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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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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8)
2018년 07월 08일 13시 24분  조회:1392  추천:1  작성자: 김장혁







                      5. 방화범의 말로

       바싹 마른 황금 벼 낟가리가 우사 지붕을 넘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우사 마당에 있는 탈곡장에서는 사원들이 연합탈곡기로 탈곡을 하느라고 웃고 떠들며 개미 채 바퀴 돌듯 맴돌아 치고 있었다.
     상순은 벽돌로 토성 안에 높다란 대대 사무실 청사를 덩실하게 지어놓고 빨간 기와까지 얹어 놓았다. 마을 어디서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사무실청사 지붕이 다 바라보이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벽돌공장을 차린 첫해에 대대 사무실대청 외에도 생활이 가난한 장팔래, 왕정해 등 몇몇 사원들의 벽돌기와집도 지어주었다.
사원들은 탈곡장에서 일하면서 모두 상순에게 엄지손가락을 대둘렀다.
“김 대장 덕분에 우리 새 벽돌집에서 살게 됐네.”
장팔래가 벼단을 낟가리 무지에 올리며 하는 말에 왕정해도 벼 단을 무지고 나서 그 높은 낟가리 위에서 허리를 펴더니 엄지를 내둘렀다.
“김 대머리(大脑袋)는 머리가 아주 좋아. 그 대머리에서 별의별 기발한 생각이 다 나온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장팔래는 혀를 끌끌 찼다.
“우리 대에서 김 대머리를 내놓고 누가 벽돌공장을 세울 생각이나 했겠소?”
“글쎄 말이오.”
왕정해도 벼 단을 척척 무지면서 동을 달았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소.” 
그들은 벼 낟가리를 가리면서 자연히 종연이나 흥수를 의논하다가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종연이랑 부대에 갔다가 와서 세상일을 다 아는 상 하잖고 뭐요?"
"그 새끼들이 우리 대대에 해놓은 게 뭐야?”
“어째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혁명을 잘하지 않았는가?”
“입방아나 찧었지. 뭘 해놓은 게 있어? 흥!”
“그래도 이번에 입당했다잖는가?”
“그게 바로 우리 대대 정치야!”
“삐뚤렁정치라고나 해라!”
“김 대머린들 어쩌겠는가? 이계삼이나 허영주 두 사람만 믿어서야 되겠소? 영발과 윤희가 앞다퉈 시내로 돌아가려고 종연을 입당시키려고 기암을 쓰는 데야.”
“글쎄 말이야. 종연은 그래도 김 대머리에게 아첨하느라고 덕돌이 고중에 붙을 때 손을 들어줬다더라.”
“제 따위 감히 김 대머리를 모르고서야 이 함흥대대에 발이나 붙이겠어? 남들은 부대에 가서 8달이면 입당한다던데 한뉘 입당은커녕, 흥!”
왕정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종연은 원래 간에가 붙고 슬개에 가 붙는 새끼야. 이런 일도 있다네. 종연이랑 승연이랑 숭길이랑 룡정에서 깡패들한테 마을까지 쫓기어 왔잖고 뭔가. 숭길과 승연은 황급히 종연이네 김치움에 숨었지. 황종연은 깡패들이 당장 집마당에 쳐들어게 되자 미처 김치움에 뛰어들지 못하고 집에 달아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지. 한무리 깡패들은 집문을 부시고 종연을 개패듯했지.
깡패들은 숭길과 승연이 어데 있는가 족따졌지.
그러자 종연은 자기 맞지 않으려고 제꺽 김치움에 있다고 물어먹었다오.”
“제 동생도 김치움에 있는데.”
“제 살려고 동생쯤 물어먹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서 숭길과 승연은 김치움에서 끌려나와 깡패들한테 물매를 맞았지.”
“에이, 항일전쟁 때 같으면 한간이나 조간이나 해먹을 놈이구만. 쯧쯧쯧. 퉤!”
“황승연도 똑 같은 물건짝이야. 깡패들한테 두들겨맞아대자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왕정해는 낟가리를 가리다가 벼단을 쥔채 물었다.
“어쨌기에?”
“다 종연과 숭길이 시켜서 한 일이지. 자기와 상관없다고 했다네.”
“허허허. 형제간이 다 사람 물어먹는 미친개구만.”
이때 병진이가 벼 단을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탈곡장에 들어섰다.
“이 새끼는 항상 뿌리 든든한 황소만 골라 쓴다니까.”
그 말에 병진은 소 수레를 멈춰 세우고 바 줄로 소수레 위의 벼 단들을 걸어 쥐어 당겼다. 그러자 벼 단들이 낟가리 쪽으로 후루루 무너졌다.
“내사 소 싸움에 이름 있지 않는가?”
병진의 말에 장팔래가 배를 끌어안고 비웃어댔다.
“허허허. 그래, 너야 말로 황소싸움에 집을 팔아 황소 값을 물고 허망 우리 한족 대에 나앉지 않았니?”
그러자 왕정해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아니, 저기 김 대머리가 네게도 벽돌집을 지어줄지.”
병진은 소 수레 위의 벼 단을 훌훌 쥐어 내리뿌리며 두덜거렸다.
“누가 생산대 소를 싸움시켜 뿔을 빼놓은 놈한테 벽돌집을 사준다더니?”
병진은 계속 두덜거렸다.
“철주마저 고중에 붙지 못했지. 더러운 팔자야. 우리 철주 저 김 대머리네 덕돌을 얼마나 쫓아다녔소? 그를 도와 싸움질은 또 얼마나 했소? 덕돌을 따라다닌 애들은 다 붙고 우리 철주만 병신 같은 새끼 혼자 붙지 못했단 말이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 등을 깬다고. 쳇!”
이때 상순이 이쪽 벼 짚무지 쪽으로 벼 짚을 산더미처럼 둘러메고 스적스적 다가왔다.
“병진이, 헛소리 작작 치고 빨리 벼 단이나 실어 들여! 저거, 저거! 소들이 또 싸워 뿌리 빠지겠어!”
병진은 허리를 굽혀 바를 주섬주섬 주어 수레에 훌 뿌리고 나서 상순의 독기어린 세 귀 눈을 흘끔 곁눈질했다.
“이라!”
그는 고삐로 소 궁둥이를 탁 치며 수레를 몰고 꼬리빳빳해 탈곡장을 빠져나갔다.
저쪽에 가서 병진은 소 수레에 올라앉더니 상순 쪽을 돌아보며 누르스름한 개털 모자를 꾹 눌러 썼다.
“이라! 저 놈을 보기 싫어서. 원!”
병진은 두덜거리며 소 수레에서 목이 긴 술병을 들어 꿀떡꿀떡 몇 모금 마시더니 애꿎은 소 궁둥이를 고삐로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놀란 황소는 대가리를 마구 흔들며 네 굽을 안고 소 수레를 끌고 덜커덩덜커덩 뛰어갔다.
상순은 가을이 다가오자 벽돌 굽기를 그만 두고 사원들을 데리고 탈곡에 나섰던 것이다. 사원들은 벼 풍작을 거둔 것은 상순이 냉상모판을 잘 관리한데다가 논물까지 잘 보았고 사원들을 잘 이끌어 벼농사를 알뜰히 지은데 있다고 혀끝을 끌끌 찼다. 그 덕분에 올해부터는 이밥을 배불리 먹게 됐다고 했다. 하긴 이전에는 생산대장이 사원들을 잘 틀어쥐지 못한데다가 전체 사원의 절반도 넘는 지주와 부농들까지 심술을 부린데다 논물을 볼 줄 몰라 해마다 아까운 논에서 벼를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했다. 여름에 논을 내다보면 벼보다도 검은 돌피 이삭이 더 많아 도대체 벼 밭 인지 돌피 밭인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허나 상순이 이 생산대로 온 다음부터 지주와 부농들이 찍 소리 한마디 치지 못하고 상순이 말하는 대로 둥글소들처럼 논에 나가 기음을 매고 또 맺던 것이다. 하여 논밭에서 돌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던 것이다. 사원들도 올해부터 새 벽돌집에 들어 배불리 먹으면서 잘 살게 됐다고 사기나 일손들을 다그쳤다.
그런데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고 야밤삼경에 탈곡장 벼 낟가리에 삼단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사원들은 탈곡을 하다가 벼 낟가리로 달려갔다.
“빨리 물을 퍼 치오!”
상순은 가래 짝을 놓고 우사로 달려 들어가며 고함쳤다.
그는 물 초롱에 물을 꼴딱 담아 들고 불길이 치솟는 벼 낟가리 쪽으로 선참으로 뛰어 갔다.
 “불이야! 불이야!”
 병진이 개털 모자를 벗어쥔 채이 불 붙는 벼낟가리 쪽에서 고함치고 있었다.
“빨리 물을 쳐라!”
병진은 상순을 보자 허리를 굽혀 굽석거리며 거수경례까지 척 했다.
“김 대머리! 아니, 존경하는 김 대장!”
상순의 날카로운 세귀눈길이 이상하게 번쩍이자 그는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사원들은 집에 달려가 물을 담은 대야며 초롱이며 들고 달려와 불이 붙는 낟가리에 물을 퍼 쳤다. 허나 바싹 마른 벼 낟가리 하나는 세차게 불어치는 겨울바람에 삽시간에 잿더미로 돼버렸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흥수와 이계삼, 종연, 허영주, 박영발, 윤희까지 대대 간부들이 몽땅 뛰어와 불을 껐다.
허영주는 사원들에게 “불이 붙지 않은 낟가리에도 물을 쳐 보호하라!” 하고 연신 고함쳤다.
한족사원들은 몸에 물을 퍼치고 성한 벼 낟가리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게 몸으로 막을 각오까지 하면서 물을 치고 또 쳤다. 둬 식경이나 사원들이 물을 퍼 쳐서야 불길은 점점 죽어갔다. 허나 한족 사원들이 한 해 동안 애나게 일해 수확한 벼낟가리 하나는 몽땅 타버렸다. 사원들과 후에 다행히 다른 낟가리에는 불이 옮겨 붙지 못했다.
“어느 놈이 낟가리에 불을 질렀는가?”
“붙잡기만 하면 껍질을 싹 벗겨놓겠다.”
탈곡장에는 아직도 재무지로 된 낟가리에서 삼단 같은 김이 물물 피어오르고 땅바닥에는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물 같은 물은 겨울의 맵짠 바람에 인차 살얼음이 지더니 인차 얼어붙었다.
탈곡장 사처에 사원들의 마사진 대야며 초롱이며 장갑이며 지어 모자까지 널려있었다. 불이 붙은 잿더미 옆에서 병진은 물을 맞아 폭 젖은 개털 모자를 주어들고 희죽이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절망에 빠진 소리가 들렸다.
장팔래는 왕정해와 마주 서서 “온 낮 가린 낟가리가 단번에 재무지로 됐구먼.”하고 실망했다.
왕정해는 “헤이, 올해는 배불리 먹겠다 했더니 쫄딱 망했어.”라고 맥이 빠진 소리를 하며 무릎을 꺾고 울상을 지었다.
“올해 또 어떻게 쌀 고생을 하겠소?”
사원들이 맥없이 물앉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서 두덜거렸다.
상순은 흥수를 조용히 불러 나직이 말했다.
“빨리 전화로 파출소 허소장에게 사건 신고를 하오. 빨리!”
“금방 여기 오기 전에 전화를 치려고 하니 통하지 않소. 어느 놈이 대대 전화선을 끊어 놓지 않았겠소.”
“이건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란 말이오! 안 되겠소.”
상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정해! 장팔래!” 하고 불렀다.
“어째?”
왕정해가 사람들 속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상순은 “너희 둘이 빨리 마구간에서 말을 타고 파출소에 가서 사건 신고를 해라!” 하고 분부했다.
왕정해는 뒤를 돌아보며 “장팔래는 집에 갔소. 내 혼자 어떻게 가오?” 하고 늦장을 부렸다.
“야! 고양이한테 불알이 떨어질까 봐 혼자 못 가니? 어서 빨리 가라!”
왕정해는 내키지 않았지만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상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이윽고 말의 호용소리에 뒤이어 말 발굽소리가 다급히 떨꺼덕떨꺼덕 멀어져갔다.
상순은 종연과 흥수와 함께 사건현지를 돌면서 수상한 단서를 찾으려고 살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동녘이 희붐히 밝아올 무렵에 찌프가 조개덕에 달려와 아츠런 제동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민병들을 데리고 탈곡장 주위를 돌며 보초 서던 상순이 찌프 소리와 인기척소리에 찌프 쪽으로 다가갔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만나자 화재정황을 물으면서 탈곡장 화재발생지 주위부터 돌아보았다.
상순은 “고의 방화혐의가 크오. 꼭 흉수를 붙잡아 징벌해야 하오.”라고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회의실에 들어가 조용히 수사방안을 의논했다.
허영호 소장은 “먼저 의심스러운 지주와 부농부터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 하나하나 조사해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상순은 대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옳소. 화재발생시간은 어제 그러니까 11월 23일 밤 12시 좀 넘어서요. 애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 별로 소조회의를 열고 사람마다 어제 뭘 했는가를 말하고 증명인을 대라고 하면 좋을 것 같소.”
허영호 소장도 한참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좋은 거 같습니다. 먼저 그물을 널리 쳐 고기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중점혐의대상이 생기면 어제 뭘 했는가를 서면으로 쓰게 하고 증명 인을 써넣으라고 합시다.”
이때 흥수가 소문을 듣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달려왔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순에게 외까풀 눈을 흘겼다.
“김 대장이 어떻게 경각성을 늦췄으면 탈곡장에 불이 다 달렸겠소? 그래도 계급투쟁을 하지 않고 되겠소? 벽돌만 구워내더니 보오. 무슨 쓸데 있소? 한해 농사를 다 태워버리지 않았소?”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를 바라보며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허영호 소장은 “지금 흉수를 나포해야지 여기서 서로 옥신각신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때 바깥에서 찌프가 급정거하는 아츠런 소리가 들리더니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찌프에서는 뜻밖에도 김용만 국장이 공안국 수사일꾼들을 데리고 내렸다.
그는 틀스레 거들먹거리면서 재무지로 된 낟가리자리를 여기저기 휘둘러보았다. 그는 회의실에서 마중 나온 허영호 소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무지와 얼음 강판이 돼버린 탈곡장 쪽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벼 짚 재무지에서는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용만 국장은 거들먹거리며 땅바닥에 널린 양철초롱을 툭 걷어차면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허 소장, 이게 뭐요? 어째 허 소장 관할 구역에서 연속 악성사건이 생기오?”
허영호 소장은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숙이고 꾹 참고 듣기만 했다.
이때 황종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참 오래간만이오.”
