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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역
□ 안수복
봄비가 놀다간 가지끝에서 연초록 솜털잎이 새로 돋던 지난 초봄이였다. 여직 홀아비로 고향마을에 눌러 살던 동창생이 한국으로 출국한다기에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눈길이 음식점 맞은켠에 미치는 순간 철퍼덕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옛날 도회지 못지않게 인산인해를 이루던 기차역이 아니던가? 그런데 노란 페인트칠을 한 정다운 기차역건물은 온데 간데 없고 그옆에 줄느런히 들어앉았던 영화관이나 백화점, 랭면집들도 그 성스런 이름을 고스란히 잃은채 무도한 겨울 발굽에 짓밟힐대로 짓밟힌 황량한 들녘처럼 스산하다. 원래의 네개 향진을 합병하여 한개 진으로 만들다보니 십여년전에 촌으로 탈바꿈한것은 진작 알고있었지만 꽃이 벙그는 소리가 들리고 내물이 목청을 푸는 화창한 봄날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살풍경이다.
고향의 정다운 노란 기차역, 왕복 16리 길을 걸어 학교로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푸르른 예지와 샘물 같은 에너지를 심어주고 그리움을 안겨주던 환상의 세계였다. 비가 와 질척거려 진흙이 신발에 찰떡처럼 묻어다니던 그 세월, 학교를 오갈 때면 꼭 지나야 하는 기차역이기에 두줄기 철길을 따라 암기숙제랑 하며 걷다가도 안개 피듯 피여오르는 정다운 노란 건물이 안겨오면 어느새 학교문앞에 다달은듯 금방 새 힘이 솟고 가슴 뛰던 환희의 기쁨역이였고 잊지 못할 추억의 소중한 기차길이였다.
고향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린 나는 고향 기차역신세를 톡톡히 봤다. 매번 산전검사를 하러 다닐 때마다 기차를 타고 30리 떨어진 룡정시부유보건원에 다녀왔는데 어리무던하고 살뜰한 남편이 상감마마를 모시듯 자전거로 역 마중, 님 마중을 해서는 역부근 랭면집에서 한그릇에 35전씩 하는 시원하고 쫄깃한 랭면 한사발 뚝딱 해치우는 재미에 꿀처럼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내던 아름다운 추억의 향수역이였다.
고향사람들은 약혼사진을 찍어도, 어린애 백날사진을 찍어도 무조건 기차역부근의 사진관을 리용했다. 우리 부부도 감미로운 20대 청춘을 자랑하며 당시 류행하던 까만 양복차림으로 기차역을 배경으로 채색사진을 남겼다. 파마도 기차역부근에서 하는것이 류행이였다. 스물세살 꽃나이에 첫날각시파마를 하고 수줍게 기차역부근을 빠져나오는데 멀리 심양에서 조카의 결혼식에 참가하려고 기차에서 내려 걸음을 재우치는 로인과 동행했었는데 시고모님이실줄이야!
기차역은 늘 고향을 떠나고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꽃분이언니는 그 기차를 타고 동경성으로, 쌍가마언니는 목단강으로 시집갔다. 인물 곱고 맘씨 착한 나의 둘째언니도 고중을 졸업하고 성건축공사에 출근하는 남자를 만나 자치주 수부 연길시로 시집갔다. 나와 두 동생은 언니가 집에 올 때마다 가만히 마을을 빠져나와 역으로 마중갔었는데 기차역은 언제나 만원이였고 노란 민들레꽃 피여나고 푸른 버들강아지가 춤추는 고향길은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붐벼 즐겁기만 하였다.
고향역은 고향사람들의 성지였다. 웬만한 기차는 다 멈춰서는 너무도 수수한 간이역이였지만 평강벌의 교통요충지였다. 농망기가 지나면 고향사람들은 기차에 앉아 북경유람, 경박호유람, 해남도유람을 떠났고 한가할 때면 왁자한 기차역부근의 음식점에서 술추렴을 하는것이 일상사가 되였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날은 마을사람들의 일대 경사날이였다. 갓 건져 올린 물고기 같은 마을의 젊고 예쁜 색시와 터밭에서 금방 따낸 오이처럼 풋내음이 나는 처녀들은 연지곤지 찍고 한창나이 들뜬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고 버들피리를 불기에 신난다. 봄마당에 갓 까난 삐악거리는 노란 병아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장난감기차나 춤추는 인형을 안고 더없이 즐거워했다. 지금은 쩍하면 택시를 타지만 그때 고향사람들은 기차역까지 7,8리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녔다. 어쩌다 길가에서 소수레를 만나면 소등을 살짝 갈기던 어진 소몰이군의 버들채찍소리가 얼마나 귀맛 좋고 신나던지…
그런데 눈앞의 고향역은 너무도 쓸쓸하다. 번영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고작 나무 몇그루 서있는 한적한 공터로 변했다. 마을사람들이 다 떠났으니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는 인적이 없다. 실로 억이 막히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다. 마을앞 내가에서 개울에서 내기라도 하듯 챙챙 울리던 녀인들의 귀맛 좋은 빨래방치소리와 자기 얼굴 다듬듯 안마당 뒤켠이나 널찍한 뒤뜰 볕바른 한켠에 장독대를 씻고 닦아 삶을 맛들이던 이 땅의 가장 진하고 감동적인 고향의 상징이던 어머님네 모습을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수 없다. 나는 애써 웃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그런데 웃음대신 난데없이 싱싱한 무청처럼 쑥쑥 암종이 똬리를 튼 부패한 트림이 올라왔다. 내가 다니던 모교도 이젠 한물이 간지 오래다. 금방이라도 교실문을 박차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올것만 같은, 수많은 대학생을 배출한, 천여명의 학생들을 자랑하던 모교가 지금은 겨우 30여명 학생이란댜.
지금 내가 머물고있는 고향마을을 품은 진거리도 규모가 꽤 큰 소도시로 탈바꿈하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너무도 모자라고 맛이 가고있다. 건물은 나날이 더 즐비해지고있지만 대신 가게는 날마다 줄어들고 조선족 수는 손을 꼽을 지경이다. 시장에서도 더는 웃음 띤 얼굴로 터밭에서 따낸 떡호박이며 김장고추, 줄당콩이며 손수 담근 된장을 팔던 착하고 정겨운 조선족아줌마들을 만날수 없다. 금년 한해만 해도 조선족이 경영하던 규모가 제일 큰 음식점 두개가 살그머니 문을 닫았고 크고작은 조선족가게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빈 간판들만 너덜너덜하다. 모두가 덕대돈만 바라보고 놀지언정 푼돈을 바라지 않는다. 200여호를 넘던 중심시장은 80호도 되나마나하다.
나는 멍하니 두줄기 기차길을 바라보았다. 철로옆 봄을 맞은 나무에서 애기손톱만한 나무잎이 돋아나고있다. 언제인가 떠났던 고향사람들이 이 기차길로 돌아오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새순으로 고향을 단장하는 한포기 그루터기도 못 되는것이 못내 한스럽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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