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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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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2015년 04월 25일 10시 46분  조회:5661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송태조 조광윤(赵匡胤)은 960년에 5대 10국의 전란을 결속짓고 송조를 건립했다. 976년 11월 14일에 송태조(宋太祖)가 갑자기 사망되자 송태조의 친동생 조경(赵炅)이 황위를 계승했다. 조경이 바로 송태종(宋太宗)이다. 송태종은 본명이 조광의(赵匡义)였는데 형님 조광윤의 이름을 회피하느라고 조광의(赵光义)라고 고쳤다가 황위에 오른후 조경이라고 개명했다. 송태종이 997년에 사망되자 그의 셋째아들 송진종(宋真宗)이 황위를 계승했다. 송진종의 이름은 조항(赵恒)이다.

송진종은  송태종의 맏아들도 아니고 황후의 아들도 아니여서 원래는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송진종의 큰 형님 조원좌(赵元佐)가 정신병에 걸리고 둘째 형님 조원희(赵元僖)가 비명횡사를 했기때문에 행운스럽게도 태자로 되였다. 송태종이 죽은후 송진종은 태감 왕계은(王继恩)과 태후가 짜고 든 궁정정변음모에 걸려들었는데 승상 려단(吕端)이 제때에 구원해주었기때문에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다. 두 승상과 과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송진종시기에 발생된것이다.

북송 함평5년(1002년) 10월에 송조의 세번째 황제 즉 송태종의 셋째아들 송진종이 조서를 반포했다:
좌승상(左丞相) 향민중(向敏中)을 재상의 자리에서 파직하고 호부시랑으로 삼는다. 우승상(右丞相) 장제현(张齐贤)을 태상경(太常卿), 분사서경락양(分司西京洛阳)으로 좌천시킨다.

이 조정의 대지진을 몰고온 연유를 따져보면 실로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당당한 좌우승상은 과부 한명을 서로 취하겠다고 싸워서 일어난 일이기때문이다.

그 과부는 좌령군위장군(左领军卫将军) 설유길(薛惟吉)의 미망인인 시씨(柴氏)이다. 설유길의 부친은 송태조시기의 재상인 설거정(薛居正)이다. 설거정은 우리가 지금 볼수 있는 24사(二十四史)중 《구오대사(旧五代史)》의 편찬자이니 재상이면서 재자(才子)라고 할수 있다. 이 재자는 아주 사나운 부인을 두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가 시비나 첩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할수 없이 설유길을 양자로 들이게 되였다. 설거정은 설유길을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그리하여 설유길은 하루종일 문제아이들과 어울려서 축구를 하고 술마시고 놀기를 즐기는 불효자식이 되였다.

설거정이 죽은후에 송태종이 친히 문상을 갔다가 설유길에게 물어보았다:
“불초자식은 잘 있는가? 지금은 버릇을 고쳤는가? 아마도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지 못할것같은데 어찌하면 좋은가?”

설유길은 곁에서 두려움에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후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였다. 그는 아래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주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후에 그의 안해로 인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과부사건이 벌어진것이다.

시씨는 설유길의 후처이다. 나이가 젊어서 과부가 되였고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설유길의 두 아들인 설안상, 설안민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개가를 하려고 했다. 시씨가 고른 사람은 당시 유명한 배불뚝이 재상 장제현이였다. 이 제상은 몸이 비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그는 시씨와 남몰래 혼약하기로 하고 사람과 수레를 보내여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자 설안상이 개봉부에 고발했다. 그는 계모가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 모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가려고 한다고 하였다. 개봉부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 재상이다보니 감히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송진종에게 보고했다.

송진종은 사건을 크게 벌리고싶지 않아서 관리를 보내여 조용히 시씨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시씨의 주장과 설안상의 고발장은 차이가 컸다. 송진종은 부득불 이 사건을 어사대에서 심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극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피고인 시씨가 오히려 원고로 되여 거꾸로 고발했다. 그녀가 고발한 사람은 또 다른 재상인 향민중이였다. 항민중이 설씨집안의 옛집을 헐값에 사들였고 자기에게 구혼을 했다는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응하지 않으니 수치가 분노로 바뀐 항민중이 설안상을 시켜 사실을 날조하여 자신을 고발했다는것이다.

