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흑야
6. 뿌리
최구장이 운주동에 차린 서당방은 요즘 또 일본 헌병 놈들 때문에 살벌한 위기를 겪게 됐다. 응삼과 영팔, 수길은 스승 최구장을 도울 대신 배은망덕하고 최구장이 서당방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염탐해 나까노라 소대장에게 다 고발했다. 나까노라 소대장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인차 끼무라 국장에게 보고했다.
교활한 헌병대와 개다리 응삼의 감시 밑에 최구장은 운주동 서당을 진지로 민족주의 전통교양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오전, 최구장은 아침 숟가락을 놓은 후 바깥 날씨가 유난히 따뜻해 마루에 앉아 대통을 길게 뻑뻑 빨아 들이켰다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 놈들은 우리를 점점 살기 어렵게 만든다. 목을 조이다 못 해 이젠 조선말을 하지 못하고 조선 글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름도 일본 놈들의 이름처럼 창씨개명을 하라고? 개놈들, 우리가 어찌 네 놈들의 섬나라 오랑캐 같은 대화민족으로 된단 말이냐? 흥!)
최구장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갑갑해났다. 운주동 서당이 위기를 겪고 조선 사람들의 대화민족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일본 놈들의 성화에 견디기 어려웠다. 설상가사상으로 요즘 며느리를 잃은 아픈 마음의 상처에마저 소금을 맞은 듯 했다.
그는 담배대통으로 마루턱을 툭툭 치더니 담배연기를 푸~ 푸~ 내뿜었다.
“응삼과 영팔은 사람새끼 아니야. 자기들이 배운 서당 방을 지켜줄 대신 뭐야? 배은망덕하게도 섬나라 오랑캐들 밀정질을 하면서 고발까지 하다니? 에잇,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에잇, 참, 개만도 못한 놈 새끼들! 개라면 주인을 보면 꼬리나 치지. 퉤! 개새끼면 잡아먹지. 흥!”
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통을 옆구리에 찌르고 은빛구레나룻을 흩날리며 글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선후하여 봉인과 봉순, 봉문이 어시들과 함께 들어왔다.
최구장은 오늘 따라 손자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어시들이 다 온지라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모두 바쁘더라도 거기 앉소. 긴히 할 말이 있소.”
경숙과 어금이 그리고 셋째며느리가 앉았다. 좌석을 다 정하고 앉자 최구장은 앞자리에 좌정하더니 아주 엄숙하고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손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겠소. 명심들 하오.”
경숙이가 최구장에게 물었다.
“이름이라니요? 우리 앤 봉인이 아닙둥?”
어금도 의아해 했다.
“혹시 시아버님도 일본 사람들의 말대로 창씨개명을 하려는 게 아닙둥?”
셋째며느리는 묵묵히 시아버지의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최구장은 건 가래를 떼더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히 말했다.
“무슨 놈의 생벼락을 맞을 창씨개명이야. 일본 놈들이 창씨개명을 하라는 바람에 급급히 우리 조선 이름을 똑바로 지어주겠다는 말이요.”
그제야 아들며느리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최구장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 애들이 부른 이름은 모두 어린애 때 부르는 애명이었소. 그러니 정식이름을 지어주겠소. 봉인은 근형, 봉순은 근덕, 봉문은 근활이라고 지었소. ‘근’ 자는 뿌리라는 ’근’ 자요. 저 애들이 이담 커서 우리 개성 최 씨네 뿌리, 나아가서 우리 조선민족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뿌리 ‘근’ 자 돌림으로 지은 게요. 이담 손자를 몇을 낳든지 모두 뿌리를, 근본을 잊지 말도록 ‘근’ 자 돌림으로 짓도록 하라.”
“예-”
모두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시들은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 근형과 근덕, 근활아,”
“예!”
“이제 마을 애들이 오면 함께 조선 글을 공부하자.”
“야~ 좋다.”
손자들은 어려운 천자문을 배우다가 천자문보다 조금 쉬운 조선 글을 배운다니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최구장은 애들이 오기 전에 흑판에 석회덩이로 백두산과 천지를 그려놓고 백두산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았다.
드디어 애들이 삼삼오오 어른들의 손을 잡고 서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 공부를 시작하겠다. 여기 흑판에 써놓은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
그때 아래 방에서 웬 애가 “백두산!”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애들이 머리를 돌려 아래 방 쪽을 보니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던 명옥이 문까지 빠금히 열고 소리쳤던 것이다.
“거 계집애가 웬 소리냐? 얼른 문 닫지 못할까? 삼실이나 뽑을 게지.”
최구장이 고함치면서 옆구리에서 대통을 빼들자 질겁한 명옥은 입을 빼쭉 하더니 문을 닫고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허연 코 물을 풀쩍거리면서 히히 웃었다.
“가시나가 무슨 공부야. 삼실이나 뽑을 게지. 흥!”
우쭐하는 상순을 보고 최구장은 눈을 무섭게 흘기었다.
“상순아, 그럼 못 써. 계집애라고 깔보면 안 돼. 에헴.”
상순은 머리를 폭 숙이었다.
“계속 배우자. 따라 읽어라. 백두산!”
“백두산!”
애들이 따라 읽는 낭랑한 소리가 서당에 차고 넘쳤다.
뒤이어 최구장은 “‘백두산’이란 글자를 읽으면서 모래판에 열 번씩 써라.”
“예~”
“뭐? 백두산?! 이놈들이 정신 나갔어?”
이때 서당 밖에서 새된 소리가 울렸다.
