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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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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6)
2016년 03월 25일 16시 51분  조회:2137  추천:0  작성자: 김장혁
                        
 

                                   8. 함흥촌
      인삼은 사냥개가 왕왕 사납게 짓는 파출소 대문을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은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 넌덜거렸다.
      “아니, 양아들아! 이게 뭐냐?”
      이때 대문 뒤에서 장학산이 뛰어나오더니 인삼을 와락 끌어안았다.
      “양아버지,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 이 놈들이 감히 너를 이렇게 때려? 파출소를 쾅 폭파해버려라!”
     장학산은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대문 안을 쏘아보았다. 뒤에 지학사와 그의 가병들도 사냥총을 쥔 채 나타났다.
     장학산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인삼을 업어다 앉혔다.
     “먼저 집으로 가라! 내 저놈들과 따져봐야겠다. 도대체 왜 무고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때려? 흥!”
    지학사는 가병들을 돌아보더니 장학산한테 고함쳤다.
     “형님, 내 사촌 동생도 믿을 놈이 못되오. 금방 뭐라고 했소? 대일본제국과 맞서선 안 된다지 않소. 허나 그놈 지학구가 눈을 좀 뜨게 만들기요.”
     그때 인삼은 수레에 누운 채 머리를 간신히 들고 손사래를 쳤다.
“양아버지, 안 되오. 절대 안 되오. 내 혼자 매를 맞았으면 됐지. 양아버지와 양 삼촌까지 연루시킬 필요 없소. 가만있으면 모든 게 끝나고 맙니다.”
장학산은 주먹으로 마차 바닥을 꽝 치며 눈을 부릅뜨더니 손을 홱 저었다.
“병원에 가자!”
마차는 진수해 아래 개방지 쪽으로 내려가 한자로 “약”자를 박은 초롱을 데룽데룽 건 집 앞에 가 멈춰 섰다. 약방이었다.
장학산이 들어갔다가 이윽고 나왔다. 장충국이 인삼을 업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다.
중의는 피가 낭자한 인삼의 몸을 두루 살펴보더니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웬 놈들이 이렇게 때렸어? 쯧쯧쯧.”
"일본 놈들이지 누구겠소?”
중의는 인삼의 팔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사촌동생 지학구가 해동분주소 소장을 하지 않소? 건데 당신 양아들을 감히 이렇게 때린단 말이오?”
지학사는 뒤에서 코 방귀를 뀌었다.
“지학구 동생도 섬나라 오랑캐 놈들의 밥을 처먹더니 섬나라 오랑캐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본단 말이오. 형님의 양아들을 구하기는커녕 우릴 보고 대일본제국 분주소와 엇서지 말라고 말리기까지 했어. 쳇! 중국 사람의 기를 개를 떼 준 모양일세!”
중의는 인삼의 맥을 한참 보더니 팔소매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괜찮소. 다행히 당신 양아들이 정신이 강하기에 피부가 찢기었을 뿐 내상은 없소.”
“다행이구먼. 약을 좀 지어 주오.”
한참 후 첩약 열 몇 첩이 나와서 장학산은 자기 호주머니에서 은전 몇 닢을 주고 일어섰다.
“약값이 이렇게 들지 않소. 가지고 가오.”
중의는 따라 나오면서 은전을 내밀었다.
장학산은 사람 좋게 마구 밀어주고 나왔다. 이번에는 장리국이 인삼을 업고 나와 마차 위에 눕히고 자기 솜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그들이 진수해 다리를 건너왔을 때 다리건너 원시림에서 기준과 창준 그리고 상우와 상훈이, 상길과 상순까지 나타났다.
인삼은 마차 우에서 머리를 들고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그는 기준을 조용히 손짓해 불렀다.
기준이 마차 우에 올라가 풍덩 들어앉았다.
“어서 숲속으로 피신하오. 명천에서 형님과 큰아버지 네를 추격해 똘만이란 경찰이 왔소. 이러다가 똘만한테 들키는 날엔 우리 함흥촌이 끝장나오.”
창준은 다가와 피투성인 인삼의 얼굴과 몸을 목수건을 벗어 닦아주었다. 그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동생이 잡혀갔는데 집에서 기다리겠는가? 쯧쯧. 이게 뭐야?”
기준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면서 말했다.
“개 놈새끼들, 토성 안에 왔을 때 어째 억복이랑 동굴에서 총을 쏘게 하지 못했소? 언제 저 일본 섬나라 오랑캐 놈들을 몽땅 잡아 없애버리겠소?”
인삼은 재촉했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오.”
“그러지.”
기준과 창준이가 자식들을 데리고 원시림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인삼이랑 해동 굽인 돌이를 돌아갈 때였다. 굽인 돌이 산등성이에서 한패의 무장괴한들이 나타났다.
지학사 가병들은 사냥총을 겨누면서 고함쳐 물었다.
“누구얏?!”
“우리오.”
꺽다리 억복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철석이랑 바위돌이랑 달려 내려왔다.
“어째 왔는가? 빨리 피신하오.”
억복은 마차 위에까지 뛰어올라왔다. 인삼이가 보니 그들은 다행히 총을 들지 않고 왔었다.
인삼은 자기 얼굴에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리는 억복의 귀에 대고 귀속 말을 했다.
“왜 눈치코치 없이 노오? 이 길로 장백산 본영에 가오. 김성칠 대장한테 토성안집은 이미 폭로됐다고 전하오. 성칠 대장 아버지네 일가를 알아 볼수 있는 놈은 똘만밖에 없소. 똘만 놈을 꼭 처단해야 하네.”
“우리 어찌 대장을 남겨 두고 혼자 갑니까?”
“이건 명령이오. 시간을 끌지 말고 당장 떠나오.”
인삼은 억복의 귀에 대고 뭐라고 몇 마디 더 했다.
“옛!”
억복은 팔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조용히 부탁했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억복과 철석은 유격대원들을 데리고 서쪽을 바라고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철석은 그간 기준이 알려준 조상의 묘방- 오줌에 상처를 처치하고 나아 씽씽 달아다닐 수 있어 유격대 대오를 떨어지지 않게 돼 다행이었다.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원시림숲속으로 뻗어나간 굽이굽이 산기슭 길을 내렸다. 인삼을 실은 마차는 어둠속에서 울퉁불퉁한 호박 길을 덜커덩거리면서 함흥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때 어둠이 뒤덮인 원시림 속에서 그들의 뒤를 밟는 자들의 눈이 있었다.  바로 똘만을 비롯한 특무, 경찰, 밀정 놈들의 도적놈 눈길들이였다. 그 놈들은 사이또 소장의 포치에 따라 길 옆의 수림 속을 따라 인삼을 멀찍이 뒤따라오면서 마중하러 온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먼데다가 아름드리나무들이 앞을 막아서 마중하러 온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보았지만 대체 누가 누군지는 똑똑히 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인삼이네가 토성 안에 들어갔다.