“오? 그래?”
용만은 종연을 와락 끌어안고 잔등을 툭툭 치며 문안했다.
“머리가 요즘 어때?”
종연은 이젠 붕대도 다 풀었던 것이다.
“붓긴 얼굴도 내리고 머리도 괜찮소. 그러나 저러나 우리 마을에 또 화재 나 큰일이오.”
종연과 용만은 부대 전우였다. 그들은 특별병종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힘깨나 쓰고 날랜 싸움꾼들이었다. 제대한 후에 용만은 대학에 추천받아 갔고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반란 파 조직을 무었고 사회에서 주먹깨나 쓴다하는 종연이랑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노 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할빈에서 온 반란파 두목 이씨 가명을 단 모원신의 통역이자 신변호위 무사를 맡고 개다리행사를 하면서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그는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을 바싹 따라야만 벼슬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호랑이 꼬리는 꽉 잡고 놓지 말아야 살아.”
그는 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지만 반란파 두목 이 씨의 거천으로 “문화대혁명” 후기에 일약 공안국 국장자리까지 빼앗아 했다.
종연은 제대한 후 진수해 근방에서 소문난 주먹깨나 휘두르는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허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동풍”을 타고 용만을 등에 업고 진수해지역의 반란파 두목으로 됐다. 야심이 큰 종연은 용만을 “형님, 형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농촌에서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이나 하며 고생하는 자기를 봐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투덜거렸다.
용만은 앞에서 설설 기는 종연과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허영호 소장을 번갈아보면서 계속 훈계했다.
“함흥대대 말이 아니오! 전번에는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돌멩이로 머리를 까는 반혁명사건이 생기더니 이번에 탈곡장에 불을 싸지르다니! 대대 간부들이 뭘 했소? 계급투쟁을 얼마나 잘 했으면 이렇소?! 쯧쯧쯧!”
종연은 뒤에 서있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흘금 돌아보더니 용만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 좋은 소리를 했다.
“워낙 이 조개덕 1대는 지주와 부농이 많은데다가 조개덕 2대에는 이른바 우파와 현행반혁명, 노 간부들이 많아서 정황이 꽤나 복잡합니다. 전번에도 허백호, 그 늙다리 우파 놈이 원한을 품고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깠소!”
“생산대 대장은 누구야?”
종연은 돌아서 상순을 가리켰다.
“이분입니다. 김 대장, 공안국 김용만 국장입니다.”
상순이 앞으로 나가면서 인사했다.
김용만은 상순의 날이 서게 우뚝 솟은 코와 예지가 번쩍이는 부리부리한 세 귀 눈을 보면서 대충 인사했다.
“아, 김 대장 말은 족히 들어 왔습니다. 공안국 국장 출신이라면서? 뭐 하고 밥을 먹었습니까? 항미원조땐 사단 비서과장까지 했다는 양반이 어째 미연에 이런 사건을 방지하지 못했습니까? 방화범을 붙잡을 좋은 방도는 생각해봤습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용만의 말에 상순은 뒤로 떨어져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용만은 아예 종연과 물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소?”
종연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전부터 사람마다 그날 일정을 얘기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적발하기로 했소.”
용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건 누가 내놓은 방안이오?” 하고 물었다.
종연은 상순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우리 대대 간부들이 내놓은 방법이오.”라고 하며 두터운 혀로 입귀를 슬쩍 핥았다.
“좋소. 털끝만한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회보해라.”
“양, 양.”
이때 허영호 소장은 재무지 북쪽에서 목이 긴 술병을 하나 주어들고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여기에 무슨 라이터가!”
잘깍 켜보니 라이터에 불이 달렸다.
수사 일군들은 인차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특별히 크고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를 쥐어 찌프에 있는 상자에 담았다.
허 소장은 “저게 중요한 단서로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김용만에게 말했다.
그러자 용만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이상인 허 소장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버릇없이 말하며 도리머리를 말대가리처럼 흔들었다.
이젠 허 소장도 늙었소. 그깟 병과 이 화재가 무슨 관계있단 말이오? 신경이 너무 예민하오. 예민해. 허 소장은 지금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문제를 보는 게 아니라 술병을 들고 흉수를 잡으려 한단 말이오. 주책 있소? 말도 늙으면 달리지 못하는 법이오.” 
“간부는 진수해파출소 소장도 젊은 간부로 시켜야 하겠소. 간부 연소화는 도리가 있단 말이오. 제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직시켜야 하오.”
그때 상순이 한발 나서면서 말했다.
“허 소장은 한창 경험을 쌓고 일을 잘 할 때오.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러오?”
그러자 김용만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영감이,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를 작작 하란 말이오.”
상순은 굽어들지 않았다.
“사람을 성가시게 굴지 말고 방화범이나 잡소.”
용만이 억이 막혀 입을 짝 벌리고 쩝쩝 다시는데 저쪽에서 병진이랑 왕정해랑 장팔래랑 숱한 사원들이 구경하러 이쪽으로 다가와 그만뒀다.
허 소장은 병진이 여기 저기 기웃거리자 그의 일거일동을 쓸어보았다. 왼 손을 검정 천으로 싸매고 있었다.
왕정해는 그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왕정해가 상순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구들머리에 걸터앉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병진의 거동이 의심스럽소.”
“뭐요?”
상순은 담배를 말다가 다가앉았다.
왕정해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탈곡장에 불이난 후 병진은 우사에 와서 내가 잣던 펌프를 마구 빼앗아 잣지 않겠소. 마구 잣다가 펌프 자루가 훌 빠지니 자기 왼손가락을 마구 쐐기자리에 넣고 잣지 않겠소. 그러다가 ‘아이구! 손가락이 덴 걸 모르고 아파 죽겠다.”고 하더구먼. 손가락을 빼낸 걸 보니 껍질이 짓 이개졌더구먼. 낮에 소 수레 벼 단을 부릴 때에는 근본 손을 데지 않았고 손을 싸매지도 않았소.”
상순은 성냥을 득 그어 담배를 붙이더니“그런데 뭐가 의심스럽소?” 하고 묻고 나서 계속 왕정해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술을 먹은 거 같더구먼. 거동이 정상이 아니었소.”
“낮에 술을 마신 거 같지 않던데.”
왕정해는 무릎을 탁 쳤다.
“병진은 소 수레에 술병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뭐요? 어제 오전에도 김 대장에게 욕을 먹고 탈곡장을 나갈 때 수레에서 술병을 꺼내 꿀떡꿀떡 마셨소.”
순간 상순은 공안국 수사 일꾼들이 재무지 옆에서 허 소장이 주은 목이 긴 술병을 주어간 일을 떠올리게 됐다.
“술병이 어떻게 생긴 겐지 알만 하오?”
왕정해는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하다가 “특별히 목이 긴 거 같았소. 일반 병보다는 뿔룩한 게 컸소.”라고 했다.
상순은 병진에게 점점 의심이 갔다.
탈곡장에서 오래 동안 철주가 학교에 붙지 못했고 소싸움을 시켜 빚을 가득 걸머지고 허망 나앉았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상순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왕정해를 보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요새 병진을 잘 감시하오. 병진의 소 수레에 아직도 목이 긴 술병과 라이터가 있는가 슬그머니 살펴보오.”라고 부탁했다.
“알았소.”
상순은 우사 회의실에 허영호 소장을 찾아갔다. 회의실에는 수사 일꾼들 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용만은 종연이가 집에서 닭을 잡고 청해 술을 마시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
“병진이가 소싸움을 시켜 배상하다나니 집도 없이 조개덕 1대에 허망 나앉은 일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르지 않았겠소?”
상순은 병진의 의심스러운 점을 일일이 제기했다.
“아침에 허 소장이 타버린 낟가리 뒤에서 주은 술병은 병진이 항상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마시던 술병과 비슷하오.”
“예?”
허영호 소장은 숱한 종이 장들을 하나하나 뒤번지더니 병진의 자술을 찾아내 상순과 함께 읽어 보았다.

나는 불이 난 12월 14일에 아침부터 우후까지 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저녁에는 앞마을 계수동에 가서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잤다.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
이병진.
1974년 12월 15일

상순은 병진의 자술서를 서너 번 읽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한곳을 똑똑 쳤다.
“병진은 확실히 의심스럽소. 누가 의심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난 이번 탈곡장 낟가리에 불을 단 일이 근본 없다.’고 쓴 거 보오."
     허영호 소장은 "정말, 도적이 제 발등이 저리다고." 하고 말하면서 자술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이게 바로 여기에 황금 300냥이 없다는 거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허허허.”
상순은 허 소장을 보고 "혹시 다른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소?" 하고 물었다.
허영호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혹시 이번엔 하향한 노간부들이나 지주와 부농들 쪽에 문제는 없겠습니까?”
상순은 뒤로 물러앉으면서 심중하게 한참이나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노간부들이 무슨 그런 불장난을 했겠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현장처럼 총칼을 들고 일제와 국민당과 싸워온 노간부들인데. 지주와 부농들 속에서는 충국을 좀 조사해봐야겠소.”
수사 일꾼들은 계급성분이 복잡한 이 마을에 와서 노서기 김상순 대장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상순이 나가 충국을 조사해보니 전날 저녁에 충국은 조개덕에 있는 단간 집이 내굴어서 우사 회의실에 와서 우사에서 일하는 상순의 둘째사위 경만과 양아들 수봉과 함께 잤던 것이다. 사위와 양아들을 찾아가 조사하고 대조해보아도 충국의 말과 똑 같았고 소변보러 밤중에 한번 피뜩 나갔다 들어온 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지주와 부농들도 수사 일꾼들이 일일이 조사해보아도 별로 수상한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상순은 이튿날 아침에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 임시로 들어있는 허영호 소장과 수사 일꾼들과 함께 아침상을 마주하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진이가 수상하오.”
“나도 병진이란 자가 제일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영호는 상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 “병진은 표현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장국을 한술 떠서 후후 불어 꿀떡 넘기더니 말했다.
“병진은 일제의 개다리, 반역자 이화영의 맏아들이오. 허 소장이 영월구에 있을 때 일이오. 이전에 병진의 애비 이화영이 역사반혁명분자로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을 때오. 병진은 팔소매 안에 비수를 치워가지고 나가 제 애비를 찔러 죽인 무지막지한 호로 자식이오.”
“예?”
수사 일꾼들은 그 말에 모두 숟가락을 든 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 자가 실로 어지간히 독한 자가 아니구먼.”
“어쩜 자기 아버지를 비수로 찔러 죽인단 말이오.”
상순은 뒤 말을 이었다.
“당장에서 죽은 건 아니지만 비수에 찔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흘 만에 죽었소. 당시 어째 죽였는가 하니까. 자기 아버지가 투쟁을 받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반역자인데 어서 죽으라고 찔렀다고 하지 않겠소?"
“개보다도 못한 놈 새끼!”
허영호 소장은 아주 격분해 했다.
“그자가 방화범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김용만 국장과 말하고 즉시 불러다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상순도 “좋소. 그렇게 하기요.”라고 했다.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종연이네 집으로 김용만을 찾아 갔다.

그런데 그들도 진작 밥을 다 먹고 새로 지은 덩그런 대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허영호가 다가가 수사방향을 말하자 김용만 국장은 이럴 때는 군인답게 과단하게 말했다.
“즉시 병진을 불러다 심문하오. 난 황주임과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함께 진수해로 내려가야겠소.”
저쪽에서 거만하게 뒤지개를 짚고 대대 위생소에 들어가고 있는 종연은 술을 마셨는지 퉁퉁한 낯이 귀밑까지 벌겋다 못해 홍당무 같았다.
그는 윤희와 송선을 보고 지껄여 댔다.
“아무리 소장으로 가도 그렇지. 어떻게 요 미녀들이 아까워 가겠니? 야, 이 좋은 침대는 어쩌고? 으흐흐, 허허허.”
그 말에 송선은 “아니, 황 주임이 어디 소장으로 갑니까?” 하고 물었다.
윤희도 적이 놀랐다.
“제가 시내로 돌아가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이 함흥대대에서, 아니, 진수해 공사에서 내 말이면 다오. 허허허. 이제 내 파출소 소장으로 가면 내 말만 잘 듣소. 시내로 돌아가는 일은 근심도 하지 마오.”
윤희와 송선은 마주 보며 웃었다.
이윽고 종연도 대대 사무실로 나오고 이흥수도 도착했다.
바깥에서 떠들썩하더니 병진이가 민병들과 함께 대대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쨌다고 나를 이러오? 난 불을 단 적이 없단 말이오?”
병진이 행악질하는 것을 보고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서로 눈길을 맞췄다.
종연과 용만은 병진을 심문하는 일보다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한지 바깥으로 나가더니 찌프에 앉아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떠나가 버렸다.
허영호 소장은 한참이나 병진을 무섭게 쏘아보더니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도 왼손에 천을 감고 있었다.
“어째 손은 감고 있는가?”
병진은 손을 움츠려 뜨리면서 “그날 저녁에 불을 끄다가 뎄소.” 하고 대답했다.
“불을 끄는데 먼데서 물을 쳤겠는데 어떻게 손을 델 수 있는가?”
허영호 소장은 병진의 가까이에 다가가더니 손을 싸맨 천을 풀어내 들고 봤다. 물퉁이 친 손등이 벌겋게 부은 채 진물이 줄줄 흐르고 식지는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이 손가락은 어떻게 돼 이렇소?”
병진은 아무 고려도 없이 대답했다.
“그날 펌프를 잣다가 핀이 나가 손가락을 넣고 자았소."
뒤이어 그는 "내 펌프를 자았으니 불을 껐지 물이 없어 불을 끄기나 했겠소?” 하고 자기 공을 내세웠다.
허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면서 호통 쳤다.
“병진이! 어째 여기 불러왔는지 아는가!”
심지가 굳은 병진은 미리 사상준비를 한 듯이 태연자약하게 앉아 허 소장을 치켜보았다.
“그래 내가 불을 질렀단 말입니까?”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그날 저녁에 뭘 했는가?”
병진은 줄줄 주어 댔다.
“그날 온 하루 뼈 빠지게 벼 싣기를 하고 저녁에 계수동에 가서 친구 동원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잤습니다. 난 불을 단 적이 근본 없습니다.”
상순이 옆에서 한마디 물었다.
“동원이네 집에서 나올 때 몇 시였소?”
“아즈바이, 지금 날 의심하오?”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병진은 좀 생각하는 거 같더니 인차 “그때 한 11시 반일 거요.”라고 대답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한마디도 거짓말이 없이 대답해야 하오. 우리 계수동의 동원과 조사하면 몇 시에 돌아온 게 빤하니까.”
“난 거짓말 하지 않았소.”
