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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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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해탄의 3거두 (2)
2013년 11월 10일 21시 40분  조회:6790  추천:2  작성자: 넉두리

조조처럼 간사한 구상해 깡패거두 두월생

(번역)

 

두월생(杜月笙)은 1888년 8월 22일에 상해 천사(지금의 상해시 포동신구역)의 고교남쪽 두가(杜家)저택에서 출생하였다. 4살전에 부모가 모두 돌아갔기에 그는 선후로 계모와 삼촌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깡패들과 어울렸으며 과일점의 점원질도 했다. 그때 그는 청방의 진세창을 스승으로 모셨다. 진세창은 소동문일대의 깡패두목이였는데 작호가 “투첨자복생”이였고 청방의 중간에 속하는 “통자(通字)”서렬이였다. 두월생은 “오자(悟字)”서렬에 배치되였다. 두월생은 진세창의 관계를 통하여 청방의 최고두목인 황금영의 저택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두월생은 령리하고 간사하고 눈치가 빨랐기때문에 얼마후에 프랑스조계지의 중국인정탐두목으로 되였다. 황금영은 그를 심복으로 여기면서 아편운반을 책임지게 하고 프랑스조계지 3대도박장의 하나인 “공흥구락부”를 경영하게 했다. 두월생은 부하들을 잘 모아들이고 군벌들과 결탁했기에 몇달사이에 아편운반에서 세력이 가장 강대해졌다.





 

1925년 7월에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와 군벌의 보호하에 “삼흠회사”를 설립하여 프랑스조계지의 아편운반을 독점했다. 이렇게 되여 그는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상해깡패3거두의 하나로 되였다. 그해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상회 총련합회 주석 겸 납세중국인감찰로 임명되였다.
상해깡패3거두중에서 “황금영은 재물을 탐내고 장소림은 싸음질을 좋아하고 두월생은 처신을 잘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황금영과 장소림에 비해 두월생은 확실히 수법이 더욱 고명했다. 그는 깡패 각 세력간의 관계를 잘 조화시켰고 각 군벌파벌간의 관계를 잘 처리했다. 그는 또 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알았다. 그는 아편을 밀수하고 도박장을 개설하여 대량의 재물을 긁어모아서는 그 불의지재를 가지고 사회각계 명류, 정치요인, 문인, 화가, 깡패골간 등 인물들을 위해 통이 크게 쓰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또 민심을 사기 위해 몇년동안 련속 전염병방지약품을 고향에 무료로 공급해주고 상해와 부근지구에 재해가 발생되면  리재민들에게 구제물자를 보내주는 등 사화기부활동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직접 나서서 로동자들과 자본가의 분규를 해결해주는 등 로동자들의 리익을 보호해주는척 하는 형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월생은 전통깡패들이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손에 반지를 끼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다니던 이왕의 틀거지를 개변하여 사계절 긴 적삼을 입고 점잖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교양있는 형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퇴진한 대통령 려원홍을 잘 대해주었고 대학자 장태염, 저명한 정치가 양도, 명변호사 진련규를 상객으로 모셨다. 그때문에 두월생의 사회상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1927년 4월 11일에 두월생은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중화홍진회를 조직하여 장개석의 반혁명정변을 도와 상해로동자운동의 령수 왕수화를 살해하고 깡패들을 시켜 로동자규찰대를 진압하기도 했다. 장개석은 그의 공로를 축하하여 남경정부가 성립된후 그에게 륙해공 총사령부 고문, 군사위원회 소장참의와 행정원참의 등 직에 임명했다. 이런 직위들은 실권이 없고 허울뿐이였지만 그의 사회지위를 높여주었다.

1929년에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 공동국의 중국인 리사장으로 되였는데 이는 중국인이 프랑스조계지에서의 최고지위였다. 그해 그는 중휘은행을 설립하여 상해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는 금융계의 서신륙, 진광보, 당수민 등 저명한 인사들과 관계를 밀접히 했기때문에 그의 은행업무가 날따라 흥성했다.
 
 
항일전쟁시기 두월생은 중국적십자회 부회장을 담임하면서 유익한 자선사업을 했다. 1937년 8월 13일에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해오자 두월생은 구급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10개의 구급치료대, 13개의 긴급구호대, 24개의 림시구호병원를 설립하고 구급차 98대를 항일전선에 지원했다. 그가 령도한 의료일군들은 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군대와 백성 4만 4398명을 구급했다. 두월생은 또 대립과 함께 1만명의 무장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정규군을 도와주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돈으로 구매한 총 5000자루를 전선에 기부했다. 두월생은 대립과 함께 항일조직인 소절행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소절행동위원회 별동대에는 5개지대가 있었는데 1, 2, 3지대는 대부분 그의 제자들로 무어졌고 사령은 모두 그의 문하생이였다.

