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황산려행단 성원들은 10월18일에 장춘 룡가공항에 집결하였다. 예정된 시간표대로 13시15분에 룡가공항을 떠나 15시 30분에 양주태주(泰州)공항에 도착 하였다. 태주공항에서 가이드 호도(胡導)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 하였다.
우리는 호도가 이끄는 대로 집적 황산으로 가지않고 먼저 양주(楊州)를 돌아보았다. 양주는 강소성 중부에 있는데 남경시에서 동쪽으로 100km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장강이 있고 북쪽에는 회수와 경향대운하가 중심을 가로 지나고 있었다. 양주는 장강 삼각주의 찬란한 명주로서 바다가 가깝고 강을 끼고 있는 신흥이 공상업도시였다.
양주는 이미 24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도시의 총 면적은 6678평방킬로메터이며 총 인구는 460만명이며 그중 도시인구가 120만명이 된다. 양주는 장강과 경항운하의 합루점에 위치해 있다. 양주시에는 36개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양주는 중국 력사문화명성이며 국가위생도시이며 국가 환경보호 모범도시이기도 하며 국가문명도시이기도 하다. 양주는 또 국가 문명도시, 사업선진시이며 전국 생태건설 모범도시이기도 하다.
양주시에 도착한 후 먼저 수서호(瘦西湖)구경을 떠났다.
수서호는 양주시 서부에 있었다. 수서호가 항주의 서호와 모양새가 비슷하다고한다. 항주서호에 비하여 범위가 작거니와 여위고 가늘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수려한 특색을 갖고 있어 파리한 호수(瘦西湖)란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한다. 이곳은 원래 양주 촉강산의 물이 운하에 흘러드는 자연 강길이였다. 력대로 사람들은 물길을 정리하고 소통시키였으며 길을 닦고 원림을 건설하여 점차 수서호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관광명승지로 되게 하였다.
처음 수서호에 입구에 들어섰을때 호수는 별로 눈에 뛰우지 않았다. 호수가의 길을 따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호수와 어울리는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확 다가왔다. 호수가에는 이색적인 대흥교, 소금산, 조어대, 백탑, 오정교, 24교 등 고풍이 다분한 문물들이 있었다. 나는 호수와 어울리는 문물들의 매력에 빠져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수서호를 돌고나니 한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았다는 감이들면서 흡족하였다. 항주에 서호가 있어 항주의 기품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면 양주 또한 수서호가 있어 도시의 아름다운 풍채를 돋구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구화산으로 가다
우리는 수서호를 돌아본 후 불교성지라 불리우는 구화산 (佛敎聖地-九華山)으로 향하였다.
구화산은 강소성과 안위성간의 접경지대에 있는데 한때는 강소성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안휘성에 귀속 되였다 한다.
우리를 태운 뻐스는 양주를 떠나 5시간 만에 구화산입구에 도착하였다. 구화산으로 가는동안 길옆에 보이는 산은 높지않은 야산들이였다. 구화산과 가까워 지면서부터 산발이 높아지고 웅장한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구화산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높은 산들이 빙둘러있었는데 뭇 산중에서도 아홉개 산 봉우리가 특별히 기이하고 높아 보였다.
구화산으로 갈때 가이드 호도가 이런 말을 했다.
“당나라 개원년간에 고조선 신라국 국왕 김교각은 궁전정변으로 왕위를 찬탈 당하고 가정이 파탄되자 비분을 안고 정치를 떠나 불교의 교리를 진정으로 전범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들어 왔습니다. 그는 구화산에 왔다가 구화산이 맘에 들어 구화산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김교각은 구화산에 온후 이곳에서 75년간 도를 닦다가 99세 일기로 불교에 입적하였습니다. 인생의 온갓 고초를 다 겪은 김교각은 마침내 불교를 믿으면서 자기가 그토록 갈망해 오던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 지장보살로 되였다고 합니다.”
