 내마음을 대표하네”(月亮代表我的心), “첨밀밀”(甜蜜蜜)의 가사들을 한국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한국에서 음반취입을 하여 한국인들이 더많은 중국노래를 부르게 하고싶다는것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메니저, 작곡가로 인정받는 그는 금년초에 “최고의 녀자”로 다시 한국가수계에 데뷰하였다. 그가 작곡한 유명한 노래들로는 “최고의 여자”, “사랑의 포로”,  “첫사랑오빠”, ”빰빠라빠라”, “살짝쿵”,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님이 오는 계절”,  “두손 싹싹”,  “미련의 부루스”, “내사랑도 가져가세요”, “슬픈 행복”, “사랑의 폭발”, “북경아가씨”, “신도라지”, “그리운 내아들아”, “국민여러분”, “뜨거운 사랑”, “돌려주오” 등이 있다.  “가수와 작곡가는 서로 박자가 맞아야 하지요.. 아무리 좋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 곡을 잘 부를수 있는 가수가 없다면 유명한 곡으로 될수 없지요. 김월녀가 나의 곡을 불러 유명하게 해주었기에 서로 성공할수 있은것이 아니겠어요? 김월녀가 나의 곡을 잘  불러주어 더 고맙습니다. 김월녀와 같은 더많은 동포가수를 발굴하고싶습니다” 중한 량국간 문화교류에 전도사의 역할을 하고싶다는 정원수씨의 말이다.  오지훈기자  
48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 댓글:  조회:2085  추천:0  2012-04-20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  2007.12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 우병희연구원 일전 기자는 심양칠보산호텔에서 있은 중조한 국제학술회의에 특별참석차로 심양에 온 중국과학원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 우병희연구원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호텔에서 단둘이 마주앉은 우병희선생은 중국 항공우주선의 공신과는 너무 판이할 정도로 조용하고 인자한 로인의 모습이다. 그는 이미 정년퇴직을 하였지만 지금도 자신이 연구하고있는 테마로 하여 연구실에서 거의 살다싶이한다 한다. 일찍 길림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한 그는 40여년을 장춘광학정밀기계연구소에서 고스란히 한우물을 파왔다. 1986년 중국국가고신기술연구발전계획인《863계획》 항태분야항목설립에서 우리 나라 국민경제발전 및 국방건설에서 중요의의를 갖는 《분광사진기》, 《태양광측정기를 제안하고 채택하게 한후 이 분야 연구에서 수석과학자의 신분으로 중대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이 제작해낸 《고분별분광사진기》는 선진원격탐지장치로 국제원격탐지기술의 전연과제였는데 항공비행에 응용실험한 결과 그 성능이 국제선진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기술은 우리 나라 우주선 발사시에도 크게 리용되였고 향후 우리 나라 우주선의 진일보로 되는 우주탐사 및 우주정거장건설 등 분야에도 크게 리용될 전망이다. 그가 20여년 연구해온 태양의 빛을 측정하는 기계 즉 태양광측정기는 이미 세계기상조직의 표준에 도달하여 세계복사중심에서 사용되고있을 정도로 오차범위가 매우 작다. 이 장치는 《신주3호》우주선궤도창에 설치되여 2000년 3월부터 9월까지 태양을 측량하고 정확한 수치를 얻어냈다. 이 중국 최초의 태양광측정기술로 하여 우병희는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진보 1등상을 수상, 국가고신기술연구발전계획 선진개인, 전국선진사업일군 등 영예를 지녔다. 그는 태양광측정기는 태양에너지의 연구와 갈수록 심해지고있는 지구온난화연구에서도 특수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지구온난화의 주원인은 탄스가스 등 기체 방출이다. 지구의 에너지는 모두 태양의 빛에 의한것으로 여러가지 현상 이를테면 태풍, 바람, 풍능, 수능이 생긴다. 그러므로 태양의 빛을 장기적으로 준확하게 측정하는것은 태양광과 지구온난화 연구에서 자못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는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이라고 했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과학에 뛰여든다면 그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과학은 절대 조급해서는 안되며 오직 기초를 튼튼히 닦고 꾸준히 몰입하는 정신으로 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70년대말 원격탐사분야를 접근하면서자신이 배운 물리학지식으로는 너무 미약함을 느끼고 도서관을 찾아들며 지질학, 우주학 등 상관분야 지식을 폭넓게 섭렵하였으며 또 자신이 배운 리론지식을 공고하기 의해 3년간 석,박사생들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또한 시종 과학연구 1선에서 몸으로 부딪기며 하나하나의 애로를 물리치고 난관을 돌파하였다. 이러한 꾸준하고 허심한 과학탐구정신으로 하여 그는 끝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나라 우주항공분야 권위자로 군림할수 있었다. 그는 과학연구에서 연구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또 이번 호금도동지의 과학발전관은 현단계 우리 나라 제반사업이 좋고도 빨리 발전할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것으로 매우 즉시적이고 옳은 판단이였다고 했다. 그는 한때 우리 나라가 농업을 발전시킨다고 생태환경을 엄중하게 파괴했던 50-60년대의 가슴아픈 과거를 회고하면서 중국은 대국으로 천천히 카브를 돌아야지 갑자기 카브를 돌려고 해서는 쉽게 사달이 생길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긴장과 고달픈 연구의 순간속에서도 그를 매료시키는것은 서양화(로씨야의 풍경화나 미국의 야외풍경화). 국외 나가면 다른것은 몰라도 서양화는 여러점씩 들고 들어온다. 서양화를 흔상하노라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고뇌를 날려가고 정신이 새롭게 충전된다고 한다. 그는 로맨 로랑의 유명한 작품 《명인전》(베토벤, 미크랑지러, 톨스토이 세 사람의 전기)은 청소년들이 한번 읽어볼 책이라면서 화가들이 그림에 몰입하는 정신이 곧바로 과학연구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또 동방의 고대문명이 인류에 준 위대함을 긍정하면서도 서방철학이 현대과학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 현대과학은 많게는 서방철학을 기초로 해 발전하였다면서 우리들은 서방철학을 배우고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오지훈기자
47    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2009 .01 댓글:  조회:2236  추천:0  2012-04-20