이전에 설안상형제가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자 송진종이 그들에게 조부와 부친의 재산을 팔아먹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바 있었다. 향민중까지 련루되여버리니 송진종은 그에게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향민중은 확실히 500만을 들여 설씨의 집을 사들인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최근에 상처했지만 재혼할 생각은 없으며 시씨에게 구혼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향민중이 설씨의 집을 사들인것은 황제의 조서를 어긴것이기는 하지만 일을 적당히 마무리짓고싶어했던 송진종은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시씨는 끝까지 고집했다. 다시 북을 두드리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다시 어사대에서 심리하게 되였다.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염철사(盐铁使) 왕사종(王嗣宗)은 향민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나서서 폭로했다. 향민중이 최근에 이미 고인이 된 부마도위(驸马都尉) 왕승연(王承衍)의 녀동생을 취하려고 했다는것이다. 밀약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납채는 아직 하지 못했다고 했다. 송진종은 왕씨에게 물어보고 나서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향민중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서 면전에서 그가 솔직하지 못하며 몰래 재혼에 관한 일을 추진하고있으면서 황제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얘기하였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생각해보니 향민중이 시씨에게 구혼하지 않았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제현도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사대에서 장제현을 조사하다가 시씨의 고발장이 원래 장제현의 아들이자 당시 태자중사의 직위에 있던 장종회(张宗诲)가 시씨를 시켜서 쓰게 한것이라는것을 밝혀냈다. 장제현도 이 사건에서 무관할수가 없었다. 어사대에서 다시 시씨의 심복인 종을 심문해보니 시씨가 금은보화 약 2만민(缗)을 매장했다는것을 발견했다. 얼마후에 송진종이 친히 심문하였다. 심문결과 다음과 같이 처분했다.

향민중은 재상에서 파면하고 호부시랑이 되였다. 장제현은 태상경이 되여 서경으로 갔다. 장종회는 해주별가로 강등되였다. 설안상은 황제의 조서를 위반하여 주택을 팔았으므로 태형에 처하며 팔아버린 집은 되사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어사대와 개봉부에 분부하여 수시로 감독하게 시켰다. 재상에 대한 처리의견은 송진종의 명의로 제서(制书)를 작성했는데 제서를 작성하는 한림원학사 송백은 원래 향민중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향민중에게 10덩이의 은자를 빌리려고 했는데 향민중이 이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송백은 제서를 초안하면서 글을 더욱 악독하게 썼다. 내용중에 “대짐식언 위신자매(对朕食言,为臣自昧)”와 같은 말이 들어갔다. 향민중은 제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시씨는 마음먹은대로 장제현에게 시집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금으로 구리 8근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씨주택을 재매입하는 돈은 그녀가 매장해둔 금은보화를 썼다. 결국 “남편도 잃고 돈도 잃은 격”이였다. 시씨에게 다른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두 재상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들이 그녀를 취하려고 서로 싸운 리유중의 중요한 원인이 그녀에게 돈이 많았기때문이란것이다. 리학자인 정이(程颐)는 직방배기로 이렇게 말했다.

“두 재상이 한 녀인을 서로 취하려고 싸운것은 그녀의 10만이나 되는 호주머니속의 재산때문이였다.”

그렇다면 과부 시씨에게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었을가? 고증에 의해 알려진바에 의하면 당시의 물가는 다음과 같았다. 희녕5년(1072년)에 경사(지금의 개봉) 등지의 밭을 팔려면 1등의 토지는 1무당 3관(贯) 내지 2관 500문(文)이였다. 개봉지역의 집임대료는 외지보다 비쌌다. 천희원년의 임대료는 1칸에 1일당 164문이였고 매월당 4관 491문이였다. 이상의 토지가격과 주택임대가격을 참고해보면 시씨가 매장한 2만관의 자금은 6666무의 좋은 밭을 살수 있는 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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