나는 고조선 신라국의 국왕 김교각이 이곳에 정착해 75년간 도를 닦으며 살다가 99세 일기로 불교에 입적하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명심해 들었다.
호도는 계속 이런말을 했다. “김교각이 세상을 하직 하신 후 불교인들은 김교각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신라국의 왕이였던 김교각이 구화산에 입적한후 지장보살이 되였으며 그가 도를 닦던 곳이라 하여 승려들이 운집하고 관광객들도 련속부절히 찾아 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되여 구화산은 력대 불교도와 신사들이 제사를 지내고 참배하는 성지로 되였습니다.
지금 구화산은 세계적인 관광 명승지로 부상되였습니다. 신라왕 김교각으로 인하여 입지가 높아진 구화산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중국을 다녀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구화산을 찾는다고 합니다.”
나는 구화산을 구경하다가 구화산 안내문에 조선글이 씌여져 있는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구화산의 중요한 명소마다에는 안내문으로 된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간판 우에는 한자로된 안내문이 씌여져있고 아래에는 조선글로 된 안내문이 씌여져 있었다. 지난달 9월에 장가계를 유람을 하면서 조선글로 된 장가계에 대한 안내문을 보면서 깜짝 놀랐됐는데 오늘도 구화산에서 조선글로 된 안내문을 보는 순간 아! 여기 구화산에도 우리 조선글이 있구나! 우리민족의 넑이 있구나! 하면서 한켠으로는 한국인들이 이곳으로 많이 찾아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쩜 우리 조선글이 중국땅 이곳에서도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이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구화산에 왔으니 구화산에 대해 알아야 할것 같다. 구화산은 황산시 서북쪽에서 176km 떨어진 청양현 서남쪽에 있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중의 하나이다. 서쪽으로는 귀지가 53km상거해 있고 북쪽으로는 합비와 310km 사이두고 있으며 남경과는 265km 사이 두고 있었고 항주와는 200km사이두고 있었다. 구화산의 면적은 100여평방킬로메터라 한다. 산 위에는 99개 봉우리가 있는데 그중 천대, 천수와 주봉인 십왕, 련화봉 등 9개 봉우리는 경치가 수려하고 자태가 각양각색이며 멀리서 바라보면 아홉 형제가 어깨 나란히 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구자산이라 불렀다 한다. 당나라 시인 리백은 청양에 있을 때 시 한수를 써 구자산(九子山)을 구화산(九華山)이라고 찬양 하였다 한다. 그후 후세 사람들은 그냥 구자산을 구화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멀고먼 옛날 구자산 일대는 지세가 낮은 곳이 였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물귀신이 있어 늘 홍수가 범람하곤 하였다 한다. 이곳에 한 로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로인은 자기의 아홉 아들을 데리고 백성을 위하여 물 피해를 없애려고 물귀신과 사생결단으로 싸우게 되였다 한다. 물귀신과 싸운 결과 승리하였으며 아흡 아들이 아홉 산봉우리가 되여 물귀신을 산밑에 눌러버리자 이 일대는 그때로부터 태평스러웠졌고 점차 부유해 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후에 당나라의 대 시인 리백이 친구들과 함께 이 산을 유람하다가 하늘 높이 솟은 아홉 개 봉우리를 보니 마치 그것이 아홉 떨기의 련꽃같아 구자산을 구화산이라 명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화산에 대한 신비한 전설을 듣고나서 구화산을 바라보니 정말로 아홉 봉우리가 름름한 아홉 장수처럼 보이였다.
우리는 구화산 관람구 입구에서 관람표를 산후 고추 구화산으로 향하였다. 구화산으로 오르는 길은 넓고도 편리하게 잘 닦아져 있었다. 입구에서 구화산을 바라보니 아홉 산봉우리 중에서 주봉으로 보이는 십왕봉과 련화봉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보이였다. 그 골짜기 중턱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대불상이 광채를 뿜고 있었다.
가이드 호도는 불상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 했다.
