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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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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2015년 05월 17일 19시 23분  조회:5967  추천:2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장개석의 본부인이며 장경국의 모친인 모복매는 1882년 11월 9일에 절강성 봉화현에서 출생했다.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는 1901년에 부모의 명과 중매를 거쳐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사업을 자그마하게 꾸리는 집안들이여서 집안이 서로 맞았다. 그해에 장개석은 14세이고 모복매는 18세였다. 당시 절강일대의 민속으로는 녀자가 나이많은것이 일반적이였으며 “ 4년차이가 가장 좋은 짝이며 아주 길하고 리롭다”고 했다.

결혼식때 장난꾸러기였던 장개석은 우스개거리를 만들어냈다. 원래 신부의 꽃가마가 남편의 집안에 도착하면 폭죽을 터뜨린다. 그때 놀이를 즐기던 아이나 결혼식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물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군 했다. 신랑인 장개석은 원래 집안에서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립장인지도 모르고 곧 아이들틈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손님들이 이를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봉화현에는 “신랑이 폭죽을 주으면 부부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이런 행위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였다.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면서 욕을 했다. 신부도 가마속에서 그 말을 듣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최종결과는 역시 이 말대로 되였다.

첫날밤에 장개석은 신방에서 달아나 어머니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 말을 들은 모복매는 서럽게 울다가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어서야 잠들었다.
봉화의 풍속에 따르면 남녀가 결혼후 정월 초이틀이 되면 신랑은 처가집에 가서 세배를 드려야 한다. 왕채옥이 재삼 권고해서야 장개석은 례물을 꾸려가지고 처가집으로 갔다. 그날에 장개석의 장인과 장모도 닭을 잡는다, 오리를 잡는다, 탕원(汤圆)을 만드다 하며 바삐 돌아쳤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 사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개석의 집에서 처가까지는 걸어서 3시간이면 닿을만한 거리이지만 해가 서산에 질 때가지 기다려도 사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장개석의 처가에서는 난처해서 어쩔바를 몰랐다. 그때 모복매의 사촌동생 모홍방(毛鸿芳)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사위가 왔는데 모가사당에서 등불놀이를 하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의 장인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9년동안이나 글을 읽은 사람이 규칙도 모르다니? 모정화(毛鼎和)는 급히 곁에 있는 큰아들을 보고 말했다.

“무보야, 빨리 가보아라. 정말 너의 매제라면 그 보고 돌아가라고 해라. 오늘은 찾아오지 말라고 해라.”
모무보가 달려가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밖에서 징소리와 폭죽소리가 울리면서 등불대오가 다가오고있었다. 제일 앞에 선 소년이 바로 장개석이였는데 신이 나서 폭죽이 불을 붙이고있었다. 그 광경을 본 모정화는 화가 나서 사위인 장개석을 막아서서 대통으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너 변변치 못한 놈아!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서 이런 꼴을 보이느냐? 장씨와 모씨 두 가문을 네놈이 더럽히는구나!” 

장인에게 욕을 얻어먹은 장개석은 난처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달아났다.

결혼후 처음 몇년간은 장개석이 현소재지와 녕파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모두 모복매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때 장개석은 10여세여서 이미 다 컸지만 모복매가 모든것을 돌봐주었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장개석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나쁜 동생과 같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싸워서 장개석이 그녀의 배를 발로 찼기에 그녀는 류산을 했다.

장개석은 18세가 되자 우국우민의 의식이 있었기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은 귀국하여 여름방학을 보내군 했는데 상해에서 머물렀다. 장개석의 모친은 모복매를 보내서 장개석을 돌봐주게 하였다. 모복매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족을 한 전통녀인이여서 장개석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다.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모복매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으며 오래동안 그녀를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모복매는 집으로 돌아간후에야 임신한것을 깨달았고 다음해 봄에 장경국을 낳았다.

모복매는 그때부터 정신적인 의지처가 생겼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아들을 돌보았다. 그때 장개석의 풍류는 점차 장개석의 모친의 귀에도 들려왔다. 장개석의 모친은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모복매를 잘 대해주라고 엄명했다. 장개석은 모친의 말을 잘 따라서 하나하나 모두 응낙했다.
모복매가 장씨집안에 시집온지 20년이 지난 1921년에 그녀가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장개석의 모친이 갑자기 사망되였다. 모복매는 의지처를 잃었다. 장례식을 끝낸후 반년도 되지 않아 장개석은 모복매의 오빠에게 서신을 보내여 모복매와 리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신의 내용은 내개 이러했다.

“10년동안 발걸음소리만 듣거나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제 결심을 했는데 이는 10년의 고통이다. 10년동안의 자극을 거쳐 이루어진것이며 또한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이다.”

이로써 볼 때 리혼할 생각을 가진것은 오래전부터라는것을 알수 있다. 장개석은 먼저 상해에서 요야성(姚冶诚)을 품었고 나중에 진결여를 취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인에게 리혼서를 보낸것이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였다. 그와 아들은 함께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고 더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왔다. 게다가 또 하나의 타격이 뒤를 이었다. 장개석이 아들에게 상해로 와서 공부하라고 한것이다. 계구의 옛날 집에는 모복매만이 홀로 남았다.

3년후인 1925년에 장경국이 구쏘련으로 류학을 갔기에 모자간은 그후 12년간을 떨어져서 지낸다. 첫2년간은 서신이 왕래되였지만 나중에 장경국이 쏘련신문에 “장개석을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집안에서의 일체서신이 단절되였다. 1927년이 되여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청혼했는데 송씨집안에서는 반드시 원부인과 공개적으로 리혼을 선포하도록 요구했다. 장개석은 계구로 돌아가서 모씨집안에 자기의 뜻을 밝혔다. 모씨집안에서는 례에 근거하여 “모복매는 이미 장씨집안에 시집갔으니 살아도 장씨의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의 귀신”이라고 답변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처리하면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였다.

어느날에 장개석은 몰래 옛집으로 모복매를 찾아갔다. 모복매는 마침 불상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를 하고있었다. 장개석은 그녀의 눈빛이 멍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는 그녀에게 리혼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옛집의 녀주인으로 남게 해줄것이며 주변사람들에게 그녀를 “대사모(大师母)”로 부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요한것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모복매는 어쩔수 없이 리혼서에 서명하였다.

10년후에 장경국은 로씨야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모복매는 마침내 아들을 만나게 된것이다. 모복매가 며느리의 중국이름을 묻자 장경국은 부친이 중국이름을 “방랑(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모복매는 “랑(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녀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랑(娘)”이고 부르면 복이 달아날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량(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후 장방량(蔣方良)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였다.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한 기간이 모복매에게는 여러해동안 가장 즐거왔던 기간이다.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있으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고향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였다. 아들도 생활이 안정되면 모친을 모시고 함께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것은 아들과의 이 만남이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였다는 점이다. 반년후에 일본군의 비행기가 계구를 폭격했고 모복매는 불행히도 총알을 맞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사망되고말았다. 그녀의 나이 58세때의 일이다.

1947년에 장개석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성묘를 했다. 아침에 그는 홀로 모복매의 묘에 가서 묵묵히 세번 절을 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작별인사인지 장개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수 없을것이다.

모복매는 어려서부터 어려 사람들이 그녀의 명을 점쳐 주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크게 부유하고 크게 귀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만 점쟁이는 남편과 아들의 부귀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더할수 없이 외롭고 처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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