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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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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5)
2018년 06월 07일 11시 55분  조회:1084  추천:0  작성자: 김장혁




                     7. “내 몫까지 공부해 달라”


       연변의 4월 중순은 화창한 봄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교하는 아직도 싸늘했고 여기저기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어떤 큰 물도랑에는 겨우내 두텁게 얼어붙었던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채 싸늘한 봄바람에 찬 기운을 풍기며 햇볕에 번쩍이고 있었다. 이 맘 때면 연변에서는 밭갈이가 거의 끝나갔지만 여기서는 이제야 밭갈이 준비로 가대기를 내다 보습 날을 닦았다.
상순은 황하채소생산대대의 논물기술원으로 왔기에 벼 냉상모판을 만든다, 벼씨를 소금물에 불궈 소독한다 하면서 바삐 보냈다.
중국 어디로 가나 생산대대마다 계급투쟁을 하지 않는 곳이란 없는 것 같았다. 비록 교하는 ‘문화대혁명’ 바람에 정치 백열화가 된 연변보다는 덜 했지만 여기서도 지주와 우파 그리고 이른바 현행반혁명을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변과는 달리 황화채소대대에는 상순처럼 항일전쟁 때 유격대원 출신에 해방 후에 대대 당지부 서기라도 한 조선족간부가 없었고 오랜 “노집권파”, 이른바 노간부가 없었다. 그래서 상순은 이사해 오자마자 당지부 부서기로 돼 존중을 받았다.
     채소대대에는 제3대가 조선족마을이고 나머지 두개 생산대는 한족생산대었다. 상순이네는 한족들이 사는 제2생산대에 이사 왔기에 편안했다. 한족들은 “문화대혁명”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서로 덜헐뜯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면 남의 일에 삐치려고 하지 않았고 남을 조만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우점이었다. 진짜 한족들은 자기 안해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남이야 살인했든 뭐 했든 제 눈으로 보고서도 눈을 질끈 감고 모르는 척했다. 허나 일단 자기를 건드리거나 원수를 맺기만 하면 10년이고 20년이고 대대로 원수치부를 했다. 또 좋다하면 자기 밸도 다 빼줄 상한다.  의리심이 강한 것이 그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황화대대 이 서기는 오히려 상순을 항일 노투사라고 하면서 아주 존중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와 토론한 후 결정했다.
상순은 이런 한족들의 성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터이라 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않고 그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하여간 상순은 쇠 물도 녹일 도가니 속 같은 함흥대대를 벗어나 고요한 황화채소대대에 온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은지 몰랐다.
보리 고개를 바라보는 함흥대대에서는 이 때면 벌써 쌀이 떨어져서 일성 골 안의 한족들한테 가서 강냉이 쌀이나 수수쌀을 꿔 먹고 가을에 가서 꿔온 수수쌀 한근에 입쌀 한근 두냥씩 갚아주어야 했다. 그러다나니 꿔 먹은 쌀을 가을에 입쌀로 갚고 나면 이듬해 또 보리고개를 넘기 힘들었다.
허나 여기 황화채소대대에 오니 쌀은 로동자들처럼 배급받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덜 했다. 연변에서 가지고 온 쌀을 다 먹자 생산대에서는 상순에게 옥수수쌀을 두 가마니나 배급해주었다.
게다가 맏딸 춘자가 배급을 탄 밀가루랑 드문드문 가져다주어 칼면도 해먹고 강냉이떡을 해 먹을 수 있어 쌀 고생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상순이 키운 벼 모가 심한 저온 냉해 년에도 잘 자라 남새대에서 처음으로 제때에 벼모를 냈다. 상순이 이른 아침에 나가 달을 지고 돌아오면서 온 정성을 다해 논물을 보았기에 논밭에서 벼모가 잘 자라 논밭 옆의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상순에게 엄지를 내두르면서 혀끝을 끌끌 찼다. 상순은 일약 합격된 논물관리원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셋째사위 동준이네 이모 집에 빌려 들어서 살았는데 장구지책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연 며칠째 피장을 쳤다.
명옥은 학교에 가서 외손자 성춘과 성일을 봐주었다.
첫달에 춘자는 자기 애 둘을 본다고 어머니한테 30원을 가져왔다.
명옥은 맏딸이 내미는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얘, 좋은 제 외손자를 봐주고 돈을 받아서야 되니?”
“엄마, 남한테 애를 보이면 15원을 내야 하는데 좋은 자기 엄마를 주는데 뭐 아깝겠소?”
명옥은 첫달에 마지못해 15원만 받고 두 번째 달부터 춘자가 뭐라고 해도 일전도 받지 않았다.
“얘, 남을 웃기겠다. 가져가라.”
춘자는 별 수 없어었다.
     “그럼 이 돈은 엄마 나를 준 셈 치고 가져다 잘 쓰겠소.”
      후에 사돈집에서 둘째아들을 세간내겠다고 하면서 집을 내라는 바람에 상순은 있을 곳이 없어 맏딸 춘자네 외통 집에 들어가 얹혀 살았다.
맏딸 춘자네 집이라야 구들이 열대여섯 평방미터 밖에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집이었다. 게다가 한족 집구들이어서 비좁은 집에서 아홉 식구가 정말 돌아누울 자리도 없었다.
춘자네 부부는 자기네가 이사 오는 것을 동의한 터라 불편한대로 부모와 함께 한 구들에서 살아야 했다.
“빨리 집을 짓고 나가야지. 사위 보기 미안해 어쩌니?”
상순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생산대와 말해서 집터를 잡고 짬짬이 피장을 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한족마을에 이사해오니 한족들이 은자와 성숙을 욕심내서 혼사 말을 어찌나 거는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지어 한족 총각들이 은자와 성숙과 어찌나 지분거리는지 딸애들이 집에 돌아오면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한족마을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빌빌거리었다.
게다가 연변에서는 공부를 잘하던 덕돌이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족 건달무리들과 어울려 탄광 시내로 돌아다니면서 싸움을 하고 지어 학교로 가는 척 하고 마을을 떠나 중도에서 술이나 마시고 계집애들과도 지분거렸다.
덕돌은 한반 뒤좌석에 앉은 왕춘영(王春荣)이라는 애가 이뻐보여 자꾸 지껄였다.
쌍태 머리를 땋아 올린 그 여자애는 우유빛 얼굴에 운우지정을 그리는 듯한 외까풀눈이 생글생글 웃음 지을 때면 퍽 유혹적이였다. 덕돌은 그 여자애를 날마다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할 정도이었다.
그런데 춘영도 덕돌을 보고 웃음을 살짝살짝 보내면서 유혹했다.
그녀는 자기 필기장을 내밀면서 생글방글 웃음을 보냈다.
“조선어로 내 이름을 써 달라.”
"엉? 왜?"
"기념으로!"
덕돌은 싱글벙글 하면서 “좋아. 내 써 줄게.”라고 하더니 필기장을 가져다 왕춘영의 이름을 멋있게 써주느라고 애썼다.
“와, 멋있다. 이게 정말 내 이름 맞지?”
왕춘영은 입을 함박만큼 활짝 벌리고 웃으면서 필기장을 광순한테 내밀어 보였다.
광순은 덕돌의 셋째매형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그 애는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데 소학교 1학년을 조선학교를 다녀서 한글을 알아보았다.
“맞아. 이거 네 조선 이름이야.”
“와, 좋다. 난 조선이름을 가졌어.”
춘영이 좋아서 필기장을 안고 교실에서 어린애처럼 퐁퐁 뛰자 리려평이랑 진해화랑 다른 한족 여자애들도 조선이름을 써달라고 덕돌에게 졸랐다.
덕돌은 그 애들에게 일일이 조선이름을 정성껏 써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한족학교 공부는 따라가지 못했지만 한족 여자애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여자애들은 점심이 되면 맛있는 돼지고기채랑 덕돌에게 집어 주군 했다. 특히 춘영은 맛있는 소고기랑 닭고기랑 많이 사다가 덕돌에게 가만히 주었다.
그 덕분에 덕돌은 춘영의 고기를 잘 얻어먹고 좋아 입이 함박만해졌다. 심지어  춘영과 가만히 만나 영화 보러 가기도 했다.
춘영은 덕돌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용대랑 보고 “어째 덕돌은 오지 않아?” 하고 묻곤 했다.
그러자 용대랑 덕돌을 놀려주었다.
“춘영의 신랑, 제일 고운 각시 얻어 좋겠어.”
기실 용대도 슬그머니 춘영을 좋아했는데 춘영이 덕돌을 좋아하는 눈치자 은근히 질투했던 것이다.
어떤 때 춘영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덕돌은 그만 삐져서 춘영의 책상에 모래를 한줌 쥐어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여담임 왕숙혜 선생한테 들켜 된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어 왕 선생은 덕돌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친구 춘자한테 덕돌의 소행을 고발했다.
그러자 덕돌은 점점 학교에 가기 싫어 집에서 싸준 도시락과 책들을 가방에 넣어 메고 학교로 가는 척 하면서 집을 떠나서는 용대랑 용구랑 함께 학교로 가는 도중 탄광에 가서 놀았다.
그들은 석탄을 실은 소철에 뛰어올라 몇 리씩 호사를 보다가도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어떤 때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학교로 가다가 자기들을 놀리는 한족애들을 때려놓기도 했다.
한족 애들은 덕돌이랑 어찌나 미웠는지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손벽을 치면서 놀려댔다.
