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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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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2015년 12월 26일 14시 23분  조회:5922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번역)



 
1946년에 국민당이 전면적으로 내전을 일으켰을 때 호종남이 거느린 부대는 서북에서의 국민당주력이였다.
애초에 호종남(胡宗南)은 국민당군의 최후 방어지역을 중경과 성도를 축으로 하는 서남지역 보다 귀주의 서중부쪽인 먄마와의 변계지역을 선택할 예정이였다. 1949년 8월 11일에 국민당 천상악(사천-호남-호북지역)변구 수정공서(绥靖公署) 주임 송희렴(宋希濂)이 비행기로 한중(汉中)으로 날아와 호종남과 만나 최후방어지역을 상의했다.
두 사람은 황포군관학교 1기 동기생이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지역을 귀주서중부 만먀변계지역으로 꼽았다. 부대를 이 일대로 집결해 란창강(澜沧江), 노강(怒江)과 고려공산(高黎贡山)의 지형적리점에 의지해 계속 저항하기로 했다.
그들은 만부득이 할 경우에 접경지역인 먄마로 퇴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당시 호종남은 40만명, 송희렴은 10여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있었다. 패전중에 있는 국민당군의 대부분 병력에 해당되였다. 송희렴은 항일전쟁시기에 11집단군을 이끌고 인도먄마로 원정해 귀주와 먄마변경에서 4년동안 전투를 벌려 이 일대의 지형과 민정(民情), 물산 등에 대해 훤히 알고있었다.
그들은 제1단계로 서강(西康)과 사천서쪽지역을 통제해 점차적으로 귀주와 먄마변계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했다. 2단계로는 인민해방군이 서남쪽에서 진군할 때 곧바로 주력을 귀주서쪽의 보산(保山), 등충(腾冲), 룡릉(龙陵), 망시(芒市) 일대를 축으로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란창강, 노강과 고려공산의 천험을 리용해 인민해방군의 진공을 막기로 했다.
그런 연후에 상황에 따라 귀주로부터 먄마와 타이변경과 먄마경내로 들어가 인민해방군과 싸운다는 전략이였다. 호종남과 송희렴은 장개석이 8월중순 중경에 도착했을 때 관저로 찾아가 이런 전략계획을 보고했다. 뜻밖에도 장개석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돼! 이 계획은 절대로 안돼! 너희들이 사천과 서남의 반벽강산(半壁江山)을 모택동에게 거저 바치려는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고 사실은 군사상으로 볼 때 사천은 대만이나 해남, 주산(舟山)과 달리 공산당군이 4방에서 포위공격해온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볼수 없습니다!”
“안돼! 절대 안돼! 너희들은 군사는 알지만 정치를 모른다! 너희들이 단지 6개월만 지켜준다면 제3차세계대전이 폭발될수 있어. 그때 북경, 금릉(金陵-남경의 별칭), 상해는 우리것이 된다.”
장개석은 손을 휘저어가며 그들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중에 호종남이 사천으로 퇴각할 때 그의 수중에는 국민당군의 정예인 제1군단을 포함해 30만명의 병력이 있었다. 호종남은 다시 장개석에게 서창(西昌), 운남(云南)으로 퇴각해 방어할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한편 모택동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저지선인 서남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위해 북쪽에서 치고 들어가는척하면서 남쪽에서 공격하는 량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예로부터 사천을 공략하는 방안은 두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섬서에서 진령(秦岭)을 넘어 진격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호북서쪽에서 장강의 원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장개석은 모택동이 팽덕회, 하룡이 이끄는 제1야전군의 주력을 진령으로 보내 사천을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은 이런 판단에 따라 1949년 8월에 서남군정장관공서군사회의를 열어 직접 사천-섬서변계를 중점방어하는 서남방어를 위한 병력배치를 완료했다. 호종남집단군의 주력이 진령의 주산맥을 따라 제1방어선을 구축하고 백룡강(白龙江), 미창산(米仓山), 대파산(大巴山) 지역에 제2방어선을 설치하는 방어계획이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사천동쪽과 귀주방면에 병력을 따로 배치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통상적인 진공로선 대신 제2야전군이 대우회작전을 펼쳐 호남서쪽, 호북서쪽에서 직접 귀주로 진격해 사천의 서부(叙府-지금의 의빈), 로주(泸州), 중경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이런 작전은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러 국민당군의 서남 방어선의 뒤쪽에서 호종남집단군과 사천변계에 진을 친 국민당군의 퇴로를 끊어버리는것이였다.
