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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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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2015년 04월 18일 15시 30분  조회:5378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번역)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하자 송자문(宋子文)은 사직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여론은 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여론은 송자문이 미국원조과정에서 사사로이 재산을 개인적으로 챙긴 일을 대거 보도했다. 심지어 송자문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까지 보도되였다. 사실 송자문이 세계최고부자라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것이였다.
 
비록 송자문은 “량조국구(两朝国舅-누나인 송경령이 손중산의 부인이고 녀동생인 송미령이 장개석의 부인이기에 그렇게 불리웠음)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있었고 오래동안 중화민국의 재정부장의 요직을 맡았지만 1930년대까지는 송자문의 개인재산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중반이후부터 사람들은 송자문의 재산에 대해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후의 력사를 뒤져보면 그의 재산에 관한 각종 자료, 전설이 물밀듯이 나타났다. 그 시기는 바로 송자문의 재산이 급격히 증가된 시기였다.
 
1933년 가을에 군사비문제로 장개석과 심각한 의견차이가 나타나자 송자문은 다시 한번 국민당정부 재정부장의 직위를 사직했다. 동시에 중앙은행 총재, 행정원 원장의 요직도 사직했다. 그는 잠시 중화민국의 권력핵심에서 물러나 있었다. 정치적인 실의는 오히려 그에게 사업상의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그 시기에 그는 전국경제위원회 상무위원직은 사직하지 않았기에 그 직을 리용하여 전국경제건설에 열정을 나타냈다. 새로운 경제건설계획을 추진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는것을 송자문은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대한 실력을 지닌 투자집단인 중국건설은회사(中国建设银公司)를 설립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성립된후에 송자문은 경제령역에서 계속 호풍환우하려면 절대로 대재벌의 지원을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금융계의 배경을 보자면 중국은행이 가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력사적인 원인으로 중국은행의 력대총재는 모두 한간들이였다. 1935년에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등이 한구에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중국은행에 대한 개조계획을 통과시켰다. 이 계획의 기밀유지는 아주 잘되였다. 사전에 장가요가 알지 못하게 하고 왕정위 등의 한간거두들도 모르게 하였다. 행정원장을 맡고있던 왕정위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든 문건이 이미 완성된 후였다. 이것은 한간들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중국은행 리사장직를 맡은 송자문은 실력이 강대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송자문은 마침내 중국정계, 공상실업계, 금융계에서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 되였다. 그때부터 송자문은 자신이 장악한 경제위원회, 중국건설은회사, 중국은행의 3대도구를 통하여 계속 민족공상업, 금융업에 침투하고 지배하고 합병하는 활동을 벌렸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송씨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관료매판집단과 독점왕국을 건설했다. 이를 통하여 송자문은 신속히 재부를 축적했다.
 
송자문이 경제건설계획과 개인재산추구의 측면에서 잘 나가고있을 때 영미파의 령수라는 배경과 대일강경파의 대표인물이라는 명성으로 인하여 그는 일본측과 국내한간들로부터 적대시당하게 되였다. 일본인들은 재주를 있고 일처리는 서방자유주의자와 같은 송자문을 심지어 그들의 최대적수인 장개석보다 더 싫어하게 되였다.
 
일본측과 왕정위일파의 반격으로 하여 송자문의 재산이 세계에서 제일 많다거나 그가 미친듯이 재산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 1939년에 일본간첩은 “국민당정부의 고급급관리예금상황에 대한 비밀조사보고서”에 송자문 한사람만 5000여만원의 재산을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해두었다고 실었다. 그리고 전쟁기간동안에 일본은 송자문이 대통국민은행과 뉴욕의 화기은행에 7000만딸라의 예금을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송자문은 세게최고부자라는 소문이 소리없이 퍼져갔다.
 
력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런 정보는 모두 전시에 일본의 정치선전수단의 하나로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작자도 그다지 믿고있지 않았지만 그때로부터 송자문의 재산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송자문이 당시 경제건설에서 종횡으로 활약하고있었고 금융계에서 호풍환우하였으며 그의 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있었기때문에 더더욱 널리 퍼져갔다.
 