“저 대불상은 1990년부터 뷸교도인들이 이곳에 불상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건설자금을 모금하였습니다. 수년간 국내외 많은 불교도인과 기업인들이 협찬하고 헌금하여 5년만에 이 불상과 불상주체공사를 원만히 완공하였습니다. 불상의 높이는 99m이고 부처님이 집고있는 선장의 높이는 108m라 합니다. 불상에 도금할때 쓴 황금만 하여도 24킬로그람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불상과 불상주체 시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중국사람들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이다. 중국사람들은 고대로 부터 현재까지 뭐나 만든다 치면 세계일류의 걸작품을 잘 만들어 내였다. 잠간 손꼽아 혜여보면 중국인들은 화약, 인쇄술, 라침판, 지진관측기를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하였으며 천하 제일 장성인 만리장성을 구축하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긴 운하 경항대운하를 파지 않았는가?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고 방대한 궁전 “고궁”을 건축하였다. 현대에는 세계에서 제일긴 고속철도를 건설하였으며 근래에는 세계에서 제일 긴 장가계의 케불카와 세계에서 제일 큰 구화산의 불상을 만들어 냈였다
나는 다년간 외국려행을 다니면서 서방나라의 도시와 문물고적을 많이 보아 왔다. 유럽의 고도(古都)들을 보니 견고하게 건설하였으며 예술성이 있게 건물을 건축하였다는 감이 들어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때론 서방나라의 고대 건축과 중국의 고대 건축물과 대비해 보게 되였다. 서방의 건축물과 중국의 건축물들을 보면 둘다 장, 단점이 있었다. 서방이 건축물은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건축조각예술이 뛰여 났다면 중국의 고대 건축물들은 방대하고 견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달랐다고 생각되였다.
구화산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불상앞에서 향을 피우고 참배를 올리였다. 나는 불자는 아니였지만 불상 앞에서 참배를 올리며 소원성취를 바랬다.
3 . 황산을 돌아보다.
우리는 구화산을 흥미롭게 돌아보고 나서 황산시 한 호텔에 주숙을 정하였다.
가이드 호도가 황산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였다.
“황산시는 안휘성 남부에 있는데 북쪽으로는 합비시와 350km떨어져 있고 남경과는 320km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항주시와 270km떨어져 있으며 상해와는 500km떨어져 있습니다.
황산시의 전신은 휘주(徽州)였습니다. 옛적부터 휘주에는 인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휘주에서 많은 인재들이 나오게 된것은 력사적 원인과 환경조건이 그런 인재들이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보고 느끼였겠지만 휘주 지역은 산이 많습니다. 휘주의 산에는 질좋은 목재가 많이 있었고 귀중한 약재와 광석들이 많이 매장되여 있습니다. 휘주에서 생산된 목재와 약재들은 수로를 통하여 항주로 가서 팔리게 되였습니다. 휘주는 비록 산간지대에 속해 있지만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과거 휘주 지방에서는 사람들을 사, 공, 농, 상(士工農商)으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선비사에 속하는 사람들의 제일 등급이 높은 사람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답니다. 상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돈은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들로 취급 받았다고 합니다. 상인들은 자식들이 하층인으로 취급받아온 자신들의 전례를 벗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선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자식들에게 투자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휘주에서는 지식인들이 많이 나왔으며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호금도 전 주석이 고향도 휘주였으며 청화대학의 5섯명 학장중에서 3명이 휘주사람이라고 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산시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한다. 일찍 상주(商州)시기부터 토착민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황산시는 지금까지 2,3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데 진(晉)나라 시기에는 신안군이라 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휘주라 불렀으며 후에 휘주는 마주지구로 되였다가 다시 황산시로 되였다.
