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미녀갑첩에 대해 영화를 통해서 얼마간 알고있지만 그녀들의 진실한 생활은 어떠했으며 그녀들의 운명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다.
로씨야 미녀간첩 안나 채프먼
로씨야의 미녀갑첩 안나 채프먼(安娜·查普曼)은 미녀갑첩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떠올랐다. 18살에 간첩활동을 시작한 안나 채프먼은 세계적인 남성잡지(성인) 《맥심》2010년 11월호에 속옷차림의 성감적인 모습으로 표지모델을 장식하여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성감미인가를 보여주었으며 최근에는 로씨야의 국가영예훈장을 받아 세계언론의 화제인물로 되였다.
1982년 2월 23일에 로씨야의 쓰딸린그라드에서 태여난 그녀는 미국의 국가정책결정에 관여하는 유력자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맡았다. 안나 채프먼은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미국에서 상류층이 즐겨찾는 오락장소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여 유력인사들과 친분을 맺으며 이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수집해왔다.
그녀는 미국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결국 간첩용의자로 체포되였다. 이 무렵에 그녀의 라체사진이 영국과 미국의 대중잡지에 실려서 화제가 되였는데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은 그녀의 전 남편인 알렉스 채프먼이 돈을 받고 판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미국과 로씨야에서는 간첩행위에 대하여 신속히 협상을 하였다. 결과 로씨야에 수감되여있던 미국갑첩 10명과 미국에 체포되여있던 로씨야간첩 4명을 맞교환하기로 하면서 안나도 그속에 포함되여 로씨야로 돌아왔다.
안나는 “사랑과 우정이 주는 매력은 세상 어느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3가지류형으로 나눌수 있는데 가장 원시적인 남자들은 오직 성관계만을 원하고 조금 더 똑똑한 남자들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최고수준의 남자자들은 사랑받기만을 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삶속에서 사랑을 가장 크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느끼는것을 원하고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로씨야 국영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2010년 12월 31일에 안나 채프먼을 “2010년 로씨야의 최고녀성”으로 뽑았다. 그녀는 2010년 12월에 통합로씨야당 청년근위대 대의원으로 되였고 로씨야의 한 은행에서 은행장의 투자 및 혁신분야자문직을 맡아 일하고있다. 몇년전에 로씨야대통령 메드베데프는 친히 그녀에게 국가의 최고훈장을 수여하여 그녀가 세운 공헌을 긍정해주었다.
독일미녀갑첩 마타하리
간첨력사에서 가장 유명한 색정녀갑첩이라고 불리우는 마타하리(玛塔哈莉)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7층면사포라는 춤을 춰서 옹근 유럽을 미치게 만들었으며 남자들은 그녀와 하루밤을 즐기기 위해 수천프랑을 쓰는것을 아까와하지 않았다. 그녀의 간첩생활은 그녀의 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간첩활동을 한 마타하리는 1876년 8월 7일에 “마가레타 게크루디아 젤레”라는 이름으로 화란에서 출생했다. 원래 평범한 녀성이였던 그녀는 화란장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리혼했다. 그후 그녀는 프랑스 빠리의 물랭루즈에서 “마타하리”라는 예명을 쓰면서 무희로 활동하며 유명세를 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정보국에서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간첩활동을 하게 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국방장관과 외교관, 군장교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해 독일에 넘겼다. 그러나 중간에 프랑스정보국의 부탁을 받고 프랑스의 간첩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정보국에서는 마타하리에게 독일군의 첩보장교를 유혹하는 임무를 주었다. 그런데 마타하리를 의심한 독일정보국에서는 그녀의 간첩신분을 고의적으로 흘렸다. 결국 프랑스정보국에서는 독일간첩인 그녀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프랑스군은 그녀때문에 수십만명이 사망되는 손실을 입었다. 마타하리는 1917년10월 15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였다.
영국 미녀간첩 낸시 웨이크
가장 용기있는 녀갑첩이라고 불리우는 낸시 웨이크(南希韦克)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검은명단의 첫 순위에 올랐다. 독일군은 그녀를 잡기 위해 500만프랑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12년에 뉴질랜드에서 출생한 낸시 웨이크는 프랑스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했다. 제2차대전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영국간첩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대호 “흰 쥐”로 불리우는 그녀는 1943년에 독일군의 1급목표물이 되여 5백만프랑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1943년에 간첩망이 배신하자 그녀는 마르세이유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체포되여 독일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였다. 그후 낸시 웨이크는 툴룽에서 체포되였지만 간신히 도망쳐 나와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빠냐로 도주한 다음 영국으로 건너가 간첩훈련을 받았다. 1944년 4월밤에 락하산으로 프랑스 오베른에 투하된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련락망을 구축하고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앞서 간첩활동을 벌리며 몽트루송의 독일군본부의 통신선을 끊는 등의 활약을 했다. 1944년 4월부터 프랑스가 해방되기까지 7000명의 저항세력을 이끌고 2만 2000명의 독일친위군과 전투를 벌려 1400명을 소멸하여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결속된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나라들에서는 그녀에게 최고영예훈장을 수여했다.
영국 미녀간첩 크리스티나
1915년에 뽈스까(폴란드)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한 크리스티나(克里斯蒂娜)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미모가 뛰여났는데 성인이 된후 뽈스까의 미녀선발에서 최고미녀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1939년 9월에 독일군이 뽈스까를 점령하자 크리스티나는 영국으로 들어가 간첩훈련을 받은후 여려가지 신비한 신분으로 간첩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혹적인 자색을 리용하여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임무를 집행했으며 뛰여난 용기와 지혜로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매우 가치가 있는 수두룩한 정보를 얻어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시간의 가장 저명한 녀간첩의 하나로 되였다. 더구나 그녀는 영국수상 처칠이 가장 좋아하는 녀간첩으로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결속된후 소설가 이안 플레밍(1908년 5월 28일에 영국에서 출생, 1964년 8월 12일에 사망)의 비밀련인으로 되였다. 이안 플레밍(伊恩弗莱明)은 크리스티나를 원형으로 007계렬소설중에 저명한 “제임스 본드의 녀자”를 창조했다.
조선미녀간첩 원정화
1974년 1월 2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여난 원정화(元正花)는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녀자고등중학교를 다녔는데 4학년때(1988년)에는 학습성적이 우수하여 “이중영예 붉은기휘장”을 받기도 했다. 15세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의해 발탁되여 공작원양성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다가 1992년에 머리부상으로 소속특수부대에서 의병제대했다.
그녀는 1998년에 국가안전보위부에 소속되여 간첩활동을 시작했다가 2008년 7월 15일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한국의 군경합동사법부문에 의해 체포되였다. “조선에서 넘어온 사람(脱北者)”으로 위장한 원정화는 자신의 자색으로 한국 모 부대의 장교들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의 군사기밀을 빼냈다. 한국 수원지방법원은 원정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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