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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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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가 계획한 “동방제1암살사건”
2013년 12월 14일 14시 35분  조회:6489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주은래가 계획한 “동방제1암살사건”
 
(번역)
 



 
호남성 상덕출신인 백흠은 1926년 3월에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했다. 그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에 “8.1남창봉기”에 참가했으며 1929년초에 상해에 들어가 중공중앙군위의 비서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8월 24일 오후에 백흠의 집에서 군위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중앙농민위원회 서기 겸 강서성위 군위서기인 팽배, 중앙정치국후보위원이며 중앙군위위원 겸 강서성위 군위위원인 양은, 중앙군위위원 겸 강서성위 군위위원 안창이, 중앙군위위원이며 사병운동사업을 책임졌던 형사정이 참가했다. 원래 당중앙군위서기 주은래도 참가하게 되여있었지만 림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 그런데 회의도중에 국민당특무들이 회의장소에 뛰여들어 팽배, 양은, 안창이, 형사정을 붙잡아갔다.
사건이 발생된후 주은래와 중국공산당중앙특별행동과를 책임졌던 진갱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당내에 반역자가 생겼다는것을 알아냈다. 그 반역자는 바로 백흠이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상해는 매일 피비린 학살이 벌어졌는데 백흠은 적들의 백색공포에 온몸이 떨려났다. 그는 남경이불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고있는 형을 통하여 국민당상해당지휘부정보처 처장 범쟁파를 만났다. 그는 공을 세우고 상을 타기 위해 국민당을 도와 오호(주은래의 별명), 팽배 등 공산당고위급간부를 붙잡게 하겠다고 말했다. 범쟁파는 크게 기뻐 백흠과 상의하여 중공중앙군위에서 회를 열 때 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도 주은래는 림시 다른 일이 있어서 군위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변고를 면하게 되였던것이다.
주은래는 진갱에게 국민당내부에 잠복한 동지들을 통해 팽배, 양은 등 동지들이 갇힌 곳을 알아낼것과 그들을 구원할것을 지시했다. 진갱은 적들의 심장에 잠복한 공산당비밀특공요원인 양등영을 통해 팽배 등 동지들이 갇힌 곳을 알아냈고 장개석이 이미 팽배 등 동지에게 사형명령을 내린 시간이 8월 28일 아침이란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국민당의 경계가 삼엄하여 팽배 등을 구해내지 못했다. 결국 팽배 등은 국만당반동파에게 살해당했다. 그후 팽배 등을 밀고한 반역자가 백흠이란것을 알아낸 주은래는 진갱에게 백흠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1929년 9월말에 백흠은 갑자기 국민당특무를 데리고 상해달생병원의 가달문의사를 찾아와서 병을 보였다. 원래 백흠은 팽배를 밀고하여 살해되게 한후 중공상해지하당당조직에서 자신을 가만놔두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 온종일 극도의 공포에 처했다보니 머리가 아픈 병이 생겼던것이다. 가달문은 백흠을 진찰하고나서 말했다.
“여기 잠시 앉아있으십시오. 몇가지 약이 아래층에 있으니 내가 가져오겠습니다.”
가달문은 총망히 아래층으로 내려온후 이웃집에 가서 진갱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백흠은 혹시나 가달문이 고발하러 갔을가봐 꼬리빳빳이 줄행랑을 놓았다.
백흠이 도망친것을 본 진갱은 가달문을 보고 “백흠이 병에 걸렸으니 아무때든 또 의사를 찾아올것입니다. 그가 다시 찾아오면 먼저 방법을 대여 안심시키십시오. 우리가 수시로 찾아올것입니다”라고 지시했다.
가달문은 중공지하당원인데 본명이 가린이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은페하기 위해 상해 위해위로에 달생병원을 꾸려놓았다. 아래층은 진료소이고 웃층은 지하당조직의 회의실이였다. 상해지하당조직에서는 매달 여기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주은래도 가끔씩 여기서 외지에서 회보하러 온 지하당원들을 접견했다. 그러나 백흠은 당내에서의 지위가 높지 않고 상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가달문의 진실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는 가달문을 의술이 높은 의사로만 알고있었다.
