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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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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필) 봄,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봄 (안수복) 댓글:  조회:155  추천:0  2022-04-05
아직 바깥공기는 차가운 겨울이지만 며칠 전부터 가로수 버드나무 새 순이 몽글몽글 달리는 게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출근하다 말고 버드나무와 말을 걸고 있는데 곁에 작은 화단에도 뽀얀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싹이 막 움을 트고 있는게 보였다. 봄이 살금살금 어느새 내 곁에 오고 있었다.   봄은 계절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곁에 온 봄은 축복만은 아니였다. 새삼 봄이구나 하는 생각에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진다. 내 마음의 봄은 언제 올가? 몸을 바짝 움츠리며 봄이 오기를 그토록 기다렸건만 봄의 서정과는 달리 재작년 봄 갑작스럽게 우리의 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코로나19가 여전히 종식되지 않아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콕’ 때문에 가게는 여전히 썰렁하고 거리는 차량과 마스크를 낀 사람들 뿐이다. 설마설마 했던 ‘코로나 봄’이 해마다 다시 온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 확진자수가 날로 늘어나면서 작년처럼 음력설을 계기로 음식점들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뒤로하고 열심히 출근하지만 붙는 불에 키질이랄가 걸려오는 전화마다 “가게 문을 열었냐”가 아니면 “언제 닫느냐”였다. 가뜩이나 가게 문을 닫게 될가봐 뒤죽박죽인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얼마나 기다렸던 음력설이고 얼마나 설레였던 새봄인데.  그러지 않아도 가뜩이나 살얼음을 걷듯 하루하루 버티는 음식점영업이라 작년처럼 가게문을 닫을가봐 은근히 걱정하고 있는 터였다. 매일 가뭄에 콩 나듯 많지 않은 고객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도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데 만약의 경우에 재작년처럼 음력설련휴를 계기로 가게 문을 닫게 되면 그 엄청난 손실은 막을 수 없을 것이였다. 이미 재작년 봄 40여일이나 가게운영을 못했기에 대출금은 고슴도치 외 따 지 듯  줄어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늘어난 터이다.   뒤숭숭한 세월인데다 뜬소문까지 겹쳐 한창 손님들이 북적거려야 할 저녁시간대인데도 콩나물시루처럼 빼꼭히 들어앉은 음식점 가게들은 텅텅 비고 거리는 행인 하나 얼씬하지 않고 가로등불빛만이 거리를 비출 뿐이다. 그 와중에도 대출금을 갚아야 할 날자는 어김없이 돌아오고 집세는 꼬박꼬박 갚아야 하니 가게주인들의 속은 타서 재가 될 지경이다.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 잡는다고  갖은 방법을 다 써가며 아등바등 하지만 결과는 불 보듯 빤하다.  몇개월에 한번씩 바뀌는 영업간판, 하나하나 무너지는 영업집, 행여나 하는 요행심리로 희망의 돛을 달아보지만 죄다 물거품이 되거나 허사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직 음식업종은 통보는 받지 않았지만 언제부터 문을 닫아야 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다 보니 음력설예약 음식주문마저 마음 놓고 받을 수 없었다. 요행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반갑지 않은 ‘코로나 봄’이 다시 오니 꽃샘추위에 새봄을 맞을 준비로 용암처럼 끓어번지던 희망과 열정이 저도 모르게 죄다 사그라지고  마음마저 시려난다. 언제 가야 오는 봄이 반갑고 설레 이고 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웃을 수 있을가?   솔직히 대출금은 목을 조이고 가게들은 엉망진창이다. 어쩔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래돌을 빼 웃돌을 괴는 식으로 다시 대출을 맡아 대출을 갚다보면 결국 돌탑이 무너지는 악성순환에 시달릴게 뻔하다. 매일 불안에 떨며 가게 문을 열었으나 수시로 닫을 수도 있다는 허무감에 웃음마저 잃어버린지 오래다. 2차대전 이후 전세계가 공황에 빠진 건 처음이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콕’ 생활을 실천하면서 설사 가게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린다 해도 들어올 손님이 별반 없다. 쫓기며 살아가는 기분이랄가?   금년에는 유별나게 해살이 잘 비추는 가게 안의 남쪽 창턱에 놓인 게발선인장이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겨울은 봄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듯 정월에 꽃들을 활짝 피웠었다. 이전에는 년말쯤에 이미 피였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신기하게도 바다에서 자라는 게의 발처럼 생긴 잎 끝에서 선혈처럼 붉은 꽃이 아름답게 피여나는 게발선인장꽃의 미소를 보노라니 얼음 같은 내 마음에도 꽃피는 봄이 소리없이 잠시 내 곁에 와 있음을 실감해본다. 내 삶도 그랬으면 한다. 고단하지만 찌들지 않는, 그래서 조용히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집안에서 키운 화초에 꽃이 피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다. 화사하게 웃는 매력적인 게발선인장꽃을 바라보다 얼결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수만원의 거금을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액정화면에 떴다. 잘못 봤나 하며 몇번이고 확인해도 현실이였다.   “밥값, 술값으로 저축”이라는 짤막한 글과 함께 “받아놓고 한번씩 가 밥 먹을 때마다 거기서 까면 된다”는 설명도 따랐다. 우리 가게 메뉴로 볼 때  한번에 백여원씩 소비해도 백번이나 되는 거금이였다. 일년에 열번을 오신다 해도 십년도 더 넘어 소비할 가격이라 어마지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게의 어려움을 헤아려 고객들이 앞다투어 소비권을 사용하지 않고 현찰로 소비한다는 말과 글은 보았지만 신문과 방송에서나 보고 들었을 뿐이였다. 가뭄에 단비처럼 매달 갚아야 할 대출금을 갚고도 꽤 여유가 있는 액수였다. 너무 뜻밖이여서 그만 돌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언제 한번 입금해주신 지인 앞에서 어려움을 호소한 적도, 내비친 적도 없었다. 더우기 식사초대 한번 살갑게 한 적 없는, 8개월이나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한 평범한 작가의 가게에 따스한 손길을 보내준 명망 높은 교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저 창턱에 화려하게 피여난 게발선인장꽃처럼 내 곁에 피여난 한떨기 아름다운 ‘꽃’, 하지만 인정밭에 피여난 그 아름다운 ‘꽃’은  묵묵히 지켜볼 뿐 뽐내지 않았다. 진정한 봄은 이미 벌써 내 곁에 와 있었다. 비록 코로나는 물러가지 않았지만 새봄과 더불어 더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요즈음 밤은 령하권으로 내려가지만 한낮의 기온은 따스하기만 하다. 봄은 내 등뒤로 어느새 와 있었구나. 이제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울긋불긋 산과 들에 꽃들의 잔치가 분주하고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줄을 잇고 정원에 핀 꽃 잔디도 자태를 뽐내며 제몫을 다하고 날마다 풍성한 꽃 잔치 열리리라.   계절은 단 한번도 례외없이 순서 대로 온다. 봄이 윙크하니 차갑던 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느껴진다. 두꺼운 패딩은 갑옷같이 답답하다. 삶의 균형을 맞추려 오늘도 집과 가게 사이의 공원을 걸으며 나의 마음 길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봄은 진작 내 곁에 와서 속삭였던 것 같다. 어서 기지개 켜고 일어나 훨훨 날아보라고,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따스한 해살에 녹여보라고. 찬찬히 주위를 눈여겨보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봄이 내 곁에 와 있다. 이름 모를 꽃들 역시 봄을 알려주는데 동참했고 봄내음에 움을 틔운 나무들, 아빠트정원의 꽃망울을 하나씩 터뜨린 꽃봉오리들 봄은 봄이다. 마침내 내 곁에 다가온 봄, 온 세상이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생의 의미를 되찾게 하는 민초 같은 민들레덕분에 나의 가슴 속에도 노란 웃음꽃이 피여난다.   봄은 내 곁에 팔짱을 끼고 생글생글 웃는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힘들고 고되지만 언젠가는 피워낼 내 안의 꽃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연변일보 2022-03-04