“좋소. 11시 반부터 12시까지 뭘 했소?”
“술을 먹고 집에 와서 잤지 뭐 했겠소”
“집에서 뭘 했소?”
“잤다는데. 왜 이러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자기 한 짓을 모르오?”
“난 불을 지르지 않았소.”
“지금 묻지도 않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건 뭐요?”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거 말하는 거요. 야, 내 정말 정신병에 걸리겠다. 그만 하면 안 되오?”
상순은 그간 조사한 정황에 근거해 따지고 들었다.
“네 옆집 왕정해는 네가 12시 넘어 집에 오지도 않았다는 거 알고 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할 작정이냐? 생각해 봐라. 너는 근본 집에 가지도 않고 불이 붙은 화재현장에서 헛소리를 치면서 개털 모자를 주어가지고 우사 펌프를 자았다. 네가 집에서 잤다는 게 거짓말 아닌가? 넌 근본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화재현장에 있었다. 그래도 떼질 쓸 테냐?”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리한 비수로 돼 허위와 거짓말로 감싼 병진의 추악한 몸뚱이를 하나하나 발가벗겨버리었다.
허영호 소장은 사무상을 꽝 치며 고함쳤다.
“노실하게 탄백하라!”
“내 불을 질렀다고 이럽니까?”
“이게 누구 건가?!”
허영호 소장은 목이 긴 술병을 사무 상 위에 꽝 올려놓았다.
술병을 본 병진의 낯은 대번에 새까맣게 질렸다. 그는 버릇처럼 시꺼먼 눈썹아래 우멍 눈을 껌벅이며 번개같이 속궁리를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술병을 모르오?”
한참 후에야 제 정신이 들었던지 병진은 “그 술병과 무슨 관계있소?”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누구 술병인가?”
“내 거요.”
“네 술병이 왜 불에 탄 낟가리 북쪽에 있는가?”
“건, 건.”
병진은 꺽꺽거리다가 “어제 벼를 부리고 떨어뜨린 거 같습니다.” 하고 둘러댔다.
허 소장은 “우리 사원들은 네가 벼를 부린 후 술을 마시고 가는 걸 다 본 사람이 있다. 그래도 계속 거짓말을 해?” 하고 말하며 병진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며 고함쳤다.
“우린 증거를 다 장악했다. 노실하게 말해라! 네 라이터는 어쨌니?”
병진은 호주머니를 들추는 체 하다가 “아야, 내 라이터를 어쨌니?” 하고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은 병진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다가 콱 밀어놓았다.
“네가 불을 질렀지?”
병진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아니, 이거 생사람을 잡겠소.” 하고 억울한 척 했다.
“이건 뭐냐?”
이때 허 소장은 라이터를 사무 상에 내놓았다.
병진은 “그 라이터 어디서?” 하고 빼앗으려고 허 소장한테 달려들었다.
“이 놈, 노실하게 탄백해라.”
“난 불을 단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병진은 죽을상을 지으면서 최후발악하며 탄백을 거부했다. 그야말로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물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자충 우돌 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상이었다.
이때 허영호 소장은 사무 상을 꽝 치면서 “어째 네 죄행을 다 말해야 승인하겠는가?” 라고 고함쳤다.
병진은 그저 “난 불을 지른 적이 없소. 생사람을 잡지 마오.” 이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네가 손이 덴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
상순의 묻는 말에 병진은 흘끔 쳐다보며 “불을 끄다가 뎄소.”라고 대답했다.
“거짓말!”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너 이놈 새끼! 넌 불이 달린 낟가리에 가서 고함질이나 쳤지 근본 불 가까이에 가서 불을 끈 적이 없다. 어떻게 손을 데우니?”
허 소장도 책상을 꽝 쳤다.
“너 이놈! 노실하게 탄백하지 못 하겠는가? 네 손은 어데서 덴 후 상한 거다. 말해! 손은 어데서 뎄는가? 네 라이터는 어째 벼 낟가리 옆에 떨궜어?”
“또 한 가지 있다. 네 모자는 어째 불붙은 낟가리 옆에 있어?”
“불을 끄다가 떨어뜨렸지. 뭐. 어쨌다고 자꾸 이러오? 난 불을 단적이 없소. 없어!”
병진은 비수에 심장을 찔려 피를 줄줄 흘리는 야수처럼 되고서도 한사코 불을 단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병진은 평소에 사내노라고 큰소리를 꽝꽝 쳤지만 이쯤 되자 걸상에 물앉아 도적고양이처럼 허 소장과 상순을 흘금거리면서 다리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나중에 허영호 소장은 “자기 죄행을 낱낱이 교대하고 발편잠을 자라!” 하고 엄히 꾸짖었다.
뒤이어 허영호 소장은 병진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상순이네 윗방에 가둬 넣고 계속 심문하기로 했다. 허영호 소장과 상순은 혹시나 해 기타 지주들과 부농들의 정황도 조사했다. 그런데 충국이랑 근본 의심할 데가 없었다. 온 여름 집에 비가 새 대부분 시간 우사 회의실에 와서 잔 충국은 그날도 초저녁 팀으로 탈곡하고는 회의실에서 불이 달리기전에 자는 것을 사원들이 드문드문 쉬러 들어왔다가 보았다고 했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함께 상순이네 집 바깥에 나가 새 정황을 말했다.
“김 국장, 전번에 허백호 형님이 말하던데 그날 종연은 묘지꺼리까지 송선을 쫓아가 겁탈하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백호 형님이 종연을 돌멩이로 깠답디다.”
“그럼 송선을 겁탈하려는 형사범죄자를 돌로 깠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황차 종연은 죽지도 않고 그날로 정신을 차렸고 사흘 만에 공사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상순의 말에 허 소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백호 서기가 내 형이라고 김용만이 생사람을 잡는 겁니다. 공안국에서도 형사수사에 이름 있는 강운룡 과장을 교통대대에 쫓아버렸답니다. 기실 이번 방화사건도 강운룡 과장이면 진작 해명했을 겁니다.”
상순은 사촌동서가 그렇게 된데 마음이 아팠다.
“방화사건이 해명된 거나 같소. 병진이 지른 게 분명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편 병진은 허영호 소장의 수사방안대로 상순이네 집 위방에 있으면서 수사일꾼들과 함께 성숙과 명옥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하루 10여 시간 씩 심문을 받았다.
날마다 수사 일꾼들이 윤번으로 똑 같은 심문을 했다. 그것이 짜증나 병진은 이젠 밥도 별로 먹지 않고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병진은 숟가락을 놓자마자 뒤가 마려웠던지 구들 끝에 나가 앉아 신을 신었다.
그러다가 피끗 부엌 쪽으로 해 놓인 땔나무 패는 도끼가 눈에 뜨였다. 그는 도끼를 보는 순간 생사결판을 내고 도망치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수사 일꾼들은 바깥에 나가고 없었다. 부엌에서 명옥과 성숙이가 설거지를 하고 벽 밑에서 상순이가 솜옷을 껴입고 있었다.
(이때 손을 쓰지 못하면 감옥에 가거나 총살 받을 거다.)
병진은 불시에 도끼를 쥐어들고 돌아섰다.
“이놈 새끼!”
순간 어느 결에 덮쳐든 상순의 무쇠주먹이 병진의 면상을 떵 쳤다. 병진이 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상순에게 도끼를 쥔 팔이 뒤로 탈려 버렸다.
“사람 살려라!”
명옥이 소리치자 문이 벌컥 열리며 허영호 소장이랑 뛰어 들어왔다.
“꼼짝 말어!”
허영호 소장이 권총을 병진에게 들이댔다. 병진은 몸부림을 치다가 그만두었다. 수사 일꾼들은 병진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이 새끼 도끼를 들고 찍으려고 하지 않겠소.”
병진은 이를 악물며 고함쳤다.
“네 놈들을 다 찍어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 상순이, 네 놈은 내 소싸움을 시켜 소뿔을 뺐다고 한족 대에 쫓아내 빚 구렁에 처넣었다. 난 허망에 나앉았기에 아까울 게 없다. 네놈들에게 원수를 갚지 못한 게 원통할 뿐이다!”
“네 놈이 불을 달았지?”
상순은 병진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병진은 하늘땅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네 놈들의 집까지 다 불 지르지 못한 게 한이다.”
“탄백해라. 어떻게 불을 질렀는가?”
병진은 상순과 허영호 소장을 쏘아보며 버럭버럭 고함쳤다.
“난 두려울 게 없다. 내가 불을 질렀다. 난 그날 계수동에서 술을 마시고 11시 반에 집 울안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에 탈곡장에 밝힌 전등불을 보는 순간 소싸움을 시킨 바람에 소 값을 무느라고 집을 팔고도 모자라 빚을 가득지고 한족 생산 대에 쫓겨 온 게 괘씸하더라. 그래서 낟가리에 불을 콱 지르고 싶더라. 사원들이 먹을 쌀이 없게 만들어서 상순의 위신을 납작하게 만들자고 그랬다. 그래서 항상 쥐고 다니던 술병을 가지고 탈곡장에 가서 제일 서북풍이 센 서북쪽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다 말했다. 죽이고프면 죽여라!”
허영호 소장은 수사 일꾼들을 잘 기록하게 하고 병진을 계속 심문했다.
“불을 지른 경과를 상세히 말해라. 낟가리에 술을 치고 불을 달았지?”
병진은 구들에 펄렁 물앉더니 자랑삼아 대답했다.
“낟가리에 불이 잘 붙으라고 벼 짚 단을 몇 단 빼낸 후 술을 치고 불을 질렀다. 불이 통쾌하게 확 달리더라.”
“손에도 술이 묻은 채 불이 달려 뎄지?”
“잘 아는구나. 술병에도 불이 확 달려 손이 뎄다. 그래 불이 붙은 술병을 낟가리 밑에 떨군 채 달아났다.”
상순은 성난 사자처럼 병진을 쏘아보며 따졌다.
"라이터도 그래서 낟가리 밑에 떨어뜨렸지?”  

“그렇다. 공안국 국장을 했다더니 공밥은 먹지 않았구나. 라이터에도 술이 묻었는지 불이 확 달려 그만 떨어뜨리고 달아났다.”
병진은 어린 애처럼 마구 발버둥질을 치며 대성통곡 쳤다.
“네놈들의 집을 몽땅 불 지르고 죽여치우지 못하고 잡힌 게 한이다. 이 개새끼들아!”
그는 쇠고랑을 채운 두 손을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진짜 방화범의 몰골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화재사건이 발생해 일주일 만에 사건이 다 해명된 뒤에야 김용만과 황종연이 돌아왔다.
김용만은 황종연이 사건을 해명했다고 상급에 거짓 보고를 하고 허영호 소장을 철직시킨다고 했다. 이유라면 허영호 소장의 관할구역에서 연속 살인, 상해, 방화 사건이 발생했지만 제때에 해명하지 못했고 이젠 늙어서 제대로 소장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방화범 이병진은 공개심판에서 유기징역 10년에 언도돼 감옥으로 압송됐다.
김용만 국장은 방화범을 나포한 허영호 소장을 철직하고 대신 황종연을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상순이나 허영호나 수사 일군들과 사원들까지 모두 그 인사변동에 삶은 소대가리 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라고 뒷공론을 했다.

             6. 주먹세계

      개일듯 말듯 하던 하늘이 조금 개이는 것 같더니 또다시 먹장구름이 뒤덮쳐 왔다. 거무칙칙한 하늘이 둥근 천정처럼 가없이 넓은 들을 칭칭 둘러 감아 숨 막히고 코막 힐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덕돌의 근심어린 마음이 내려앉은 듯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게 퍼렇게 덩덩한 구름들이 겹겹이 내려 앉았다. 먹장구름덩이들은 해가 대지를 비출 수 없게 심술을 부리는듯이 만물상을 지었다. 어떤 먹장구름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대가리 같고 어떤 구름은 때론 불상에 뛰어올라 천정을 쳐다보며 이를 잡아먹는 잰나비 같았다. 어떤 구름은 뭉쳤다가도 변화무쌍하게 흐트러지며 요술이나 피우는 상 싶었다.
먹장구름의 심술과 요술,롱간에 숨 막힐 듯한 대지의 만물은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을 볼 수 없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 골짜기의 과수원 상공에서 난데없는 매지구름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감때사나운 바람에 먹장 같은 떼구름이 사납게 몰려왔다.
우르릉 꽝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소낙비가 새까만 구름이 고패를 치듯 하며 덮쳐왔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마자 밤송이 같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그만 비바람과 함께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나 시피 먹장구름이 쏟아져 내리는 듯이 진창에 소낙비가 창창 들어박혔다.
덕돌은 패용천산 동굴 속에 숨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언제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개이고 맑은 하늘아래 따뜻한 날이 오겠는가고 바랐다. 허나 당장 하늘이 개일 것 같지도 않았다.
패용천산 남쪽 산비탈의 이 동굴은 십여 년 전에 군부대에서 전쟁준비로 파놓은 군용 갱도였다. 이전에 덕돌은 애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이 갱도 안에 들어가 횃불을 들고 끝까지 나가 본적이 있었다. 갱도가 남쪽 양지바른 벼랑으로부터 서쪽 과수원 쪽까지 통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덕돌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바깥에서 헤매다가 소낙비를 피해 이 갱도로 와서 숨었던 것이다.
사실 덕돌은 고중입학을 위해 여학생들이 자기에게 투표하게 동원하라고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써서 부친 일이 탄로 났던 것이다. 그것도 덕돌이 믿고 친하던 철주와 동림에게 그 쪽지를 썼기에 여자애들이 다 투표해 고중에 입학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가 그 일을 성욱과 상선에게 말하는 바람에 성욱이 새로 온 담임교원 황승연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공사 기업에 갔다가 형 황종연의 덕분에 학교에 되돌아온 황승연이 또다시 덕돌이네 학급에 와서 담임교원을 맡았던 것이다. 황승연은 공사 기업에서 일해봤자 승급도 하지 못하자 학교에서 놀면서 애들의 왕이나 되는 게 나을 거 같아 되돌아왔던 것이다.
황승연은 덕돌에게 선입견이 있었는바 덕돌은 노 간부 상순의 아들이기에 미워 했지만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에 폭 물들어 공부만 잘하지만 사상이 나쁜 애라고 더욱 미워했던 것이다.
“나쁜 놈 새끼, 내 계속 이 학교에 있었더라면 고중에 가기나 했겠어? 흥! 하도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동창생인 경산이랑 성환이랑 도왔으니 그렇지. 거기다 6촌형 철봉까지 발을 벗고 나서는 판에 빈농 대표 흥순들 혼자 막을 수 있었겠는가! 손오공이 아무리 날래도 여래불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이제 내 손에 들었으니 혼나 봐라!”