그후 두월생은 또 송강, 곤산, 소주, 무석, 항주, 남경 등지에 중상병원을 설립하여 해마다 수천명의 부상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남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그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한구로 날아가서 정부 해당부문과 함께 한구에 림시구급위원회를 설립하고 178개의 의료대를 설치했다. 그가 령도한 적십자회에서는 항일하다 부상당한 군대와 백성 260만명을 치료해주었다.
항일전재시기 두월생은 통신기재, 장갑차 등을 중국공산당의 고급지휘관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또 생해주재 팔로군대표 반한년의 요구에 의해 화란에서 수입해온 1000개의 방독면구를 진북전선에서 싸우는 팔로군부대에 증송했다.

1938년봄에 중국적십자회 총회 리사사무실은 향항으로 이주했다. 두월생은 직접 향항으로 가서 사업을 맡아하면서 항일지원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중국적십자회 부회장, 구제위원회 상무위원과 상해 당정통일사업위원회 주임위원을 담임하면서 정보업, 한간암살계획 등 활동에 종사했다. 그 시기 그는 군통특무를 협조하여 대한간이며 상해시 괴뢰시장인 부소암을 죽여버렸다. 1940년에 그는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국민당의 지지를 받는 중국 각 깡패세력의 련합기구였다. 두월생은 인민행동위원회의 주요책임을 맡았는데 이는 사실상 그가 중국깡패세력의 최고두목으로 된것이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폭발된후 두월생은 중경으로 이주하여 “항사총사”를 세우고 대후방에서 세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화무역신탁회사, 통제회사 등을 조직하여 점령구에서 물자를 교환하여 리익을 챙겼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두월생은 1945년 9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와 세력을 넓혀갔다. 그때는 조계지가 이미 없어졌고 국민당세력이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수 있게 되여 깡패의 작용이 더는 이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되였다. 1946년 12월에 그는 상해참의회 의장으로 당선되였지만 국민당이 이전처럼 지지하지 않았기에 얼마후 사직했다. 그후 그는 공상, 금융, 교통, 문화, 교육, 매체 등 각 방면에서 세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각종각약의 리사장, 회장, 상무리사, 학교리사장 등 60~70개의 직위를 담임했다.

두월생이 공개적으로 맞아들인 부인은 다섯이였다. 첫째부인 심월영은 소주사람인데 생육을 못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후 첫째부인이 외사촌오빠와 간통하는것을 발견한 두월생은 첫째부인을 10년동안이나 가둬놓았다.
두번째부인 진귁영은 상해사람인데 무용배우였다. 둘째부인은 두유환, 두유한, 두유녕 세 아들을 낳았다.
셋째부인 손패호는 소주사람인데 16살에 두월생한테 시집을 와서 두유병, 두유친 두 아들을 낳았다.
넷째부인 요옥란은 북경사람인데 저명한 경극배우였다. 두월생은 요옥란과 그녀의 녀동생 요옥영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했다. 그후 그는 두 자매를 하루밤사이에 번갈아가며 자기의 녀자로 만들었다. 일주일후 요옥영은 병으로 죽고 요옥란은 두유선, 두유숭 두 아들과 두미여, 두미하 두 딸을 낳았다. 다섯째부인 맹소동은 북경사람인데 요옥란과 같은 스승을 모신 저명한 경극배우였다. 그녀는 두월생의 부인으로 되기전에 저명한 경극대사(大师) 매란방의 련인이였다. 맹소동은 딸 두미연을 낳았다.

1948년봄에 두월생은 국민정부에서 열린 헌정(宪政)을 실시하기 위한 “국민대회)”에 참석하여 장개석을 받들어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하는데 일조했다. 장개석은 엄중한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장경국을 상해에 파견하여 시장가격개혁을 실행하게 했다. 장경국은 금원권(金圆券)을 발행하여 민간에 소지하고있는 외화와 금은을 일률로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두월생의 아들 두유병은 그대로 하지 않았기에 투기거래죄로 장경국에게 체포되여 6개월의 도형에 언도되였다. 이 일을 겪은후 두월생은 상해에서의 자신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알게 되였다.

1949년 3월하순에 장개석은 두월생을 남경에 청해놓고 “상해를 지키기 어렵게 되였으니 두선생은 대만으로 가는게 좋겠소”라고 말했다. 그 시기 중국공산당측에서 황염배에게 위탁하여 두월생을 상해에 남도록 권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두월생에게 경고하는 말투로 “두선생이 민국 16년에 공산당을 제거하는데 큰공을 세웠고 이때문에 공산당과 깊은 원한을 맺게 되였소.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중시하기에 두선생을 절대 가만놔두지 않을거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대만으로 가도록 하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산당도 장개석도 믿을수 없게 된 두월생은 자유의 항구 향항을 선택했다.
1949년 5월 1일에 향항으로 도망간 두월생은 1951년 8월 16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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