성해가 마중 나왔다가 마차 위에 누워 있는 인삼을 보고 왼손으로 입을 싸쥐고 흐느끼면서 다가왔다.
“주인님, 이게 웬 일입니까?”
“울지 마오. 이후에 놈들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마오.”
그제야 성해는 눈물을 훔치더니 마차에서 내리는 인삼을 부축했다.
“아저씨, 우리 업어 드리지요.”
상길이가 등을 들이대자 인삼은 사양했다.
“아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괜히 똘만 놈의 눈에 뜨이면 대사다.”
기준은 “그 똘만 놈 새끼 여기까지 쫓아왔어? 내 만나기만 하면 도끼로 대갈통을 까치우겠다.” 하고 을러멨다.
기준과 창준은 인삼을 부축해 위방에 들어가 자리에 눕혀 놓은 후 별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인삼은 성해한테 “집안에 다른 정황이 없지?” 하고 물었다.
성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아무 일도 없습니다.”라고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했다.
인삼은 미닫이문을 열고 정지를 내다보았다. 그는 쌀독이 그대로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다행이군, 동굴이 문제없군.)
그는 한 숨을 후 내쉬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편 똘만은 이끈 자위대 놈들은 동산에 올라가 계수동쪽에 숨어있으면서 토성안집 마당을 내려다살피기로 했다.
똘만은 자위대 놈들에게 명령했다.
“토성안집에서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려도 놓치지 말라!”
“예.”
두덜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새까만데 어떻게 살핀다고.”
“그러게 말이야. 추워 죽겠는데.”
그러자 똘만은 목이 빠지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뭐라고? 네놈들이 유격대 두목 인삼을 놓치는 날엔 목이 날아 날 줄 알아라.”
그러자 자위대 놈들은 질겁해 목을 움츠렸다. 그 놈들은 추운지 겁이 났는지 덜덜 떨면서도 산 아래를 살피는 척 했다.
한참 후 똘만은 그저 산등성이에 서서야 어두운 밤에 토성안집을 살핀다는 것도 수하자위대원들의 말처럼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은 둘씩 짝을 무어서 함흥촌에 내려가라. 토성안집 말고 다른 집도 살펴라. 만약 의심스러운 놈들이 있으면 나한테 와서 보고해라.”
자위대 놈들은 짝을 무어가지고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한 놈이 의아해 물었다.
“똘만 경찰님, 경찰님은 어데 있겠습니까?”
“건 비밀이야.”
똘만의 말에 자위대 놈들은 툴툴거렸다.
“어데 있는지 알아야 보고하지.”
그제야 똘만은 엉뚱하게 말했다.
“너희들의 옆엔 항상 내가 있다고 생각해. 빨리 내려가 수사해!”
자위대 놈들은 툴툴거리면서 둘씩 짝을 무어 흩어져 산 아래로 내려갔다.
똘만은 산등성이에서 서성거리다가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내 여기 간도까지 온 게 무슨  진짜 유격대와 겨뤄보자고 왔어? 자칫 잘못 걸려들었다가 목이 날아나겠다. 영월구 지게꾼과 십가장 끝장 몰라? 으흐흐, 성지촌 허팔기처럼 목이 썩뚝 잘리자고? 쳇, 웃기지 말라. 이 똘만 경찰을 어떻게 보고? 흥! 사이또 소장과 조일파출소 소장이 다 뉘 아들이냐? 난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 대대장 파견받은 간도에 온 특무야. 끼무라 국장 포치대로 병완과 기준이 부자 놈들이 어데 있는가 알아내면 한평생 배때를 두드리면서 잘 살 텐데. 자위대 부대대장도 시키겠댔지. 흐흐,  한 대장처럼 양옥도 준댔는데. 으흠, 그런데 소서구란 골짜기는 도대체 어데 있을까?)
이때 뼈 속을 스미는 초겨울 바람이 우수수 낙엽을 날리면서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유격대를 잘못 건드렸다가 목숨 잃겠다. 살아서 고향 명천에 돌아가야 우시장에서 한다하는 자위대 부대장을 하지.)
똘만은 두 손을 마주 싹싹 비비며 서성거렸다.
(이거 추워서 어쩌지?)
어둠속에서 동쪽 골 안에 게딱지처럼 널려있는 움막들이 그의 뱁새눈에 피뜩 뜨였다.
“에라, 모르겠다. 추워 죽겠어.”
그는 어느 움막에도 들어가 한잠 푹 자면서 자위대 놈들이 보고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9.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이튿날 이른 아침 기준은 가을걷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곧추 용정 동쪽에 있는 성지촌 으로 떠나갔다.
      (일본 놈 새끼들이 어떻게 모질게 때렸으면 ‘꼬리 없는 황소’가 화병에 앓아누워 일어나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는 일본 놈들을 한없이 괘씸했다.
     그는 령길을 타고 반나절 너머 걸어서야 성지촌 뒤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이전에 옥수수 밭에 마른 이파리들이 너펄거리는 옥수수 밭이라도 있었기에 몸을 숨기기도 좋았다. 그런데 산우에서 원삼이네 집 뒤쪽 옥수수 밭을 보니 이젠 옥수수단을 세워놓은 무지 밖에 없었고 저쪽 멀리 산비탈 밭에서 옥수수단을 날라다 무지는 애들 몇몇이 보일뿐이었다. 방법 없이 그는 옥수수단 무지 속에 숨어서 산 아래 원삼이네 집에서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없는가 애타게 살폈다. 마을에도 별로 오가는 사람이 없고 다만 산비탈에 널려있는 밭들에는 가을 곡식 싣기에 바삐 도는 농사꾼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준은 속에서 불길이 활활 피어올랐다. 그 울뚝밸에 원삼이네 식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라니 한식경이 삼추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원삼이네 집으로 씽 달려 내려가 원삼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시퍼런 대낮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삼이네 집은 사이또 소장 놈과 똘만이가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내심하게 둬 식경이나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피뜩 원삼이네 마당에 수레가 없는 것이 보였다. 산비탈 밭을 두루 살펴보아도 수레는 보이지도 않았다.