7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가로수 댓글:  조회:140  추천:0  2021-12-23
연변의 봄은 버드나무가 푸르고 분홍색 살구꽃이 활짝 핀다. 그래서인지 내가 살고 있는 도시도 버드나무와 살구꽃 가로수가 특징적이다. 일찍 봄을 알리고 늦은 가을까지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버드나무, 유구한 역사와 애환을 품고 있는 버드나무, 마을의 안녕과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버드나무는 고향을 떠올리는 향수의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하루 새에 고목이 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가 뿌리 채 뽑혀 파랗게 쑥이 돋아나는 봄날의 화단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꽃망울이 한창 부푼 가지들은 댕강댕강 잘려나가 휑뎅그레해졌다. 그나마 뿌리 부분을 흙 채로 비닐주머니에 넣고 꽁꽁 싸놓은 걸 보면 여기에서의 가로수 사명을 다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난 그만 우두망찰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출퇴근할 때마다 늘 쫓기듯 달음박질하는 나에게 쉬어가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던 가지 휘늘어진 수양버들과 기품 있고 당당하던 살구나무 가로수였는데…… 더욱 한심한 것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가지에 살짝 가려 제법 운치가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이던 시내버스 정거장마저 삽시에 벌거숭이가 된 채로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좀만 있으면 살구꽃이 팝콘처럼 터지기 시작하고 연녹색 버드나무가 실실이 드리워져 산책로와 정거장을 풍성하게 만들 텐데 말이다.   물이 조금만 있어도 자라나는 강인한 생명력, 부드럽게 가닥가닥 풀어지면서도 껍질 속으로 무섭게 내공(内功)을 쌓아가는 버드나무, 어릴 적부터 가장 많이 보아온 나무가 버드나무가 아닌가싶다. 봄이면 화사한 연두 빛을 선사하는 버드나무는 가로수 또는 풍치수로 많이 심는다. 파릇하게 새순을 올리고 커튼처럼 가지를 땅으로 내리는 모습이 참 너무 아름다웠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파랗게 늘어진 버드나무와 일정한 간격으로 엇갈아 심어놓은 살구나무는 분홍색 꽃이 만발할 때면 화단의 파란 잔디나 꽃나무와 잘 어울려, 그 거리를 활보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고 살구꽃이 피어나던, 가슴 깊이 간직한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나는 고향마을이 눈앞에 떠오르며 눈물이 핑 도는 걸 어쩔 수 없다. 어릴 적 마을 동구 밖의 그 큰 수양버드나무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하학 후 버들이 우거진 해란강 둑으로 나가 암기숙제 할 때 보았던 신나게 버들피리를 불던 옆집 오빠는 지금 그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 십 년 전 고향마을을 떠나 진소재지에서 음식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 야외가 아니고서는 버드나무를 볼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도심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4년 전, 음식가게를 도시로 옮기면서부터 출퇴근길에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가로수였다.   그런데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마치 고향을 만난 듯 반갑고, 수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출퇴근길에 맞아주고 바래주며 삶의 욕구와 에너지를 심어주고, 생의 희열과 보람을 느끼게 하던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가로수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너무 허무하고 맹랑했다. 뿐더러 출퇴근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버드나무나 살구나무가 살짝 가린 골목시장에서 머리에 이고 온 줄당콩이나 무말랭이 같은 채소들로 노천난전을 벌린 시골의 할머니들이나, 휠체어에 노모를 모시고 시원한 버드나무 그늘을 찾아 산책 나온 아저씨들도 더는 만날 수 없다. 게다가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지지는 통에 출퇴근길의 그 가슴 부풀던 설렘도 죄다 무의미해진다.    버드나무는 빨리 자라고 정수작용이 있어서 예로부터 우물가에 많이 심어왔다. 그리고 햇빛을 전부 가리지 않기에 밑에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다. 아버지는 붉은 수수 울바자를 두른 집 앞 터전머리에 구기자나 앵두나무 외에도 해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먹을거리가 없던 지난날 살구는 더없는 풍성함을 안겨주는 맛 나는 과일이었다. 여름이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오구구 모여들어 엄마와 두 언니가 뜯어주는 앵두랑 살구랑 실컷 먹으며 풍성한 푸른 가지를 땅에까지 드리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그네도 타고 공기놀이, 고무줄뛰기, 숨바꼭질에 정신이 팔려 날이 어둑어둑 저무는 것도 몰랐다.    살구나무는 열매도 좋지만 봄이 오면 화사한 꽃을 보기 위해 가로수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버드나무 가지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살구나무는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하기 전에는 바라보는 것도 더없는 사치다. 살구꽃은 처음 필 때는 연분홍색을 띠다가 차츰 옅어져, 활짝 필 때면 거의 하얗게 변한다. 꽃잎 다 떠나보내고도 끄떡없이 서 있는 살구나무, 상큼한 봄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버드나무와 살구나무로 가득한 거리를 걷노라면 진짜 여왕이 따로 없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살구나무의 꽃이 열매로 되어 우리 곁에 다가서기 전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봉변을 당하였다. 상큼한 봄 내음, 지저귀는 새소리 등으로 하여 실로 자연음악회가 따로 없었는데……   버드나무는 의학적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강인한 생명력과 유용성은 물론, 부드러움까지 가지고 있어 그야말로 외유내강(外柔内刚), 유용지물(有用之物)의 나무이다. 꽃샘추위는 봄을 시샘해도 버드나무는 천만 가지를 거느리고 봄 마중을 한다고, 연둣빛의 길고 풍성한 가지들은 부드럽고 끈질겨 세찬 비바람을 맞아도 휘어질지언정 좀처럼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이용하여 소쿠리나 바구니, 고리짝 같은 생활용품은 물론, 지어 조각 작품의 재료로까지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쉼터가 되고 그늘이 되는, 고난을 잘 견디어 내는 신기한 버드나무는 맨 먼저 봄을 알려준다. 고향의 큰 나무 밑은 마을사람들의 안식처였다. 시냇가에는 아직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지만 버들강아지는 입춘만 지나면 양지쪽에서 눈을 뜨기 시작한다. 낙엽도 가장 늦게 지는 버드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잎이 먼저 나온다. 또한 부드러운 가지로 세월을 이겨간다. 그래서인지 버드나무처럼 허리가 가늘고 버들개지처럼 오동통한 엄마의 고운 얼굴을 상기시킨다. 하여 고향을 떠올릴 때면 버드나무와 함께 있는 한 폭의 고향풍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는 많은 문학의 소재에서도 등장한다. 적어도 우리 시대 사람들은 고향을 떠올리는 대상으로 생각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고향의 풍경이 담긴 나무를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낀다.    잘 가라, 푸른 하늘을 떠이고 도시의 예술작품으로 도시의 품격과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하고 푸른 가로수로 행인들에게 꿈과 안녕, 끝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하게 하던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야!우리 언제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든지 내 삶의 쉼터가 되고 고향을 닮은 내 마음의 풍경이 될 것이다. 2021년 5호 