 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미안합니다”   일전 76세의 한 로지원군전사가 신문사를 찾아왔다. 죽기전에 39년전에 차사고로 피해를 끼친 당년 지식청년을 찾아 “미안합니다” 사과의 말을 전하고싶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로지원전사가 바로 료녕성로간부이고 2008년지원군로전사방조대표단 단장을 맏았던 정덕홍씨이다. 16세 어린 나이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여러차 공을 세웠고 1953년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여 고향의 뉴스인물로 되기도 하였고 또 여러차 차사고와 악연을 맺으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다재다난”의 인물로 현지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으로 정덕홍씨는 16살의 어린 나이 지원군에 참군하여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수장들은 그가 너무 어려워 “꼬맹이”라고 불렀는데 한어, 조선어, 일어가 숙련하여 67군의 정찰처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꼬맹이”이였지만 다른 두 정찰병과 함께 기민하게 적군을 생포하는데서 공을 세웠고 또 수장이 준 카메라를 메고 전장터 곳곳을 누비며 많은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1953년 3월, 3국언어를 익숙히 구사할줄 하는 정덕홍은 개성군사위원회 제7련합군 관찰소조 통역으로 불리워갔다. 제54군 진지에서 350킬로의 군사분계선을 감독 확정하는 통역을 맡았다. 8월 적의 차량이아무런 저해없이 군사분계선을 진입해오다 아군에 의해 차압당하였는데 제7관찰소조 책임자이며 지원군상교 백병훈이 이끄는 정덕홍 등은 신속하에 사고발생지점에 도착하였다. 정덕홍의 통역하에 백병훈은 기고만장한 적병에게 질문을 들이대고 이 일을 신속하게 상급에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시 32호 기록편으로 촬영되여 전국에 방영되였고고향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 성관진에서 이 기록편이 방영되면서 그의 부모들도 참전하여 종무소식이던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고향에서는 정덕홍을 고향의 영웅이라 자랑했고 참군을 반대했던 부모들도 이러인해 가슴이 뿌듯해났다. 1953년 11월의 어느날, 하룡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지원군위문단이 금성전선에 위문하러 왔다. 54군은 환영식을 가졌고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공연이 끝난뒤 인민군 김학범대교가 정덕홍을 데리고 가 하룡장군을 만났다. 김학범은 “저는 조선인민군 대교 김학범입니다. 하룡장군이 이곳에 오신데 대해 환영합니다.”라고 인사의 말을 건늬자 하룡장군은 김학범과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덕홍이 또박또박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통역하였다. 대화가 끝날무렵에 하룡장군이 웃으며 정덕홍에게 몇살이냐? 고향이 어디지? 라고 물었다. 정덕홍의 가정형편과 부대생활, 학습정황 등을 일일이 물을 때 하룡장군의 검고 까칠한 수염이 약간씩 떨렸는데 그를 보고 웃는듯 했다. 그때의 정경을 회고하는 정덕홍씨는 화기가 넘치고 자애로운 하룡장군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고 했다.   차사고에 대한 저주 조선전쟁에 참가하여  5년남짓한 시간에 그는 선후 3차 3등공을 기입하였고 1956년 귀국하여 제남군구 사령부에서 14년간 참모장을 담임하였다. 1951년 4월 그는 고향의 11명 동학들과 지원군에 참군하였지만 그를 포함해 3명이 무사히 귀국하고 기타 사람은 전장터에서 전사하였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것은 그가 수십여년간 여러차 차사고를 당하고 빈번히 구사일생으로 사선에서 탈출할수 있었다는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1969년 1월 24일. 당시 그는 심양시 황고구무장부의 참모로 있었다. 음력설기간이라 공안부문과 배합하여 치안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이날 새벽 4시경에 찦차를 몰고 다른 한 동사자와 함께 우홍구 대흥향 등가황촌에 왔다가 마침 귀성하는 두 녀지식청년을 차에 태우고 시내로 들어가고있었다. 차가 정상툰 근처의 기차길에 이르렀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경적소리가 들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는 기차에 부딪쳐 두고패 번진후 레루길아래로 떨어졌다. 네사람은 모두 병원에 호송되였고 정덕홍은 오른쪽 쇄골이 골절되여 두달남짓 입원치료를 받았고 기타 3명은 경상을 입어 그날로 집에 돌아갔다. 두번째 사고는 1983년 8월 8일이다. 한번 생사고비를 벗어난 그는 다시는 차를 운전하려 하지 않았고 차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다녔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료녕성사격대에 배치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그는 다시는 차사고를 당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30분좌우 성위체육위원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장강북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가 말이 놀랐다는 웨치는 큰소리가 뒤전에서 들려오는가 했는데 뒤도 돌아볼새없이 그는 말발굽에 차여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그를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고 4개 갈벼대가 끊어져 그는 한달동안 병원에 누어있어야 했다. 세번째는 20년이 지난 2002년 9월14일, 누가 차사고로 이젠 액을 다 때웠다해서 그런가했는데 액운은 또한번 그에게 덮쳤다. 이미 퇴직한 그가 친구 몇사람과 함께 와방점저수지에 가 고기를 낚았고 1메터가 넘는 고기를 낚은 그는 기쁜 나머지 고기를 안고 기념촬영까지 하였다. 하루종일 고기낚시질에 지친 그들이 봉고차에 앉아 눈을 부치다싶이 하면서 웅요부근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차가 또랑에 번져지면서 정덕홍을 차밖으로 팽개쳤다. 왼쪽 뒤잔등이 쑤셔나는듯한 통증을 느낀 그는 인차 움직일수 없었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는것과 다시 차사고를 당했음을 예감했 다. 이번에도 그는 끊어졌던 갈벼대가 다시 끊어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어 웅요에서 구급치료를 받고 심양병원으로 옮겨 한달동안 다시 치료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러번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나고 빨리 회복할수 있은데 대해 그는 다행히 자신이 몸이 좋았고 력기운동과 권투운동을 한 덕이라고 자랑했다.   미안합니다 사과라도 한번 세차례 차사고를 겪고난 정덕홍로인은 오히려 차분해졌고 차사고와 인연을 맺었다고  우스개소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큰사고에도 살아날수 있었다면서 이런 경력은 자신에게 행운일뿐만 아니라 생활가운데서 갑작스레 부닥친 일을 여하히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것을 알려주었다며 인생에서 귀중한 재부를 얻은것이라고 토로했다. 