     “원삼을 싣고 병원에 갔을까? 아니야, 원삼은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을 사람이야.”
     기준은 중얼거리면서 어데 갔을까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혹시 원삼이 타작하느라고 물레방아 골의 리영룡네 집에 가지 않았을까?)
기준은 옥수수단 무지에서 산비탈과 마을을 참빗질해보았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 외에는 이상하게 기웃기웃 하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준은 옥수수단무지에서 살그머니 나와 옥수수단 무지 사이를 슬금슬금 빠져나가 산등성이 길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산기슭에서 “장활아, 종호야~ 점심을 먹어라.” 하고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호라니? 그럼 쟤들이 비탈 밭에 있었단 말인가?”
기준이가 바삐 옥수단사이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확실히 산기슭 둔덕 우에 키가 작달막한 원삼의 처가 입가에 두 손으로 손나팔을 해대고 애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산비탈 밭에서 애들 서넛이 원삼이네 집이 있는 둔덕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기준은 황급히 옥수수단 무지 속에서 “종호야!” 하고 나직이 불렀다.
종호는 이쪽을 피뜩 돌아보더니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상한지 도리머리 질 하면서 계속 어머니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종호야!”
기준은 좀 더 높이 부르면서 옥수수단 무지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종호는 이쪽을 여겨보더니 달려왔다.
종호는 산비탈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옥수수단속으로 슬쩍 들어왔다.
“큰아버지! 어떻게 돼 왔습니까? 큰아버지랑 유격대랑 잡지 못해 놈들이 미친개 눈깔이 돼가지고 싸다니는데.”
기준은 종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버진 어떠냐?”
종호는 철색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비치더니 머리를 숙였다.
“아버진 식사도 하지 못합니다. 마른 팥알 몇 알씩 씹어 넘기고선 숨을 몰아쉽구마. 그런데 뒤를 보지 못해 생야단입구마. 우리하구 엄마가 손가락으로 파낼 지경입구마.”
기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산비탈아래 원삼이네 집 쪽을 내려다보았다.
“야, 원삼이, 어떻게 돼 이 지경이 되였소?”
뒤이어 그는 옥수수단 무지에서 나와 곧추 원삼이네 집으로 씨엉씨엉 내려갔다. 종호는 기준의 뒤를 따라 내려가면서 사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리였다.
“큰아버지, 해진 뒤에 내려오시오. 대낮인데 개다리들의 눈에 띠우겠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계속 내려갔다.
“동생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해지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어느 놈이 개다리질 하면 도끼로 허팔기 새끼처럼 대갈통을 까부시겠어.”
종호와 장활은 마을에 이르러 이집 저집 흘끔거리면서 살폈다. 그러나 다행히 길목에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준이가 집 문을 뚝 떼고 들어가니 원삼이가 피골이 상접해 위방에 누워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오? 원삼이.”
그 소리에 피골이 상접한 원삼은 겨우 고개를 돌려 기준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형님이 어떻게 돼?”
상처투성이 얼굴에 관골이 튀어나오고 눈 확이 푹 꺼진 원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준은 원삼의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원삼은 기준을 맥없이 쳐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형님, 난 허팔기 새끼를 처단한 게 정말 시원하오.”
기준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원삼은 기준의 손을 꽉 잡으면서 “형님, 우리 온 집 식구는 살 길이 없게 됐소. 온 일 년 뼈 빠지게 농사를 지었는데 리영룡이 소작료를 8, 8할이나 가져가오. 에헴, 헴, 컥.” 하고 말하다가 억이 막혀 숨을 거칠게 톺았다.
기준은 원삼을 부축해 앉히고 잔등을 투덕투덕 두드려주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리영룡 새끼를 도끼로 대갈통을 까치우겠어.”
원삼은 억이 막혀 겨우 숨을 톺았다.
“리영룡이 다 나를 업신여기다니? 어, 헉, 원, 기, 기막혀 어디 살겠소? 어, 헉, 헉.”
기준은 “근심하지 마오. 내 언제든지 동생의 원수를 갚아 줄 테니. 그러나 저러나 동생 병원에 가 보이고 약을 쓰오. 꼬리 없는 황소 이게 뭐요?” 하고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잎을 들춰 내놓았다.
원삼은 기준이쪽에 동전을 밀어주면서 사양했다.
“형님, 형님네도 바쁘겠는데.”
기준은 버럭 성을 냈다.
“야, 잔말 말구 병 치료를 하게. 우리 일본 놈들을 몰아내고 함께 고향에 돌아가자.”
원삼은 희죽이 웃더니 두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자리에 누웠다. “고향에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겠소. 요즘 자리에 누워 눈만 감으면 고향 경성 산골과 부모들의 산소가 떠오르오. 언제 일본 놈들을 몽땅 몰아내겠소. 고향에 가서 뒤 산의 나무를 마음대로 해 때면서 살아야 하는건데. 내 밭에 곡식을 심어먹으면서 사는 그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소?”
기준은 원삼을 꽉 껴안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날이 멀지 않네. 꼭 강해져라. 꼭 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원삼의 눈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베개 잇에 뚝뚝 떨어졌다.
“난 고향에 돌아가고 말 거 같잖소.”
기준은 버럭 고함쳤다.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린 꼭 함께 고향에 가는 거야. 이 놈아, 이 못난 놈아.”
“일본 놈들과 리영룡 놈 때문에 억이 막혀 숨이 올라오지 않소.”
“용정에 가서 죤슨한테 부탁해 좋은 의사를 보이면 치료할 수 있네.”
그러나 원삼은 가늘게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속병, 속병을 누가 치, 치료한다오. 허 헉, 꺽.”
그 말에 장활과 종호랑 모두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뭐야? 한참후 원삼이가 숨을 거칠게 톺았다. 이윽고 숨이 꺽 막혀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크게 뜬 채 손으로 문밖을 가리키다가 털썩 떨어뜨렸다.
기준은 원삼을 안아 일으켜 마구 잔등을 퉁퉁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원삼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올라오지 못했다.
“아버지!”
“아버지!”
종호랑 애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대성통곡 쳤다.
원삼의 처는 구들을 치며 대성통곡 쳤다.
기준은 원삼을 스르르 자리에 눕히면서 입만 멍하니 헤벌리었다가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이보게, 함께 고향으로 가야지.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나가다니? 이 못난 놈아. 그렇게 가기 바쁜가? 엉? 야,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단 말인가? 엉엉.”
