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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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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1)
2014년 06월 01일 10시 05분  조회:6119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강청은 본명이 리운학(李云鹤)이고 산동성 제성현에서 출생했다. 강청의 할아버지 리순해(李纯海)는 원래 2만여평방메터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 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강청은 1972년의 자술에서 “나는 매우 가난한 수공업집안에서 태여났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목공소주인이였다. 리덕문은 처음에 목공소견습공으로 들어가 뒤에는 목공소주인이 되였으며 그뒤 다시 제성현의 성문부근에 려관을 차렸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리란씨(李栾氏)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에 란씨는 딸애를 하나 낳았다. 그러나 리덕문과 란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까지 리진남으로 지어놓았던 터이라 실망이 컸다. 그들은 할수 없이 이름을 다시 리진해(李進孩)로 고쳐지었으니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강청이다.
강청이 태여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 리덕문은 이미 60세였으며 우로 이복오빠 리건훈(일명 리간경이라고도 함)과 언니 리운하가 있었다. 리진해(강청)는 6세 되던 해에 다른 녀자애들처럼 전족을 해야만 했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기때문이다. 어린 리진해는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에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곤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진해는 어릴 때 담이 크고 남에게 지면 죽고 못사는 맹랑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어린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리진해의 동네에 단운전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리진해는 그녀와 함께 잘 놀다가도 자주 싸우군 했다. 하루는 단운전이 리진해를 보고 “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줄 아냐, 네 아빠는 이리, 네 엄마는 호랑이, 넌 새끼 호랑이야! 네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뿐이구나!”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리진해는 당장 단운전에게 달려들었지만 도저히 그녀를 당해낼수 없었다. 얼마후 리진해는 길에서 놀고있다가 마침 이복오빠인 리건훈을 만났다. 당시 리건훈은 제성현 경찰국소속 경관으로서 한창 거드름을 피우고있을 때였다. 리진해는 리건훈에게 달려가서 단운전과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바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리건훈은 그녀에게 반드시 보복해 줄테니 안심하라고 약속했다.
다음날에 리건훈은 순경들을 데리고 단운전의 집으로 찾아가서 “우리 집을 이리집안이라 욕한 놈이 누구야! 어서 나와!”라고 웨쳤다. 단운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담장모퉁이에 꼭 숨어있었다. 단운전의 아버지가 나와서 애들끼리 싸우다 그런것이니 참으라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리건훈은 오히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면서 데리고간 순경들과 함께 구타를 가했다. 이에 단운전의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으며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강력하게 항의하던 단운전의 삼촌도 리건훈과 순경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단운전의 삼촌은 억울하게 죽고말았으며 단운전의 숙모는 생계를 잇기 위해 두살밖에 안된 자기애를 버려두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야만 했다. 얼마후 두살짜리 애도 엄마젖을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
이때 리진해의 나이는 불과 일곱살이였다. 처음에 그녀는 단운전에게만 보복할 생각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것이였다. 리건훈이 단운전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있을 때 리진해는 열심히 단운전을 찾고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숨어있던 단운전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겁나냐? 모두 너때문에 생긴 일이야. 또 한번 욕해 봐!”
이 일이 있은 뒤로 동네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피해다녔으며 아무도 그녀와 함께 놀지 않았다고 한다. 리진해는 강청이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그녀의 공식적인 이름은 리운학이다.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정식이름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리사장 설환등이 그녀의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해서 운학(云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그녀가 자술에서 “군계일학”을 운운하면서 이름을 지은 경위를 설명한것은 유명해진 뒤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여진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 원소절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판단한 란씨는 리운학을 데리고 그 집에서 나와서 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다. 그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 되였다.
1926년에 12세의 리운학은 소학교 5년과정을 졸업하고 그해 아버지가 사망되자 어머니와 함께 천진에 있는 동부이모(同父异母)인 언니네 집에 가서 살았다. 중학교진학을 하지 못한 그녀는 언니네 집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몇년을 지냈다. 1929년 봄에 그녀의 형부 왕극명(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네 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그해 여름에 거기에서 15세의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조태모와 왕박생 등으로부터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그때 강청은 학력이 낮고(다른 사람들은 최소 중학교졸업이상이였음.) 가난하여 동기생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개성과 승부욕이 아주 강했기때문에 수업시간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실험극원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이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의 영화배우 람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에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리운학과 학생들은 왕박생을 따라서 북경으로 가서 “해명극사”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경극단에 들어가 제남, 청도, 연태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도 리운학이 적응하기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연기경력이 짧은데다 사투리가 심해서 북경인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공연도 정기적으로 있지 않았기때문이였다. 1931년 봄에 리운학은 다시 청도에 있던 조태모(당시 청도대학 총장)를 찾아갔다. 조태모의 배려로 그녀는 청도대학 도서관의 직원으로 근무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도서관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중문과수업을 청강하고 유명한 현대문학가 문일다와 심종문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문학적소양을 쌓을수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유계위(일명 황경이라고도 하는데 청도대학 리과생, 후에 천진시장 겸 중국공산당 천진시위원회 서기 력임)와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유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에 들어갔다. 당시 유산은 중국연극계의 인기배우로 남국사의 일원이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관동군이 동북삼성을 점령하여 각지에서 반일운동과 반장개석운동이 일어났을 때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진보적인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3년 2월에 19세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 황경은 중국공산당 청도대학 지하지부 서기를 거쳐 중국공산당 청도시위원회 선전부장을 맡고있었다. 그런데 이해 7월에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국민당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되여 강청은 조태모의 소개로 황급히 상해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조직과 련계를 잃고말았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던 “신경공학단”의 교사로 들어갔다. 1933년 겨울에 체포되였던 황경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에 상해에서 “1. 28”항전 2돐을 기념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신경공학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 일로 리운학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북경으로 도망갔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동거를 계속하였으나 황경의 부모가  그들의 동거를 반대하여 생계비를 보내주지 않아 생계를 잇기가 곤난한 지경이였다. 결국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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