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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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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끼치는 마귀의 소굴 76호
2013년 11월 17일 15시 38분  조회:6810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소름이 끼치는 마귀의 소굴 76호
 
(번역)

 
 
76호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수 없다는 한간특무조직의 소굴이였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소굴인 76호는 수많은 항일투사, 공산당원, 진보인사, 신문일군 등 일본과 한간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랍치하고 암살했으며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1939년에 상해주둔 일본령사관의 추천에 의해 이미 일본에 투항한 원 국민당특무와 일본군부의 대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贤二)가 만나서 “상해특공계획”을 제출했는데 일본대본영의 중시를 받았다. 일본대본영에서는 “정묵촌(丁默邨)일파의 특무사업을 원조할데 관한 훈령”을 내려보냈다. 일본군부는 1939년 5월에 상해에서 괴뢰정권을 세우고 리사군(李士群), 정묵촌특무본부와 왕정위괴뢰본부를 합류시켰다. 왕정위괴뢰 국민당제6차대표대회에서 왕정위괴뢰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 특공총부를 정식으로 성립하고 특무위원회주임위원을 따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묵촌을 부주임위원으로, 리사군을 비서장으로 임명했다. 또 정묵촌을 특공총부 주임으로, 리사군과 당혜민(唐惠民)을 특공총부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1939년 9월 5일에 왕정위괴뢰정권의 특무조직인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가 상해에서 성립되였다. 그전에 한간 정묵촌과 리사군은 일본군부의 지시를 받고 특무조직을 세우고 상해 대서로(大西路)의 76호에 특무조직기구를 설립했다. 그후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원인때문에 일본특무조직에서 극사비이로(极司菲尔路) 에 위치한 76호를 특무활동장소로 정했다.




 
76호의 창시자는 리사군이였다. 민국10대한간중의 한 놈인 리사군은 일찍 공산당에 가입했고 구쏘련에 가서 류학했다. 그후 국민당에 체포된 그는 국민당의 중통특무로 되였다. 1938년에 또 일본특무기관에 투항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한간으로 되였다. 상해를 점령한후 상해를 통제하기가 급해난 일본군은 돈과 무기를 내여 리사군에게 될수록 빨리 한간특무조직을 세울것을 명령했다. 자신의 영향력이 부족함을 느낀 리사군은 달갑게 한간으로 되려는 정묵촌을 청했다. 정묵촌은 군통과 중통의 이중간첩이였다. 리사군과 정묵촌은 특무망을 통해 달갑게 일본에 투항하려는 군통과 중통의 특무들을 골간으로 하고 지방깡패들을 졸개로 하는 한간나부랭이들을 끌어모아 상해의 대서로 76호에 특무조직을 세웠다. 그후 활동의 편리를 위해 일본특무기관인 “매기관(梅机关)”의 중좌급특무가 극사비이로의 76호에 자리잡은 원 안휘성주석 진조원의 공관을 정묵촌, 리사군의 특무조직 주둔지로 정했다.

1939년 5월에 나라를 배반하고 일본에 투항한 왕정위가 상해에 와서 괴뢰정권을 세울 준비를 했다. 일본침략군은 왕정위괴뢰정권의 실력을 증강하기 위해 정묵촌, 리사군의 특무조직을 왕정위에게 주어 리용하게 했다. 세력이 약했던 왕정위는 이 특무조직을 자신의 괴뢰통치를 실시하는 지주의 하나로 삼았다. 76호내에는 시부야준위를 통령으로 하는 일본헌병분대가 있었는데 그들의 직책은 76호의 한간특무들을 감시하는것이였다. 76호에서 큰 행동을 할 때마다 사전에 일본특무기관에 통지해야 하며 전반행동은 일본특무기관에서 파견한 특무들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지 이미 1년이 지난 1938년에 곳곳에서 참담하고 어두운 구름이 드리웠지만 유독 상해의 영국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만이 외국인의 세력에 의거하여 여전히 전쟁의 화를 입지 않고있었다. 게다가 국민당의 2대특무기구인 군통과 중통이 상해에 대량의 특무를 잠복시켜 한간과 일본인을 암살해 일본인들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런 상황이였지만 일본특무기구인 특고과는 상해에서 근본 그 작용을 발휘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골치를 앓고있던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는 군통과 중통과 같은 특무조직인 왕정위괴뢰정권의 76호를 세울 생각을 하게 되였다. 또 한방면으로는 당시 국민당 부총재인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하여 윁남으로 도망가자 군통특무두목 대립은 왕정위를 암살하기 위해 천진특무소의 19명 특무를 윁남에 파견하였다. 결과 왕정위의 비서가 암살당하고 왕정위는 살아남게 되였다.