기준의 넉두리에 온 집 식구들은 모두 대성통곡 쳤다…
기준은 죽음도 뭐도 겁나지 않았다. 그는 원삼을 손수 염습하고 원삼이네 집 널 바자를 뽑아 손수 관을 짠 후 원삼을 입관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애들과 함께 성지촌 뒷산 양지바른 언덕아래 원삼을 묻어주었다.
원삼의 묘 앞에 꿇어앉은 기준의 눈에는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원삼의 처자들 눈물바다 울음바다 속에서 애 끊는 듯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삼이, 일본 놈을 몰아내고 함께 고향에 돌아가자던 자네 이게 웬 일이오? 으흐흑, 흑흑.”
한참 대성통곡 치고 난 기준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나 옆에서 꿇어 엎딘 채 울고 있는 원삼의 처자들을 근심했다.
“일본 놈들의 감시 밑에 성지촌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작달막한 원삼의 처는 “예. 애들도 다 컸으니 용정에 가서 막일을 하더라도 소작 농사를 짓기보다 나을 겝구마.” 하고 대답했다.
기준은 장은이랑 종호랑 일일이 손을 잡아주었다.
“이젠 너희들이 살림살이를 떠메야 해.”
제일 마지막에 그는 열 살도 되지 않는 장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 원삼의 처 잔등에 업힌 둬 살 밖에 안 되는 막내 장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요것들이 불쌍합구마.”
기준은 장활에게 머리를 돌리더니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라.” 하고 말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의 뒤에서는 종호랑 애들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에 술렁거렸고 석별의 정이 사품치며 출렁거렸다.
기준은 해진 뒤에야 계수동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어귀와 조개덕이 갈라진 갈림길에 이르렀다.
늙은 비술나무가 고개를 숙이고 초겨울바람에 벌거숭이가지를 휴~휴~ 몸부림치고 있었다. 기준은 서너 아름이나 되는 늙은 비술아래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돌리면서 담배를 말아 물고 궁리를 돌렸다.
(조개덕으로 해 갈까? 안 돼? 토성안집에 왔다간 똘만이랑 조개덕 길목을 지키면 어찌는가?)
기준은 부시를 척척 쳐 담배를 붙여 물고 뻑뻑 빨았다.
“그래, 계수동 쪽으로 올라갔다가 산등성이를 넘어가자.”
그가 몇 발자국 떼지 않았을 때였다. 계수동쪽 산길에서 웬 사람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밤길에는 산짐승보다도 밤 사람이 싫은 법이다.
기준은 짚신의 흙을 터는척하며 길바닥에서 돌멩이를 슬쩍 주어 쥐었다.
그때 맞은 켠에서 터벅터벅 다가오던 작달막한 밤 사람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을 건네었다.
“여보게, 담배 불이나 붙입세.”
둬 발자욱 지척에 다가온 상대방의 목소리가 귀에 좀 익었다. 하지만 기준은 작달막한 상대방을 개의치 않고 담배 대를 뻑뻑 빨다가 작달막한 밤 사람에게 맞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불에 비친 상대방의 얼굴을 서로 보는 순간 둘 다 깜짝 놀랐다.
“앗!”
똥똥한 몸집과 뱁새눈,
“똘만이 놈 새끼!”
구척 키에 세귀 눈을 보는 순간 똘만은 깜짝 놀라 잽싸게 허리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기준 이놈!”
기준이가 돌멩이로 똘만의 대가리를 꽝 내리쳤다.
담배 불이 땅바닥에 탁 떨어져 불똥을 날렸다.
똘만은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발길을 날려 기준의 손목을 걷어찼다. 기준의 손에서 돌멩이가 밤하늘로 씽 날아났다. 똘만은 권총으로 기준을 겨누고 지껄였다.
“허튼 수작 하지 마! 허파에 바람구멍 내줄테야!”
권총이란 말에 기준은 주먹을 쳐들었다가 맥없이 내리웠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허허, 여기서 네 놈을 만날 줄이야. 으흐흐.”
똘만은 위세를 돋우느라고 공중에 대고 총을 쏘았다.
땅!
“꼼짝 말고 진수해 쪽으로 걸어!”
기준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봉변에 똘만이가 뒤통수에 겨눈 권총 앞에서 맥없이 털썩털썩 걸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똘만을 까 눕힐 궁리를 했다.
똘만은 그의 등 뒤에 총을 겨누고 걸으면서 우쭐거렸다.
“내 네놈을 찾느라고 8년 동안 간도 땅을 메주 밟듯 했어. 그런데 끝내 여기서 네놈을 나포했구나. 허허, 나도 이젠 고향 명천에 돌아가 호광할 때 됐구나. 흐흐흐.”
이때 늙은 비술나무 주위에서 마른 풀숲을 와삭와삭 헤집는 소리가 들리었다.
“총소리를 듣고 우리 애들이 왔구나.”
똘만이가 으시댈 때다.
“똘만 경찰님! 웬 일입니까?”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여럿이 우르르 이리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똘만은 총구멍으로 기준의 너부죽한 잔등을 떠밀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기준 놈을 잡았어!”
“예? 어디 보기요.”
쉭-
딱!
“앗!”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에 얻어맞은 똘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권총을 쥔 손으로 대갈통을 싸쥔 채 맴돌았다. 그때 기준은 도척 같은 몸을 홱 돌렸다. 번개 불이 번쩍 나게 똘만의 오른손을 비틀어 권총을 빼앗아냈다. 똘만의 손목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반죽돼 들렸다. 기준은 무쇠주먹을 연신 꽝꽝 안겼다.
자위대 놈들은 뒤늦게 영문을 알았다. 하지만 똘만경찰이 상할까 봐 총도 쏘지 못하고 기준과 똘만을 에워싸고 맴돌 뿐이었다. 그 틈을 타 기준은 권총박죽으로 똘만의 대갈통을 연신 내리깠다. 쇠 가마라도 견딜소냐? 똘만 놈은 대갈통이 피로 묵사발이 된 채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뻐드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기준은 몸을 날려 골짜기 아래로 뛰어들어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뒤에서 야무진 총소리가 땅! 울렸다. 기준의 머리우로 총알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앵앵 날아지나갔다.
쉭- 쉭-
어두컴컴한 어둠속에서 연속 돌멩이가 날아왔다.
“웬 놈들이야?!”
자위대 놈들이 질겁해 늙은 비술나무 뒤에 비실비실 물러갔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계수동 골짜기 어귀에서 초겨울 밤하늘을 울렸다. 몇몇 자위대 놈이 썩박나무처럼 푹푹 쓰러졌다.
땅 땅!
몇 놈이 또 꺼꾸러졌다.
