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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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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친 주은래
2014년 01월 13일 18시 10분  조회:7168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청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친 주은래
 
(번역)

 
 


 

1939년 7월 10일 아침에 모택동은 갑자기 두곳의 청첩장을 받았는데 하나는 연안마레학원에서 보낸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공중앙당학교에서 보낸것이였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보고 말했다.

“은래, 당신은 대후방에서 왔으니 바깥형세에 대해 잘 알고있잖소. 모두들 당신의 보고를 듣고싶어 할거요. 당신이 나를 도와 한곳으로 가주오. 내가 마레학원에 가겠으니 당신은 당학교로 가오.”

그때 곁에 있던 강청도 따라가겠다고 졸라댔다. 모택동은 “당신은 조건이 안되오!”라고 막아버렸다. 그러자 강청은 애교를 부리면서 “나도 가서 배우자고 그래요. 가게 해주세요. 네?”라고 말했다. 모택동은 하는수없이 양보하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나를 따라 마레학원으로 가자구.”

“당학교에서는 회의후에 문예공연이 있다던데 전 보고를 들은후 문예공연을 구경하겠어요.”
영화배우출신인 강청은 문예공연을 매우 좋아했다. 모택동은 시끄럽다는듯이 손을 흔들면서 “그럼 당신은 주부주석과 함께 가오”라고 말했다.


중앙당학교로 가려면 연하를 건너야 했다. 그 시기 연하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날은 간밤에 내린 비로 하여 강물이 불어서 자동차가 강을 건널수 없었다. 모택동은 왕래음을 불러 자신이 타던 대청마를 가져와 주은래를 타게 했다. 이 대청마는 모택동을 따라 2만 5000리장정을 했기에 산길을 걷고 강을 건너는데 매우 경험이 있었다. 모택동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신의 경호참모 장택민을 불러 주은래를 보호하게 했다. 원래 장택민에게도 말이 있었지만 강청에게 양보했다.

연하를 건널 때 물은 무릎을 넘어왔다. 왕래음은 주은래의 말고삐를 잡고 앞에 서고 강청은 말을 타고 뒤를 따랐다. 장택민은 맨 뒤에서 앞사람들을 살피면서 걸어갔다. 무사하게 강을 건넌 왕래음은 주은래의 말고삐를 놓고 모래톱에서 신을 신었다. 그때 갓 강을 건넌 강청은 갑자기 사기가 나서 두발을 힘껏 모으면서 말에 채찍질을 했다. 그러자 말은 맹렬한 속도로 네굽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청마와 강청이 탄 말은 원래 한쌍이였다. 강청의 말이 달리자 대청마도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주은래는 말고삐를 꽉 잡았다.

강청의 말과 주은래의 말은 강가로 나는듯이 달려갔다. 강청의 말은 방향을 돌려 강안의 골목으로 달렸다. 말이 달리는 소리에 놀란 마을의 개들이 미친듯이 짖어대며 달려왔다. 대경실색한 강청은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말은 급한 김에 밭사이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주은래가 탄 말도 강청의 말을 뒤따라 달렸는데 속도가 빨라 앞의 말과 부딪칠 기세였다.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주은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대청마는 눈앞에 큰 구덩이가 보이자 급히 피하려다가 주은래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주은래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땅바닥에 돌이 보이자 급히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짚었다. 결과 오른팔이 골절되였다.

부상을 당한후 주은래는 극심한 동통을 참으면서 당학교의 회의실까지 걸어가서 중앙위생처에서 파견해온 의사한테서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았다.

주부주석이 달을 타고 강을 건너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는다는 소식이 중앙당학교에 쫙 퍼졌다.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의논이 분분했다. 특무, 한간의 공격을 당한것일가? 여태껏 공산당과 홍군의 령도자들은 종래로 이처럼 큰 사고를 당한적이 없었다. 중앙당학교의 고급반(이 반의 학원들은 모두 퇀급이상의 간부임)의 학원들은 모두 주부주석을 청한것을 후회했다.

주은래는 당학교의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모택동은 그때까지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가장 급해난것은 주은래와 함께 당학교로 갔던 왕래음과 장택민이였다. 주부주석이 부상당한것을 모주석께 회보해야 하는데 강청이란 이 특수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 중간에 끼이다보니 보고하기도 어렵고 보고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하지만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왕래음은 말을 타고 양가령으로 돌아가 사실대로 모주석께 보고했다. 사실을 알게 된 모택동은 급히 비서 엽자룡을 불러서 함께 당학교로 가서 주은래를 만나보고 치료를 잘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강청을 불러서 “당신이 얼마나 큰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하고 꾸짖었다. 강청은 자신이 잘못했는지라 찍소리도 못하고있다가 멀리 피해 달아났다. 그후 강청은 오래동안 감히 양가령에게 가서 모택동을 만날 엄두를 못냈다.

주부주석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삽시에 연안성에 쫙 퍼졌다. 각 부문의 령도들과 주은래의 로전우들은 선후로 주은래의 병문안을 왔다. 주은래는 부상당한 팔이 몹시 아팠지만 참으면서 그들을 일일이 접대하면서 말했다.

