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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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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2014년 11월 16일 11시 26분  조회:8354  추천:6  작성자: 넉두리

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번역)





 
 
저명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1907년 8월 10일~1984년 2월 5일)는 중국인민해방군 10대 대장 순위에서 서렬이 1위이다. 1955년 9월 중순에 한단을 시찰하고 돌아온 모택동은 중남해 이년당에서 주은래, 주덕, 류소기와 함께 해방군고급장교들에게 군사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문제를 토론할 때 “전공, 경력, 재능, 품덕을 놓고 볼 때 속유는 모든 방면에서 능히 원수계급을 받을수 있습니다. 해방전쟁에서 화동야전군의 통수 속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하고 말했다.
하지만 속유는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그후 새로운 원수명단이 확정되여 정식으로 발표할 준비를 하고있을 때 당내의 몇몇 고위급간부들은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이 군을 떠나 지방에서 사업했다는 리유로 원수계급수여명단에서 제외된 정황을 언급하면서 똑같이 지방에서 사업한 진의에게 원수계급을 수여하게 된데 대해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진의는 1954년 9월에 국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 정법, 문화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였고 1955년 5월에 국무원에서는 진의에게 제1판공실, 제2판공실, 민족사무와 과학, 위생사업을 관할하게 했다. 만약 이런 문제로 진의가 원수계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장기간 실제적으로 화동야전군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중임을 맡았던 속유를 다시 원수명단에 넣는것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속유자신이 다시 사양한것도 예상하던 일이였다.
1955년 9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는 인민해방군장군계급수여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국무원비서장 습중훈이 인민해방군군관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주은래총리의 명령을 선독하고 국무원총리 주은래가 속유(粟裕), 서해동(徐海东), 황극성(黄克诚), 진갱(陈赓), 담정(谭政), 소경광(萧劲光), 장운일(张云逸), 라서경(罗瑞卿), 왕수성(王树声), 허광달(许光达) 10명에게 대장계급을 수여했다. 그날 오후 5시에 중남해회인당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수여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원수는 한어사전에서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있다. 하나는 군대중의 통수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군보다 높은 계급을 뜻한다. 속유는 한개의 방면군인 화동야전군(제3야전군)을 거느린 통수로서 가장 많을 때에는 82만 5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속유는 제4야전군 총사령이였던 림표를 제외하고 직접 제일 많은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한 고급장군이였다. 때문에 전자의 뜻을 놓고볼 때 속유는 원수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뜻을 놓고 볼 때 속유의 계급은 대장이였기에 원수라고 할수 없다. 비록 10대 대장의 서렬에서 첫순위라고 하더라도 속유는 필경 원수가 아닌것이다.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놓고 볼 때 대장은 원수가 향수하는 대우보다 차하였고 지명도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겸손했던 속유는 “내가 대장계급을 수여받은것도 높다고 생각하는데 원수라니요? 나는 나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지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략이 출중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화동야전군 통수였던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일은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있으며 군사애호가들이 관심하는 초첨으로 되고있다.
인민일보사 기자 김봉은 1950년말에 류백승과 속유를 취재한후 “년령, 자격과 경력을 놓고 볼 때 팽덕회는 자연히 속유보다 앞서지만 전공과 군사재능을 놓고 볼 때 전군은 속유가 약간 낫다고 공인하고있다. 그러나 속유는 대장계급을 수여받았고 팽덕회는 원수계급을 수여받았다”고 서술하여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유감을 표달했다. 《개국장군일화》라는 책에는 “속유장군은 ‘7전7첩’, 로남, 맹량고, 사토집, 예동, 제남, 회해, 도강, 상해 등 중대한 전역을 지휘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지만 1955년의 계급평의에서 원수계급에 오르지 못한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속유가 1948년 5월에 진의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직을 양보하고 자신이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직과 정위대리직밖에 맡지 않은 력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속유를 인격이 높고 절개가 곧다고 칭찬한 동시에 탁월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속유가 양보한것은 당시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뿐만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계급이기도 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1948년에 모택동은 중원야전군과 협동작전을 하기 위해 화동야전군 사령원이였던 진의를 중원야전군 부사령원으로 파견하고 속유에게 3개 종대를 거느리게 하여 도강작전을 지휘하도록 결정했다. 그리하여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 겸 정위로 임명했다. 하지만 속유가 진의에게 속했던 그 직위를 사양하자 중공중앙에서는 진의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을 보류하고 속유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겼다. 속유는 소수민족인 동족(侗族)이였지만 자신이 동족인것을 모르고있었다.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이렇게 서술했다.