“고려새끼 큰 바지가달, 애를 한무리 낳는다!”
그러면 그 놀리는 소리에 용대랑 용구랑 반격하군 했다.
"낳은 애들은 몽땅 너네 할아버지다!”
하여 쩍 하면 한족 애들과 무리 싸움을 하였다. 그래서 덕돌이랑 맞을 까봐 가까운 길로 학교로 다닐 수 없어 멀리 에돌아 다니지 않으면 안됐다.
    “안 되겠다. 여기에 애들을 뒀다간 한족 집에 시집가지 않으면 건달이 되겠다.”
명옥은 춘자를 불러다 토론했다.
“야, 저 덕돌을 연변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 여기 뒀다간 건달이 되겠다.”
춘자는 무서운 눈길로 동생을 흘겨보았다.
“야, 어째 학교는 가지 않고 애를 먹이니? 내 낯이 다 깎인다. 왕 선생은 공사에서 회의할 때마다 네 말을 한단 말이다. 수학은 잘 하는데 다른 공부는 몽땅 낙제라고.”
덕돌은 겁기 띤 눈으로 큰누나를 흘금 훔쳐보며 입이 뽀로통해 중얼거렸다.
“난 한족학교를 다니지 못하겠소. 이전에 소학교에서 한족 반을 다닐 때도 공부를 따라하지 못해 그만두지 않았소? 그때도 괜히 재수 없이 ‘류소기를 타도하자’를 한어로 잘 쓰는 바람에 한족 반에 갔단 말이오.”
그러자 춘자는 나무랐다.
“얘야, 여기서도 부지런히 공부 하면 따라갈 수 있다. 어째 학교에 가지 않고 건달들과 휩쓸려 다니니?”
그러자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한족 선생들이 시간에 뭐라는지 근본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어쩌오?”
이때 동수가 다가와 덕돌에게 불러 쓰기를 시켜보았다.
그런데 매형이 부르는 단어를 거의 다 썼다.
“열심히 하면 되겠다. 금방 이사 왔는데 어떻게 또 이사해? 이담에 모를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라.”
그리하여 후에 덕돌은 모를 것이 있으면 큰매형 동수 아니면 셋째매형 동준을 찾아가 배웠다. 하여 한어와 수학은 비슷하게 배워나갔지만 한어로 강의하는 정치나 역사, 물리, 화학은 근본 따라갈 수 없었다.
덕돌은 시험을 치면 수학과 한어문은 우수를 맞았지만 기타 과목은 몽땅 낙제를 맞았다. 한족학교에 온 바람에 처음으로 낙제생이 돼버린 덕돌은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됐다.
그때 명옥은 가문 회의에서 이런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내 생각에는 덕돌을 연변에 내보내 잠시 은숙이네 집에서 공부를 시키는게 옳은 거 같다. 먼저 은숙에게 편지를 써 보내자.”
“뭐라고요?”
춘자는 놀라 눈이 동그래지더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동수는 한참 궁리하더니 “좋겠소." 하고 동의해나섰다.
"여기 시내에서 친구를 잘못 사귀는 날엔 얘가 건달이 아니면 도적, 아니 강도로 될 수도 있소.”
명옥은 춘자의 손을 쥐고 당부했다.
“빨리 은숙한테 편지를 써 보내라.”
      춘자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의 전도를 위해 체면을 버리고 은숙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이사온 후 부모와 덕돌의 근간 형편을 말하고 쌀고생을 하면서 고생스런 대로 남동생을 데려다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동녘이 푸름 해 오자 상순은 덕돌을 두들겨 깨웠다.
“야, 일어나라.”
“어째 그럽니까?”
“학교 다니기 싫으면 농사라도 지어야지.”
덕돌은 언감 아버지 말씀을 어기겠는가. 곤한 대로 눈을 집어 뜯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엔 이쯤 되면 아버지한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런데 아버진 이상하게 때리지 않았고 심지어 욕하지도 않았다.
        “이걸 메라!” 
        상순은 삽과 괭이를 들더니 멜대를 내밀었다.
       덕돌은 멜대를 받아 물초롱을 메고 아버지를 따라 변소 쪽으로 갔다.
상순은 괭이로 변소 뒤의 넓적한 돌을 들었다. 순간 누런 똥이 드러나면서 구린내가 물씬 풍겨 코를 찔렀다.
“똥을 퍼서 초롱에 담아!”
“아, 구린내야.”
덕돌은 코를 싸쥐고 울상을 지었다.
상순은 덕돌을 흘겨보았다.
“공부하기 싫으면 별 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덕돌은 아버지를 무서워 구린내를 맡으면서 억지로 퍼 담았다.
“그걸 메고 나를 따라오라.”
덕돌은 무거운 대로 똥초롱을 멜대로 메고 아버지를 따라 남산으로 올라갔다. 덕돌이 똥초롱을 메고 올라가다가도 맥이 없어 쉬자 상순이 메고 산비탈을 한참 올라갔다.
상순은 푸름 해 오는 옥수수 밭골땅에 괭이로 홈을 죽죽 파더니 을러멨다.
“거 코 막고 말뚝처럼 서있지 말고 똥이나 이 홈채기에 쏟아라.”
덕돌은 하는 수 없이 구린내를 참으면서 똥초롱을 들어 홈채기에 나가면서 누런 똥을 줄줄 쏟았다.
“이 놈아, 한 곳에 그렇게 많이 쏟아서 어떻게 이 많은 밭에 다 쏟니? 작작 쏟아!”
덕돌은 빨리 쏟아버려 일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 호령에 덕돌은 꼼짝 못하고 조금씩 쏟으면서 나갔다. 자칫하면 아버지가 온 밭에 똥을 지어 나르라고 하면 큰 일이었다.
개구쟁이 아들의 그런 속내를 빤히 들여다본 상순은 똥을 두 초롱 다 내자 괭이를 짚고 서더니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놈아, 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집이 가난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으면 저녁쌀을 근심해야 해서 난 여덟살부터 그렇게 가고 싶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아주머니 기음을 맬 때면 앞에서 밭고랑의 풀을 뽑았다. 열세 살부터는 가대기질도 했다.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한뉘 농사를 지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면서 산다. 넌, 얼마나 좋니? 무슨 근심이 있니? 너를 일하라 하니? 공부만 잘 하면 되는데 어째 배불리 먹고 배때 쑤셔나서 학교에도 가지 않니?”
덕돌은 아버지의 엄한 눈길을 피하면서 머리를 숙이며 목구멍으로 기여 들어가는 소리로 “잘못했습니다.”라고 겨우  대답했다.
상순은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공부를 잘 하지 않으면 별수 있니?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학교로 가지 않겠으면 오늘부터 이 밭에 똥을 메 내라."
덕돌은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쩌겠니? 학교로 가서 공부하겠니? 날마다 똥을 메 나르겠니?”
“학교로 가겠습니다.”
덕돌이 눈물을 흘리며 어깨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자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 공부만 했으면 현장이라도 했겠다. 넌 내 하지 못한 몫까지 공부하면 안 되겠니? 넌 전도가 창창한 애다. 내 몫까지 공부를 잘 해라. 부탁이다. 네가 공부를 잘해 한뉘 소 궁둥이를 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덕돌은 아버지 말에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잘 못했습니다. 이젠 학교로 가서 공부를 명심해 하겠습니다.”
상순은 덕돌을 품에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신신당부했다.
       "그래야지, 이제야 내 아들답구나. 나처럼 한뉘 후회하지 말게 공부를 잘해라.”
      “예.”
그들 부자간이 남산의 비탈 밭을 내릴 때는 이른 아침 해가 동산에서 두둥실 떠올라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덕돌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도 마음 속으로 부모를 애먹이지 않고 공부를 잘하겠다고 다지고 또 다지었다.
(이제 연변에 나가면 본때나게 공부해야지.)
열흘도 되지 않아 은숙한테서 친혈육의 정이 담뿍 담긴 편지가 날아왔다.
“…부모형제들 쌀 고생, 마음고생 하지 않는다니 이 둘째딸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덕돌이 안쪽에 가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을 공부를 잘 시켜야 합니다. 덕돌을 보내시오. 내 책임지고 우리 집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덕돌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친형제의 뜨거운 정을 느꼈다.
물보다 피가 더 짙고 피보다 짙은 것은 정이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시름을 놓은듯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춘자는 밥상을 가져다 놓고 함흥중학교에 있는 동창생들인 경산과 성환 그리고 황승연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마다에 동창생들의 우정을 먼저 간단히 말하고 남동생 덕돌이 함흥중학교에 되나가니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덕돌의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외지에 가서 공부하노라면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을 거야. 누나를 애 먹이지 말고 공부를 잘해라.”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을 덕돌은 가슴 깊이 아로 새겼다.
“나도 어지간하면 너를 보내지 않겠다. 네 앞날을 망칠까봐 모진 마음을 먹고 누나네 집에 보낸다.”
“꼭 최우등을 할 테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덕돌은 어머니가 주는 단돈 5원에 쌀 한 주머니를 가지고 떨어지지 않은 걸음으로 연변으로 떠나가게 됐다.
그는 부모와 누나들과 갈라지기 아쉬운 대로 연변 고향으로 나가야만 했다.
용대랑 용구랑 현준이랑 광순이랑 아쉬워하면서 덕돌을 바랬다.
성숙과 은자는 쌀주머니를 번갈아 이면서 교하역에까지 가서 바래었다.