“내가 말을 타고 당학교로 가던 도중에 강을 건넌후 말이 구덩이에 빠지면서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습니다. 지금은 치료를 받고있는중이니 곧 나을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 길에 확실이 일본비행기의 폭격으로 생긴 구뎅이가 있는지라 그들은 믿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미심쩍어서 중앙경위퇀에 이번 교훈을 참답게 섭취하라고 엄숙하게 요구했다. 왕래음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중앙교도대대의 령도들은 다음부터는 수장이 말을 타던 걸어서 가던 경위원들은 반드시 말고삐를 잡고 걸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연안의 의료조건은 매우 차하여 접골할수 없었다. 1939년 8월 18일에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러 온 인도의료대가 다시 주은래의 팔을 검사해본 결과 골절부위가 잘 잇기지 않은것을 발견했다. 주은래의 팔꿈치부분은 이미 굽혔다 폈다 할수 없게 되였고 오른팔근육은 수축되기 시작했다. 안마와 찜질을 했지만 오른팔은 쭉 펼수 없게 되여 절반 굽힌 상태에 처해있었다. 이에 중공중앙에서는 주은래를 쏘련 모스크바에 보내여 치료를 받도록 결정했다.

쏘련정부에서는 많은 고명한 의사들을 배치하여 주은래의 오른팔을 치료하게 했다. 선후로 3번 상세하게 검진한후 두가지 치료방안을 내왔다. 하나는 주골(肘骨)을 떼여내여 다시 잇는것인데 이렇게 하면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게 되지만 수술을 두차례 해야 되기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이 방안대로 하면 만약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되지 못한다고 해도 효과를 볼수 있는것은 긍정적이였다. 두번째 방안은 수술을 하지 않고 이미 아문 근육을 힘껏 당겨서 펴는 방법인데 치료를 마친다고 해도 결국에는 팔을 40~60도밖에 더 펼수 없게 된다. 이 방안은 비록 치료시간은 짧지만 아무는 효과는 좋지 않은것이다. 쏘련의사들은 첫번째 방안대로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었기때문에 환자가 굽은 팔을 하고 퇴원하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은래는 두번째 방안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국외에서 오래동안 치료를 받을수 없습니다. 국내에서 해야 일이 매우 많기때문입니다. 원래상태로 회복되지 못한다고 해도 그저 사업과 생활을 할수 있는 정도이면 난 만족합니다.”

주은래는 9월 19일에 크레물리궁(克里姆林宫-크렘린궁)병원에서 툭 튀여나온 작은 뼈를 잘라버리는 작은 수술을 받았다. 일주일후에 상처는 전부 아물었다. 실밥을 푼 이튿날부터 안마, 전기치료, 운동, 목욕료법 등 재활치료를 받았다. 결과 주은래는 오른팔을 45도로 굽힐수 있게 되였지만 절반 장애가 되고말았다. 주은래는 2개월동안 입원해있다가 새해가 되기 며칠전에 퇴원했다.
 
주은래는 1939년 9월부터 1940년 3월까지 6개월동안 쏘련에 체류하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공산국제는 당시에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모택동의 혁명리론을 믿지 않았다. 주은래는 모택동이 1939년 9월 1일에 한 《국제형세에 대한 신화일보기자와의 담화》를 공산국제에 가져다주었다. 공산국제에서는 이에 찬성을 표시했고 모택동이 정확하다고 하면서 매우 큰 지지를 해주었다.

주은래는 쏘련에 있는 기간에 임필시와 함께 중국공산당제7차대회를 열게 될 시간, 새 중앙의 선발인원 및 일부 인사문제에 대해 신중하고도 전면적으로 연구했다. 그들의 의견은 중공중앙의 원칙적인 동의를 얻었다.

모스크바에서 주은래는 모택동을 대표하여 리덕이 30년대에 중국에서 중국혁명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범한 일련의 착오에 대해 성토하면서 리덕을 제3국제에서 축출해달라는 모택동의 요구를 전달했다. 또 주은래는 쓰딸린과 만나서 쏘련에서 공부하고있는 중국렬사자녀들을 전선에 보내지 말고 잘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다.

모택동은 친인에게 보내는 두통의 편지를 주은래한테 부탁했다. 한통은 아들 모안영과 모안청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다른 한통은 2년전에 모택동과 다투고 쏘련에 가서 병치를 받고있는 하자진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에서 모택동은 “이후 우리는 동지사이요…”라고 썻다. 그해 하자진은 30살이였다.

1940년 봄에 주은래는 양복을 입고 귀국했는데 영화방영기 한대와 5부의 쏘련영화필림을 가지고왔다.

말에서 떨어져 오른팔이 장애로 된 진상에 대해 주은래는 생전에 등영초한테마저 털어놓지 않았다. 이 력사의 비밀은 38년동안 묻혀있다가 주은래가 서거된후에야 강청과 관계가 있다는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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