6    [수필 ] 거미줄 - 안수복 댓글:  조회:274  추천:0  2019-07-11
안수복   거미줄   해마다 여름에 접어들면 가게주방의 남쪽으로 난 창문가 공터에 거미가 집을 짓고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마치 꽃피는 봄이 오면 처마밑 제비둥지에 어김없이 날아드는 제비들처럼 말이다.   처음 내가 발견했을 때는 몸뚱이가 겨우 쌀알만 했었는데 그게 차츰 자라 어느새 살이 통통하게 올라 팥알만 해지더니 나중에는 제법 땅콩만한 거미로 자라나있었다. 거미의 몸집이 클수록 집도 어찌나 크게 지었는지 털실로 지은 것마냥 엄청 두꺼워 아침이슬이 보석마냥 거미줄 우에 화려하게 내려앉았다.        거미줄과 친분을 맺은 것은 3년 전부터이다. 어느 날 아침시장에 다녀오려고 거울에 마주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직 여드름인 줄로 알고 무시해왔는데 어느 사이 좁쌀알만한 크기로부터 수수쌀알만큼 크기로 자라났는지 턱밑 목 한복판에 밉살스런 ‘사마귀’인지 ‘쥐젖’인지 통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 골려주기라도 하듯 껌딱지처럼 찰싹 들어붙어 날 보란 듯이 시위하고 있었다. 졸지에 흥이 깨졌다. 그렇다고 짚신에 국화 그리듯 삼복염천에 새삼스레 스카프를 목에 두르거나 밴댕이만한 일을 가지고 괜히 호들갑을 떨며 병원이나 미용원을 들락거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여보, 나에게 밀방이 있소.”   놀랍게도 남편 손에는 섬유처럼 가늘고 긴 모양의 거미줄이 쥐여있었다.   “밤낮 거울에 붙어사는 음식점사장님의 이쁜 목에 밉살스런 ‘쥐젖’이 자라서야 되겠소? 사장님을 위해 이 주방장이 새벽부터 참빗질하듯 온동네를 돌며 거미줄이란 거미줄을 싹쓸이했다오.”    남편은 투박한 생김새와는 달리 유난히 너스레를 떨며 심란한 나의 마음을 달래느라 무던히도 애쓰는 눈치였다.    물에 빠진 놈 지푸래기라도 잡는다고 하루빨리 ‘사마귀’인지 ‘쥐젖’인지를 ‘숙청’하기 위해 난 온순한 양처럼 거미줄로 그 밉살스러운 것을 꽁꽁 감도록 얌전히 남편한테 몸을 내맡겼다. 기적이 생겼다. 목부위가 따끔하고 당기우며 조여드는가 싶더니 하루의 낮과 밤이 지나자 피가 안 통하는지 ‘쥐젖’의 색갈이 황색으로부터 검은색으로 변했으며 나중에는 점차 몸통이 작아지고 미라처럼 말라들더니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듯 사흗날째 되는 날에는  ‘시체’가 되여 허물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내 몸에서 톡 떨어져나갔다.           곤충세계에서도 거미줄은 매우 가는 편이지만 그 강도는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왕거미의 직경은 누에가 만드는 실의 직경보다 10배나 작다. 하지만 거미줄의 강도는 누에의 실보다 2배 이상 강할 뿐만 아니라 강철보다도 5배나 강하다. 게다가 거미줄의 탄성은 나일론보다 2배나 좋다. 한마디로 거미줄은 가늘고 잘 늘어나지만 강철보다 강하다. 거미줄은 인체에 무해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거미는 누에처럼 따로 고치를 만들지 않으며 독을 가지고 있어 거미로부터 거미줄만을 추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거미는 타고난 건축가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3차원을 2차원에서 고도의 원근법 계산으로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보이지만 단 한곳의 시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모양을 볼 수 있는 마술과 같은 놀라운 건축디자인, 거미줄은 그들 생존과 번식에서 가장 중요하다.    신민들은 거미를 자상하고 거룩한 창조신으로 여겼고 거미의 기하학적 모양에 근거하여 첫 문자를 창조했으며 언어와 문자의 수호신이라 믿었으며 또 거미라는 말을 총명함의 뜻으로 여겨 지혜와 인내의 상징이자 의식적인 존재로 믿고 거미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고 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이 귀찮아하는 거미줄을 실생활에 리용하고 있다. 많은 과학자가 거미줄에 집중하는 리유는 거미줄이라는 신소재의 적용범위 때문이다. 굵기가 머리카락의 수천분의 일에 불과하면서도 탁월한 끈기와 신축성을 가지고 있는 거미줄은 이미 측량장비, 현미경, 총의 망원조준기에 필요한 광학물질의 중요한 원료로  쓰이고 있다. 선진국들은 가볍고 원형회복력이 뛰여나고 친환경적, 인체무해, 강철보다 5배나 강한 강도로 바다에서 사용이 가능한 생분해성, 어망, 인공장기, 인공인대, 항공우주소재, 방탄조끼, 락하산, 스포츠의류, 헬멧, 방탄피부 등을 만드는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다.   거미는 진정한 글로벌 시민이다. 지구상에는 4만여종의 거미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거미들은 엄청난 량의 거미줄을 사용하고 있다. 거미줄은 거미의 생존 필수 아이템으로서 그들 생존과 번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루이틀 한달두달 거미줄에 걸린 곳에서 다음 거미줄 걸린 곳까지 거리를 가늠하며 거미를 관찰하면서 보니 매일 먹을거리가 충분하게 잡히는 게 아니였다. 비가 여러 날 오게 되면 공치는 날이 많았고 또 바람이 몹시 불면 거미줄이 휩쓸려 날아가기도 했다. 어쩌다가 큰 나비나 잠자리 같은 것이 걸리면 그 엄청난 몸뚱이를 얽어매느라고 죽을힘을 다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거미에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노력과 인내, 치밀함이 있었다. 집을 짓는데 몇시간, 먹이감을 기다리는데 기나긴 시간, 먹이를 독으로 죽이고 소화시키는 시간, 거미의 인생에서 그만큼 한시간을 투자했기에 거미들은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미의 치밀함, 빈틈없는 거미의 사냥솜씨를 피해가지 못한 곤충들의 말로가 비참하다. 우리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가? 옳바른 목표와 행동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완성을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마친 후 자신의 인생설계, 삶의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의 목표는 사회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거미의 치밀함이 보여주다 싶이 내 안에서 발견하는 목표가 되여야 하지 않을가?     요즈음 길거리에 나서면 턱턱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 보면 길게 늘어지면서 감겨오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너무 싫다. 머리에 얼굴에 몸에 징그럽게 달라붙고 엉켜붙는다. 거미줄보다도 더 미세하여 아예 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눈에 거슬리는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몸에 걸리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거미처럼 목숨을 잇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저 즉흥적이다. 자기만의 리익을 위한다거나 거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편의와 만족을 위해서라면 남이야 어떻든지 당장만을 고집한다. 배려라고는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한다. 노력이나 땀 흘림이라고는 없이 빨리빨리 욕망을 채우려 한다. 어쨌든 내가 좀 앞서야 직성이 풀리니 허풍이 득세를 한다. 가는 곳마다 알게 모르게 쳐놓은 줄에 걸려든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 자신도 사회가 제시하고 조장하는 삶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은 아닌지…     외가닥 같은 거미줄에 벌써 애벌레가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곡예라도 하는 듯싶다. 그물에 맺힌 이슬이 반짝거렸다. 이슬방울 옆에 어쩐지 내 마음을 살짝 걸어놓고 싶다.    기다림이라는 인고의 시간 속에서 ‘치밀함’이라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거미, 그 어떤 실보다 가늘게 반짝이는 ‘덫’을 놓고 수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거미줄너머로 포식자가 아닌 기다림을 느낄 줄 아는 생명이 보인다.  