황산시는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인문고적이 많으며 관광제품의 품위가 높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천연력사문화 대 관원으로 되고 있다. 황산시의 관광 자원은 아주 풍부하다. 황산주위를 둘러싸고 제운산, 태평호, 신안강 등은 모두 국가급풍경명승구이다. 황산시에 있는 문물고적은 거의 5.000곳이나 되는데 그중 국가급과 성급 중점보호구가 50곳이나 된다고 한다. 황산시의 면적은 9.807평방킬로메터이며 인구는 170만명이며 그중 도시인구가 50만명에 달한다.
1987년도 등소평동지는 황산을 돌아보고 나서 “황산의 간판을 들고 나가라”는 짧은 지시를 하시였다. 이 짧은 지시는 황산시가 개혁개방의 길을 걷도록 방향을 제시한 것이였다. 1987년 11월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원래의 마주지구를 황산시로 승격했다. 이렇게 되여 황산의 이름으로 명명한 황산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아주 높은 지명도를 가지게 되였다 한다.
이튼날 우리는 황산풍경구를 찾아갔다. 황산풍경구는 황산시 북쪽에서 7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황산은 진나라시기에는 아산이라 하였다. 당나라 천보6년(기원747년)에 당나라 현원황제가 이 산에 와서 장생불로초를 캐다가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현원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에 오라갔다고 여기였다. 그후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아산을 황산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한다.
황산은 사방 250평방킬로메터로서 그중 풍경구가 150평방킬로메터가 된다. 황산은 남북의 길이가 40km이며 동서의 너비는 20km이다. 면적은 1.200평방킬로메터이다. 사람들은 보통 500리 황산이라고 한다. 황산은 중국의 10대 풍경명승지의 하나로 특이한 자연풍경으로 이름이 높아 천하제일 기이한 산으로 불리우고 있으며1990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되였다.
예로부터 황산의 아름다움은 대시인 리백과 두보 등에 의하여 칭송되였다. 또 명나라때의 저명한 지리학자이며 려행가였던 서하객은 30년에 거처 중국의 산하를 돌아본 후 황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5악 (태산, 형산, 항산, 승산, 화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평범한 산 따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산에서 돌아온 사람은 그 5악도 눈에 차지 않는다.”
황산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원인은 기이한 소나무, 기암운해, 온천, 해돋이 이라는 네가지가 기이하기 때문이라 한다. 황산에 올라보니 그 말뜻을 리해 할만 하였다. 산기슭으로 부터 산꼭대기까지 올라 가면서 보니 바위틈에 자라는 기이한 소나무, 기이한 자태를 나타내는 거대한 바위, 산자락을 뭉게뭉게 에도는 구름이 신비하게 보이였다. 아쉽게도 우리가 늦게 산에 오르는 바람에 해돋이는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황산입구에서 수속을 마친후 황산주봉으로 오를수 있는 케불카를 타고 정착점에 올랐다. 우리는 케불카에서 내리자 고추 련화봉을 향하여 올리 걸었다. 가파로운 층계길을 따라 올리걸으면서 경치가 좋은 곳이면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 둥산객이 어찌도 많은지 어느 명소나 사진을 찍을 때 줄을서서 내심히 기다려야 했다.
련화봉을 향하여 한참 걸으니 영객송(迎客松)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영객송은 황산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명소였다. 영객송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뭇 산들의 내 발밑에 있는 듯이 보이였고 높은 산들은 아츠렇게 높아 보이였다. 영객송 마중켠에 거대한 절벽 바위가 있고 그 절벽을 배경으로 신기한 소나무가 한구루가 서 있었다. 마치 그 소나무는 유람객들을 반기는 주인 같았다. 하기에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영객송이라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영객송은 황산의 명물이다. 영객송의 모습이 하도 신기하고 인상적이여서 영객송을 그린 그림은 인민대회당 회의청에 걸려 있다고 한다.
