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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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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2014년 10월 11일 14시 06분  조회:7282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번역)



 
 
본명이 진서강(陈庶康)인 진갱(陈赓)은 1903년 2월 27일에 호남성 상향시 룡동향 천호촌에서 출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다음으로 가는 10대 대장중의 한분인 진갱은 1961년 3월 16일에 58세의 나이로 상해에서 사망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인 진갱은 고향친구 장선운(蒋先云), 하충한(贺衷寒)과 함께 “황포3걸”로 불리웠는데 장개석은 이 셋에 대해 인재라고 매우 높게 평가했다. 졸업후 재능이 뛰여난 진갱은 학교에 남아 선후로 제2기 입학생들의 련장, 제3기 입학생들의 부대장직을 맡았다.
1925년 10월에 국민혁명군인이 제2차로 군벌 진형명을 동정할 때 황포군관학교 교장 겸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이였던 장개석은 총지휘를 맡았다. 그 시기에 22살밖에 안된 진갱은 제1군 제2사 제4퇀에서 련장직을 맡았다. 그번 전투에서 진갱이 용감하게 싸운것을 본 장개석은 그의 련을 전부 자신의 총지휘부로 전이시키고 진갱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두었다.
그번 전쟁에서 제3사 사장의 착오적인 지휘로 화양에서 반란군 림호의 주력부대에 포위되였다. 총지휘인 장개석은 전황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여 직접 화양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때 사장 담서경은 아무런 방법도 없어 쩔쩔 매고있었다. 망원경으로 그 정황을 지켜도던 장개석은 급하여 “진갱은? 진갱은 어디 있어?”하고 소리쳤다.
“전 여기에 있습니다. 교장님!”
진갱이 부근의 방공호에서 뛰쳐나오며 장개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네가 즉시 달려가 담서경에게 철퇴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명령을 전달하게!”
진갱은 번개같이 달려가 담서경에게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런데 담서경은 이미 부대를 명령할 능력이 없었다. 수하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진갱은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한후 신속히 총지휘부로 돌아왔다. 망원경으로 모든 정황을 살펴본 장개석은 진갱을 보고 “혁명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난 자네에게 제3사의 대리사장직을 맡아서 즉시 적들을 물리칠것을 명령하네”하고 말했다.
군령을 받은 진갱은 총을 들고 산우로 올라가서 총을 쏘며 “후퇴하지 말고 나의 지휘를 들엇”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듣는 자가 없었다. 진갱은 하는수없이 지휘부로 되돌아 상황을 회보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혁명군인은 후회하지 않아”하면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림호의 부대가 가까이 달려오자 진갱은 장개석을 끌고 총탄을 무릅쓰고 후퇴했다.
어렵게 산에서 내려왔는데도 장개석은 바위우에 앉아서 “난 도망치지 않겠어. 내가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는가? 힘들게 혜주를 점령했는데 여기서 망할줄은 몰랐어”하고 말했다.
림호의 부대가 추격해오는데도 장개석은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진갱은 급하여 장개석을 업고 퇴로를 뚫고 화살같이 달려갔다. 그들은 황혼무렵에야 림호군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장개석을 구해준 진갱의 이야기는 날개라도 돋힌듯 온 국민혁명군에게 알려졌다. 당시 황폭군관학교의 동학들은 “황포3걸중에 장선운의 필재와 하충한의 말재주도 진갱의 다리만 못하네”라고 탄복했다. 그후 진갱은 장개석의 수종참모로 되여 장개석의 사무실을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었다. 처음에 진갱은 “보고(报告)”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이후부터는 직접 들어오게. 자네마저 믿지 못하면 내가 누굴 믿겠는가?”하고 말했다. 이 사실로부터 장개석이 진갱을 얼마나 믿었는지 알수 있다.
그런데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중의 공산당명단에 진갱의 이름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비탄에 빠져 진경의 이름밑에 “이 사람에게 부대를 맡기지 말라”고 썼다.
장개석의 신변에 오래 남을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진갱은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휴가를 맡았다. 장개석은 진갱의 속셈을 알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해서 휴가를 주었을뿐만아니라 배표와 로비를 대주고 “진갱을 중앙군사정치학교의 중좌 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위임장까지 보내주었다. 그러나 진갱은 장개석의 “호의”를 거절하고 광명의 길을 찾아갔다.
1927년 4월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진갱은 즉시 장개석의 수하에서 벗어난다고 선포한후 8.1남창봉기에 참석했다. 그 일을 알게 된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측근들을 보고 “진갱은 인재야. 그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기에 난 그를 중하게 쓰려고 했네. 그런데 그는 어리석게도 공산당을 따라갔어”라고 말했다.
1933년 3월에 진갱은 다리를 상하여 비밀리에 상해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그는 반역자 진련생의 밀고로 불행하게 국민당에 체포되였다. 그해 4월 1일에 그는 남경에 압송되여 중앙헌병사령부에 감금되였다.
당시 남창에서 중앙쏘베트구역의 포위토벌을 지휘하던 장개석은 진갱을 붙잡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장개석은 진갱을 남창으로 압송해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적이 있는 진갱을 직접 만나서 “은혜에 보답”하는척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진갱을 만난 장개석은 실망하면서도 동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자넨 나의 훌륭한 학생이였어. 내가 교장직을 맡은 황포군관학교의 걸출한 학생이였지. 자네가 비록 정치상에서 착오를 범했지만 교장은 언제나 학생을 애호하기때문에 용서해줄수 있어.”
장개석의 말에 진갱은 랭소했다.
“난 당신이 용서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 맘대로 처리하십시오!”
장개석은 진갱을 자기편사람으로 끌어오려던 일이 허사로 되자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되여 진갱은 다시 남경으로 압송되여갔다. 그 시기에 중공당조직과 송경령은 진갱을 구원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 때문에 국민당은 진갱을 살해하지 못했다. 장개석도 배은망덕이란 오명을 쓸수 없었다. 국민당은 진갱을 계속 감화시켜 자기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진갱을 어느 한 저택에 전이시켜 특수대우를 향수하게 했다. 비록 위병들이 지키고있었지만 진갱은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수 있었다. 이는 진갱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장계취계하여 국민당에 합작하는척 했다. 그러자 국민당은 진갱에 대한 경계를 점차 늦추었다.
국민당은 어느날밤에 갑자기 진갱이 사라진것을 발견했다. 진갱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순리롭게 남경에서 탈출했던것이다. 4개월동안의 철창생활을 마치고 그는 다시 당의 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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