“사학가와 민족학가들은 ‘만약 속유가 자신이 동족인것을 일찌기 알고있었더라면 1955년에 계급제를 실시할 때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한분의 동족원수가 나타났을것이다’고 탄식하여 말했다.”
당시 28명의 군사위원회 위원중에서 속유는 서렬 15위였다. 나중에 원수계급을 받은 라영환은 이 명단에 들지 못했다. 서렬이 속유보다 앞섰던 군사위원회 위원은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팽덕회, 정잠(程潜), 하룡, 류백승, 진의, 림표, 서향전, 엽검영, 섭영진, 고강(高岗)이였다. 대원수립후보자(候选人)였던 모택동, 국민당군의 1급상장이였던 봉기장군 정잠 및 주요하게 지방사업을 책임졌던 류소기, 주은래, 고강을 제외하면 속유는 서렬 10위였다. 또 모택동은 속유를 10명의 원수명단중 제7위에 넣었다. 하지만 속유는 여러가지 원인을 고려하여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1948년에 모택동이 “속유에게 전역지휘를 책임지게 한다”고 지시했을 때 화동야전군 사령원 진의는 도량이 넓게 속유의 전역결책과 전역지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역이 시작되였을 때 진의는 늘 지휘실을 떠나면서 “내가 여기를 떠나는것은 매우 필요하오. 속유사령이 번마다 나에게 보고하여 시간을 지체하는것을 피면할수 있기때문이요”하고 말했다. 그번에 모택동이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하고 진의를 중원으로 보내 후근을 관할하게 했는데 속유는 후근사업이 진의의 특장이 아니라고 여겼다. 때문에 속유는 사양하면서 모택동에게 “진의동지는 화동야전군을 떠날수 없습니다. 그를 보내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요. 진의동지와 등자회동지는 중원국, 중원군구에 가서 사업하게 되니 동무가 화동야전군을 책임지오”라고 말했다. 속유는 하는수없이 마지막으로 “진의동지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무를 계속 보류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한참 생각해본후 속유의 요구를 동의했다. 그리하여 속유는 진의가 중원군구로 떠나간후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다. 이는 속유가 후에 원수계급을 수여받는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지적해야할것은 그번의 사양으로 정식사령원이란 명의가 없었기때문에 객관상에서 속유의 지명도가 떨어졌고 그가 세운 전공이 약화되고 전이되고 마멸된것이다. 이 사실은 명예를 탐내지 않는 속유의 고상한 정신을 말해준다.
계급을 수여할 때의 현임직무로 보아도 속유는 원수계급에 합당한 립후보자였다. 1954년 10월 31일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장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개칭했고 종속인민혁명군사위원회를 종속중공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했다. 총참부는 아래에 작전부, 정보부, 기술부, 통신부, 군무부, 장비계획부, 인민무장부, 군사운수사령부, 정치부, 간부처, 측량국, 행정경제관리부 등을 관할하는데 속유가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계급이 정식으로 선포되기전에 성격이 직방배기인 허세우는 자신의 계급이 상장밖에 안된것을 알고 주은래를 찾아가서 대장계급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은래는 “속유도 대장계급밖에 받지 못했소”라는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허세우는 더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속유가 화동야전군을 실제로 지휘하던 부사령직을 맡아서 맹량고전역의 기적을 창조했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 9종대의 사령원이였다. 그리고 속유가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에서 한개 성을 공격하는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속유가 대장계급을 받게 되였다면 자신은 상장계급밖에 받을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원수계급수여의식은 이미 지나간 력사로 되였다. 하지만 후세사람들에게 약간의 유감도 남겨놓았다. 모택동은 속유를 보고 “당신은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지만 원수가 하는 일을 하고있소”라고 말한적이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가장 우수한 장군의 한분인 속유는 비록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의 높고도 영원한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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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진실
날자:2014-11-19 00:44:01
진의가 화동야전군에서 밀려난것은 속유의 군사재능때문이라기보다는 화동야전군의 실제 제1책임자였던 화동국의 서기였던 요수석의 눈밖에 났기때문이였다. 회해전역을 총지휘한 사람은 실제로 요수석이였고 속유는 그 밑의 군사총지휘관에 지나지않았다. 요수석은 상해가 해방된뒤에도 또 상해시위 제1서기직에 있었고 진의는 그의 밑에서 부서기 겸 상해시작을 겸직하고 있었을따름이였다. 진의는 신사군 시절부터 화동야전군시절 그리고 상해시장 시절과 후에 북경으로 올라와 외교부장으로 있었을때도 줄곧 요수석보다 직위가 낮았고 요수석의 눈밖에 났었다.
신사군시절 요수석은 신사군 정치위원(항영이 살았을때는 정치부 주임과 부정위, 완남사변 이후에는 정치위원으로 승직, 화동야전군 시절에는 화동군 제1서기 상해 시절에는 상해시위 서기, 북경에 올라와서는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을 맡았었다.
속유는 진의보다 요수석을 더 존경하였으며 요수석도 줄곧 진의를 배척하고 속유를 중용하였다. 그런데 속유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회해전역을 직접 지휘하였다는 말을 한마디도 써넣지 않았다. 물론 이 전역을 총지휘하였던 요수석의 이름자도 들어가 있지 않다.
대신 회해전역의 대부분 전공을 훔친 사람은 진의와 등소평이였다.
1   작성자 : 삿갓
날자:2014-11-16 18:08:56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것은 확실히 아쉬운 일입니다.
그가 원수계급을 사양한 리유중의 하나를 더 보충한다면,
금문도 작전에서 속유가 실수해 근 1만명에 달하되는 해방군 장병들이 전멸되었기에 속유는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당시 누구도 그 책임을 내놓고 추궁하지는 않았으나 속유는 원수 계급을 사양하는 것으로 그 작전의 실패를 책임지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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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송미령의 생일비밀 2014-12-07 0 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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