“1소대는 북쪽으로! 2소대는 서쪽으로! 3소대는 동쪽으로 포위하라!”
분명 거짓말로 놈들을 겁을 먹이느라고 하는 여성지휘관의 명령소리였다.
“투항하면 살려준다!”
“우린 항일유격대다!”
"항일의병이 왔다!"
이상했다. 유격대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총을 버렷!”
늙은 비술나무 쪽에서 어느 놈인가 “빨리 달아나라!”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대 놈들은 숱한 유격대가 왔는가 하여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뒤이어 진수해 쪽으로 달아나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었다.
(인삼 아저씨가 유격대를 보냈을 거야.)
기준은 구사일생으로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빼앗은 권총을 쥐고 아름드리버드나무들에 이리저리 몸을 숨기면서 부르하통하 쪽 원시림숲속으로 달아났다.
기준은 한참 닫다가 아름드리버드나무에 몸을 기댄 채 헐떡거리면서 숨을 돌렸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조개덕과 계수동쪽에서 뒤쫓는 동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지학사네 토성 밖을 에돌아 패용천산과 칼산사이 골짜기로 들어갔다.
(똘만 놈 새끼 썩어졌으니까. 이젠 누가 우리 집 식구들을 알아보겠는가? 길수 놈 새끼야, 끼무라 놈아, 어디 아무리 특무를 보내봐라. 흥!)
한참 헐떡거리면서 걷고 나니 누런 천지꽃산 마루가 보였다. 황야의 밤은 무섭게 고요한데 어디서인가 개짓는 소리가 숨 막힐 듯이 정적을 깨뜨렸다.

                                10. 포위토벌

     초생 달이 동녘하늘에 걸렸을 때였다.
     한 무리 일본 헌병 놈들이 자위대원과 일제 경찰들과 함께 계수동에 덮쳐들었다. 계수동과 조개덕, 함흥촌 갈림길 옆에 서너 아름이나 되는 늙은 비술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본 헌병놈들은 먼저 늙은 비술나무 부근 둔덕 우에서 똘만의 시체를 찾아냈다.
     헌병 대장 놈은 늙은 비술나무 옆에서 군도자루를 잡고 서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렸다.
    “여기서 병력을 다섯 갈래로 나눠 함흥촌 부근 마을을 몽땅 소탕하라. 사이또 소장은 저 동쪽의 계수동을 토벌하라. 나는 헌병들을 데리고 유격대 본거지인 함흥촌 토성안집부터 소탕해버리겠다. 진수해의 분주소와 조일파출소는 경찰과 자위대를 세 길로 나눠 진격하라. 너희들은 저 패랑천촌의 토성안집 지학사와 서쪽골 안의 장학산, 이 조개덕의 조덕림을 몽땅 소탕해버려야 해.”
사이또 소장과 조일파출소 소장이 경찰들을 데리고 떠나려 할 때다.
“잠간!”
모두들 덮쳐나가려다가 주춤주춤 멈춰서 헌병 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헌병 대장 놈은 군도를 빼들어 휙 휘둘렀다.
“풀을 건드려 구렁이를 놀래지 말엇!  함흥촌에서 첫 총소리 울리면 동시에 행동하라! 무고한 백성 백 명을 잘못 죽이더라도 유격대 한 놈이라도 놓쳐선 안돼! 똘만 살해 작전은 유격대 아낙네가 지휘했다. 남녀노소 모조리 살해하라!”
“하이!”
“옛!”
어지러운 군화소리가 마른 풀숲을 짓밟으면서 밤 정적을 깨웠다. 여기저기서 놀란 새들이 푸르릉 날아났다.
한참 후 함흥촌 쪽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계수동에서도 총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놈들은 계수동을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조선 백성들의 집에 뛰어들어 한참 잠이 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참하게 총을 놓거나 총창으로 찔러 살해했다. 그것도 모자라 초막과 집에 불을 지르고 부림소나 돼지 같은 집짐승마저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빼앗아갔다. 경찰 놈들은 소 두마리만 살려 수레에 메워 자기들이 살해한 백성들의 귀를 베 죽은 돼지와 함께 수레에 싣고 토성안집 쪽으로 내려갔다.
인간백정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해 전리품으로 싣고 너털웃음을 치면서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한편 헌병 대장은 군도를 빼들고 헌병들을 지휘해 토성  밖을 포위하고 작탄으로 대문을 부신 후 일제히 덮쳐들어갔다. 살인야수들은 집안에 대고 한창 몰사격을 가하고 수류탄까지 들이 뿌렸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총 한방 쏘지 않았다.
헌병 대장 놈은 유격대가 보이지 않자 이를 악물더니 군도를 빼들어 휘둘러댔다.
“토성과 창고를 몽땅 무너뜨렷!”
몇몇 일본 놈들이 수류탄묶음을 토성 밑에 뿌렸다.
서쪽토성이 굉음과 함께 서너 발이나 쿵 무너졌다.
“대장님, 갱도입구!”
대장 놈과 몇몇 분대장이 다가갔을 때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무너진 토성 굽에 갱도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입쌀가마니가 드러났다.
대장 놈은 군도로 가마니를 푹 찔러 째보았다. 싯누런 옥수수 알이 드러났다.
“요로씨이(좋아), 유격대 옥수수! 흐흐흐.”
유격대 한명도 잡지 못하고 헛물을 켠 대장 놈은 전리품이나 얻은 듯이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끝내 유격대 놈들의 꼬리를 밟았구나.”
그 놈은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고 군도를 휘둘렀다.
“갱도 안을 수색해라. 개미 한마리라도 얼씬거리면 몽땅 참살해라!”
“하잇!”
한개 분대나 되는 헌병 놈들이 시꺼먼 갱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웬 일일까? 갱도 안에서 닭 몇 마리가 풍겨 나왔다. 그러나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았다.
드디어 헛물을 켠 놈들이 갱도어귀로 맥없이 되나왔다.
“한 놈도 잡지 못했어?”
헌병 대장 놈이 낯을 찌를 듯이 군도를 휘두르며 묻는 소리에 분대장 놈은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유격대 놈들은 진작 몽땅 도망쳤습니다”.
이때 그나마 계수동쪽에서 회합해온 사이또 소장 등이 수레 두 채에 죽은 돼지와 숱한 무고한 귀라도 실어 왔다. 그제야 대장은 조금 위안됐다.
그러나 대장 놈은 상전에게 보고할 무엇이 있어야 했다. 그 놈은 군도를 토성밖에 대고 홱 휘둘렀다.