그의 구사일생 경력은 그의 로친구들속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그를 보면 구사일생이면 꼭 뒤에 복이 따른다며 롱담을 던졌다. 그는 죽지 않은것 자체가 큰복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현재 안해와 함께 만년을 행복하게 살고있는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그의 생활도 매우 규칙적이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심양시로간부활동센터까지 걸어가서 운동했고 점심때에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차사고경력에서 인생의 도리를 더 깨우쳤다는 정덕홍로인은 그래선인지 첫번째 차사고때 같이 승차했던 두명의 녀하향지식청년을 지금이라도 만나보고싶고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다를 꼭 전해주고싶다고 했다. 그는 2007년 1월 27일과 2008년 2월 18일에 두번에 걸쳐 “료심석간”지에 당년의 두 녀지식청년을 만나 사과 한마디 하고싶다는 간절한 념원을 절절하게 표달했고 또 료녕텔레비죤방을 통해서 같은 심경을 표달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그를 만나서 그 두사람을 만났는가 물었는데 이 말이 인사말로 되였고 그의 사실을 보도한 매체들에서도 만나면 꼭 알려달라고 부탁해오고있다. 그의 소박한 념원을 담은 기사가 처음 신문에 나간뒤 그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당년 하향지식청년들의 기념합동촬영사진을 얻을수 있었고 두사람의 이름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거처하고있는 곳도 알아냈지만 아직 여러가지 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기자가 꼭 사과할 필요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만나서 자기의 진심을 표달하고싶다며 안해와 두 아들도 나의 행동을 지지해주고있다고 했다. 정덕홍로인은 만날수 있다면 꼭 사과파티를 열고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고 자신의 불찰로 빚어진 사고에 사과할것이라며 기자에게 만나도록 주선해줄것을 신신당부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과 가슴아픈 추억이 있다. 이미 흘러간 수십년 세월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한순간을 추억의 한장으로 떠올리면서 사과하려는 정덕홍로인의 집요함에서 고통을 락으로 간주하는 한 로간부의 인생철학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오지훈기자
46    서탑지역판도 점점 넓어진다 댓글:  조회:1710  추천:0  2012-04-20
서탑지역판도 점점 넓어진다        2008.09 지역면적 1.2평방킬로, 관할사구 6개로 확대 본사소식 일전에 발표된 화평구가도판사처 조정결과에 따르면 화평구는 기존 17개에서 12개로 축소, 그러나 그 관할 지역규모는 원래보다 정도부동하게 확대되였는데 서탑지역판도는 기존 0.99평방킬로에서 1.2평방킬로로 확대되였다. 따라서 서탑가도판사처 관할지역은 기존의 방적(方適), 안도(安圖), 서철(西鐵), 방직(紡織) 5개 사구(社區)에서 심방북(沈紡北)이 추가되여 6개로 늘어났다. 서탑가도판사처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정에서 서탑이 소수민족집거구인 특점을 감안하고 지역내 민족특색의 상업이 발달한 독특한 우세를 살려 조선족특색이 짙은 민족거리를 형성하는데 주력하여 과거 오송가도판사처에 귀속되였던 시부대로 남쪽의 녕대호텔, 서울호텔, 서탑대랭면, 정창호텔을 이번에 서탑가도판사처의 관할지역에 포함시켰고 또 과거 북시지역에 속했던 심방북지역을 서탑판도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현재 서탑지역은 동쪽으로 남경북가, 서쪽으로 철도선과 황고구경계선, 남쪽으로 시부대로남쪽, 북쪽으로 동서쾌속간선까지이며 인구는 기존 4.4만명에서 5.5만명으로 증가되였다. 서탑지역은 심양시가 한국에 대한 전면개방을 중요한 사업으로 선포하고 심양한국주 등 중대한 대외행사를 다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추진하면서 그 판도가 점점 넓어져 몇년전의 0.58평방킬로에서 현재는 1.2평방킬로로 배로 증가되였다. 현재 서탑지역은 서탑가와 연변가, 시부대로, 도문로, 무순로 등 길목거리량켠으로 크고작은 수백개의 가게들이 촘촘하게 들어서서 주변지역으로 신속하게 뻗어나가고있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식당과 가라OK 등 찬음오락업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 몇년간의 조정과 발정을 거쳐 서탑지역은 찬음오락업에서 쇼핑, 관광과 비즈니스가 활발한 지역으로 탈바꿈하고있는데 특히 공상은행, 인민은행, 건설은행, 교통은행 등 10개의 은행지사들이 둔을 치고있어 심양의 그 어느지역보다 은행밀도가 높은것으로 주목받고있다. 다른 소식에 의하면 심양시의 가도조정작업이 막바지에 들어섰는데 도시 5개구의 소속 가도판사처가 기존 88개에서 59개로 개편, 그중 화평구가 12개, 심하구가 10개, 황고구가 10개, 대동구가 13개, 철서구가 14개이며 주민들의 양로보험, 의료보험, 저소득세대 등 관련수속을 하는 절차와 지점을 변하지 않으나 부분 파출소는 새로운 가도분포에 따라 일정하게 조정된다. 대홍, 오지훈기자    
45    방취제 한국어시험을 고민해본다 댓글:  조회:2817  추천:0  2012-04-20
[기자의 눈]    방취제 한국어시험을 고민해본다  2007. 04   요즘 방취제 한국어시험을 지켜보는 동포사회의 시선은 착잡하기만 하다. 방취제 한국어시험으로 하여 동포사회가 "인터넷전쟁"을 거듭하고있고 현행 방취제 한국어시험 인터넷등록의 원서방식에 대한 질타와 불만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있다.   인터넷 원서접수를 시작해서 현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홈페이지에는 강한 유감과 불만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조선족들의 댓글이 쇄도했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에서 인터넷등록 실패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실망감, 그리고 그 원인 해명, 지어 교육부 고심중심 인터넷등록에 얽혀있을 그 어떤 비리의 개입을 거론하며 무효를 요구하거나 신고를 주장하는 댓글도 올라왔다. 23일, 인터넷등록을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교육부 고심중심 서버가 다운되기 시작, 원서요구에 따라 성명, 주소를 준확하게 기입했지만 자꾸 에로메시지만 뜨면서 도무지 접속 불능이였다는 사실, 시험장선정에서도 분명 료녕대학을 클릭하였는데 다른곳으로 등록되버렸다는 사실, 수차 곡절끝에 등록은 되였지만 접속이 잘 안되여 돈을 내기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고심중심에서 고시한 응시생수가 이미 만원데도 불구하고 어떤 려행사나 대행사에선 아직도 돈을 2-5,000원 내면 꼭 등록해준다는 내용이 댓글에 올라 더욱 의문을 증폭시키고있다 한다. 또한 지금도 주변에는 돈을 몇천원 내면 얼마든지 등록해준다는 말이 뻐젓이 나돌고있다. 이번에도 브로커들의 활동이 창궐한듯싶다.    