영객송에서 굽이굽이 에돌라 올라가면 황산에서 제일 높은 봉 련화봉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련화봉으로 올라가야 황산을 보았다고 말할수 있다고 했다. 련화봉은 황산의 중부에 있는데 3대 주봉의 하나로 해발 1.893m이다. 안휘성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련화봉에서 가파른 절벽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황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인 광명정에 이르게된다. 광명정은 해발1.841m이다. 광명정 산정은 높고 평탄하여 일조시간이 길다고 해서 광명정이라는 이름을 얻게되였다 한다. 명나라 때에 이곳에 대비원을 건조하였는데 후에 없어졌다. 이곳은 아침해돋이를 구경하며 운해를 구경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곳이다.
광명정에서 동남쪽길을 따라 가면 황산에서 세번째로 높은 봉인 천도봉(天都峰)에 이르게 된다. 옛 사람들은 천도봉을 “군산지도(郡山之都)”로 보았다. 군산지도란 말 뜻인 즉 천상의 도회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천도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한다. 천도봉은 해발 1.810m이다. 천도봉은 험준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산이다. 민간에서는 “천도봉에 가보지 않으면 소경이 서울에 갔다 온거나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려행코스에 따라 영객송, 련화봉, 광명정, 천도봉을 지나 여러개 명소들을 돌아 보았다. 중점적인 곳만 한바퀴 도는데 8시간이 걸리였다. 8시간내 점심은 황산에 있는 음식점에서 먹었다.
황산에서 일하는 일군들은 대단한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하산할때 커다란 짐짝을 멜대로 메고 수백메터가 넘는 층계로 오르는 일군들을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이 숨을 돌리는 사이에 그 사람이 메고온 짐짝 하나를 들어 보았다. 짐짝 하나의 무게만 하여도 실히 50근이 될것 같았다. 그 사람은 잠간 숨을 돌리더니 짐을 메고 층계를 밟으며 힘겨웁게 오르고 있었다. 려행객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엄지척을 펴 보이였다.
그날 황산으로 로인들이 많이왔다. 모두다 황산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 하면서도 황천으로 가기전에 황산구경을 하였으니 소원성취 했다면서 좋아했다. 그러면서 황산을 오르는 것은 로인들의 신체를 검증하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8시간 황산을 돌고나니 모두들 지쳐서 저녁을 자실 맥이 없다고 하였다. 저녁 6시가되자 우리는 황산기슭에 있는 온천호텔에 주숙하게 되였다. 온천호텔에서는 저녁을 자실수 없기에 다른 호텔로 가서 저녁을 자시게 되였다. 우리는 저녁7시가 되자 차를 타고 다른 호텔로 가서 저녁을 자시게 되였다. 온천호텔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골짜기를 사이두고 골짜기 량켠 숲속에 호텔들이 련이어 있었다. 온천호텔에서 볼때에는 나무 숲으로만 보였는데 정작 이곳으로 와보니 딴 세상이였다. 높은 나무에 가리워 보이지 않던 골짜기 변에 큰길이 있고 길 위쪽에 줄줄히 호텔과 상가들이 있었다. 마치 도회지의 한 골목처럼 보이였다. 가이드 호도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워나 휘주지구 간부료양소가 있던 곳이라 했다. 그때는 간부들과 로동모범들만 주숙하던 특별한 곳이 였다고 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지금은 관광객들이 주숙하는 곳으로 되였다고 했다.
우리는 멋지게 지은 한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을 자신후 온천욕지로 가게 되였다. 우리가 주숙한 온천 호텔에서 100m상거한 곳에 온천욕지가 있었다. 온천욕지는 집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었다. 꽤나 넓은 공지의 여기저기에 호화롭게 꾸민 욕탕이 있었다. 욕탕에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떤 욕탕은 임금님이 목욕을 하던 곳이라며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밖갓은 쌀쌀한 기훈이 도는데 욕탕안은 뜨근뜨근하여 피곤을 가셔주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난뒤 귀로에 오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황산 온천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어쩐지 장백산 온천보다 어느모로보나 차하다는 생각을 했다..
온천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 우리는 “잘 있거라 황산아”를 외치며 다음의 향선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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