“옛!”
일본 놈들이 야수들처럼 덮쳐나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원래 성칠 대장과 인삼이가 보낸 진달래 중대장과 억복 소대장은 한 개 소대 유격대를 영솔해 계수동 부근에 매복해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때 늙은 비술나무 밑에서 기준을 발견한 똘만 놈이 고아대는 목소리를 듣게 됐다. 기준과 똘만이가 박투하면서 주고받는 말을 들은 진달래는 키 큰 게 기준이고 기준에게 총을 겨눈 작달막한 놈이 똘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진달래가 먼저 돌멩이를 날려 똘만의 대갈통을 까고 뒤이어 연속 몇 놈을 까 눕혔던 것이다. 기준이가 도망치자 유격대원들은 진달래의 명령에 따라 사격하면서 자위대 놈들을 쓸어 눕혔던 것이다. 진달래 중대장은 놈들이 꼭 소탕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전이하면서 미리 병완과 석은의 형제 등 마을사람들에게 기별하여 몽땅 산속으로 피신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헛물을 켜고 난 놈들은 악이 받쳐 집집이 돌아가면서 불을 지르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헌병놈들이 토성안집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지르려고 할 때었다.
헌병 대장 놈이 군도를 거두면서 고함쳤다.
“잠간!”
놈들이 야수의 손들을 마지못해 멈추었다.
“불을 지르지 말엇!”
분대장 놈과 사이또 놈은 의아해했다.
“난 이 마을이 아주 좋아. 산을 등지고 남쪽과 서쪽에 강이 흘러 여름이면 얼마나 경치가 좋겠는가?”
사이또 소장은 헌병소대장이 정신이 혹시 나가지 않았는가고 어리둥절해했다.
(자식, 환장했어? 싸우다가 웬 기생집 생각이 났는가?)
대장 놈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올줄이야..
“소탕 맞은 유격대 놈들이 다시는 이 마을에 얼씬하지도 못할게다.”
그러자 사이또 소장 놈이 활활 타오르는 가재수염을 슬슬 어루만졌다.
“그래 어쩌자는 겁니까?”
헌병 대장 놈은 희죽이 웃으면서 사이또 소장과 여러 놈들을 두리번거렸다.
“이 마을에 토성안집을 중심으로 우리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조선인 모범집단부락을 세우면 어떤가?”
“조선인 모범집단부락?”
사이또 소장은 치켜떴던 피비린 눈 확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헌병대장은 군도로 땅을 짚고 어깨를 으쓱하였다.
"모범집단부락을 잘 꾸려 유격대 놈들이 있을 때보다 이 마을 조선인들이 더 잘 살게 만들어야  그런 날엔 조선인들이 스스로 우리 대일본제국에 충성할게 아니겠는가?”
이때 해동분주소 지학구소장이 자기 사촌형님인 지학사를 데리고 사이또 소장과 헌병 대장 놈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자는 누구?”
지학구는 굽신거리면서 소개했다.
“내 사촌형 지학사입니다. 형님, 어서 말하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다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까.”
그제야 지학사는 겁기 띤 눈길로 사이또 소장과 헌병 대장 놈을 두리번거리더니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에, 에헴,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사이또 소장은 그리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자가 혹시 패용천산 앞마을에 유명한 대지주 지학사가 아닌가?”
“맞습니다.”
옆에서 지학구 소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전번에 왜 우리 진수해분주소 자위대에 총을 겨눴쏘까? 인삼이 항일유격대 대장 좋쏘까? 보호했쏘까?”
사이또 소장이 허리에 찬 권총을 매만졌다. 헌병소대장도 군도자루를 매만졌다.
지학사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때 우린 인삼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소. 우리 중국 사람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보지 마오. 우리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소.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소. 우리 집과 처자 그리고 밭을 다치지 않으면 당신들한테 쌀도 주겠소. 허나 털끝 하나라도 다치기만 하면 우린 가만…”
그때 옆에서 지학구소장이 지학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이 자가 뭐래?"
지학구 소장이 앞질러 말했다.
“가만 있으면서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 그럼 장학산은?”
지학구 소장은 인차 대답했다.
“이 부근 중국 지주들은 내 책임지고 몽땅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게 만들겠습니다. 태군, 근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죽이고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던 사이또도 지학구소장의 말에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좋아, 지 선생, 당신을 촌장으로 임명할 테니 이 부근 중국 사람들과 조선인들을 몽땅 집단부락에 들어오라고 하게나. 우리한테 대일본제국에 충성할 충성 맹세서를 써내야 살려주겠소.”
이때 장학사네 집으로 덮쳐갔던 자위대 놈들이 어둠속에서 달빛을 빌어 장학산마저 뒤 결박을 지워 끌고 왔다.
“이 놈은 유격대 우두머리 인삼이란 놈의 양애비랍니다.”
그때 지학구소장이 나서서 사이또 소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사이또 소장놈이 헌병 대장과 귀속 말을 했다.
“놓아줘라! 우리 친구야.”
헌병 대장 놈의 말에 자위대 놈들은 전리품을 빼앗기는듯해 두덜거리면서도 장학산을 풀어주었다.
사이또 소장은 진수해분주소 소장을 보고 물었다.
“그래 함흥촌 서쪽 골안은 잘 훑어보았는가?” “옛! 골짜기 사람들은 함흥촌에서 울린 총소리에 놀랐던지 몽땅 도망치구 없습디다. 몇몇 초가집과 움막을 몽땅 불살라버리고 오는 길입니다.”
리달송 통역에게서 통역을 들은 사이또 소장과 헌병소대장은 대가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올 때에야 무고한 백성들의 시체를 남기고 계수동과 함흥촌에서 떠나갔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는 한 많은 거위 털 같은 눈이 잿더미로 된 함흥촌에 풀풀 흩날려 내렸다.
 
 
 
 
 
 
 
 
 
 
14 많은 사랑

         1. 모범집단부락

        창준과 기준은 일본 놈들의 포위토벌에 목숨을 건진 것만 하여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장학산이 지학사와 가병까지 불러 일본 놈들의 손에서 인삼을 구하려고 길목을 막아나선 일이 고마워 소작료를 8할이나 내라고 하여도 옴니암니 따지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장학산은 창준과 기준이 이젠 다신 감히 자기와 얼굴을 붉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오산했다.
지학사는 더구나 기고만장해 거들먹거렸다.
어느 날, 그는 사냥총을 든 가병들까지 데리고 함흥촌에 우르르 쓸어들었다.
