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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초 중공실권자 왕명의 전기적인 사랑
2009년 09월 14일 10시 56분  조회:4768  추천:0  작성자: 人和

 앞줄 좌1이 맹경수이고 바로 뒤에 선 사람이 왕명이다.

 

 

왕명(王明)의 일생에는 착오도 많고 전기적인 이야기도 많다. 왕명은 한때 리립삼(李立三)의 “좌”경모험주의를 따랐지만 오히려 리립삼에 의해 철직당하고 당적을 보류해두고 관찰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그는 또 당시의 강소성당위 선전부의 일개 자그마한 간사로부터 일약 당중앙의 주요 령도자로 변신했다. 그는 “좌”로부터 극“우”로 뛰여넘었다. 그와 맹경수(孟庆树)의 사랑은 더욱더 곡절적이고 전기적이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첫사랑

왕명과 맹경수는 모스크바중산대학에서 서로 알게 되였다.1925 11 28, 왕명은 특혜를 받아 장문천, 왕가상 등 60여명과 함께 쏘련류학을 갔으며 모스크바중산대학 제1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1927, 왕명은 미꼬브교장의 눈에 들어 학교에 남아 교수를 하는 한편 번역원으로 일했다.

 

맹경수는 1911 12 2일에 안휘성 수현의 한 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7년에 맹경수도 쏘련류학을 갔으며 모스크바중산대학 제3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중국에서 온 류학생들 대부분이 나이가 어린 까닭에 련애바람이 성행했다. 당시 16살 묘령소녀 맹경수는 용모가 청수했고 몸매도 쭉 빠졌으며 성격 또한 대범하여 남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 23살나는 왕명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맹경수가 입학했을 때 왕명은 이미 학교에서 명성이 뜨르르했다. 그러나 맹경수는 그에 대해 경의와 흠모의 감정은 가졌지만 사랑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맹경수는 수시로 보내오는 왕명의 사랑신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한 남학생을 사귀였다. 그러나 마음먹으면 꼭 목적을 이루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인 왕명은 맹경수에게 남자벗이 있다 하여 물러선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1928 6, 중국공산당 제6차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미꼬브의 알선으로 왕명은 《대회》의 비서처 번역실 주임을 맡았다. 그는 이 기회를 빌어 대회에서 일할 중산대학생들을 선발할 때 락방된 맹경수를 지명해 대회사업에 참가하게 했다. 맹경수는 미꼬브와 공산국제의 신임을 받고있는 왕명이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라는것을 보아내고 원래의 남자와 관계를 끊고 왕명과 사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명의 키가 1메터 50여센치메터밖에 안되여서인지 왕명의 열렬한 사랑이 맹경수의 격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929, 왕명은 귀국할 때까지도 맹경수의 긍정적인 답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견우”의 실련

1929 3, 왕명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했다. 귀국전 미꼬브는 공산국제 동방부의 명의로 중공중앙에 전보를 쳐 왕명의 사업배치를 잘해줄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중공중앙에서는 의연히 원 규정을 견지했다. 즉 무릇 쏘련에서 돌아온 류학생들은 실제사업경험이 결핍하기에 일률로 기층에 내려보내 단련하게 하며 기층에서의 그들의 표현을 보아 다시 중앙 혹은 지방 령도기관에 배치한다. 이에 좇아 왕명은 선후로 상해 호서구위와 호동구위에서 선전사업을 맡아했다. 하지만 왕명은 이렇게 배치하는것이 인재에 대한 랭대이고 인재매몰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업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만리밖에 있는 “직녀” 맹경수를 그리면서 나날을 보냈다.

 

련정에 빠진 “견우”가 하염없이 “직녀”를 그리워하고있을 때 “직녀”가 은하수를 날아넘어 “견우”의 곁으로 왔다. 1930년에 맹경수는 귀국했다. 귀국후 그녀는 상해 호동구위 부녀위원회 사업을 맡아했다. 하여 둘은 같은 호동구위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왕명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맹경수에게 맹렬한 사랑공세를 들이댔다. 당시 왕명은 중앙의 사업배치에 불만이 있는데다가 남녀간의 련정에 빠져있었기에 사업은 응부하는 식으로 대강대강 해나갔다. 결과 그는 상급에서 맡겨주는 임무를 제때에 완성하지 못해 늘 비판을 받았다. 이로하여 맹경수의 사랑천평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끈질게 달라붙는 왕명을 따돌리려고 세집을 물리고 친구의 세집을 찾아갔다. 왕명이 맹경수의 세집을 찾아갔을 때는 집이 텅 비여있었다. 왕명은 맹경수가 쓰던 몇개의 머리삔이 땅에 버려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보물이나 발견한듯이 머리삔을 주어서 깨끗이 닦은후 사랑의 기념품으로 소중히 간수했다.

 

“안해”를 맞다

19307 9일에 열린 중앙회의에서 리립삼과 왕명이 큰 쟁론을 벌렸다. 화가 치민 리립삼은 왕명에게 “우파”모자를 들씌우고 그의 중앙선전부 비서직무를 해임시켰으며 6개월간 당적을 보류하고 관찰하는 처분을 주고 강소성당위 선전부에 내려보내 간사직을 맡게 했다.