승연이 속을 끙끙 앓으면서 벼르는데 때마침 덕돌이 순희와 은숙에게 쪽지를 썼다고 하지 않겠는가!
“흥! 잘 걸려들었다. 못된 송아지 궁둥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너 이전에 나를 풍자하는 7언 율시까지 쓰더니 이번에 어디 두고 보자. 우리 학교에서 공부나 하는가?”
그는 학교 장동원 서기한테 말하면 괜히 또 덕돌의 편을 설 것 같아 먼저 은숙을 불러 사건을 확인했다.
은숙은 선생님의 앞인지라 얼굴이 대뜸 홍당무가 됐다.
승연은 은숙을 슬슬 구슬렸다.
“괜찮아. 은숙아, 네 잘못은 없다. 덕돌이 그 못된 새끼 잘 못이지. 어찌 학생으로서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니?”
“연애편지 아닙니다. 그저 서로 학습을 도우면서 이담 대학에 가자는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네 그 편지 있니?”
“그거 해 뭐 합니까?”
은숙은 외까풀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득의양양해 하는 황승연의 날카로운 낯을 올려다 보았다.
“너한테 관계없다. 덕돌이 쓴 그 편지를 내 보자. 뭐라고 썼는가?”
허나 은숙도 이젠 열일곱 살이나 되는 애여서 하라는 대로 할 소녀애가 아니었다.
“그 편지를 애들이 보면 나까지 놀려댈 게 아닙니까?”
“내 말릴게. 누가 감히 너를 놀리겠니?”
“덕돌이 놀림을 당해도 그렇지.”
은숙은 눈물이 글썽해 황승연을 쳐다보면서 통사정을 들이댔다.
“황 선생님, 제발 이 일을 없는 일로 덮어 감춰 주십시오. 예?”
그러자 황승연은 음충한 눈길로 귀밑까지 발갛게 물든 은숙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슬슬 어루만지면서 빈정거렸다.
“내가 담임교원인 이상 넌 근심하지 마라. 덕돌을 교육해 사람으로 만들자고 그런다. 이담 다신 여자애들과 집적거리지 못하게 말이다. 이게 바로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모주석의 교시를 학습 활용하는 거야.”
은숙은 자기 얼굴에서 벌레가 기는 것 같아 몸을 옹송그리면서도 황승연의 손을 감히 쳐버리지 못했다.
황승연도 너무 한 거 같았던지 은숙의 얼굴에서 손을 떼면서 “그 편지만 가져오라. 그 편지 있니?” 하고 물었다.
은숙은 덕돌의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황승연의 말에 얼리어 깊은 고려도 없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 건사했을 겁니다.”라고 대답해버렸다.
“네 엄마 그거 건사해둬 뭐한다니?”
은숙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는 편지를 두었다가 이제 다시 덕돌이 나를 지껄이면 그 편지를 꺼내 혼 내주겠다고 건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일 얼른 그 편지를 찾아 가져 오너라. 내 덕돌을 혼 내주마.”
“덕돌을 놔두십시오. 서로 학습을 잘하자고 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럽니까?”
“넌 모른다. 학생들이 연애를 해선 안 돼.”
“…”
그리하여 이튿날 은숙은 어머니와 말하고 그 편지를 가져다 황승연에게 바쳤다.
황승연은 덕돌의 큰 꼬리나 밟은 듯이 성욱이랑 상선이랑 응철이랑한테 이른바 연애편지를 돌려가면서 구경시켰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온 학급 애들에게 덕돌이 연애편지를 은숙에게 썼다고 소문이 쫙 펴졌다.
화는 눈썹 끝에서 떨어진다더니 이런 맑은 하늘의 생벼락이 또 어디 있겠는가?
덕돌이 교실에 들어갔을 때었다. 은숙이랑 순희랑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바깥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남자애들은 “연애대장이 왔다!” 하고 고함쳤다.
덕돌은 무슨 감투 끈인 지도 모르고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책상에 죽은 물고기 몇 마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 분필로 “덕돌아, 너와 은숙의 결혼잔치 부조다.”라고 써놓았다.
머리를 들고 앞을 보니 흑판에도 여자애 손을 잡은 남자애를 그려놓고 “난 은숙을 사랑한다. 우린 이 담 대학에 간 후 잔치해 잘 살자!”라고 써놓지 않았겠는가!
“누가 그랬니?”
덕돌이 묻자 여기저기서 “연애대장!” 하고 고함쳤다.
성욱이랑 응철이랑 깨고소해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니? 나서라!”
덕돌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치자 응철이 책상에 앉아 깨 그루에 앉은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내 그랬다. 연애대장!”
덕돌은 분이 치밀어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으로 응철을 한 대 갈겼다. 응철은 허리를 슬쩍 틀어 피하면서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돌과 응철은 땅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굴렀다.
그때 구경하는 숱한 애들 속에서 성욱이 발로 덕돌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상선이랑 설복이랑 일광이랑 달려들어 덕돌에게 물매를 안겼다. 그때 장영웅이랑 동림이랑 광철이랑 나서서 말려서야 덕돌은 다 터진 얼굴을 들고 겨우 일어났다.
덕돌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책상에 가서 가방을 메고 쩔룩거리면서 교실을 나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개새끼들아!”
상학종이 울렸다.
황승연은 교실에서 나가는 덕돌을 문어귀에서 딱 마주쳤다.
“어디로 가?!”
"..."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 하니 가버렸다.
그런데 고중에 붙지 못한 철주랑 숱한 애들이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와 벽에 죽 붙어 서서 야단쳤다.
“저런 연애대장을 다 고중에 붙이면서 왜 우릴 붙이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덕돌을 퇴학시키고 우리를 고중에 입학시키십시오.”
철주랑 소리쳤다.
황승연은 코피를 흘리며 운동장으로 가버리는 덕돌을 보고 고소해 했다.
한참 후 황승연은 덕돌을 따라와 불러 세웠다.
“네가 학생이 할 짓을 했니? 연애편지를 쓰다니? 넌 퇴학시켜야 해.”
덕돌은 허리 아파 나무에 기대서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난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그래 학습을 서로 돕자고 한 게 무슨 잘 못입니까?”
황승연은 날이 선 콧마루 위 우멍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고함쳤다.
“너 아직도 승인하지 않겐?! 이 놈아, 꼴찌 같은 새끼, 죄꼬만 게 누구한테 연애편지를 써? 그 바람에 은숙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울고 있다.”
황승연은 덕돌의 귀쌈을 쨕 갈겼다.
덕돌은 눈앞이 캄캄해나며 숱한 별찌가 맴돌았다.
“어째 칩니까? 선생이면 학생을 마음대로 때려도 됩니까?”
덕돌은 얼얼해나는 볼을 매만지면서 대들었다.
“야, 이 놈 새끼, 아무리 사생이 ‘한 전호속의 전우’라지만 네 감히 선생한테 대들 테냐?”
덕돌의 눈에는 황승연이 선생이라기보다 편싸움을 하는 싸움 군 같아 보였다.
“더 들을 말도 없습니다.”
덕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면서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점심에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순은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덮어놓고 덕돌을 마구 때리며 쫓아다녔다. 성질이 괴벽한 상순은 낫을 마구 쥐어뿌리며 쫓아다녔다.
덕돌은 집에서 쫓겨난 후 여기저기 숨어 다니다가 배고프면 밤에 자기 집 가지 밭에 가만 가만 가서 가지를 뜯어먹고 추우면 가만히 집 뒤울안으로 해 고방에 들어가 가만히 잤다. 아버지가 겁나 어떤 때에는 교실의 창문 유리를 뜯어내고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책상 위에서 자군 했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어 집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머나먼 패용천산 갱도에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배고프면 마을 앞의 자기 집 가지 밭에 내려가서 가지나 오이를 뜯어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래었다. 그는 아무리 배고파도 과수원에 주렁주렁 달린 배 하나 마을의 남의 가지를 하나도 훔쳐 먹지 않았다.
(에이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니? 아예 자살해 버리자.)
덕돌은 달리는 기차 앞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진수해 역으로 갔다.
허연 연기와 김을 물물 내뿜으며 칙칙 폭폭 달리는 열차 대가리를 보는 순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덕돌은 열린 대합실 창문으로 뛰어나가 달리는 열차를 향해 뛰어갔다.
“서라!”
그때 역 직원이 고함치며 쫓아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았다.
“놓으십시오!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덕돌은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여러 직원들이 덕돌의 허리를 끌어안고 팔을 뒤로 비틀어 역 파출소로 끌어갔다.
경찰까지 와서 덕돌을 보고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왜 자살하려고 하니?”
“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연애편지를 쓰지 않았는데도 연애편지를 썼다고 놀려주는 거 어쩝니까?”
경찰은 인차 진수해파출소에 전화로 알렸다.
이윽고 찌프가 달려와 역 파출소 마당에 와서 멈춰 섰다.
찌프에서 허영호와 황종연이 내렸다.
그들은 역파출소에 들어오자 대뜸 덕돌을 알아보고 “네가 어째 여기 왔니?” 하고 놀라했다.
역 파출소 경찰은 “얘를 아오? 얘가 자살하려고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려는 거 겨우 붙잡았소.”라고 했다.
황종연은 허영호를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경찰에게 “얘는 우리 진수해 공사 함흥 대대 노 서기의 아들이오. 꽤나 말썽을 일으키는구먼.” 하고 말하면서 덕돌을 돌아보았다.
“어째 자살하려고 했니?”
덕돌은 왕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경찰들은 흑흑 흐느끼는 덕돌에게서 억울한 하소연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 서기가 어떻게 기른 외동아들인데 자살해서야 되니? 구체정황은 대개 알만한데 사내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리를 꿋꿋이 펴고 떳떳이 살아야 한다. 알만하니?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어째 이를 악물고 살 결심이 없느냐?”
허영호 소장의 말에 덕돌은 머리를 점차 들었다.
(그래, 옳다. 내가 자살하면 누가 좋아하니? 성욱이랑 응철이랑 내가 연애편지를 썼다고 두고두고 놀릴 게 아닌가? 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귀신이 될 게 아닌가?)
순간 덕돌은 벌떡 일어나 “저를 집에 보내주십시오. 다신 머절싸하게 자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허영호는 “그래, 그래야지. 어서 집으로 가라.”라고 했다.
그때 황종연이 덕돌의 앞을 막아 나섰다.
“안 되오. 우리 파출소 소장은 내지. 당신이오? 걔를 마음대로 돌려보낼 순 없소. 우리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잘 알아봐야겠소.”
“뭘 말이오?”
종연은 소장 틀을 차리면서 제까진 멋있는 추리를 해댔다.
“얘 말만 듣고 내보내 되오? 자살하려고 할 때엔 꼭 무슨 죄를 지었을 수 있소. 그간 집에서 쫓겨나 바깥에서 뭘 먹고 살았단 말이오? 꼭 뭘 훔쳐 먹었을 수도 있잖소?”
덕돌은 너무 억이 막혀 종연을 쏘아보면서 울분을 토했다.
“어째 생사람을 잡으렵니까? 내 언제 훔쳐 먹었습니까? 난 배고프면 우리 집 가지 밭에 가서 가지를 뜯어 먹으면서 이제껏 살았습니다.”
“걸 어떻게 믿니? 네 집 가지 밭이 얼마 크면 네가 가지를 뜯어먹으면서 열흘이나 넘게 살았단 말이냐? 남의 가지랑 훔쳐 먹었지?”
“어떤 때엔 우리 엄마 가만히 옥수수떡을 가져다주어서 먹고 살았소.”
“보오. 아무 문제도 없소. 얘는 김 서기를 닮아서 거짓말을 할 얘가 아니오.”
그제야 황종연도 죄 없는 덕돌을 어찌는 수 없어 내보냈다.
허영호는 비칠거리는 덕돌이 또 자살이라도 할까봐 근심돼 쫓아나가 데리고 진수해 시내에 하나 밖에 없는 대중식당에 대리고가서 한때 사 먹였다.
그는 이밥을 넋을 잃고 먹는 덕돌을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얼마나 굶었으면 이밥 두 사발이나 먹고서도 두부 국 한 사발을 게 눈 감추듯 할까?)
“덕돌아, 날 알만하지?”
덕돌은 국물을 들어 쭉 마시고 나서 입귀를 쓱 닦으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는 40대 중반인 허영호가 자기를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것이 고마워 연신 인사했다.
허영호는 덕돌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난 진수해파출소 허영호라고 한다. 네 아버지는 이전에 영월구 공안국 국장이었다. 그때 나를 경찰로 뽑아줬다.”
“예? 우리 아버지가 공안국 국장이었습니까?”
덕돌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그때 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생할 때 김 국장은 항상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자기 호주머니를 들춰 어려운 생활에 보태라고 주었지. 네 아버지가 나를 공안국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파출소 소장을 하기는커녕 영월구에서 소 궁둥이나 쳤을 거야.”
“예~”
덕돌은 이제야 자기를 잘 대해주는 원인을 알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미더운 눈길로 허영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다. 황승연이나 저 파출소 소장 황종연은 네 아버지와 썩 좋지 않은 사이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허영호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예. 알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허영호는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진수해를 벗어나 해동다리까지 덕돌을 바래다 주면서 여러 가지로 타일러 주었다.
허영호와 갈라진 덕돌은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기한테 낫을 마구 쥐어뿌리던 아버지 부릅뜬 세 귀 눈이 떠올라 주춤 멈춰 섰다.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까?)
중도에서 덕돌은 오도 가도 못하고 길 한판에서 서성거렸다.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패랑산 갱도로 갈까? 아니야. 이젠 조꼬만 가지나 오이도 다 뜯어먹어 사흘 안엔 먹을 게 없다. 그렇다고 남의 거 뜯어 먹을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해 덕돌은 가보지 못한 둘째외삼촌 집을 떠올렸다.
(거기서 며칠 묵으면서 보자.)
덕돌은 진수해 영화관 근처에 있는 둘째외삼촌 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집에 들어선 덕돌을 보고 둘째외삼촌 근룡이나 삼촌댁도 놀라했다.
“네가 어떻게 돼 왔니?”
“놀러 왔소.”
근룡은 키 넘게 큰 덕돌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옛날 자기 애기때 어머니가 젖이 없어 먹지 못해 고생할 때 덕돌의 어머니가 자기를 업고 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여 살렸고 염소를 길러 염소젖을 먹여 키웠다는 말을 했다. 삼촌댁은 덕돌을 먹이려고 없는 쌀독을 빡빡 긁어 찰밥을 해먹이었다.
덕돌은 고중입학준비를 한창 하는 한 살 지하 외사촌여동생 최정옥과 초중입학을 준비하는 외사촌남동생 최연길의 공부랑 배워주면서 사흘은 잘 놀았다.