동포언론과 한국관련 언론들도 23일 인터넷등록 장면을 "한차례 전투", "하늘에 별따기"로 묘사하며 동포사회가 인터넷전쟁으로 곤혹을 치르고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9월 16일, 방취제 한국어시험에서 조선족이 집거한 동3성에 배정된 시험장이 너무 적어 울며겨자 먹기로 원정고시를 피면할수 없었던데로부터 인제는 고사장 대문은커녕 원서접수 자체가 까다롭고 어려워 방취제과정중 또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하고있다.       지금 동포사회에서는 방취제 한국어시험 원서접수는 이미 "인터넷전쟁"으로 통하고있다.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두손을 바짝 들었고 내노라 하는 컴퓨터전문가들도 벙어리 랭가슴 앓는격이 되였다. 3월 원서접수에서 "흑색 17분간"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면 이번 인터넷등록은 "미스터리 50분"이라는 후유증을 남겨놓았다. 따라서 일각에선 원서접수의 형평성을 거론하는가 하면 일각에선 방취제 한국어시험에 대한 회의 시각도 머리를 쳐들고있다. 이번 방취제 한국어시험을 희망한 수자가 10만명으로 줄잡는다해도 전 두번까지 브로커들이 조선족들한테 앗아간 돈은 엄청난 수자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방취제 한국시험방식이 브로커들에 의해 변색되여가고있다는것이다.   그런데 브로커들에게 재다시 기회를 주고있는것은 우리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아프다. 과거 한국비자를 위해 수만원의 거금을 내던 시기와는 다르지만 브로커들의 원서접수 1건당 요구하는 돈은 정부에서 정한 원서접수비 300원의 몇배나 된다는 사실, 결국은 브로커들의 덫에 우리 스스로가 걸려들고있다는 자체가 슬프다.        따라서 방취제 한국어시험 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있다. 지난해 한국어시험에서 추첨되지 못한 5천명과 지난번과 이번 9월에 치른 한국어시험에서 합격됐지만 추첨받지 못한 인원수를 합하면 약 7만명이 되는데 이 사람들을 다 내보내려 해도 족히 3년은 걸려야 한다. 그런데 해마다 이런 방식으로 진행나간다면 인터넷 원서접수에서만 브로커들에게 갈취당하는 돈액수도 엄청나고 우리 동포사회에 주는 피해액도 더욱 커질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한국내 현재 체류중인 조선족수 35만명과 향후 나가는 인원수까지 합하면 취업경쟁도 역시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만약 방취제 인터넷원서접수과정에 그 어떤 비리가 개입되였다면 그 수사의 몫은 당연히 공안당국이겠지만 방취제가 굴절되지 않고 방취제에서 동포들이 당하는 피해액을 줄이고 원초대로 혜택을 받을수 있도록 지켜나가는데 있어서 우리 민족성원들이 해야 할 일도 크다고 본다.    한국어시험방식은 무연고동포들의 방취제를 위한 하나의 방식이겠지만 대상에 따른 맞춤형취업교육을 통한 한국내 취업방식이나 기타 해결대안도 함께 고민하고 기대해보고싶다.      석천
44    브러커에 의한 사기, 자체예방이 우선 댓글:  조회:2445  추천:0  2012-04-20
브러커에 의한 사기, 자체예방이 우선   2007. 06 요즘 동포사회가 한국방문취업제 실시로 크게 술렁이고있는 가운데 또 최근에 발생한 심양한국총령사관 현지직원의 비리건이 회자하면서 동포사회를 경악케 하고있다. 중국에서 동포들이 가장 많이 집거해있는 동북3성의 비자업무를 담당하고있는 심양한국총령사관은 번중한 비자업무에 눌려 숨도 제대로 가누지 쉬지 못할 정도에도 불구하고 또 여러가지 비자발급 비리건에 휩쌓여 곤혹을 느끼고있다. 소문에 의하면 한국비자에 대한 동포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비자는 하늘에 별따기다》, 《진짜는 안나오고 가짜는 잘 나온다》 라며 브러커에게 돈을 주면 나온다는 말도 《공공연한 비밀》로 되버렸다. 이번에 비리건으로 구속된 현지직원들은 모두 브러커와 련루되여있는것으로 판정, 가랑비에 옷젓는줄 모른다고 당자자들은 뼈아픈 죄책감을 느껴야 할것이요, 우리 동포사회도 경각성을 높이고 사전에 막을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심양한국총령사관은 브러커와 얽힌 비자관련 비리를 척결하고저 여러가지 실속있고 효과적인 조치로 비자발급시스템을 부단히 강화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보여왔다. 이를테면 령사들에게 비자신청수속을 무작위로 배분한다거나 한국 본사에서 예약시스템을 직접 관리하여 예약과정에 브러커에게 끼여들 틈도 주지 않는 등이며 최근에는 또 갈수록 늘어나는 친척방문과 고령자에 한해 예약대기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점을 감안, 예약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부분 친척방문업무를 한국 법무부를 통해 사증발급인증서를 발급하는 등 조치로 방문취업제 예약대기시간을 단축 실시하고있다.  지난번에 적발된바 있는 령사 비리나 이번에 적발된 현지직원과 브러커와의 얽힌 비자발급 비리는 비자발급시스템을 부단히 정비하고 개선화하는 과정중에 발생한 문제로서 이러한 비리 사출로 하여 심양한국총령사관의 업무시스템은 더욱 공정하고 더욱 투명해지고있다.  다른 한편 한국비자 비리에 대해 우리는 한쪽만 지탄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도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만약 우리가 한국드림으로 인한 그 어떤 환상이나 조급한 심정으로 감성적으로 일을 처사하지 않았더라도 브러커에게 쉽게 사기당하는 기회는 주지 않았을것이다. 결국 우리의 모종 리지를 상실한 처사가 브러커들에게 발붙일 틈과 기회를 제공해준것이다. 브러커에 의한 사기피해는 우리 스스로 막는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심양한국총령사관이 홈페이지나 동포언론들을 통해 수차 경각성을 환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기피해가 발생하는데 대해 우리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요즘 무연고 방문취업제관련 한국어시험에 대해서도 동포언론들이 수시로 한국정부의 정보를 전달하면서 옳바르게 이끌고있으나 아직도 적잖은 사람들이 떠도는 소문에 더 귀를 기울이면서 사기피해를 대처할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있다. 사기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려면 옯바른 정보를 갖고 랭철한 리지의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방문취업제에서는 더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사기피해가 없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석천 
43    중국사업으로 재기꿈 펼치는 82세 고령할머니 댓글:  조회:2738  추천:0  2012-04-20