뜻밖에도 왕춘영이 교하역에까지 따라 와 눈물을 흘리면서 덕돌의 손을 잡고 애원하지 않겠는가.
“연변에 가지 말라.”
누나네는 덕돌을 흘겨보았다.
“못된 쇄지 뿔부터 난다더니. 쯧쯧쯧."
"쓸데없이 가시나들부터 친하지 말라."
"연변에 나가면 공부나 잘해라. 알았지?”
허나 덕돌은 누나네 말에는 개의치 않고 개찰구로 나가면서 왕춘영에게 머리를 돌렸다.
“내 이제 대학에 붙으면 너를 찾아올게.”
그는 무거운 한마디 남기고 무정한 열차에 올랐다.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차창 밖으로 성숙과 은자가 보였다. 아니, 저게 뭐야? 춘영이 플래트홈에까지 나와 뛰어오며 처량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일어나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았다. 춘영은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다가 허망 넘어진 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무정히 달리는 열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덕돌이 아무리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눈 뿌리 빠지도록 보아도 시야에서 춘영의 모습은 훌 무정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8. 교정의 종소리


     소낙비가 언제 쏟아 졌나 시피 먹장구름이 드리웠던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동쪽 벌판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려 패용천산 앞 큰 도랑물에 거꾸로 비끼었다. 이슬은 해빛을 한오리 한오리 꿰여 황홀한 칠색비단을 드리우고 황홀한 꿈의 세계로 무지개-아치교를 놓아주었다.
“빨리 나가 고기를 잡자. 물이 흐리면 꼭 미꾸라지가 많을 거야.”
덕돌은 성욱과 함께 바삐 다리 밑에서 나갔다. 덕돌이 반디를 대고 성욱이 발을 쿵쿵 굴러 물고기를 반디 쪽으로 쫓았다. 덕돌이 반디를 드니 미꾸라지가 한 종지씩이나 나왔다.
비온 뒤 물고기가 많이 나와 덕돌은 반디 질을 하는 재미가 좋았다.
“아차, 큰 고기 든 거 같다.”
덕돌이 반디를 들면서 하는 말에 성욱은 “거 어떻게 아니?” 하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반디를 들여다보았다.
“아이야, 뱀이다! 뱀!”
덕돌은 소리치더니 “이걸 어쩌니?” 하며 제꺽 반디를 감아쥐었다.
성욱은 미꾸라지를 반 초롱이나 담은 초롱을 들고 따라 도랑둑으로 나갔다.
덕돌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옳다. 이대로 집에 가지고 가서 가마에 삶아서 돼지를 먹이자.”라고 했다.
성욱은 섬직해 “그 가마에 어떻게 밥을 해먹니?” 하고 짧은 목을 움츠리었다.
“그럼 우리 누나네 집 가마에 삶아 우리 돼지를 먹일게.”
“그래라.”
그들은 덕돌의 누나네 집으로 뱀을 감아쥔 반디를 들고 갔다.
모두 일하러 가고 집에는 누나도 매형도 없었다.
덕돌은 성욱을 보고 “가마 덮개를 열어라.”라고 했다.
성욱이 가마를 여니 돼지죽이 절반이나 차 있었다. 덕돌은 가마에 다가가 반디를 스르르 풀었다.
“뱀이 가마에 떨어지자마자 제꺽 가마뚜껑을 닫아라!”
“응.”
덕돌이 반디를 가마 안에 넣고 슬슬 풀었다. 뱀이 가마 안에 뚝 떨어지자마자 성욱은 뚜껑을 찰강 닫아버렸다.
“이젠 됐어.”
덕돌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한참 있으니 김이 쌕 나면서 가마뚜껑이 무엇엔가 툭툭 맞히는 소리가 났다.
“뱀이 데 죽는 모양이야.”
“하하하.”
한참 후 가마를 살그머니 열어보니 부글부글 끓는 돼지죽 위에 꼬불꼬불한 뱀이 푹 삶겨져 있었다. 바가지로 툭툭 건드려 보니 확실히 죽었다. 덕돌은 삶은 뱀을 바가지에 퍼서 돼지 굴에 가지고 가서 돼지구유에 쏟아 놓았다. 그러자 돼지는 꿀꿀 거리며 다가가더니 아주 맛있게 한 입에 다 먹어 버렸다.
덕돌은 배짱도 있고 시원시원한데 비하여 콩알 눈인 성욱은 꼭 다문 입처럼 속이 꽁해 쩍하면 잘 앵돌아졌다. 그러나 그들 둘은 성미는 달라도 친척이어서 그런지 늘 잘 어울려 다니곤 했다.
한번은 낙제생인 원순이가 성욱의 새 모자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 그때 성욱이 따라 달려가면서 모자를 돌려달라고 했다가 원순에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덕돌과 성욱이 달려들어 한쪽다리씩 들어 건뜻 들어 메쳐놓고 모자를 되찾았다.
성욱과 덕돌은 늘 같이 다니면서 단짝이 됐기에 아이들의 업신여김을 덜 받았다.
둘째매형 경만은 덕돌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교하에서 조개덕에 올 때도 수레를 몰고 와서 마중해 덕돌과 쌀을 실어왔고 책도 매주었다.
쌀 고생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경만은 아내와 함께 마당에 자란 청수수를 베여 낟알을 털어내 말리었다.
허나 그 수수가 마르기도 전에 쌀이 다 떨어졌다.
은숙은 부득불 돌도 되지 않은 둘째딸 주옥을 업고 방아에 청수수를 쪘다. 수수가 채 마르지도 않아 방아에 묻어나면서 잘 찧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은숙은 오전부터 진종일 방아를 찧어서야 여나무근 되는 수수쌀을 얻어냈다.
은숙은 그 청 수수쌀로 죽이라고 쑤어놓았다.
그런데 죽이 목에 걸려 덕돌은 속으로 눈물과 함께 삼켰다.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덕돌은 공부는 잘해 학습위원으로 됐다. 그것도 매 학과목 평균 성적이 98점 이상이었다. 그중 수학과 물리, 화학 평균성적은 100점이나 됐다.
하지만 덕돌은 항상 낙제생 큰애들에게 얻어맞았다. 매형 경만이나 양형님 수봉에게 말하면 원순이랑 철주랑 광일이랑 시간에 덕돌의 잔등에 잉크를 쳐놓는가 하면 여자애들이 보는데서 더 놀려주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수봉과 경만은 덕돌의 역성을 들곤 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전 교 수학콩쿠르를 벌렸다. 성욱은 덕돌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덕돌의 시험지를 처음부터 몽땅 베껴 썼다. 결과 성욱은 덕돌과 함께 1등상을 탔다. 그것도 어느 문제 답안이나 똑같았고 성적도 똑같이 100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욱은 덕돌의 덕분에 1등상을 타고서도 차츰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편에서 덕돌은 두번째 수학 콩쿠르 때에는 성욱과 갈라 앉았다. 물이 가라앉자 물에 가리었던 돌이 수면에 드러났다.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덕돌은 그번 수학 콩쿠르에서 2등을 했지만 성욱은 등수에 들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한 문제 밖에 풀지 못했다.
그때부터 성욱은 덕돌과 나란히 앉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덕돌이 자기와 나란히 앉아 시험지를 보였더라면 그래도 2등은 했겠는데 말이다.
한번은 성욱이 교실에서 발딱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선생님, 덕돌은 학습위원 자격이 없습니다.”
애들의 눈길이 일시에 성욱에게 쏠렸다.
“어째?”
황승연의 물음에 성욱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했다.
“전번 수학콩쿠르 때 내 시험지를 다 보고 써서 2등을 했습니다. 덕돌은 학교 나무도 수태 꺾었습니다.”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일어나 되물었다.
“내 언제 네 시험지를 보고 썼니? 네가 내 시험지를 보고 썼지. 또 언제 나무를 꺾었니?”
성욱은 질투의 불길로 타오르는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다가 주먹을 한 대 날렸다.
그때 덕돌이 팔을 들어 막으면서 한주먹을 안겼다.
“손을 떼라!”
황승연 담임이 고함치면서 다가왔다.
“시간에 이게 뭐야? 덕돌은 참아야지. 학습위원이라는게 뭐야?!”
덕돌은 머리를 숙이면서 “잘못했습니다. 선생님.”라고 했다.
짙은 눈썹아래 쑥 패어들어 간 우멍눈, 날이 선 코. 황승연 선생님을 보기만 해도 덕돌은 겁부터 났다.
그 일이 있은 뒤 덕돌과 성욱은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덕돌은 그래도 어깨동무이자 9촌 조카라고 성욱과 더 싸우지 말려고 했다. 하지만 성욱은 상선이랑 자기 집에 데려다 놀면서 덕돌의 흉을 한바탕 보면서 따돌리자고 했다.
신록이 짙어가고 무더위가 쏟아지는 여름이 지나가고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덕돌은 태평강 가에 이르자 채발로 고기잡이를 하던 성욱이랑 상선이랑 애들의 옷을 걷어안고 저쪽으로 달아났다. 덕돌은 그제날 활동참 단장을 하던 애 답지 않게 친구들을 잃고 말았다.
그때 철주가 채발과 비닐초롱을 들고 저쪽에서 흥얼거리면서 다가왔다.
“너 따돌림을 당했지?”
“아, 아니야.”
덕돌은 그제날 성욱과 함께 철주와 원순의 두 다리를 들어 메 치고 때린 일이 생각나 얼버무렸다.
