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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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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2014년 07월 27일 19시 16분  조회:6913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번역)





 
 
장개석에게는 정식으로 맞아들인 4명의 안해외에 정부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일본녀자도 있었다.
1913년에 손중산이 령도한 제2차혁명이 실패했다. 손중산은 일본에 가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원세개정부는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혁명당인을 잡아들이면서 일본정부에 손중산체포를 협조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겉으로는 원세개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척 했지만 암암리에 우익단체 “흑룡회”의 조직원들을 파견하여 손중산을 보호해주었다.
그무렵에 상해에서 제2차혁명에 참가했던 장개석(蒋介石)과 대계도(戴季陶)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손중산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흑룡회”에는 신엔 미찌꼬(津渊美智子)라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하녀가 있었다. 장개석이 올때마다 이 하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렇게 여러번 접촉하면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남몰래 동거하기 시작했다.
미치코는 장개석과 가까이 지냈지만 대계도와도 친했다. 그후 2년동안 장개석은 중국과 일본을 오갔는데 매번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에는 늘 미찌꼬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1916년 6월에 원세개가 죽자 장개석과 대계도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가을에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장개석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찌꼬가 서너살이 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장개석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가운것은 옛 사랑을 다시 만나서이고 당혹스러운것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일가 하는것 때문이였다.
다행히 미찌꼬는 “대계도의 혈육을 데리고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개석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몇층만 올라가면 대계도의 집이였다. 장개석에게서 미찌꼬가 아이를 데리고왔다는 말을 들은 대계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누가 들을세라 장개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우리 둘의 황당했던 과거의 일입니다. 한때의 풍류였는데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지금은 처자가 있잖습니까? 알다싶이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사납습니까? 그 암펌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 끝입니다. 그러니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장개석은 대계도가 시키는 대로 둘러댔다. 다 듣고 난 미찌꼬는 한바탕 울어댔다.
“당신들은 다 형편없는 놈들이야. 자신의 혈육도 필요없다니 나도 필요없어!”
미찌꼬는 아이를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개석이 황급히 쫓아가 찾아보았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장개석은 미찌꼬가 팽개치다싶이 두고간 사내아이에게 장위국(蒋纬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족보에도 올렸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적지 않았다. 고향에 보내 결발안해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诚)이 3개월씩 돌아가며 키우게 했다. 부지런하고 현숙한 모복매는 14살밖에 안된 장개석에게 시집을 와서 내조를 잘하면서 장경국을 낳았지만 1927년에 장개석에게 리혼을 당했고 1939년 12월 12일에 불행하게도 폭탄에 맞아 사망되였다. 요야성은 남편이 아편중독자였기에 핍박에 의해 가무청에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되였다. 그무렵에 장개석을 만나 첩으로 되였지만 봉건사상이 뿌리깊었던 장개석의 부모가 반대하였기에 장개석의 4명처첩중에서 유일하게 정식명분이 없었다. 장개석과 결혼한후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녀는 모복매가 장개석과 리혼한후 장위국을 도맡아키웠다. 그녀는 1949년에 장위국을 따라 대만에 가서 1966년에 사망될 때까지 장위국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사실 미찌꼬는 장개석과 대계도와 살면서 장위국외에 1916년 10월 16일에 둘째아들 대안국(戴安国)을 낳았고 1920년에 또 딸 안세방(颜世芳)을 낳았다. 이때문에 대안국과 안세방만 대계도의 자녀이고 장위국은 장개석의 아들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미찌꼬는 1977년에 사망되였다. 1989년에 장위국은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만 밝혀낼 방법이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장개석의 아들이여도 좋고 대계도의 아들이여도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여부를 증명해줄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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