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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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번째 집
2019년 01월 04일 10시 32분  조회:2178  추천:0  작성자: 최상운
                                               열 다섯번째 집
 
 
     엘리베이터 집으로 이사를 온지 몇달이 된다. 새 집에 들던날 내 평생에 이런 집에서 살리라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현실이 그렇다 보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감격에 넘쳐 집안을 여러번 돌면서 훝어 보았다.
    아침에 글을 쓰다가 머리를 쉬울겸 창문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으로 시원한 강바람이 들어와 가슴이 탁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였다. 사방을 휘 둘러보니 세상 만물이 새단장을 하고 나를 반기는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우뚝솟은 멋진 빌딩들이 키돋음을 하고 있었다. 여름내 흐리터분하던 하늘은 높아보이고 바람에 실려 동으로 흐르는 꽃구름들이 마치 한해동안 쌓였던 사람들이 시름거리들을 싣고 떠나면서 “안녕”을 기원하는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은 건물의 위압이라도 받은듯이 지상에서 볼때 그렇게 높아 보이던 7층짜리 아빠트도 난쟁이 집으로 보이고 넓은길은 졻아보이고 다리와 차들은 모두 작아 보였다.  
    이멋에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집을 선호하며 엘리베이터 집에서 산다고 자랑했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나도 뭇 사람과 다름없이 엘리베이터 집에서 살고보니 세상의 모든것을 한품에 않은것 같은 기분이다. 평생 살아오면서 집을 장만하느라 고생했던 일이 다 잊어지고 이제는 안온한 생활을 누릴수 있는 행복감에 도취되였다.
    천당같은 엘리베이터 집에서 살면서 지금까지  이사를 몇번 했나? 꼼꼼이 헤여 보았다. 열다섯번이였다.열 다섯번!  내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내 인생을 동년시절, 청장년시절, 로년시절로 구분하여 보니 제일 이사를 많이한 시절은 청장년 시절이였다.
    나는 연길시 조양천진 태흥촌에서 유년기를 보내였다. 내가 10살 되던해(1954년) 연변에는 심한 자연재해가 들었다. 어려운 식량난을 피하기 위해 우리집은 둘째 이모님의 계시는 곳 흑룡강성 해림시 금산촌으로 이사를 갔다.그때까지 금산촌은 미개발 지역이였다.쌀밥에 물고기국을 배불리 먹을수 있었지만 교통과 교육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않고 주거 시설도 매우 낙후하였다. 학생이들이 생활하기는 불편한 곳이였다. 우리 집은 금산촌에 이사를 가서 세번 이사를 하였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시험을 치지 못하게 했다.그때 금산촌의 학생들은 금산촌에서 50리 떨어진 신안진조선족 중학교나 해림조선족 중학교를 다니였다. 외지 학생들은 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학비외 기숙사비만 한달에 9원이들었다. 지금돈 9원이면 작은 돈으로 보이지만 그때의 9원은 대단한 돈이였다. 둘째형님은 신안진 중학교를 다니였는데 기숙비를 내지 못하여 집에와 있었다.부모님들은 물고기를 잡아팔고 고추, 담배를 팔고 집 이영초를 팔아 자식들이 학비를 댓다. 하지만 그 수입으로는 판 부족이였다. 둘째형님이 학비와 기숙비를 대지 못하여 집에와 있는 정황하에서 내가 중학교로 갈수는 없었다. 나는 그런형편을 알면서도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지 못하게 되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으랴… 
     돈이 없어 자식들이 학교로 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들은 긴 한숨을 쉬였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앞날을 망치는것 같아 금산촌을 떠나 교육시설이 좋은 연변으로 나오기로 결정하시였다. 당시 금산촌에서는 외지호를 받는것을 환영했지만 촌민이 외지로 이사가는 것을 막았다. 아버지는 한달동안 매일과 같이 촌장을 찾아가 사정하여 끝내 천이동의서를 받아 내고야 말았다.
     내가 열 다섯살 되던해 룡정시로두구진렴명촌으로 이사를 왔다.이사를 와서 나는 초급중학교를 다니였다.