한편 그는 공부도 잘 못하고 남의 해바라기랑 딱총이랑 훔친 철주와 놀기 싫었다.
“야, 외목에 날게 뭐야? 나와 친하겠니?”
철주의 말에 덕돌은 저 멀리에서 히히거리는 성욱이랑을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덕돌은 철주를 따라 태평강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시작했다.
잔잔히 흐르는 태평강 물에는 병풍처럼 둘러선, 깎아지른 벼랑이 치솟은 패용천산이 거꾸로 비꼈다.
철주가 발을 대자 덕돌이 강물에서 발을 굴러 고기를 쫓았다. 철주가 발을 들자 하얀 모래무치와 버들치가 팔딱팔딱 뛰었다.
한참 물고기 잡이를 하면서 그들은 어느덧 칼산기슭의 과수원 옆에까지 이르렀다. 주렁주렁 달린 노란 배들이 싱그런 향기를 풍기었다.
덕돌은 닭 알 군침을 꼴깍 삼켰다.
“덕돌아, 더운데 저 배를 뜯어먹자.”
덕돌은 덴겁해 “얘, 들키면 큰일 날 게 아냐? 그만두자.” 하고 뒤로 물러섰다.
“일없다. 난 도적질에 이골이 텄으니까. 들킬까 봐 근심하지 마.”
그래도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는 덕돌을 보고 철주는 바투 들이댔다.
“너 정 재미없이 놀면 나까지 널 외목에 낸다.”
그 말에 덕돌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는 철주를 따라 살금살금 강냉이 밭을 꿰질러나가 배 밭에 숨어들어갔다. 그들 둘은 쥐처럼 배나무에 기어 올라가 주먹만큼 한 배를 뜯어 적삼 앞가슴에 불룩하게 넣었다. 덕돌은 두 다리와 손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심장이 콩콩 뛰어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덕돌과 철주가 배를 가득 뜯어 넣고 태평강 쪽으로 다가올 때다. 저 멀리에서 빨래를 하는 순희랑 보였다.
“저 애들에게 배를 나눠 줄까?”
덕돌도 맞장구를 쳤다.
“옳다. 순희랑 우리 편이 되게 하자.”
그들은 그대로 마을에 들어갈 수 없어 태평강 가의 버드나무 밭 모래를 파고 배를 파묻었다. 그리고 서너 개씩만 쥐고 가서 순희랑 인옥이랑 또래 여자애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배는 어디서 훔쳤지?”
“아니야, 6촌 형님한테서 가진 거야.”
“응, 옳다. 함흥촌의 과수원은 덕돌네 6촌형이 지킨다더라.”
철주도 맞장구를 쳤다.
덕돌이 앞가슴에서 노란 배를 서너 개 꺼내 순희에게 주자 순희랑 생글 웃으며 받았다.
애들은 태평강에 가서 배를 씻어 사각사각 맛나게 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큰 경을 치렀다.
농약을 친 줄도 모르고 애들이 배를 먹고 저마다 배를 끌어안고 마구 뒹굴었다.
어른들은 사연을 알고 황급히 손잡이 트랙터에 덕돌이랑 순희랑 싣고 진수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규상과 박영발은 “빨리 진수해병원에 가야 애들을 살리오.”라고 했다.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 운전수 허성훈은 전 속력을 다해 애들을 싣고 밤길을 달려 진수해 병원으로 향했다.
배도적사건이 드러난 후 덕돌은 자연히 학습위원직을 철직 맞을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사건은 연속 생겼다.
어느 날, 애들은 보슬비가 쏟아지는 싸늘한 날씨를 피해 학교 동쪽에 가서 뛰놀았다. 그런데 종이 울린 줄도 모르고 계속 놀았다.
담임 황승연은 함흥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찬탈한 황종연의 동생이었다. 그는 덕돌이 상순의 아들이라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터였다.
그런데 오늘 때마침 잘 걸려들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학교 동쪽에 와서 숱한 애들과 함께 뛰노는 덕돌을 보고 꽥 소리쳤다.
“종이 울렸는데도 계속 놀 테냐?!”
“아야, 종이 울렸구나.”
덕돌은 당황해 이렇게 외치며 황승연의 날이 선 코 위 독기서린 눈길을 보면서 질겁해 하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애들은 모두 교실로 찍 소리치지 못하고 쓸어 들어갔다.
승연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교편으로 교탁을 탕탕 치며 꽥꽥 고함쳤다.
“덕돌아, 일어서!”
덕돌은 잘 못 걸렸구나 생각하며 머리를 숙이면서 일어섰다.
“너 종이 울린 거 들었니? 못 들었니?”
“못 들었습니다. 지각해서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단가? 노실하지 못한 새끼, 어디 혼나봐라!”
승연은 “위응과 철복도 서라! 너네는 종이 울린 걸 듣지 못했니?” 하고 물었다.
위응은 덕돌이 사실 대로 말했다가 혼나는 것을 보고 인차 “들었습니다.”하고 거짓말로 대답했다.
“음, 로실하구나. 넌 앉아라!”
약삭빠른 철복도 당연히 들었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런데 승연이 덕돌에게 다시 물어도 역시 지각한 것은 잘 못했지만 종소리 나는 건 정말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승연은 독기 서린 우멍눈으로 쏘아보며 덮쳐오더니 덕돌을 마구 책상에 짓 쪼아 놓고 주먹으로 때렸다. 덕돌은 코피가 터져 책상에 피가 질벅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차마 그 참경을 볼 수 없어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덕돌이 맞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승연은 때리고서도 성차지 않아 당장에서 처분결정을 내렸다.
“덕돌의 학습위원직을 철직한다. 대신 성욱을 학습위원으로 임명한다.”
그는 덕돌을 질투하는 성욱을 버쩍 추켜올리고 덕돌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기 시작했다.
“성욱은 덕돌보다 공부를 더 잘한다. 이전에 덕돌이 수학 콩쿠르에서 1등한 것도 모두 성욱의 시험지를 베껴서 쓴 거야. 어쩜 시험 답안이 성욱의 답안과 똑같단 말이냐?”
덕돌은 너무나 억울했다.
“선생님, 난 학습위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허나 성욱의 답안을 베낀 적이 없습니다.”
덕돌은 성욱이 그래도 9촌 조카라고 성욱이 자기 답안을 베낀 것은 숱한 애들 앞인지라 말하지 않았다.
이때 성욱이 일어나 덕돌을 손가락질하면서 교실이 떠나가게 소리쳤다.
“덕돌이 내 답안을 베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덕돌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성욱을 손가락질 하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얘, 네가 이런 말을 할 처지냐?”
“친척이고 뭐고 모르겠다.”
“옳다. 친척이고 뭐고 사실대로 말한 성욱이 잘 했다.”
승연은 성욱과 덕돌 사이에 붙는 불에 키질했다.
순희랑 미선이랑 덕돌이 억울하다고 떠들었다.
덕돌은 아무리 말해도 버선목이라고 번져 보일 수 없었다. 진짜 만두 먹은 벙어리 처지로 되고 말았다. 그저 속으로 꼭 이담 성욱보다 공부를 더 잘해 대학에 가는 것으로 누가 진정 자기 성적인가, 누가 누구의 시험지를 베꼈는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덕돌은 해쭉거리는 성욱 그리고 오류분자 리달송의 아들 이응을 보았다.
그때 철주가 다가와 덕돌에게 나직이 쑹얼거렸다.
“야, 네가 나떨어지니 성욱이 새끼 박수까지 치더라. 그냥 놔두지 말자.”
철주의 말에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철주는 덕돌을 끌고 고추밭에 들어가 빨간 고추를 뜯어 그 즙액을 손에 바르게 했다.
덕돌과 철주는 준비가 끝나자 성욱이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서라, 개새끼들아, 오늘 맞아봐라!”
덕돌이 꽥 소리치며 덮쳐들어 성욱의 눈통을 잽싸게 쳤다. 성욱은 눈이 아려 눈을 싸쥐고 맴돌았다. 그때 상선이가 덕돌에게 덤벼들었다. 옆에 있던 철주가 상선을 막아 귀 쌈을 짱 갈겼다. 그러자 상선이가 철주의 턱주가리를 헤딩했다. 덕돌이 손바닥으로 성욱의 눈 통을 짱 갈겼다. 고추 발린 손에 눈 통을 맞은 성욱은 눈을 뜨지 못해 물매를 맞았다.
담배 밭에서 일하던 경학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그 바람에 덕돌과 철주는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날 저녁에 성욱은 부모에게 야단맞았다.
“뭐야? 친척끼리 싸우다니?”
성욱이 자기 좋은 소리를 하자 경학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고놈 새끼, 굴러 온 돌이 배긴 돌을 뺀다고 공부를 잘 한다고 너를 업신여겨?”
덕돌은 연변으로 나올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던 부탁을 생각한데다가 둘째 누나와 매형이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편 날마다 누나를 도와 아침과 저녁으로 불을 때고 외 조카 혜옥과 주옥도 업어주면서 도와주었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덕돌은 솜옷을 가지고 온 것이 없어 추워 기침을 쿨룩쿨룩 깇었다. 나중에 가래를 뱉으면 피가 묻어 나왔다.
덕돌이 돌을 던지며 운동하던 곳을 돌아보던 경만은 놀라 은숙에게 알렸다.
