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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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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2015년 03월 01일 13시 47분  조회:609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번역)



 
 
1975년 4월 5일 밤 11시 50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그의 맏아들 장경국(蒋经国)이 1975년 4월 28일에 국민당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75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송미령은 즉시 대만을 떠나 미국에 가서 장기적으로 거주했다. 외계에서는 모자간에 서로 응어리를 풀지 못했기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때의 장경국은 이미 실질적인 후계자였지만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마다 례모적으로 송미령에게 의견을 묻군 했다. 장경국이 “부대통령”을 선택할 때 송미령은 “신중하게 2인자를 선택하라”고 하면서 “우리 당의 종지를 진심으로 따르고 부흥대업의 집행을 견지”하는 사람을 선택할것을 권고했다. 후에 장경국이 선택한 “부대통령”은 리등휘였다. 송미령은 늘 사람들에게 “경국이가 국사를 처리하는데 나는 간섭하기 불편합니다”라고 말했다. 송미령은 리등휘에게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장경국의 선택을 존중했다.
정계에서는 장경국과 송미령이 화목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장경국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다. 1986년에 장개석의 탄생 100돐을 기념할 때 장경국은 송미령이 대만으로 오지 않으면 모자간의 불화설이 사실이란것을 증명해주게 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막내아들 장효용(蒋孝勇)을 미국에 파견하여 송미령을 대만으로 모셔오게 했다.
장경국으로 말하면 둘째아들 장효무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딸 효장은 혼사때문에 장기간 미국에 숨어지녔기에 내성적인 장효용이가 가장 합당한 후계자감이였다. 장경국은 또 장효용을 자신의 정치사무를 협조해줄 적임자로 여겼다. 장경국의 부관 옹원의 화상에 따르면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장효용이 아버지에게 여러가지 사무에 대해 보고하는 날이였다. 민감한 정계의 인사들은 장경국의 그런 속셈을 알아내고 “태자”에게 잘 보이려고 모여들었다. 장경국도 많은 재주가 있는 청년들을 불러들여 장효용과 합작하고 교류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장경국은 만년에 “우리 장씨가문은 이후에 ‘대통령’선거에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 말은 “장가왕조”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경국이 장씨세습제도를 종결지은것은 력사학자들로부터 영명한 선택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8년 1월 13일에 장경국은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78세였다. 중국지도자는 장경국의 불행한 서거에 심심한 애도를 표시하면서 1월 14일에 담화를 발표해 “장경국선생은 한개 중국원칙을 견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며 국가통일을 주장했으며 량안관계를 완화시키는데 공헌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 및 해당인사와 대륙에 있는 장경국의 친척들도 모두 대북에 조전을 보냈다.
장경국은 행정원장임기내에 10대건설을 추진하여 대만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킴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의 네마리 작은룡”중의 하나로 되게 했다. 집정말기에 그는 민주개혁을 추진하여 대만정치를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고 “한개 중국”립장을 견지했으며 “대만독립”을 반대했다. 1987년 11월에 부분적 인사들이 대륙으로 나가 친척방문을 할수 있도록 개방하여 근 40년간 량안동포들이 서로 왕래를 못하던 국면을 결속짓게 했다.
1910년 4월 27일에 절강성 봉화에서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의 맏아들로 태여난 장경국은 사실 대만인민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특히 기층민중들의 생활을 관심했다. 그는 매년 200차이상 농촌을 방문하여 지방의 진실한 정황을 료해했고 향촌건설을 중시했으며 수력발전 및 기초의료위생건설을 락실하여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줄였다. 그는 지금까지 대만민중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대통령으로 되고있다.
장경국의 동생 장위국(蒋纬国)과 장경국의 아들 장효용도 병으로 사망되자 송미령과 장방량(장경국의 부인)은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장씨가문은 모두 해외에 이민하여 다시는 정치사무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에 송미령은 뉴욕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106세였다. 송미령의 사망소식을 들은 전세계의 화교들은 추모활동을 벌렸다. 전국정협주석 가경림은 조전에서 “송미령녀사는 중국근대사에서 영향력이 있는 지명인사이다. 송미령녀사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과 국가분렬을 반대하기 위하여 힘썼다”고 했다.
송미령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고 구술로 력사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회억록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개인의 비밀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일생동안 중요한 력사사실을 많이 경험한 송미령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것은 중국력사에서 영원히 미봉할수 없는 손실이다.
이로써 장씨일가는 정식으로 력사무대에서 물러났다. 근 100년의 중국력사에서 장씨가문의 영향은 비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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