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력사에는 무측천이라는 녀황제가 있었고 조선력사에는 선덕, 진덕, 진성이라는 녀왕이 있었다.
먼저 녀황제 무측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 한다.
당 고종은 유약한 황제였다. 즉위한 후 그는 조정의 대사를 외숙인 승상 장손무기에게 모두 맡겼으며 나중에는 무측천을 황후로 올려 놓았다. 권력욕이 매우 강한 무측천은 점차 조정 대권을 장악하여 중국 력사상 유일한 녀황제로 되였다.
무측천의 본명은 조이 이며 병주(倂州) 문수 (산서성 문수현)사람이다. 아버지 무사확(武士穫)은 매우 부유한 목재 상인이였는데 수나라 말기에 장사를 그만두고 군대에 들어가 부병제(府兵制)밑에 있는 응양부의 대정의 군대로 들어가 공을 세우고 당나라 조정의 관원이 되였다. 그러다가 리연이 반란군을 일으킬 때 리연의 군대로 들어가 공을 세우고 당나라 조정의 관원으로 되였다.
후에 그는 공부상서로 되여 응국공으로 책봉 받았다. 무측천이 아홉 살 때 아버지 무사확이 죽고 말았다. 무측천이 열네 살 때 이미 마흔에 가까운 태종은 그녀가 대단한 미녀라는 말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서 무미라는 호를 하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측천을 미낭(媚娘)이라고 불렀다. 후에 그녀는 재인으로 책봉 되였다. 태종이 죽자 그녀와 다른 궁녀들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였다. 당 고종 리치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그녀와 은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은 황제로 되자 무측천을 도로 입궁시켜서 시침(侍寢)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소의(昭儀)로 책봉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왕황후를 암살하려고 했다.
어느 날 무측천이 딸을 낳자 왕황후가 득녀를 축하하려고 무측천의 침실로 왔다. 황후가 귀엽다며 아이를 연신 얼려주고 돌아가자 무측천은 이를 악물고 자기 딸애의 목을 졸라 죽이고는 이불을 덮어 놓았다. 그리고는 당 고종이 오자 황후가 자기 딸을 죽였다고 모함 했다. 왕황후는 변명할 길이 없었다. 대노한 당 고종은 왕황후를 페위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올려놓기로 마음 먹었다.
655년 9월, 당고종은 저수량, 장손무기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를 페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올려놓을 의사를 정식으로 표하기전에 먼저 친신인 리적에게 이렇게 물었다.
“짐은 무소의를 황후로 올려놓으려고 하는데 저수량 등이 한사코 반대하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당 고종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리적은 무측천에 리로운 말을 했다.
“황후의 페립은 페하의 가정사이므로 외간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야 한다는 법은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자 허경종도 이를 거들었다.
“시골 농사꾼도 밀 10섬을 거두면 본처를 버리고 새 각시를 얻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천하를 가진 천자께서 왜 새로운 황후를 세우지 못하시겠습니까?”
결국 당 고종은 결단을 내려 왕황후를 페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책봉했다.
황후가 된 무측천은 재빨리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자신의 세력을 조정 대사에 끌여들였다. 한편으로 고종과 원로대신들 간의 알력을 리용하여 장손무기를 죽이고 이를 반대하는 주요 대신 20여명을 파직시키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 대신들을 등용했다. 리의부, 허경종 등은 관운이 터서 차례로 재상이 되였다. 그후 무측천은 당 고종과 더불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권세욕이 무척 강한 무측천은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면서 고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단속했다. 무측천이 이런 행위에 대해 못 마땅하게 보아온 당고종은 대신 상관의를 은밀히 불러놓고 무후를 페위시킬 조서를 꾸미게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무측천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노기충천한 무축천은 당 고종을 찾아가 소리 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리숙한 당 고종은 무측천의 고함소리에 그만 혼줄이나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짐..... 짐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상관의……그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무측천은 그 즉시 수하에게 명해 상관의를 비롯한 반대 세력들의 목을 무참히 베여 버렸다. 이때로부터 조정의 대소사는 모두 무측천 혼자서 좌지우지 했다. 무칙천 일파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당 고조는 당나라 리씨의 천하가 무씨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 심히 우려가 되였다. 그래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황제자리를 아들 리홍(무측천의 맏아들)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자 무측천은 자기의 소생인 리홍에게 독주를 먹여 죽여버리고 둘째아들 리현(李賢)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측천은 또 리현을 서민으로 페하고 셋째 아들인 리현(李顯)을 태자로 삼았다. 무측천의 이 같은 수법에 당 고조는 속수무책이였다.
