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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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주일점령군 파견되지 못한 내막
2009년 04월 08일 08시 56분  조회:5769  추천:1  작성자: 人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미국정부는 중국정부에 련합군을 도와 부대를 일본에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제, 국내 형세의 변화로 하여 중국은 전승국으로서의 이 권리를 결국 상실하고말았다.


1945년 9월, 미국정부는 미국주재 중국대사관을 통해 중국정부에 공문을 보내왔다. 대체적인 뜻은 “중국정부가 부대를 파견하여 련합군이 일본을 점령하는데 협조해달라는것”이였다. 국민당정부는 당시 국내정세를 고려하여 려단규모의 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중국과 미국 쌍방은 일찍 중국주일점령군파견문제에 대하여 여러차례 협상을 하였다. 처음에 미국에서는 5만명의 군사를 요구했고 손립인이 지휘하는 신1군을 지명하여 이 임무를 담당하도록 요청했다. 신1군은 전부 미국식으로 무장했고 손립인도 미국버지니아군사학교를 졸업하였다. 손립인은 미국의 여러 장군들과 안면이 있었고 신1군은 광주에 주둔하고있었으므로 일본으로 가기도 편리했다. 국민당정부는 신1군을 파견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신1군은 당시 국민당군대에서 첫번째 혹은 두번째로 가는 전투력을 가진 부대였고 일찍 동북으로 옮겨가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되여있었다. 국민당정부는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를 국내에서 유용하게 활용하고싶었던것이다.


미국측은 다시 최소한 사단규모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 사단규모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여러번 검토한 끝에 국민당정부는 1만 5000명으로 편제된 사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결정된 부대는 1945년 12월에 하노이에 가서 항복을 받은 영예1사단으로 구성된 륙군67사단이였다. 이 사단의 사단장은 대견이였다. 이듬해 4월, 영예2사단은 남경정부의 명령을 받고 하이퐁으로 가서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련합군 총사령부가 처음에 중국주일점령군 주둔지로 정한 곳은 니아까따현을 중심으로 하는 호꾸리꾸지역이였다. 국민당정부는 니아까따는 일본의 중요한 지역도 아니고 공업지역도 아니며 산이 많고 사람이 적은 곳이여서 중국점령군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시꼬꾸를 주둔지로 해달라고 제의했다. 그곳은 대공업지역은 아니지만 완전한 하나의 섬이여서 중국군대가 이곳에 주둔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온 부대와 접촉할 일이 없으므로 관리하기 편리했다. 련합군에서는 시꼬꾸는 이미 영국군의 주둔지로 결정되였다고 중국측에 통지했다. 중국측은 다시 큐슈를 요청했다. 큐슈는 상해와 가깝기에 보급이나 련락이 모두 편리하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련합군총사령부는 아이치현을 중심으로하여 시즈오까와 미에 2개현을 포함한 곳을 지정해주었다. 아이치의 현정부소재지 나고야시는 일본의 제3대공업지역이였고 시즈오까는 농업지역이여서 주둔하기 편리한 곳이였다. 이리하여 중국주일점령군이 주둔할 곳이 정해졌으며 미군 제8군의 지휘를 받기로 결정되였다.


1946년 5월초, 장개석은 남경에서 제67사단의 사단장 대견을 접견했으며 3차례에 거쳐 련급이상의 모든 장교들을 접견했다. 5월 27일, 련합군일본관제위원회 중국대표단 단장인 주세명은 대견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들은 완전무장하고 일본에 들어가서 전승국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먼저 일본에 도착한 중국점령군 사전파견부대는 주로 련합군총사령부와 미군 제8군과 련락을 취했다. 사전파견부대는 또 중국군이 주둔할 주둔지와 부대건물현황을 살펴보았다.


대견 등은 비행기편으로 일본 아츠기공항에 도착한후 군용찌프차를 타고 도꾜로  떠났다. 6월 4일 오전, 도꾜에 도착한 대견과 주세명은 함께 련합군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을 만났다. 사령관은 대견에게 67사단의 편제장비일람표를 건네주면서 두가지 임무를 내렸다. 첫째, 미군에 각급장병의 급여수당표를 요구해서 중국점령군의 장병 급여수당표를 초안하는데 참고하도록 하라. 둘째, 자동차문제를 계속 련락해보라.


제67사단은 모두 1만 4500명인데 3개 보병련대, 1개 운수련대, 1개 전차대대, 1개 공병대대, 1개 통신대대, 1개 특수임무중대 그리고 1개의 야전군병원과 200여명의 의료대, 100여명의 선전대로 구성되였다. 그리하여 전체 사단의 급여수당은 괜찮은편이였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당시 딸라를 단위로 계산했는데 미군기준보다 장교는 30~50%가 낮고 병사는 약 20%가 낮았다. 최저급인 2등병의 매달 로임은 20딸라였다. 가장 높은 소장인 사단장은 매달 430딸라였다. 이렇게 계산하면 전체 사단의 고정된 급여수당으로 매달 50만딸라가량 수요되였다. 여기에 출장비, 교육련습비 등 각종 잡비를 포함하면 매달 적어도 200만딸라가 필요했다.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부대가 일본에 도착한후 약 1주일이 지나서 련합군총사령부 참모처는 중국측과 첫번째 회의를 가졌다. 67사단은 3가지 중화기가 있었는데 자동차가 끄는것도 있고 말이나 당나귀에 싣고 다니는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말과 당나귀 문제가 중점적으로 화제에 올랐다. 동물이 휴대한 전염병독을 막기 위해 련합군총사령부는 말과 당나귀는 반드시 해안에서 검역을 받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모든 동물들이 검역을 받으려면 대략 3~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측은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자동차를 보충해줄것을 요구했다. 중국군대가 사용하는 연료는 주로 나무장작이였는데 련합군총사령부는 일본점령규정에 따라 장작을 일본에서 징용하거나 구매할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중국에서 운송해와야 한다고 했다. 중국측에서 장작을 사용하게 되면 전 사단이 매달 450톤씩 써야 하므로 운송량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중국측은 이 상황을 국내에 보고하여 석탄과 기름으로 장작을 대체하자고 건의했다.


미군측은 련합군이 점령한 일본의 일부 법규를 추려서 중국측에 알려주었다. 첫째는 미군의 일본에 대한 통제권이고 둘째는 각국 점령군의 생활비용, 물자는 모두 본국이 부담하며 일본에서 나무 하나 풀 한포기 가져가서는 안된다.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인원은 요꼬하마에서 7월중순까지 기다렸는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장개석은 중국점령군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점령군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드는 1개사단의 비용이면 중국내에서 10개의 사단을 운영할수 있었다. 장개석이 보기에 이것은 아무런 득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공산당과의 내전이였고 모든 병력을 내전에 투입하여야 했던것이다. 장개석의 계산으로는 로남(산동남부)과 강소 태흥지구를 얻기만 하면 바로 사단을 빼내서 원래 계획대로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이 67사단은 해안, 여고에 도착한후 얼마 되지 않아 속유, 담진림이 이끄는 화동야전군에게 완전히 전멸당하고말았다.


당초 미국이 장개석에게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즉 쏘련으로부터 미국 혼자 일본을 점령하였다는 비난을 받는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군대가 전승국의 립장에서 일본에 파견되는것은 얻기 힘든 기회이며 세계에 중국의 위험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였는데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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