이럴 경우에 사천경내의 국민당군주력은 대문이 닫히는 격이 되여 사천성내에 고립될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의 일부부대가 진령으로 진격해 대거 사천을 공격하는 모양새의 거짓공세를 펼쳐 호종남집단군이 북쪽방어선에 주력하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국민당군의 요해를 찔러 부대를 남하시켜 사천북쪽과 성도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는 성동격서전략을 펼쳤다.
이런 군사행동은 예측불허의 전략이였지만 위험부담도 높았다. 대병력이 “사천-호북-오남-귀주”의 수천메터높이의 높은 산과 험난한 협곡을 행군해야 하고 원활하지 못한 보급을 인내심있게 극복해야 했다. 때때로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하듯이 목숨을 걸고 덤비는 국민당군의 최후의 저항에 맞서 싸워야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장개석이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서남방어선은 변변한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1949년 11월 1일에 몰래 호남서쪽지역에 집결한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의 제3, 제5 두개병퇀(兵团)은 제4야전군의 일부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쾌속으로 진격해 일거에 “호남-귀주”방어선을 돌파했다. 인민해방군은 11월 15일에 귀양을 해방시키고 11월 21일에 준의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인민해방군은 사천성경내에 있는 국민당군의 귀주퇴로를 끊어버렸고 승기를 잡아 남쪽에서 사천남쪽을 포위공격할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만들었다.
이때 중경에서 지휘하던 장개석은 장담했던 철통방어가 남가일몽이 되자 부랴부랴 호종남부대를 사천으로 후퇴시켜 방어하게 하고 사천동쪽방어군도 서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은 국민당군의 어수선한 부대배치를 틈타 사천서쪽으로 철수하는 국민당군의 동쪽방어군과 호종남의 일부부대를 우회해 포위한후 사천남쪽산골짜기에서 궤멸시키고 중경을 점령했다. 성도로 후퇴한 장개석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날로 압박해 들어오는 공산당군의 공격에 쩔쩔매였다. 마침내 권토중래의 꿈이 물거품이 되면서 대륙에서 도망쳐야하는 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되였다.
1950년 3월 26일에 인민해방군이 서창공항 가까이 공격해오자 호종남은 너머지 6만명부대의 지휘권을 참모장 라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황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만에서 호종남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탄핵을 받을번 했다가 처벌을 면하게 되였다. 1951년 9월 9일에 호종남은 “진동창”이라고 변성명하고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로 임명되여 대진도에 주둔하면서 부대를 지휘하여 대륙연해에서 소란을 피우며 파괴활동을 했다.
1952년 10월 19일에 호종남은 국민당 제7기 중앙평의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절강성정부주석”직을 겸임했다.
1953년 6월 24일에 인민해방군이 대진도로 진군하자 대만당국은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부”를 취소했다. 그해 7월 23일에 대만으로 돌아온 호종남은 총통부전략고문위원회 상장고문직에 있으면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1955년 9월에 팽호수비사령부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륙군2급상장으로 승진했다.
1962면 2월 14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륙군2급상장이였던 호종남은 사망된 이튿날에 대진자제198호명령에 따라 륙군1급상장으로 진급되였다.
장개석의 신임과 중시를 받아온 호종남은 득의양양해했으며 야심발발하고 아주 거만하여 안하무인격이였다. 그는 항일전쟁시기에 서북에 숨어지내면서 왕으로 자처했으며 내전시기에 급선봉이 되였다. 하지만 그는 포부가 크지만 재능이 없었고 전략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선악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장개석에게 복종했다. 호종남은 군사상에서 팽덕회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쳤으며 탄핵을 받는 랑패상이 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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