    불세로 이사를 오다나니 제집을 장만할수 없었다.처음에는 외가집에 며칠 머물려 있다가 방씨성을 가진 집의 곁방살이를 하였다. 친척도 아니고 타남인 두집 식구가 같이 산다는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이였다. 다행히 두집 식구들은 서로 양보하고 리해해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였다. 우리집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곁방살이 1년만에 초가 3간집을 지었다. 그 초가집에서 10여명식구가 16년을 함께 살았다. 내가 장가를 가게되자 부모님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 우리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
     내 나이 서른 여섯살 되던해 나는 네째 이모부님의 주선으로 농촌호적을 성시호적으로 변경하기 위하여 정든 렴명촌을 떠나 룡정시 대신저수지로 이사를 갔다. 대신저수지에 가 있은 5년동안 두번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이주호들이 남긴 초가집에서 살다가 후에는 대신저수지에서 건축한 공공주택에서 살았다. 대신저수지로 가면서 우리집 호적을 룡정시 룡문가에 올리게 되였다. 농촌 호적으로 부터 도시호적을 올리자 나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마흔한살 되던해 대신 저수지에서 룡정과원으로 호적을 옮기였다. 친구 동봉률씨의 도움으로 룡정과원에서 경영하는 한 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였다.처음에는 룡정에다 세집을 맡아놓고 거기에서 공장으로 출근했다. 1년이 지나 공장의 낡은 창고를 수리하고 그곳에서 몇년 살다가 후에60평방되는 벽돌기와집을 장만했다.
    사람은 앞일을 예측할수는 있어도 알수는 없다. 내가 다니는 공장은 한때 룡정시에서 리윤창조률이 가장 높은 공장이였다. 경기가 좋던 공장이 시장경제의 충격하에 전기세가 오르고 상품 판로가 막히면서 불경기를 맞게 되였다. 공장 결책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파산을 피면 못하였다. 결국 공장 창립10년만에 공장이 파산선고를 하였다. 직공들은 로임의 70프로를 받으며 새로운 직업을 찾게 되였다.
     나는 살길을 찾아 연길로 들어왔다. 급하게 연길로 들어오니 애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제일큰 애로는 일자리를 찾는것도 문제였지만 살집이 없는것이였다. 시내로 들어올때 가지고 온 돈으로는  살림집을 사기에는 퍽 부족하였다. 부득불 세집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세집도 구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아는 친구가 본채가 아닌 사랑채를 내놓아 거기에서 살았다..
    작은 세방이였지만 가족이 한자리에서 식사하고 잘수있으니 그것 만으로도 한시름을 덜게 되였다. 세집을 맡아 놓았으니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나는 연길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참외장사를 하였고 후에는  목수일을 하다가 모 학교의 경비원으로 있었다. 안해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였고 작은 장사도 하였다. 부지런히 일하고 아끼고 모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3년만에 자식들이 지원하에 시교에다 단층집 두채를 삿다. 제집이 있으니 한숨 돌리게 되였고 두 다리를 쭉 페고 잤다. 자기집에서 기분좋게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냈다.
    한사람에겐 세번쯤 좋은 기회가 온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좋은 기회가 여러번 찾아왔다. 두번 찾아온 좋은 기회를 놓치였고 후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붙잡았다. 처음 찾아온 기회를 잡은것은 농촌을 떠나 대신저수지로 가면 농촌호적을 성시 호적으로 변경할수있다는 기회를 잡은 것이였고 두번째는 나이 륙십이 되던해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3년석달을 체류해 있었다. 한국에서 부부가 알심들어 일하고 돈을 모아 연길에다 아빠트 집 한채를 삿고 양로보험도 하였다. 세번째는 단층집 두채를 팔지않고 세를 주고 있다가 그 단층집이 시정부 개발규획범위에 속하게 되여 파가이주호로 된것이였다. 정부의 파가이주호에 대한 우혜정책에 의하여 우리는 엘리베이터 집 두채를 분양 받게 되였다.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다. 나는 헐망한 토굴집에서 살때에는 초가집에서 살고 싶어 했고 초가집에서 살때에는 벽돌집에서 살고싶었다. 벽돌집에서 살자 아빠트 집에서 살고 싶었고 아빠트 집에서 살아보니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은것이 내 소원이였다.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엘리베이터 집에서 살면 만족해야 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외국 관광을 하면서 보니 발달한 선진국 사람들은 도시에 집중하여 살던 데로부터 점차 작은 진으로 나가는 추세였고 중산계층의 사람들은 교외에 단독 전원 주택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으며 경치가 좋은 산속과 해변가에 별장을 지어놓고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들처럼 도시를 떠나 자연과 가까운 전원 생활을 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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