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선말에는 그만한 정도로 그만이라는 뜻의“그만ㅡ저만 ”이라는 단어와 쌍둥이자매쯤 되는 이만저만이란 단어가 있는데 어떤 일이나 사물에 한계가 있으므로 알맞춤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있다. 총명한 인류는 모든 일에 리성적인 절제의 필요성을 터득하였고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써왔다. 하지만 그만저만이나 이만저만으로 금을 그을수 없는것이 있으니 곧 욕망의 세계이다.
본질상에서 욕(欲)과 원(愿)은 별로 다르지 않는바 다가 심리본능이고 심리추향의 반영이다. 그러나 바램(愿望)은 취향의 청정함과 밝음의 특징을 가지고있다. 욕망의 특점은 “나의 수요”이다. 그것을 만족시키는것이 곧 욕망의 실현이다. 그래서 욕망은 “나”의 인생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나”란 기실 가설적인것으로서 불투명하다. 그만 큼 방향성이 없고 맹동적이며 무한대로 확장되기에 끝없는 회전이 된다. 욕망이 욕 망을 꼬시여 우주의 대폭발처럼 무변광대해지고 있기때문이다.
욕망의 승화로서의 탐욕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의 일종 실패작이며 제어할수 없는 원죄의 모체이다. 탐욕이 있기에 약육강식이 생겨나고 략탈이 있게 되였고 음모 술수가 생성되여 인류의 심령을 타래떡처럼 배배꼬아 비틀어버렸다.
욕(慾)자를 골짜기를 채우려는 마음을 뜻하여 조성한것이지만 생존욕과 부화사치를 위한 무지경의 탐욕은 별개의 문제이다. 보통인의 탐욕은 도를 넘은 사치스러운 욕망이라 하는데 생활본능에서 생긴다. 류리걸식자들이 때마다 배불릴것을 바라는것 도 밤뒤골목 부나비들이 육체를 팔고 그날 받은 팊을 세면서 고달픈 심신우에 달걀 가리를 가리는것도 다만 방식이 옳지 않을뿐 보통욕망에 속한다.
로임족들은 해마다 장금이 나오기를 바라고 해마다 로임이 오르기를 바라며 투기모리군들은 철창행 위험도 무릅쓰고 량심을 속여가며 백성을 해치고 장사군들은 저울을 속여 푼돈이라도 더 벌려 고심한다. 어찌해서 선택된 기득권자들은 호화별장을 짓고 문을 열고 나가면 외제고급차를 타고 속도와 부의 쾌감을 과시하려한다.
그래 맞다. 누구나 수확할 권리가 있다. 옛날, 특권계층만이 그 모든것을 독점하고 합법화하였던것은 인류의 원죄였다. 희망은 누구의 삶터에서나 넘어져서는 안되는 금빛기둥이다. 희망을 지니고 살기에 인간은 언제든 웃을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만저만도 모르고 탐욕의 광란에 곱새춤을 춘다면 섶지고 불구덩이를 돌며 춤추는것과 다를배 없다. 돈나는 모퉁이 죽을 모퉁이란 속담이 있지 아니하던가?
하긴 돈에 침뱉는놈 없고 돈소리를 하면 배안에 아이도 손을 내민다고들 하지만 탐욕을 입에 세상에 물고나온 사람은 없었다. 차차 살면서 욕망이 굵어지고 내용도 다양해지며 사람에 따라,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욕망은 굴리면 굴릴수록 커진다. 마치 돼지가 흑탕 물에서 구을수록 더욱 더러워지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천당을 들어서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지옥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제 모든것이 만족되였다고 욕망의 문을 잠근 사람은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 않았지만 소망이 할일을 남겨두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원만한 행복다음에 오는것은 불행이기 쉽다는 도리를 알고있기에 “그만”에 족할줄 안다. 육체는 숨쉬려하고 정신은 추구하려 하며 욕망은 사면팔방으로 팔을 뻗쳐 가지고싶은 모든것을 그러잡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이만저만이나 그만저만을 무시하고 넘치도록 많은것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 매양 불만족을 짓씹으며 풀풀거리는 그런 자들은 커다란 집안에도, 마음의 골방에도 가득 채워놓고도 더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소망이 있어야 희망이 숨쉰다. 돈도 재물도 권력도, 미녀도 다 가지고도 희망마저 고무풍선처럼 잔뜩 공기를 채워 벽에 걸어두둔다면 무엇을 더 바라고 살것인가? 빨리 살찐 돼지는 액운이 그만큼 앞당겨지여 료리로 될일밖에 안남은것과 같다.
