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마당발 녀인"
글 / 강 순 화
미국 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동포들이 근 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속에는 수년간《아메리카 꿈》을 안고 그땅을 찾아 간 우리 조선족동포들을 위하여 수많은 좋은 일을 해 온 한 인기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캘리포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회 자문봉사센터 소장이며 코리아타운의《마당발 녀인》으로 불리우는 김정화씨이다.
연변 로투구진 출신인 그녀는 아직 40대의 젊은 녀성이지만 그가 걸어 온 인생길은 그야말로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량식가공공장에서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와 페결핵 장기환자인 어머니 슬하에 딸 넷, 아들 하나로 빈한한 삶을 이어가는 가정에서 그녀는 셋째 딸로 자라났다. 두 언니가 시집간 후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 가시고 또 반년도 안되는 사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집에는 그녀와 오빠, 동생하여 세 고아만 남게 되었는데 오빠는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동생은 학비 때문에 연변일중에 입학한 것도 포기하고 돈이 적게드는 사범학교에 전학하였다. 워낙 승벽심이 강하고 남달리 총명한 그녀였지만 가정형편이 너무도 어려워 겨우 중학을 마치고는 자진하여 취직의 길에 들어섰다. 새벽에는 큰 공장의 보일러들을 찾아다니며 부엌에 땔 곡스를 주어왔으며 낮에는 복장점에 나가 무보수 로동으로 봉제기술을 배우고 밤이면 또 싸리나무 광주리를 틀어서 파는 부업을 하면서 풋돈을 모아 겨우 가정 살림을 이어갔다.
부모가 남긴 단칸짜리 낡은집이 그들 삼형제의 유일한 삶터였는데 동생은 학교 숙사에 나갔지만 오빠는 당장 결혼할 때가 됐으니 그녀는 빨리 집을 나가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녀도 임자를 찾아 시집가는 길이였다. 나이도 어느덧 스물다섯이 되었으니 사실 때이른 혼사도 아니였다. 그의 생각을 알게 된 친구는 그에게 키크고 이쁘장하게 생긴 한 총각을 소개해 주었는데 시어머니되실 분은 새 며느리감을 보더니 키도 작고 인물도 환하지 않다고 나무리였다.
《얼굴만 이쁘면 뭘합니까? 마음씨를 잘 써야지요. 두고 보세요, 제가 시부모님을 어떻게 모시는가를 ... ... 》새 애기의 야무지고 당돌한 대답에 시부모들은 너무도 기득하여 그만 동의하고 말았다 한다. 아니나 다를가 결혼 후 지금까지 근 20년간 그녀 같은 효녀는 따로 없었고 고부간의 관계도 친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서로가 지극정성이였다.
그런데 그 세월에 만난 그 실랑집도 그녀집 못지않게 가난하고 말끔한 가정이였다. 사실 결혼준비도 힘든 형편이였지만 량쪽이 다 비슷한 처지라 서로 리해해 주면서 이불한채에 첫날옷 한벌과 삼일옷 한벌 그리고 간단한 식사 한끼로 결혼은 무난히 마치였다. 허나 신혼생활은 첫 발짝 부터가 고생문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볼가 생선을 넘겨 팔아도 랭장고에서 시장까지 가져다 내 놓으면 얼음이 다 녹으면서 별 리윤이 없었고 돼지고기 장사를 해 보아도 워낙 적성이 틀려서인지 밎져들어 가기만 하였다. 아예 복장가공이나 해 보자 마음먹고 그녀는 복장점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가공기술을 익혔다.
바지 한견지 수공에 2원5십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벌을 만들면 25원. 남들이야 밤새 마작판에서 놀건 말건 그녀만은 밤을 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악착스레 일했다. 하기에 집세도 물고 그럭저럭 생계는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길시내로 일보러 왔다가 우연히 복장가공부에 들려보니 바지가공에 호주머니 하나 더 붙이고 수공은 배로 5원씩 받는 것이였다. 정신이 번쩍 돌았다. 내가 왜 로투구에서 남의 절반을 받고 일하지? 연길로 가자.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그녀는 밤도아 이사짐을 꾸려 가지고 이튿날 곧바로 연길로 향했다. 키큰 실랑이 다리도 바로 펼수 없는 작은 셋방을 싸게 세맡고 매일 복장매대를 돌면서 일거리를 찾아서는 밤을 새며 가공하여 시장에 가져갔다. 하도 일솜씨가 재빠르고 신용도 잘 지키기에 그녀에게는 남의 몇배로 일거리가 생겼다.