당시 상해에서 독신남자들이 쉽게 경찰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라 집을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강소성당위 선전부 비서 리초리는 왕명에게 가짜안해를 붙여주어 엄호하게 했다. 그 가짜안해가 바로 이견(易 )이란 젊은 처녀였다.

 

1930 8, 리초리는 당조직의 명의로 이견을 성당위기관으로 전근시키고 중요한 사업을 맡겼다. 어느날 저녁 리초리는 이견을 데리고 성당위기관에 가서 왕명과 만나게 했다. 그러면서 집주인이 독신남자에게 집을 세주려 하지 않으니 이견더러 왕명의 안해로 가장하라고 지시했다.

 

하여 왕명과 이견은 “부부”로 가장하고 베란다가 달린 10여평방메터되는 작은 집을 세맡았다. 이견은 당조직과 동지의 안전을 책임지느라 노력을 다했지만 왕명은 출장이 잦아서인지 “안해”에 대해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와 사업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경력에 대해선 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왕명은 의연히 맹경수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하고 “안해”에 대해 무감각했다. 아련하고 단정한 이견은 가짜안해로 있는것이 달갑지 않았고 고독한 생활도 싫었으며 “남편”의 랭대를 받기가 더욱 싫었다. 이견은 참다못해 조직의 동의를 거친후 원래의 거처로 돌아갔다.

 

마침내 이룬 소원

맹경수가 사랑의 대문을 꼭 닫아걸고있었지만 왕명은 실망하지 않았다. 1930 7 30, 맹경수는 불행하게 체포되여 상해 룡화간수소에 갇혔다. 이는 왕명에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왕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번이나 룡화간수소에 가서 맹경수를 면회했다. 맹경수의 둘째삼촌 맹한지는 조카를 살리려고 관계를 통해 국민당관원들에게 돈과 뢰물을 보냈다. 맹경수는 마침내 1930 11 22일에 출옥했다.

 

맹경수는 왕명의 열렬하고 진실한 사랑에 감동되여 출옥한 이튿날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1~1934년 중공 최고실권자시절의 왕명

 

 

연안에서의 맹경수

 

44년을 이어온 결혼생활

왕명과 맹경수는 1930 11 23일에 결혼해서부터 1974 3 27일에 왕명이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세상뜨기까지 함께 44년을 생활해왔다.

 

44년래 왕명은 쉽지 않게 얻어온 맹경수와의 결합을 더없이 소중히 여겼다. 그는 맹경수를 첫사랑때처럼 줄곧 관심하고 사랑해주었다. 맹경수도 왕명을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왕명과 맹경수 부부는 슬하에 자식 셋을 두었는데 딸 하나와 아들 둘이였다. 큰딸 왕방니(王芳 ) 1932 1 18일에 왕명이 공산국제 대표로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 태여났는데 그는 중국어를 모르고 한번도 중국을 다녀온적이 없었다. 1937 11, 왕명부부는 쏘련에서 귀국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할 때 큰딸을 데려오지 않고 당시 공산국제총서기로 있던 지미뜨로브에게 주어 양딸로 삼게 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왕방니는 후에 녀비행사로 있었으며 1985 1 27일에 사망됐다.

 

두 아들은 모두 연안에서 태여났다. 큰아들은 왕범지(王凡芝)라고 하는데 1939년생이고 둘째아들은 왕범정(王凡丁)이라고 하는데 1945 10 2일에 태여났다. 맹경수는 두 아들을 무원칙적으로 사랑했다. 줄곧 그들을 집에 가두어두고 소학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글을 배워주었다. 큰아들은 자란후 직접 초중에 입학했는데 그것마저 며칠밖에 다니지 못하고 부모를 따라 쏘련으로 갔다. 그때로부터 두 아들은 줄곧 쏘련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모두 로씨야국적을 가지고있다. 왕범지는 군인이 되였고 로씨야처녀와 결혼했다. 왕범정은 모스크바국제관리학원을 졸업하고 쏘련과학원원동연구소에서 사업했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다. 쏘련이 해체된후 그는 10여년간 해온 원동연구소사업을 그만두고 중국무술중심을 꾸렸다.

 

부동한 출신, 부동한 경력, 부동한 성격으로 인해 왕명과 맹경수 부부도 모순이 많았다. 빈민가정에서 태여난 왕명은 집도 없고 땅도 없었으며 지어 녀동생을 남의 집에 주어 민며느리로까지 시킬 정도로 살림이 구차했다. 반면에 지주집가정에서 태여난 맹경수는 쏘련류학을 가면서 집을 떠날 때에도 참대가마에 앉아갔고 쏘련에 가서도 양옥에 들고 빵을 먹으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들 부부는 결혼후 자주 다투었는데 다툴 때마다 이웃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씨야어를 사용했다.

 

1974 3 27, 왕명은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왕명이 사망된후 쏘련정부에서는 그를 모스크바 교외의 성모공동묘지에 안장했다. 1983 9 5, 맹경수는 72세를 일기로 모스크바에서 돌아갔다. 그녀도 성모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중국알자카페/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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