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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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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2014년 06월 01일 10시 13분  조회:7619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뜻에 따라 강청과의 결혼을 비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간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는 규정을 두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약법삼장(约法三章)”이라고도 일컬어진 규정이다.
그후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에 강청은 24세의 나이로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에도 강청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였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모택동의 생활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 시기 강청은 행동을 극히 조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되 말을 삼가했다. 그리고 모택동을 위해서 세타를 짜고 맛있는 료리를 만들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택동이 부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의 집을 방문하였던 어떤 외국기자는 그러한 강청의 인상에 대하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현모량처 같았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뛰여난 배우 출신답게 자기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채 얼마나 완벽하게 현모량처역을 잘 연기해내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에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 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모택동의 정식부인”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에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李讷)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식부인의 지위를 더 굳게 다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1949년부터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 다닐수 있게 되였으며 료양차 쏘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는 강청에 대한 규제가 많이 완화되였음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녀는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직책은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한가한 직이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때부터 당내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게 되였으며 또 이를 기점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또 전국영화지도위원회 위원(후에 문화부영화국고문으로 변경)을 겸임하면서 영화 《무훈전》과 유평백(俞平伯)의 《홍루몽간론》등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문예들에 대한 비판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에 강청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의 생활비서로 임명받았다. 말이 생활비서이지 그것은 실제로 부부장급의 간부직이였기때문에 당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두차례에 걸쳐 문예문제에 관한 모택동의 지시가 나왔다. 모택동은 이 지시에서 건국이후 문예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과가 보잘것 없으며 문련산하의 각 협회는 최근 몇년사이에 수정주의의 변두리로 굴러떨어졌다고 단언하였다. 이 지시는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계획하고있던 강청에게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1964년 6월 5일~7월 31일 경극현대경연이 북경에서 거행되였는데 이 기간에 강청은 전면에서 나서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면서 “경극혁명을 론한다”라는 제목으로 공개연설을 하였다. 1938년 8월 하순에 연안에 들어간 이후 27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가진 그녀의 연설은 그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신호탄이 되였다.
그때부터 강청은 경극혁명이란 이름하에 문예계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극좌적사조를 선동하였다. 중간인물론, 사실주의심화론, 시대정신회합론 등을 비판하고 연구적가치가 있는 문예론들까지도 “자산계급적 문학주장”, “반혁명수정주의적 문학주장”으로 몰아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녀는 또 전국을 다니면서 로동자, 농민, 군인 등에 대해 묘사한 연극작품을 골라내 현대경극으로 개편하도록 지시하고 《홍등기》, 《사가방》,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백호퇀을 기습》,《룡강송》, 《해항》, 《홍색랑자군》, 《백모녀》 등을 우수한 경극현대화의 본보기로 선정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무산계급문예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였다. 경극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결과 그녀의 이름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대표명단에 올라갔다. 1964년 12월 20일~1965년 1월 4일에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였을 때 그녀는 인민대표자격으로 인민대회당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식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것이다. “경극혁명을 론한다”는 연설발표이후 전국인대 대표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정치상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진행한것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북경과 상해를 빈번하게 왕래하여 장춘교, 요문원 등과 접촉하면서 극히 비밀스런 정치활동을 준비하고있었다.
강청은 1962년 7월 6일에 오함의 신편 력사경극 《해서의 파직》을 보고 “이 극에는 심각한 정치적오류가 내재되여있으니 이 극의 공연이 금지되기를 주장한다”라고 말한바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반사회주의적인 작품에 대하여 “반드시 비판하고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는 비판의 열기가 한창 고조에 올랐을 때인 1965년 11월 10일에 상해 《문회보》에 《해서파직을 평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강청이 8~9개월간에 걸쳐 준비한것으로 요문원의 이름으로 발표되였지만 실제로는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세 사람의 합작품이였다. 요문원은 이 글에서 《해서파직》을 일러 반당 반사회주의의 독초라고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면서 저명한 력사학자인 《해서의 파직》의 작자 오함을 직접적으로 겨냥한것이였다. 그 글이 발표된이후 11월 12일부터 26일까지 상해의 《해방일보》, 절강의 《절강일보》, 산동의 《대중일보》, 강소의 《신화일보》, 복건의 《복건일보》, 안휘의 《안휘일보》, 강서의 《강서일보》에도 차례로 실렸다. 그것은 화동의 6개지역이 모두 요문원의 문장을 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북경시 부시장이 걸려있는 문제라 망설이면서 대세를 관망하고있던 북경지역도 여론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1월 29일에 《해방군보》를 시작으로 《북경일보》, 《인민일보》, 《광명일보》에서 요문원의 글을 게재하였다. 상해에서 붙인 비판의 불씨가  마침내 북경지역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였던것이다. 그후 이것은 단순히 학술계의 범위를 뛰여넘어 사회적인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하여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였다.
1966년 3월에 강청은 문예정풍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장춘교, 진백달, 유지견, 진아정 등과 함께 론의하여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를 작성하였다. 당시에 모택동도 그 글을 읽어보고 만족해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문화전선상의 사회주의대혁명을 꿋꿋이 전개하여 반동로선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라는 구절 뒤에 “이 반동로선을 짓밟은후에도 새로운 반동로선이 생길지 모르니 계속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라는 구절을 덧붙이는 등 세군데나 직접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1966년 4월 10일의 “기요”는 중국공산당중앙의 중요문건으로 채택, 발간되여 전국각지에 배포되였다. 문화방면에 있어서 대혁명이 없으면 안된다는것을 골자로 하고있는 이 “기요”는 바로 문예사업에 대한 강청의 의견을 철저하게 집행하도록 전국각지에 하달한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문건에서는 “모택동동지가 친히 세차례나 수정하였다”, “림표동지가 위탁한것이다”라는 등의 문구가 삽입되여있어 그녀의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잘 나타나 있었다. 이 “기요”는 강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 이로써 강청은 중국공산당내에서 위상이 강화되고 새로운 정치실세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1966년 5월 28일에 중공중앙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가 신설되여 강청은 부조장직을 력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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