어느덧 결혼 1년이 되자 그녀는 귀여운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하도 일욕심이 강한 며느리를 보아온 터이라 애가 돐이 되자 시어머니는 아예 손자를 자기집에 업어다가 키울테니 며느리더러 시름놓고 마음껏 일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갑자기 새끼를 떼여 버리는 엄마의 마음이라 가슴이 째질듯 아팟지만 그것도 시간이 약이 되여 오랜세월 아들애는 아예 시어머니가 도맡아 키우고 말았다.
항창 복장가공으로 신나게 일하고 있는 어느날 또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연길시복장공장에서 기술공을 모집하여 미국령토인 싸이판에 보낸다는 것이다. 시간당 2.75딸라씩 준다고 하니 연길에서 아글타글 벌기만 퍽 나은 돈벌이가 아닌가? 워낙 복장업에서는 재간이 있는지라 실기면접에서 수백명 응시자를 제치고 선참으로 합격되였다. 인젠 출국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첩첩강산에 갈수록 심산이라고 시련은 또 찾아왔다. 출국비용 2만6천원도 어떻게 갖출가 근심이 태산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련일째 배가 탈리는듯 아파나는 것이였다. 병원에 가보니 급성맹장이란다. 당장 수술해야할 형편이였다. 수술비 500원을 갖추라니 어데서 갑자기 이 돈을 구한단 말인가? 생각끝에 난생 도움을 청해 못본 사촌오빠를 찾아가서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출국비용 500원이 모자라니 먼저 꿔주라고 사정하였다. 하도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본 터이라 그 오빠는 선듯 돈을 내 놓았다. 그녀는 남편도 시부모도 알리지 않고 친구만 데리고 병원에 가서 수술대에 올랐다.
사후 소식을 알게 된 가족들은 기가막혀 할말을 잊었다. 어데 그뿐인가 수술 3일만에 병원을 뛰쳐나와 자기 혼자 집에서 점적주사를 맞았고 일주일 후에는 실을 빼야 하는데 병원가는 비용이 아까워 집에서 자기절로 가위를 불에 달구어 소독하고 실을 끊고는 집께로 그 실을 하나하나씩 뽑아 버리고 배를 단단히 동여매고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보통사람들로는 상상할수도 없는 그야말로《강심장》의 녀인이였다. 결국 맹장수술에 230원밖에 쓰지 않았고 그후에는 언니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수술 보름만에 싸이판으로 향한 출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어데 상상이나 했던가? 싸이판에서의 나날은 완전히 일하는 노예들의 생활이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밤 한,두시까지 근 20시간이나 되는 고된 로동은 그렇다손 치고라도 무시로 가해지는 사장과 지배인들의 저질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욕설과 행동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자들은 이 로무일군들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지옥같은 하루하루가 참으로 삼추같이 길었지만 어떻게 하던지 꿔온 빚은 갚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는 매일 이를 악물고 귀를 막으며 참고 견디여 가면서 만 3년의 합동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멕시코행을 신청하였다.
한국사장을 따라 낮설고 물선 지구 반대쪽 검은 피부의 나라 멕시코땅에 도착하니 제일 큰 곤난은 언어불통이였다. 죽으라는지 살라는지 우선 말을 알아야 이땅에서 살아남을 것이 아닌가? 빨리 말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또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스페인어 사전을 보풀이 나게 번져가며 읽고 암기를 내였다. 일터에선 되던 안되던 손짓발짓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몇 달간 꾸준히 노력하니 차츰 멕시코인들이 지껄이는 소리들을 약간씩 알아듣기 시작하였다.
《하면 된다》는 그녀의 인생신조이다. 1년간 밤낮이 따로없이 극성스레 애쓰는 모습에 멕시코애들도 감동하여 적극 도와 나선데서 차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였으며 2년이 되니 의사소통은 문제없이 되었고 3년만에는 완전히 멕시코인들과 어울려 막힘없이 말하고 일할 수 있었다. 한국사장은 그녀의 놀라운 의력에 탐복하여기한이 차자 선참으로 그녀의 희망대로 미국행의 길을 열어 주었다.