5    [수필] 하수도 (안수복) 댓글:  조회:313  추천:0  2017-08-21
수필 하수도 안수복 가게일이 한창 바쁜 시간대인데 불시에 하수도가 고장났다. 위생실에 들어갔던 손님들이 차마 못볼 것을 본 것처럼 입을 싸쥐고 아우성을 치며 되돌아나왔다. 주방바닥도 둥둥 떠다니는 채소찌꺼기와 음식찌거기들이 ‘배놀이’를 했다.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에서 한창 손님들이 주문한 료리들을 볶느라 땀벌창이던 남편은 급기야 팔소매를 걷어부치고 하수도덮개를 열어젖힌 후 비상용 장비로 하수구 속을 뚫어대느라 한참을 역사질 했으나 헛물만 켰다. 집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였다. 더구나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염천이라 24시간 에이콘을 작동했음에도 오물이 주방과 화장실 배수구로 역류하여 코를 찌르는 더러운 악취가 가게 안을 진동했다. 음식점을 경영하다보면 궂은 일이 자주 발생한다. 전기나 수도가 갑자기 끊기거나 가스가 떨어지는 일, 랭장고나 전기밥솥 같은 것들이 고장나는 일… 선풍기나 주방과 화장실의 배연기도 곧잘 고장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수도가 막히면 음식점 주방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된다. 하수도사건은 끝내 전문업체의 수리공이 와서 고압세척을 해서야 겨우 끝을 보았다. 주방과 화장실 하수가 막히면서 방안 가득 고였던 오물들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썰물 빠져나가 듯 졸지에 말끔하게 빠져나갔다. 수리공은 하수도가 막히는 원인은 일반적으로 하수관 내부의 기름때나 오수침적물, 토사, 모래, 자갈 등 퇴적물이 물의 흐름을 막아서라고 볼 수 있지만 특히 음식가게들이 밀집한 구역에서 주요한 원인은 곧 주위의 양꼬치 구이점들에서 늘 소고기와 양고기를 손질하고난 물을 버리면서 기름찌꺼기가 비누같이 응고되여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하수도 구멍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쿠렁쿠렁… 시원하다는 듯이 하수물이 소리를 치며 쏟아지고 하수도가 뚫리니 체증이 뚫린 것 같아 내 마음에도 상쾌함이 들었다. 살다보면 무슨 일이나 다 중요한 것 같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수도처럼 우리에게 참 중요한 기능을 해주는 것들은 더없이 중요하다. 제대로 기능을 하는 하수구를 두고 우리는 늘 그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러나 허드레 물이 내려가지 못하면 당장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수는 가정과 사업장에서 버리는 더러운 물과 화장실의 분묘뿐 아니라 거리의 비물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당장 하수도가 막힌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것은 당장 오염된 물이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먹을 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수도를 막고 있는 물질이 계속되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나가 페수처리장을 망가뜨린다면 이 건 더는 페수가 흐르지 않는 문제로 끝나지 않고 깨끗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상수도를 오래동안 깨끗이 사용하려면 오염을 막고 로페물 축적에 의한 상수도 막힘을 예방해야 한다. 좋은 물은 과거로부터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이런 필요에 의해 인류는 상하수도라는 시스템을 발명했고 오염된 물을 정화해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상하수도 시스템은 인류의 건강증진과 깨끗한 도시환경을 이루에 낸 획기적인 발명이다. 놀랍게도 수천년전에 이미 현재의 비슷한 형태의 상하수도 시설이 설치되여있는 것을 고대유적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대 로마시대에서도 하수시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도시 전체가 하수관로를 만든 지혜를 창출해냈다. 로마제국이 건설한 대부분의 고대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설치되여 있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가 형성되였던 중세유럽에서는 깨끗한 식수원오염방지가 큰 과제였고 상류하천의 오염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발 아래,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아래 온갖 오염물이 고여 썩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거두는 일에는 온갖 신경을 다 쓴지만 정작 우리가 쏟아낸 물들은 다 어디로 갈가? 몸을 씻은 구정물과 공장페수 그리고 분뇨는 결국 누가 품는가? 하수도 덮개를 열면 매일 청소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 들어가는지 머리카락이거나 음식찌꺼기가 도관구멍을 덮고 있다. 시대가 급변하고 우리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반면으로 너무 많은 오염이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하수시설은 그렇게 윤택하지 못한게 사실이다. 내 집 하수구가 막히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긴급수술이 필요한 응급환자보다 더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장이 좋지 않아 오줌길이 막히면 큰 고통을 받고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과 같다. 요즈음 나는 매일 의사가 환자의 몸안에서 수술칼로 종양을 제거하 듯 하수도 도관을 깨끗이 청소하군 한다. 똑 같이 우리도 삶 속에서 막힌 것, 오랜 세월로 더러워진 관계는 깨끗이 씻어내야 그래야 다시 새롭고 신선한 관계가 일어나는 법이다. 좋은 삶은, 진정 의미있는 삶은 깨끗한 인간관계. 감정관계에서 비롯되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생도 하수도 관리를 하듯 매일 점검해야 한다. 삶이 때때로 상수도로 갈 것인지 아니면 상수도가 아닌 하수도의 인생을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문득 하늘 복은 땅에서의 용서와 련결돼 있으며 하늘과 땅, 우와 아래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더욱 느낀다.   연변일보 2017-8-17  