중국사업으로 재기꿈 펼치는 82세 고령할머니    2008.10   -한국 셀라늄생명공학연구 하상남회장   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하상남 한국 셀라늄생명공학연구소 회장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하회장은 여든을 넘은 고령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피부나 얼굴이나 너무 젊은 인상이였다. 말마디를 또박또박 조리있게 엮어가는 모습이나 제스처에서 하회장은 고령의 년세를 무색케 하는 무서운 힘과 정렬적사고를 분출하였다.   하상남회장은 기자가 만난 수많은 기업인중 고령할머니로서는 처음이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조심스러웠는데 그와 대화하면서 이런 로파심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고 대신 친근하고 존경스런 기분으로 바뀌였다.   지난 1982년부터 특허를 내면서 현재까지 30개를 갖고있는 그는 인류건강에 크게 기여할 신물질 세리온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한국의 큐리부인"으로 불리우고있다. 그것이 하회장의 꿈이고 그는 또 이 꿈을 중국에서도 꽃피워볼 생각으로 일전에 심양을 노크했고 심양에서 중국사업구상을 펼쳤다.    하회장의 중국연(緣)   하회장이 중국을 처음 방문한것은 지난 1992년 산동성의 초청으로 한국기업인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중국에 왔다. 그때 그는 산동뿐만 아니라 북경에 들렸으며 자금성도 참관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1998년에 북경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고 2001년에는 한국기업인녀성협회의 한 성원으로 청도를 방문하였다.   이번 심양방문은 다섯번째로 그에게 있어서 아주 뜻깊은 방문이다. 원래 개인사정으로 수십년간 해온던 사업을 포기하다싶이 하였는데 오곡백과가 영근다는 9월의 어느날 심양으로부터 문득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이 전화가 다시 인연이 되면서 그는 포기했던 사업을 재기하기로 결심했고 그것도 중국사업으로 사업을 재기하겠다는 맘을 먹게 되였다. 그는 심양에 오기전에 먼저 북경에 가서 그 전화를 건 지인과 만나 중국사업을 검토했고 이번에 심양에 와서 사업구상을 무르익히게 되였다 한다.   사실 하회장의 중국연(緣)은 열여섯 나이 우연한 기회에 "화타와 편작"이라는 책을 접촉한뒤부터라 할수 있고 그보다 썩 전이라고 할수 있을만치 자기와 중국과는 무언의 끈이 이어지고있는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 하회장은 6박7일로 째여진 심양방문이 매우 뜻이 깊고 의의가 크다고 했다. 그는 심양체류기간 세계 최초로 당뇨병을 치료할수 있는 싸이클로지를 개발한 재미과학자 송문기박사와 만났고 두분은 서로 자기의 과학성과에 대해 교류하고 합작할 의향을 내비쳤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지난 9월 18일 북경방문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100명에 가까운 환자들에 대한 자기의 발명품인 세리온의 림상실험에서 좋은 효과를 보니 매우 기쁘다고 했다.   또 중국 미래생물과기유한회사 등 중미한 3개국 합작(미국 BSF사와 기술제휴)으로 림상실험을 진행중이고 관련제품 허가가 나오면 단기간 제품이 중국에서 출시될것으로 보여 중국사업으로 사업을 재기하는 꿈이 곧 실현되는것 같다고 토로했다.   50년대 한국 최고의 녀배우   하회장의 지나온 삶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이다. 한국전쟁중 손목이 포탄파편에 맞아 절당상황에 처했던 일, 세리온이라는 물질을 입수해 치료한 결과 절단된 혈관과 심줄이 이어졌던 일, 남편과 함께 조산원과 약국을 운영하면서 자신들과 동물을 대상으로 림상실험을 했던 일, 헌 책방을 뒤지며 의학 광물학 등 서적을 참조하며 세리온리론체계를 다져갔던 일...그중에서 그에게 가장 화려했던것은 영화배우 시절이다.    하씨네 집안의 7남매중 다섯째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오페라가수였지만 결국 영화배우로 되고만다. 그것도 아버지의 강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삐어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하여 46년에 "자유만세"로 데뷰하여 56년에 대히트작 "처녀별"(윤봉춘감독)을 비롯해 "노들강변" 등 10여편에 출연했고 이로 하여 50년대 한국 최고의 녀배우반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예명은 하연남, 백락인 윤봉춘감독이 지어준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의 배우생활은 그리 평탄치만 않았다. 몰래 영화를 찍고있다는 일이 들통 나면서 아버지가 한강변에서 자살소동을 벌리는바람에 영화배우생활은 한동안 중단되고만다. 그러다 오빠와 약국을 운영하던도중 6.25 당시 피난도중 폭격에 파편을 맞아 오른손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곡절도 결국 영화배우가 되려는 그를 단념못한다.      그는 오른손이 장애의 비운을 맞는 가운데서도 윤봉춘감독의 고무와 권유하에 다시 등단하여 "손병신"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도 극복하고 "처녀별" 히트작을 만들어내고 자신은 유명 스타로 된다.    그는 영화일을 하면서 무슨 일이든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배우 하연남"보다 발명가로 남고싶다   하회장은 50년대에는 인기배우로서 이름을 날렸고 1980년대부터는 발명가로서 세계 발명계에 이름을 새기고있다.      하회장은 영화계에 등단하여 한순간을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당시 의학기술로 부상당한 손을 수술할수 없다는 절망의 소식에 혼자 치료처방을 찾아나섰다. 양의보다 한의쪽에 더 관심이 갔고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의 책을 연구하였다. 거기서 적석지, 양기석, 운모 등 광물질의 효능을 소개한 내용을 보고 그 광물질을 자기의 손에 사용해봤는데 효과가 있다는걸 경험했고 이러한 천연광물질의 뛰여난 효능에 대해 알리고싶은 충동을 받게 된다.    후에 남편과 함께 본격적인 발명작업에 착수했고 광물질을 얻기 위해 광산을 인수했다. 그러다 미국의 물리학자이며 의학박사인 클리우스 슈바르츠박사의 셀레이움이라는 항암, 항로화미네랄에 관한 연구론문을 접하면서 여기서 흰트를 얻고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끝내 셀레니움과 희귀 미네랄 등이 천연상태로 함유되여있는 "세리온"이라는 신물질을 발명해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천연광물질인 세리온은 정혈작용, 해독, 피부세포에 영향을 주고 신진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그는 세리온에 대한 림상실험효과를 얻기 위해 분말을 내여 매일 복용하고 손과 얼굴 등에 발랐다. 그런데 기적이 나타났다. 세리온을 꾸준히 바른데서 절단하지 않은 손목에 혈액이 돌면서 손가락을 움직일수 있게 된것이다. 여기에서 고무를 받은 그는 림상실험과 연구범위를 넓여나갔다. 세리온을 주성분으로 하는 세리온비누와 세리온화장품 등 계렬제품이 하나하나 탄생되였다.   어떤 제품은 삼성전자와 계약해 납품한것도 있다. 세리온비누는 92년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발명대상을 탔다. 그의 세리온제품은 세계 독일발명전시대회에서 92년에 이어 2002년에도 대상을 수상했고 미국유엔지적재산권기구에서도 1등을 수상했다. 또 한국대통령산업포장을 비롯한 상을 수십여차 수상했다. 