이 사실로부터 왕정위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일본인들은 왕정위의 이름을 빌어 한간특무조직인 76호를 세웠다. 76호가 갓 세워졌을 때 사람이 모자랐기에 리사군은 청방의 최고우두머리 두월생(杜月笙)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두월생의 거절을 받았다. 그후 리사군은 청방의 두목 계운경(季云卿)을 찾아갔다. 계운경이 한간으로 되기를 원했기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76호의 개다리로 되였다.

특무위원회의 주불해(周佛海), 정묵촌, 리사군은 왕정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특무들을 지휘하여 조금의 인간성도 없는 38가지의 잔혹한 고문방법을 만들어냈다. 그 고문형에는 묶어놓고 때리는것, 호랑이의자(고문용의자의 하나)에 앉게 하는 고문, 고추물을 먹이는 고문, 전기고문, 쇠침으로 찌르는 고문, 반공중에 묶어놓고 강한 해볕을 오래 쪼이게 하는것, 지하감옥, 물감옥 등이 있었다. 76호특무들은 사회상에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가로등아래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머리를 걸어놓기도 하고 위협대상자의 집안에 끊어진 손과 발을 던지기도 하는가 하면 또 위협대상자의 문에 비수를 꽂아넣기도 하고 탄알을 넣은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뒤를 따르다가 인질을 랍치하는것은 보통일이였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의 기간에 76호특무들이 저지른 암살, 랍치사건은 3000여건에 달했다.

76호는 일본인들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두목 리사군은 도리여 일본인들의 손에 죽었다. 태평양전쟁이 폭발된후 일본은 새로운 침화정책(侵华政策)을 추진했다. 태평양전쟁에 수요되는 전략물자를 얻기 위해 일본은 왕정위괴뢰정권을 강화하고 상해대자산계급을 위로해야 했다. 일본은 또 조계지에 진입한후 혼란한 상황이 생기는것을 바라지 않고 국면이 안정되기를 바랐다. 때문에 76호에서 계속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는 자는 일본인의 리용가치를 잃게 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76호의 세력은 이미 강대하게 되여 일본들이 배척하기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더는 자신의 뒤심이 되여주지 않는것을 눈치챈 특무두목 리사군은 자신의 퇴로를 남겨두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군통특무들과 련계하여 군통의 행동에 도움을 주는 한편 공산당의 지하일군들이 상해에서 철수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표시했다. 중경의 국민당군통특무들은 리사군이 공산당인사를 도와준다는것을 알게 된후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리사군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일본특무조직에서도 자신들이 기르던 리사군이란 이 개가 꼬리가 너무 커서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것을 보고 이런 개를 더 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본특무조직과 군통특무조직은 합작하여 리사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에 일본헌병대는 먼저 리사군의 심복이며 76호의 경위대 대장인 오세보(吴世宝)를 독살했다. 1943년 9월에 상해의 일본헌병대 특고과(特高课) 과장 오까무라(冈村)는 집에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리사군을 청했다.

“당신이 군통의 웅검동(熊剑东)과 모순이 있는것을 알고있네. 내가 웅검동을 불렀으니 우리 집에 와서 한잔하면서 두 사람이 화해하게나.”

리사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가지 않을수 없었다. 오까무라는 리사군에게 독약을 넣은 소고기과자를 권했다. 리사군은 사전에 일본인이 권하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오까무라가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한입을 먹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지만 일본인이 사용한 독이 너무 강해서 소용이 없었다. 리사군은 집에 돌아와 이틀동안 앓다가 죽고말았다. 리사군이 죽은후 76호내의 크고 작은 두목들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다가 결국 조직이 와해되고말았다.

그후 76호는 개조되고 왕정위괴뢰특공총부는 최소되였다. 그리고 따로 정치보위국이 세워지고 그 밑에 제1국과 제2국을 두었다. 제1국은 의연히 원래의 76호에 자리잡았지만 권세는 이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1944년 11월에 왕정위는 일본에 가서 병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그러자 한간특무조직은 약화되였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하자 76호도 철저하게 멸망되였다. 76호에서 악행을 일삼던 한간특무두목 정묵촌은 1947년에 총살당했다. 나머지 중층두목인 소성덕, 양걸 등도 징벌을 벗어나지 못하고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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