683년12월, 당고종이 병들어 죽자 태자 리현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당 중종(中宗)이다. 무측천은 황태후의 명분으로 조정에 나가 집정을 했다. 그러다 나중에 중종이 자신의 처가인 위씨 가문 사람들을 등용하는 데 불만을 품고는 중종을 페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리단(李旦)을 황제로 올려놓았다. 그가 바로 당 예종(裔宗)이다. 무측천은 자기 혼자서 국사를 도맡아 처리하면서 당 예종을 전혀 관여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무씨 가문이 조정 대권을 휘두르는 것을 본 황실 종친과 공신들은 모두 큰 위협을 느끼며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무측천을 반대하는 투쟁 또한 점점 드세여 졌다.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당나라의 오랜 신하들인 서경업, 당지기, 낙빈왕 등이 중종을 옹위한다는 명분으로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조정 내에서는 재상 배염이 그들을 지지하여 내응하기로 했다. 그들은 신속히 10여 만의 군사를 모아 장안을 향하여 진격했다. 이 기세를 리용하여 낙빈왕은 무측천을 맹렬히 비판하는 격문을 써서 전국에 배포했다. 무측천은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서경업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서경업은 싸움에 패해 죽고 서경업을 도와주던 재상 배염 등도 잡혀 살해 당했다.
690년9월, 67세가 된 무측천은 스스로 신성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주(周)나라로 고쳤다. 도성 락양의 이름도 신도(神都)라고 고쳤다. 그리고 당 예종은 황사(皇嗣왕제의 후계자))로 내려놓았다. 무측천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잔혹하게 제거했지만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파격적으로 임용했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은 적인걸의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무측천은 고민하였다. 무측천은 리씨자손을 태자로 삼을지 아니면 본가집인 무씨 자손을 태자로 삼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적인걸은 무측천이을 용단을 내리지 못하자 리씨 성을 가진 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하는 리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모와 조카가 더 가까운지 어머니와 아들이 더 가까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페하께서 아들을 태자로 삼으시면 그 후손들은 천추만대 내려가면서 길이길이 페하를 태묘(太廟)에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친정조카를 태자로 삼으면 그런일은 없을 겁니다. 태묘에 고모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법은 자고로 없지 않습니가?”
적인걸의 이 말에 무측천은 친정 조카를 태자로 삼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자기 아들을 태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조선력사에 존재하였던 녀왕 세분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신라에는 녀왕 세분이 있었다. 오늘은 그 세분중에서 먼저 선덕녀왕(善德女王)과 진덕녀왕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532년에 신라의 제26대 왕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를 이어 받게 되였다. 왕위를 이어받은 왕이 곧27대 왕 선덕녀왕이다. 선덕녀왕의 성은 김씨로 아버지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였다. 정관 6년에 선덕녀왕은 왕위에 올라 16년동안 신라를 다스렸다. 선덕녀왕은 매우 총명하여 보통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능히 해결할수 있는 군주였다.
어느 날 당나라 태종이 선덕녀왕 앞으로 진홍, 자색, 흰색 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꽃 씨앗 석되를 보내왔다. 선덕녀왕이 그 그림을 보고는 말 없이 있다가 뜰에 꽃씨를 심도록 명하였다. 꽃씨를 심고 나자 선덕녀왕은 이런 말을 했다.
“이 꽃은 보기에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싹이 자라 꽃이 피고 꽃이 질 땔를 기다렸더니 과연 녀왕의 말과 같이 꽃은 하려하게 피였건만 향기가 나지 않았다. 군신들이 이상히 여기며 왕에게 물었다.
“대왕님께서는 어떻게 꽃이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왕은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꽃을 그리되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당나라 태종이 내가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하니 군신들이 그의 뛰여난 판단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던 어느 날 령묘사(靈廟寺) 앞 옥문지에 난데없는 개구리가 모여 3 - 4일간 떠들어대고 있었다.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여 시내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들어 구경을 하고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급히 알천 장군을 불러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속히 서쪽으로 나가서 녀근곡이라는 곳을 물어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하여 잡으라고 명하였다. 알천장군이 명령을 받들고 서쪽으로 가 녀근곡을 물으니 부산밑에 과연 녀근곡이란 곳이 있었다. 백제군사 500명이 거기에 잠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 사살하고 또 백제장군 우소가 남산고개우에 숨어있음을 발견하고 포위하여 사살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백제군의 후속부대 1천300명이 진격해오는 것을 모두 사살하여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한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이와 같이 백제군의 잠복장소를 알아냈고 적군이 진격해 오고 있음을 미리 알게된 리유를 선덕녀왕은 다음과 같이 군신들에게 설명했다.