두터운 금융자본을 가지고있었기에 송자문은 경제분야에서 확장하는것은 식은죽먹기처럼 쉬웠다. 광동은행을 례로 들자면 남방에서 광동은행은 영향이 큰 화교자금계은행이다. 1935년 가을에 채무가 많아서 위기에 처하자 송자문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을 리용하여 자금을 투입하여 개조했다. 그는 20만주를 사들여 비록 최대주주는 아니였지만 아무도 그와 감히 싸우려고 할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개조후의 리사장은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로 송자문이 맡았다. 송자문은 자신의 심복에게 총경리직을 넘겼다. 그때로부터 광동은행은 송씨가족의 개인은행으로 바뀌였다.
 
남양형제연초회사를 놓고보면 원래 중국최대의 담배회사였다. 회사사장인 간씨형제는 “연초대왕”으로 불리웠다. 이 회사는 1930년대에 경영과 재무에서 사면초가의 처지에 처했다. 이때 송자문은 겨우 70만원의 대가로 이 회사의 52%주식을 사들였다. 그리고 70만원도 광동은행이 대신 납부했다. 송자문은 한푼도 내지 않고 남영형제연초회사를 자신의 산하에 넣어버렸다.
 
그외에도, 송자문은 신화은행, 중국국화은행, 중국보험회사, 상해은행등에 모두 투자를 했다. 송자문은 공업에도 적지 않게 투자하였다. 일부분 금융기관을 차지한후 그는 은행의 자금으로 공장, 광산과 철로건설에 투자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몇몇 철로와 공장, 광산에 투자한외에 송씨집안은 사천사업회사, 진화종이공장, 민생회사, 화풍화기방직포공장, 대중화화시회사, 화풍화기면분공장, 중화서국 등 공업, 광업기업에 일정한 주식을 차지했다. 송자문과 송자량은 이런 기업의 리사장 혹은 리사를 맡았다. 서북 섬서, 감숙 두곳의 10여개의 방직, 면분, 제약, 인쇄, 양조, 석탄채굴, 성냥 등 공장도 송씨가족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송자문은 상업분야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친히 경영하는 중국면업회사는 몇달만에 자본이 갑절로 뛰여올랐다. 화남미업회사는 독점적으로 “외국쌀”의 수입업무를 수행하여 리윤이 엄청났다. 항전후 상해에 부중무역회사, 중국수출입무역회사, 통일무역회사, 금천무역회사, 등을 설립하여 물자부족, 물가상승을 틈타서 큰 돈을 벌었다.
 
경제분야에서 이처럼 활약이 컸기에 그의 재산에 대하여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였다. 당시 글을 보면 “송씨의 경제활동은 우에 언급한 7개은행, 12개 류통회사, 22개 큰 공장, 1개의 운수회사이다. 주식은 모두 얼마일가? 송자문자신도 재산수자를 몰랐을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글에서는 “그 당시 독자적으로 6억원을 가지고있었다”고 밝혔다. 또 4대가족이 여러 분야에서 독점하고있는 재산 및 그들이 가진 예금과 사업은 통계를 내보면 최소한 200억딸라가량이다”고 하기도 했다.
 
정말 이러한 수자라면 4대가족중 어느 한명만 하더라도 세계최고부자의 반렬에 오를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사료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는 3개의 국가독점자본집단이 있었다. “4행2국(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중국농업은행, 중국신탁국 및 우정저금회업국), 자원위윈회 및 중국방직건설회사이다. 합계는 겨우 62,972억원이였다. 1947년의 환률로 계산하면 100억딸라에 미치지 못했다. 만일 당시 국민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자산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200억딸라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우에서 얘기한 “4대가족”의 재산이란 단순히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립부와 진과부의 개인재산을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국민당 및 국민당정부 통치하의 “국가독점자본”의 재산을 의미한다고 한것이다. 단순히 송자문만을 본다면 비록 그가 장악한 공상금융기관이 많지만 전부 점유하는것은 아니고 일부 투자하거나 요직을 맡고있었을뿐이다. 그의 개인재산은 이런 기업의 총자산보다 적을수밖에 없다. 대략 1000만딸라정도일것이다. 송자문이 정계에 있을 때 국가은행 혹은 재정부에서 투자하여 설립한 기업은 송자문의 개인재산으로 볼수 없다. 미국학자 대홍초(戴洪超)가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오래동안 회사의 중요요직을 겸직하였고 회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송자문은 비록 재산이 엄청 많았지만 소문에서처럼 억만부호는 아니였다. 그러나 어찌되였건 당시 관료자본의 제도하에서 그가 재물을 취득한 경로는 정치특권을 리용하는것에서 벗어날수 없었고 권력을 가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말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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