은숙은 깜짝 놀라 바깥에 뛰어나와 덕돌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얘, 언제부터 피 나왔니?”
“한 보름 되오?”
“뭐라니?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은숙은 주옥을 업고 덕돌을 데리고 정규상을 보이러 토성안집의 위생소로 찾아갔다.
대대 혁명위원회 간판을 버젓이 건 위생소에서 무슨 옥신각신 소리가 들렸다.
“당신, YB병원에서 우파 모자를 쓰지 않았소? 여기 와서 그간 위생소 소장을 했으면 과분하지. 이젠 박영발 서기한테 소장을 시키겠소. 정규상 우파는 이제부터 돼지 똥이나 모으란 말이오. 빈농에게서 재교육을 잘 받으란 말이오.”
정규상은 소침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위생소에서 나왔다.
“저기, 정 선생, 얘 병을 봐주십시오.”
그러자 정규상은 뒤에 따라 나오는 종연과 박영발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어째, 아프오? 아프면 이젠 박 소장한테 보이오. 난 병을 보지 못한다오.”
은숙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정규상 의사가 용하다는 말을 듣고 기어이 정 선생에게 보이려고 졸라댔다.
그때 종연이 마루에 나와 허리에 두 손을 지르더니 혁명위원회 주임 틀을 차리면서 정규상을 쏘아 보며 을러멨다.
“정 우파는 거기서 뭘 하는가? 얼른 가서 오류분자 리달송과 함께 돼지 똥이나 줏지 못하겠소?”
“예?”
“아직도 꾸물거리겠는가?”
정규상은 어정쩡해 서 있다가 물었다.
“리달송은 일제 때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일본통역인데 나를 어찌 그런 일본주구 놈 취급을 한단 말이오?”
종연은 정규상의 눈길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 발을 탕 구르며 을러멨다.
“뭐라고?! 정 우파는 반당분자이기에 옛날 지주나 통역보다도 더 악독한 현행반혁명분자야! 무산계급전정의 타도 대상이란 말이야! 썩 물러가 돼지 똥이나 백 수레를 주으란 말이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네놈의 대가리를 둼 무지에 거꾸로 심어놓을 테다!”
박영발은 위생소 유리창문으로 내다보며 깨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김상순 서기를 믿고 이 마을에 왔었다. 하지만 정작 와보니 상순은 기운 달과 같았고 흥수가 살판 치는 것을 보고 상순을 따르지 않고 점차 흥수한테 붙었다. 허나 흥수도 맥을 추지 못하는데다가 상순마저 교하로 이사해가자 반란파 종연한테 철썩 달라붙어 입당소개인이 돼주었다. 종연이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갈 때는 슬그머니 막후에서 “정치고문”을 서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연은 박영발을 치하해주었다.
“박 서기는 세상물정을 아는구먼. 당신, 정치표현이 아주 좋소. 지금 반란파들의 세상인데 그까짓 시들어가는 노간부들을 보호해 보았자 밥이 나오오? 사형장에 끌리어 가지 않으면 감옥에 가고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돼지 똥이나 주어야 하지.”
박영발은 속으로 자기보다도 스무 살이나 어린 20대 반란파 두목 종연을 건달 같은 놈이라고 욕하였다. 허나 혁명위원회 주임 종연에게 달라붙어야 노동개조도 덜 하고 위생소에 들어박혀 병이나 보고 어려운 세월을 넘길 것 같았다.
종연은 박영발의 그런 속내까지는 모른 채 홱 달라진 정치표현을 보고 계속 횡설수설했다.
“박 서기, 대대혁명위원회에 대한 충성심을 봐서 박영발 서기를 우리 대대 위생소 소장으로 임명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영발은 허리를 굽신거리면서도 뒷말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헌데 정규상 의사는 어쩌겠습니까?”
“근심하지 마오. 그 놈은 돼지 똥이나 주어라면 되지. 근심할게 있소? 정치표현이 아주 나빴단 말이오. 이전부터 병완 영감과 상순 서기한테 찰싹 붙어서 내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가는 걸 얼마나 반대했다고?”
이렇게 돼 오늘 정규상은 위생소에서 쫓기어 나가 돼지 똥을 줏게 되었던 것이다.
윤희는 창문가에 서서 측은한 눈길로 정규상을 내다보았다.
은숙은 정규상을 욕보이지 않으려고 덕돌을 데리고 위생소에 들어갔다. 정규상은 먹장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더니 머리를 수깃하고 토성안 대대사무실 마당에서 나가버렸다.
박영발은 덕돌의 가슴에 대고 청진기를 대보더니 놀라했다.
“아니, 폐염에 걸렸구먼. 허나 약을 좀 쓰면 되오.”
그때 주사실에서 박윤희 간호사가 건너와 아양을 떨었다.
“아니, 이게 김 서기네 아들딸이 아닌가요? 어쩜 김 서기는 이렇게 예쁘고 칠칠한 아들딸을 두었어요?”
그녀는 부끄럼을 타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했다.
“이 부리부리한 눈이랑 보오. 딱 김 서기를 답지 않았소?”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종연이 두덜거리었다.
“노처녀 돼 그러오? 걔가 뭘 잘 났다고 그러오? 새애기처럼 곱게 생겨 뭘 하오? 무골충처럼 애들에게 놀림만 당한다던데.”
박영발은 처방을 떼더니 먼저 덕돌에게 마이시린 주사를 맞으라고 했다.
덕돌이 주사를 맞으러 갔을 때었다. 종연은 덕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주사실에서 윤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쌍소리를 하며 지분거렸다.
“주사 맞으러 왔니?”
윤희는 덕돌을 보자 종연의 손을 밀치며 주사를 놓으려고 서둘렀다.
그제야 종연은 윤희한테서 물러서면서 자기 흥을 깼다고 그러는지 덕돌을 곱지 않은 퉁방울눈으로 흘겨보았다.
덕돌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 점심마다 토성 안 위생소에 와서 주사를 맞았다. 허나 기침이 좀 나을 뿐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왔다.
그때 은숙은 덕돌을 데리고 가만히 조개덕 생산대 식당자리에 있는 정 의사를 찾아가 덕돌의 병을 봐달라고 했다.
정규상은 돼지 똥을 줏던 작은 삽을 놓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여기 오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없습니다. 덕돌을 살려주십시오.”
“집에 들어가기요.”
정규상은 황급히 돼지 똥 초롱과 삽을 든 채 집 문을 떼고 들어갔다.
“내 병을 봤다는 걸 알면 야단나오.”
은숙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전번에 박 서기한테 보이니 페염이라고 합디다. 주사를 며칠 맞혔는데도 계속 가래에 피가 묻어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규상은 덕돌의 손목을 짚고 맥을 보더니 “페염은 옳소. 중약을 써야 하겠소. 내 처방을 떼 줄 테니 진수해 병원에 가서 중약을 지어다가 달여 먹이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은숙은 정규상의 처방을 받아 쥐자마자 애를 업은 채로 진수해 병원에 헐금씨금 달려가서 약을 지어다가 풍로에 달였다.
그런데 돼지 똥을 줏느라고 돌아다니던 이달송이 은숙이네 마당을 지나다가 은숙과 덕돌이 풍로에 중약을 달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은숙은 개의치 않고 중약을 달였다.
정규상의 약 세 첩을 달여 먹였는데 기적적으로 덕돌의 가래에 피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달송이란 자가 은숙이네 중약을 달인 일을 박영발한테 밀고할 줄이야. 그 바람에 등줄이 달아오른 박영발은 공사병원에 달려가 은숙이 중약을 지어간 처방을 들춰내 정규상의 필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는 위생소 소장 몰래 우파 정규상이 병을 마음대로 보고 약 처방을 뗀 일을 고발했다. 그 일로 해 정규상은 조개덕생산대 우사에 소들과 함께 갇혀 날마다 소 똥과 돼지 똥을 쳐내고 밤에는 투쟁맞고 소들과 함께 북데기를 쓰고 자야 했다. 그는 낮에는 돼지 똥을 주어 모으면서 노동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대신 이달송은 고발한 공로로 돼지 똥 임무를 백 수레로부터 50수레로 줄일 수 있게 됐다.
덕돌은 페염이 치료돼 건강한 몸으로 공부를 잘해 기말에 최 우수생으로 됐다. 수학콩쿠르에서 덕돌은 백점으로 1등, 그것도 아주 풀기 어려운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어 만점으로 1등을 했던 것이다. 어문 성적은 그의 모든 학과목 성적에서 제일 낮았지만 역시 다른 과문과 마찬가지로 최우등을 했다.
특히 작문을 어찌나 멋있게 썼던지 김경산 선생은 한 학년의 다른 학급에 다니면서 덕돌의 작문을 참고하라고 읽어주기까지 했다. 한어는 더 말할 데 없었다. 교하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다가 온 덕돌은 한어로 대화도 술술 하고 과문은 통째로 줄줄 한어로 이야기 할 정도로 통달했던 것이다.