《자유와 기회의 땅》아메리카에 왔다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소한 이국에서의 생활은 또다시 고행길의 시작이였다. 거리에서 몇날몇일을 헤매다가 요행 옛 고향의 언니를 만나 그집에 얹혀 살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식당 복무원도 해보고 사우나에서 때밀이도 하고 안마방의 지압도 하면서 차츰 그곳 생활에 적응하였다. 후에는 세집도 따로 잡고 일터 외 시간에 보건식품 사업도 하면서 점차 수입을 늘였다. 몇 년후 미국에서의 영주권을 쟁취하자 2009년에는 12년이나 갈라져 살며 서로 그리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미국에 데려와서 다시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세식구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명년 8,15에는 시부모님을 뵈려 중국에 온다고 나와 약속하면서 마음은 지금부터 애들처럼 들뜨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나온 길들을 돌이켜 보면 꿈을 안고 돈을 벌어 보려 가족과 갈라져서 외국에 나온 우리 조선족 형제자매들이 격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안다고 하면서 그 누가 집이 없이 거리에서 헤매면 우선 자기 집에 데려와서 안착시키고 일자리와 방을 구해주며 그 누가 말을 모르고 법을 몰라 불이익을 당하면 앞장서서 도와주는 등 이 몇 년간 그녀의 도움으로 미국땅에 정착한 우리동포들만도 5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넓은 인맥으로하여 친정집《큰 언니》로, 코리아타운의《마당발 녀인》으로 불리우며 뭇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2010년에는 또 큰 종류수술까지 하여 무거운 일을 할수 없게 되자 그는 쯤쯤이 우리 동포들의 카드구입과 우편, 송금 등 일들을 도와주었고 또 열심히 자습하여 힘든《보험회사 자격증》도 땃으며 앞으로는 또《부동산중계 자격증》도 따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이 곤난하여 어릴때 공부를 다 못한 한을 가슴에 안고 명년에는 이곳 외국어학원의 대학본과과정에 입학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영어와 스페인어에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미국사회의 각종 인터넷 정보도 제때에 장악하여 지난해부터는 할리우드 영화촬영회사 회원으로 가입하여 여러가지 보조역까지도 맡아하는 등 외국에 나간 조선족녀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항상 열정적이고 활달한 그녀는 지금도 우리 조선족 동포들의 일이라면 밤낮이 따로 없이 차를 운전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자기일처럼 해결해 주고 그 누가 중국에서 찾아오면 극력 시간을 짜내여 구경시키고 안내해 주는 등 그의 매일 일과는 항상 빈틈없이 꽉 차 있군 한다. 하기에 그곳에선 누구던지 무슨일이 생기면 일단 그녀를 찾았고 그녀와 연락되기만 하면 십중팔구는 해결을 가져오군 한다고 하였다. 그녀의 능력과 책임감은 참으로 보통이 아니였다.
최근에는 또 미국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을 더욱 뜻있고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동포회 성원들을 이끌어 월요일,화요일 영어학습반을 조직하고 그녀가 직접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다. 또 배구, 테니스 등 여러 가지 종목의 아침운동도 조직하였으며 명절에는 조선족동포회 주체로 각종 문예오락과 체육경색을 벌리는 등 유익한 활동들로 언제나 스케줄을 꽉 차게 하고 있었다. 요지음에는 또 한국코치가 조직한 배드민턴 클럽에 가담하여 매일아침 두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오전에는 영어학원의 공부를 하며 오후에는 일터에 나가는 등 날마다 뜻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난 10월,《제39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야말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만들어 낸 우리 조선족의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 평범한 시골뜨기 녀인이 오늘날 지구 반대쪽 백인세계에서 마음껏 활보하기까지 그 얼마의 천신만고를 격었으며 그 힘겨운 한걸음 한걸음이 그녀의 능력과 자존심을 키워주었고 그녀의 앞길을 찬란히 개척해 준 것이다. 지금《미국 캘리포니야주 중국조선족동포회》의 한 책임일군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그 직함에 손색이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동포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있으니 이 얼마나 장하고 멋진 인생인가?! 이런 고마운 분들이 있기에 가족을 그 머나먼 미국땅에 보낸 고향의 친지들도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있을 것이며 그녀와 같은 해외의 우리동포지성인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2012년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연변녀성>-- 2013년 제2기에 실렸음)
파일 [ 5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