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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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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2)
2014년 11월 23일 10시 50분  조회:6906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보로딘은 광주에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풍격은 주위사람들을 깊이 감염시켰다. 그의 명성은 원동지구에 쫙 퍼졌다. 혁명자들은 그를 광주의 “레닌”이라고 불렀다. 상해조계지에서는 그를 “홍색수도”의 “홍색야수”라고 말했다. 이렇게도 령리하던 보로딘은 손중산이 사망된후 눈에 콩깍지가 씌웠던지 속마음이 씨꺼먼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앉도록 밀어주었던것이다.
당시 장개석이 강유력한 인물로 되려면 장애가 되는 세 사람을 제거해야 했다. 그 세 사람은 군사부장 허숭지, 외교부장 호한민, 재정부장 료중개였다. 일반적인 규률로 보면 장개석이 이런 장애를 제거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불가능했던 일이 몇개월내에 발생되였다.
1925년 8월 20일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국민정부위원회와 군사위원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보로딘에게 집중되였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몇달동안 보로딘은 광주정부에서 주요하게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되였다. 겉으로는 모든 결의가 몇몇 국민당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하는것 같았지만 사실은 보로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그가 거주하고있는 저택의 웃층에는 늘 광주정부의 부장들, 국민당중앙집행위원들과 중국공산당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아래층에는 번역일군들이 중문문서를 영어거나 로어로, 영어거나 로어를 다시 중문으로 번역하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각종 재료, 보고, 지시가 보로딘의 거처에서 끊임없이 전달되였다.
보로딘은 그번의 중요한 회의에서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 세 사람으로 특별위원회를 세우고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권한을 주자고 건의했다. 이는 구쏘련의 “반혁명숙청및태업특설위원회”의 조직과 비슷했다. 보로딘자신은 특별위원회의 고문을 맡았다. 그의 건의가 곧 결의였기때문에 그 건의는 즉시 통과되였다.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대권을 틀어쥐고있는 특별위원 3인중에 왕정위는 국민당정부 주석이였고 허숭지는 국민당정부 군사부장이였지만 장개석은 월군참모장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상의 직무를 맡은적이 없었다.
사실 그전에 보로딘은 장개석을 전도가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때문에 구쏘련에서 파견되여온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 가륜(加伦)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가륜은 중국에서 쓴 이름이고 그의 본명은 와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이다. 가륜은 마땅히 허숭지를 등용하여 황포와 대등한 군사력량을 배양해야 한다고 보면서 어느 개인이거나 어느 한 파가 중심이 되는 우환을 방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보로딘은 허숭지의 월군은 구군대여서 큰 임무를 맡을수 없다고 여기면서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새 군인들이 혁명성질을 갖고있기에 큰 임무를 맡을수 있다고 인정했다. 7월에 국민정부가 성립되였을 때 가륜은 다시 군사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허숭지를 위수로 하는 군사위원회제도를 건립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보로딘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장개석을 지지했다.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갈수록 엄중해지자 모스크바에서 나서서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보로딘은 청년시절부터 쓰딸린을 알고있었다. 때문에 보로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쓰달린은 장개석을 신임했다. 결과는 가륜이 광동을 떠나게 되였다.
군사고문인 가륜은 자못 정치의의가 있는 의견을 제기했지만 정치고문인 보로딘은 관건적인 시각에 장개석의 군사재능에 속아 개인정치시야의 사각에 빠져버렸다. 그는 직접 지극히 큰 권력을 장개석의 손에 쥐여주었다.
중국에는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천번에 한번쯤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한번의 실수는 너무 크고 너무 관건적인것이여서 이미전에 쌓았던 999번의 성공이 이 한번의 실수로 훼멸되였다.
파스퇴르(巴斯德)는 기회는 준비된 자의 편이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갑자기 수중에 “정치, 군사, 경찰을 관할할수 있는 대권”이 쥐여졌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군사조직을 즉시 움직여 먼저 허숭지를 억압했다.
1925년 8월 20일에 중국국민당집행위원회 위원,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황포군관학교 당대표인 료중개가 국민당중앙당부의 문밖에서 피살되였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일정한 정도로 력사방향을 개변시킨 돌발사건이였다.
장개석은 허숭지가 이 사건에 관련되여있다는 리유로 군대를 지휘해 그의 저택을 포위했다. 허숭지는 황망히 상해로 도주했다.
그 다음으로 제거해야 할 인물은 호한민이였다. 장개석은 호한민의 동생 호의생이 료중개의 암살사건에 관련된다는 리유로 호한민을 조사받게 한후 외교사절로 구쏘련에 보냈다.