비록 학습성적은 올라갔지만 덕돌은 한번 지각했다가 승연에게 혼난 후 몇해 동안이나 승연에 대한 공포증으로 시달렸다. 그는 교정에서 뛰놀다가도 종소리만 들으면 신경을 도사리고 교실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덕돌의 대신 학습위원으로 된 성욱의 학습 성적은 덕돌과 비하기도 어렵게 훨씬 낮았는데 전 학급에서 중상류에 속했던 것이다. 은숙과 경만은 입이 하나 불어 쌀고생에 힘들었지만 덕돌의 진보에 기뻐 힘든줄 몰랐다. 그러나 정규상 의사가 덕돌의 페염을 치료해주었다고 대대 혁명위원회의 처벌을 받아 돼지 똥을 모으면서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미안해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9. 우국우민의 충정
내자산탄광의 하늘을 찌르며 아찔하게 솟아오른 버럭 산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버럭을 실은 차가 연신 소철을 타고 버럭산 꼭대기로 올라가 버럭 돌을 버렸다. 그때마다 숱한 버럭 덩어리가 가파른 버럭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면서 깨져 돌 속에 숨은 석탄을 굴려내려 보냈다.
상순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버럭 산 아래로 가서 버럭 차가 올라와 버럭 돌을 부리어놓고 내려오는 틈을 타서 버럭 속의 석탄덩이를 주어 수레에 담았다. 그렇게 온 하루 모으면 몇 버치는 돼 땔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됐다.
상순이네 황하전자에 온지도 어언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새해 봄이 다가왔다. 아직도 날씨는 아주 쌀쌀했지만 버럭 산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화기로 해 추운 줄을 몰랐다.
며칠 전에 선후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한테서 눈물겨운 편지가 왔던 것이다. 편지에서 두 노간부는 함흥대대 반란파들이 당지부를 말살하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위원회 주임이며 반란파 두목인 황종연이 새까만 정치를 하고 있는 살벌한 정황을 죽 쓰고 나서 상순을 보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함흥대대에 돌아오라고 했다.
상순은 망치로 버럭덩이를 땅 쳐 깨 석탄을 주어 버치에 담으면서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황화전자 남새생산대에 있으면 쌀 고생과 마음고생 하지 않고 땔나무근심을 하지 않아 좋긴 좋은데.)
상순은 허리를 펴고 버럭 산 저쪽 산기슭 아래 무연하게 펼쳐진 검은 논을 내려다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를 양성해준 이 서기와 허 현장을 사지에 놔두고 좌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상순은 이런 생각을 굴렸다.
(황차 덕돌은 여기 한족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딸애들을 한족 집에 줄 수도 없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상순은 석탄을 그만 줏고 수레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기 생각을 아내와 말하자 아내는 기뻐 야단쳤다.
“잘 생각했소. 애들 전도를 봐서라도 연변에 나가기요.”
허나 춘자와 홍자는 말리었다.
“여기 오라고 한 나를 망신시키지 마십시오.”
춘자는 성이 나 펄펄 뛰었다.
상순은 춘자를 보고 말했다.
“이 일은 체면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사야. 내 먼저 연변에 나가 마을 형편을 두루 살펴보고 결정하겠다.”
춘자는 일단 생각을 잡은 후에는 벽이라도 마구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아는지라 더 말리지 못했다.
명옥은 연변으로 떠나가는 남편에게 희망을 기대하면서 바래었다.
“꼭 이사해 나가기요. 종연이랑 좀 입당시키겠다고 얼려 일이 되게 만들어보오.”
허나 상순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사를 가지 못하면 못했지. 종연한테 알락거리라고? 원칙도 없이 오뉴월의 소불알달걀처럼 이 볼 쳤다 저 볼 쳤다 하라고? 어림도 없어. 나는 이사를 가도 당당하게 갈 테오.”
허나 명옥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어떤 때에는 일이 되게 하자면 종연이랑 스리슬쩍 얼려 넘겨야 하오.”
“스리슬쩍 얼려 넘겨? 오호. 그래 그 말은 하던 중에 멋있소. 얼려 넘기기만 하겠소. 나를 받지 않고선 그 놈이 살아남을 수 없지.”
상순의 그 말 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명옥은 남편도 꼭 이사해 나가려고 한다는 것만은 알고 한시름 놓았다.
상순은 함흥대대에 돌아오자마자 토성 안 아주머니부터 찾아가 보았다. 아주머니는 딸 순애마저 진수해 음악교원 최수룡에게 시집보내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 그간 편안히 계셨소?”
뜻밖에도 지새금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외손자 최귀춘을 데리고 놀다가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생원이 우리를 버리고 영 갔나 했소. 올 봄에는 생원이 없어서 이영을 잇지 못해 어쩌겠는가 근심했소. 그런데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소.”
상순은 아주머니를 한참 위문하고 나서 옆에 있는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머나!”
        위생소에서 쓰레받기를 들고 나오던 윤희는 놀랐다. 그녀는 주춤 멈춰 섰다가 생글방글 웃었다.
“김 서기,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누가 왔다고?”
건방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조개턱 종연이 길쭉한 머리를 내밀었다.
“어, 당신 어떻게 돼 왔소?”
“사원들이 다 어데 갔소?”
종연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했다.
"저 패용천산에 갔소. 저기 보오.  돌로 ‘모 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잖소?” 
그의 상통에는 상순이 다시 나타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속내가 환히 드러났다.
박영발은 위생소 창문으로 상순을 보면서도 나와 인사도 하지 않고 신문으로 낯을 가리는 것이었다.
(간에 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자식, 딱 오뉴월에 소불알처럼 이 볼 쳤다 저 볼을 쳤다 하는 놈 새끼야.)
상순도 종연과 영발이 보기 싫어 토성 안에서 성큼성큼 나와 패용천산으로 향했다. 대문어귀에서 되돌아보니 종연이가 윤희의 팔소매를 억지로 끌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연은 윤희를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을러멨다.
“박 간호사, 내 말 듣겠소? 안 듣겠소?”
윤희는 두 손을 싹싹 마주 비비면서 종연이가 무슨 수작을 부리겠는가고 눈치를 살폈다.
“어찌 언감 황주임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 우리 함흥대대에 온 이상 내 말을 잘 듣지 않고 되겠소? 누구 덕에 무더운 여름이나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 산과 들에 나가 헤매지 않는지 아오?”
종연은 사무 상을 손가락으로 똑똑똑 치면서 윤희 눈치를 살피면서 수작을 피웠다.
“아차, 앉소. 여기 앉소.”
윤희는 별 수 없이 종연이 내주는 걸상에 앉았다.
종연은 옆으로 윤희를 째려보았다.
“이제 보니 우린 동갑인 거 같소. 둘 다 용띠지?”
“어머, 그래요?”
윤희도 위생소에서 쫓기워 날까봐 발라맞추었다.
“나는 노총각, 박동무는 노처녀. 우린 천생배필인 거 같소.”
윤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앵돌아졌다.
“처자 있으면서 노총각은 무슨 노총각? 사람을 웃기지 마세요.”
종연은 손으로 윤희의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면서 지껄였다.
“애는 있어도 마음만은 총각 마음이오.”
윤희는 겁기 띤 표정으로 종연을 흘끔 곁눈질했다.
“왜 이래요? 누가 보겠어요.”
“모두 일하러 가고 없소.”
윤희는 걸상에서 엉덩이를 옴찔하면서 옆의 위생소 눈치를 살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 그래. 옆에 박 소장이 있지. 이제 보니 그 놈을 일밭에 쫓아 보내고 윤희 혼자 소장 겸 의사 겸 간호사를 하면 좋겠다.”
종연은 서뿔리 건드리지 않고 아주 점잔을 빼면서 서서히 윤희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윤희는 종연이 징그럽고 두려웠다.
“아니, 전 병을 볼 줄 몰라요. 그저 주사나 놓았지.”
“그 놈을 쫓아 내지 않으면 어지간히 불편하지 않겠소?”
      종연은  다시 윤희를 와락 끌어안고 걀쭉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윤희는 종연을 살짝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주임은 박 소장 지지마저 받지 못하면 어떻게 입당하겠습니까?”
그러자 종연은 걸상 등받이에 잔등을 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옳소. 박영발 소장과 윤희 간호사는 문화대혁명 전부터 어진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서?”
한참 무슨 궁리하던 종연은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면서 헤헤 웃으면서 윤희를 쳐다보았다.
“동갑이, 내 입당을 도와주오. 그럼 내 동갑을 영영 위생소에서 일하게 할게.”
윤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황 주임이 진보하고 입당하려는데 어찌 돕지 않겠습니까?”
윤희는 종연이가 문화대혁명 초부터 국장을 하는 반란파 두목 김용만과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잘 아는 터라 발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종연은 윤희를 노려보면서 한바탕 열변을 토했다.
“고맙소. 허나 절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지 마오. 저 박영발은 양면파 수법을 쓰는 사람이오. 듣자니, 대대 당지부 서기를 선거할 때 모든 당원들 앞에서는 이흥수 서기를 선거하고 나중에 투표할 때는 상순한테 투표했다오. 오히려 정적이나 다름없이 수십 년 싸운 상순이한테 투표했다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의리와 양심을 어기고 논단 말이오.”
갑자기 위생소 쪽에서 박영발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윤희! 환자 왔소. 얼른 주사를 놓소!”  
종연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옆의 위생소 쪽을 흘끔 눈짓하며 헐뜯어댔다.
“저 영감은 믿지 못할 사람이오. 윤희는 뭘 보고 저런 영감과 바람을 피웠소? 흐흐흐. 이젠 나와 친하기요.”
윤희는 낯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앵돌아져 나가버렸다.