4    고향역 댓글:  조회:414  추천:0  2014-12-12
고향역    □ 안수복              봄비가 놀다간 가지끝에서 연초록 솜털잎이 새로 돋던 지난 초봄이였다. 여직 홀아비로 고향마을에 눌러 살던 동창생이 한국으로 출국한다기에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눈길이 음식점 맞은켠에 미치는 순간 철퍼덕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옛날 도회지 못지않게 인산인해를 이루던 기차역이 아니던가? 그런데 노란 페인트칠을 한 정다운 기차역건물은 온데 간데 없고 그옆에 줄느런히 들어앉았던 영화관이나 백화점, 랭면집들도 그 성스런 이름을 고스란히 잃은채 무도한 겨울 발굽에 짓밟힐대로 짓밟힌 황량한 들녘처럼 스산하다. 원래의 네개 향진을 합병하여 한개 진으로 만들다보니 십여년전에 촌으로 탈바꿈한것은 진작 알고있었지만 꽃이 벙그는 소리가 들리고 내물이 목청을 푸는 화창한 봄날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살풍경이다. 고향의 정다운 노란 기차역, 왕복 16리 길을 걸어 학교로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푸르른 예지와 샘물 같은 에너지를 심어주고 그리움을 안겨주던 환상의 세계였다. 비가 와 질척거려 진흙이 신발에 찰떡처럼 묻어다니던 그 세월, 학교를 오갈 때면 꼭 지나야 하는 기차역이기에 두줄기 철길을 따라 암기숙제랑 하며 걷다가도 안개 피듯 피여오르는 정다운 노란 건물이 안겨오면 어느새 학교문앞에 다달은듯 금방 새 힘이 솟고 가슴 뛰던 환희의 기쁨역이였고 잊지 못할 추억의 소중한 기차길이였다. 고향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린 나는 고향 기차역신세를 톡톡히 봤다. 매번 산전검사를 하러 다닐 때마다 기차를 타고 30리 떨어진 룡정시부유보건원에 다녀왔는데 어리무던하고 살뜰한 남편이 상감마마를 모시듯 자전거로 역 마중, 님 마중을 해서는 역부근 랭면집에서 한그릇에 35전씩 하는 시원하고 쫄깃한 랭면 한사발 뚝딱 해치우는 재미에 꿀처럼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내던 아름다운 추억의 향수역이였다. 고향사람들은 약혼사진을 찍어도, 어린애 백날사진을 찍어도 무조건 기차역부근의 사진관을 리용했다. 우리 부부도 감미로운 20대 청춘을 자랑하며 당시 류행하던 까만 양복차림으로 기차역을 배경으로 채색사진을 남겼다. 파마도 기차역부근에서 하는것이 류행이였다. 스물세살 꽃나이에 첫날각시파마를 하고 수줍게 기차역부근을 빠져나오는데 멀리 심양에서 조카의 결혼식에 참가하려고 기차에서 내려 걸음을 재우치는 로인과 동행했었는데 시고모님이실줄이야! 기차역은 늘 고향을 떠나고 찾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꽃분이언니는 그 기차를 타고 동경성으로, 쌍가마언니는 목단강으로 시집갔다. 인물 곱고 맘씨 착한 나의 둘째언니도 고중을 졸업하고 성건축공사에 출근하는 남자를 만나 자치주 수부 연길시로 시집갔다. 나와 두 동생은 언니가 집에 올 때마다 가만히 마을을 빠져나와 역으로 마중갔었는데 기차역은 언제나 만원이였고 노란 민들레꽃 피여나고 푸른 버들강아지가 춤추는 고향길은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붐벼 즐겁기만 하였다. 고향역은 고향사람들의 성지였다. 웬만한 기차는 다 멈춰서는 너무도 수수한 간이역이였지만 평강벌의 교통요충지였다. 농망기가 지나면 고향사람들은 기차에 앉아 북경유람, 경박호유람, 해남도유람을 떠났고 한가할 때면 왁자한 기차역부근의 음식점에서 술추렴을 하는것이 일상사가 되였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날은 마을사람들의 일대 경사날이였다. 갓 건져 올린 물고기 같은 마을의 젊고 예쁜 색시와 터밭에서 금방 따낸 오이처럼 풋내음이 나는 처녀들은 연지곤지 찍고 한창나이 들뜬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고 버들피리를 불기에 신난다. 봄마당에 갓 까난 삐악거리는 노란 병아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장난감기차나 춤추는 인형을 안고 더없이 즐거워했다. 지금은 쩍하면 택시를 타지만 그때 고향사람들은 기차역까지 7,8리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녔다. 어쩌다 길가에서 소수레를 만나면 소등을 살짝 갈기던 어진 소몰이군의 버들채찍소리가 얼마나 귀맛 좋고 신나던지… 그런데 눈앞의 고향역은 너무도 쓸쓸하다. 번영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고작 나무 몇그루 서있는 한적한 공터로 변했다. 마을사람들이 다 떠났으니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는 인적이 없다. 실로 억이 막히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다. 마을앞 내가에서 개울에서 내기라도 하듯 챙챙 울리던 녀인들의 귀맛 좋은 빨래방치소리와 자기 얼굴 다듬듯 안마당 뒤켠이나 널찍한 뒤뜰 볕바른 한켠에 장독대를 씻고 닦아 삶을 맛들이던 이 땅의 가장 진하고 감동적인 고향의 상징이던 어머님네 모습을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수 없다. 나는 애써 웃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그런데 웃음대신 난데없이 싱싱한 무청처럼 쑥쑥 암종이 똬리를 튼 부패한 트림이 올라왔다. 내가 다니던 모교도 이젠 한물이 간지 오래다. 금방이라도 교실문을 박차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올것만 같은, 수많은 대학생을 배출한, 천여명의 학생들을 자랑하던 모교가 지금은 겨우 30여명 학생이란댜. 지금 내가 머물고있는 고향마을을 품은 진거리도 규모가 꽤 큰 소도시로 탈바꿈하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너무도 모자라고 맛이 가고있다. 건물은 나날이 더 즐비해지고있지만 대신 가게는 날마다 줄어들고 조선족 수는 손을 꼽을 지경이다. 시장에서도 더는 웃음 띤 얼굴로 터밭에서 따낸 떡호박이며 김장고추, 줄당콩이며 손수 담근 된장을 팔던 착하고 정겨운 조선족아줌마들을 만날수 없다. 금년 한해만 해도 조선족이 경영하던 규모가 제일 큰 음식점 두개가 살그머니 문을 닫았고 크고작은 조선족가게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빈 간판들만 너덜너덜하다. 모두가 덕대돈만 바라보고 놀지언정 푼돈을 바라지 않는다. 200여호를 넘던 중심시장은 80호도 되나마나하다. 나는 멍하니 두줄기 기차길을 바라보았다. 철로옆 봄을 맞은 나무에서 애기손톱만한 나무잎이 돋아나고있다. 언제인가 떠났던 고향사람들이 이 기차길로 돌아오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새순으로 고향을 단장하는 한포기 그루터기도 못 되는것이 못내 한스럽다.  연변일보    
