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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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2010년 04월 02일 15시 32분  조회:5023  추천:75  작성자: 강순화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윤봉길의사 "상해홍구공원의거"78주년을 기념하여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중심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뜨락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력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있던 숨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력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 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뒤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여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였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여난 집안은 몰락한 량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살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살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여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력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련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수 있었다.
    1926년 19세되던 해《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력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리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례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리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였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리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여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 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리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우기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량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림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리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림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림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것을 맹세하였다.

    《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앞 》

     력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래왕하면서 듣고 본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 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래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죽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것이나 숲속에 자고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래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것을 나는 확신하고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것과 똑같은 리치이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여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시위를 펼치고저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프랑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렬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여나가 지니고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였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채 13년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우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들어 짐짝처럼 차 뒤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팔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륙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륙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 되였음.
    처형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것이니 지금에 림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였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였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력사속에서 살아숨쉬고있다.
    안중근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만큼 호전되였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림시정부에 대한 물심 량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꼬, 꾸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림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리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땅을 밟게 된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림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난 어린이가 깊은 련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락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것이다.
    상해의거로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림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림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였다. 독립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력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림시정부에 의한 의렬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림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림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림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림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련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만보산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련합전선이 형성되였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만큼 상해전쟁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량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락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림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림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없는 외교적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세계의 각광을 받은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세계가 놀랐다. 림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립증하고 과시한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성과는 가히 짐작될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래동안 친일로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림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령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것이라고 해석한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음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력사적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력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력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였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량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량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량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대를 세운 렬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력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켤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력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한국명인연구》에 수록
                                            연변인민출판사    2007년 7월 출판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제279페지-제281페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 백범일지 김구 저 제289페지-제294페지 서문당 출판.
3. 윤봉길의사 상해의거의 력사적의의 신용하 백범 김구기념관.
4. 윤봉길의사의 출생과 가정환경 윤남의 홈페지 자료.
5. 선구적인 농민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6.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륙군성 극비문서 월간조선 2002년 5월호.
7. 선구적인 개혁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8.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와 가나자와순국의 의의 윤병섭.
9. 광복의 력사인물 제260페지-제263페지. 조동걸 한국 국민대학교.
10.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신용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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