한편 상순이 패용천산으로 올라가면서 볼라니 온 함흥대대 사원들을 다 동원했는지 돌을 나르는 사원들이 과수원 다락 밭과 패용천산 양지바른 벼랑 위 사이로 개미떼처럼 분주히 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원들은 글쎄 과수원에 다락 밭에 둔덕을 쌓은 돌을 허물어 날라다 벼랑 위에 “모주석 만세!”를 새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저 다락밭의 둔덕을 어떻게 쌓은 거라고 저래? 저걸 허물면 수토유실이 생겨 과수원은 끝장 날 게 아닌가!”
상순은 다락밭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흥수의 손에서 돌을 빼앗아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과수원을 망치려고 드오?”
흥수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는 성난 상순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비웃음을 지었다.
“이보, 당신, 아직도 우리 함흥대대 일에 삐치오?”
상순은 흥수에게서 빼앗은 돌을 도로 쌓아놓으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락밭 돌을 허물어선 안되오.”
흥수는 옆구리에 두 손을 지르고 침을 튕기며 을러멨다.
“이 싱거운 나그네를 봐! 지금 모주석께 충성을 표시하려고 패용천산에 세상에서 제일 큰 ‘모주석 만세’를 새기는데 파괴할 예산인기여? 어째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서 교하에 보내 달라노? 더운 밥을 먹고 식은 걱정 말라!”
흥수는 상순을 밀어놓으면서 돌을 기어이 가져가려고 했다. 상순은 돌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흥수와 밀고 닥치고 했다.
이때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까지 다가와 상순을 말렸다.
그러자 상순은 그들과 인사한 후 저쪽에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아니, 칼산과 패룡산 돌을 새로 캘게지. 하필이면 다락밭 돌을 왜 허물어간단 말입니까?”
이계삼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었다.
“놔두오. 지금 무슨 세월이라고 그러오?”
허영주도 말렸다.
“놔두오? 지금 과수원이겠소? 새해 농사를 다 망쳐 먹으면서도 그 노릇을 하는데. 무슨 수가 있소? 시대 조류가 아니오? 누가 감히 거슬러 올라 간다오?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데.”
허백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상순이 잘 왔소. 저녁에 우리 다시 토론해보기오.”
이때 산비탈에서 종연이 헐금씨금 올라오고 있었다. 이계삼은 머리로 종연이 올라오는 쪽을 가리키자 허영주와 허백호가 스적스적 돌을 나르러 떠나들 갔다.
종연은 과수원에 올라오자마자 상순을 손가락질하며 빈정댔다.
“김상순, 당신 정말 싱거운 사람이오. 교하에 갔으면 그 곳 혁명이나 할 거지. 어째 불청객이 나타나서 남의 충성심을 어지럽히오? 당장 산 아래로 내려가오. 안 그러면 민병들을 부르겠소.”
흥수가 맞장구를 쳤다.
“황 주임 말이 맞아. 조금만 더 지랄 쓰면 민병들을 불러야제이. 치보주임이 부르지 못할 거 같아? 파출소 허소장이라도 불러오지 않는가 보라구.”
상순은 흥수와 종연을 손가락질하며 질책했다.
“교하로 이사해 가면서 자네들한테 우리 대대를 맡겼더니 이게 뭔가?”
상순은 침을 퉥 뱉더니 산비탈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바라보던 이계삼이랑 허영주랑 그제야 상순을 시름 놓고 돌을 날랐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 왔지만 아직도 날씨는 싸늘했다.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날아와 지붕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을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었다.
토끼꼬리만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먹장구름이 뒤덮인 동녘 하늘에 그래도 초생 달이라도 떠서 먹장구름 사이를 헤집고 지지리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려고 무등 애를 썼다. 두꺼운 먹장구름 떼들이 퍼져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순은 조개덕에 있는 둘째딸 은숙이 네 집에서 저녁을 들었다.
은숙은 보글보글 끓는 장국을 사발에 떠서 아버지 밥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많이 듭소. 이전에 이사갈 때 제가 뭐랍디까? 이사가지 말라는데도 기어이 가더니. 이제라도 이 딸의 말을 듣고 돌아옵소.”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오자 해도 집이 없구나.”
“먼저 우리 건너 사랑방에 구들을 놓고 있으십시오. 차차 집이 나지면 사고 듭지요.”
은숙은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받아들인 거로 여기고 뒤 말을 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덕돌이 부모가 없으면 친구를 잘 못 친해 나쁜 애로 변질하면 어쩝니까?”
상순은 돼지고기 점을 떠서 덕돌의 국그릇에 담아주면서 타일렀다.
“최우수노라고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라. 그리고 누나와 매형을 애 먹이지 말고 말을 잘 들어라. 철주랑 손버릇이 나쁘니까. 놀지 말라. 그런 애들과 놀면 나쁜 물이 묻을 수 있다.”
은숙도 타일렀다.
“넌 별나게 성욱이랑 놀지 않고 하필 철주와 노니?”
“성욱이가 내 공부를 잘하고 학습위원이 됐다고 질투하오. 내 나무를 꺾지 않았는데 선생한테 나무를 꺾었다고 물어먹었소.”
“뭐라고?”
은숙은 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덕돌은 성욱에게 물리어 학습위원에서 떨어진 일도 말할까 말까 하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 두었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매부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교하에 있는 엄마와 누나들은 펄쩍 뛸 게 아니겠는가?)
경만은 덕돌을 보고 말했다.
“이후에 누가 너를 때리거나 놀리면 내나 수봉한테 말해라. 내 놔두지 않겠다. 쓸데없이 시시한 철주랑 친해가지고 그러지 말아라.”
허나 덕돌은 외목에 날까봐 철주와 놀지 않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우사 회의실로 이계삼을 찾아갔다.
도중에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는데 누가 부삽으로 뭘 줏는 듯한 어두운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누구요?”
가까이 가서 보니 정규상이 초롱을 들고 돼지 똥을 부삽으로 주어 담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요? 동생은 대대 위생소에서 병을 보지 않고?”
“그렇게 됐소.”
정규상은 주위를 슬금슬금 둘러보더니 상순을 데리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 나직이 영발에게 밀리어 위생소에서 쫓겨나 돼지 똥을 줏게 된 경과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먼. 영발 서기는 뭐요? 반란파들에게 붙어 동생을 해치다니? 참.” 
정규상은 상순을 보고 귀속 말을 했다.
“놔두오. 괜히 그자들을 건드렸다가 형까지 고생하겠소. 형은 교하로 시원히 잘 떠나갔소. 보지 않으면 약이지.”
“내 어찌 동생이나 이계삼 서기랑 여기서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피해 있겠소?”
“그래 어쩔 예산이오?”
상순이 뭐라고 입을 떼려고 할 때었다.
저쪽에서 기침 소리가 나더니 어두운 그림자가 둘이 나타났다.
상순과 규상이 비술나무 뒤에 숨으면서 살펴보니 별로 허영주 서기 같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걸 보니 과연 허영주가 아니겠는가.
“허 현장!”
허영주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상순이 외치자 허영주는 “쉿-” 하고 식지를 입에 대더니 나직이 말했다.
“여기는 오래 말할 데가 아니오. 저기 가기요. 이 서기랑 기다리고 있소.”
“알았습니다.”
상순과 정규상은 허영주를 따라 마을 뒤로 해 조개덕 서북쪽으로 한 1리 떨어져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백양나무가 봄바람에 쏴- 쏴- 무섭게 을씨년스레 소리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른 풀이 한 키씩이나 자란 한족묘지꺼리는 꽤나 무시무시했다.
허영주가 다가가면서 손 벽을 짝짝 치자 저쪽에서도 손 벽을 짝짝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까마귀가 푸 닥닥 날아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시무시한 감이 더했다.
상순이네가 다가가자 묘지 쪽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상순이 왔소?”
이계삼이 먼저 다가와 상순의 손을 잡았다.
“이서기, 허서기, 반갑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허 소장이 아니오?”
상순은 제일 뒤에 나타난 허영호 소장을 보고 놀랐다.
“김 국장, 제가 노간부들을 제대로 보호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 언제 국장이오?”
상순은 허영호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이젠 우리 모두 허 소장의 신세를 져야 하겠소.”
인사를 마치자 허 백호 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문화대혁명’이라도 그렇지. 우린 이대로 노동개조나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순 없소. 저 반란파 두목 종연과 반란 파 개다리들과 생사결단을 내기요.”
그러자 이계삼이 말렸다.
“그래도 당을 믿소. 위대한 당은 꼭 영명한 결단을 내릴 것이오.”
허나 허백호 서기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이 대체 언제 오겠소? 내나 정규상 교수나 보오. 십여 년 전에 우파 모자를 썼는데 오늘도 그 상이 장상이오. 우린 일본 놈들과 국민당 놈들과도 목숨을 내걸고 싸웠소. 저 종연과 흥수만 없애치우면 누구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게요.”
허영주도 격분해 했다.
“우린 대갈로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놈들과도 태항산으로부터 싸우면서 동북에 진군했고 정성해 서기를 따라 연변에까지 나왔소. 그까짓 주먹깨나 쓰는 반란파 놈들이 뭐가 대단하오?”
허백호는 살기 띤 말을 이었다.
“난 이 묘지거리 저 백양나무에 목을 매 이미 죽은 사람이오. 상순이 구해준 목숨인데 이제 그까짓 반란 파들을 죽이고 죽으면 뭐라오?”
이계삼은 나직하지만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아무리 정치투쟁이 백열화해도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오. 일단 살인사건을 저지르기만 하면 공안국에 잡히고 말 거요. 정적은 정치투쟁으로 해결해야지. 왜 산전수전 다 겪은 노 간부들이 요만한 시련을 이기지 못하오? 내심하게 싸워야 하오.”