3    팔 베 개 댓글:  조회:1055  추천:10  2013-10-11
팔 베 개 창문으로 부드러운 달빛이 비쳐들어오는 포근한 밤입니다. 밤하늘의 별무리들도 깜박깜박 조으는 깊은 밤 우리 부부는 팔베개를 하고 별처럼 소곤거립니다. 잠자리라야 겨우 성냥갑만한 가게 한쪽 구석을 차지한 칼날(길이 2메터, 너비 1메터)만한 좁은 침대에 누웠어도 출국꿈 한번, 출세 한번 모른채 행복을 꿈꾸는 우리 부부랍니다. 남들은 돈을 벌면 번쩍번쩍 자가용을 굴리고 별장도 척척 사지만 그냥 푼돈벌이에 목을 맨 우리 부부랍니다. 남편의 팔베개를 베고 자야만 잠이 온다는 행복한 비명에 친구들은 닭살이 돋는다며 같은 침대를 쓰면 좋은 점이 있지만 불편한 점이 더 많다고 야단을 칩니다. 코골이, 이갈기, 이불쟁탈전, 몸부림, 자다가 화장실 가기, 상대방 밀어내기 등등 리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솔직히 남편 얼굴 맞대고 남편이 내여준 팔베개를 베고 한치의 틈도 없이 꼭 붙어서 자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부부는 팔베개를 해준 고마운 대가로  목과 팔이 뻣뻣하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날 때도 있지만 사랑병인지 치료베개인지 인젠 팔베개가 없으면 한시도 잠들지 못합니다. 때론 부부의 청청한 하늘에 까닭모를 흑구름도 몰아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별이 빛나고 무지개가 비낀 하늘만을 선사하는 팔베개, 흐르는 세월속에서 자리지킴이나 하는 침대우의 베개는 색이 날고 수명을 다한데서 바뀌기를 반복했지만 결혼 20여년간 더 살뜰하고 더 폭신해진 팔베개, 여직 각방하거나 침대를 따로 쓴적이 없습니다. 뜨개소처럼 뿔이 빠지게 싸운  날에도, 빚더미에 눌리워 기를 펴지 못할 때에도, 억울함에 죽고만 싶을 때에도… 손꼽아보니 당신의 팔베개와 함께 보낸 나날도 어느덧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당신의 팔베개는 묵묵히 자신을 헌신하며 타박 한번, 불평 한번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로 높아가는 인간의 채울수 없는 욕망과 탐욕때문에 당신의 팔베개는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때는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별장과 자가용이 딸린 지체 높은 팔베개나, 벼슬과 권력을 겸비한 품위 높은 팔베개가 각광을 받을 때였습니다. 지지리도 못난 당신의 팔베개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매서운 비난을 받을대로 받았지만 자라처럼 움츠러들거나 게걸음칠 대신 자기만의 소유한 잠재력과 한낱 꾸미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열심히 노력을 경주하여 드디여 자신을 과시하고 인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당신, 기억하세요? 그날은 찬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을씨년스러운 날이였습니다. 전 그날을 영원히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날은 당장 도시인이 된것처럼 시골에 있던 밭과 집을 헐값으로 처분하고 시장바닥에서 닥치는대로 김치장사도 하고 락화생이나 해바라기따위들을 되넘겨 팔던 우리 부부가 요행 찾은 직업―우리 가족의 희망이고 명줄이던 몸담고있던 백년대계 대기업―쇠줄공장이 파산을 고하는 날이자 당신과 내가 아빠, 엄마가 되는 성스러운 날이기도 했습니다. 오직 팔베개를 해주는것외에는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당신은 새 생명의 탄생으로 생기를 띠는 병실의 축하분위기와는 달리 침울한 기분으로 출입문을 향해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떼였습니다. 홀연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발길을 돌려 안해를 병실벽쪽을 향해 돌려눕혔습니다. 그날, 안해는 병실의 차가운 벽만 바라보며 서럽게 서럽게 울었습니다. 당신이 병실문을 나서서야 안해는 꿈에서 깬듯 당신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차가운 벽은 안해를 고독하고 쓸쓸하게 만들었지만 안해가 혹 상처를 받을가 문을 나서는 그 순간에도 안해의 마음을 배려한 당신의 자상함은 안해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사실 당신은 그 시각에도 바보같이 길바닥에서 인력거를 끌어야만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수 있는 밑바닥인생을 살고있는 처지였지만 대신 병실이 떠나갈듯 황후마냥 떠받들리우는 다른 산모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볼 안해의 서글픈 마음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을뿐이였습니다. 홀로 병실에 쓸쓸히 남겨질 안해가 상처를 받을가 왼심을 쓰는 남편이 있어서 안해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비록 권세도, 재부도 없는 당신이지만 당신한테는 샘처럼 퐁퐁 솟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과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뜨거운 팔배개가 있어 지금까지 우리 부부가 무난히 삶의 길을 헤쳐왔나봅니다. 솔직히 별로 이쁜데가 없는 투박하고 목석같은 당신의 팔베개는 시대와는 많이 처진 한낱 보잘것없는 때지난 “고물”에 지나지 않지만 진실과 충성, 사랑과 의무라는 매력을 지니고있어 부부 수면질을 한결 높여주고 부부정을 더 돈독히 합니다. 어찌 보면 팔베개는 가정행복의 모티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가정을 이루는것은 자고 깨고 나가고 들어오는것이 아니라 애정의 속삭임과 리해의 만남이기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두루 살펴보면 팔베개가 있는 가정들은  팔베개를 “출국”시킨 가정보다 더 삶의 질이 높을뿐더러 리혼률, 리산률이  낮습니다. 상처와 아픔은 팔베개에서 사라지고 왕궁도 부럽지 않고 돈도 그다지 위세를 못 부리는 그렇게 좋은것이 팔베개이기때문입니다. 팔베개에는 또한 부부의 희노애락(喜怒哀乐)이 담겨져있어 부부가 한통속이 되는 “부부일심동체”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아무리 전면적인 교육기관이나 각종 보호시설이 잘되여있다 해도 가정―가족의 기능을 대체할 팔베개보다 더 좋은 기관은 없을것입니다. 