허나 외삼촌 집에 계속 눌러 앉아 있는 것도 쌀이 귀한 세월에 말이 눈치 보여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근룡은 “얘, 어쩌다 놀러 왔다가 더 놀아라.”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겠소.”라고 하며 기어이 일어나 떠나갔다.
뒤에서 정옥은 “지금 어디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그래? 농촌 학교에서야 농사일을 더 시키겠지 뭐? 더 놀면서 내 공부나 배워 줄 게지.”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그들의 호의를 가슴에 담은 채 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좁은 골목길을 벗어났다.
“이젠 어디로 가야지.”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외할머니네 집이었다. 작은 외삼촌 근삼은 덕돌보다 열한 살 이상이었는데 둘째누나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는 금방 결혼해 여섯 살 난 딸애 순애를 키우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허나 외할머니네 집 앞으로 가면서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쌀 고생을 모질게 하는 세월이여서 피뜩 보니 외할머니네 바람벽에 쌀 절약공약서가 나붙어 있었다. 둘째외삼촌댁에게서 들어서 알았는데 외할머니는 바람벽에 붙인 그 절약공약서에 “손님은 하루에 양표 한 근 두 냥에 5전을 내고 가라.”고 조목조목 써넣었다고 했다. 또 화룡의 맏아들 근형의 맏아들 만길이 어쩌다 놀러 가도 양표와 돈을 내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외할머니가 꾸중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덕돌은 발길을 돌렸다. 이때 뒤에서 문을 열며 누가 뭐라고 말하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덕돌은 혹시 외할머니께 들킬세라 황급히 발걸음을 재우쳐 그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럼 어디로 간다? 영월구에 간 큰고모네도 계속 진수해에 있었더라면 며칠 묵을 수 있겠는데.)
진수해 골목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방황하던 덕돌은 광석의 둘째고모네 집으로 갈까 궁리해보았다.
(아니야. 거기 가도 며칠 있겠니? 아예 이 걸음으로 교하 누나네 집으로 달아나자. 누나야 날 몇 달이고 있어라 할 게 아닌가?)
무릎을 탁 치고 난 덕돌은 다시 진수해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속으로 태산 같은 근심이 발걸음을 무겁게만 했다.
(동전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교하까지 간단 말인가? 4원 50전이나 하는 차표를 사야 가지. 정 안되면 도적차를 타고 가지. 화물차에 숨어 갈까.)
마음을 다잡자 덕돌은 골목에서 큰길로 나와 역으로 빨리 걸어갔다.
“어디로 가니? 덕돌아!”
이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덕돌이 몸을 홱 돌려 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 누나 성숙이가 아니겠는가? 덕돌은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다.
“야, 서라! 누나 어쩌니? 집으로 가자.”
덕돌은 겁을 집어먹고 우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네 살 위인 성숙과 물었다.
“아버지한테 잡히면 죽겠는데.”
“아버지 너를 데려 오라고 했다. 때리지 않겠다고 하더라.”
“정말?”
노기 띤 아버지 무서운 세 귀 눈이 떠올라 덕돌은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이다! 아버지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 알고 데려오라고 했다.”
그제야 덕돌은 성숙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윽고 덕돌은 성숙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겁이 나서 가만히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상순은 덕돌이 무서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까봐 자리를 우정 피해주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서야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윗방에 누워 자는 척 하는 덕돌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덕돌이 아버지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옥수수떡을 먹을 때 상순은 자기 그릇의 옥수수떡을 하나 집어 주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사내란 큰일을 하자면 여자애들을 멀리 해야 한다. 알만하니?”
“아니, 난 고중에 갈 때 여자애들을 투표하라고 편지를 썼지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 무슨? 원, 억울해 죽겠습니다.”
덕돌이 일어나자고 하자 붙들며 아버지는 계속 타일렀다.
“네가 연애했다는 게 아니다. 이후에 어쨌든 여자애들과 주의해라는 말이다. 봐라. 말로 그저 투표해달라고 하면 될 걸 편지를 쓸게 뭐야? 네가 연애편지를 쓴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곤혹을 겪니? 방법이 틀렸단 말이다. 이후엔 뭘 하나 주관동기와 방법을 잘 고려해야 한다. 알만하지?”
그 말에 덕돌은 뭔가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거다. 그거. 왜 하필 좋은 입을 두고 편지를 썼을까? 남에게 이상하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억울하게 놀림을 당하게.)
“이젠 성욱과 싸우지 말라. 걘 네 9촌 조카 아니냐? 옛날부터 팔촌이 한 구들이라고 성욱의 아버지 증조부와 네 증조부는 친형제간이야.”
“글쎄 난 친척이라고 그 애 공부도 배워주고 수학콩쿠르에서랑 시험지를 보여주면서 도와주었건만 내 학습위원을 한다고 질투해 처처에서 물어먹는단 말입니다. 그 새끼 내 나무를 꺾지 않은 것도 꺾었다고 선생한테 고발했습니다. 이번엔 내 연애편지를 쓴 게 아닌데도 선생한테 고발하고 애들한테 소문을 편 바람에 내 학교에 머리를 들고 가지 못합니다. 애들이 나를 어떻게 놀려주는지 알고 아버지는 그럽니까?”
순간 덕돌은 너무 억울해 옥수수떡을 먹지도 못하고 “엉엉.” 통곡 쳤다.
그제야 상순은 먼 손자 벌 되는 성욱이가 너무 했다는 것을 알고 더 말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
덕돌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교실에 들어갈 일이 머리기 곤두설 지경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교실에 들어가도 어디 공부 하니? 학교라는 게 전탕 농사일만 시키면서. 놀림을 당하자고 학교로 다녀? 안 가!”
덕돌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었다.
“권투를 배워 나를 놀리던 새끼들을 몽땅 때려눕히고 다시 학교에 가자!”
덕돌은 아버지 눈길이 무서워 학교로 가는 척 하다가 아버지 엄마 그리고 누나 은자와 성숙이가 모두 밭으로 나간 후에 슬쩍 집으로 돌아와 들어 누워 교과서를 보면서 그간 뒤쳐진 공부를 했다. 지어 집식구들에게 들킬 까봐 철봉형님과 경산 선생이 준 “림해설원”이나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은 두툼한 소설책을 가지고 패용천산 양지바른 절벽 위에 올라가 나무 그늘 밑에서 읽었다.
그는 소설책을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재미났다.
그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속의 리규나 로지심 같이 무예가 출중한 무사가 돼 자기를 놀리는 애들을 때려눕힐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내 힘으로는 안 되겠고. 누굴 시켜 때린다?)
궁리 끝에 그는 조개덕의 소학교 때 한족친구들을 내세워 설복이랑 성욱이랑 때리기로 마음먹었다.
덕돌은 장옥이랑 조신지, 장선이랑 친하자고 그물로 잡은 물고기랑 집에 좀 남기고는 다 퍼다 주었다. 지어 한번은 대여섯 근이나 되는 잉어를 잡자마자 장옥이네 집에 가져다주었다. 장옥은 장팔래의 둘째아들이었다. 원래 장팔래와 상순은 아주 친하게 지냈기에 장옥도 덕돌과 인차 친해졌다.
그러자 장옥은 “덕돌아, 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새 벽돌집을 지어줬다. 너와 난 세세대대로 제일 가까운 친구야. 만약 어떤 새끼든 너를 건드리기만 하면 말해라. 이 형님이 죽여치우겠다.”라고 하며 주먹을 내휘둘렀다.
그때라고 생각한 덕돌은 장옥에게 한 마을의 친척인 성욱을 치면 또 아버지께 말을 들을 거 같아 가만 놔주고 계수동의 설복이랑 괘씸하게 굴던 일을 말했다.
“당장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이었다. 진수해중학교에 다니는 그는 그날 학교에 가지도 않고 인차 조신지랑 장선이랑 장화랑 한족 애들을 일여덟 불러가지고 함흥중학교로 뛰어갔다.
휴식시간에 교실에 뛰어든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가 감히 덕돌을 놀리는 거냐?! 어디 죽어봐라!”
몇 개 대대에서 손꼽히는 싸움꾼 장옥을 보는 순간 애들은 모두 목을 움츠리더니 서로 눈치 보며 뒤 구석으로 비실비실 피했다.
그때 덕돌이 쓱 나서며 설복을 손가락질 하며 고함쳤다.
“저 새끼 쳐라!”
“이 새끼야!”
장옥은 씽 덮쳐가 키가 훤칠한 설복을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쳤다. 숱한 한족 애들이 우르르 덮쳐가 설복을 땅바닥에 쳐 눕히고 물매를 안겼다. 덕돌은 설복의 멱살을 쥐어 일으켜 보기 좋게 골받이를 딱딱 해댔다. 설복은 코피가 터져 낯이 쥐마당이 됐다.
덕돌은 숱한 애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우줄거리며 고함쳤다.
“이후에 누가 나를 놀리기만 해봐라! 대갈통을 까버릴 테다!”
은숙은 여자애 같던 덕돌이 사납게 변한 데 놀라 바깥으로 달아났다. 순희도 나무라는 눈길로 덕돌을 흘겨보며 뒤따라 나가버렸다.
설복은 그래도 기가 시들지 않아 죽는 소리를 쳤다.
“일광아, 성욱아, 뭐 하니?”
덕돌은 일광을 걷어찼다.
“이 새끼도 때려라!”
덕돌의 소리치자 한족 애들은 일광마저 반주검이 되게 때렸다. 애들은 무서워 손을 쓰기는커녕 맞을 까봐 겁을 집어먹고 교실에서 와 소리치며 달아났다.
그때 황승연이 뛰어왔다.
“이게 뭐야? 한족 애들을 시켜 우리 학급 애들을 치다니?”
“치면 어째? 몽땅 때려죽이겠다!”
장옥이랑은 황승연마저 때리자고 덤벼들었다.
그때 덕돌이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섰다.
“선생은 놔둬라.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교실은 장마당이 돼버렸고 온 학교가 공포에 떨었다.
덕돌은 속이 시원해 온 하루 장옥과 함께 진수해 대중식당에 가서 술까지 마시고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절칵
전등불이 켜지더니 아버지가 일어나 앉으며 노한 눈길로 덕돌을 쏘아보며 세 귀 눈을 흘겼다.
“너 학교에 간 첫날부터 싸움질이냐? 숱한 애들이 네가 보낸 한족 애들에게 맞아댄 보복을 하자고 우리 집에 찾아와 사랑방까지 온 집안을 다 뒤번지고 갔다.”
“뭐라고? 누가 감히 왔단 말이오?”
덕돌은 밸을 쓰면서 윗방에 들어갔다.
허나 상순은 이전과는 달리 덕돌을 마구 욕하지 않고 문을 열고 윗방에 들어와 앉더니 차근차근 타일렀다.
“얘야, 복수심을 버려라. 저 병진을 봐라. 이전에 소싸움을 시켜 생산대 소뿔을 뺐다가 그때 돈으로 900원을 배상했다. 병진이 집까지 다 팔아 소 값을 물고 한족 대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 승치를 하려고 생산 대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갔다. 사람이 복수심이 강하면 남을 해치고 자기마저 해치게 된다. 남과 단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를 헐뜯고 해치던 애들과도 단결해야 한다.”
허나 덕돌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나를 죽이자고 드는 애들을 놔두란 말입니까? 난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놈새끼들이 다신 나를 놀리지 못하게 몽땅 혼 줄을 내주겠습니다.”
“에이유, 언제 철이 들겠니? 사람이 어찌 힘으로 세상을 개조하려고 하니? 힘이 센 게 왕이 된다면 황소가 왕이 되지? 네가 하나 쳐 눕히면 셋을 쳐 눕히는 싸움꾼이 너를 찾는다. 어쨌든 숱한 애들이 널 때리려고 찾아다니니까 주의해라.”
덕돌은 일어나려는 아버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졸라댔다.
“아버지, 허영호라는 경찰이 말하던데 아버진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했답디다. 나한테 싸움재간을 배워주지 않겠습니까?”
상순은 손을 뿌리쳤다.
“그만둬라! 금방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싸움꾼이 될 작정이냐? 언제 사람이 되겠니? 힘이 나 쌔나면 내일부터 밭에 나가 기음이나 왕왕 매라. 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어쩔 예산이냐? 철봉이랑 성환이랑 경산이랑 다 네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도를 근심하더라.”
허나 이번에도 덕돌은 툴툴거렸다.
“공부도 하지 않는 학교에 가서 놀림을 당하자고 가겠습니까? 내 놀리는 애들을 몽땅 버릇을 떼놓고야 학교에 가겠습니다. 어느 새끼 더 놀리는가 보겠습니다. 주둥이를 망치로 다 까 없애치우겠습니다.”
상순은 아들애가 세상에서 부딪치고 얻어맞더라도 스스로 세상 사는 도리를 깨닫게 하려고 더 말하지 않고 정지로 내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때마침 일요일이 돼 덕돌은 장옥이네 집으로 찾아가 어제 저녁에 애들이 자기를 때리려고 찾아온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장옥은 주먹으로 벽을 꽝 쳤다. 순간 땅땅한 벽에 움푹 주먹자리가 났다.
“어느 새끼 감히 네 집까지 찾아간다니?! 때려죽이겠다!”
장옥은 주먹을 휘두르며 윽윽 별렀다.
그날 덕돌은 장옥과 조신지와 함께 반디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패용천산 앞으로 가면서 어떻게 집에 찾아온 애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기겠는가를 의논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때마침 저쪽에서 일광과 설복이 반디를 들고 골통 쪽에서 금방 둑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저길 봐라!”
덕돌이 가리키는 쪽을 보던 장옥은 반디를 쾅 내던지고 곧추 그리로 씽 덮쳐갔다. 뒤에서 조신지와 덕돌도 쫓아갔다.
덮쳐드는 장옥을 본 설복과 일광은 고양이를 본 쥐새끼처럼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발뺌을 하려고 허둥지둥 길옆의 옥수수 밭으로 달아 들어갔다. 좁은 옥수수 밭 옆은 논밭이어서 일광을 숨기기는 어림도 없었다. 숨을 곳이 없게 된 일광과 설복은 얼마 더 달아나지 못했다. 장옥의 안걸이에 걸려 일광이 논밭에 쿵 넘어졌다. 장옥은 한다하는 싸움꾼이어서 발길을 날려 넘어진 일광의 턱주가리를 탁 걷어차고 논밭에서 절벅절벅 달아나는 설복을 쫓아갔다. 뒤따르던 조신지와 덕돌이 뒤따라가 치고 박고 해 논밭에 거꾸로 처박아놓았다. 드디어 설복도 장옥의 무쇠주먹에 얻어맞아 코에서 쌍줄 코피가 줄줄 흘렀다. 장옥과 덕돌이 네는 설복과 일광을 논밭에서 이리 저리 쫓아다니며 반 주검이 되게 밟아주었다.