허백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이라도 만들어놓으면 다요.”
이계삼이 백호와 영주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
“안되오. 종연과 흥수를 병신을 만들어놓으면 지금 같은 ‘문화대혁명’ 바람에 또 두 번째 종연과 흥수, 박영발이 나타날 게요. 몇을 병신을 만들어야 이 놈의 세월이 끝나겠소?”
뒤이어 그는 상순을 돌아보더니 뒤 말을 이었다.
“상순이, 이사 갈 때도 우린 반대했소. 현실도피를 하지 말고 돌아오오. 숱한 노간부들을 버린 건 둘째고 우리 대대를 흥수와 종연에게 맡기는 바람에 이게 무슨 꼴이오?”
허영주도 말했다.
“옳소. 돌아오오. 우리 일치단결해 흥수와 종연을 꺾어버리잔 말이오.”
여러분의 말을 다 듣고 상순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간 노간부들을 두고 교하로 가서 죄송합니다. 저는 돌아와야겠습니다. 반란파들이 로간부들을 반란해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주먹이나 칼로써가 아니라 마레주의 모택동 사상이란 정치투쟁 무기를 들고 최대의 인내성으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여럿은 박수쳤다.
“좋소. 환영하오.”
이계삼은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영주도 상순을 끌어안았다.
허나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정규상이 근심했다.
“형님이 돌아오는 건 옳소. 그런데 혁명위원회와 치보 주임 자리를 차지한 종연과 흥수 형님을 받자 하겠소?”
그러자 상순은 주먹을 틀어쥐고 을러멨다.
“누가 내 앞길을 막는다오?”
“형님이 이사해 오려고 해도 그 놈 새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오겠소?”
그러자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 영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얘야, 네가 방법을 대봐라. 상순이 와야 우리가 발편잠을 잘 수 있다.”
한참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허 영호 소장이 자기 소견을 내놓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조개덕 생산대 사원대회를 열고 김 서기를 받겠는가를 투표해서 결정하게 합시다. 조개덕에는 종연 밖에 없습니다. 흥수는 함흥촌에 있지 않습니까? 조개덕생산대에서 결정하면 직접 파출소에 락호증을 가져오면 내 호구를 올려놓으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러나 허백호는 시름놓지 못했다.
“만약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어쩌니?”
허영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관대루야?”
허영주가 동을 달았다.
“옳소. 조개덕 생산대 광범한 사원들은 모두 상순동무를 환영할 거요. 지난해 종연과 흥수가 대대를 맡으면서 무슨 꼴이 됐소?”
허백호는 영호쪽으로 돌아서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얘야, 혹시 생산대에서 통과되지 않더라도 네가 손을 써라. 파출소에서 상순이네 호구를 조개덕에 붙여주면 다야.”
“정 안되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지.”
이튿날, 조개덕 우사에 있는 생산대 회의실에서 사원대회가 열렸다. 회의에는 당연히 종연과 흥수도 대대를 대표해 참가했다. 허영호 소장과 허영주, 이계삼, 허백호, 정규상 등이 모두 참가했다.
생산대 허송산 대장은 사원들이 다 모인 것을 보고 선포했다.
“이제부터 사원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대대 당지부 오랜  서기 김상순 동지 일가 이사문제를 토론하겠습니다.” 
종연은 벌떡 일어나 버럭 고함쳤다.
“안되오! 절대 안되오! 이사 갔으면 갔지. 왜 되돌아와? 어림도 없는 짓이오!”
흥수도 맞장구를 쳤다.
“안 되고말고. 아예 이사회의를 열지도 말아야 해. 생산대에 밭이 적어 죽물도 먹기 힘든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해간 사람을 받어? 식량이나 줄어들었지. 사원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잘 따져 보십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동원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김상순 서기를 받는 게 옳소. 김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 대대 과수원을 꾸리고 저 멍지메산 앞에 논밭을 여섯 헥타르나 더 풀었소. 저 장개골안과 천지꽃산 그 어느 밭인들 김 서기네 일가가 일군게 아니겠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로실히 말해 우리 함흥촌은 김 서기네 일가가 개척한 마을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오. 우리가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 이 곳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게 다 누구네 덕이오? 김 서기네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되오. 사람이 양심을 저버리고 배은망덕해서야 되오? 우리 마을은 김 서기 같이 대공무사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는 실농군 간부가 와서 영도해야 살 길이 있소.”
“뭐라고?”
종연은 허동원을 쏘아보면서 자기 귀를 의심했다.
“종연아, 네 말버릇을 조심해라. 이상들과 뭐야? 넌 혁명위원회 주임을 하면서 해놓은 일이 뭐냐? 과수원 다락밭에 쌓은 돌을 허물어 뭘 했니? 그 바람에 과수원에 수토유실이 심해 사과나무 뿌리가 다 드러났고 지난해 여름 폭풍우에 숱한 나무가 넘어지고 아무 것도 거둬들인 게 없다. 지난해 농사도 다 망태기로 돼버려 올해 사원들은 보리 고개를 넘기 어렵게 됐다. 상순 서기와 병완 서기가 우리를 이끌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 차려놓은 과수원이냐?”
“뭐라오? 감히 ‘모주석 만세’를 새긴 위대한 공적을 죄로 몰겠는가? 어째 반혁명 모자를 쓰고 싶소?”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을러멨다.
그때 허영호 소장이 나섰다.
“이치보, 괜히 죄 없는 사람에게 마구 모자를 씌우지 마오. 상급에서는 타격면을 좁히라고 했소. 쩍 하면 우파가 아니면 현행반혁명 모자를 씌워 타도하다나면 함흥대대에 혁명적인 빈농이 몇이 남겠소? 정 그따위로 놀면 파출소에서 당신 치보주임 자격을 취소해버리겠소.”
파출소 소장이 말하자 흥수는 찍 소리 하나 더 치지 못했다.
그러자 최국선이 나서서 흥수를 종연과 흥수를 손가락질하면서 공소하듯 말했다.
“너희들이 한 게 뭐냐? 내 온 일년 내내 뼈빠지게 일한 게 년말에 5전짜리 동전 세 개 밖에 타지 못했다. 내 그래 온 일년 가마니 한 장 짜서 판 것보다도 일을 못했단 말이냐?”
최국전은 지난해 연말에 탄 동전 세 개를 종연의 낯에 쥐어 뿌렸다.
그러자 국전의 동생 국천은 더 한심한 말을 했다.
“형님은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소. 난 빚을 120원이나 진 건 어찌 하오?”
그때 정규상이 나섰다.
“김서기 영도할 땐 그래도 이 마을에서 찰떡을 쳐 먹고 돼지고기도 놔눠 먹지 않았소?”
그러자 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옳소. 김 서기 돌아와야 하오.”라고 했다.
이쯤 되자 일이 뒤틀린 것을 알고 종연은 아예 자리를 훌 떠나 버렸다.
허나 흥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남아 있었다.
“사원대회에서 무기명투표를 하제이(하지).”
그는 일어나 말했다.
“모두들 담배 종이에 동의, 부동의를 써서 바치오. 한 사람이 한 장만 써내야 하오. 내가 직접 검표하겠소.”
모두들 담배쌈지에서 담배종이를 한 장씩 꺼내 써서 바치고 회의실을 나가 흥수와 허영호소장의 검표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 흥수가 두덜거리며 투표종이를 허공중에 활 뿌리치며 두덜거렸다.
“어쩜 이럴수 있단 말인가? 지주나 부농들이 반대하고는 누구도 막아 나서지 않다니?”
허소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조개덕생산대와 함흥대대 민심의 반영이오.”
흥수의 형 학수도 끼어들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상순을 받는 수밖에 있어? 괜히 원수를 맺지 말고 낙호증이나 떼줘라.”
성수도 형 흥수를 나무랐다.
“상순은 항미원조 전쟁때도 형님을 몇 번이나 구했소? 형님은 잊었소? 압록강을 건널 때 미군 전투기가 소사할 때도 상순이 밀치며 엎드리게 하지 않았으면 살아 남을 수 있소? 남조선 충청도 한산면에 산등성이에서 육박전을 할 때도 상순이 공병삽으로 미군 흑인을 찍지 않았더라면 왼팔을 상한 형님이 살아남았겠소? 상순은 왼팔까지 날창에 찔리면서 널 구해줬는데 구명은인한테 배은망덕해서야 쓰나?”
그러나 흥수는 “흥!" 하고 회의실을 떠나갔다.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와 정규상 등은 모두 상순한테 다가와 악수를 나누면서 기뻐했다.
사원들도 이구동성으로 환영했다.
“잘 됐소. 김 서기 온다니 살 길이 나졌소.”
“어서 옵소. 김 서기.”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사원들은 상순과 웃음꽃을 피웠다.
허동원은 상순의 두 손을 잡고 흔들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김 서기 돌아오면 우리 생산대 정치대장을 합소. 내 계속 생산대장을 하면서 손잡고 사원들이 잘 살게 합시다.”
“감사하오. 나를 받아주어서 고맙소.”
그날 사원대회는 기실 상순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희의나 다름없었다. 사원들은 진짜 우국우민의 충정을 지닌 상순과 같은 대공 무사한 농촌간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순이 노간부들과 사원들에게 휩싸여 회의실을 나섰을 때는 밝은 보름달이 구중천에 두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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