그는 93년에 한국녀성발명가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했고 몇년후에 학생과 어머니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단법인 한국어머니발명가협회를 만들어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그는 "발명과 과학이 살아야 나라도 살고 경제가 살지요. 나는 경제의 기본에는 과학과 발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게이츠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발명가로서 기억되고싶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발명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 제가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으니까요. 발명이 무엇인지 또 발명인과 발명품을 소개해야 많은 사람들이 알수 있죠"라고 했다.   하회장은 세리온은 신물질로 인류가 추구하는 자연미네라로서 환경오염에 찌든 우리들에게 삶의 희망이 줄것이으로 확신했다.     그는 인터뷰도중 스크랩북에 있는 화려했던 녀배우시절의 흑백사진과 환자들로부터 받은 감사편지, 산업포장을 비롯한 상장들과 신문기자들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기자는 80고령의 하상남회장의 재기꿈이 꼭 이뤄지고 그가 약 60년간이 이뤄낸 업적 신물질 세리온연구가 인류에게 더많은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줄것을 기대해본다.  오지훈기자       
42    취미가 성공을 부른다 댓글:  조회:2146  추천:0  2012-04-20
취미가 성공을 부른다   2008.08   -심양약과대학교 교수 허영남씨   대학생이 1만명이 넘는 심양약과대학교에서 "무서운 교수"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으며 이 대학중견교수로 활약하고있는 허영남씨(1963년생)를 일전 기자는 30도이상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의 연구실에서 인터뷰하였다.   길림 조양천태생인 그는 일찍 길림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심양약과대학에 배치받았고 후에 한국 서울국립대학 약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후 "인재유치" 방식으로 다시 심양약과대학에 돌아와 교학과 천연물과학에 전념하고있다. 현재 16명의 석박사생을 거느리고있는 그는 이 대학 약물화학전업 박사생도사, 중약화학전업석사생도사로 유기화학류과정 교학, 약물합성에 종사하고있으며 이 기간 국가2류신약 "벤트렉"원료 및 그 제재림상연구를 주최해 림상인가서를 취득했고 한국SK케미칼 약물연구실 책임자로 한국보건보건복지부의 "유도화합물의 전합성 및 그 연생물의 합성" 국제합작테마를 책임지고 진행중이며 중국과 미국, 일본 등 국내외 학술간행물과 국제대회에서 약 20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취미는 천성적이 아니다   허영남씨는 사람들은 성공하려면 흔히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것이라 말하는데 자신의 경우는 취미가 오늘을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소학시절부터 수학에 취미가 있은 그는 중학때 현수리화경연에서 우수한 수학성적으로 여러차 수상한바있고 제1회연변주수리화경연에서 수학 2등상을 취득하는 영예를 가져 대학지망서를 쓸 때 1지망을 수학, 2지망을 물리로 선택했다. 그런데 길림대학 수학학부 졸업생인 고중담임선생이 수학은 기초이기에 앞으로 성공하려면 화학을 잘해야 한다고 화학을 제1지망으로 바꾸게 되였고 그는 결국 길림대학 화학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무슨 일이나 취미가 있어야 깊이 연구할수 있고 자신이 취미 있는것을 해야 성공할수 있어요. 그러나 취미는 천성적이 아니지요. 어떤 문제를 풀거나 연구하는 과정에 양성되지요. 만약 컴퓨터게임을 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게임을 잘하는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게임규칙을 파악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게임하면서 점차 취미를 붙이고 놀아야 게임의 고수가 될수 있는것이지요."   그는 료녕성민족과학보급활동에 참가하여 선후 심조1중과 철령조선족중학교에 가서 특강하였는데 학생들에게 우선 취미가 있어야 성공할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화학이란 무엇이며 생명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실천과 경험을 통해 설명해 커다란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중소학시절 미지의 수학세계에서 여러가지 꿈을 키워오던 그는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화학을 배우며 생명과학에 매료되였다. 심양약과대학 영어약학반의 유기화학을 가르치고있는 그는 국내 기타 유기화학강의에서 보기드물게 영문으로 된 미국 원판 교재를 채용하고있다. 중문교재는 여기저기서 카피한 부분들이 많아 체계가 형성되지 않고있기에 배우고난후에도 별로 쓸모가 없다는것이 그의 주장, 그래서 교수로서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고있다고 했다.   천연약물연구에서 두각을 내밀어   지난 1998년 3월부터 2004년 8월까지 한국 서울국립대학에 류학하면서 한국 SK케미칼과 인연을 맺었고 귀국후 심양약과대학교와 한국 SK케미칼회사의 합작을 추진해 2005년에 대학교내 한국 SK케미칼연구실(200여평방메터)을 개설하였다. 21명으로 된 교수와 부교수, 석박사연구생이 포진하고있는 연구실은 매년 SK케미칼회사로부터 약정된 테마연구비를 받고 천연물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있다.   천연물연구란 천연약물화학연구를 말하는데 자연의 식물, 동물,광물, 해양과 세균 등에서 유효성분을 발견, 분리, 개발하는것을 말한다. 현재 그가 맡고있는 천연물연구는 동북지대에서 쉽게 볼수 있는 할미꽃에 대한 연구이다. SK케미칼은 할미꿏에 로인치매증을 치료할수 있는 유효성분을 찾아냈고 허영남연구팀과 합작으로 2단계 림상실험을 하고있는중이다. 그는 중국 동북지역에 나는 할미꽃을 선정하여 시험재배하고 단계별 채집하여 거기서 유효성분을 추출 정제하는 사업을 주관하고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심양농업대학 박종원교수팀과 합작, 시험재배하여 이미 신빈의 10무되는 땅에 재배하였고 허영남연구팀은 이미 채집한 할미꽃에서 17가지의 사포닝을 성공적으로 추출 정제해내여 약재품질관리로 사용하고있다. 같은 할미꽃이지만 지역마다 틀리고 성분함량이 틀리기에 자연산품종에서 우량종을 선정하여 재배하는 해수, 채집 적정시기를 파악하여 가장 많은 유효성분을 추출정제해내는것이 연구팀의 당면 과제다. 연구팀은 3년동안 채집해온 신빈, 통화, 연길 등 지역의 할미꽃에 심입되는 연구를 진행하여 장차 지역을 축소하고 우량종를 선정하여 대면적재배를 진행할 계획이다. 그때에 가면 3000무되는 땅에 대량으로 재배하게 되는데 신농촌건설과 빈곤지역지원과 결부해서 진행되며 연구사업도 더 활발해지고 관련 개발산업도 규모화될것이라 한다.    연구팀은 매년 한국에 가서 상황보고를 진행하고 새로운 테마를 연구하고있는데 며칠후 연구팀이 한국에 가서 래년계획을 상의하게 된다고 했다. 중국은 할미꽃을 다만 리질치료 중약재중 한가지로 사용, 할미꽃에서 유효성분을 추출정제하여 약물로 만들어 치매증을 치료할수 있다는것은 세계에서 한국 최초의 발견이라고 했다. 