과연 백흠은 며칠후 가달문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교활한 백흠은 달성병원으로 오지 않고 가달문더러 프랑스조계지의 한 호텔로 와서 자신의 병을 봐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어느 호텔인지는 가달문이 프랑스조계지에 오기만 하면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것이라고 했다. 가달문은 이 정황을 즉시 진갱에게 회보했다. 진갱은 가달문더러 백흠을 치료해주면서 그의 병세가 차도가 보이되 완쾌됐다는 느낌은 가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가달문이 약속한 지점으로 가니 거기에는 백흠과 그의 안해가 있는외에 정보처 처장 범쟁파도 있었다. 백흠은 가달문이 들어서자마자 의심스러운 말투로 “그날 당신이 약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고 해놓고는 왜서 밖으로 나갔습니까?”라고 물었다. 가달문은 웃으면서 “제가 아래층으로 내러가보니 한가지 약이 모자라기에 가까운 약방에 약을 사러 갔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당신이 이미 갔더군요. 왜서 약도 가지지 않고 갔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백흠도 그날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며칠후 백흠은 두번이나 가달문을 불렀는데 모두 하비로의 한 골목에 있는 43호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백흠이 이 저택에 거처한다고 짐작한 가달문은 이 정황을 진갱한테 회보했다. 진갱은 비밀특공요원인 양등영에게 반역자를 처단할데 관한 주은래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43호가 어떤 곳인가를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본명이 포군보인 양등영은 어릴 때 일본에서 공부한적이 있어서 일본어에 능했다. 그는 국민당특무기관내부에 들어온후 국민당특무조직 중통의 두목인 진립부의 신임을 얻어 국민당중앙조직부 상해주둔 특파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상해에 파견된지 얼마 안되여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 사람으로 당원이 아닌 신분으로 공당산당의 특공요원이 되였다. 양등영은 많은 중요한 정보를 공산당에 제공해주어 긴요한 관두에 수많은 중공상해지하당 동지들을 구해주었다.
이번에 양등영은 신속하게 “43호가 바로 정보처 처장 범쟁파의 저택이며 국민당특무들이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있다”는 정보를 진갱한테 전해주었다. 그후 양등영은 리유를 찾아 범쟁파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범쟁파는 진립부의 신임을 얻고있는 특파원을 깎듯이 모시면서 백흠을 소개해주었다. 양등영은 불안에 떨고있는 백흠을 자신이 보호해주겠다면서 몹시 관심해주는척 했다.
백흠은 정보처 처장 범쟁파의 저택에 거주하면서 양등영특파원의 “보호”를 받고있지만 팽배 등 렬사들의 피투성이 된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는가 하면 지하당원들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정경이 자꾸 눈앞에 나타나면서 발편잠을 잘수 없었다. 그는 날마다 공포에 떨면서 범쟁파에게 남경방면에 보고하여 자신을 빠른 시일내에 외국에 피신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남경이나 광주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국내에 있는한 지하당원들이 꼭 자신을 찾아내여 팽배의 원쑤를 갚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결국 남경방면에서는 백흠을 이딸리아에 피신시키는데 동의했다. 이는 절대기밀이였지만 범쟁파와 백흠은 “보호자”인 양등영특파원에게 알려주었다. 양등영은 이 소식을 진갱에게 전해주었고 진경은 또 주은래한테 회보하였다. 주은래는 백흠이 도망치는 시간, 부두, 출발차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내여 반역자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백흠과 범쟁파는 양등영과 상의하여 출발시간을 1929년 11월 11일 밤 11시로 정하고 배표도 미리 사놓았다. 범쟁파는 승용차 2대를 저택뒤문어구에 세워두어 백흠부부가 도망칠 때 타고갈수 있도록 했다. 양등영은 만약 백흠이 차에 앉아서 뒤문을 나서게 되면 지하대원들이 그를 처단하기가 매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배치가 좋기는 하지만 만약 깊은 밤중에 2대의 차량이 문어구에 주차해있으면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낼것입니다. 만약 소식이 공산당한테 전해지기라도 하면…”
양등영이 일부러 이렇게 말하자 범쟁파는 “그럴수 없습니다. 이 일은 우리집의 집사도 모르고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양등영은 “팽배가 살해된후 공산당은 몰래 백흠의 종적을 정찰하고있습니다. 그들은 틈만 있으면 파고드는데 만약 그들이 이곳을 의심하고있고 또 문어구에 2대의 차가 세워져있는것을 보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라고 한술 더 떴다. 결국 범쟁파는 2대의 차량을 43호문어구에 세워두지 않고 뒤문에서 50메터 떨어진 골목에 세워두었다. 양등영은 이 모든 정황을 진갱한테 전해주었다. 진갱은 “참 잘했소”라고 양등영을 칭찬해주었다.
1929년 11월 11일 저녁에 양등영은 작별인사를 한다는 명의로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범쟁파의 저택으로 찾아가서 백흠한테 주었다. 백흠은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줄도 모르고 양특파원의 “관심”에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양등영은 백흠이 원 계획에 따라 도주하려는것을 알고 시름을 놓고 돌아갔다.
그날밤에 반역자를 처단하러 온 지하공산당원들은 43호의 뒤문에 매복했다. 밤 11시에 43호의 뒤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와서 동정을 살피더니 주위가 조용한것을 보고 손을 저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안에서 백흠부부, 범쟁파형제와 3명의 경호원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몇발자국도 못가서 “땅!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하나, 둘씩 쓰러졌다. 백흠이 죽은것을 확인하자 대원들은 전투를 끝내고 철퇴했다.
이튿날에 백흠, 범쟁파의 동생과 2명의 특무가 죽고 범쟁파와 백흠의 안해가 중상을 입은것이 밝혀졌다. 이 소식은 중외의 여러 신문에 보도되였는데 어떤 신문에서는 “동방제1암살사건”이라고 하면서 경계가 삼엄한 프랑스조계지에서 이토록 주도면밀한 대암살사건이 발생된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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