탐욕이 하늘을 찌르면 정상에 오른 다음 어디로 더 오른단말인가? 달갑지 않더라도 내려야 한다. 저 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면 내려야 한다. 불원이면 일패도지에로의 비장한 희생적진군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노크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떨고있을 뿐이다. 소망이 없어지는 그 시각부터 파멸은 히쭉 웃으며 달을박질쳐 올것이다.
일세영달한 사람도 거개 욕망의 문을 닫지 못할 때 죽는다. 그것을 탐욕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탐욕심은 있으되 바보인 사람은 좋은 충고에 짓눌려 죽는다. 바보처럼 죽는다는것은 너무 많은 물욕으로인해 죽는다는것이다. 물욕이 살판치는 지금은 탐욕과 리기심이 담박한 사람을 흔히 바보라 하는데 새는 모이에 죽고 사람은 물욕에 죽는다는 규률을 알면서 탐심에 목을 맨다면 기꺼운 자업자득이다.
분별력이 너무 차해서 죽는자도 바보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령리해서 비명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소신껏 산다. 그러나 “총명한”자들은 바보처럼 죽고 소위 “바보”들은 “안빈락도”에 산다. 죽은 정승이 산강아지만 못하다는 속담을 좌우명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의 처지가 최적은 아니여도 만족하고 시대의 비린 풍조에 둔감한줄 스스로 알면서도 만족하기때문에 산다.
그만하면 지금 위치가 우러러 보이기도 하련만 이 산에서 저 산을 바라보며 더 오르지 못해 불평불만인것은 천성 어리석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탐욕이 바보로 만들었기때문이다. 사닥다리꼭대기까지 올라가서야 사다리를 왕청같은 담벽에 세웠다는것을 알게 되였을 때 어떤 심정일가? 결론은 당신이 시들해져서 내려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다. 한갈래 길의 저 끝에도 의연히 다른 한갈래길이 있기마련이다. 다만 당신이 걸으려고 하는 말이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ㅡ군자는 남과 조화를 이루되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과 군자주이부비'(君子周而不比ㅡ군자는 두루두루 살피되 비교하지 않는다.” 옛글처럼 사람마다 어찌 군자가 되련만 가득 가진것에 양양자득하는 자는 부족함을 알면서도 담박하게 웃을줄 아는 “바보”들보다 더 지독한 바보이다. 이를 두고 로자 어른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명예와 우리의 몸 어느쪽이 더 친숙한가? 생명과 재물, 어느쪽이 더 소중한가? 얻고 잃고 어느쪽이 더 해로운가? 너무 아끼면 반드시 한때 크게 랑비하게 되며 너무 많이 가지면 크게 잃기마련이다. 지금의 정도에 만족하면 욕될 일이 생기지 않고 지금 처지에 머문다면 처세에 위태롭지 않아 생활이 오래오래 안정하리로다.》로자의 말처럼 마음편히 살자면 그만저만이나 이만저만을 되새기면서 사심이 흑심으로 번지 지 않도록 다잡고 소망이 탐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게 만전지책일것같다.
중국 춘추시대에 제환공이 군주의 옳바른 처신을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며 늘 곁에 놓고 마음을 닦았던 잔이 있는데 “계영배(戒盈杯)”라 부른다.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3분의 2 이상 차오르면 전부 새어나가도록 만들어진 신기한 잔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지나침 을 경계하는 고인들의 교훈이 담겨있는 술잔이라는 의미에서 참으로 골동품중에 진귀한 골동품으로서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욕망에 좌표가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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