따라서 현재 2기림상실험을 마치고 래년부터 3기림상실험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약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커저 엄청난 시장이 형성될것이라고 했다.   이밖에 허영남연구팀은 한국보건복지부의 프로젝트인 항암제연구중 약물합성을 3년간 수행했고 또 1호천연물약품인 관절염치료제의 조인스 등 3개 생약의 추출 정제도 진행하고있다.   생명과학은 전망이 크다   한국에 가서 쉽게 돈벌려하지 말고 앞선 과학지식을 배우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허영남씨는 최근년에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쉽게 돈을 벌수 있는것만 연구하는것이 문제라고 했다.   대학을 지망할 때도 조선족학생들이 많이는 공상관리, 금융, 컴퓨터 등 학과를 선택하는데 여기에는 고중담임선생들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고중때부터 학생들에게 화학과 같은 생명과학에 대해 많이 소개해서 관심을 갖게 하여 대학지망을 쓸 때 이런 학과를 선택하도록 의식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심양약과대학을 일례를 들면 80년대만해도 매년 모집하는 300명 학생가운데 10명의 조선족이 있어 전체모집인원수의 3%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매년 모집하는 1500여명중 겨우 2-3명이여서 천분의 1도 도달못하고있다는것이다.   그는 화학이 기타 학과보다 힘든것은 사실이지만 졸업후 취업률이 훨씬 높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심양약과대학의 취직률은 80%이상으로 일반대학보다 훨씬 높아(30%)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 명문대학이나 중점대학과도 견줄수 있다고 했다. 졸업생들은 거의 제약회사, 병원이나 약방, 그리고 대학연구생으로 들어간다는것이다.   "해마다 취업률이 치렬해지는 현실에서 왜 이렇게 취직률이 높은 대학이나 학과가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외면당하는지 생각이 안되요." 그래서 매번 신입생이 들어오면 조선족학생이 몇명 되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그다. SK케미칼에서도 괜찮은 조선족을 추천하라 하지만 심양약과대학이나 중국약과대학에도 이 방면 조선족인재가 없어 추천못하고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현재 딸애는 복단대학 부속중학교 고중2학년에, 안해는 복단대학 한국어과 부교수로 사업하고있어 독신생활을 하고있는 허영남씨는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자료를 검색하거나 관련 서적을 섭렵하는것이 취미라고 한다.   오지훈기자   
41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에 혼신을 쏟는다 댓글:  조회:2132  추천:0  2012-04-20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에 혼신을 쏟는다   2007/06 김좌진장군의 손녀 김을동을 만나 일전 기자는 심양한국주기간 심양을 잠간 방문한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의 손녀인 한국탈랜트 김을동녀사(63세)를 심양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해림에 세운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의 인테리어건때문에 해림에 들렸다 전원주선배를 만나로 심양으로 오는 길이였다. 장군의 손녀, 김두한의 딸, 성공한 탈랜트, 《국민스타》의 엄마 등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갖는 그녀였지만 녀장부다운 건장한 체구외에는 보통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장군의 손녀로 기념관을 세워놓으니 당당하다》고 허두를 뗀 그녀는 려로의 피로도 잊고 기자에게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자기일가에 대한 일화를 자상히 들려주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청산리구국대장정》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은 목단강지역 해림시에 위치해있는데 김좌진장군이 피살된 곳이라한다. 이 사업관은 김을동씨가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를 만들고 1999년부터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흉상건립 및 생가복원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지난 2005년말에 개관하였다. 기념관의 16,000여평되는 부지는 해림시정부에서 무상제공받았고 박물관과 복지관 두동의 건물로 구성되였다. 박물관에는 현재 한국독립기념관에도 없는 문물이 전시돼있는데 당시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독입운동가들의 업적이 수록돼있다. 중한 력사학자들이 공동발굴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관련 등 항일무장투쟁사적과 한국인과 중국인 항일투사 각 15명의 개인사적들이 전시되여있다. 소개에 의하면 김좌진장군은 군자금을 마련하고저 정미소를 운영하다 41살에 피살, 그는 일찍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대승전을 거두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은 일명 중한우의공원이라도 하는데 독립운동유적지로 되여 해마다 적잖은 참관자들의 발길이 잇고있다. 지난해 단체손님만 400여명, 올해는 5천여명에 달할것으로 본다. 지금은 해림의 관광코스로 되여 목단강에서 해림으로 가는 직승비행기가 개통되여 20분이면 도착할수 있다. 복지관은 숙박장소외 식당과 례식을 할수 있는 장소로 만들 계획, 살아있는 민족문화의 례식, 환갑잔치 등을 이어나가는 공간, 또한 세미나를 할수 있는 공간 마련으로 한중우호관계의 컨셉으로 만들고싶다고 했다. 그는 현재까지 사재를 털어가며 투자한 자금이 2500만원에 가까운데 그 과정에 사기를 당하는 등 원인으로 공사가 계획보다 많이 지연되고있지만 이 곳에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을 고집한데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것도 있지만 자라나는 후세대들에게 민족의 얼과 넛을 심어주고싶었다고 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의는 련속 6년째 해림조선족실험소학교(김좌진장군이 생존에 지은 학교라고 함)에 장학금을 지급, 이미 10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으며 래년 5월에는 전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것이라 했다. 동시에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의는 지난 2001년부터 한국의 대학생을 모집해 해마다 《청산리구국대장정》을 펼치고있다. 초기 심양을 경유했지만 후에는 단동에서 배를 타고 와서 집안의 환인, 이도백화, 연길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지역, 다시 발해지역에서 김좌진장군기념관, 할빈731부대, 할빈역 등 로정으로 10박이상의 대장정을 한다. 