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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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의 퇴직이 확정되기까지
2009년 05월 26일 13시 26분  조회:3792  추천:0  작성자: 人和

 

등소평의 만년은 활력으로 충만되였다. 1977 73세의 나이에 세번째로 정계에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년세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때로부터 눈부신 만년에 들어섰다. 그는 1997년에 서거하기까지 20년동안 중국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현대화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1989 9 4: 등소평의 사직담화

 

승용차 몇대가 번화한 거리를 지나 질서있게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서더니 한 철문앞에 멈춰섰다. 강택민 등 몇몇 중앙지도동지들이 차에서 내려 사업일군의 안내하에 넓고 밝지만 소박하게 꾸려진 집안에 들어섰다. 등소평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에게 자기의 퇴직시간과 방식에 대해 상의하자고 말하였다. 중앙책임동지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그가 퇴직하지 말것을 바랐기때문에 변명하려 하였다.

 

등소평은 손을 저으면서 “퇴직은 이미 결정된 일이고 그러면 좋은 점도 많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리를 같이한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심정을 리해하였다. 이때는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한 제3대 중앙지도부가 건립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등소평이 키를 잡을것을 바랐기때문에 그는 인내성있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퇴직하지 않고 사업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세계에서 어떤 반향이 일어날지 말하기 어렵소. 자연법칙은 개변할수 없고 지도층도 부단히 갱신해야 하오. 퇴직이 제도로 되여야 지도층변경이동도 비교적 쉬워질거요.” 그는 퇴직은 이렇게 결정하자고 딱 잘라 표시하였다.

그는 두번째 담배를 물면서 “두번째 문제는 퇴직방식인데 이 문제에 대해선 반복적으로 고려해보았고 이미 양상곤동지와도 이야기가 있었소. 퇴직을 리용하여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것은 필요없고 좋은 점도 없소. 깔끔하고 소박하게 즉  중앙에서 나의 요구를 비준해주고 몇마디 말만 하면 되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중앙책임동지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나의 퇴직방식도 그렇고 죽은 뒤에도 그렇고 간소하게 해주길 부탁하오.”라고 말하였다.

 

등소평은 또 세번째 문제 즉 자기의 퇴직시의 직무교대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구성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는 중앙지도자들을 둘러보다가 눈길이 강택민동지의 몸에 가 멈춰섰다. “군위에는 주석이 있어야 하오. 우선 당의 군위주석을 확정하고 동시에 국가군위주석도 확정해야 하오. 나는 강택민동지를 군위주석으로 제의하오.”라고 말하였다.

 

그날 등소평은 중앙정치국에 자신이 중앙군위주석직에서 물러나고자 사직의 뜻을 적은 편지를 써보냈다. 700여자밖에 안되는 이 사직서에는 글자마다 당과 국가, 인민에 대한 로당원, 로공민의 참된 마음이 체현되여있었다. “나의 생명은 당, 국가에 속합니다. 퇴직후에도 나는 계속 당과 국가의 사업에 충성할것입니다.

 

1989 11 9: 등소평의 퇴직일

 

늦가을의 북경이다. 등소평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바깥을 내다보며 “진눈까비가 적지 않게 내리는구만. 북경은 지금 눈이 와야 될 때지”하며 감개에 젖어 말하였다. 9월 당중앙에 사직서를 바친후 그는 줄곧 자기의 퇴직을 반대하는 일부 동지들을 설복하였다.

 

11 9일은 중국공산당 135중전회의 마지막 날이였는데 회의에서는 등소평의 퇴직문제에 대하여 최후의 표결을 하게 되였다. 오전 9시쯤 판공실 주임은 등소평의 신변에 와서 한창 진행되는 회의정황, 거기에서도 중점적으로 그의 퇴직문제에 대한 토론정황을 회보하였다. 등소평은 회보를 통하여 많은 동지들이 점차 그의 퇴직에 대한 결심과 의의를 리해하는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결국 이 일이 완성되는구만.”라고 홀가분하게 말하였다.

 

가족들의 점심밥상의 화제는 자연히 등소평의 퇴직문제를 벗어날수 없었다. 등소평은 침착하게 “퇴직후 내가 바라는것은 진정한 평민으로 보내며 거리에도 나가보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참관하는것이다”고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손녀는 웃으면서 “할아버지는 정말 리상주의입니다”고 말하였다.

 

오후 3시쯤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표결을 거쳐 중앙군위주석직에서 은퇴할데 대한 등소평동지의 요구를 통과하였다.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휴식실에서 금방 회의장에서 온 중앙 각 지도자들과 악수하였다. 강택민의 제의하에 그들은 일자로 서서 진귀한 력사적순간을 남겼다. 이어서 등소평은 강택민 등 사람들의 배행하에 등불이 휘황한 대회당에 들어섰는데 순식간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그 자신도 마음을 진정시킬수 없었다. 공산주의사업과 국가의 독립, 통일, 건설, 개혁을 위해 수십년간 분투해온 로당원, 로공민으로서 이제 일터를 떠나야 했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하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마이크앞에 서서 “저에 대한 여러 동지들의 리해와 지지에 감사를 드리며 전국대표대회에서 나의 퇴직요구를 접수한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충심으로 전국대표대회와 동지들에게 감사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대표들의 가운데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이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로인과 헤여지기 서운해하며 건강장수하기를 기원하였다.

 

새로 당선된 중앙군위주석 강택민은 등소평을 배행하여 인민대회당문앞까지 바랬다. 강택민은 자기 어깨에 놓인 짐이 무겁다는것을 마음깊이 느끼면서 등소평의 손을 잡고 “후회없이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고 한마디로 자기의 심정을 표했다.

 

등소평: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력사발전에 많은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운동을 언급할 때 늘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1980년 중국공산당 두번째 력사결의때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놓고 말하면 현재 우리는 모택동동지가 이미 제출하였으나 못한 일들을 하였다. 금후 상당히 오랜 시간에도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발전이 있을뿐만아니라 아직도 계속 발전해야 한다.

 

이 말은 등소평동지가 1980 10 25일에 호교목, 등력군과 한 담화인데 이미 “등소평문선” 제2권에 수록되였다. 이 말을 개괄하면 실제로 4가지 의미를 말해준다.

 

선인들이 제기하고 구상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을 하자.

선인들이 한 그릇된 일들을 시정하자.

선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일들을 진일보 완벽하게 하자.

선인들이 접촉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하자.

 

이 네마디는 보건대 평범한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어떤 기초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력사와 현실, 계승과 발전을 봐야 하는가 하는 대도리를 제시하고있다.

 

등소평의 이 네마디 말은 새시기에 개척한 길은 모주석 그 일대가 한 일과 내적관련이 있다는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제시해주었다. 사실상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인들을 참조좌표로 한다면 후세인들이 한 일은 총적으로 이 네가지 방면의 일을 했을따름이다. 이른바 력사의 계승과 발전, 후세인들이 옛사람을 초월한다는것을 한조목 한조목씩 명확히 분석해보면 대체적으로 이 네가지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등소평은 이 네마디를 1980년에 제출했다. 1989년의 “6.9”연설과 1992년의 남방담화에서 등소평은 실천경험총화와 관련하여 또 이와 비슷한 네마디 말을 했다. 개괄해 말한다면 “맞는것은 견지하고 잘못된것은 바로잡고 부족한것은 더욱 힘을 내며 새로운 문제해결에는 다그쳐야 한다”이다.

 

《력사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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