“개구리는 성내는 형상이니 군사를 상징하는 것이고 옥문(玉門)이란 녀근 인데 그 색은 희고 흰것은 서쪽이라. 그러므로 서쪽에 군사를 움직임이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은 녀근에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항복하기 마련이므로 쉽게 물리칠수 있음을 알았다.”
라고 말하니 군시들이 모두 그 지혜에 탐복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왕이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아무해 아무달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 하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데나고 물으니
“랑산(狼山)남쪽이다.”
하였는데 과연 예언한 그날에 죽으니 신하들이 그 유언에 따라 랑산남쪽에 장례 하였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무왕(文武王)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밑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우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로 미루어 보아 선덕녀왕의 신령스러움을 알수 있었다.
당초에 당태종이 3색 꽃을 그린 그림을 보낸것은 신라에 녀왕이 셋이 있을줄을 미리 알고 그런것이 아닐가? 생각해 보게 한다. 정말로 당 태종의 예측대로 신라에는 선덕, 진덕, 진성녀왕이 있게되였다.
선덕녀왕의 뒤를 이어 진덕녀왕의 신라 제 28대왕으로 등극하게 되였다. 진덕녀왕은 진평왕의 조카로서 역시 왕위에 올랐다. 왕의 재위동안에 당나라의 위관제도를 본따 시행하게 하니 당시 신라의 상류층인사들은 거의 당나라 사람처럼 되여갔다. 순수한 신라의 옛 문물은 이때를 계기로 하여 점점 당나라 문물로 변해갔다. 진덕녀왕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기가 없이 이만 줄이고 다음으로 진성녀왕(眞聖女王)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라국의 51대 왕은 진성녀왕이였다.
진성녀왕의 아버지는 정강왕으로 아들이 없었고 딸 둘이 있었다.
딸들의 숙성하게 되자 왕은 사위를 삼을려고 생각하던 중 어느 연회석에서 응렴이란 젊은이를 알게 되였다. 숫한 사람중에서 용모가 띄여난 그 젊은이는 왕의 시선을 끌었다. 왕이 여러모로 묻자 그 젊은이는 조리 밝에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왕은 만족해 하며 그를 사위감으로 점 찍었다.
왕의 두딸 중 맏딸(영화공주)는 인물이 수수했지만 둘째딸(설화공주)는 미인이였다. 응렴은 두 공주중에서 맏딸을 선택하였다. 맏이를 선택한 리유는 부귀영화를 바랬던 것이였다.
곡식이 무르익는 시월 중순에 응렴은 영화공주와 성대한 혼인식을 치르렸다. 응렴은 이로서 비록 얼굴이 못생겨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당장에 왕의 부마가 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응렴은 이렇게 생각했다. 미녀든 추녀든 잠자리를 함께 함에 있어서는 별로 구애될 것이 없었다. 생김새가 어떻든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이다. 장차 권세와 재물을 얻게 되면 못생긴 정실 부인은 내실 깊숙이 들여 앉혀놓고, 아리따운 계집을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결혼식을 치른후 응렴은 부인을 끔찍히 사랑하였다. 왕과 왕비는 사위가 딸을 좋아하자 한시름 놓게 되였다.
세월이 흘러 왕비가 죽고 난뒤 왕이 몸도 좋지 않았다. 왕은 후임자를 선택할 시기라고 생각되여 가까운 중신들을 불러 놓고 유언했다.
“과인이 불행하여 더이상 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여 그대들을 불렀노라. 과인에게 한가지 근심거리가 있다면 과인의 대를 이을 왕자를 두지 못하고 두 공주만 두고 떠나게 된 것이로다. 이런 처지에 누구에게 양위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상대등(승상)김안이 연신 읍하며 대답했다.
“전하께옵서는 조만간 기력을 회복하여 병상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너무 심려 마시옵고 어체를 중히 여기시기를 비옵니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병은 자신이 잘 아는 법이오. 사양말고 말하시오”
“정히 그러시다면 선대에도 선덕, 진덕녀왕의 경우고 있었던 것처럼 두분 공주님 중 한 분께 양위하시옴신지요?”
이번에도 왕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 력사를 살펴보면 공주에게 양위할 수 없는 것도 아니나, 자고로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소 그러니 이런 것을 알면서 따름은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큰 불행이 될 것이오. 그리하여 과인이 결심한 바가 있으니 새겨듣고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시오.”
녀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던 왕은 비록 사위에게 왕권을 계승시켜 줄지언정 자기 딸인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니 왕의 유지를 받들어 응렴을 보위에 올렸다. 그가 곧 신라 제 48대 경문왕이다. 응렴은 부마로 들어온 지 석 달만에 왕위를 차지하게 되였다.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영화왕비의 뜻에 따라 김정에게 승상에 맞물리는 상대등으로 임명하였으며 위진에게는 시중의 자리를 주어 조정의 일을 맡기고 자신은 마침내 옛 버릇이 도져 얼굴이 못생긴 영화왕비를 제쳐두고 미녀 탐색에 나섰다. 이제는 왕의 행동거지를 나무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아리따운 녀자를 보기만 하면 궁으로 끌어들여 비빈 시녀로 삼고 밤마다 번갈아 시침을 들게 했다.