“다시 덕돌을 놀리겠느냐?!”
“다신 안 놀리겠다.”
설복과 일광은 두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비며 빌었다.
“네까짓 새끼들이 감히 덕돌의 집에까지 때리겠다고 찾아가? 다시 그래 겐?!”
장옥이 을러메자 일광과 설복은 쥐마당이 된 낯을 쳐들지도 못하고 논밭에 조아렸다.
“안 찾아갈게.”
장옥은 발길로 일광과 설복의 턱을 걷아 차며 호령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
일광과 설복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빌지 못할까?!”
조신지가 주먹을 날렸다.
“부르겠다. 할아버지!”
“한어와 조선어로 불러!”
일광과 설복은 연신 피 흐르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들은 여자애 같은 덕돌을 입으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언제든지 오늘의 치욕을 씻고 덕돌에게 보복하려고 궁리했다.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시퍼런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성질도 여자애 같고 이제껏 싸움이라고는 해 보지 못한 덕돌은 슬그머니 겁났다.
“정말 엄마의 말씀처럼 맞은 놈은 다리를 펴고 자도 때린 놈은 다리를 꼬부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덕돌은 장옥이랑 없을 때 혹시 설복이나 일광을 만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패용천산 절벽 위에 가만히 올라가 나무그늘 밑에 누워 책을 보다가도 애들이 뛰노는 함흥중학교 마당을 내려다보는 순간 학교로 가지 못하는 서러움이 괴여 올랐다.
“날마다 이렇게 그 놈 새끼들을 피해 벼랑 위에 누워 있을 순 없어. 하루빨리 주먹치기를 배워 저 놈 새끼들을 다 때려눕히고 학교에 가야 한다! 내 무슨 죄인이라고 숨어 다녀?”
덕돌은 벼랑위에 앉아 학교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핍박에 의해 양산박으로 올라가듯이 책을 잠시 놓고 싸움재간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됐다. 황차 무슨 등소평의 “우경 번안 풍”을 배격하고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근본 공부를 하지 않고 일만 하는 데야. 학교에 가서 농사만 지으니 갈 재미도 없었다.
그는 먼저 남몰래 장옥에게서 발로 걷어차기로부터 하나하나 익혀나갔고 집 사랑방 천정에 끈으로 모래를 꼴딱 넣은 농구공을 달아매놓고 주먹으로 치고 머리로 들이받기도 했다. 주먹으로 농구공을 처음 칠 때에는 손등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허나 장옥이랑 없을 때 자기를 보호하고 적수를 쳐 눕히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치고 박고 또 쳤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다. 설복과 일광은 다 축구선수인데다가 진수해에서 한다하는 싸움꾼들을 친해 권투를 어지간히 배운 애들이 아니었다.
“그 새끼들을 싹 때려눕히자면 로지심처럼 힘 장수로 돼야 해.”
덕돌은 함흥 촌에 가서 쇠바퀴를 얻어다 뒤울 안에 숨겨두고 어두워진 밤이면 가만히 거중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25 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한 개씩 쇠막대기에 꽂아놓고 드는 연습을 했다. 팔에 힘이 오르자 나중에는 양쪽에 50킬로그램짜리 쇠바퀴 하나씩 달고 거중을 연습했다. 날마다 밤이면 100킬로그램짜리 쇠바퀴로 거중을 연습했기에 온 몸에 힘도 자라 단숨에 20차씩 인상할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어지간한 애들은 외팔로 허리를 감아쥐어 내동댕이치거나 깔아 뭉개버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누구 앞에서도 힘자랑을 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태평강의 얼음을 까고 차디찬 강물에 발가벗고 팬티만 입고 냉수욕을 했고 날마다 식전에 패용천산 앞에까지 내복바람에 달아갔다 달려왔다.
낮에는 학교에 가지도 않고 패용천산에 달려 올라가 누구도 볼수 없는 양지바른 절벽 위거나 시꺼먼 갱도 안에 들어가 혼자 주먹치기와 발길질을 연습했다.
장옥은 덕돌이 그간 연습한 주먹치기와 발길질 그리고 거중하는 것까지 점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이만 하면 내게선 배울 거 다 배웠다. 맨 힘만 세고 주먹질과 발길질만 익혀선 안 돼. 이제 스승을 모시고 진짜 무술과 권투를 배워야 해. 단매치기 같은 결투재간을 두루 배워야 해.”
장옥은 이튿날 덕돌에게 무술스승을 찾아주겠다면서 데리고 진수해에 갔다.
진수해 동쪽으로 해 남새대대 부근으로 가서 키도 자그마한 한족 애를 만났다.
“인사해라. 류운봉이라고 한다.”
덕돌은 류운봉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장옥은 운봉에게 “이 앤 내 한마을 친구야. 무술을 잘 가르쳐달라. 부탁한다.”라고 했다.
덕돌은 속으로 요 죄꼬만 애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슨 무술을 배우겠는가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치를 채고 류운봉은 집 뒤울안에 덕돌과 장옥을 데리고 갔다. 거중연습을 할 때 쓰는 육중한 쇠바퀴며 벽에 처매놓은 모래 마대가 보였다. 저쪽 땅바닥에는 아링과 숱한 쇠바퀴와 쇠모르쇠가 널려 있었고 벽에는 번뜩이는 검과 대도가 걸려 자루의 빨간 술이 바람에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운봉은 허리는 가늘었지만 어깨는 넓었다.
그는 덕돌을 보고 쇠바퀴를 들어보라고 했다.
덕돌은 거중연습을 해온터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신 있게 다가가 쇠바퀴를 “어차!” 소리와 함께 들려고 했다.
그러자 류운봉은 “그게 몇 킬로그램인지 아니? 150킬로그램이야.”라고 하더니 작은 쇠바퀴를 바꿔 맞추더니 “자, 이걸 들어봐라!”라고 했다.
덕돌은 자기가 연습하던 쇠바퀴보다 50킬로그램이나 무거운 것을 보고 놀라 입을 짝 벌렸다.
“이건 몇 킬로그램이냐?”
“120킬로그램이야. 이전에 내 연습하던 거야.”
덕돌은 자신이 없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다가가 가름대를 꽉 틀어잡고 건뜩 들어 올렸다가 가볍게 내려놓았다. 겨우 체면을 지켰던 것이다.
“힘이 세구나! 괜찮아!”
류운봉은 150킬로그램 짜리 쇠바퀴를 다시 맞추고 나서 허리띠를 꽉 조여 매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쭉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배는 홀쪽해지고 가슴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그가 허리를 굽혀 가름대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는 순간 근육과 힘줄이 울뚝불뚝한 팔뚝이 용처럼 꿈틀거리었다.
“어-싸!”
고함소리와 함께 류운봉은 그 무거운 쇠바퀴를 건뜻 머리위로 추켜올렸다.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들었던 쇠바퀴를 두 손으로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고 또 추겨 올렸다. 뒤이어 사람을 내동댕이치듯 저쪽에 활 내동댕이쳤다. 허나 숨이 차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덕돌은 속으로 저 왜소한 키에 어데서 저런 괴력이 나올 까고 못내 감탄하면서 스승으로 모실만 하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야,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구먼!”
덕돌은 감탄소리를 치며 박수까지 쳐댔다.
운봉은 표정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벽돌을 넓적한 돌 위에 넉 장이나 쌓아 놓더니 기를 장 측에 모으더니 힘껏 내리쳤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돌 넉 장이 무쇠주먹에 맞아 몽땅 깨졌다.
류운봉은 무술에서 권술을 날렵하고도 힘차게 표연했다.
덕돌은 처음 보는 지라 깜짝 놀랐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굴에서 기어 나오는 듯 하고 독소리가 나래를 퍼덕이며 먹이를 찍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을 했다. 땅바닥에 살짝 몸을 기댔다가 토끼가 네발로 매를 차는 동작도 하고 원숭이가 나무위에 달려 올라가 팔을 들고 멀리 보는 듯하다가 살짝 뛰어내려 자세를 낮춰 몸을 씽 돌리며 발로 땅바닥을 쌩 쓸어버리고 일어나며 무쇠주먹을 내지르고 몸을 날렸다. 원앙새다리에 양다리로 뛰면서 발길을 연신 날렸다. 정말 무른 속에 강함이 돋보이고 강한 속에 유연한 동작이 깔려 있어 힘 있고도 날래고 보기도 멋졌다.
그날부터 덕돌은 날마다 진수해에 가서 류운봉을 스승으로 모시고 실전무술과 무술단매치기를 하나하나 배웠다. 그것은 나 어린 덕돌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압제받는 운명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는 까딱 소문 없이 패용천산 벼랑위 나무 숲속에서 무예를 익혀 이제 언젠가는 숲속에 숨었던 맹호가 산에서 덮쳐나가듯이 함흥중학교로 쳐들어갈 그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암담한 세월

       
       구중천 하늘 높이 걸린 금빛태양은 뭇산들이 자기 발 밑을 찌르며 높이 솟으려고 하자 삽시에 얼굴이 퍼러뎅뎅해졌다. 검퍼런 태양은 먹장구릅 속에서 불채찍을 마구 휘둘러 쵸몰랑마봉이고 백두봉이고 칼산이고 마구 후려갈겼다.
        꽈르릉 꽝꽝!
        세상의 풍운조화는 변화무쌍해 마른 하늘에서 생벼락이 마구떨어졌다.
        함흥대대에서는 하루 밤 자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종연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내놓고 진수해파출소 소장으로 갔지만 함흥 대대를 더 미친 듯이 쥐락펴락했다.
그는 박영발과 박윤희를 사상개조에 힘썼고 정치 표현이 아주 좋았다고 극구 찬양하면서 시내로 추천해 보냈다.
박영발은 시내로 떠나가면서 종연의 손을 꽉 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황주임, 아니, 황 소장. 이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요. 이 다음 어데 아프거나 하면 찾아오오. 내 힘껏 도와줄게.”
박영발은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아주 능란하게 썼다. 그는 기실 속으로 반란파 두목 출신인 황종연을 곱게 보지 않았다. 허나 이 진창에서 빠져나가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려면 별 수 없었다. 속에 내키지 않는 대로 윤희를 황종연에게 양보해야 했고 황종연의 입당소개인도 서주어야 했다. 전번에 화재사건이 생겨 김용만 국장이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황종연은 철천지원수 김용만과 한 짝패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팎이 다르게 양면 파 수법을 썼기에 시내로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윤희는 암흑으로 뒤덮인 이 산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도 눈물겨운 모욕도 윤간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기쁜 줄도 몰랐다. 황종연과 흥수에게 짓밟히고 짐승처럼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그녀에게는 다만 깊고 깊은 인간생지옥에서 간신히 벗어났다는 감각 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귀에는 어느덧 잔주름이 얼기설기 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먹장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그녀는 자기 대신 위생소에 남게 된 맨발의사 송선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주사실에 놓은 새 침대를 유심히 보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어떻게 고생하겠습니까?”
송선은 주사기를 소독하다가 말고 “어쩌겠소? 나도 햇볕을 볼 날이 오겠지.”하고 말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윤희는 속으로 송선이가 어떻게 자기 대신 저 침대에서 색마 황종연과 흥수에게 깔릴까 적이 근심됐다.
그녀는 황종연이 위생소에 들어와 헤헤 웃으며 내민 손을 잡지도 않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생소 문을 쾅 닫고 함흥대대 마을을 총총히 떠났다.
영발은 그래도 떠나가기 전에 아래 마을 조개덕으로 가서 양심적으로 상순을 찾아보았다.
상순은 한창 울바자를 뽑아 안으로 해 세우고 있었다.
영발은 바자를 쥐어주면서 속심의 말을 했다.
“김 서기, 정말 미안합니다. 나도 살자니까. 본의 아니게 황종연을 도와주고 김 서기에게 미안한 일을 많이 한 거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상순은 흉금이 넓게도 영발을 포옹까지 해주었다.
“우리 마을에 와서 고생했소. 살자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할 때도 있소. 내 이 바자를 안으로 세우고 싶어 세우오? 흥수가 떠드는 바람에 이러지.”
영발은 이상해 물었다.
“바자를 어째 안으로 세워야 한답니까?”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우리 집 마당이 너무 넓어 자본주의 싹이 자랄 수 있다오.”
“건 무슨 말입니까?”
“남보다 더 심어 먹으면 배불러 자본주의 생각을 하게 돼 자본주의 싹을 아예 매버리느라고 이런다오. 대대 신임 혁명위원회 주임의 말을 듣지 않고 되오?”
영발은 상순이 삽으로 바자를 세우고 흙을 파묻자 발로 꽁꽁 밟아 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게 많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는 입에 빗장을 질렀다. 항상 량면파수법을 써온 박영발을 경계해야 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한 고랑이라도 만들어 옥수수 몇 포기라도 더 심어먹으면 좀 좋아서? 돼지도 두 마리를 치면 안 된다지. 닭을 열 마리 이상 쳐도 자본주의를 복벽한다고 하지. 이 산골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는가? 덕돌이 네 함흥중학교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고 학생들이 농민들과 함께 밭에 나가 헤매니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겠는가? 손발에 똥을 발리여야 사상이 좋으니 뭘 해? 배를 촐촐 굶으면서도 무슨 밭고랑을 가로 타고 공산주의를 바라본다고 하니. 쯧쯧쯧.”
상순은 바자 굽을 꽁꽁 밟아놓으면서 누가 듣지 않나 살폈다. 길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다행히 한족 마을이어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영발은 떠나가면서 말도 많이 했다.
“김 서기, 내 간 다음에 내 들었던 집에 드십시오. 그 집이 길옆 제일 앞집이어서 멀리 저 앞이 바라보이고 환합니다. 그 집이 장래성이 있는 집입니다.”
“이젠 조개덕의 한족 생산 대와 조선족 생산 대를 한데 합쳤기에 서쪽의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쪽으로 올라가야 할 거 같소.”
이 마을을 떠나게 된 영발은 무서운 것이 없었다.
“조개덕 생산대를 두 개 대로 나누더니 또 합친답니까? 흥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린답니까?”
상순은 영발이가 그래도 기본 양심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자초에는 나를 지주와 부농들이 득실거리는 한족 대에 보내 고생시키자고 갈라놓고 나를 보냈지. 허나 벽돌공장을 세워 한족 생산 대에서 새 벽돌집을 짓기 시작하니까 합해버리는 거지. 그래야 자기 잘 영도한 걸로 되고 여기 조개덕 한족 사원들처럼 새 벽돌집에 들어 살지.”