지학사는 인심을 얻는 수작을 잊지 않았다. 그는 창준이네 집에 가서 괴춤에서 동전 몇 닢을 위방 구들에 내놓았다.
“보태 쓰오.”
병완은 “고맙소." 하고 인사하면서도 동전은 되밀어주었다.
“왜? 자네 아들을 괭이로 찍었다고 안 받아?”
지학사의 눈길에는 서슬 푸른 빛이 번뜩였다.
(이제야 네놈 속심이 드러나는구나. 네 놈과는 한 하늘을 이구 살지 못할 거 같구나.)
지학사는 인차 침착성을 되찾았다.
“중국에 왔으면 우리와 화목하게 보내야 해. 우리에겐 땅이 많아.”
이젠 창준도 중국말을 많이 배워 지학사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대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창준과 상길이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듣는 것을 보고 지학사는 문턱에 걸터앉아 계속 지껄였다.
“문칠이, 우리 손을 잡고 함흥촌과 패랑천촌, 조개덕을 합쳐 모범집단부락을 차리자. 중국 사람들 속에서 위망 있는 내가 촌장을 하고 조선 사람들속에서 위신이 있는 병완이 부 촌장을 하게나. 우리 모범집단부락만 되면 대일본제국 일본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전기도 놔주고 석마간도 져 준다오. 얼마나 좋소. 생각해보오. 모범집단부락이 얼마나 좋은 지상낙원이오?”
그래도 병완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학사는 옆에 서있던 가병의 사냥총을 쥐어 흔들어댔다.
“누가 만약 모범집단부락건설을 방애한다면 이 총이 용서하지 않을 게요. 곰곰이 생각해보오. 관동군이 백만도 넘는데 역지 못해 그들과 엇선단 말이오? 당신네 조선 사람들도 어째 고향을 떠나 이국 타향에 왔소? 배불리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오? 누가 배불리 먹고 살게 하면 우린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할 게 아니오?”
창준은 속으로 지학사를 욕했다.
(개놈새끼, 촌장벼슬을 가지더니 벌써 왜놈의 개다리로 돼버렸구나. 뒈질 놈 새끼!)
지학사는 괴춤에서 필기장을 꺼내들면서 말했다.
“여기에 김병완, 김문칠이란 이름 석 자씩만 써넣게나. 그럼 당신네 가족, 에헴, 헴, 그럼 일본 사람들은 자네들을 못살게 굴지 않을 거네.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뭘 하오? 어서 양민 명단 속에 자네도 이름을 써넣게나.”
창준은 필기장을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이건 뭐요?”
창준이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같아 지학사는 입이 당나발이 돼 문턱에서 내려 다가와 앉았다.
“이건 진수해분주소에서 내준 ‘협파회’와 ‘협조회’에 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넣는 호구부오. ‘협조회’나 ‘협파회’에 들면 일본제국에선 정식으로 대일본제국의 양민으로 인정해주오. 내 기쁜 소식을 알려줄게. 대일본제국에서는 당신네 조선인들을 대일본제국의 2등 공민으로 인정해주고 조밥을 먹게 해준다오. 죽물도 먹기 힘든데 조밥을 먹는 2등공민이 매우 좋소. 좋아.”
창준은 상길을 돌아보면서 피씩 웃었다.
지학사는 창준이 마음이 돌아 선다고 생각하고 계속 늘어놓았다.
“우리 중국 사람은 3등공민이라오. 3등공민은 수수쌀을 먹어야 된다나. 그래도 난 이렇게 2등 공민 당신한테 찾아와 부 촌장을 하라고 하오. 허허허. 하하하.”
지학사는 창준의 부자간을 번갈아보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당신을 강박하지 않겠소.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보오. 중국에 밥이라도 얻어먹으러 왔으면 잘 생각할 필요가 있소. ‘협조회’에 들면 나처럼 일본 사람들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오. 허나 ‘협파회’에 들면 대일본제국과 엇서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일본 공민이 되겠다는 결심과 같소. 그러니 어느 회에 들겠는가는 잘 생각해 아무데나 드는 건 옳을 게오. ‘협파회’에도 들지 않으면 일본 사람들은 요시찰인물이거나 반일불온분자라는 딱지를 붙여놓소. 그럼 살기 힘들 게요. 지어 함흥촌에서 쫓겨나게 될 거요. 함흥촌은 일본 공민들로 채워 모범집단부락을 꾸려야 하니까. 으흠, 납득되면 그 필기장에 이름 석 자를 써주오. 그럼 내 진수해분주소에 보고하고 당신을 부 촌장으로 임명하게 하겠소.”
창준은 필기장을 주어들더니 지학사에게 주었다.
“난 못하겠소.”
“뭐?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소?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는가?”
지학사가 눈알을 번뜩이면서 고함쳤다.
그러나 창준은 굳은 표정이 변함없었다.
“난 아무 술도 마시지 않겠소.”
지학사는 떠나가면서 말했다.
“토성안집을 보지 못했소? 유격대를 따라 항일을 해봤자 어떻게 됐소? 인삼은 내 외사촌형님의 양아들이네. 내겐 양조카구. 그래서 나도 인삼이 잡혀갈 때 가병까지 데리고 가서 구하려 했소. 일본 헌병들을 당할 수 있소? 인삼이가 토성안집에 있었더라면 낙자없이 참살 당했을 거네. 토성안집 덕에 온 마을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네. 한심하지 않소? 중국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편안히 살겠으면 협파회에 들란 말이오.”
그러나 창준은 문밖에 나가 지학사를 바래면서 도리머리질만 했다.
지학사를 보내고 창준은 위방에 들어와 구들에 앉으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방에서 기준이가 나왔다.
“이 일을 어쩜 좋겠느냐?”
기준은 아버지와 형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벽이라도 차고 뛰쳐나가는 성격과는 달리 이런 말을 했다.
“형님, 협파회에 이름을 써 넣기요.그래야우리 함흥촌에서 편안히 살 수 있소. 온 조선과 만주국이 몽땅 일본 놈의 세상이 됐는데 어디에 간들 협파회에 들지 않고 우리가 마음 놓고 살겠소.”
창준은 놀란 눈길로 기준을 쳐다보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래 우리 일본 놈들의 공민이 되잔 말이냐? 안 된다. 무슨 낯으로 유격대를 보겠느냐?”
기준은 한참 궁리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살기 위해 가짜로 협파회에 잠시 드는 게지. 우린 일본 놈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되지. 아버지는 부 촌장 하지 마시요.”
창준은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얼굴이 굳어있었다.