모두들 머리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나까노라 소대장이 군도를 잡고 응삼과 영팔, 류강철을 앞세우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응삼은 들어서자마자 삿대질하며 가물에 실 돌피 같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백두산은 무슨 백두산이야? 장백산이야. 아니, 후지산이라고 해야 해. 알았어?"
최구장은 씨무룩이 웃으며 대구했다.
"이보쇼. 지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요. 백두산을 어떻게 장백산이라고 하는가? 더구나 백두산을 일본의 후지산이라는 건 너무 하잖은가?!"
류강철이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퉁사발눈깔을 희번뜩이며 버럭 고함치었다.
"뭐라고? 이 놈 영감! 후지산이라면 후지산이랄거지. 웬 잔소린가?!"
그러나 최구장은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장백산은 산맥 이름이고 장백산 최고봉은 백두산이 아니고 뭔가? 백두산을 어찌 후지산이라고 해?"
나까노라는 최구장의 일리 있는 말에는 더 어쩌지 못하고 딴전을 부리었다.
최구장, 왜 또 조선 글을 가르쳐?”
최구장은 앉은 자리에서 응삼을 손가락질하면서 질책했다.
“너 정말 점점 말이 아니구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누구 보고 삿대질하며 반말이냐?”
나까노라 소대장은 군도 자루를 잡으면서 거들먹거렸다.
“최군 목에 개패를 걸어!”
류강철이 따라 들어와 통역하자 응삼과 영팔이 줄이 달린 패쪽을 들고 들어와 주춤주춤 하다가 최구장의 목에 걸어놓았다.
“무슨 짓이냐?”
나까노라는 말해주라고 영팔에게 손짓했다.
영팔은 개다리질을 곧잘 했다. 차렷 자세까지 취하고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 고아댔다.
“이젠 조선 말을 하지 못해. 대일본 제국 법을 어긴 죄인놈에겐 이런 패쪽을 걸어준다.”
최구장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까노라와 영팔을 쏘아보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왜 이래?”
영팔은 기가 눌리어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찰나 최구장은 목의 패쪽을 벗겨 제꺽 영팔의 목에 걸어놓았다.
영팔은 개패를 벗어 쥐고 최구장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영감에게 건 거야.”
최구장은 무섭게 영팔과 응삼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이 섬나라 오랑캐 발바리놈들아, 너넨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이야 말로 민족의 역적들이야. 일본 놈의 개놈들게게 개패를 걸어야 해! 개놈새끼들!”
영팔은 개패를 들고 최구장과 나까노라 소대장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숙였다.
나까노라 소장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코밑 가재수염을 쓰다듬더니 “허허허.” 하고 허무한 웃음을 웃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허허, 단단히 경을 치러야 하겠구먼.”
그래도 최구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개 뼈다귀 같은 개 소리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지 않고 그래 섬나라 오랑캐들의 개소리를 치라는 거야? 너희들 죄꼬만 섬나라 오랑캐들 개소리를 우린 모른다.”
최구장이 고함치자 류강철은 옛스승인지라 그대로 통역할 수 없어 우물거리었다.
그러나 나까노라는 최구장의 퍼러덩덩한 얼굴 표정을 보고 격한 어조를 듣고 눈치챘다. 그는 군도 자루를 거머쥐어 군도를 뽑으려다가 도로 뒤로 밀어재끼었다.
“최구장, 당신은 이 부근에서 제일 유식한 양반이 아니고 뭐요? 당신은 앞장서 대일본 제국의 말을 배우고 일어를 애들에게 가르치란 말이요. 우린 당신이 우리 대일본 제국에 공로를 세우면 서당을 계속 꾸리게 하겠네. 잘하면 서당 방이 아니라 이 마을에 커다란 벽돌학교를 지어주겠소이다. 알겠소까?”
나까노라는 이쯤 말하고 나서 옆에 선 류강철을 보고 통역해주라고 눈치 했다.
통역을 듣고 난 최구장은 피씩 쓴 웃음을 지었다.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일은 없다. 안 된다, 안 돼, 절대 안 되지.”
류강철이 그 말을 통역해주자 나까노라는 군도를 쑥 뽑아들더니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 영감두상을 붙잡아가!”
“하이!”
영팔과 응삼은 최구장의 양팔을 붙잡고 류강철은 뒤에서 마구 밖으로 떠밀었다. 뒤에서 나까노라는 빼들었던 군도로 통나무흑판을 탁 내리찍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발길로 흑판과 석회 덩이 통을 탁 차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경숙과 경민 등이 영팔의 손을 붙잡고 사정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나까노라 소대장의 안전에서 최구장의 두 팔을 바 줄로 꽁꽁 묶어 문 밖으로 마구 떠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근형과 근덕, 근활 그리고 명옥까지 달려와 끌려가는 할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꿇어앉아 엉엉 울었다.
나까노라는 사정없이 애들을 마구 뜯어 내쳤다.
최구장은 애들을 내려다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너희들은 우리 조선 사람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꼭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말을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애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주먹 밑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아가는 일본 놈과 영팔 등을 쏘아보았다.
최구장은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머리를 들어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을 쭉 뻗치고 은발을 흩날리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먹장구름 밑에서 불뱀이 뻘건 혀를 날름거리어 기운봉 산허리를 내리치더니 먹장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대지에는 창대 같은 소낙비가 새뽀얗게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골물이 요란스레 협곡에 뭐라고 고함치며 덮쳐내려가더니 실폭포가 쏴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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