영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혁명적 본보기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독수리의 웃음소리와도 흡사했다.
상순은 괭이를 쥐어 울바자 바깥의 밭고랑 자리를 골고루 고러 길바닥을 넓혀 놓았다.
그는 밭으로 갈 때 돼 영발의 손을 잡고 한 가지 부탁했다.
"병원에 정규상을 데려가 주오. 이젠 정규상과 싸우지 말고 늘그막에 화목하게 보내오.”
영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인차 안경을 춰올리더니 카멜레온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러지 않고.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정교수를 돕겠습니까? 우린 이전에는 옥신각신했지요. 허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치했습니까? 결국 우린 모두 이 산골에 와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고생했는데. 정규상은 해마다 스무 수레나 되는 돼지 똥과 인분을 모아 커다란 제형 둼 무지를 만들었습니다. 아까운 원로교수가 병을 보지 않고 저게 뭡니까?”
영발이 가리키는 데를 바라보니 정규상이 싯누런 인분을 담은 밀차를 밀고 건조실 부근에 있는 둼 무지로 힘겹게 끌고 가고 있었다.
“아무튼 시내 병원에 가면 정의사 일을 힘써 주오.”
영발은 이젠 더 할 말이 없는지 상순과 악수를 나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늙은 비술나무 밑으로 가버렸다.
며칠 후 상순은 흥수와 말하고 영발이가 들었던 널찍한 집을 사고 이사했다. 그는 조개덕 1대와 2대 연합생산 대 대장으로 된 후 칼산의 양지바른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기로 했다.
사원들은 이젠 상순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연합생산 대를 만드는 바람에 조선족사원들도 벽돌공장의 벽돌로 새 벽돌집도 짓고 들것이고 이제 인삼도 심고 꿀벌도 길러 잘 살 날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은 코 기러기 같은 상순을 따라 괭이를 메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은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과수원을 돌아보더니 뒤 덜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앞에서 걷는 상순의 등 뒤에 대고 엄지들을 내둘렀다.
“김 대장! 이거요.”
“이 과수원도 다 김 대머리 덕분이오.”
“하도 김대장이 칼산과 패용천산의 돌을 캐서 다락 밭을 손질해 놓았으니 말이지 과수원을 골물이 몽땅 밀어버렸을 거요.”
“흥수랑 제정신이 있소? 과수원 수토유실을 방지하자고 사원들이 쌓은 다락 밭인데 어쩜 걸 허물어서 ‘모 주석 만세!’를 새기오?”
“그래야 모 주석에 대한 진붉은 충성심을 표현하지.”
“저 김 대장이 아니면 우리 대대가 무슨 왜지 밭으로 갈지 모르오. 동지섣달에 한지에 방아를 걸 지경이오.”
“어디 그뿐이오. 저기 멍지뫼산 앞의 산종논밭도 김 서기 덕분이지.”
“이제 양봉장과 인삼 장을 차리면 꿀을 슬슬 마시면서 인삼을 팔아 수입을 톡톡히 거둘 거요.”
“김 대장의 대머리를 누가 따르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과수원 위로 해 서쪽으로 굽어들어 칼산으로 올라가면서 상순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었다. 그들은 상순을 따라 칼산의 남쪽 중턱에 올라가 괭이며 삽이며 짚고 멈춰 섰다.
상순은 손으로 산중턱을 가리키면서 사원들에게 원대한 설계도를 내놓았다.
“여긴 산세가 가파르지 않은데다가 양지바른 비탈이어서 인삼 장을 차리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오. 이제 저 칼산 뒤쪽의 돌을 캐서 구들돌로 팔면 그 수입도 톡톡할 거요.”
“와- 김 대장이 돌아왔기에 살 때를 만났소.”
“옳소.”
사원들은 온 몸에 힘이 나서 상순이 포치한대로 괭이를 휘둘러 잔 나무들을 뿌리 채로 뽑아 버리고 인삼 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대장! 큰 일 났소.”
이때 흥수가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상순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황급히 물었다.
“이보, 경주가 대련에 가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달아나다가 잡혀 왔소.”
“그 새끼들이!”
“이제 며칠 후에 반역자, 매국 적들을 공개심판하게 될 거요.”
“사람 질을 못할 새끼들이 정신이 있소? 후-”
숱한 사원들도 일손을 멈추고 흥수와 상순 쪽으로 몰려왔다.
흥수는 터를 닦기 시작한 인삼 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뭘 하오?”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오.”
“뭐요?! 이게 어느 때오?”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김 서기, 아니, 김 대장, 당신 제정신이 있어? 당신 생산 대에서 숱한 일이 생겼는데 계급투쟁을 틀어쥐지는 않고 인삼장과 양봉장을 꾸리다니? 아무리 꾸린들 무슨 소용 있소? 붉은 기발이 꺼꾸러지고 위성이 하늘로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린 항상 계급투쟁이란 이 기본 고리를 잊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그 말에 상순은 개의치 않았다.
“또 그 말이오? 사원들이 배를 곯고서야 붉은 기가 며칠 휘날릴 수 있다고 보오? 모 주석께서도 혁명만 틀어쥐라고 하지 않았소. 생산도 촉진하라고 했소.”
“당신과 난 정말 완전히 다른 두 갈래 노선으로 달리고 있단 말이오. 말이 정말 통하지 않소. 당신네 생산대 상해지식청년 상지민과 수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오?”
“생산대를 갓 합한 게 내 어떻게 아오?”
상순도 놀라하며 흥수의 외까풀 눈을 쳐다보았다.
“상지민이랑 상해지식청년들을 몇 백 명이나 조직해 두만강 변에서 모 주석의 초상화까지 불태워 버렸소. 현행반혁명이오, 반혁명!”
“뭐라오? 그 새끼들이. 쯧쯧쯧.”
흥수는 책임을 상순에게 덮어씌웠다.
“당신이 생산만 생산이라더니 상해지식청년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때문이오. 수호는 전기 줄을 훔쳐 오늘 오전에 파출소에 잡혀 갔소. 마반산 집 아매는 일제 때 해동다리 건너 진수해 어구지에 있던 기생집의 소문난 ‘뽕녀’라는 미녀 기생이었어. 당장 위생소 조산사자리에서 몰아내야겠소. 맨발의사 송선이 혼자면 되오.”
“글쎄 정 안되면 정 의사를 되 위생소에 쓰면 어떻소?”
“보오. 그래 계급투쟁을 하지 않으면 되오? 당신은 이런 걸 도무지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모두 당신 탓이오.”
“모두 내 잘못이겠구먼. 내 한족생산 대에 있다가 금방 온 게 알 턱이 뭐요? 치보 주임인 당신 뭐 했소? 이제 와서 네 탈 내 탈 할게 뭐요?”
상순은 무릎을 꺾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붙이더니 담배 연기를 길게 후 내뿜으면서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며칠 후 진짜 공안국 김용만 국장과 진수해파출소 황종연 소장 그리고 허영호 등 숱한 경찰들이 법관들과 함께 상지민과 수호, 김경주, 그리고 마반산집 아매까지 자동차에 싣고 와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서 공개심판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에는 사람들이 시루 속의 콩나물대가리처럼 빼곡하게 들어 서 목을 왜가리 목처럼 빼들고 구경했다.
법관은 공판대회 주석 대 마이크 앞에 다가서더니 목청을 가다듬어 선포했다.
“지금부터 일제 때 기생 마반산집 아매를 판결하겠습니다.”
"어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반산집 아매라니?"
"옛날엔 남존녀비가 심해 이름 없는 여자들이 많았다오."
"아무리 심문해도 마반산집 아매는 죽어도 이름을 대지 않는다오."
"쯔쯔쯧." 
경찰들이 마반산 집 할머니에게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이란 개패를 메워 자동차 위에 끌어 내세웠다.
허나 마반산집 할머니는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수군거리었다.
“저 할머니 별나게 남편도 없고 애도 없다고 했더니. 원래는 기생이었구먼.”
“글쎄 말이오. 기생은 애를 낳지 못하오?”
“그래. 피임약을 너무 써서 애도 가지지 못한다오.”
"저 아매 우리 마을 숱한 애들을 받아냈는데."
"글쎄 말이오. 덕돌이랑 성욱이랑 다 저 아매 받아내지 않았소?"
"그렇지. 조산파아매 수고 은공이 많지."
법관은 판결문을 공포했다.
“마반산집 아매, 녀, 조선족, 65세.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사람, 죄범은 일제 때부터 명천 우시장 일본 놈들의 기생집에서 기생 질을 했으며 우리 진수해 북쪽 어귀에 있던 유명한 일본 기생집에서 기생을 했다. 후에 일본군을 따라 교하, 길림, 장춘, 심양으로 따라다니면서 일본군을 위해 기생을 했으며 호북성 무한, 장사에 가서 기생을 했다. 일본 놈들이 투항한 후 죄범은 우리 군에 의해 체포됐으며 후에 신강개발 집체농장에 가서 노동개조를 했다. 죄범은 신강 집체농장에서 도망쳐 함흥대대 조개덕에 잠입한 뒤 마반산에서 온 사람처럼 신분을 속이고 조산사 노릇을 했다. 일제 군을 위해 기생노릇을 한 김뽕녀가 지은 죄는 하늘에 사무친다. 그러나 죄범은 해방 후 대대 위생소가 없는 형편에서 조산사를 하면서 빈농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주었고 숱한 해산부의 애를 받아내 주었다. 그리하여 감형하여 일제 매국, 매 민족 기생 마반산집 아매에게 유기징역 5년에 언도한다.”
“억울합니다! 억울해. 난 일본놈들의 피해잡인다. 난 정말 억울하단 말입니다!”
뜻밖에 마반산 집 할머니는 개패를 마구 벗어 자동차 위에서 내던지면서 고함쳤다.
“아니, 감형 판결했는데도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옆에서 여성경찰이 두 팔을 붙잡고 제지시키느라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팔을 뿌리치며 반발이 심했다.
“난 자원해 기생이 된 게 아닙니다. 일제 때 일본 놈들이 명천 우시장 부근에서 빨래를 하는 나를 붙잡아 강제로 기생집에 걷어 넣었습니다. 내가 왜 정든 고향을 떠나 이 만주에 들어와야 했겠습니까? 일제 놈들이 군대를 위안하는 성노리개로 우리 조선 여성들을 짐승처럼 짓밟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합니다.”
여성경찰이 수건으로 마구 마반산 집 할머니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마반산 집 할머니는 입을 막는 손을 마구 집어 팽개치며 안간힘을 다해 고함쳤다.
“나는 일제 놈들의 피해자입니다. 절대 일본 놈들을 방조한 매국역적이 아닙니다. 난 억울합니다.”
“주둥일 다물지 못해?!”
흥수가 마반산집 아매 얼굴을 쨩 갈겼다.
순간 마반산집 아매는 피흐르는 주름진 입귀를 사려물더니 가냘픈 어깨가 무섭게 파도쳤다. 할머니는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독기서린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며 고함쳤다.
“흥수, 너네 처 춘실도 네 처제 영실과 함께 위안소에 끌려갔다가 임신해서 풀로나왔다. 기억하느냐?”
“뭐, 뭘? 영실인지, 은실인지 몰라. 춘실을 모욕하지 말라.”
“난 네 처와 처제와 함께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간 피해자야!”
“아니, 생사람을 물어먹어?”
흥수는 식은 땀이 흐르는 말상을 팔소매로 닦으면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군중들도 웅성거렸다. 춘실은 머리를 숙여 흥수의 우멍눈을 피해 슬슬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상순은 버릇처럼 대머리를 숙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궁리하고 있었다.
이때 법관이 상해지식청년 상지민에 대한 판결서를 읽었다.
그제야 상순은 머리를 들었다.
“현행반혁명, 상지민, 25세, 상해시 출생, 체포 전 진수해공사 함흥 대대 조개덕 생산 대 상해 지식청년.
죄범 상지민은 ‘지식청년들이 광활한 농촌에 하향해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불만을 품고 집체호 호장으로서 생산대 노동에 잘 참가하지 않고 항상 영어와 노어, 일어 책을 들고 보면서 외국의 달은 둥글고 밝은데 중국의 달은 왜 항쌍 쪼각달인가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외국을 숭배하고 중국이 낙후하다고 씹어쳤다. 특히 상지민은 상해지식청년들 가운데서 사상이 온전하지 못한 수호 등과 결탁해 반동무리를 뭇고 모주석의 지시 때문에 고향 상해를 떠나 산골에 와서 고생한다면서 공개적으로 반동사상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여론을 조성했다. 심지어 수십 명의 사상이 불온한 상해지식청년들을 긁어 모아 두만강 변에 가서 당지 정부를 포위공격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했다. 죄범 상지민과 수호는 반당, 반사회주의, 현행 반혁명 죄를 범했다. 허나 현행반혁명 상지민과 수호는 일시 실족해 기로에 들어선 상해지식청년들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감형 처분해 유기징역 3년, 노동개조 3년에 처한다.”
황련지랑 이행복이랑 뒤에서 뭐라고 쑤군거렸다.
상순이나 마을 군중들은 멀거니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뽕녀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경찰들이 결박 지은 장리국과 김경주를 자동차 위에 서있던 끌어내 자동차 바곤 앞머리에 설치한 두 쇠살창 사이에 머리를 넣고 채워놓았다. 그들의 목에 건 개패에는 “매국역적, 반역자”라고 쓴 글씨가 박혀 있었다. 특히 뻘건 승하기 표를 쳐놓은 것이 사람들의 눈을 놀랍게 자극했다.
“아니, 총살한다는 표시 아니오?”
“글쎄 말이오. 그 아비에 그 아들이오.”
“주는 밥을 먹고 살 거지. 이제 남조선을 간다고 누가 공밥을 먹여준다오?”
법관이 김경주의 매국반역도주 죄행을 공술했다.
“남조선 특무의 아들 김경주는 몇 해 전에 함흥대대에 암암리에 기여든 국민당 잔여특무 장리국을 따라 장백산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중국 대륙에서 남조선과 대만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다. 리국은 향항을 거쳐 대만으로 달아나자고 하고 경주는 대련으로 해 남조선으로 달아나자고 했다. 대련으로 간 후 그들은 항구에 가서 외국상선을 본 후 비수로 경찰이나 군인을 살해하고 총을 빼앗은 후 외국상선에 잠입해 올라간 후 공해로 가서 외국상선을 납치해 경주는 남조선으로 가고 배 머리를 돌려 리국은 대만으로 달아날 매국도주계획을 꼼꼼히 세웠다. 하여 그들은 우선 오금상점에 가서 시퍼런 식칼 두 자루와 숫돌을 사 시퍼렇게 갈아 몸에 품고 파출소 부근에서 홀로 나오는 경찰을 노리며 기웃거리며 살폈다. 허나 시내에서 행인이 아주 많아 좀처럼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들은 연 한달 동안이나 대련 시내와 군부대 숙영지 부근에 가서 총을 탈취하려고 시도했지만 죄악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자 두 놈은 행동계획을 변경해 군부대에 기어 들어가 무기고 열쇠를 마스고 총을 도둑질하려다가 김경주는 붙잡히고 장리국은 도망쳐 행방불명이다.