팔베개는 또한 금전으로 환산할수 없는 생산성을 지니고있어 부부의 팔베개 한번이면 모든것이 원상복구되는 신비한 힘과 신통력도 지니고있어 부부금슬이 더 윤택해집니다. 아마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것이 팔베개의 원동력일것입니다. 힘들 때, 지칠 때 어디 한번 팔베개를 해보세요! 모든 번뇌와 근심은 구름처럼 밀려가고 기쁨, 환희, 즐거움이 배로 넘칩니다. 팔베개는 또  바다와도 같은 너그러움을 지니고있어서 오막살이 초가에 사는 농부에게도 고층빌딩에서 으시대는 신사에게도 또는 광산에서 석탄캐는 광부에게도 똑같이 사랑을 주고 애정을 키워주며 짙은 가족향기를 물씬 풍겨줍니다. 오늘날에 집은 더 커지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되려 가족은 더 적어지고 이웃을 만나기가 더 힘들어진것은 다 팔베개가 “출국품”으로 둔갑했기때문입니다. 진정 팔베개가 있는 가정이란 손을 꼽을수 있는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살다보면 “궁전속을 거닐지라도 내 집만한곳은 없다”고 세상 그 누구를 막론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귀속은 가족이며 팔베개는 부부의 특혜이고 통행증입니다. 지나온 세월, 돌이켜보니 당신의 팔베개는 비바람에 삐걱거리는 우리 가족에 단비를 뿌려주고 평화와 행운을 가져다주었을뿐만아니라 애정밭에 피여난 부부꽃을 더 아름답게, 더 찬란하게 가꿔갑니다. 만약 이 세상에 금산, 은산을 가져다주는 베개가 태여난다 해도 부부의 팔베개와는 비기지 못할것입니다. 신비한 치료와 신통한 효험을 가지고있는 만병통치 팔베개, 팔베개에는 부부의 청춘과 정열, 사랑과 애정, 분투와 희망, 노력과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2    창문을 열었다 댓글:  조회:1176  추천:0  2013-06-03
창문을 열었다 ●안수복(화룡)   이른아침,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여났다. 무의식중에 손으로 더듬어보았더니 남편자리는 비여 있었다. 잠을 확 깬 나는 소리나는 쪽에 귀를 귀울리며 잠옷바람으로 살금살금 도적발을 옮겼다. 남편은 2층 베란다에서 붙어 겨우내 창문을 봉했던 비닐박막을 뜯어내고있었다. 아, 라이라크향기! 나는 취한듯 바깥풍경에 푹 빠졌다. 늘 보는 풍경이였지만 5월을 맞은 봄날은 어딘가 달랐다.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타래치던 보이라 굴뚝은 숨을 죽이고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행인들의 옷차림은 울긋불긋해졌다. 파란색 학생복을 떨쳐입은 학생들은 웃고 떠들며 파란 뒤산언덕에 자리잡은 학교로 줄달음친다.… 넋없이 창문에 마주서있노라니 거의 감금된 생활이나 다름없던 지난 3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지난 3월초, 음식점에서 한창 바삐 돌던 나는 기름투성이로 흥건한 주방바닥에 미끌면서 어쩔사이없이 뒤로 넘어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손가락도 움직일수 없는데다가 손등이며 손가락, 손목부위가 팅팅 부어 가뜩이나 침울한 내 심신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살거죽은 날로 거멓게 죽어갔는데 꼭 마치 터실터실한 소나무껍질 같았고 손목은 축 처져 폭설에 부러진 나무가지를 련상시켰다.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 시누렇게 찌뜬 손톱과 손가락마디들은 저리고 아픈데다가 까딱 잘못하면 종신불구로 될수도 있다는 주위의 사람들의 뒤공론에 처량한 손목을 부여잡고 안타까운 눈물만 홀로 흘렸다.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나는 뒤늦게야 이웃의 권고로 골과에 용하다는 병원을 찾았다. 손등의 타박상외에는 별 이상이 없다던 지방병원의 진단과는 판판 달리 손등의 뼈가 금이 간외에도 세손가락뼈를 상하고 탈골까지 했다는 무서운 진단이다. 의사는 이미 황금치료시간을 많이 늦추었지만 천만다행이라면서 뼈마디를 주물러 탈골, 골절된 부위를 다시 고정하고 중약을 떼준다. 뼈를 주물러 맞출 때의 그 숨넘어가는 고통과는 달리 그날부터 죽은 사람의 손처럼 뻣뻣한 손가락을 좀씩 움직일수 있게 되였다. 실로 다행이였다. 오늘 창문을 열어서야 저 앞뒤집 꼼지락거리며 살아가는 이웃들을 바라볼수 있듯이 나는 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다. 저 이웃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떨어질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라는것을 느꼈다. 갑자기 거리가 북적거린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쏟아져나온 인파와 차량들이 더 늘어나더니 장터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을 물샐틈없이 메운다. 그제야 오늘이 큰 장날이라는것이 생각났다. 그동안 (이제 손을 못 쓰면 종신불구가 될터인데 돈을 해선 뭐하랴)는 짧은 소견에 가슴앞에 드리운 붕대에 감긴 손이 창피하다는 구실로 영업시간에만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고는 들이구실 하다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또는 장날인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를 통 모르고 지내왔던것이다. 《갓 캐온 민들레와 쇠투리입니다. 곰취, 들잎, 냉이. 달래, 물쑥도 있습니다.》 소리나는 쪽을 내다보니 한 농촌아주머니가 음식점문앞에 봄냄새 물씬 풍기는 먹음직한 산나물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사구려를 부르고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푸르러지는 가로수처럼 황페해지고 얼었던 내 마음의 밭에도 새들이 우짖고 새순이 돋아나고 촐랑촐랑 시내물이 흐르고있었다. (오십고개가 달라. 넘어져도 뼈부터 상하니. 식당을 해서 20년동안 수없이 넘어지고 부딪쳐도 아무 탈 없고 기껏해야 파스로 에때울뿐 병원을 모르고 감기약 한알 안 먹고도 잘 버텼는데…) 기실 난 모든것을 나에겐 영영 오지 않을것 같던 오십고개에 돌렸고 원망하고 저주했으며 좋은 세월이 다 지났다고 저도모르게 슬그머니 삶의 동아줄을 놓았었다. 그 누가 나의 신상을 알가봐 전화두절, 출입금지하고 죄없는 남편만 달달 볶았다. 덕분에 2개월이 다 가도록 병만 키웠을뿐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만약 마음의 문을 꽁꽁 닫지 않고 저 열린 창문처럼 활짝 열어놓았더라면 파란 하늘이 비낀 세계를 내다보았을것이다. 화창한 5월은 나한테 인생 50은 다만 인생 후반전의 시작일뿐 아직도 꿈꾸는 청년이라고 속삭인다.