료중개피살사건을 처리하면서 장개석은 권력쟁탈에 장애가 되는 세 인물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6개월후에야 보로딘은 자신이 마귀병마개를 열어주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허숭지, 호한민, 료승지가 소실된후 보로딘은 이미 원래의 생각대로 장개석을 견제하지 못하게 되였다.
보로딘은 장개석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료중개를 매장하고 허숭지와 호한민을 쫓아버린후 장개석의 앞에서는 아직도 마지막 3개의 장애가 남아있었다. 그 3개의 장애는 바로 앞에 나서서 지휘하고있는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 막후에서 조정하고있는 국민정부정치고문 보로딘, 마음속의 철전지원쑤 중국공산당이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조직의 전부력량을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기전에는 계속 보로딘의 힘과 영향을 리용해야 했다. 보로딘의 말은 왕정위와 장개석중에서 의연히 결정적인 작용을 놀았다. 장개석은 반복적으로 “보로딘의 의견은 곧 나의 의견입니다”라고 했던 손중산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로딘을 춰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로딘을 제거할 시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시기가 다가왔다. 제2차동정(东征)에서의 대승은 장개석의 명성을 하늘을 찌를듯이 높여주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남녀로소와 사회 각 단체들로 이루어진 환영대오가 길량옆에 쭉 늘어섰다. 대중들이 빼곡이 둘러싸서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하고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장개석에게 광주의 왕정위, 담연기, 오조추, 고응분, 송자문이 련명으로 축전을 보냈고 국민정부요원들이 한줄로 서서 경의를 표시했다. 이렇게 군권을 틀어쥔 장개석은 위풍이 당당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6년 1월에 광주에서 국민당제2차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1표기권외에 전부찬성의 최고표수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 기권표는 장개석자신일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전부찬성표보다 더 강한것이였다. 그번 대회에 참석한 공산당대표 100명은 모두 장개석에게 찬성표를 던져주었다. 그해에 장개석은 40세였다. 송경령은 동정승리후의 광동형세에 대해 말할 때 “이 기간의 형세는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욱 좋았다”고 평가했다.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 좋았다”는 한마디가 송경령의 입에서 나왔다는것은 최고의 칭찬이였다. 국민당제1차대표대회에서 입장권도 얻지 못했던 장개석은 제2차대표대회에서 개인명성이 정점에 달했다. 이렇게 명성이 정점에 달하게 되자 손을 쓰기도 편리했다.
1926년 3월 20일에 발생된 “중산함사건”에서 장개석은 료중개, 허숭지, 호한민을 쓸어버릴 때처럼 일거삼득의 효과를 보았다. 이번에 타격할 목표는 중국공산당, 구쏘련고문단, 왕정위였다.
때마침 보로딘이 광주에 없었다. 구쏘련고문은 전부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였다. 장개석은 또 “당무안정리”를 리용하여 암암리에 보로딘을 배척하여 실권을 잃어버리게 했다. 공산당원도 “당무안정리”후에 핍박에 의해 국민당중앙과 제1군에서 퇴출했다. 장개석은 왕정위를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했다.
1927년 7월 15일에 왕정위는 무한에서 “분공(分共)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을 반대하겠다는 립장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로서 대혁명은 완전히 실패했다.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은 보로딘은 1926년부터 1927년의 1년사이에 장개석에 의해 “손중산총리가 사망된이래 우리에게 이처럼 위대한 정치활동가가 없었다”고 높이 떠받들렸다가 “적색혁명을 선동하여 정권을 뒤엎으려고 시도한 음모가”로 되여 즉시 잡아들여 총살해야 될 운명에 처했다. 정치인물은 왕왕 순식간에 상전백해속에서 사람들이 짐작할수 없는 인물로 되여버린다. 보로딘은 장개석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으며 장개석도 보로딘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전에 일본사관생이였던 장개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복하고있었고 자신을 리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당년에 보로딘이 장개석을 권좌에 올려놓는것을 반대했던 가륜은 귀국후 1938년 10월에 있은 구쏘련의 반혁명숙청운동에서 체포되였다. 구쏘련주재 중국대사 양걸의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가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손과를 특사의 신분으로 구쏘련에 보내여 쓰딸린에게 가륜을 자신의 사인고문으로 파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쏘련의 반혁명숙청행동은 너무 빨랐다. 가륜은 체포되여 한달만에 총살되였다. 손과가 쓰딸린에게 장개석의 요구를 전달했을 때 쓰딸린은 가륜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반대했던 가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장개석은 도리여 자신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았던 보로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체포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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