특히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지에 갈때면 독립가를 부르며 12킬로를 걸어가서 주먹밥을 먹으며 당년 독립군들의 생활을 체험한다.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애국애족의 정신과 민족정신을 함양시키는 일에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싶다》며 오로지 외고집으로 오늘까지 왔는데 참으로 감회깊다고 했다. 《주몽이 엄마》 김을동 자신도 한국에서 성공한 탈랜트. 그러나 최근 아들 송일국이가 출연한 한국드라마 《주몽》이 뜨면서 《일국이 엄마》, 《주몽이 엄마》로 더 각인되고있다. 그는 아들이 성공해서 기분이 좋다며 그러나 내아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선조들이 잘 보살펴준 덕분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청산리구국대장정》 1회때부터 송일국이는 이 대오에 합류하여 환인 오녀산성에 가서 999개 층계를 올라 참배한적 있는데 누가 꿈에라도 주몽역을 맡으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또 세상에 우연일치라는 말이 있듯이 2005년 10월 29일,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이 준공하는 날 일국이는 금정(金鼎)호텔 선물가게에 가서 활 하나를 사와서 kbs 소품실에 갖다놓겠다 말한적 있는데 5개월후 그는 주몽역을 맡게 되였다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국이도 사극에서 성공하였는데 그가 맡은 역은 《해신》에서 장보고를 죽이는 염장이라는 악역, 여기서 성공하면서 그는 kbs신인상, 우수연기상을 수상하여 스타로 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몽》에서 주몽역을 맡았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거의 반대하였다. 그 리유인즉 사극에 편중하면 탈렌트로 성공하기 어렵기에 여러가지 드라마에 출연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일동씨는 어머니로서 력사적으로 최고의 인물을 재연한다는것은 그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섰다. 일국이가 주몽이 형들에게 하마트면 진흙탕에 생매장당할뻔한 장면을 찍고나서 집에 들어왔는데 그 흙탕물이 푹 밴 옷을 자신이 손구 며칠이나 빨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북핵문제로 남북정세가 긴장하던 시기, 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김을동씨는 평양 동명성왕릉에 참배하는 가는 기회를 갖고 주몽의 릉앞에 일국이 사진을 갖다놓고 현재 일국이가 대박이 터지고있으니 끝까지 성공할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었다. 김을동씨는 원래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55평에 살던 집과 가산을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청산리구국대장정에 투자하다보니 월세 100만원짜리 집에 들었다가 쫓겨날 무렵 일국이가 대박을 터뜨려 가긍한 신세를 면하게 되였고 일국이도 기념관사업에 적극 지원하고있다고 했다. 그는 성공한 배우를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으로 비유하면서 외교관 수백명이 하기 어려운 일을 성공한 욘사마가 해낼수 있었다며 《국민의 스타》로 뜨고있는 아들에게 호의호식이 아니라 나라에 기여하는것을 항상 잊지 말고 행동거지에 조심하라고 타이르고있다한다. 《각본없는 드라마》 김을동씨는 할아버지가 세상뜬지 100년만에 손녀가 흉상을 모셔놓았고 거기에 한국 국회의원과 한국인들이 와서 참배하고 또 일국이가 국민스타로 성공했으며 한 방송사에서 다큐맨타리로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과 아들 4대가 나왔으니 가히 《극본없는 드라마》라고 했다. 할아버지 김좌진장군은 한 대가가문의 둘째로 태여났으며 17살 되던해 한국사상 처음으로 35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재산을 전부 무상으로 나눠주면서 가노를 해방시켰으며 문중 어른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않고 99칸이나 되는 집에 호명학교라는 학교를 열어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일본 경찰에 쫓겨 만주에 가서도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다. 특히 독립군사령으로 몸소 지휘한 청산리전투는 청산리대첩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독립운동의 빛나는 한페이지로 길이 남아있다. 아버지 김두한도 한국에서는 전기인물이다. 그는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일본경찰에 쫓기며 살았고 대담하게 일제에 항거했다. 특히 그가 한국 국회에서 오물을 투철한 이야기는 후세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대의를 주장하고 불의를 타매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을동씨에 의하면 그때 한국정치가 정경유착으로 판을 치자 김두한은 탑골공원(순국선렬공원) 화장실에서 똥물을 퍼다 국회에 부으면서 선렬들의 응징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잇슈가 되였다. 그리하여 군사독재시절 김두한은 국회의원 빠지를 빼앗겼으며 국회에서 제명당했다. 김을동씨는 부친이 국회의원을 했지만 김두한이라는 이름으로 재산등기한적 없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자신은 생활이 그처럼 검소했는데 국회의원치고 그렇게 어려운 가족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두한의 출생 자체가 한편의 로맨틱한 드라마다. 김을동씨에 의하면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쫓기여 도주하던중 어느집 담장을 뛰여넘어들어갔는데 거기서 한 착한 녀자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임신하여 김두한을 낳았으며 그뒤 그 녀성은 김두한이 여덟살되던 해 일제본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일국이는 《주몽》의 역으로 《국민의 스타》로 뜨고있고 자신은 스타다큐맨타리에 출연, 또 무지하다고 할 정도로 김좌진장군기념관사업을 추진하고있으니 말이다. 그는 심양은 옛날 아버지가 머문적 있었던 봉천이여서인지 더 정이 든다며  《재중동포는 글로벌시대 한국의 엄청난 자원이다. 한국인이 중국에 무난하게 진출할수 있은 원인중 동포들이 가교역할을 해준데 있다. 중한 량국간 윈-윈관계를 이룰수 있는 사업들을 통해 중국에서 우리의 말과 우리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있는 중국동포들에게 현대식 한국문화 보급 및 교육과 장학사업 지원, 한국의 학생과 기업인들의 동북 3성 지역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오지훈기자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