1    진달래와 렬사비 댓글:  조회:1088  추천:2  2013-04-09
 진달래와 렬사비 안수복 4월중순의 아름다운 봄날이다. 등산도 할겸 약초도 채집할겸 나와 남편은 친구부부와 함께 화룡시 문화관광명승지인 서성진달래기지를 지나 와룡산 정상에 올랐다. 백번 듣는것이 한번 보는것만 못하다고 말로만 들었던 와룡산은 말그대로 그 기묘함과 아름다움으로 《갑》속에서 빠져나온 불청객들을 몇번이고 혼절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 멀리 멋진 산천경개 바라보니 눈에 비껴들어오는 한뙈기의 밭, 한줄기의 강물, 한그루의 나무, 한채의 집들이 그렇게도 정다울수가 없었다. 더우기 소나무, 가둑나무, 피나무, 물푸레나무, 개암나무와 이름모를 초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숲속에서 발목을 사로잡는 융단같은 락엽을 밟노라니 깎아찌른듯한 절벽틈서리마다 활짝 피여난 진달래가 이 가슴을 뭉클하게 할줄이야! 난 약초를 캐다말고 봄바람이 하느작거리는 연분홍빛 진달래꽃잎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엄마의 모습같았다. 이 나라 강산을 지키기 위하여 참군한 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돌로가 아니라 바위돌로 변한 열여덟 청춘의 어머니, 그 애절함이 꽃이 되여 바위틈에 피여납니다. 송이송이 진달래꽃으로 말입니다. 산천초목 푸르렀다 누르렀다 10년 세월 흘렀어도 초소의 병사마냥 엄마의 님마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른 봄 꽃샘추위에도 꽃망울 터치며 벼랑가에 곱게 핍니다. 아,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하얀 렬사비가 보입니다. 이 나라 강산을 위하여 피흘려 싸운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입니다. 10년을 기다렸건만 하얀 비석되여 마을에 돌아온 님, 야속하다 할가 진달래꽃은 바람에 흐느낍니다. 1946년, 열여덟살 되는 엄마는 범박골에서 화수촌에 살고있는 동갑내기한테 시집갔다. 그런데 군대모집이 나오는 바람에 결혼해 열흘만에 남편이 참군하게 되였다. 전쟁시기라 남편의 입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색시인 엄마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차바곤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렬차가 곧 떠나게 되였다. 시부모님들과 남편전송을 나온 엄마는 부끄럼으로 하여 고개를 살풋이 떨어뜨린채 《임자, 미안하오, 결혼하자마자 참군해서… 꼭 기다려주오.》하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조차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단다. 남편이 차바곤에 오를 때는 올려다보아도 눈앞이 뿌옇게 흐리며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엄마는 끝내 떠나는 남편의 모습을 똑똑히 보시지 못했단다. 그때 엄마가 어찌 알았으랴. 그날에 본 남편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줄을… 그날, 떠나가는 남편한테 《무사히 돌아오세요.》라는 말 한마디만 남겼어도 살아생전에 그렇게 가슴을 잡아 뜯지는 않았으련만 그것이 가슴에 못으로 박혀 엄마에게 평생의 회한을 남겼단다. 《뿡뿡…》렬차가 달리기 시작해서야 엄마는 미친듯이 손을 저으며 철길을 따라 한정없이 내달렸단다. 《여보, 순이가 사랑합니다.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눈물에 젖은 엄마의 웨침이였건만 요란스레 달리는 기차소리에 남편이 들을리 만무했다. 1948년 장춘전역이 시작되자 남편소속부대에서 가족면회를 오라는 통지가 왔다. 너무도 그립고 보고팠던 남편이지만 시어머니가 떠나는 바람에 엄마는 까딱 내색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울기만 하셨단다. 장춘전역이 끝나고 전국이 해방되였지만 남편소식이 묘연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10년을 시어머니와 함께 한구들에서 먹고자고 일하면서도 엄마는 불평 한마디 안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간부차림한 사람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엄마가 사는 집에 들어서더니 남편의 렬사증을 내놓더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엄마는 당장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단다. 《여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한쪽 다리, 한쪽 팔, 한쪽 눈이 실명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서 돌아와주면 안되나요? 결혼해서 열흘만에 떠나간 당신이 이렇게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무정하게 떠나가다니요?》 실로 너무나도 비참한 엄마의 모습이였단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허탈감에서 나날을 보내던 엄마는 자상하고 부지런한 아버지한테 재가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했으나 엄마의 속에는 재가 내려앉았다. 군인남편이 세상뜬것만 하여도 가슴이 찢기는데 1985년까지 엄마가 렬사안해대우를 받지 못했다. 당초에 남편렬사증은 시어머니가 챙겼는데 그들이 세상뜨면서 잃어졌던것이다. 군인남편생각에 엄마는 늘 가만가만 눈물을 흠쳤다. 자식들은 엄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 상관부문에 사처로 뛰여다닌 끝에 끝내 엄마로 하여금 렬사 안해의 대우를 받게 하였다. 우리는 렬사증을 엄마의 눈길이 제일 잘 미치는 바람벽에 정중히 모셔놓았다. 생전에 엄마는 시간만 있으면 우리에게 군인남편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쩍하면 눈물을 찔끔 쏟군 했다. 《엄만 왜 아버지를 따돌리고 하필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군인남편을 떠올려요?》 자식들의 말에 엄마는 《열흘밖에 함께 못살았어도 우린 부부였어. 하물며 우린 이팔청춘 꽃나이에 만나 서로 순정을 바쳤는데…》 엄마의 그 말씀을 우린 결혼해서야 비로소 리해하게 되였다. 사랑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1982년 7월부터 엄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것이 돌아가실 때까지 변변히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해마다 《8.1》건군절이면 렬사남편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혁명렬사기념비를 한번도 빼놓지 않고 찾아갔다. 오래동안 서있을수 없는 엄마는 자식들의 부축임을 받아가며 번마다 택시에 앉아서 갔는데 차멀미를 하는 바람에 한번 렬사비에 갔다오시면 며칠씩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일년 365일중 엄마의 정서가 제일 좋은 날은 바로 《8.1》건군절이였다. 엄마 말을 빈다면 남편을 만나러 가는 날이였으니깐. 생전에 엄마는 텔레비죤에서 군인이 나오면 자기 남편같이 생겼다며 끄지 못하게 했으며 영화주인공과 함께 울고불고하시였다. 어느 날인가 문득 들어설 남편의 모습을 엄마는 늘 꿈속에서 본다고 하였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2000년 3월에 엄마는 겨우 걸음을 옮겼다. 아직 5월인데도 엄마는 《8.1》절 근심을 하신다. 《금년에 마지막 해가 되겠는지 상차림과 차를 준비하거라. 누워 가더라도 마지막인 셈치고 렬사비에 기어이 가야겠다.》 어느덧, 눈시울이 젖어든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모습이 너무도 안스러워 근심말라고 하였다. 엄마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2001년 5월에 병이 악화된 엄마는 사랑하는 우리 오남매를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림종시 엄마는 남편의 렬사증을 좀체로 손에서 놓을 념을 하지 않고 군인남편과 만날수 있도록 골회함을 안장하지 말고 하늘로 날려보내라고 하셨다. 아마 58년동안이나 군인남편이 그리워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엄마의 골회가 바람에 실려 하얀 렬사비 바라보이는 이 벼랑, 이 바위틈마다에 그리움 안고 진달래꽃으로 피여났으리라. 주위가 진달래꽃으로 둘러싸인 하얀 렬사비, 다름아닌 엄마의 첫사랑이 살아숨쉬는 엄마의 군인남편이다. 산마다 질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는 연변의 풍경이고 이 강산을 찾아준 충혼들의 숨결이다. 생전에 늘 군인남편을 떠올려 아버지를 난감하게 하셨던 엄마, 산바람에 파르르 떠는 진달래 이파리를 보노라니 이제야 당신 마음 알것만 같습니다. 숨결도 없는 렬사비에 평생을 바쳤던 당신의 그 정성, 그 애착심을 그리고 늘 남몰래 가만히 훔치던 당신의 그 눈물까지… 유난히 좋은 이 봄날, 저 마을을 낀 산자락에 자리잡은 렬사비가 따사로운 해빛을 받아 눈을 부십니다. 아마, 세월이 가도 더 짙어가는 그리움 못잊어 여느 해보다 더 일찍, 더 화사하게 활짝 핀 진달래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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