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광안현 협흥진 패방촌은 등소평의 고향이다. 어려서 고향을 떠났던 등소평은 나이 들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량친부모는 이미 사망되였고 고향에는 계모와 두 녀동생이 살고있었다. 등소평은 계모를 중경으로 모셔왔다. 물론 두 녀동생도 함께 데려왔다. 그때로부터 계모 하백근은 줄곧 등소평과 함께 반세기를 살았다.
하백근은 등소평과 5년 년상밖에 안되였다. 선박공의 딸이였던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여세에 시집을 갔는데 얼마 안되여 남편이 병사했다. 그후 그녀는 다시 등소평의 아버지 등소창한테 시집을 갔다. 1936년에 등소창이 병으로 사망된후 하백근은 줄곧 혼자서 두 딸을 데리고 과부생활을 했다. 그녀는 글은 읽지 못했지만 대의명분을 잘 알고 사리에 밝고 활달한 성격이였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아들 등소평이 사람을 파견하여 모시러 왔을 때 하백근은 작은 보따리만 들고 문을 잠근후 중경으로 갔다.
중경에서 보따리를 내려놓은 순간부터 하백근은 등씨집안에서 생활했는데 중요한 가족구성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등소평부부에게 맛있는 료리를 해주었을뿐만아니라 손자손녀들도 손수 키워주었다. 등용은 《강서에서의 나날들》이란 글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할머니(하백근)와 우리 몇몇 아이들은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그때 할머니는 의연히 역경속에서 온가족의 생존을 위한 중임을 떠멨다. 어렵던 그 시기에 할머니는 굴욕을 받을대로 받아왔지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굳세게 생활하면서 우리 몇몇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여주었다”고 썼다.
그 특수한 시기에 하백근로인은 완강하였을뿐만아니라 시비도 명백하게 갈랐다. 그녀의 딸 등선군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계선을 나누었어요. 우리 엄마는 올케를 보고 ‘탁림아, 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너희들 부부가 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니 넌 그(등소평)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있을거야. 그러니 그와 계선을 나누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해’라고 말했어요. 그때 올케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전 그이를 잘 알고있어요. 마음놓으세요. 그런 일은 없을거예요’라고 대답했어요”라고 말했다.
1969년 10월에 등소평이 강서에 내려가서 로동을 할 때 등소평의 부인 탁림과 하백근도 함께 생활했다. 매일 아침마다 등소평과 탁림은 공장까지 걸어가서 로동했는데 하백근은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 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하백근은 딸이 아이를 낳은 기간에 잠간 떠나 있은 외에 줄곧 등소평부부와 함께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
1997년 2월 19일에 등소평이 위대한 일생을 마쳤을 때 97세의 고령이였던 하백근은 이미 로년치매증에 걸렸지만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표시했다. 2001년봄에 하백근은 사망되였는데 향년 10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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