김경주는 남조선으로 도망치려고 꿈꾸며 매국역적의 사상이 뼈 속까지 배긴 얼토 당토하지 않는 반동 시까지 썼다.

파도가 출렁이는 대련의 항구에
구리바라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구나
고향의 저 달이 나를 반겨 웃나
나를 마중해 고향의 바닷물이 예까지 밀려왔나

산이 높아 가지 못하나
바다 깊어 날아가지 못 했나
이제 민주와 자유 고향 경주에 간다면
만주 타향에서 죽은 아버지 혼도 모시어 가리라
...”

“얼마나 경주의 매국반동사상을 보여준 시인가?”
군중들은 경주의 시를 법관이 읽자 웅성거렸다.
이때 법관이 목청을 가다듬어 판결서를 선포했다.
“매국역적, 현행반혁명 김경주를 무기징역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
뒤이어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장리국과 김경주를 실은 자동차가 먼지를 새뽀얗게 울리며 달려갔다.
장미련은 어린 아들애 토함산을 끌어안고 함흥중학교 마당에 벌렁 물앉아 왕왕 울었다.  장충국은 동생 장리국의 안위를 걱정되는데다가 남편을 잃은 미련이 불쌍해 때가 괴죄죄한 낯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숱한 산새들이 놀라 하늘로 새까맣게 날아오르고 까마귀 떼들이 까욱까욱 을씨년스럽게 울면서 먹장구름이 뒤덮인 계수동 골짜기 상공을 날아예고 있었다.
마반산집 할머니와 상지민, 수호를 실은 자동차는 다시 새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진수해 쪽으로 떠나갔다.
상순은 찌그려져가는 초가집에서 아들 애 수길림을 데리고 홀로 사는 수호의 각시가 불쌍했다. 상해 대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을 떠나 이런 시골에서 배고프고 추운 고생에 이제 신랑까지 감옥에 갔으니 얼마나 고생하랴.
상순은 수호네 집에 찾아갔다.
수호 색시 황련지는 놀란 기색을 띄우며 문을 열고 구들 끝에 물러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상순은 싸늘한 집안에 들어서면서 “집에 어째 면내 같은 냄새 난다.”라고 하며 코로 “흡, 흡” 하고 냄새를 맡았다.
“아니, 며칠 불을 때지 않았소?”
황련지는 울상이 된 채 “땔나무가 없어서 이틀째 불을 때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며 반반히 빈 부엌을 내려다보았다.
“추운데 겨울에 우리 집에 가 있는 게 어떻소?”
상순의 물음에 황련지는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애를 데리고 어떻게 가 있겠습니까? 김 대장, 어떻게 땔나무를 해결해 줄 수 없어요?”
“되오.”
상순은 그 길로 생산대 탈곡장에 가서 수레에 벼 짚을 꽉 박아 실어 수호네 집 문 앞에 부리었다. 그리고 황련지와 함께 손수 부엌과 마당에 벼짚 무지를 가려 주었다.
황련지는 너무 감사해 상해에서 부쳐온 갈치를 네 개나 상순에게 줘 보냈다.
상순은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사의를 받아주십시오.”
 황련지가 맨 발 바람으로 갈치를 들고 따라 나왔다.
       상순은 동네 영상해 갈치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갔다.
       이윽고 수호네 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때부터 수호네 부부는 상순을 양아버지라고 부르고 존경했다. 그들은 상해에 설을 쇠러 갔다가 올 때면 항상 일주일 전에 편지로 오는 날을 기별했다. 그러면 상순이 아니면 덕돌이 수레를 메워 가지고 진수해 역에까지 마중 가서 짐을 실어왔다. 집에 돌아오면 수호네 부부간은 갈치나 돼지고기 그리고 상해국수를 꺼내 덕돌에게 줘 보내군 했다.
상순은 자기 생산 대에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 그리고 정규상교수와 송선에게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항일투사출신 서기와 현장이 이런 농촌에 와서 억울하게 노동개조를 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는 봄과 여름 가을에는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을 보고 바쁜 대전의 일을 시키지 않고 과수원과 인삼 장과 양봉장을 지키게 했다. 하여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 현장은 복잡한 생산 대를 피해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 과수원 보초막에서 시원한 샘물에 밥을 지어 들면서 신선처럼 지낼 수 있었다.
눈보라가 흩날리는 겨울이 돌아오면 상순은 그들을 보고 우사에 들어와 소 사양을 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에 사원들과 함께 농토개량을 하느라고 언 흙덩이를 끄거나 멜 필요 없이 따뜻한 사양 실에서 보낼 수 있었다.
또 흥수의 딸 해월을 치료해주는 기회를 타 흥수와 말해서 정규상을 위생소에 되넣었던 것이다. 또 위생소에서 밀려 나온 송선을 돼지사양을 시켜 대전의 힘든 노동에서 해탈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또 이튿날 아침부터 일이 생겼다. 항상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우파 박성근이 글쎄 폐 염으로 피를 토하더니 한 많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누구나 폐 염에 걸려 죽었다고 전염될까봐 성근의 조상도 하러 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구경했다.
(말 한마디를 잘 못했다가 몇 십 년 동안이나 우파 모자를 쓰고 얼마나 고생하다가 저세상으로 갔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순은 우파를 돕는다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면서도 성근이네 집에 갔다.
집안에 들어서 보니 성근의 입귀에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 아들 숭길은 옷도 갈아입히지 못하고 불쌍하게 돌아간 아버지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상순은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뜬 성근의 눈을 스스르 감겨 주고 헝겊 쪼박을 주어다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입귀의 피부터 시작해 얼굴을 말끔히 닦아주고 나중에 손과 발까지 닦아 주고 나서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혔다. 상순은 한숨을 후 쉬고 나서 숭길과 함께 널판을 한 쪼각 주어다 칠성판이라고 그 위에 성근을 눕혀놓았다.
숭길은 아버지 시체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넉두리를 했다.
“아버지,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세상 떠나도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덕돌의 아버지가 찾아와 옷을 갈아입혀주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상순은 손등으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얘야, 기다려라. 내 가서 관작 짜 올게.”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깥에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상순마저 슬슬 피해 갔다.
“폐병에 걸리면 어쩌자고?”
“저 김 대장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이때 흥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째 수호가 없으니 황련지에게 눈독을 들여? 쳇, 진짜 기름개구리가 학 고기를 먹으려는 격이지.”
상순은 남이 뭐 라든 개의치 않고 자귀와 대패, 톱, 망치를 가져다 성근이네 집 앞에서 널판을 주어다 관을 짰다.
대패를 빡빡 미는 상순과 멀찍이 떨어진 아래 이화영이네 집 근처에 서서 마을 사람들과 뒤 공론을 했다.
“김 대장을 보오. 어디 계급투쟁의 안광이 있소? 우파분자에게 관까지 짜주오.”
참다못해 상순은 자귀를 쥐다가 말고 허리를 폈다.
“우파 분자도 사람이오.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우리 마을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래 들여다보지도 않고서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짐승보다 못한 놈 새끼!”
“아니, 당신 지금 누굴 욕하오?” 흥수는 상순에게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조개턱을 흔들어댔다.
“너도 사람새끼냐? 흥! 더러운 새끼들이.”
상순은 손바닥에 침을 퉥 뱉어 큰 자귀 자루를 쥐더니 팍팍 널판을 찍어댔다.
한참 후 관을 다 짜자 상순은 숭길과 함께 관작을 집 윗방에 맞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손수 성근의 유체를 관안에 모셨다.
숭길은 상순의 손을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 김 대장이 아니면 어쩝니까? 난 어떻게 할지 전혀 머리 뻥 한 게 생각나지도 않습디다.” 하고 말했다.
상근의 처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 나더니 문을 삐꺽 열고 덕돌이 들어와 다급한 소리를 쳤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일이냐?”
“아버지, 수호네 각시 죽은 거 같습디다.”
“뭐라고? 어제 금방 벼 짚을 실어다 불을 때게 했는데. 가보자!”
상순은 급히 덕돌을 데리고 수호네 집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알았니?”
“내 상해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가서 ‘길림이 엄마!’ 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디다.”
금방 덕돌이 갔을 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문을 당겨 보았다.
그런데 문안으로 노끈으로 느슨히 매놓지 않았겠는가! 하여 ‘길림이 엄마!’ 하고 연신 부르니 집안에서 가느다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문을 콱 당겨 끈을 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황련지가 글쎄 팬티 바람에 문어귀 쪽으로 기어 나오다가 까무러친 것 같았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상순은 황급히 수호네 집으로 달려가 문을 뚝 떼고 들어갔다.
“흡, 이게 뭐야? 면내구나.”
집안에는 면내가 지독했다.
“면내 먹고 죽었지 않았니?”
상순은 바삐 마구 엎디어 있는 황련지를 마구 흔들며 불렀다.
“황련지! 황련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당황해난 상순은 황련지를 끌어안고 흔들며 애타게 불렀다.
“황련지! 깨나라고!”
그래도 까딱하지 못했다. 허나 황련지의 몸은 따뜻했다.
“안 되겠다.”
상순은 황련지에게 옷을 입힐 새도 없어 이불에 싸 업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덕돌이 따라가면서 이불귀를 쥐어 밖에 드러난 어깨를 덮어주었다.
흥수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을 보고 코를 조개턱을 쳐들고 헐뜯어댔다.
“흥! 잘해. 절다간 이제 황련지에게도 폐병이 옮겠어.”
상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련지를 업고 집에 들어갔다.
“빨리 김치 물을!”
“이게 무슨 일이오?”
“면내를 먹은 거 같소.”
명옥은 황급히 조왕덕대에서 김치대야를 내리어 김치 물을 바가지에 부어들고 왔다. 상순은 바삐 황련지 입에 김치 물을 부어넣었다. 꼭 다문 입에 잘 들어가지 않자 명옥이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벌리고 상순이 부어넣었다. 뒤이어 상순은 두 채나 내다가 따뜻한 구들 위에 이불을 펴고 그 위에 황련지를 눕히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명옥은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벼 짚을 넣고 불을 땠다. 드디어 가마에서 따가운 김이 쌕 나오며 구들이 뜨끈뜨끈해졌다.
이윽고 황련지 입귀가 실룩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신음소리가 났다.
“살아났다. 살아나.”
황련지는 상순의 말을 들으며 쌍까풀눈을 스르르 뜨더니 “이게, 이, 이게 어딘가요?” 하고 물었다.
“면내를 먹고 까무러친 거 업어왔어. 아들애를 상해에 보내기를 잘 했어. 하마터면 애까지 봉변을 당할 번했어.”
황련지는 그제야 자기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인 거 알고 부끄러움을 타며 일어나려고 했다. 허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 없소. 나을 때까지 우리 집에 있소.”
상순은 황련지를 말리고 나서 성숙을 보고 “가서 옷을 가져오너라.” 하고 부탁했다.
이윽고 성숙과 은자가 수호네 집에 달려가 황련지의 옷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녀들은 구들에 올라오기 바쁘게 황련지에게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근심 말고 우리 집에 있으라고. 부모를 떠나 이런 시골에 와서 얼마나 고생이냐?”
상순의 부모와도 같은 관심과 말에 황련지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상순은 이불깃을 꼭꼭 여며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이가 아래로 한 집 건너 성근이네 문 앞으로 내려갈 때었다.
칠촌조카 위경이 그의 팔소매를 잡아 한쪽으로 끌고 갔다.
“흥수랑 뒤에서 삼촌을 수호 색시한테서 갈치를 얻어먹더니 업고 달아 다닌다고 하오.”
그 말에 상순은 저쪽에서 삿대질하며 재재거리는 흥수를 쏘아보았다.
“주둥이를 까부셔버려라. 저것도 사람새낀가? 당원은커녕 사람 새끼도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래 업어다 김치 물이라도 먹여 살려야지. 뭐요?”
상순은 성근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으면서 위경한테 다가와 말했다.
“조카도 다른 일이 없으면 함께 성근의 장례를 지내기오. 성근은 글쎄 말을 한마디 잘 못했지만 우파도 사람이 아니오? 살겠다고 소련에서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했소. 영영 떠나가는 마지막 길이 곁에 사람 하나 없이 얼마나 쓸쓸하오?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 같소.”
위경은 뒤로 물러서면서 “폐 염이 전염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우파라고 도리머리를 흔드는데 하필…”라고 할 때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가는 길에라도 사람대접을 하면 안 되냐? 폐 염에 걸리면 형내를 찾아 가 보면 되오.”
위경은 주춤거리다가 상순의 무서운 세 귀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때 규상과 이계삼이 조상하러 찾아왔다. 뒤에 허영주도 오고 장축국마저 찾아왔다. 조개덕의 숱한 지주들도 먼발치에서 구경하면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상순이가 바깥에 나가서 충국과 함께 돌아가라고 말렸다. 자칫하면 진짜 우파와 지주, 부농들은 원래 한통속이라고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당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해지기전에 상순은 노 간부들과 함께 괭이와 벼 짚을 메고 뒤 산에 올랐다. 그들은 벼 짚으로 불을 피워 언 땅을 녹이고 온 종일 역사 질 해 성근의 무덤을 팠다.
이튿날 아침에 쓸쓸하게 눈이 풀풀 흩날리었다. 성근의 시체를 실은 수레를 앞에서 상순이가 몰고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숭길이 수레 뒤에서 성근의 관을 짚고 꺼이꺼이 서럽게 울며 걸어 나갔다. 그 뒤에 노 간부들이 머리를 숙이고 뒤따라 걸어 나갔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저 먼 발치에서 쑤군거리면서 구경하며 성근이가 불쌍하게 죽었다고 속으로 외울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상순은 성근의 장례 수레를 몰고 눈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정치투쟁의 참혹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참혹한 정치는 뼈를 부시는구나.)
뒤에서 성근의 아내와 아들 숭길의 대성통곡소리가 눈 덮인 북망산을 애절하게 울리며 천천히 산비탈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쪽 흐리멍텅한 하늘에서 허연 눈이 푸실푸실 흩날리며 쏟아지고 까마귀가 아직도 암담한 세월임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까욱까욱 울며 스산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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