이때 상순이가 미닫이문을 열고 위방에 나왔다.
“절대 안됩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일본 놈들의 백성이 돼서는 안됩니다.”
기준은 넉가래 같은 손으로 상순의 뺨을 짱 쳤다.
“요놈새끼, 어른들 말에 끼어들겐?”
상순은 볼을 매만지며 정지에 나가면서도 계속 두덜거렸다.
“일본 놈들의 개가 되는 게면 죽고 말겠다. 씨.”
나중에 창준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 촌장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구하고 함흥촌에서 살자고 협파회에 드는 거쯤은 유격대에서도 양해하겠지.”
창준은 곰방대를 재떨이에 툭툭 쳐서 담배 재를 털면서 뒷말을 이었다.
“성칠한테 물어보고 가불간 결정하자.”
이튿날 기준은 도끼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장백산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다 되여 지학사가 또 찾아왔다.
“에헴, 문칠 영감 있소?”
창준은 전날과는 달리 굳었던 얼굴을 좀 풀면서 “지 촌장이 왔소?” 하고 인사까지 하며 위방에 들였다.
지학사는 필기장을 또 꺼내들면서 말했다.
“이걸 보오. 이 마을의 숱한 사람들이 거의 다 협파회에 이름을 써넣었소. 이게 역은 거요. 살자면 낮은 문턱에도 머리를 굽혀야 하는 법이오. 내라고 중국 사람의 자존심이 없겠소? 흥, 여기 중국 땅은 우리 조상들이 몇 천 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땅이오. 뭘 구실로 내 조상의 뼈가 묻힌 이 땅을 저 일본 놈들이 차지한다오? 그 놈들이 내 땅을 빼앗고 우릴 못살게 굴면 내부터 저 놈들을 목숨을 걸구 싸울테오.”
지학사는 창준의 눈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동생네하구 간밤에 잘 토론해보았소? 동생은 어데 갔소? 어째 보이잖소?”
창준은 제꺽 에둘러댔다.
“그 앤 집을 손질하자고 산으루 목재를 베러 갔소.”
지학사는 병완의 눈치를 흘끔거리면서 다가앉았다.
“에이, 이 개울가에도 숱한 나무를 두고 어디로 가오? 이리 중대한 일을 두고. 그러나 저러나 부 촌장을 하겠소? 저 아래 리부림이란 사람이 하자고 나섰지만 난 어쩐지 당신이 마음에 있소. 그래도 함흥촌의 개척자인 자네 함흥사람의 말이 서지. 그 지씨 말 설 거 같잖단 말이오.”
그 말에 창준은 제꺽 대답했다.
“부 촌장은 하지 않겠소. 그러나 ‘협파회’에 드는 거 좀 생각해보기오.”
그러자 지학사는 만면에 춘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뾰족한 턱을 슬슬 만지면서 장황설을 늘여놓았다.
“옳소. 잘 생각했소. 머저리 아닌 이상 누가 감히 대일본제국을 항거하겠소. 나도 내 밭을 지키면서 살자고 억지로 촌장을 하오. 일본 옷을 한벌 갈아입은 셈이지. 으흐흐. 촌장 질을 하면 최저한도 우리 집 밭을 빼앗아 가지야 않겠지. 그 놈들도 사람인 게. 아무리 그러니 자기들께 충성하는 내 아내하구 짐승들을 끌어 가지야 않을게 아니요. 이게 혼란한 일본 놈들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이지. 안 그래? 다시 생각해보오. 부 촌장을 해보오. 그럼 내 장학사동생과두 말해 자네 소작 농사를 영영 짓게 주선해보지.”
창준은 머리를 숙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앓았소. 협파회에는 들게. 우리 아버지는 부 촌장을 하지 않소.”
“좋소. 그럼 먼저 ‘협파회’쪽에 이름을 써넣소.”
창준은 지학사에게서 연필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필기장에 자기와 동생 기준의 이름까지 써넣었다.
(세상에 못할 노릇을 했구나.)
창준은 후회 절반 근심 절반 하건만 지학사는 필기장을 쳐들고 보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그래, 이게 명지한 선택이지. 일본 백만 일본 관동군 앞에서 누가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아남겠소? 흐흐흐, 하하하. 이게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지.”
창준은 위방 문을 나서는 지학사의 득의양양한 낯을 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문밖에서는 거위 털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창준은 하얀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으면서 멀어져가는 지학사와 가병 둘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상순은 문밖으로 뛰쳐나가 지학사가 떠나간 쪽에 대고 눈을 마구 쥐여 뿌렸다.
“개새끼, 콱 썩어져라!”
그러나 지학사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어깨가 으쓱해 토성안집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너진 토성 밑 동굴에서는 장학산이 한창 동굴 속의 쌀을 마대에 퍼담고 있었다.
“형님, 유격대 놈들이 두고 달아난 쌀은 대일본제국에 바쳐야 하오.”
장학산은 자학사에게 눈을 흘겼다.
“너 일본 놈 새끼들 촌장 되더니 이 형님도 알아보지 못해? 토성안집은 내 양아들에게 지어준 집이야. 이 토성안집의 쌀과 집은 이젠 몽땅 내거란 말이다. 삐치지 말라!”
그러나 지학사는 언성을 높였다.
“형님, 이게 무슨 세월이라고 이러오? 대일본제국에서 함흥촌에 집단부락을 세우고 이 토성안집을 손질해 촌공소로 쓰라고 했소.”
그 말에 장학산은 성을 벌컥 냈다.
“야, 이 놈 새끼야, 그래 네깐 놈이 일본 놈 새끼들을 등에 업구 이 형님의 양아들 집을 빼앗아 네놈이 쓰겠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 안 돼!”
       지학사도 세길, 네길 펄쩍 뛰는 장학산을 어찌는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형님, 왜 그리 세상물정을 모르오? 지금 무슨 세월이오? 일본 놈들의 세상이랑 말이오. 일본 놈들과 등져서 먹을 알이 있소?"
       장학산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서서 지학사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골기 없는 놈새끼, 굶어 죽어도 일본 놈의 개 돼선 안돼!"
지학사는 억이 막혀 입을 함박만큼 벌렸다.
"형님, 우리 집단부락을 잘 꾸리기오. 그게 살 길이오. 나도 우리 집 밭을 일본 놈들이 빼앗아간다면 가만놔둘 거 같소. 난살기 위해선 집단부락보다도 더 한 짓이라도 할수 있단 말이야.” 
     지학사는 침을 퉤 뱉고는 뒤짐 짚고 패용천산 앞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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