이렇게 정신 없이 세 해를 넘기고 보니 문득 주위에 득실거리는 계집들에 싫증이 났다. 그 동안 왕비는 두 아들을 낳았다.
젊은 나이에 대를 이을 왕자를 둘이나 얻어서 후사도 걱정 없고 나라가 태평하니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그는 우연히 처제인 설화공주가 있는 별궁근처로 가게 되였다. 그때까지 설화공주는 시집을 가지 못하고 별궁 깊숙한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공주가 있는 별궁에서 두 사람은 눈이 맞아 만리장성을 쌓게 되였다. 워낙 설화공주를 맘에 들어 했던 왕은 설화공주를 차비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10여일 뒤 둘째 공주 설화는 언니 영화의 뒤를 이어 차비가 되여 궁으로 들어오게 되니 왕은 두 번째 소원도 풀게 되였다.
이렇게 두해를 보내자 마침내 차비의 몸에도 이상이 생겼다. 어느새 씨앗이 들어가 그녀의 몸을 달덩이처럼 부풀어오르게 만들었다. 왕은 평소에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차비가 임신이 되였다는 사실을 알고 못내 흐뭇해 하였다.
경문왕 6년(서기 866년 차비가 딸을 낳으니 왕은 공주에게 만(曼)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력사상 신덕, 진덕에 이어 세번째로 녀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녀걸 진성녀왕이다.
경문왕의 후임으로 맏아들 헌강왕이 뒤를 이었다. 헌강왕은 오래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헌강왕의 뒤를 이어 아우 정강 왕이 왕위에 올랐다. 정강왕도 왕위에 오른지 거이 1년동안 병상을 들락거리면서도 궁녀들을 끌어들여 황음으로 나날을 보내더니 중병에 걸려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태평성대에 자기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군왕의 자리에 올라 젊어서 죽어야 한다는 게 원통한 일이였지만 운명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이른 것을 안 왕은 대신들을 불러놓고 이런 말을 했다.
“그대들은 모두 과인의 말을 듣고 시행하도록 하시오. 과인은 그대들이 알다싶이 병이 위중하여 다시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할 것 같소. 친형이자 선왕이신 헌강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제 겨우 한 해를 지났을 뿐, 일찍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 원통한 일이나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오. 과인은 그 동안 나의 들어서도 과인의 뒤를 이을 후사를 두지 못하였음을 경들이 잘 알 것이오. 그러니 과인은 걱정하지 않소. 과인에게는 경들이 잘 알다싶이 총명한 만공주가 있소. 공주는 골상이 사내 대장부다운데다 총기도 있어 능히 과인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리실 만하다고 여기오. 그러니 과인의 누이동생 만으로 하여금 과인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게 하여 잘 보필하도록 하시오.”
그런후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정강왕이 하직하고 왕의 유언대로 마침내 만공주가 스물두 살의 나이로 녀왕자리에 오르니 서기 887년이다. 그가 바로 신라녀왕으로서는 세 번째로 보위에 오른 제51대 진성녀왕이다.
만공주는 녀왕으로 등극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선왕들의 관례에 따라 먼저 옥에 갇힌 죄수들을 모두 풀어방면하고 나라 전체 각 주 백성들의 세금을 1년 동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과 중신들은 녀왕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일년이 넘자 태평세대로 보이던 신라는 속이 곪기 시작하였다. 일년이 지나자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였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낼 수 없으면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였다. 각주 변방의 군현 태수나 관아의 아전 나부랭이들은 있는 재주를 다 피워 백성들을 들볶아 재물을 훑어 내기가 바빴다. 조정에서 감시를 하지 않으니 살판났다고 백성들만 들들 볶아 댄 것이였다.
녀왕은 정사엔 관심이 없고 고독을 달래기 위해 상대등을 불러오고 젊은 애들을 궁으로 불러들어 시중을 들면서 고독을 달래였다.
진성녀왕이 왕위에 오른 후 나라의 정세가 기울리기 시작하였다. 나라 운명을 걱정을 하는 유지 인사들이 녀왕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총고의 말을 드렸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은 어린 나이에 중국류학을 가서 벼슬까지 한 학자인 최치원이였다. 최치원은 녀왕에게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개혁안을 제의 하였다. 하지만 녀왕은 녀왕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왕족과 관료들이 말만 듣고 유지인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명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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